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왕조는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이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만주지역에 살던 조선인들은 이들을 마적단이라고 부름)은 중국공산당 산하의 빨치산 세력인 동북항일연군이었다. 한국 독립군과 중국 호로군의 연합체로서 이들중 상당수 한국인은 중국 국적을 취득한 공산주의자들이었으며 이들 중국공산당과 연합한 광복군은 339명 이었다. 반면에 2차대전 말기 조선인 일본군 지원자는 80만 명이 넘었고, 입대 경쟁률이 62:1을 넘었다.당시 조선인들의 일본에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 알수있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왕조는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이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만주지역에 살던 조선인들은 이들을 마적단이라고 부름)은 중국공산당 산하의 빨치산 세력인 동북항일연군이었다. 한국 독립군과 중국 호로군의 연합체로서 이들중 상당수 한국인은 중국 국적을 취득한 공산주의자들이었으며 이들 중국공산당과 연합한 광복군은 339명 이었다. 반면에 2차대전 말기 조선인 일본군 지원자는 80만 명이 넘었고, 입대 경쟁률이 62:1을 넘었다.당시 조선인들의 일본에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 알수있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왕조는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이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만주지역에 살던 조선인들은 이들을 마적단이라고 부름)은 중국공산당 산하의 빨치산 세력인 동북항일연군이었다. 한국 독립군과 중국 호로군의 연합체로서 이들중 상당수 한국인은 중국 국적을 취득한 공산주의자들이었으며 이들 중국공산당과 연합한 광복군은 339명 이었다. 반면에 2차대전 말기 조선인 일본군 지원자는 80만 명이 넘었고, 입대 경쟁률이 62:1을 넘었다.당시 조선인들의 일본에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 알수있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user-wy1pv7sk2p 원래 팩트는 불편한법이지. 이토 히로부미는 흔히 일본에선 좌익으로 유일하게 한일병합 반대하는 인물이였단다. 이토가 일본 메이지유신에 중요한인물인데 총리까지했던 엄청난 정치거물이 부페에 찌든 조선에와서 통감까지하면서 한일합병 반대했는데? 물론 자기정치력 넓히려고한건 있겠지. 일본 근대화성공시킨 인물이 조선까지 근대화 성공시켰으면 그것만큼 역사에 이름 남기는데 좋은게없었을테니. 그리고 팩트는 이토죽자마자 일본 우익들이 한일병합 해버린건 팩트다. 역사는 양쪽입장에서 바야지 너처럼 더듬어 만진당이 선동일으키는 반일감정으로 무조껀 일본을 까는건 그냥 개돼지랑 다를게 없지 ㅉㅉ
ㅈㄹ도 풍년이네 친한파이자 조선의 식민지를 오히려 반대했던 이토호 히로부미를 안중근이 살해하는 바람에 그 동안 히로부미 때문에 기를 펴지 못했던 일본의 군부세력이 정계를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고 훗날 안중근 아들인 안준생이 히로부미 아들에게 직접 사과까지 하는 일이 있을 정도로 안중근이 ㅂㅅ짓을 한건데 아직도 영웅 취급하는걸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생각'이란걸 모르는 낮은 국민성의 소유자들인지 잘 알 수 있는 대목ㅉㅉ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똑바로 하랬는데 누가 뭐라해도 안중근은 한일합방의 일등공신이었고 이토히로부미는 죽기 직전까지 한일합방 반대론자였지만 오로지 안중근 덕분에 너무나 쉽게 합방이 이루어지고 말았습니다 물론 이토히로부미는 일본의 재정적 문제로 합방을 거부한 것이지만 어쨌거나 조선이 끝까지 독립을 지키려고 했다면 이런 이토히로부미에게 힘을 실어주거나 전략적 연대를 하는게 맞지만 안중근은 한중일 3국의 평화적 합방을 주장했던 것이기에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이토히로부미를 살해한 사건입니다 안중근은 처음부터 끝까지 조선독립을 주장했던 적이 없고 소시적에 고향 황해도에서 자비로 만든 의병을 거느리고 일본군과의 합동작전으로 동학군을 토벌했습니다 대단히 친일적인 정서의 소유자입니다 만일 안중근이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하지 않았다면 조선은 최소한 이토히로부미가 자연사할때까지 또는 1918년 일본이 1차대전 승전국이 되면서 러일전쟁 이후 누적된 재정적자를 모두 해소할 때까지는 합방이 연기되던가 아니면 2차대전 종전까지 친일정권이 유지되는 선에서 명목상의 독립국을 유지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본은 2차대전 종전까지 한국과 대만을 제외하고는 어떤 공식적인 식민지도 가진 적이 없습니다 그나마 대만은 1949년까지는 국가가 아니라 중국의 영토일부였고 한 국가로서 식민지가 된 것은 한국이 유일한 경우인데 이게다 안중근 덕분에 그런 것입니다 일본은 애당초 대제국을 거느리기에는 걸맞지 않은 소국이었고 겨우 한국보다 1.5배 크기의 영토에 2배정도의 인구로는 대규모 식민지를 거느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거기다가 농사짓기에는 땅이 너무 