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우리의 신뢰를 결코 배신하지 않습니다!! 저는 다리 수술 후 요양 중으로 매 식사를 누가 챙겨줘야 합니다. 오늘은 집에 누가 없습니다. 간단히 떼울 건 있지만, 주님 밥 주세요. 기다렸습니다. 친구가 집 앞이라며, 저녁을 챙겨 왔네요. 남자식구들이 못 알아주는 과일까지.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지시는 분이십니다♡
개혁신학이 세계 여러 곳에 어떻게 전파되는지 보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찰스 스펄젼의 설교를 보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믿고 따르는 모든 자들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가득 찬 그리스도 중심의 자세로 이 믿음의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숨 불어넣으심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말씀을 꾸준히 읽고 곱씹어 읽으면 하나님의 숨결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와서 믿어지게 됩니다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께 모든 것을 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가득해야 순수하게 전도할 수 있게 됩니다
온전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 즉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심으로 끊임없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전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시작입니다. 복음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에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하며 또한 자신이 지금것 무엇을 잘 못하고 있엇는지 또한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잘못(죄)들에 대하여 회개를 하게 합니다. 알지 못한다면 회개를 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 율법이 그 역할을 감당하였고 양심이 그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래서 율법과 양심은 죄를 깨닫게 하는 몽학선생이 되며 참 선생이신 에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죄를 회개하고 용서함을 받게 됨을 진실로 믿게 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앞으로의 삶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합니다. 소망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며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르기 위해선 신뢰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신뢰는 소망을 이루기 위한 또 다른 하나님의 은혜가 됩니다.
@@라일락-u8c 내가 가져야지 해서 갖게 되는 것이 믿음이라면 구원은 진짜 너무도 쉬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의 문에 대하여 좁고 그 길은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 하였습니다. 이 말씀 자체로만 보아도 힘들고 어려워도 찾으면 갖게 될 것 같은 것이 믿음이라 생각할 수 있음 입니다. 그러나 정작 믿음을 갖으려 하면 할 수록 오히려 멀리 달아나 버리는 것이 믿음임을 알게 될 뿐입니다. 또 다른 말씀엔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려울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실상은 낙타를 바늘귀에 통과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된다면 너무도 어렵고 힘든 일이겠으나 성공을 할 수 있음이라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 할수 있다는 것일까? 그게 가능키는 해?라는 의문만을 남기게 될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이 말씀은 가능성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 같으나 실상은 인간의 힘과 능력으론 불가능함을 말씀하심이라 생각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일단은 이렇게 생각하여 본다면 자신의 능력과 힘으론 불가능한 것이 믿음을 갖는다는 것라 봄이 매우 타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 불가능한 것과 같은 말씀으로 구원의 문에 대하여 말씀하셨을까? 희망고문하심일까? 진정 그렇다면 예수님은 좋은 친구가 아니라 못된 친구이겠지요. 아이 원수라 보아도 무방하겠지요. 그러니 그 말씀엔 뭔가 비밀이 담겨 있음이라 생각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구원의 문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 하였으니 그 문은 구원의 문과 아주 비슷하지만 개념적으론 뭔가 미세한 차이점이 있음입니다. 그차이점 가운데 우리는 구원의 문이라 하면 사람이 드나드는 문을 물리적 문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문은 이런 물리적 문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이 구원의 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구원의 문)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 됨인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구원의 문은 그 자체로 들어간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때부턴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을 가게 된다라고 생각할 수 있음 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의 문을 통과하면 그 후부턴 생명으로 인도하는 또 다른 문이 있음인데.. 그 문이 바로 성령이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구원의 문(예수 그리스도)을 열고 들어온 믿음의 사람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성령께서 온전케 하시어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심이라 할 수 있음인 것입니다. "회개하여 각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믿고)으로 세례를 받아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으라." 하였던 것과 같이 다시 이 말씀을 구원의 문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으로 재 번역을 해 본다면 "회개하여 각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음으로 세례를 받아 구원의 문을 열고 죄사함을 받아 생명으로 인도하는 성령을 선물로 받으라." 는 말씀이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회개를 통해 얻게 되는 것입니다. 또 이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곧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믿음을 얻겠다는 의미가 됩니다. 도 다시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단순히 명사적인 표현인 주에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표현인 나의 주님이신 예수께서 나를 구원하리라. 그러하오니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볼쌍히 여기시고 나로하여금 구원을 받게 하옵소서."라는 간청적 기도문임과 동시에 내 삶의 고백(회개)과 삶의 모습(주님을 생명으로 인정함)이 보여져야만 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여기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여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하면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라는 명사적 이름을 부르는 것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려함을 의미함이니 곧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기를 간청하며 도우심을 구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함의 삶을 살게 되는 새로운 삶을 의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 가운데 그나마 가장 사람들의 삶의 피부로 와닿는 변화라 한다면 곧 진리 가운데 살아가려 하는 삶을 의미하며 진리가운데 살아가려 한다는 것은 진실하게 살려 함을 뜻함이니 모든 거짓 된 것들로 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게 됨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진실하게 살려 함일까요? 그것은 성령의 감동을 쫓는 삶을 의미합니다. 즉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참된 진리를 알(개닫게)게 하시어 그 진리의 길을 진실되게 살아가게끔 인도하심이란 의미가 됩니다. 진리(실)의 기준은 내게 있음이 아니라 세상에 있음이 아니라 성령께 있는 것이며 아버지 하나님께 있음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곧 진리의 기준이 됨이니 생명의 문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란 곧 진실하게 살려 함일 뿐만 아니라 성령의 깨닫게 하심과 인도하심을 통해 진실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성도의 진실한 삶의 모습을 목도케 됨이 되는 것이니... 그 가운데서 많은 믿음의 선조들의 진실을 듣고 보고 느끼고 깨닫게 됨을 체험하게 됨입니다. 곧 이것이 꿈이 되기도 하고 예언이 되기도 하며 때에 따라선 환상을 보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글로 설명하려니 장황한 설명이 된 듯합니다. 제 글보다 성령께서 친히 님에게 깨닫게 하시는 은혜로 진실한 믿음을 선물로 얻게 되시길 기도합니다.
@@라일락-u8c 간단히 말하면 그런 것이죠...그러나 실상 이것도 현실적 상황과 영적인 활동(성령의 역사)를 이해해야 하므로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성경 말씀을 인용 해본다면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고전2:14))하셨으니 이에 대하여 주님이 말씀하시길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마13:13)이라 하셨으므로 육에 속한 이들에겐 숨겨진 비밀이겠으나 성령에 속한 믿음의 사람에겐 깨달음이 되고 영적 지식이 되니 은혜 위에 은혜가 됨이니 너무도 선명하고 분명하고 명확하여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가 없는(손으로 직접 만지는 것과 같이) 울림, 감격, 감동, 공명과 같은 현상이 속에서 일어남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상은 믿음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주어짐이 되며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너무도 분명하여 세밀하고 은밀한 죄(과거, 현재, 미래)까지도 낱낱이 보여(이상과 환상을 통해)짐(핑게치 못하리라)이니, 그러기에 이러한 영적 회개는 자신 스스로 한다기 보단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한 회개가 되니 회개케 하심이라 할 수 있음 입니다. (롬2:4b)
믿음은 예수님을 아는것 입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아는것은 주님의 인성,신성.말씀을 알아야 깊이 주님을 알게되고 믿음이 깊어 집니다. 저기에서 신성의 부분은 성령의 열매를 많이 맻어져야 주님의 마음으로 다른이들을 궁율을 알게되고 주님의 뜻을 분별하게 됩니다. 저3가지를 실천하게 되면 주님의 큰 일꾼으로 주님과이웃을 위해 헌신하게 됩니다. 주님을 체험으로 주님을 안다고 하신분은 일부분만 주님을 아시는 분입니다. 저3가지는 저가 몇십년을 동행하면서 최근에 주님의 음성으로 듣고 깊이 깨닫은 말씀입니다. 저3가지는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살롬
요즘따라 깨달은 말씀들과 동일한 내용에 참으로 놀랐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예수그리스도를 얼마나 믿고 살아가는지 궁금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믿음은 아무것도 아니며 우리의 지식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얼마나 적은지도 알게됩니다. 우리는 보이는 세상에 살므로. 보이는 세상을 신뢰하고 살아가지만. 마치 건물이 언제든 무너지지 않을것을 믿기에. 그건물 아래에서 무너지는것을 걱정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처럼. 하지만 실제로 건물은 무너질떄도 있고. 이를 믿고있는자들은 이를 걱정하지 않고 살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 진리임에도. 그것이 보이지 않는 나라이기에. 처음부터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신앙 생활을 아무리 많이 했고. 아무리 많은 헌신과. 봉사를 한다 할지라도. 보이지 않는 나라에대한 믿음은 믿음의 싸움이 없이는 이루어질수 없기 떄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묻게 됩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의 싸움은 무엇이며. 우리는 무엇과 싸우어야 하는지 말입니다. 이것은 분명 구원과 관계된 것이니까요. 믿음의 주체는 나.입니다. 내가 어디에 속해있는지 아는 것이지요. 로마서 8장 이런 구절이있지요. 육신에 속한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도 못하고 도리어 원수가 되며, 영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곧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요한복음 6.63. "내 말이 곧 영이요" 예수님말씀이 곧 영이라고 하시지요. 무슨 말인가요? 육신에 속해있다는 것은 무엇인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영이란? 무엇인가 한다면 곧 예수님 말씀임을 알수있지요. 그렇다면 육신은 예수님과 반대되는 모든것이라고 볼수도 있겠지요, 실제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분들에게 물어보곤 했습니다. 당신의 믿음은 어떻게 나아가십니까? 그들의 대답은 하나같이.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봉사를하며, 헌금을 하고, 열심을 낸다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그믿음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물으면. 그들은 그에 대해 대답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모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많이 다니는 것이 중요한 것은. 그만큼 많은 것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고, 또 교제를 할 수 있기 때문이지만. 대부분 교회를 다니는 시간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시 해도. 주마다 떨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그런가보다. 그랫으면 좋겠다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듣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들리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할때 부터이겟지요. 예수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의사가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인자는 의인을 부르러 온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느니라. " 이와같이 내가 죄인인것을 아는 자.
