정말 감사합니다! 잘 시청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으로 통제하실 때에는 사람에게도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을 때도 있죠? 예를 들어서, 르호보암 왕이 연로한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고 연소한 왕자친구들의 의견을 따랐을 때에나 선지자 미가야에게 환상을 보여주시면서 거짓말하는 영을 선지자들에게 보낸 일과 같은 상황에는요?
@@페리데시스세계 자유의지 성경에 없습니다 전부 반론 가능합니다 애초에 알파와 오메가 라는 말을 깊이 묵상해 보시면 아실거고 지금 현세는 영원의 나타난 것일뿐 영원에서 이미 이루어진것을 재방송하는 것입니다 자유의지가 있어보이는 척하는 구절들도 예정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알마니안 조건적 예정론을 반대하는 사람 입니다.인간의 자유의지라는 말 자체는 성경에 나와 있지도 않을 뿐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에 좌지우지 되는 하나님은 더더욱 아닙니다.예를 들어 어항속에 이리저리 해엄치며 움직이는 물고기가 굳이 표현해서 인간의 자유의지라면 그 어항을 들어 이쪽에서 저쪽으로 움직이시는분은 하나님의 예정 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인간의 행위에 따라 좌지우지되는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패와 성공에 상관없이 모든것을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시는 주체는 하나님 이시기 때문 입니다.
설명하신 것은 칼빈주의는 아닌 것 같네요.. 칼빈주의에서 약간 변형된 예정론? 그런데 이게 칼빈 예정론보다 더 성경에 가까운 설명인 것 같습니다. 칼빈 예정론은 인간의 타락된 자유의지로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 아닌가요? 그래서 절대적으로 하나님이 구원 받을 사람이 누군지 개인을 예정했고, 그들을 거듭나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것이다. 이것 아닌가요? 신앙생활에 있어서 예정에대한 설명보다, 구원에 대한 예정문제를 먼저 다루워 줘야 할 것 같습니다. 구원 문제에있어서도 똑같이 적용되나요? 칼빈 예정론 자체를 설명해주시면, 그것에 대해 합리적인 이해와 비판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선에는 원인이 되시지만 악에는 원인이 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서 생긴 선한 일, 좋 은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용광을 돌리고, 악한 일에 나쁜 일에 대서는 자기 탓으로 돌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기적 욕망을 성경말씀으로 포장하고, 잘못된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예정니었다고 하며 발뼘을 할 때가 많습니다.
선제적 은혜에 의해 회복된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어떻게 자동적 원죄의 속죄로 귀결 되는지 전혀 논리적 이지 않습니다. 원죄의 속죄는 자유의지로 은혜로 주시는 말씀의 계시에 반응해 회계하고 믿음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중생의 시점에 발생된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칼빈의 예정에 대한 웨슬레의 반박 끝부분에서 설명을 했습니다. 먼저 그부분부터 들어 보시길 바랍니다. 선제적 은혜에 의해 회복된 자유 의지를 사용하여 인간이 먼저 믿어야 원죄가 속죄된다는 것이 아르미니우스 주의적인 웨슬리안입니다. 선제적 은혜가 작동하려면 원죄에 대한 용서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원죄의 대한 용서도 없이 선제적 은혜가 작동하여 자유의지가 회복되었다는 논리적 근거가 무엇인가요? 자유 의지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선제적 은혜에 의한 원죄의 용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영적 선택에 대한 ) 자유의지의 상실도 원죄의 결과이기 때문에 선제적 은혜에 의해 원죄는 용서되지 않고, 왜 자유 의지만 회복되었는지를 말하면 나는 님의 견해에 반은 동의합니다. 다음에 원죄가 용서되었다면, 원죄의 결과로 온 죽음이 제거되었어야 합니다.