척박해서 항상 쌀부족국가여서 대규모 군대를 운영하는 데는 군량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항상 조선쌀을 수입하는데 급급했습니다 중국은 농토가 비약하고 넓지만 의외로 쌀농사가 주업이 아니고 밀가루로 된 만두나 면 돼지고기를 주식으로 많이 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애당초 만주국을 건설할때에도 일본인들의 대거 이주를 권유했지만 의외로 호응이 적자 조선인들을 온갖 혜택을 주고 대거이주시켰고 중일전쟁을 일으켰지만 중국이 질질 끌며 지연전을 벌이자 국토의 3분의 1정도만 점령한 후 왕정위 친일괴뢰정권을 일으켰습니다 이상태로 동남아각국에 쳐들어가 서구열강의 군대를 몰아내고 현지인들의 지지를 얻어 명목상 독립을 주고 괴뢰정부를 통해 간접통치를 했는데 막상 일본에게 협조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베트남의 경우 프랑스 군대를 몰아내고 베트남 황제를 복위시키는 과정에서 왕정복고파와 공화파 공산당 등 극심한 갈등을 유발했는데요 정작 일본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모두가 반일을 들고 나왔습니다 우리가 잘아는 응오딘 디엠(남베트남 독립후 대통령을 지내다가 군부세력에게 암살당함)은 불란서(프랑스) 식민지 시절 철저히 친불파에다가 불교국가 베트남에서 프랑스 유학을 다녀오고 프랑스 국교 카톨릭의 독실한 신자였습니다 이분은 이승만 대통령 시절 한국을 두번인가 방문했는데 그때마다 이승만의 정적이자 독실한 카톨릭이었던 장면 부통령을 만나 독실한 우정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이 고딘디엠은 일제시기 베트남에서 프랑스가 부여한 북부 모지역의 성장(省長,한국의 도지사)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철저한 반일운동을 했습니다 심지어 태국의 경우는 일본이 만든 대동아회의(오늘날 apec 같은) 의 의장격 역할을 맡은 나라였지만 일본총리가 소집한 대동아회의 때마다 태국총리는 한번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 동남아 국가들이 일본으로부터 막대한 원조를 받으면서도 그런 반일적 자세를 보였지만 당시 미국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일본으로서는 이들 국가들과 자중지란을 일으킬 수가 없어서 그냥 넘어갔습니다 어쨌거나 이런 분위기를 감안하면 안중근의 이토암살은 한일합방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입니다 그때까지 찬반양론이던 일본인들에게 혐한 분위기를 일으켜서 합방은 쓰나미처럼 이루어졌다 더불어 이를 노린 일본 흑룡회가 안중근에게 자금지원을 했다는 설에 대해서도 언젠가는 흑백이 밝혀지리라 생각합니다 당시 흑룡회는 일진회의 한일합방 청원운동에도 배후에서 관여하면서 자금지원을 했습니다
이분 역사를 아시네용 호밀밭에 우원재 체널에 안중근 편을 꼭 보시길 권합니다 안중근 의사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던 인물은 아니라는 점 안중근 의사는 철저히 양반계급을 위해 움직인 사람이고 일반 백성은 안중에도 없던 사람입니다 자국민을 학살하기도 한 인물입니다 제대로된 역사 을 알아갔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왕조는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이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만주지역에 살던 조선인들은 이들을 마적단이라고 부름)은 중국공산당 산하의 빨치산 세력인 동북항일연군이었다. 한국 독립군과 중국 호로군의 연합체로서 이들중 상당수 한국인은 중국 국적을 취득한 공산주의자들이었으며 이들 중국공산당과 연합한 광복군은 339명 이었다. 반면에 2차대전 말기 조선인 일본군 지원자는 80만 명이 넘었고, 입대 경쟁률이 62:1을 넘었다.당시 조선인들의 일본에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 알수있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강휘찬 / 안중근 의사님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셨습니다. (당시로서는 천주교) 서양 선교사로부터 교리는 물론 영어, 불어 등도 공부를 열심히 하신 분으로서 사격수로서도 대단한 사수였습니다. 안중근 의사님 정도라면 그분의 종교가 불교든 무교든 관계없이 저처럼 의연하게 행동하셨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docteursade2 나는 무종교인 인이지만 현재 이곳에서 천국에 살만큼 현세에 만족하며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중근의사님처럼 과감한 결심을 가지려고 하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정신세게를 이루어야 가능한일입니다. 그런면에서 존경을 하고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 아님. 대한의군참모중장 임. 안중근 장군도 재판 당시 나는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며 나를 군인 신분으로 포로 대우 해달라고 했음. 물론 일본이 무시하고 개인의 행위로 치부함. 의사라하는 뜻 자체가 나쁜의미를 담고 있진 않지만 의사라하면 개인의 행위로 비춰질 수 있어 장군이라 불러야 함