또한 내 스스로. 율법, 나의 행위, 노력, 의지 가지고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행할수 없음을 알고 탄식하며. 바울과같이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하며 갈급한 자들. 복음의 죄의 용서, 구속이 필요한 자들에게 먼저 그리스도의 말씀이 들립니다. 그래서 교회를 많이 다녓건, 많은 봉사를 하엿건, 중요한게 아니게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필요로 하느냐 이지요.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복음은 가난한 자에게, 눈먼 자에게, 약한 자에게. 묶인 자에게 전파하라고. 내가 어떤 자 인지. 내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하나님 없이 스스로 완전하다 생각하는 자인지. 아니면. 스스로 내가 복음에 비추어볼때 가난한 자 인지. 눈먼 자인지. 인지 하는게 필요하겟지요. 또 성경은 천국을 비유로 씨를 비유합니다. 무슨말이냐.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밭은 우리의 마음이라는 비유죠. 이 씨의 비유대로 하나님말씀이 우리마음밭에 떨어졋을때. 우리가 그렇긴 뭐가그래? 라거나. 또는 그랫으면 좋겠다 라거나. 그런가보다 라거나. 하나님 말씀을 흘러가는 말로 듣고. 귀담지 않으면 길가밭에 떨어졌다 비유합니다. 또, 말씀을 듣고 " 그래 이거야! " 확신하며 환호하다가. 당장 상황이나 여건이 변하지 않음을 보고. "에이 뻥이네 " 라거나. 그와비슷한 생각으로 신뢰를 잃어버리면 돌짝밭이 라고 합니다. 이제 가시밭길에서는 무엇을 말합니까? 번뇌에 대해서입니다. 하나님과. 자신의 삶가운데 이리재고 저리재다가. 하나님말씀도 따라가지 못하고. 자기 자신도 믿지 못하는 삶이죠. 매너리즘에 빠진 신앙을 말합니다. 이런신앙은 영원히 열매맺지 못합니다. 좋은 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잊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복에대하여 시편1장은 말합니다. " 밤낮 읇조리는 자는 복이있다고. " 즉 하나님 말씀을 잊지 않고. 나의 생각을 하나님께 두기 위해선 첫쨰. 읇조리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듣는것입니다. 인생의 어려움을 볼때에. 당장의 어려움에서 눈을감고. 예수그리스도를 보아야하고. 들어야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네.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본다는것은 그분의 공로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사야60장에 이런말을 합니다 " 그가 찔림은 나의 허물 떄문이요. 그가 상함은 나의 죄악 떄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는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사하셧고. 하나님과 화평케 하셧으며. 우리가 저주받은곳에서. 회복하게 하셨습니다. 죽은영이 살아나듯이 말이죠. 이 저주는 신명기 28장에 대해서 아주잘 설명하고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라고. 또 그리스도의 믿음을 가지라고도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있습니까? 저는 저의삶이 온전하다 생각했습니다. 저의 지식이 넓다고 생각햇고. 저의믿음이 강건하다 여기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내가 믿은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은 받아들였으나. 정작 그 축복에 대하여서는 무지했으며, 또한 그것을 여수루이 여기었습니다. 가볍게 여기었다는 것이죠. 내삶의 주체는 나 였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주권자라고 아무리 말해도. 나의 삶의 주권은 그리스도가 아닌 나 였죠. 그래서 고민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체가된다는게 뭔가. 첫것을 폐하고 둘째것을 세운다는게 뭔가.? 첫것은 나의뜻이고. 둘째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첫것은 나의 노력으로 사는 삶이고, 둘째것은 말씀의 기대어 사는 삶입니다. 첫째는 듣는것입니다. 우리는 양심이 있기에 올바른 소식을 지식을 들으면 내생각이 행동이 그에 맞추어 감을 알수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한 컵에 농약이 있고 한 컵에 콜라가 있습니다. 그가 묻기를 " 무엇을 택하겠느냐 " 라고 할때에. 우리가 올바른 지식을 갖고있다면 콜라를 택할 것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만약 한컵에 농약도있을수 있고 콜라도 있을수 있다 라고 들었다면. 둘다 택하기가 무서울것입니다. 왜냐하면 지식의 한계아래에서. 어느것을 택하든 농약으로 인하여 죽을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의 대한 온전한 지식을 잘 듣는것이 중요합니다. 또는 읽으면서 깨닫는것이죠. 깨달음은 위. 즉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옵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령이 충만하다 라고 표현합니다. 즉 말씀이 가득하다는 것이지요. 말씀이 가득한 자 가 된다면 우리의 생각은 초점이 말씀에 집중할수 밖에 없고 맞추어질수 밖에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북한을 아시나요? 태어날 때부터 김정은 김일성, 김정일 이 삼부자를. 마치 신과 동등되다고 세뇌하고 후에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게되고 그렇게 믿게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얼마나 깊이 알고. 생각하고. 깨달음에 따라. 우리는 그말씀에 기대어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에 기대어 사는 것 또한 단계가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분명 전에 말하기를 믿음이 없다라고 말씀드렷는데. 이제는 믿음이 무엇인지 주체는 알았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말합니다. 믿음은 덕을 덕은 지식을 지식은 절제를 절제는 인내를 인내는 경건을 경건은 형제 우애를 형제우애는 사랑을 공급하라. 믿음의 말씀과 싸우는 것이지요. 이것은 곧 좋은 밭입니다. 좋은 밭이 되었다면 이제 인내만이 남았습니다. 내상황이나 여건이 어떠한지와 관계없이. 나의 소망이 그리스도께 두었는가에 초점이 맞춰지는 일이지요. 내가 가난하다고 한들 가난하다 말하는 자는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자 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가난한곳에서 태어나신것은 우리의 부유함을 위함이기 떄문입니다. 내가 약하다, 아프다 하여 약하다 아프다 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멸시 하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허물과 죄악을 용서하심으로 죄로 부터 들어온 가난과 저주와 질병을 속량하셨고. 이뜻에 따라 영원히 자신을 화목제물로 드리심으로 영원히 온전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죄를 지으므로. 그들의 행위나 노력에 상관없이 아담 아래 있는 자들이 죄로부터 종노릇하게 되었듯. 둘째 사람 예수님이 죄를 속죄하므로 그들의 행위나 노력에 상관없이. 의. 곧 생명으로부터 왕노릇하게 되었듯이. 내가 그리스도를 신뢰한다면. 보이는 나라에 어두움을 보고서 어둡다 말하지 않을 것이요. 내 믿음이 약함을 보고 의로우신 주님께 나아갈 것이니. 그는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여기시는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처럼 99세가 되어도 그믿음이 쇠하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을 향한 소망을 쉬
