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 따라서 낙타털옷 입은 자가 그 말씀을 보고 나름대로 믿어왔으되 세미한 음성으로 전하시는 참 하나님은 볼수 없었음이니 스스로 얼굴을 가려 보지 못함을 드러냈음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을 접할때 그 섬세한 것을 못 볼것 같으면 봤다 하지 말 것이며 만일 봤다 하는 자가 있다면 말마다 확증 해야 할 것이다 이와같이 까마귀가 날라다 주는 떡을 먹은 자가 어미이겠냐 아니면 그 날라다 주는 새가 새끼이겠냐 말이다
이 시점에서 엘리야는 모세처럼 정의감에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그의 인식 속에는 기적과 능력만 휘두르시는 하나님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오직 민족과국가를 위한 애국심에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칠천명의 변치않는 선지자를 언급하신 이유는 쉽게 말해서 ‘임마 너 혼자 잘난척 하지마라’. 이겁니다. 엘리야는 홀로 목숨걸고 싸워야 하는 심각한 고독과 두려움에 쌓여 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를 위로하기 위해 들려주신 세미한 음성은 하나님과의 1대1 만남입니다. 모세의 타지 않는 덤불. 여호수아의 군대장관 천사, 야곱의 얍복강, 이사야의 숯불, 요나의 고래뱃속이 모두가 공의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으로만 나타나는알고 있던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만난 사건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의 시각에서 ‘온전한 하나님’ 을 만난 것입니다. 각자의 삶과 생각 성향 경험이 달랐기 때문에 다른 모양으로 만난 것이지요. 우리 각자에게도 하나님과의 1대1 만남이 필요합니다. ‘세미한 음성’ 은 히브리 원어로도 ‘세미한 음성’ 입니다. דַּק קוֹל 다른 번역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따뜻한 음성으로 말씀하실때 우리는 치료받고 위로받고 새 힘을 얻습니다.
아닙니다. 원래 엘리야는 정신적으로 상당히 불안정한 사람으로 조울증 증세에다가 스트레스에 굉장히 취약했죠. 증거로 갈멜산 사건에서도 엘리야는 말은 강인하게 했지만, 비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여러번 사환에게 비의 징조에 대해 묻고 얼굴을 땅에 박은 채 비를 간구했습니다. 말과는 달리 본인은 엄청난 스트레스와 긴장 상태였던 거죠. 갈멜산 사건으로 엘리야가 승리한 줄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갈멜산 사건은 오히려 엘리야에게 목숨이 걸린 위기로 작용했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에게 분노를 사서 목숨을 지키기 위해 북 이스라엘에서 남 유다로 계속 도망쳤어요. 엘리야 본인은 지금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하나님은 도망치는 엘리야를 도와주지 않았어요. 원래 정신적으로 취약했던 엘리야는 살기 위한 도피 과정에서 극도로 정신적인 스트레스에 정신이 붕괴하기 직전 상태여서 하나님은 강력하게 말을 할 수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세밀한 음성으로 말씀하신 겁니다. 엘리야가 정신적으로 너무 취약한 상태에서 하나님이 강하게 말했다면 엘리야는 속에 있는 분노와 좌절과 스트레스가 터져나왔을 겁니다. 관념에 맞추어서 사람과 사건을 해석하면 오용하게 됩니다. 객관적으로 열왕기서를 읽어보세요. 7천명의 사건도 '너 잘난체 하지 마' 이런 거 아닙니다. 남 유다 출신 엘리야는 혼자서 북이스라엘의 아합/이세벨과 처절하게 싸웠습니다. 물론 북 이스라엘 사람들도 남 유다 출신을 좋아하지도 않았구요. 배척받았습니다. 그렇게 혼자서 처절하게 싸우며 나 혼자 이게 뭐냐고 좌절하게 되는 엘리야에게 너 말고 7천명이 더 있다. 이들도 너처럼 싸우고 있으니 혼자라는 생각은 버려라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에 들고 있는 돌을 두려워 해서 가데스바네아에서 바위에다가 지팡이로 혈기를 2번 부렸죠.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에 들고 있는 칼을 두려워 해서 하나님께 더 이상 못해먹겠다고 두려움을 2번 표현합니다. 성경적 관점에서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의 정수들 입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양 옆에 모세와 엘리야가 서 있었죠. 하나님 입장에서는 모세와 엘리야가 실패해야만 합니다. 율법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가르치기 위함이죠. 모세와 엘리야가 실패하고 낙담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혼내셨지만, 모세는 부활해서 천국으로 올라오게 하시고 엘리야는 변화되어 천국으로 올라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이 두려움을 주는 음성이 아니였을 것입니다. 진짜 부드럽고 세밀한 음성이였을 것입니다. 특히, 겁쟁이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왜 나를 믿지 않았냐며 다그치고 호통을 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엘리야의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부드러운 사랑입니다. 율법의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것이죠.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서 죄책감에 해방되고 이제 율법의 고아에서 복음의 아들로 장성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불말과 불병거를 보내서 내 아들아 이제 올라와라 하신거죠. 천국 백성 시민으로서의 큰 훈련을 다 마쳤기 때문이죠. 모세 입장에서도 가나안땅 원주민이 원수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최고의 원수죠. 그래서 예수님도 너희들의 원수는 가족이라고 하잖아요ㅋ 제 경험담이지만,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경험하면 평생 뇌리에 각인되어 기억에 남습니다. 두려움이 엄습할 때에 어둠속에서 한 줄기의 빛이 됩니다. 그 이후부터는 원수들을 무서워하지 않고 원수들을 불쌍히 여기게 되죠. 복음의 시대에 아직도 성장하기를 지양하고 아동수준에 머무는 자녀들은 이제는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불구덩이에 던져 넣으십니다.