진심으로 존경하고 존경합니다. 고문 앞에서는 애국자가 없다고 했는데, 어찌 끝까지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는지... 그런가 하면 일제강점기때 일본 순사들보다 더 잔인했던 고문 조선 순사 마쓰우라 히로(노덕술)은 독립군들 고문 전문이였고 악랄하기가 얼마나 잔인한지 여기에 적고 싶지 않을 정도. 그런 자가 일사천리로 승진을 했고 해방되어서는 우여곡절끝에 헌병 중령까지 지냈습니다. 일제때 악랄했던 일본 순사 노덕술은 해방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처벌은 커녕 훈장을 받았다. 그의 훈장은 화랑무공훈장 2개, 충무무공훈장 1개... 받았다. 언제 이런 엉망 잘못된 역사가 고쳐질지 걱정입니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왕조는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이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만주지역에 살던 조선인들은 이들을 마적단이라고 부름)은 중국공산당 산하의 빨치산 세력인 동북항일연군이었다. 한국 독립군과 중국 호로군의 연합체로서 이들중 상당수 한국인은 중국 국적을 취득한 공산주의자들이었으며 이들 중국공산당과 연합한 광복군은 339명 이었다. 반면에 2차대전 말기 조선인 일본군 지원자는 80만 명이 넘었고, 입대 경쟁률이 62:1을 넘었다.당시 조선인들의 일본에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 알수있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역시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자신과 나라를 위하여 최고의 인생을 살다가신 학문을 배운 지식인답게 용기있는 호연지기의 삶을 살다 가신 분이시구나!!! 감사드립니다. 자기정체감이 바른 분별력이 있는 판단력을 쓰신 살해당하셨지만 안중근의사님의 정신은 지금도 우리 대한민국속에 살아계시다.
그저 고개만 숙여질만한 위인이자,
나라의 영웅 중 한분..
한국 위인들 수준 ㅋㅋㅋㅋ 일본인 많이죽이고 총쏘면 위인이노 ㅉ
@@yourmother_isdead 저능아임?? 총쏴서 일본인 죽였다고 위인이 아니라,
고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목숨과 신념을 걸고 희생하셨으니 위인이라 칭할만 하다는거지~
총질한번에영웅된 안중근 사람토막살해후 영웅된킬구
이슬람도. 이정돈아닑건디
테러리스트
이슬람은 12살어린애도 의사되더라.
몸에퐄탄조끼두르고 미국대사관미대통령 등등.
안중근은 그에비하면
고맙습니다
존경합니다
영원히 기억 합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안중근의사님 고귀한 희생으로 오늘의 우리가 있음을 잊지않겠습니다 부디 천국에서 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이토히로부미는 어떤 인물이였나요? 정말 조선을 식민지화 시키려는 인물이였나요? 먼저 공부하시고, 안중근을 존경하시길바랍니다.
이토가 한반도를 식민지화
할려고 한 사실은 전국민이 아는데
무슨 공부타령 입니까?@@sang-i3m
위대한 조상님 안중근의사 ㆍ 우리 한민족
이 자랑스러운 것은 안중근 의사같은 분을
조상으로 두었기 때문입니다 ㅡ감사합니다 ㅡ 민족에 영웅 이시어ᆢ
마지막 순간까지도 당당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존경스런 분께 풍족하고 안전한 곳에 다시 태어나 좋으신 부모님밑에서 많이많이 누리는 그런 행복한 삶도 꼭 한번 더 주어지기를..
죽음 앞에서 초연한 안중근 의사 정말 대단하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우린 배워야해
눈물난다.잊지말자
마지막 까지 책을 읽는 것을 보니 정말 자신의 운명을 받아드렸구나
하늘에선 부디 편히 쉬십시요.
치하포서스즈키상을 토막살해한 토막아티스트킬구 일본순경에잡혀 콩밥무고독립투사됨.
후에 장개석이한티잘보일려고 윤봉길꼬드겨테러일으킴.장개석이가 잘했다고칭찬하며 돈줌. 장개석이마누라 보ㅃ해주고돈받음.
ㅋ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왕조는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이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만주지역에 살던 조선인들은 이들을 마적단이라고 부름)은 중국공산당 산하의 빨치산 세력인 동북항일연군이었다.
한국 독립군과 중국 호로군의 연합체로서 이들중 상당수 한국인은 중국 국적을 취득한 공산주의자들이었으며 이들 중국공산당과 연합한 광복군은 339명 이었다.
반면에 2차대전 말기 조선인 일본군 지원자는 80만 명이 넘었고, 입대 경쟁률이 62:1을 넘었다.당시 조선인들의 일본에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 알수있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안중근은 친일이었다.이토를 정치적 적으로 본거뿐
@@seromekim7798 압사충 세월충하는거보면 답나오자나.ㅋ
편히 쉴수 있겠노. 그 후에 유족들은 ㅈ되부렀는데ㅋ
고맙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왕조는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이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만주지역에 살던 조선인들은 이들을 마적단이라고 부름)은 중국공산당 산하의 빨치산 세력인 동북항일연군이었다.
한국 독립군과 중국 호로군의 연합체로서 이들중 상당수 한국인은 중국 국적을 취득한 공산주의자들이었으며 이들 중국공산당과 연합한 광복군은 339명 이었다.