지않음으로 100세에 아들을 낳게 되는 아브라함처럼. 여리고성을 앞두고 하나님말씀에 따라 일곱바퀴를 돌며. 잠잠하되. 여리고성의 비난과. 비웃음과. 멸시를 인내함으로 하나님의 때가 차매.부르짖을때 그성벽이 무너지는것 처럼. 여호수아 갈렙이. 12정탐꾼과 함께 가나안을 정벌하기위해 정탐할때에. 메뚜기같이 자신들이 약함을 알고도. 하나님을 신뢰하는것을 택하고, 목숨까지 내어줌으로. 하나님이 우리와함께하시면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라고 자신있게 믿음을 열매맺을떄 많은이들에게 돌로침을 당하려고 하니 하나님이 영광으로 여호수아 갈렙을 영화롭게 하셨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어려움이나 어두움가운데에. 희망을 노래해야만 하니. 이는 우리의 소망이 보이는 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나라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보이지않는 나라에 대한 소망이 보이는 나라에 따라 이리저리 갈팡이고 또 이리저리 갈대처럼 흔들리는 모습들을 보며 스스로의 믿음에 대하여 회의감을 느꼈습니다. 그리하여 그말씀을 생각하기를 쉬지 않고. 그말씀에 소망을 두며. 그말씀을 상고하는것이 필요함을 느꼈습니다. 여기있는 분들은 얼마나 자신이 믿음에 확신이 있는 분들인가요? 만약 어두움가운데 소망을 노래하기를 즐거워하고. 그리스도의 말씀 묵상하기를 사모하시는 분이라면 그분이 곧. 하나님의 아들들에 속한 분들이요. 하나님께서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나타내게 하실. 거듭나신 영화로우신 신부들이라고 저는 감히 말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신부로써 부르심을 입었으니. 어떤 상황에도 그리스도의 공로를 잊지 말고. 그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때에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셔서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증하셨듯이 결코 버리지 아니하시며, 그리스도를 믿는자들에게는 결코정죄하지 아니하심을 믿고.나아가십시다. 만약. 믿음에 대해서 이와반대되는 말을 하거나, 또는 그리스도께서 내행위가 의롭지 못함으로써 정죄한다거나, 죄의형벌이 중해진다는 말을 하는 자들은 자신있게 말하니 떠나야합니다. 그들은 저주아래있는 자들이며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자기 배나 불리려는 자들이기 떄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견고하여져서. 마침내 대한민국을 통하여 백 투 더 예루살렘이 이루어지는 그날에, 나를 통하여 나와같은 한 영혼을 위하여 안내자가 되어 말씀을 전하시어 나를 구원받게하는데 이르게하신 우리 목사님처럼. 저도 한사람을 저와같이 구원받게하는데 이르게하는데 소망을 두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의말씀이 오늘도 나의 소망이 되시며 진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원합니다. 아멘
그리스도를 참되게 아는 지식: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성육신하시어 이땅 에 오시었고 모든죄를 청산해 주셨으며 부활하사 우리 의가 되셨고 승천하셔서 지금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 중보자가 되시며 믿는 우리를 위해 처소를 만드신 후 다시 오실것 입니다 그 사실에 대한 동 의:전 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내모든 죄와 허물을 완전하게 해결하셔서 의가 되어주신 예수그리스도께 나의 구세주이심을 믿게 은혜주심을 감사 드립니다 예수그리스도은 나의 의가 되십니다 아무도 아무것도 결코 나를 정죄하지 못합니다 그분 안에서 나는 완전하고 온전하고 영 원한 사랑과 생명에 이른 것입니다 그분에 대한 신뢰 :예수그리스도를 100%의지하고 싶습니다 이 상황들이 저를 흔들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주는 완전하십니다 주는 완전하고 영 원하신 사랑 으로 지금도 사랑하십니다 주는 여전히 저의 중보자이시며 변치 않으시는 사랑과 성실 로 일하십니다 저에게 주산 기업의 퓽성한 영광 을 차지하게 하시며 생명의 놀 라운 열매로 아버지하나님의 기쁨이 되었음을 믿겠 습니다 네 미듬이 어디있느냐....?
위 내용 관련으로 제가 지식은 없지만요... 글을 읽고 조금 안타까운 마음 있어 생각 적어봅니다. 번역은 틀렸을지 모르지만 왜 동의라고 하시는지는 확실하게 알겠습니다. 믿음과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지만요... 그 선물을 보물과 같이 소중히 받을지는 지식을 통한 인정과 그에 따른 동의된 마음이 자연반응 돼고... 그 시간을 걸어가는 그 모든 여정들이 신앙인것 같습니다. 신뢰함 마저도 동의된 마음을 기다려 주시고 늘 이끌어 인도함 주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라고 이순간 고백하며 그 위대하고 따뜻한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정언권 믿음에 대하여 자기 의지적인 믿음이라 생각을 한다면 동의라는 말은 전혀 틀린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믿음이 하나님으로 부터 주어지는 것(은혜의 선물)이라 한다면 주어진 복음의 말씀에 동의한다는 말이 믿음이란 말과 같은 의미가 될 수 있음이라 생각을 합니다. 1)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에 대하여 나도 같은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2) 혹은 하나님께 주신 그 믿음이 제 믿음과 동일 합니다. 3) 또는 최소한 하나님이 주시는 그 믿음을 저도 갖고 싶습니다. 4)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으로 저도 살고 싶습니다. 등의 의미로 사용될 수 있기에 믿음은 분명 동의가 수반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의 경우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 갖게 되는 믿음에 대하여 순서적 세분을 해본다면 1) 복음을 전하여지고 2) 복음을 듣게 되어 알고 3) 복음을 알아 받아(이해)들이고 4) 복음의 말씀에 동의(이성적 수용)하고 5) 믿음이 된 복음의 말씀을 신뢰하고 살아가는 삶을 말씀하심인데... 이것을 스퍼전 목사님의 말씀으로 더욱 간략하게 표현하여 본다면 복음에 대하여 1) 듣고 알고 2) 알고 동의하고 3) 동의한 복음을 신뢰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이 보인 믿음의 특징이라 함인 듯 싶습니다. 그러므로 어느정도 성장 후에 복음을 수용(전도)한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선 스펄전 목사님의 3가지 믿음의 특징이 설명이 쉽게 잘 이해될 것이나 모태 신앙인으로 자라온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겐 이러한 믿음을 동의한다 라는 말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생각을 합니다. 그저 어린시절 부터 알게된 복음을 스스로 믿는 것이라 생각을 하게 되니 말입니다. 그러던 중 성령의 은혜(감동)를 깨닫게 되면, 자신에게도 믿음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내려온 은혜의 선물인 것을 알고, 인정하고, 신뢰하(믿음)게 된 것이라 고백(증언)을 하게 될 것입니다.
