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강] 창세기 16장 | 위대한 체험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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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10 фев 2025
  •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 성경통독 전문가 장춘권 목사
    홈페이지: ptnambu.org
    교재: wikidocs.net/8...
    신자와 비신자가 함께하는 성경공부 Bridge Talk: wikidocs.net/b...
    개요
    16장 강의 시작하겠다. 16장부터는 아브람이 하나님께 '의로 인정받은 믿음'을 갖게 된 이후의 삶이다. 쉬운 말로, 구원받은 이후의 삶이다.
    구원 받은 이후의 삶은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면, 일상으로 되돌아온다. 위대한 체험을 하면 삶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고 예상하기 쉽다. 하지만, 위대한 체험을 해도 삶은 여전히 일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일상이란 건 걷는 것과 같고, 위대한 체험은 뛰는 것과 같다. 항상 뛰면서 살 수 없는 것처럼 위대한 체험만 하면서 살 수 없다. 뛰면서 사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 아닌 것처럼 위대한 체험을 많이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얘기를 하면, 이렇게 질문하는 분이 있다. "하나님과 친밀하면, 기적이 일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말이다. 질문 자체가 오해와 잘못된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오해는 위대한 체험을 기적이라고 해석한 부분이다. 위대한 체험은 기적과 다르다. 기적은 흔히 신비한 일, 초자연적인 일을 말한다. 불치병이 낫는 것, 기도 응답을 받는 것 등 말이다. 위대한 체험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다. 죄의 각성, 심판의 각성, 회심 등을 말한다. 기적은 기독교에만 있는 게 아니다. 어느 종교나 그 종교를 믿어서 불치병을 고쳤다는 등의 간증이 있다. 기도 응답도 마찬가지다. 방언도 다른 종교에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죄의 각성, 심판의 각성, 회심 같은 건 다른 종교에는 없다. 기독교 고유한 체험이고 사건이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경험하게 되는 오묘한 섭리, 섬세한 인도, 예기치 않은 기쁨, 과거의 재해석, 인생의 반전 등도 기독교에만 있는 위대한 체험이다. 기적에 관해서는 다른 부분에서 더 다룰 것이다.
    잘못된 선입견이란, 하나님과 친밀하면 어떻게 될 것이라는 부분이다. 저 사람이랑 친해지면 이렇게 되겠지? 예상하는 경우가 있다. 인터넷에서 보면, 연예인이랑 친해지면 어떻게 될 것인지 상상하는 글이 있는 것 같다. 재벌2세랑 친해지면, 매일 근사한 식사를 하고 해외 여행을 다닐 거라는 상상. 스포츠 스타와 친해지면 기자들이 쫓아다니고 악플을 받을 것이라는 상상등 말이다. 얼마나 현실을 모르는 상상인가. 누구랑 친해지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건 일상이다. 일상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와 친해져도 행복할 수 없다.
    하나님과 친밀하면 기적을 많이 경험하게 될까? 아니다. 결국 일상으로 돌아온다. 하나님이 기적을 줄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성품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은 기적보다는 일상에서 위대한 체험을 주실 것입니다. 일상에서 위대한 체험을 하는 것은 나선계단 혹은 스프링에 비유할 수 있다. 위에서 보면 단순히 동그라미가 반복되는 것 같지만, 옆에서 보면 한층한층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일상을 반복하면서, 내면이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만큼 성장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일상의 질적 향상을 원하신다. 그리고 향상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시행착오를 거쳐야 한다.
    창세기 16장은 위대한 체험을 한 아브람이 일상으로 돌아와서 느낀 혼란을 보여준다. 그리고 시행착오도 나온다. 이것은 이전에 있었던 시행착오와 다르다. 같은 시행착오 같지만, 한단계 성장한 상태에서 겪은 시행착오이다. 질적으로 향상된 일상에서 일어난 시행착오라는 말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강의를 듣기 바란다.
    요절 1. 창세기 16:9
    9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배경 설명을 하겠다. 본문은 위대한 체험을 한 후 아브람이 어떻게 살았는지 보여준다. 아브람은 하갈을 첩으로 들여서 아들을 낳는다. 첩을 통해서 낳은 것이지만,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말씀과 일치한다. 아브람의 예상과 다르게 이 선택은 아브람의 삶을 혼돈으로 몰고갔다. 가정 불화가 일어났다. 첩 하갈이 아내 사래를 멸시했고, 사래는 하갈을 학대했다.