다음 글을 읽어 보시면 답이 될 것 같군요. 웨슬리 주의자인 조봉상 목사라는 분이 쓴글에서 발췌한 글인데 인저넷에서 찾아 보세요. 알미니안주의는 선재적 은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보혈로 모든 자들의 원죄가 사해지고, 자유의지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을 얼마든지 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은총을 인간이 선택할 수도 거부할 수도 있다. 구원은 하나님이 독단적으로 이끌어 가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협력하여 이루어간다고 믿는다. 따라서 예지예정을 믿는 알미니안주의는 인간에 의해서 구원이 결정되기 때문에 또한 인간의 범죄로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밀라드는 예지의 역할에 대한 알미니안주의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MrShk2812 저도 로마서 팔장과 예베소서의 말씀으로 무작위적 random 방식의 구원 선택이 아닌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이리 아심을 따라 선택”이 되는 예지 예정을 지지하며, 그 기쁘신 뜻과 미리아신 것의 구체적 기준이 성경에 없기에 학자들의 말 처럼 그것이 기독교의 신비한 미스테리의 부분이고요. 그러나, 위에 말씀중 “그리스도의 보혈로 “모든 (신, 불신자 포함)” 자들의 원죄가 사해졌다는 주장과 “ 자유의지의 부분적 회복”으로 우리가 이제 자유의지를 발동해 예수님을 선택해 구원에 동참할 수 있다는 내용은 성경에서 그 참조를 찾을 수 없다고 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호소가 하나 있다면 “너희들의 악한 행실에서 떠나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입니다” 이 구약 백성들은 십자가 보혈을 통한 속죄 전 사람들인데 어떻게 하나님은 “자유의지의 전적 타락” 상태인 인간들에게 이런 죄를 버리고 돌아오라는 “불가능한 호소”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칼빈의 주의의 5대 강령 중 첫째인 “전적타락”에 자유의지의 까지 포함을 기킨것이 오류임을 증명하는 것 이겠죠? 다시말해 선악과 사건으로 인간의 자유의지가까지 홰손된 증거는 성경 어디에도 없으면, 신명기에서 말하 듯 인간 앞에 선과 악의 선택에 길이 항상 놓여 있으며, 그 선택의 결과로 복과 저주가 임하며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일반은혜도 제한 될 수 있음으로 말하며, 또한 우리의 이해와 이런 우리의 선택의 결과를 예외시 하는 하나님의 선제적 특별 은총이 주어 지기도 하죠, 그래서, 로마서 9장에서 토기장이 비유를 통해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길 것이다. “ 고 말씀하시며, 이것이 하나님의 “미리아심”의 신비에 속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은혜는 “자격이 없는 자”에게 우리의 자격조건을 떠나 하나님편에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경우가 있기 때문 입니다. 바울의 회심전 그는 오히려 예수를 박해하던 사람이 었던게 그 예이지요.
@@Dan-mh9bq 저는 조봉상 목사의 글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타락으로 인해 인간은 자유의지가 완전 상실했다는 말에도 찬성하지 않습니다. 또 알미니우스가 선제적 은혜에 의해 자유 의지가 회복되었다는 것도 옳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타락에 대한 저의 의견은, 악과 타락의 정의 악은 어떤 주체 안에서 성립된다. 모든 주체는 유(有)이며, 모든 유는 선이므로 결국 악은 주체 안에 즉 선안에 있어야할 완전성의 결여(缺如) 상태로서 성립된다 . 따라서 악은 어떤 적극적 요인 안에 성립하지 않고, 어떤 부정적 요인 즉 유의 거부에서 성립된다. 이런 부정은 그것이 전체적이나 부분적일 것이다. 그런데 악이 유의 전체적인 거부에서 성립된다면, 그것은 모든 존재성을 거부하는 것이 되며, 거기에는 무만 남을 것이다. 다시 말해 악도 없게 된다. 따라서 악을 성립시키는 거부는 부분적일수 밖에 없다. 즉 악은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데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고, 존재의 어떤 완전성을 거부하는데서 성립된다. 제거 혹은 거부되는 완전성은 유의 실체적(實體的) 완전성이 아니다. 실체적 완전성은 어떤 사물을 사물 자체로서 구성하는 것이다. 