@@honeymung-my2ou 확신이란 믿음의 또 다른 표현일 수 있는데 그 성격에 있어서는 좀 다릅니다. 그 다르다는 의미는 이렇습니다. 신앙의 믿음(이성적으론)은 믿을 수 없는 존재 혹은 사건 또는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을 합니다. 그 보이지 않음이란 영적 존재 즉 하나님, 성령님, 귀신, 천사 등등의 영적인 존재들에 관한 믿음에서 시자되는 믿음이니 이 믿음은 굉장히 주관적이지만 실상은 그렇게 믿어지는 믿음 입니다. 이 믿음엔 딱히 이유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에 대한 입증도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믿음을 감리회 운동을 펼친 웨슬리는 견인의 은혜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이 믿음은 누군가에 의해 전해져야만 가능한데 이 누군가가 전도자 혹은 선지자라고 부르는 이들에 의해 믿음이 전달이 됩니다.(이후는 알고, 동의하고, 신뢰하고의 내용을 참조) 확신은 신뢰와 비슷하지만 실상은 또 다시 전혀 다르다 할 수 있습니다. 신뢰란 어떤 의미에서 믿을 수 없는 대상에 대한 변하지 않는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확신은 이 믿을 수 없는 대상에 대한 변치않는 믿음에서 또 다시 믿음이 성장하는 데 그 믿음은 스스로 믿음의 대한 확증 즉, 객관적으로도 이 믿음에 대한 입증이 가능한 경우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이와 같은 믿음에 해당합니다. 내가 구원을 받앗을까? 누가 구원을 받았을까? 그는 구원을 받았을까?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으며 이 논란에 대한 답은 어떠한 의미에서 '모른다'로 귀결이 되는 데 구원의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된다면 당연이 자신의 구원이든 누구의 구원이든 그 구원의 확신에 대한 것은 모르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모르다는 말은 곧 구원에 대한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고 그것은 믿음에 대한 불확실성을 나타내는 의미가 되기 때문에 그러한 표현 자체가 구원은 없다는 말과도 비슷하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에 대한 논란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나타날 논란이자 오해이며 왜곡이 될 수 있습니다. 오해이며 왜곡이란 말은 즉 구원에 대한 확신은 모르는 것이라며 넌 어떻게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느냐?고 의혹하고 반문하고 회의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헤 대한 확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확신에 대한 증거가 무엇일까? 그 증거란 내적인 증거이기도 하고 외적인 증거 이기도 합니다. 내적인 증거라 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그 어떠한 논란과 논쟁과 부정적이거나 회의적인 세상의 주장들을 듣게 된다 하여도 흔들리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론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은 꽉 막힌 골수분자, 광신자, 또는 세뇌당한자 라고 생각을 하거나 그렇게 치부되기 쉽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말씀을 전할 때 저들이 새술에 취하였다고 하였던 것과 같이 말입니다. 새술에 취하였다고 말한 이 주장이 틀린 것이 아니라 분명한 증언 입니다. 그들의 마음과 생각과 그들의 태도와 삶의 자세 및 외형적인 것까지도 모두 변하여 있었으니 그런 것입니다. 사람들이 새술에 취한 것처럼 보이는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대표하여 증거합니다. "우리는 새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성령에 취한 것이니 (중략) 누구든지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내적 왜적 증거들이 나타날때 곧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주권을 증거하는 또 다른 복음 입니다. 회심의 과정을 통해 얻게 되는 이러 저러한 변화(거듭남)의 현상이 나타날 때 비로서 스스로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음(확신)이라 증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회심의 변화에 대하여 감리회 운동을 일으킨 웨슬리는 체험이라 하였는데 이 체험의 옳고 그름은 1) 성경을 통해 2) 교회의 전통을 통해 3) 다른 성도들의 체험을 통해 4)이성적인 논증을 통해 입증이 가능해야 비로서 진실한 성령의 체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체험은 비이성적인 단순한 신비주의적 체험이 아닙니다. 그리고 4) 나만이 갖게 되는 극히 주관적인 체험이 아니라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 간에 공유되고 공명이 되는 체험(아멘)이어야 함을 뜻하며 3) 이성적으로 이해 되지 않거나 용납할 수 없는 신비로운 내외적인 변화들에 대하여 이해되거나 논리적 증명이 가능해야 함을 뜻하기고 하고 2) 다시 교회의 전통속에 반드시 이어지고 있는 거룩한 하나님의 역사임이어야 함을 뜻하고 1) 성경은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증언으로 말씀을 통해서도 입증이 되어야 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확신은 무조건 믿으려 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무조건 우긴다고 확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보다 세뇌도 아니고 뭐가에 광적인 반응을 보이는 신비주의적임도 아니며 비이성적이고 무지성적인 무식함도 더더욱 아닌 것입니다. 결국 이 구원은 확신을 얻게 하는 신앙적인 체험 즉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이 있을때에야 비로서 서로 공유 가능하고, 공감 가능하고, 서로 울림이 될 수 있는 내 외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내외적인 현상을 보이는 진실로 거듭난 성도의 모습을 본다면 그 누구도 그에 대한 반론을 말하지 못하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그 무엇인가가 되는 것 입니다. 그 무엇인가는 바로 하나님의 역사, 은혜, 감동, 사랑이라 표현을 할 수 있습니다. 님은 믿음을 확신이라 하셨으니 제 말을 이해하실 듯도 한데요....물론 아멘이라 하신다면 더 할나위 없겠지만 말입니다.
님 . 그분 왔었음 아직도 계심 .나는 그렇게 생각해도 완전하지 못할수밖에 없는 먼지 하나이니 술이나 마시는 주정뱅이 . 잠이잘옴 , 현실에서 하지 못하는 글을 이딴데서 잘 싸지름 . 현실에는 직장인 나부랭이 거지꼴임 . 그래도 과거보다 나아진 직장 ... 또 할수 있는 일들이 많아진걸 감사라고 생각하고 사는중ㅈ임 . 예로 보자 , 니가 쓰레기 치우려고 12시간 일해서 쓰레기 치우는데만 하루를 다쏟고 씨고 먹고 자고의 시간이 반복이었는데 , 니 근로 시간이 6시간씩만 일하고 남은 시간에 니가 하고 싶었던 일 , 부가적 돈의 질서 채움의 시간 , 몸가꿈 여가 다 하는데 만족까진 아니라도 더 나음에 감사가 당연하지 않음 ?? 급여는 같으니까 재끼고 , ㅋㅋ
주예수아의 귀한종의 메세지를 이렇게 해설하여 듣게 해주신 아버지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감사 합니다 수고하신 귀한분께 가장 좋은것으로 갚으시기를 원합니다 오늘도 주께서 베푸신 은혜와사랑 너무커서 눈물납니다 그이름 예슈아 이름만 영원히 홀로 송축 받으소서 할렐루야^^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죄에서
자유롭게하소서
저는 볼 수 있으나..보지 못함으로 알지 못함으로 예수님을 의지하며 신뢰하며 걷고자 합니다..
이거 정말 좋은 비유네요..^^
감사합니다..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잘 알게 되었읍니다 수고하심에 감사합니다
일생을 인도하소서. 전적으로 신뢰케 하소서.
바른믿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
감사합니다 ♡
앞을 보지 못하는 자는 온전히 그의 손을 잡고 믿고 따라간다라는 것 , 맡긴다라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울림이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일점 일획도 틀림이없는설교의말씀입니다 두손으로 아멘합니다.
예수님을 기뻐하며 온맘과 온몸을 기대어 기대하겠습니다 결코 배신하지 않으시고 받아주시는 사랑 감사합니다 ❤
예수님은 우리의 신뢰를 결코 배신하지 않습니다!!
저는 다리 수술 후 요양 중으로 매 식사를 누가 챙겨줘야 합니다.
오늘은 집에 누가 없습니다. 간단히 떼울 건 있지만, 주님 밥 주세요.
기다렸습니다.
친구가 집 앞이라며, 저녁을 챙겨 왔네요. 남자식구들이 못 알아주는 과일까지.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지시는 분이십니다♡
아멘 ~~
내 삶의 모든것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께 의지합니다.그렇게 행하시고 계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나는 미래를 모르나 주님은 아심으로 완전히 믿음으로 밑깁니다
시각장애인이 안내자에게 믿음으로 의지하듯이
감사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에 대한 의구심을 아주 잘 해소시켜 주는 말씀입니다.
믿음에 대하여
말씀하여 주심에
감사합니다.
아멘.
아멘
주님과 함께하는 나외 하루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오늘도
함게하여 승리 하시길 축복합니다 오직 사랑
성령 예수님께 감사드림니다 아멘 아멘
항상 건강 하시고 말씀 주십시오
네 참으로 귀한 스펄전 목사님의 말씀을 듣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아멘! 예수님을, 하나님을, 성령님을 더 알기 원합니다. 그래서 주님 뜻대로 살기 원합니다.