오와 마지막 적용 묵상이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멘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
따라서 낙타털옷 입은 자가 그 말씀을 보고 나름대로 믿어왔으되 세미한 음성으로 전하시는 참 하나님은 볼수 없었음이니 스스로 얼굴을 가려 보지 못함을 드러냈음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을 접할때 그 섬세한 것을 못 볼것 같으면 봤다 하지 말 것이며 만일 봤다 하는 자가 있다면 말마다 확증 해야 할 것이다
이와같이 까마귀가 날라다 주는 떡을 먹은 자가 어미이겠냐 아니면 그 날라다 주는 새가 새끼이겠냐 말이다
이 시점에서 엘리야는 모세처럼 정의감에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그의 인식 속에는 기적과 능력만 휘두르시는 하나님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오직 민족과국가를 위한 애국심에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칠천명의 변치않는 선지자를 언급하신 이유는 쉽게 말해서 ‘임마 너 혼자 잘난척 하지마라’. 이겁니다. 엘리야는 홀로 목숨걸고 싸워야 하는 심각한 고독과 두려움에 쌓여 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를 위로하기 위해 들려주신 세미한 음성은 하나님과의 1대1 만남입니다. 모세의 타지 않는 덤불. 여호수아의 군대장관 천사, 야곱의 얍복강, 이사야의 숯불, 요나의 고래뱃속이 모두가 공의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으로만 나타나는알고 있던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만난 사건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의 시각에서 ‘온전한 하나님’ 을 만난 것입니다. 각자의 삶과 생각 성향 경험이 달랐기 때문에 다른 모양으로 만난 것이지요.
우리 각자에게도 하나님과의 1대1 만남이 필요합니다. ‘세미한 음성’ 은 히브리 원어로도 ‘세미한 음성’ 입니다. דַּק קוֹל
다른 번역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따뜻한 음성으로 말씀하실때 우리는 치료받고 위로받고 새 힘을 얻습니다.
아닙니다.
원래 엘리야는 정신적으로 상당히 불안정한 사람으로 조울증 증세에다가 스트레스에 굉장히 취약했죠.
증거로 갈멜산 사건에서도 엘리야는 말은 강인하게 했지만, 비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여러번 사환에게 비의 징조에 대해 묻고 얼굴을 땅에 박은 채 비를 간구했습니다. 말과는 달리 본인은 엄청난 스트레스와 긴장 상태였던 거죠.
갈멜산 사건으로 엘리야가 승리한 줄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갈멜산 사건은 오히려 엘리야에게 목숨이 걸린 위기로 작용했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에게 분노를 사서 목숨을 지키기 위해 북 이스라엘에서 남 유다로 계속 도망쳤어요.
엘리야 본인은 지금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하나님은 도망치는 엘리야를 도와주지 않았어요.
원래 정신적으로 취약했던 엘리야는 살기 위한 도피 과정에서 극도로 정신적인 스트레스에 정신이 붕괴하기 직전 상태여서 하나님은 강력하게 말을 할 수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세밀한 음성으로 말씀하신 겁니다.
엘리야가 정신적으로 너무 취약한 상태에서 하나님이 강하게 말했다면 엘리야는 속에 있는 분노와 좌절과 스트레스가 터져나왔을 겁니다.
관념에 맞추어서 사람과 사건을 해석하면 오용하게 됩니다.
객관적으로 열왕기서를 읽어보세요.
7천명의 사건도 '너 잘난체 하지 마' 이런 거 아닙니다. 남 유다 출신 엘리야는 혼자서 북이스라엘의 아합/이세벨과 처절하게 싸웠습니다. 물론 북 이스라엘 사람들도 남 유다 출신을 좋아하지도 않았구요. 배척받았습니다.
그렇게 혼자서 처절하게 싸우며 나 혼자 이게 뭐냐고 좌절하게 되는 엘리야에게 너 말고 7천명이 더 있다. 이들도 너처럼 싸우고 있으니 혼자라는 생각은 버려라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에 들고 있는 돌을 두려워 해서
가데스바네아에서 바위에다가 지팡이로 혈기를 2번 부렸죠.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에 들고 있는 칼을 두려워 해서
하나님께 더 이상 못해먹겠다고 두려움을 2번 표현합니다.
성경적 관점에서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의 정수들 입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양 옆에 모세와 엘리야가 서 있었죠.
하나님 입장에서는 모세와 엘리야가 실패해야만 합니다.
율법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가르치기 위함이죠.
모세와 엘리야가 실패하고 낙담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혼내셨지만,
모세는 부활해서 천국으로 올라오게 하시고
엘리야는 변화되어 천국으로 올라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이 두려움을 주는 음성이 아니였을 것입니다.
진짜 부드럽고 세밀한 음성이였을 것입니다.
특히, 겁쟁이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왜 나를 믿지 않았냐며
다그치고 호통을 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엘리야의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부드러운 사랑입니다. 율법의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것이죠.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서 죄책감에 해방되고
이제 율법의 고아에서 복음의 아들로 장성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불말과 불병거를 보내서
내 아들아 이제 올라와라 하신거죠.
천국 백성 시민으로서의 큰 훈련을 다 마쳤기 때문이죠.
모세 입장에서도 가나안땅 원주민이 원수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최고의 원수죠.
그래서 예수님도 너희들의 원수는 가족이라고 하잖아요ㅋ
제 경험담이지만,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경험하면
평생 뇌리에 각인되어 기억에 남습니다.
두려움이 엄습할 때에 어둠속에서 한 줄기의 빛이 됩니다.
그 이후부터는 원수들을 무서워하지 않고
원수들을 불쌍히 여기게 되죠.
복음의 시대에 아직도 성장하기를 지양하고
아동수준에 머무는 자녀들은
이제는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불구덩이에 던져 넣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