만일 악이 실체적 거부에서 성립된다면, 그것은 어떤 사물의 악이라기 보다는 어떤 한 사물의 다른 사물로서의 실체적 변화일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거부는 우유적(偶有的) 완전성의 거부인 것이다. 우유적 완전성은 유자체 혹은 사물 자체로서의 완전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런 우유적 완전성의 거부 혹은 결여는 그 존재 자체의 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유적 완전성은 유의 완전성 특히 유의 본성에 입각한 목적성을 실현하는 완전성을 의미한다. 이런 우유적 완전성이 결여될 때, 유는 그것이 지녀야 할 어떤 완전성의 결여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악은 어떤 적극적인 것이 아니며 부정적인 것이다. 즉 악은 사물의 본성과 목적성이 요구하는 우유적 완전성의 결여이다(Privatio perfectionis debiate.) . 그러므로 악이 전면적으로 선을 파멸시킬 수는 없다. Aristoteles가 말한 바와 같이 악이 완전하면 스스로 멸하는 것이다. 악은 주체에 있는 안에 성립된다. 그러므로 주체가 전체적으로 멸하면 악도 더이상 존재치 못하게 된다. (정의채 형이상학 2010판 p. 251-253) 주 : 어거스틴은실체 안에 있어야 할 유유적 완전성의 요소를 도량(measure) 형태(form) 질서(order)로 본다. 그래서 도량 형태 질서의 결핍을 악으로 규정한다. 저자는 카돌릭 신부인데 저는 이 분의 "형이상학" 책에서 많은 영감을 얻습니다.
자유의지에 대한 부분은 저의 최종 결론은 어거스틴의 말입니다. 어거스틴은 어거스틴은 “아담 안에서 타락의 부산물로서 우리는 아담이 누렸던 자유, 즉 죄를 피하고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유를 상실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 후부터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죄를 피할 수 없었고, 한층 더한 특별 은혜가 없이는 선을 이룰 수 없다”고 했다. 이러한 말들을 통하여 어거스틴이 전달하고자 했던 것은 우리의 자유의지가 박탈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의 언어는 종종 이것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통상적인 가르침은, 우리는 우리의 자유의지를 손상되지 않은 채로 보유하고 있지만, 중생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자유 의지를 잘못을 행하는 데에만 사용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범죄할 수 밖에 없는 잔혹성’이 인류 위에 드리워져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을 통해서 그가 의도한 것은 우리의 의지가 어떤 물리적이나 형이상학적인 숙명에 사로 잡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권은 여전히 자유롭지만, 우리는 심리적인 사실의 문제로서, 자발적인 그릇된 길들 만을 선택하는 것이다 . JND Kelly 고대기독교 교리사 p. 391박희석 역
감사합니다
쉽고 명쾌하고 말씀해 주셔서 예정론과 자유의지에 대하여
잘 알았습니다.
명 강의 감사합니다 ♡♡♡
예정에 대해 성경을 통해 명확하게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와 목회자들이 이런부분에 대해서 명확한 신앙이 없어서 인문학에 물들고 하나님의 주권을 오해하는 부분이 많은거 같아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앞으로도 좋은 강의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내요 간단 시원 명확하게 정리해주셨어요
귀한 강의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잘 시청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으로 통제하실 때에는 사람에게도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을 때도 있죠?
예를 들어서, 르호보암 왕이 연로한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고 연소한 왕자친구들의 의견을 따랐을 때에나 선지자 미가야에게 환상을 보여주시면서 거짓말하는 영을 선지자들에게 보낸 일과 같은 상황에는요?
인간에게 선택권이 있다는거 자체가 착각이자 정신병입니다
우리는 모두정신병에 걸ㄹ려있죠
@@DONGUNLEE-u5s 동의합니다 모든 주권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ㅎㅎ 하지만 어느정도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점...