아멘 아멘입니다"
아멘
부활 생명 되신 주님을 의지하고 시례합니다
믿음을 선물로 주신 주님을 영원히 찬양합니다
아멘~ 나의 구주시며 나의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살아계신예수님을 따아갑니다. 시각장애인이 안내자를 믿고 따라가는것처럼 예수님 너무좋습니다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지식과 동의와 신뢰가 우리의 믿음입니다! 아멘~
주님 저의발 저의몸 다 주님의것입니다
아멘 🙏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
완전하신나의주님 의의길로 날 인도하소서 온전히 신뢰하고 의지합니다 우리주와같으신이 어디 있을까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고 오직 주님에게 다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나라는 존재를 정확히 알기를 소망합니다. 내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빛으로 보여주소서
주님 감사합니다
너무 귀하고 보배로운 설교입니다 반복해서 듣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얻기를 원합니다
귀한 말씀 듣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아멘 !😅
예수님의 피로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아멘
좋은 말씀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됩니다
🙏
예수님은우리들의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구주이시며 목자이십니다.아멘.❤❤❤❤❤
하나님을 알아간다는거 예수님을 알아간다는거 그 크기만큼 나의 신앙이 자랍니다 🙏
피조물의 배신을 창조주의 피로 대속하시고
우리를 다시 의롭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은혜에 감사 또 감하드립니다!성령충만하여 성령님께 운전대를 맏기는 참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이끌어 주시옵소서! 아멘!
개혁신학이 세계 여러 곳에 어떻게 전파되는지 보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찰스 스펄젼의 설교를 보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믿고 따르는 모든 자들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가득 찬 그리스도 중심의 자세로 이 믿음의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믿음은회개가없다면.하나님께로부터구원이없읍니다!회개후거듭나서.구원의길로가는믿음을.하나님께로부터받아서.순종으로가는자만.이설교가이루어집니다!
제가 구독중인 지식브런치님이랑 목소리가 똑같은데요
저는 부활 하신 예수님께 내 생명을 걸었습니다.
어케 그럴 수 잏나요? 전 성경말씀이 사실이라는것이 믿어지지가 않아요
예수님을 위해 사신 분이라면 이해타산 하지 않고 전도하시죠?
성경은 하나님의 숨 불어넣으심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말씀을 꾸준히 읽고 곱씹어 읽으면 하나님의 숨결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와서 믿어지게 됩니다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께 모든 것을 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가득해야 순수하게 전도할 수 있게 됩니다
@@blessedtheman1608 성경공부 기도 읽기 매일합니다 할수록 답답하네요
@@라일락-u8c 하나님께서 라일락님을 만나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살아서 역사하십니다 아멘아멘 ❤
@@blessedtheman1608 지금 신약을 두번 읽기 시작햇는데
처음 구약읽다가 믿음이 없어 지루하더라구요
거의 2년동안 불안증으로 시달리니 내 방법이 틀렷나 싶은데 구약부터 읽어야 하나요?
온전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 즉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심으로 끊임없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전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시작입니다.
복음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에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하며 또한 자신이 지금것 무엇을 잘 못하고 있엇는지 또한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잘못(죄)들에 대하여 회개를 하게 합니다. 알지 못한다면 회개를 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 율법이 그 역할을 감당하였고 양심이 그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래서 율법과 양심은 죄를 깨닫게 하는 몽학선생이 되며 참 선생이신 에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죄를 회개하고 용서함을 받게 됨을 진실로 믿게 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앞으로의 삶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합니다.
소망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며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르기 위해선 신뢰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신뢰는 소망을 이루기 위한 또 다른 하나님의 은혜가 됩니다.
그닌까 그 믿음을 어떻게 가져요 ?내가 가져야지 한다해서 믿어지나요?
@@라일락-u8c 내가 가져야지 해서 갖게 되는 것이 믿음이라면 구원은 진짜 너무도 쉬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의 문에 대하여 좁고 그 길은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 하였습니다.
이 말씀 자체로만 보아도 힘들고 어려워도 찾으면 갖게 될 것 같은 것이 믿음이라 생각할 수 있음 입니다. 그러나 정작 믿음을 갖으려 하면 할 수록 오히려 멀리 달아나 버리는 것이 믿음임을 알게 될 뿐입니다.
또 다른 말씀엔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려울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실상은 낙타를 바늘귀에 통과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된다면 너무도 어렵고 힘든 일이겠으나 성공을 할 수 있음이라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 할수 있다는 것일까? 그게 가능키는 해?라는 의문만을 남기게 될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이 말씀은 가능성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 같으나 실상은 인간의 힘과 능력으론 불가능함을 말씀하심이라 생각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일단은 이렇게 생각하여 본다면 자신의 능력과 힘으론 불가능한 것이 믿음을 갖는다는 것라 봄이 매우 타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 불가능한 것과 같은 말씀으로 구원의 문에 대하여 말씀하셨을까? 희망고문하심일까? 진정 그렇다면 예수님은 좋은 친구가 아니라 못된 친구이겠지요. 아이 원수라 보아도 무방하겠지요.
그러니 그 말씀엔 뭔가 비밀이 담겨 있음이라 생각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구원의 문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 하였으니 그 문은 구원의 문과 아주 비슷하지만 개념적으론 뭔가 미세한 차이점이 있음입니다.
그차이점 가운데 우리는 구원의 문이라 하면 사람이 드나드는 문을 물리적 문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문은 이런 물리적 문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이 구원의 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구원의 문)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 됨인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구원의 문은 그 자체로 들어간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때부턴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을 가게 된다라고 생각할 수 있음 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의 문을 통과하면 그 후부턴 생명으로 인도하는 또 다른 문이 있음인데.. 그 문이 바로 성령이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구원의 문(예수 그리스도)을 열고 들어온 믿음의 사람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성령께서 온전케 하시어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심이라 할 수 있음인 것입니다.
"회개하여 각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믿고)으로 세례를 받아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으라." 하였던 것과 같이 다시 이 말씀을 구원의 문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으로 재 번역을 해 본다면 "회개하여 각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음으로 세례를 받아 구원의 문을 열고 죄사함을 받아 생명으로 인도하는 성령을 선물로 받으라." 는 말씀이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회개를 통해 얻게 되는 것입니다. 또 이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곧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믿음을 얻겠다는 의미가 됩니다.
도 다시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단순히 명사적인 표현인 주에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표현인 나의 주님이신 예수께서 나를 구원하리라. 그러하오니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볼쌍히 여기시고 나로하여금 구원을 받게 하옵소서."라는 간청적 기도문임과 동시에 내 삶의 고백(회개)과 삶의 모습(주님을 생명으로 인정함)이 보여져야만 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여기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여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하면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라는 명사적 이름을 부르는 것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려함을 의미함이니 곧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기를 간청하며 도우심을 구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함의 삶을 살게 되는 새로운 삶을 의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 가운데 그나마 가장 사람들의 삶의 피부로 와닿는 변화라 한다면 곧 진리 가운데 살아가려 하는 삶을 의미하며 진리가운데 살아가려 한다는 것은 진실하게 살려 함을 뜻함이니 모든 거짓 된 것들로 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게 됨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진실하게 살려 함일까요? 그것은 성령의 감동을 쫓는 삶을 의미합니다. 즉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참된 진리를 알(개닫게)게 하시어 그 진리의 길을 진실되게 살아가게끔 인도하심이란 의미가 됩니다.
진리(실)의 기준은 내게 있음이 아니라 세상에 있음이 아니라 성령께 있는 것이며 아버지 하나님께 있음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곧 진리의 기준이 됨이니 생명의 문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란 곧 진실하게 살려 함일 뿐만 아니라 성령의 깨닫게 하심과 인도하심을 통해 진실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성도의 진실한 삶의 모습을 목도케 됨이 되는 것이니... 그 가운데서 많은 믿음의 선조들의 진실을 듣고 보고 느끼고 깨닫게 됨을 체험하게 됨입니다.
곧 이것이 꿈이 되기도 하고 예언이 되기도 하며 때에 따라선 환상을 보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글로 설명하려니 장황한 설명이 된 듯합니다. 제 글보다 성령께서 친히 님에게 깨닫게 하시는 은혜로 진실한 믿음을 선물로 얻게 되시길 기도합니다.