    우리나라 아침 드라마에서 볼 법한 진행이다. 이런 진행은 결론도 예상하기 쉽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진행되고 결말도 다르다. 하나님이 개입하셨기 때문이다. 주의할 점은,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불화하는 가정을 회복시키셨다" 이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면 안된다는 점이다. 길게 말하지 않겠지만, 이런 식의 성경해석 방법, 설교 방식이 구원계시를 가리는 방해꾼이 된다. 나름대로는 은혜롭게 설교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성경의 내면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이런 해석은 수박 속살을 맛보지 못하고, 수박 껍질을 설탕 찍어 먹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미 앞부분 개요 설명에서 답을 했다. 성경을 점이 아니라 선으로 보아야 한다. 본문은 아브람의 또다른 실수 사건이 아니다. 아브람이 구원계시를 더 깊이 알아가는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이 사건은 위대한 체험 이후에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겪는 혼란이라고 말했다. 위대한 일이 계속 될 줄 알았고, 기도만 하면 응답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아브람은 나름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고 했다. 그러면 하나님에 기적을 주실 줄 알았다. 결과는 엉망이었다. 뭐가 잘못되었을까?
    불필요한 상상은 제거하고 필요한 요소만 설명하겠다. 하나님은 아브람 가정에 해결책을 주셨다. 먼저, 하갈에게 명령하셨다. 여주인에게 돌아가고 "그 수하에 복종하라"라고 말이다.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이것은 질서에 복종하라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끝인가? 아니다. 이 다음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섬세한 성품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하갈에게 단순히 질서에 복종하라고 하신 게 아니다. 하갈이 마음으로 걱정하던 걸 응답해 주셨다. 하갈은 무엇보다 태아의 미래가 불안했던 것 같다. 하나님은 자식에 대한 걱정을 해소해 주셨다. 본문을 보자.
    창세기 16:9-10
    9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10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하나님은 하갈에게 질서에 복종하라고 명령하시고, 마음 속 근심을 해결해 주셨다. 전능하면서도 상냥한 하나님의 성품을 잘 기억해 두기 바란다. 이 중에서 요절을 9절로 택한 이유는 "그 수하에 복종하라"는 명령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보편적 진리를 담고 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하갈을 율법에 비유한다. 율법을 따르면 안된다는 가르침이다. 율법은 복음에 복종해야 한다. 갈라디아서를 보자
    갈라디아 4:21-24
    21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하고 싶은 말은 뭐냐면, 복음이 율법보다 상위법이라는 말이다. 법에도 높낮이가 있다. 높은 법이 있고, 낮은 법이 있다. 교통 신호가 빨간불이면 멈춰야하지만 교통경찰이 수신호하면 가도 된다. 교통경찰의 수신호가 상위법이기 때문이다. 이건 법을 어긴 게 아니라 법을 지킨 것이다. 이 부분은 다시 말하겠다. 다시 말하지만, 하갈에게 복종하라고 명령하신 건, 하갈이 비유하는 율법보다 상위법이 있다는 걸 알려주려는 의도이다. 이걸 알고 넘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요절 2. 창세기 16:13
    13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본문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언약의 주변인에 관한 기록이다. 언약의 주변인은 성경에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그들은 언약의 대상 그러니까 구원계시의 상속자에게 협조적이거나 적대적이다. 협조적인 사람은 구원계시의 전달과정에서 위기 상황이 오면 구원투수처럼 투입되기도 한다. 다말, 라합, 룻 등이 그 예이다. 적대적인 사람들은 위기를 가중시킨다. 에서, 이스마엘, 아말렉 족속 등이 그런 역할을 한다. 이들은 구원계시의 경계선에서 구원계시의 상속자와 상호작용한다. 그들은 선교 대상이면서 박해의 주체가 된다.
    그들에 관한 하나님의 관점은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겠다. 그들을 살펴주신다. 돌봐주신다는 말이다. 요즘 교인들을 보면, 교회 안다니는 사람을 적대시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은 교인들만ㄴ 돌보시고, 비교인은 안돌본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건 완전한 착각이다. 하갈은 요즘으로 치면 완전한 비교인은 아니다. 하지만, 비교인으로 된다고 볼 수 있다. 또 하나님은 미래를 아시니까 그걸 알고 계셨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하갈을 살피셨다.
    하나님이 비교인도 살피시지만 우선순위는 있다. 언약의 대상이 가장 우선이고, 언약에 포함된 사람이 그 다음이다. 이건 차별이 아니라 순서이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그 약속 안에 하갈도 포함되어 있다. 하갈은 그래서 복을 받았다.
    언약의 주변인들은 구약 성경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몇가지 예를 보자. 앞으로 창세기 38장에 나올 다말 같은 경우 성경 해석의 테스터 역할을 한다. 창세기 해석의 기말고사라고 보면 된다. 이건 창세기 38장에서 설명하겠다. 룻기에 나오는 룻은 모압족속이지만, 구원계시의 상속자가 된다. 이스라엘에 상속자가 없을 때 구원투수 역할을 한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께 기적을 체험한 수로보니게 여인은 어떠한가?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는 것을 자처했다. 귀신들린 딸이 치료되었다. 우선순위에서 밀린다고 해서 섭섭해하지 말자.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합당한 은혜를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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