반면에 2차대전 말기 조선인 일본군 지원자는 80만 명이 넘었고, 입대 경쟁률이 62:1을 넘었다.당시 조선인들의 일본에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 알수있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안중근은 친일이었다.이토를 정치적 적으로 본거뿐
안중근은 살인마 테러리스트다
이토 히로부미는 온건파의 수장이었다
@@seromekim7798 그만해ㅋㅋ 니 조상들 노예인거 알겠으니까
근데 이토 히로부미가 온건파였고
다른사람들은 조선인들 다죽이고 일본인을 이주시키자고 하던상황이라
결과적으로 식민지화가 앞당겨짐
저의 조상님이 안중근의사이신데 저도 커서 꼭 저런 멋진 사람이되고싶습니다
안중근 의사님 대한민국,대한제국을 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안중근 의사님을 평생 기억하겠습니다.
안중근의사님은 정말 멋진 분입니다..감사드립니다..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희가 독립된 대한민국에 살고있습니다.
부디 행복하소서~~
정말 안중근 의사님 정말 감사합니다!그 뜻을 교훈으로 여겨 인생을 열심이 살겠 습니다!정말 감사합니다!
최고의 대한민국인.
존경합니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왕조는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이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만주지역에 살던 조선인들은 이들을 마적단이라고 부름)은 중국공산당 산하의 빨치산 세력인 동북항일연군이었다.
한국 독립군과 중국 호로군의 연합체로서 이들중 상당수 한국인은 중국 국적을 취득한 공산주의자들이었으며 이들 중국공산당과 연합한 광복군은 339명 이었다.
반면에 2차대전 말기 조선인 일본군 지원자는 80만 명이 넘었고, 입대 경쟁률이 62:1을 넘었다.당시 조선인들의 일본에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 알수있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안중근은 친일이었다.이토를 정치적 적으로 본거뿐
@@seromekim7798 우쭈쭈 불펌해온 글 어찌저찌 모아서 복붙하고 다니느라 고생이 많다 힘내
@@user-wy1pv7sk2p 원래 팩트는 불편한법이지. 이토 히로부미는 흔히 일본에선 좌익으로 유일하게 한일병합 반대하는 인물이였단다. 이토가 일본 메이지유신에 중요한인물인데 총리까지했던 엄청난 정치거물이 부페에 찌든 조선에와서 통감까지하면서 한일합병 반대했는데? 물론 자기정치력 넓히려고한건 있겠지. 일본 근대화성공시킨 인물이 조선까지 근대화 성공시켰으면 그것만큼 역사에 이름 남기는데 좋은게없었을테니.
그리고 팩트는 이토죽자마자 일본 우익들이 한일병합 해버린건 팩트다. 역사는 양쪽입장에서 바야지 너처럼 더듬어 만진당이 선동일으키는 반일감정으로 무조껀 일본을 까는건 그냥 개돼지랑 다를게 없지 ㅉㅉ
안중근 의사를 있게한 어머니도
정말 인품이 남다르셨다
우리민족의 영웅 일제36년이 치욕스러웠지만 安義士때문에 우리민족이 자긍심을 가질수있는 이유
천국 가셔서 말씀하실듯..... 천국에도 이 책을 볼 수 있네. 빨리 와도 됐었어~
천국에서 영원히!
대단하신분....존경하고 존경합니다
안중근 의사님 잊지 않겠습니다 😊😊
안중근 의사님은 진정한 우리 민족의 기상을 보여주신 대단한 분이십니다. 감히 흉내도 낼 수 없는 의연한 모습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고맙습니다.