@@jaeshinroh7605 정말 감사합니다
@@jaeshinroh7605 믿음을 달라는것과 내가 죄인임을 깨닫게 해달라는 거죠
@@라일락-u8c 간단히 말하면 그런 것이죠...그러나 실상 이것도 현실적 상황과 영적인 활동(성령의 역사)를 이해해야 하므로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성경 말씀을 인용 해본다면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고전2:14))하셨으니
이에 대하여 주님이 말씀하시길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마13:13)이라 하셨으므로 육에 속한 이들에겐 숨겨진 비밀이겠으나 성령에 속한 믿음의 사람에겐 깨달음이 되고 영적 지식이 되니 은혜 위에 은혜가 됨이니 너무도 선명하고 분명하고 명확하여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가 없는(손으로 직접 만지는 것과 같이) 울림, 감격, 감동, 공명과 같은 현상이 속에서 일어남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상은 믿음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주어짐이 되며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너무도 분명하여 세밀하고 은밀한 죄(과거, 현재, 미래)까지도 낱낱이 보여(이상과 환상을 통해)짐(핑게치 못하리라)이니, 그러기에 이러한 영적 회개는 자신 스스로 한다기 보단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한 회개가 되니 회개케 하심이라 할 수 있음 입니다. (롬2:4b)
믿음은 예수님을 아는것 입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아는것은 주님의 인성,신성.말씀을 알아야 깊이 주님을 알게되고 믿음이 깊어 집니다.
저기에서 신성의 부분은 성령의 열매를 많이 맻어져야 주님의 마음으로 다른이들을 궁율을 알게되고 주님의 뜻을 분별하게 됩니다.
저3가지를 실천하게 되면 주님의 큰 일꾼으로 주님과이웃을 위해 헌신하게 됩니다.
주님을 체험으로 주님을 안다고 하신분은 일부분만 주님을 아시는 분입니다.
저3가지는 저가 몇십년을 동행하면서 최근에 주님의 음성으로 듣고 깊이 깨닫은 말씀입니다.
저3가지는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살롬
요즘따라 깨달은 말씀들과 동일한 내용에 참으로 놀랐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예수그리스도를 얼마나 믿고 살아가는지 궁금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믿음은 아무것도 아니며 우리의 지식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얼마나 적은지도 알게됩니다. 우리는 보이는 세상에 살므로. 보이는 세상을 신뢰하고 살아가지만.
마치 건물이 언제든 무너지지 않을것을 믿기에. 그건물 아래에서 무너지는것을 걱정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처럼. 하지만 실제로 건물은 무너질떄도 있고. 이를 믿고있는자들은 이를 걱정하지 않고 살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 진리임에도. 그것이 보이지 않는 나라이기에. 처음부터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신앙 생활을 아무리 많이 했고. 아무리 많은 헌신과. 봉사를 한다 할지라도. 보이지 않는 나라에대한 믿음은
믿음의 싸움이 없이는 이루어질수 없기 떄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묻게 됩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의 싸움은 무엇이며. 우리는 무엇과 싸우어야 하는지 말입니다. 이것은 분명 구원과 관계된 것이니까요.
믿음의 주체는 나.입니다. 내가 어디에 속해있는지 아는 것이지요. 로마서 8장 이런 구절이있지요.
육신에 속한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도 못하고 도리어 원수가 되며, 영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곧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요한복음 6.63. "내 말이 곧 영이요" 예수님말씀이 곧 영이라고 하시지요.
무슨 말인가요? 육신에 속해있다는 것은 무엇인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영이란? 무엇인가 한다면 곧 예수님 말씀임을 알수있지요.
그렇다면 육신은 예수님과 반대되는 모든것이라고 볼수도 있겠지요, 실제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분들에게 물어보곤 했습니다.
당신의 믿음은 어떻게 나아가십니까? 그들의 대답은 하나같이.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봉사를하며, 헌금을 하고, 열심을 낸다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그믿음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물으면. 그들은 그에 대해 대답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모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많이 다니는 것이 중요한 것은. 그만큼 많은 것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고, 또 교제를 할 수 있기 때문이지만.
대부분 교회를 다니는 시간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시 해도. 주마다 떨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그런가보다. 그랫으면 좋겠다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듣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들리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할때 부터이겟지요. 예수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의사가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인자는 의인을 부르러 온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느니라. " 이와같이 내가 죄인인것을 아는 자.
또한 내 스스로. 율법, 나의 행위, 노력, 의지 가지고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행할수 없음을 알고 탄식하며. 바울과같이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하며
갈급한 자들. 복음의 죄의 용서, 구속이 필요한 자들에게 먼저 그리스도의 말씀이 들립니다. 그래서 교회를 많이 다녓건, 많은 봉사를 하엿건, 중요한게 아니게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필요로 하느냐 이지요.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복음은 가난한 자에게, 눈먼 자에게, 약한 자에게. 묶인 자에게 전파하라고.
내가 어떤 자 인지. 내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하나님 없이 스스로 완전하다 생각하는 자인지. 아니면. 스스로 내가 복음에 비추어볼때 가난한 자 인지.
눈먼 자인지. 인지 하는게 필요하겟지요. 또 성경은 천국을 비유로 씨를 비유합니다. 무슨말이냐.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밭은 우리의 마음이라는 비유죠.
이 씨의 비유대로 하나님말씀이 우리마음밭에 떨어졋을때. 우리가 그렇긴 뭐가그래? 라거나. 또는 그랫으면 좋겠다 라거나. 그런가보다 라거나.
하나님 말씀을 흘러가는 말로 듣고. 귀담지 않으면 길가밭에 떨어졌다 비유합니다. 또, 말씀을 듣고 " 그래 이거야! " 확신하며 환호하다가.
당장 상황이나 여건이 변하지 않음을 보고. "에이 뻥이네 " 라거나. 그와비슷한 생각으로 신뢰를 잃어버리면 돌짝밭이 라고 합니다.
이제 가시밭길에서는 무엇을 말합니까? 번뇌에 대해서입니다. 하나님과. 자신의 삶가운데 이리재고 저리재다가. 하나님말씀도 따라가지 못하고.
자기 자신도 믿지 못하는 삶이죠. 매너리즘에 빠진 신앙을 말합니다. 이런신앙은 영원히 열매맺지 못합니다.
좋은 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잊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복에대하여 시편1장은 말합니다. " 밤낮 읇조리는 자는 복이있다고. "
즉 하나님 말씀을 잊지 않고. 나의 생각을 하나님께 두기 위해선 첫쨰. 읇조리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듣는것입니다.
인생의 어려움을 볼때에. 당장의 어려움에서 눈을감고. 예수그리스도를 보아야하고. 들어야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네.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본다는것은
그분의 공로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사야60장에 이런말을 합니다 " 그가 찔림은 나의 허물 떄문이요. 그가 상함은 나의 죄악 떄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는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사하셧고. 하나님과 화평케 하셧으며.
우리가 저주받은곳에서. 회복하게 하셨습니다. 죽은영이 살아나듯이 말이죠. 이 저주는 신명기 28장에 대해서 아주잘 설명하고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라고. 또 그리스도의 믿음을 가지라고도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있습니까?
저는 저의삶이 온전하다 생각했습니다. 저의 지식이 넓다고 생각햇고. 저의믿음이 강건하다 여기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내가 믿은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은 받아들였으나. 정작 그 축복에 대하여서는 무지했으며, 또한 그것을 여수루이 여기었습니다. 가볍게 여기었다는 것이죠.
내삶의 주체는 나 였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주권자라고 아무리 말해도. 나의 삶의 주권은 그리스도가 아닌 나 였죠. 그래서 고민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체가된다는게 뭔가.
첫것을 폐하고 둘째것을 세운다는게 뭔가.? 첫것은 나의뜻이고. 둘째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첫것은 나의 노력으로 사는 삶이고, 둘째것은 말씀의 기대어 사는 삶입니다.
첫째는 듣는것입니다. 우리는 양심이 있기에 올바른 소식을 지식을 들으면 내생각이 행동이 그에 맞추어 감을 알수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한 컵에 농약이 있고 한 컵에 콜라가 있습니다. 그가 묻기를 " 무엇을 택하겠느냐 " 라고 할때에. 우리가 올바른 지식을 갖고있다면 콜라를 택할 것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만약 한컵에 농약도있을수 있고 콜라도 있을수 있다 라고 들었다면. 둘다 택하기가 무서울것입니다. 왜냐하면 지식의 한계아래에서.
어느것을 택하든 농약으로 인하여 죽을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의 대한 온전한 지식을 잘 듣는것이 중요합니다. 또는 읽으면서 깨닫는것이죠.