@@페리데시스세계 자유의지 성경에 없습니다 전부 반론 가능합니다
애초에 알파와 오메가 라는 말을 깊이 묵상해 보시면 아실거고
지금 현세는 영원의 나타난 것일뿐
영원에서 이미 이루어진것을
재방송하는 것입니다
자유의지가 있어보이는 척하는 구절들도
예정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웨슬레의 자유의지가 원죄의 속제를 전제하고 있다면 빌라도와 헤롯의 자유의지도 원죄 속죄 후 이루어진것이 되는지요?
사람의 생각의 예정론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만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헤롯과 빌라도의 자유의지는 타락으로 말미암아 죄에 대하여 자유로운 자유 의지를 말하고, 웨슬레의 자유의지는 타락한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선제적 은혜에 의해 의지가 회복되었다는 의미에서 자유 의지입니다.
질문이 너무 어려워 무슨 질문인지 모르겠군요. 다시 물어 보시면 아는 범위 내에서 성실히 답변 하겠습니다.
저는 알마니안 조건적 예정론을 반대하는 사람 입니다.인간의 자유의지라는 말 자체는 성경에 나와 있지도 않을 뿐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에 좌지우지 되는 하나님은 더더욱 아닙니다.예를 들어 어항속에 이리저리 해엄치며 움직이는 물고기가 굳이 표현해서 인간의 자유의지라면 그 어항을 들어 이쪽에서 저쪽으로 움직이시는분은 하나님의 예정 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인간의 행위에 따라 좌지우지되는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패와 성공에 상관없이
모든것을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시는
주체는 하나님 이시기 때문 입니다.
설명하신 것은 칼빈주의는 아닌 것 같네요.. 칼빈주의에서 약간 변형된 예정론? 그런데 이게 칼빈 예정론보다 더 성경에 가까운 설명인 것 같습니다.
칼빈 예정론은 인간의 타락된 자유의지로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 아닌가요? 그래서 절대적으로 하나님이 구원 받을 사람이 누군지 개인을 예정했고, 그들을 거듭나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것이다. 이것 아닌가요?
신앙생활에 있어서 예정에대한 설명보다, 구원에 대한 예정문제를 먼저 다루워 줘야 할 것 같습니다.
구원 문제에있어서도 똑같이 적용되나요?
칼빈 예정론 자체를 설명해주시면, 그것에 대해 합리적인 이해와 비판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이미 예정이 되었는데 .그 예정으로 자유의지가 가고있다는 말씀인가요?
하나님은 선한 일에는 원인이 되시지만 악한 일에는 웡인이 되시지 않습니다. 산한 일로는 하나님의 예정에 동참하지만, 악한일은 인간이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선에는 원인이 되시지만 악에는 원인이 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서 생긴 선한 일, 좋 은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용광을 돌리고, 악한 일에 나쁜 일에 대서는 자기 탓으로 돌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기적 욕망을 성경말씀으로 포장하고, 잘못된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예정니었다고 하며 발뼘을 할 때가 많습니다.
@@MrShk2812 감사합니다. 예정론이 무척 이해가 어려운데...여러번 반복하여 들어 알게되었습니다
모순처럼 보이지만 모순이 아닌 두 관계에 대해서 설명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다른 데서 본 영상도 공유할께요. 개혁주의 예정론이라는 제목이에요. ruclips.net/video/fTL0e2jSvBk/видео.html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제적 은혜에 의해 회복된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어떻게 자동적 원죄의 속죄로 귀결 되는지 전혀 논리적 이지 않습니다. 원죄의 속죄는 자유의지로 은혜로 주시는 말씀의 계시에 반응해 회계하고 믿음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중생의 시점에 발생된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칼빈의 예정에 대한 웨슬레의 반박 끝부분에서 설명을 했습니다. 먼저 그부분부터 들어 보시길 바랍니다. 선제적 은혜에 의해 회복된 자유 의지를 사용하여 인간이 먼저 믿어야 원죄가 속죄된다는 것이 아르미니우스 주의적인 웨슬리안입니다. 선제적 은혜가 작동하려면 원죄에 대한 용서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원죄의 대한 용서도 없이 선제적 은혜가 작동하여 자유의지가 회복되었다는 논리적 근거가 무엇인가요? 자유 의지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선제적 은혜에 의한 원죄의 용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영적 선택에 대한 ) 자유의지의 상실도 원죄의 결과이기 때문에 선제적 은혜에 의해 원죄는 용서되지 않고, 왜 자유 의지만 회복되었는지를 말하면 나는 님의 견해에 반은 동의합니다. 다음에 원죄가 용서되었다면, 원죄의 결과로 온 죽음이 제거되었어야 합니다.