안중근의사는 대한민국에 역사에 길히남을 애국자이시며 일제에 맞서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고 이또오 히로부미라는 거물급 인사를 제거하고도 당당하게 일제에 맞서 대한민국에 후손들에게 많은 교훈을 남기신 분으로 안중근의사 같은 분이계셨기에 지금에 대한민국이 존재한다
ㅈㄹ도 풍년이네 친한파이자 조선의 식민지를 오히려 반대했던 이토호 히로부미를 안중근이 살해하는 바람에 그 동안 히로부미 때문에 기를 펴지 못했던 일본의 군부세력이 정계를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고 훗날 안중근 아들인 안준생이 히로부미 아들에게 직접 사과까지 하는 일이 있을 정도로 안중근이 ㅂㅅ짓을 한건데 아직도 영웅 취급하는걸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생각'이란걸 모르는 낮은 국민성의 소유자들인지 잘 알 수 있는 대목ㅉㅉ
@@범화-z9g 아저씨 일본에가서살어 대한민국땅에서 🐕👈 소리까지 말고 이 친일파야👈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똑바로 하랬는데 누가 뭐라해도 안중근은 한일합방의 일등공신이었고 이토히로부미는 죽기 직전까지 한일합방 반대론자였지만 오로지 안중근 덕분에 너무나 쉽게 합방이 이루어지고 말았습니다
물론 이토히로부미는 일본의 재정적 문제로 합방을 거부한 것이지만 어쨌거나 조선이 끝까지 독립을 지키려고 했다면 이런 이토히로부미에게 힘을 실어주거나 전략적 연대를 하는게 맞지만 안중근은 한중일 3국의 평화적 합방을 주장했던 것이기에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이토히로부미를 살해한 사건입니다 안중근은 처음부터 끝까지 조선독립을 주장했던 적이 없고 소시적에 고향 황해도에서 자비로 만든 의병을 거느리고 일본군과의 합동작전으로 동학군을 토벌했습니다 대단히 친일적인 정서의 소유자입니다 만일 안중근이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하지 않았다면 조선은 최소한 이토히로부미가 자연사할때까지 또는 1918년 일본이 1차대전 승전국이 되면서 러일전쟁 이후 누적된 재정적자를 모두 해소할 때까지는 합방이 연기되던가
아니면 2차대전 종전까지 친일정권이 유지되는 선에서 명목상의 독립국을 유지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본은 2차대전 종전까지 한국과 대만을 제외하고는 어떤 공식적인 식민지도 가진 적이 없습니다 그나마 대만은 1949년까지는 국가가 아니라 중국의 영토일부였고 한 국가로서 식민지가 된 것은 한국이 유일한 경우인데 이게다 안중근 덕분에 그런 것입니다
일본은 애당초 대제국을 거느리기에는 걸맞지 않은 소국이었고 겨우 한국보다 1.5배 크기의 영토에 2배정도의 인구로는 대규모 식민지를 거느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거기다가 농사짓기에는 땅이 너무 척박해서 항상 쌀부족국가여서 대규모 군대를 운영하는 데는 군량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항상 조선쌀을 수입하는데 급급했습니다 중국은 농토가 비약하고 넓지만 의외로 쌀농사가 주업이 아니고 밀가루로 된 만두나 면 돼지고기를 주식으로 많이 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애당초 만주국을 건설할때에도 일본인들의 대거 이주를 권유했지만 의외로 호응이 적자 조선인들을 온갖 혜택을 주고 대거이주시켰고 중일전쟁을 일으켰지만 중국이 질질 끌며 지연전을 벌이자 국토의 3분의 1정도만 점령한 후 왕정위 친일괴뢰정권을 일으켰습니다 이상태로 동남아각국에 쳐들어가 서구열강의 군대를 몰아내고 현지인들의 지지를 얻어 명목상 독립을 주고 괴뢰정부를 통해 간접통치를 했는데 막상 일본에게 협조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베트남의 경우 프랑스 군대를 몰아내고 베트남 황제를 복위시키는 과정에서 왕정복고파와 공화파 공산당 등 극심한 갈등을 유발했는데요 정작 일본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모두가 반일을 들고 나왔습니다
우리가 잘아는 응오딘 디엠(남베트남 독립후 대통령을 지내다가 군부세력에게 암살당함)은 불란서(프랑스) 식민지 시절 철저히 친불파에다가 불교국가 베트남에서 프랑스 유학을 다녀오고 프랑스 국교 카톨릭의 독실한 신자였습니다 이분은 이승만 대통령 시절 한국을 두번인가 방문했는데 그때마다 이승만의 정적이자 독실한 카톨릭이었던 장면 부통령을 만나 독실한 우정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이 고딘디엠은 일제시기 베트남에서 프랑스가 부여한 북부 모지역의 성장(省長,한국의 도지사)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철저한 반일운동을 했습니다 심지어 태국의 경우는 일본이 만든 대동아회의(오늘날 apec 같은)
의 의장격 역할을 맡은 나라였지만 일본총리가 소집한 대동아회의 때마다 태국총리는 한번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 동남아 국가들이 일본으로부터 막대한 원조를 받으면서도 그런 반일적 자세를 보였지만 당시 미국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일본으로서는 이들 국가들과 자중지란을 일으킬 수가 없어서 그냥 넘어갔습니다
어쨌거나 이런 분위기를 감안하면 안중근의 이토암살은 한일합방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입니다 그때까지 찬반양론이던 일본인들에게 혐한 분위기를 일으켜서 합방은 쓰나미처럼 이루어졌다 더불어 이를 노린 일본 흑룡회가 안중근에게 자금지원을 했다는 설에 대해서도 언젠가는 흑백이 밝혀지리라 생각합니다 당시 흑룡회는 일진회의 한일합방 청원운동에도 배후에서 관여하면서 자금지원을 했습니다
이분 역사를 아시네용
호밀밭에 우원재 체널에 안중근 편을 꼭 보시길 권합니다
안중근 의사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던 인물은 아니라는 점
안중근 의사는 철저히 양반계급을 위해 움직인 사람이고
일반 백성은 안중에도 없던 사람입니다
자국민을 학살하기도 한 인물입니다
제대로된 역사 을 알아갔으면 합니다
길이 남을
한때의 영화로인해 잠깐 기억하지맙시다
영원히 기억해야할 우리나라의역사입니다
안중근의사 외에모든 독립운동하신분들을 기억해야합니다
대한민국 만세! 대한독립 만세!