깨달음은 위. 즉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옵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령이 충만하다 라고 표현합니다. 즉 말씀이 가득하다는 것이지요.
말씀이 가득한 자 가 된다면 우리의 생각은 초점이 말씀에 집중할수 밖에 없고 맞추어질수 밖에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북한을 아시나요? 태어날 때부터 김정은 김일성, 김정일 이 삼부자를. 마치 신과 동등되다고 세뇌하고 후에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게되고 그렇게 믿게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얼마나 깊이 알고. 생각하고. 깨달음에 따라. 우리는 그말씀에 기대어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에 기대어 사는 것 또한 단계가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분명 전에 말하기를 믿음이 없다라고 말씀드렷는데. 이제는 믿음이 무엇인지 주체는 알았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말합니다. 믿음은 덕을 덕은 지식을 지식은 절제를 절제는 인내를 인내는 경건을 경건은 형제 우애를 형제우애는 사랑을 공급하라.
믿음의 말씀과 싸우는 것이지요. 이것은 곧 좋은 밭입니다. 좋은 밭이 되었다면 이제 인내만이 남았습니다.
내상황이나 여건이 어떠한지와 관계없이. 나의 소망이 그리스도께 두었는가에 초점이 맞춰지는 일이지요.
내가 가난하다고 한들 가난하다 말하는 자는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자 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가난한곳에서 태어나신것은 우리의 부유함을 위함이기 떄문입니다.
내가 약하다, 아프다 하여 약하다 아프다 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멸시 하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허물과 죄악을 용서하심으로
죄로 부터 들어온 가난과 저주와 질병을 속량하셨고. 이뜻에 따라 영원히 자신을 화목제물로 드리심으로 영원히 온전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죄를 지으므로. 그들의 행위나 노력에 상관없이 아담 아래 있는 자들이 죄로부터 종노릇하게 되었듯.
둘째 사람 예수님이 죄를 속죄하므로 그들의 행위나 노력에 상관없이. 의. 곧 생명으로부터 왕노릇하게 되었듯이.
내가 그리스도를 신뢰한다면. 보이는 나라에 어두움을 보고서 어둡다 말하지 않을 것이요. 내 믿음이 약함을 보고 의로우신 주님께 나아갈 것이니.
그는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여기시는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처럼 99세가 되어도 그믿음이 쇠하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을 향한 소망을 쉬
지않음으로 100세에 아들을 낳게 되는 아브라함처럼.
여리고성을 앞두고 하나님말씀에 따라 일곱바퀴를 돌며. 잠잠하되. 여리고성의 비난과. 비웃음과. 멸시를 인내함으로 하나님의 때가 차매.부르짖을때
그성벽이 무너지는것 처럼. 여호수아 갈렙이. 12정탐꾼과 함께 가나안을 정벌하기위해 정탐할때에. 메뚜기같이 자신들이 약함을 알고도. 하나님을 신뢰하는것을
택하고, 목숨까지 내어줌으로. 하나님이 우리와함께하시면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라고 자신있게 믿음을 열매맺을떄 많은이들에게 돌로침을 당하려고 하니
하나님이 영광으로 여호수아 갈렙을 영화롭게 하셨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어려움이나 어두움가운데에. 희망을 노래해야만 하니. 이는
우리의 소망이 보이는 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나라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보이지않는 나라에 대한 소망이 보이는 나라에 따라 이리저리 갈팡이고 또 이리저리 갈대처럼 흔들리는 모습들을 보며 스스로의 믿음에 대하여 회의감을 느꼈습니다.
그리하여 그말씀을 생각하기를 쉬지 않고. 그말씀에 소망을 두며. 그말씀을 상고하는것이 필요함을 느꼈습니다. 여기있는 분들은 얼마나 자신이 믿음에 확신이 있는 분들인가요?
만약 어두움가운데 소망을 노래하기를 즐거워하고. 그리스도의 말씀 묵상하기를 사모하시는 분이라면 그분이 곧. 하나님의 아들들에 속한 분들이요.
하나님께서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나타내게 하실. 거듭나신 영화로우신 신부들이라고 저는 감히 말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신부로써 부르심을 입었으니. 어떤 상황에도 그리스도의 공로를 잊지 말고. 그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때에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셔서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증하셨듯이 결코 버리지 아니하시며, 그리스도를 믿는자들에게는 결코정죄하지 아니하심을 믿고.나아가십시다.
만약. 믿음에 대해서 이와반대되는 말을 하거나, 또는 그리스도께서 내행위가 의롭지 못함으로써 정죄한다거나, 죄의형벌이 중해진다는 말을 하는 자들은
자신있게 말하니 떠나야합니다. 그들은 저주아래있는 자들이며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자기 배나 불리려는 자들이기 떄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견고하여져서. 마침내 대한민국을 통하여 백 투 더 예루살렘이 이루어지는 그날에, 나를 통하여 나와같은 한 영혼을 위하여
안내자가 되어 말씀을 전하시어 나를 구원받게하는데 이르게하신 우리 목사님처럼. 저도 한사람을 저와같이 구원받게하는데 이르게하는데 소망을 두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의말씀이 오늘도 나의 소망이 되시며 진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원합니다. 아멘
그리스도를 참되게 아는 지식: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성육신하시어 이땅 에 오시었고 모든죄를 청산해 주셨으며 부활하사 우리 의가 되셨고 승천하셔서 지금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 중보자가 되시며 믿는 우리를 위해 처소를 만드신 후 다시 오실것 입니다
그 사실에 대한 동 의:전 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내모든 죄와 허물을 완전하게 해결하셔서 의가 되어주신 예수그리스도께 나의 구세주이심을 믿게 은혜주심을 감사 드립니다
예수그리스도은 나의 의가 되십니다 아무도 아무것도 결코 나를 정죄하지 못합니다
그분 안에서 나는 완전하고 온전하고 영 원한 사랑과 생명에 이른 것입니다
그분에 대한 신뢰 :예수그리스도를 100%의지하고 싶습니다 이 상황들이 저를 흔들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주는 완전하십니다 주는 완전하고 영 원하신 사랑 으로 지금도 사랑하십니다 주는 여전히 저의 중보자이시며 변치 않으시는 사랑과 성실 로 일하십니다 저에게 주산 기업의 퓽성한 영광 을 차지하게 하시며 생명의 놀 라운 열매로 아버지하나님의 기쁨이 되었음을 믿겠 습니다
네 미듬이 어디있느냐....?
belief를 동의로 해석하면 안되잖아요. belief와 동의 agreement 는 엄연히 다른데. 그 전 신앙의 선조들은 믿음은 동의가 아니라고 얼마나 강조했는데 저걸 동의로 번역하면 얼마나 혼란이 오겠나요?
믿음은 아멘 입니다.
위 내용 관련으로 제가 지식은 없지만요... 글을 읽고 조금 안타까운 마음 있어 생각 적어봅니다.
번역은 틀렸을지 모르지만 왜 동의라고 하시는지는 확실하게 알겠습니다.
믿음과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지만요... 그 선물을 보물과 같이 소중히 받을지는 지식을 통한 인정과 그에 따른 동의된 마음이 자연반응 돼고... 그 시간을 걸어가는 그 모든 여정들이 신앙인것 같습니다. 신뢰함 마저도 동의된 마음을 기다려 주시고 늘 이끌어 인도함 주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라고 이순간 고백하며 그 위대하고 따뜻한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정언권 믿음에 대하여 자기 의지적인 믿음이라 생각을 한다면 동의라는 말은 전혀 틀린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믿음이 하나님으로 부터 주어지는 것(은혜의 선물)이라 한다면 주어진 복음의 말씀에 동의한다는 말이 믿음이란 말과 같은 의미가 될 수 있음이라 생각을 합니다.
1)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에 대하여 나도 같은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2) 혹은 하나님께 주신 그 믿음이 제 믿음과 동일 합니다.
3) 또는 최소한 하나님이 주시는 그 믿음을 저도 갖고 싶습니다.
4)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으로 저도 살고 싶습니다.
등의 의미로 사용될 수 있기에 믿음은 분명 동의가 수반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의 경우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 갖게 되는 믿음에 대하여 순서적 세분을 해본다면
1) 복음을 전하여지고 2) 복음을 듣게 되어 알고 3) 복음을 알아 받아(이해)들이고 4) 복음의 말씀에 동의(이성적 수용)하고 5) 믿음이 된 복음의 말씀을 신뢰하고 살아가는 삶을 말씀하심인데...