다음 글을 읽어 보시면 답이 될 것 같군요. 웨슬리 주의자인 조봉상 목사라는 분이 쓴글에서 발췌한 글인데 인저넷에서 찾아 보세요. 알미니안주의는 선재적 은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보혈로 모든 자들의 원죄가 사해지고, 자유의지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을 얼마든지 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은총을 인간이 선택할 수도 거부할 수도 있다. 구원은 하나님이 독단적으로 이끌어 가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협력하여 이루어간다고 믿는다. 따라서 예지예정을 믿는 알미니안주의는 인간에 의해서 구원이 결정되기 때문에 또한 인간의 범죄로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밀라드는 예지의 역할에 대한 알미니안주의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MrShk2812 저도 로마서 팔장과 예베소서의 말씀으로 무작위적 random 방식의 구원 선택이 아닌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이리 아심을 따라 선택”이 되는 예지 예정을 지지하며, 그 기쁘신 뜻과 미리아신 것의 구체적 기준이 성경에 없기에 학자들의 말 처럼 그것이 기독교의 신비한 미스테리의 부분이고요. 그러나, 위에 말씀중 “그리스도의 보혈로 “모든 (신, 불신자 포함)” 자들의 원죄가 사해졌다는 주장과 “ 자유의지의 부분적 회복”으로 우리가 이제 자유의지를 발동해 예수님을 선택해 구원에 동참할 수 있다는 내용은 성경에서 그 참조를 찾을 수 없다고 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호소가 하나 있다면 “너희들의 악한 행실에서 떠나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입니다” 이 구약 백성들은 십자가 보혈을 통한 속죄 전 사람들인데 어떻게 하나님은 “자유의지의 전적 타락” 상태인 인간들에게 이런 죄를 버리고 돌아오라는 “불가능한 호소”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칼빈의 주의의 5대 강령 중 첫째인 “전적타락”에 자유의지의 까지 포함을 기킨것이 오류임을 증명하는 것 이겠죠? 다시말해 선악과 사건으로 인간의 자유의지가까지 홰손된 증거는 성경 어디에도 없으면, 신명기에서 말하 듯 인간 앞에 선과 악의 선택에 길이 항상 놓여 있으며, 그 선택의 결과로 복과 저주가 임하며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일반은혜도 제한 될 수 있음으로 말하며, 또한 우리의 이해와 이런 우리의 선택의 결과를 예외시 하는 하나님의 선제적 특별 은총이 주어 지기도 하죠, 그래서, 로마서 9장에서 토기장이 비유를 통해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길 것이다. “ 고 말씀하시며, 이것이 하나님의 “미리아심”의 신비에 속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은혜는 “자격이 없는 자”에게 우리의 자격조건을 떠나 하나님편에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경우가 있기 때문 입니다. 바울의 회심전 그는 오히려 예수를 박해하던 사람이 었던게 그 예이지요.