너무 고고한 인격울 가지신 훌륭한 분
일본인 간수도 안중근의사의 인품에 감명을 받았었다고 합니다.
진짜..진짜...멋있다...어떻게 저런 용기가 생기는지..참...안중근 의사님은...대단하시다...😊
깊은 감사와 경의를 표합니다
경이로우신 선생님!
덕분에 대한민국이
이렇게 우뚝 섰습니다.
안중근은 친일이었다.이토를 정치적 적으로 본거뿐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왕조는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이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만주지역에 살던 조선인들은 이들을 마적단이라고 부름)은 중국공산당 산하의 빨치산 세력인 동북항일연군이었다.
한국 독립군과 중국 호로군의 연합체로서 이들중 상당수 한국인은 중국 국적을 취득한 공산주의자들이었으며 이들 중국공산당과 연합한 광복군은 339명 이었다.
반면에 2차대전 말기 조선인 일본군 지원자는 80만 명이 넘었고, 입대 경쟁률이 62:1을 넘었다.당시 조선인들의 일본에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 알수있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절반은 동의하지만
경제 규모는 아직 일본을 이기지 못함
축구는 이겼지만
@@YOUNG-Hwan0320 축구를 이겼다고요...? 최근 맞대결 4번다 3대0패배에 월드컵 기록도 일본이 더좋았는데...
우리모두 존경하신안중근의사님을 위해서 한번만 눈감고 안중근의사님을 생각해봅시다.
안중근 의사... 정말 감사합니다..🙏
진정한애국자입니다
영웅이라는 표현도 이분께는 부족한 말이다.
죽음도 무서워하지 않으시던 독립운동가분들 감사하고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끝까지 목숨을구걸하지않고
넘넘하게 자신을 운명을 받아드리다니
너무존경스러요
근데 목숨구걸하면 나쁜거임?
아니요. 그상황이돼면. 나같도 목숨을
구걸. 할지도 모른니다
하지만.나라를. 사랑한다는 뜻에요
@@박정희-r5r ㅋ 총질한번에영웅
아니요 그상황이되면 나같아도 목숨을 구걸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라를 사랑한다는 뜻이에요
@@Halo-b1 와우그때쩔었음,실인자를 것도 자국민도아닌조선인을 변호사붙혀주고 살기회까지주다니
ㄷㄷㄷ
갓본이네.
한국도90년대까지만해도 온갖고문을다했고, 지금도경찰들수사조작에날조까지하는데
저때갓본은지금한국보다더우월한 법체계를가져다니
조선같아서면 재판이 매질에고문에 다리는이겨지고 살은불따고 고문에지면 사지거열형에 삼족이참수
고문에이기면 사지거열형에 삼족이참수당할건디,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당신이 지켜낸 이나라가 쓰레기같은 정치인들로 인하여 망가지고있습니다~!!
이런 이야기 들으면 이가 갈리죠
요즘은 일본에 한국인 관광객이 반이라는
시대이니 참으로 죄송하네요
역사를 기억하되 감정이 앞설 필요는 없습니다.
고개가 숙여집니다
그 굳건함과 지조가 인간의 영역을 초월하신 분. 존경합니다.
안중근 의사님 감사합니다
우리나라최고의분
안중근 이순신같은 여러사람들 왜적과싸우는분들은
다 존경합니다
안중근의사분 같은분들이 나라 독립을위해 목숨걸고 해방되니
목숨까지 바친 희생이 덧없게
간첩들이 득실거리네 간첩완전박멸하자
멸공!
친일파가 아직도 득실하지
안중근 의사님은 부처요 성불을 한 사람입니다. 아니면 그런 행동을 할 수 없는것입니다. 위대한 사람입니다 !
@강휘찬 / 안중근 의사님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셨습니다. (당시로서는 천주교)
서양 선교사로부터 교리는 물론 영어, 불어 등도 공부를 열심히 하신 분으로서 사격수로서도 대단한 사수였습니다.
안중근 의사님 정도라면 그분의 종교가 불교든 무교든 관계없이 저처럼 의연하게 행동하셨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docteursade2 나는 무종교인 인이지만 현재 이곳에서 천국에 살만큼 현세에 만족하며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중근의사님처럼 과감한 결심을 가지려고 하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정신세게를 이루어야 가능한일입니다. 그런면에서 존경을 하고 있습니다.
@@강휘찬-g8n살인마 숭배자구만
넌 악마숭배자랑 동급
전쟁에서 적 장수를 죽인게 왜 재판을 받아야하는거지?
포로아닌가?
뭔 전쟁? 니 정신병동이가?
장수가 아니라 정치인인데
전쟁도 아니구요 장수도 아닙니다
안의사가 이토를 사살한게 전쟁이라 죽인게 아니라....대한의 육군 참모중장으로서 국모를 해하고 국권을 찬탈한 여러 이유를 들어 적국이자 원수인 이토를 사살했다는 애기지 전쟁이란 말이 아니다....
아 ~ 고맙습니다 ! 눈물이
납니다 !