이것을 스퍼전 목사님의 말씀으로 더욱 간략하게 표현하여 본다면
복음에 대하여 1) 듣고 알고 2) 알고 동의하고 3) 동의한 복음을 신뢰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이 보인 믿음의 특징이라 함인 듯 싶습니다.
그러므로 어느정도 성장 후에 복음을 수용(전도)한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선 스펄전 목사님의 3가지 믿음의 특징이 설명이 쉽게 잘 이해될 것이나
모태 신앙인으로 자라온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겐 이러한 믿음을 동의한다 라는 말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생각을 합니다. 그저 어린시절 부터 알게된 복음을 스스로 믿는 것이라 생각을 하게 되니 말입니다. 그러던 중 성령의 은혜(감동)를 깨닫게 되면, 자신에게도 믿음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내려온 은혜의 선물인 것을 알고, 인정하고, 신뢰하(믿음)게 된 것이라 고백(증언)을 하게 될 것입니다.
확신
@@honeymung-my2ou 확신이란 믿음의 또 다른 표현일 수 있는데 그 성격에 있어서는 좀 다릅니다. 그 다르다는 의미는 이렇습니다.
신앙의 믿음(이성적으론)은 믿을 수 없는 존재 혹은 사건 또는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을 합니다.
그 보이지 않음이란 영적 존재 즉 하나님, 성령님, 귀신, 천사 등등의 영적인 존재들에 관한 믿음에서 시자되는 믿음이니 이 믿음은 굉장히 주관적이지만 실상은 그렇게 믿어지는 믿음 입니다.
이 믿음엔 딱히 이유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에 대한 입증도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믿음을 감리회 운동을 펼친 웨슬리는 견인의 은혜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이 믿음은 누군가에 의해 전해져야만 가능한데 이 누군가가 전도자 혹은 선지자라고 부르는 이들에 의해 믿음이 전달이 됩니다.(이후는 알고, 동의하고, 신뢰하고의 내용을 참조)
확신은 신뢰와 비슷하지만 실상은 또 다시 전혀 다르다 할 수 있습니다. 신뢰란 어떤 의미에서 믿을 수 없는 대상에 대한 변하지 않는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확신은 이 믿을 수 없는 대상에 대한 변치않는 믿음에서 또 다시 믿음이 성장하는 데 그 믿음은 스스로 믿음의 대한 확증 즉, 객관적으로도 이 믿음에 대한 입증이 가능한 경우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이와 같은 믿음에 해당합니다. 내가 구원을 받앗을까? 누가 구원을 받았을까? 그는 구원을 받았을까?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으며 이 논란에 대한 답은 어떠한 의미에서 '모른다'로 귀결이 되는 데 구원의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된다면 당연이 자신의 구원이든 누구의 구원이든 그 구원의 확신에 대한 것은 모르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모르다는 말은 곧 구원에 대한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고 그것은 믿음에 대한 불확실성을 나타내는 의미가 되기 때문에 그러한 표현 자체가 구원은 없다는 말과도 비슷하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에 대한 논란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나타날 논란이자 오해이며 왜곡이 될 수 있습니다.
오해이며 왜곡이란 말은 즉 구원에 대한 확신은 모르는 것이라며 넌 어떻게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느냐?고 의혹하고 반문하고 회의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헤 대한 확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확신에 대한 증거가 무엇일까?
그 증거란 내적인 증거이기도 하고 외적인 증거 이기도 합니다. 내적인 증거라 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그 어떠한 논란과 논쟁과 부정적이거나 회의적인 세상의 주장들을 듣게 된다 하여도 흔들리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론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은 꽉 막힌 골수분자, 광신자, 또는 세뇌당한자 라고 생각을 하거나 그렇게 치부되기 쉽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말씀을 전할 때 저들이 새술에 취하였다고 하였던 것과 같이 말입니다.
새술에 취하였다고 말한 이 주장이 틀린 것이 아니라 분명한 증언 입니다. 그들의 마음과 생각과 그들의 태도와 삶의 자세 및 외형적인 것까지도 모두 변하여 있었으니 그런 것입니다.
사람들이 새술에 취한 것처럼 보이는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대표하여 증거합니다.
"우리는 새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성령에 취한 것이니 (중략) 누구든지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내적 왜적 증거들이 나타날때 곧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주권을 증거하는 또 다른 복음 입니다.
회심의 과정을 통해 얻게 되는 이러 저러한 변화(거듭남)의 현상이 나타날 때 비로서 스스로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음(확신)이라 증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회심의 변화에 대하여 감리회 운동을 일으킨 웨슬리는 체험이라 하였는데 이 체험의 옳고 그름은 1) 성경을 통해 2) 교회의 전통을 통해 3) 다른 성도들의 체험을 통해 4)이성적인 논증을 통해 입증이 가능해야 비로서 진실한 성령의 체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체험은 비이성적인 단순한 신비주의적 체험이 아닙니다. 그리고 4) 나만이 갖게 되는 극히 주관적인 체험이 아니라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 간에 공유되고 공명이 되는 체험(아멘)이어야 함을 뜻하며 3) 이성적으로 이해 되지 않거나 용납할 수 없는 신비로운 내외적인 변화들에 대하여 이해되거나 논리적 증명이 가능해야 함을 뜻하기고 하고 2) 다시 교회의 전통속에 반드시 이어지고 있는 거룩한 하나님의 역사임이어야 함을 뜻하고 1) 성경은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증언으로 말씀을 통해서도 입증이 되어야 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확신은 무조건 믿으려 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무조건 우긴다고 확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보다 세뇌도 아니고 뭐가에 광적인 반응을 보이는 신비주의적임도 아니며 비이성적이고 무지성적인 무식함도 더더욱 아닌 것입니다.
결국 이 구원은 확신을 얻게 하는 신앙적인 체험 즉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이 있을때에야 비로서 서로 공유 가능하고, 공감 가능하고, 서로 울림이 될 수 있는 내 외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내외적인 현상을 보이는 진실로 거듭난 성도의 모습을 본다면 그 누구도 그에 대한 반론을 말하지 못하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그 무엇인가가 되는 것 입니다.
그 무엇인가는 바로 하나님의 역사, 은혜, 감동, 사랑이라 표현을 할 수 있습니다.
님은 믿음을 확신이라 하셨으니 제 말을 이해하실 듯도 한데요....물론 아멘이라 하신다면 더 할나위 없겠지만 말입니다.
허물.죄.는.회개.자기를부인하고.자기십자가를지고.예수님을쫓아가는거듭난믿음을가진자만용서가있어요!이말씀을듣는자와.댓글자들이하나도구원못받습니다!
주님께서 목숨받쳐세우시고
가르치신 칠성사를사도들이 완성한
성교회에 맞겨진
칠성사은총을 받기위해 가르치고 믿는정통성을
실행하는 가톨릭.성공회.정교회이며
그러나
개신교목사들은 칠성사에대해 숨기고
가르치지않고 있다!!
그들만의 사상.
을 갖고서 말씀을 믿게하나 비교를하면분명히 오류.왜곡.모순.편향적인 주장과 이론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님 . 그분 왔었음 아직도 계심 .나는 그렇게 생각해도 완전하지 못할수밖에 없는 먼지 하나이니 술이나 마시는 주정뱅이 . 잠이잘옴 , 현실에서 하지 못하는 글을 이딴데서 잘 싸지름 . 현실에는 직장인 나부랭이 거지꼴임 . 그래도 과거보다 나아진 직장 ... 또 할수 있는 일들이 많아진걸 감사라고 생각하고 사는중ㅈ임 . 예로 보자 , 니가 쓰레기 치우려고 12시간 일해서 쓰레기 치우는데만 하루를 다쏟고 씨고 먹고 자고의 시간이 반복이었는데 , 니 근로 시간이 6시간씩만 일하고 남은 시간에 니가 하고 싶었던 일 , 부가적 돈의 질서 채움의 시간 , 몸가꿈 여가 다 하는데 만족까진 아니라도 더 나음에 감사가 당연하지 않음 ?? 급여는 같으니까 재끼고 , ㅋㅋ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