@@Dan-mh9bq 저는 조봉상 목사의 글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타락으로 인해 인간은 자유의지가 완전 상실했다는 말에도 찬성하지 않습니다. 또 알미니우스가 선제적 은혜에 의해 자유 의지가 회복되었다는 것도 옳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타락에 대한 저의 의견은,
악과 타락의 정의
악은 어떤 주체 안에서 성립된다. 모든 주체는 유(有)이며, 모든 유는 선이므로 결국 악은 주체 안에 즉 선안에 있어야할 완전성의 결여(缺如) 상태로서 성립된다 . 따라서 악은 어떤 적극적 요인 안에 성립하지 않고, 어떤 부정적 요인 즉 유의 거부에서 성립된다. 이런 부정은 그것이 전체적이나 부분적일 것이다. 그런데 악이 유의 전체적인 거부에서 성립된다면, 그것은 모든 존재성을 거부하는 것이 되며, 거기에는 무만 남을 것이다. 다시 말해 악도 없게 된다. 따라서 악을 성립시키는 거부는 부분적일수 밖에 없다. 즉 악은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데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고, 존재의 어떤 완전성을 거부하는데서 성립된다.
제거 혹은 거부되는 완전성은 유의 실체적(實體的) 완전성이 아니다. 실체적 완전성은 어떤 사물을 사물 자체로서 구성하는 것이다. 만일 악이 실체적 거부에서 성립된다면, 그것은 어떤 사물의 악이라기 보다는 어떤 한 사물의 다른 사물로서의 실체적 변화일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거부는 우유적(偶有的) 완전성의 거부인 것이다. 우유적 완전성은 유자체 혹은 사물 자체로서의 완전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런 우유적 완전성의 거부 혹은 결여는 그 존재 자체의 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유적 완전성은 유의 완전성 특히 유의 본성에 입각한 목적성을 실현하는 완전성을 의미한다. 이런 우유적 완전성이 결여될 때, 유는 그것이 지녀야 할 어떤 완전성의 결여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악은 어떤 적극적인 것이 아니며 부정적인 것이다. 즉 악은 사물의 본성과 목적성이 요구하는 우유적 완전성의 결여이다(Privatio perfectionis debiate.) . 그러므로 악이 전면적으로 선을 파멸시킬 수는 없다. Aristoteles가 말한 바와 같이 악이 완전하면 스스로 멸하는 것이다. 악은 주체에 있는 안에 성립된다. 그러므로 주체가 전체적으로 멸하면 악도 더이상 존재치 못하게 된다. (정의채 형이상학 2010판 p. 251-253)
주 : 어거스틴은실체 안에 있어야 할 유유적 완전성의 요소를 도량(measure) 형태(form) 질서(order)로 본다. 그래서 도량 형태 질서의 결핍을 악으로 규정한다.
저자는 카돌릭 신부인데 저는 이 분의 "형이상학" 책에서 많은 영감을 얻습니다.
자유의지에 대한 부분은 저의 최종 결론은 어거스틴의 말입니다.
어거스틴은
어거스틴은 “아담 안에서 타락의 부산물로서 우리는 아담이 누렸던 자유, 즉 죄를 피하고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유를 상실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 후부터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죄를 피할 수 없었고, 한층 더한 특별 은혜가 없이는 선을 이룰 수 없다”고 했다. 이러한 말들을 통하여 어거스틴이 전달하고자 했던 것은 우리의 자유의지가 박탈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의 언어는 종종 이것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통상적인 가르침은, 우리는 우리의 자유의지를 손상되지 않은 채로 보유하고 있지만, 중생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자유 의지를 잘못을 행하는 데에만 사용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범죄할 수 밖에 없는 잔혹성’이 인류 위에 드리워져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을 통해서 그가 의도한 것은 우리의 의지가 어떤 물리적이나 형이상학적인 숙명에 사로 잡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권은 여전히 자유롭지만, 우리는 심리적인 사실의 문제로서, 자발적인 그릇된 길들 만을 선택하는 것이다 . JND Kelly 고대기독교 교리사 p. 391박희석 역
주의 성령께서 이 진리되신 예수를 알아 예수 안에서 거룩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