가슴이 아프네요
나라를 지키기 위한 저 마음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요
안중근장군님 존경합니다.
우리민족의 영웅. 거룩하신 안중근의사를 기리며....
요즘 누구 땜에 넘 열받습니다 안중근의사님이 지켜주신 우리나라. 지켜주세요
대장부입니다.좋은곳에 태어나셨길~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하늘에서 편히 쉬쉽시요.
위대한 안의사님! 삼십한살 연세로 영생하고 계십니다.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늘 한점 부끄럼 없는 인생이었다..
안중근의사님감사함니다
지금 윤토히루부미 조선총독부 가 나타낫다 진짜 나라가 폭망각이다 제2의 안중근 의사가 나타날때다
나부터 조상님 4대 뒤 이름이나 자취를 모르면
글쓴분도 1909년4월 이또히로부미가
실행한 호적에 의해 만들어진 성일 확률이 100%입ㅂ니다 당시 전국민의 70% 였다네요
10%양반만의 왕권 국가를 바라싶니까
5만원권에는 안중근의사가 들어갔어야...
안중근의사 잊지압시다
야....잊는다는 놈이 웃기는 거지....ㅋㅋㅋ
잊을면 안되고 잊을수 없습니다.
테러리스트 옹호하는게 개웃기네요 ㅋ
@@RUclipsBot-b3t 한국에서 나가라
@@RUclipsBot-b3t 적어도 님보단...큼
진짜 이런남자가 더이상 한반도에 나올까??
요새 정치 시세를보면 부끄럽기 짝이없고 안의사에게 죄송하다..
기백 이미 난 처음부터 무죄다
아니 영웅이죠 나라를 처들어온
적군을 죽인건대 당연히 영웅이고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멋지십니다
충성
안 의사님 사랑합니다. 꾸벅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의사님의 희생이있어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는겁니다!! 감사합니다!! 😢😢😢
나라의 명예와 국가의 자존심과 현 대한민국 젊은이 들에게 애국심과 자부심과 미래를 가르쳐 주시고 당당히 문을열고 나가셨습니다 평생 존경하고 그뜻을 잊지 않겠습니다 존경하는 안중근 의사님께 ㅡ
참혹한 식민지 상황에서도 역사를 믿은 자의 영웅 칭호가 아깝지 않다!
강직하고 존경스러운 영웅
위대한 의사님
덕분에 인간답게 삽니다 감사합니다
존경합니다.
가슴이 먹먹하다 눈물도 납니다 ㅠㅠ
하늘에서 편히쉬시길
목숨바쳐 나라를 구해주셨는데 하늘에서 바라보시는 현재 대한민국은 어떠신지요
목숨까지 바쳐가며 구하신 대한민국이 만족스러우십니까 아니면 어쩌다 이지경인지 비통하십니까
그래서, 바로잡기 위해 윤석열 대통령을 뽑았잖아요. 대한민국 화이팅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
당신이 있어서 저희가 이렇게 라도살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강단있는 모습 존경 합니다
5만원권이 신사임당?? 안중근 의사로 교체하자
고맙습니다.
눈물과 분노가 동시에...
이렇게 다시 세운 나라를 한무리의 친일파들이 ㅠㅠ
정말 대단하신 분 . 난 저렇게 할 자신이 없다 ㅡㅡ
안중근의사 어머니는
죽을때 입는 수의 가져와서
목숨 구걸하지 마라 그냥 죽어라 하셨다했음
@@것도없었다아무 스즈키상을한땀한탐토막친후물개기밥으로던져준 토막아티스트킬구도무죄랍니다.
안중근이가왜범죄냐고요?
고종이그래서요.안중근그개때끼가 이토를살해해서 일을이리꼬우냐고.욕을바가지로했대요.
@@것도없었다아무역시일본.
조선같아서면 총독살해범은 사지를찢어죽여을건디 일본은 재판도하고 상고도가능하고.ㅋㅋㅋ
저정도면 고문도안했다는거니
@@은가누-z8n ㅅㅂ 무슨ㅈ같은 논리여~ㅋㅋㅋㅋㅋㅋ 돌긋네~ㅎㅎ
@@sSSs-hb2ej토막아티스트 살인 킬구도 세탁후에 영웅되는디. 걍총기살인범안중근정도 세탁정도야 껌이지.ㅋ
동학농민운동때 농민들 학살시킨 양반집안 학살범을 영웅이라 칭송을 하지를 않나 가만히 있던 친한파 이토를 죽여서 강경파가 바로 경술국치를 일으키게 한 장본인을 아주 영웅화하네ㅋ
안중근 의사 아님.
대한의군참모중장 임.
안중근 장군도 재판 당시 나는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며 나를 군인 신분으로 포로 대우 해달라고 했음.
물론 일본이 무시하고 개인의 행위로 치부함.
