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설쌤 덕분에 역사의 재미와 중요성을 뒤늦게 알아가는 40대 아저씨입니다. 거두절미하고, 드리고자함은 "손자병법"에 대해서 선생님께서 풀어주시면 어떨까하고 댓글 남겨봅니다. 검색해봐도 3년전 프로그램에 조금 나오신거 뿐이고, 유투브에서는 그저 책내용을 읽어주는 정도이니, 현대학적으로다가 귀에 쏙쏙 박히게 설쌤께서 말씀나눠주시면 너무 감사할것같습니다. 어디다가 말씀드려야될지몰라서 이 영상 댓글로 드립니다. 꾸벅.
#1) 홍범도에 대한 질문 제가 알고 있는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가르침을 받겠으니 .. 단, 편향은 사절하며 기록이나 사료 진실에 의거하여 안내바랍니다. 이 질문은 국내 역사학자분들에게 동등하게 질의하였습니다. 홍범도에 대하여 자세히 안내바랍니다….. 1. 육사교정 전시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홍범도·지청천·이회영·이범석·김좌진 등 다섯 사람의 흉상이 전시되어 있다. 육군사관학교라면 6.25전쟁의 영웅들의 흉상이 전시되어야 할 터인데, 문재인은 왜 6,25와는 관련도 없는 이분들의 흉상을 육군사관 학교에 전시해 놓고 사관생도들이 등하교 길에 거수경례를 하게 했던 것인가? 2. 봉오동 전투는 어떤 전투였나? 홍범도는 봉오동 전투의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봉오동 전투의 주인공은 최진동이었다. 봉오동 일대는 최진동의 구역이었고, 여러 자료에서 봉오동 전투의 사령관은 최진동이고 홍범도 는 편장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후 최진동은 친일로 변절했고 홍범도는 공산당의 길을 걸었기에 홍범도는 좌익세력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유명세를 펼 수 있었다. 위키백과에서는 봉오동 전투의 일본군 피해를 전사 157명, 200명 중상, 100명 경상이라고 밝히고 있다. 일본군 피해가 대략 460명 정도로 나타나고 있다. 이 숫자는 임정 군무부에서 발표한 숫자다. 그러나 봉오동 전투를 최초로 보도한 1920년의 독립신문에는 '적병 사상자 12명' 이었다. 그러나 임정 발표에서 '120명 섬멸'로 바뀌었다가 이틀 후에는 '적의 사망자 60명, 부상 50명'으로 발표했다가, 또다른 국민간도회의 호외에서는 다시 '150명 섬멸'로 바뀌었다. 전형적인 조센징의 고무줄 전과 발표였다. 이때 조선의 뻥튀기 독립군들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일본군과의 전투는 화적떼질과는 달랐다. 일본군에는 시스템이 있었다. 그들은 전사자를 꼼꼼이 기록하고 그 위패는 야스쿠니 신사에 봉안했다. 독립군은 도망 중이고 일본군은 추격 중에 우연히 조우 하여 벌어진 간단한 게릴라 전투라고 표현하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당시 일본군 추격대는 남양수비대 27명, 증파된 월강추격대 243명 해서 270명 정도가 전부였다. 위키백과에 나타난 일본군 피해 460명은 존재하지 않는 군대였다. 홍범도는 유령의 군대와 전투를 벌인 셈이었다. "당시 일본군 월강추격대의 지휘자는 야스카와지로 소좌였다. 야스카와지로는 '봉오동전투상보'라는 보고서를 남겼다. 여기에서는 '2등졸 호리이 시케구니 흉부 관통상 사망, 1등졸 가지우라 간지로와 응원경찰 한명 부상'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일본 경찰에서 조사하여 작성한 '복명서', 그리고 조선군사령관이 육군성에 보낸 전보 등, 여러 자료에서 일관적으로 일본군 사망자는 한 명이었다. 봉오동 전투는 '입'으로 떠벌이는 '뻥튀기'와 가로세로 교차 조사하여 기록하는 '시스템'과의 전쟁이었다.
드라마로만 봐서 몰랐는데 설쌤 감사함니다 ㅠㅠ 저 연개소문 좋아하구요 왜 천개소문이었는지 의문이 풀리네용! 안정복 기억할게용!!!
연개소문편 좀 더 길게 많이 다뤄주세요
역사가 재미있겠어요
안녕하세요.
설쌤 덕분에 역사의 재미와 중요성을 뒤늦게 알아가는 40대 아저씨입니다.