의사라하는 뜻 자체가 나쁜의미를 담고 있진 않지만 의사라하면 개인의 행위로 비춰질 수 있어 장군이라 불러야 함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평온하시길 바랍니다
안중근 의사님! 존경합니다 님 덕분에 저희들이 이렇게 행복하게 살고있네요 감사합니다 우리의 영웅님 영면하소서
진심으로 존경하고 존경합니다. 고문 앞에서는 애국자가 없다고 했는데, 어찌 끝까지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는지... 그런가 하면 일제강점기때 일본 순사들보다 더 잔인했던 고문 조선 순사 마쓰우라 히로(노덕술)은 독립군들 고문 전문이였고 악랄하기가 얼마나 잔인한지 여기에 적고 싶지 않을 정도. 그런 자가 일사천리로 승진을 했고 해방되어서는 우여곡절끝에 헌병 중령까지 지냈습니다. 일제때 악랄했던 일본 순사 노덕술은 해방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처벌은 커녕 훈장을 받았다. 그의 훈장은 화랑무공훈장 2개, 충무무공훈장 1개... 받았다. 언제 이런 엉망 잘못된 역사가 고쳐질지 걱정입니다.
감사합니다
하루 빨리 유해가 찾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나라 곳곳에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전반에 쓰레기가 넘쳐도 우리는 안중근을 보유한 민족이기에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우라나라의 자랑 이자 진정 히어로 영원히 빛날 안중근 그의 DNA이가 우리나라의 해방을 시켰다 아!?~안중근 안중근 의사에게 찬사를~
자신의 길을 받아들이셨구나..
그곳에선 편히 쉬길..
감사합니다.
마지막까지 읽으시려고 하셨던 책이 무슨 책인지 궁금하네요
안중근 의사가 평하로운 아니 만약 일제 강점기가 아닌 조선이 자체적으로 변했다면 이분은 어떤 삶을 살았을지 진짜 궁금하다
일본에게 배상 사죄하는것 강요하는것보다 일본 미래세대에게 우리한국이 알리고 전파하는것이 더 이롭고 효율적이고 미래세대 일본인들이 한국인에게 사죄를 스스로 하는 성숙한 독일미르켈 전총리처럼 숙연한 모습을 보였으면좋겠어요
영웅존경합니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왕조는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이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만주지역에 살던 조선인들은 이들을 마적단이라고 부름)은 중국공산당 산하의 빨치산 세력인 동북항일연군이었다.
한국 독립군과 중국 호로군의 연합체로서 이들중 상당수 한국인은 중국 국적을 취득한 공산주의자들이었으며 이들 중국공산당과 연합한 광복군은 339명 이었다.
반면에 2차대전 말기 조선인 일본군 지원자는 80만 명이 넘었고, 입대 경쟁률이 62:1을 넘었다.당시 조선인들의 일본에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 알수있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seromekim7798 3줄 요약해라 이렇게 길면 누가 읽니
@@seromekim7798 요약 좀
누구는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모진고문을 견디고 이슬로 사라졌건만..
그 어떤 누군가들은 반성도 없는 저 일본이 없으면 나라가 망할듯이 떠들어대고,
일본이 당연 배상해야 하는데 그걸 국내에서 지급하자니 기가 찰 노릇이다.
죽음앞에서의 평온을 유지 할수있는 사람이 몇이나될까~~?? 없지~~
진정한 애국지사 이십니다.
목숨은 다 아까운데 어찌
받아 들이셨을까요?
나라잃은 설움 이렇게
무섭습니다.
나라가 중요함을 깨달읍시다.
안중근 의사님 존경합니다.
감사합니다.
안타깝습니다.
슬픕니다.
부디 극락왕생 하소서.
감사드립니다
나보다 어린 사람이 저렇게 할 수가 있나? 정말 존경스럽다.
저런테러리스트는이슬람가면알라취급도몬받는단다.6
이슬람가면 저런애들 바가지로 퍼담을수있단다.
김기종도그래자나.ㅋㅋㅋ
저때도일본의 정치체계쩐다. 저런살인마를 재판에 상고까지가능하고.
조선ㅇ일본에안멱혔다면 중근이는온갖고문과함께 사지거열형당하고 삼족이 멸족되었을건디
너보다 어떻게 어리냐 넌 무슨 150살 되냐?
@@은가누-z8n 컨셉임?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자랑스런 대한민국을 친일좌빨들로 부터 꼭 지켜내겠습니다.
무지한 국민으로 부터 먼저 지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수고하셨습니다. 천국에서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
영웅 안중근의사를
잊지맙시다
이토 히로부미. ㅣ만엔 지폐에 등장 하는데 우리도 안중근의사 지폐 만들자ᆢ
역시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자신과 나라를 위하여 최고의 인생을 살다가신 학문을 배운 지식인답게 용기있는 호연지기의 삶을 살다 가신 분이시구나!!! 감사드립니다. 자기정체감이 바른 분별력이 있는 판단력을 쓰신 살해당하셨지만 안중근의사님의 정신은 지금도 우리 대한민국속에 살아계시다.
수감때 간수들도 안중근의 언행에 감동받아
알게 모르게 많은 조력을 했다 한다
둥아시아를 연구하는 미국 교수들도
강의중에 안중근이 거론될 정도로
많은이에게 울림을 준 안중근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