거두절미하고, 드리고자함은 "손자병법"에 대해서 선생님께서 풀어주시면 어떨까하고 댓글 남겨봅니다. 검색해봐도 3년전 프로그램에 조금 나오신거 뿐이고, 유투브에서는 그저 책내용을 읽어주는 정도이니, 현대학적으로다가 귀에 쏙쏙 박히게 설쌤께서 말씀나눠주시면 너무 감사할것같습니다. 어디다가 말씀드려야될지몰라서 이 영상 댓글로 드립니다. 꾸벅.
설샘...솔직히 김유신얘기에 나온 계백...계백얘기좀 더해주셨음했는데..
#1) 홍범도에 대한 질문 제가 알고 있는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가르침을 받겠으니 ..
단, 편향은 사절하며 기록이나 사료 진실에 의거하여 안내바랍니다.
이 질문은 국내 역사학자분들에게 동등하게 질의하였습니다.
홍범도에 대하여 자세히 안내바랍니다…..
1. 육사교정 전시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홍범도·지청천·이회영·이범석·김좌진 등 다섯 사람의 흉상이 전시되어 있다. 육군사관학교라면 6.25전쟁의 영웅들의 흉상이 전시되어야 할 터인데, 문재인은 왜 6,25와는 관련도 없는 이분들의 흉상을 육군사관 학교에 전시해 놓고 사관생도들이 등하교 길에 거수경례를 하게 했던 것인가?
2. 봉오동 전투는 어떤 전투였나?
홍범도는 봉오동 전투의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봉오동 전투의 주인공은 최진동이었다. 봉오동 일대는 최진동의 구역이었고, 여러 자료에서 봉오동 전투의 사령관은 최진동이고 홍범도 는 편장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후 최진동은 친일로 변절했고
홍범도는 공산당의 길을 걸었기에 홍범도는 좌익세력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유명세를 펼 수 있었다. 위키백과에서는 봉오동 전투의 일본군 피해를 전사 157명, 200명 중상, 100명 경상이라고 밝히고 있다.
일본군 피해가 대략 460명 정도로 나타나고 있다. 이 숫자는 임정 군무부에서 발표한 숫자다.
그러나 봉오동 전투를 최초로 보도한 1920년의 독립신문에는 '적병 사상자 12명' 이었다.
그러나 임정 발표에서 '120명 섬멸'로 바뀌었다가
이틀 후에는 '적의 사망자 60명, 부상 50명'으로 발표했다가,
또다른 국민간도회의 호외에서는 다시 '150명 섬멸'로 바뀌었다.
전형적인 조센징의 고무줄 전과 발표였다. 이때 조선의 뻥튀기 독립군들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일본군과의 전투는 화적떼질과는 달랐다.
일본군에는 시스템이 있었다. 그들은 전사자를 꼼꼼이 기록하고 그 위패는 야스쿠니 신사에 봉안했다.
독립군은 도망 중이고 일본군은 추격 중에 우연히 조우 하여 벌어진 간단한 게릴라 전투라고 표현하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당시 일본군 추격대는 남양수비대 27명, 증파된 월강추격대 243명 해서 270명 정도가 전부였다.
위키백과에 나타난 일본군 피해 460명은 존재하지 않는 군대였다. 홍범도는 유령의 군대와 전투를 벌인 셈이었다. "당시 일본군 월강추격대의 지휘자는 야스카와지로 소좌였다. 야스카와지로는 '봉오동전투상보'라는 보고서를 남겼다. 여기에서는 '2등졸 호리이 시케구니 흉부 관통상 사망, 1등졸 가지우라 간지로와 응원경찰 한명 부상'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일본 경찰에서 조사하여 작성한 '복명서', 그리고 조선군사령관이 육군성에 보낸 전보 등, 여러 자료에서 일관적으로 일본군 사망자는 한 명이었다.
봉오동 전투는 '입'으로 떠벌이는 '뻥튀기'와 가로세로 교차 조사하여 기록하는 '시스템'과의 전쟁이었다.
영류왕 없앤 연개소문(강경파 우두머리)
연남생,연남건,연남산 무능한 세아들😢😢
선생님 오늘 너무 충격적인 내용의 유툽 체널을 봤는데 이것이 왜 안 알려졌을까요 김좌진 홍범도 등 독립군들이 같은 민족을 죽이고 약탈하고 했다는데 이게 사실인지 너무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