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영병.. 86년 늦가을 대대훈련중 9중대 일병이 탈영을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우리 소대가 곧바로 21사 지역까지 수색작업을 했는데 찾지를 못했지요. 하루 이틀지나서 무전이 왔는데 21사 교회로 들어갔다더군요. 목사님께서 설득하여 자수를 했고 탈영 처분도 목사님이 변호하여 사단영창으로 마무리했습니다. 탈영은 여친변심 이었구요.😅
저도 자대전입후 2개월지난후쯤 다른포대 상병이 두번째 정기휴가다녀온후 애인변심으로 인해 마음을 추스리지 못하고 새벽에 대공초소에서 근무중 M16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사건이후로 군기세다는 곡사포대에서 밤에 무섭다고 3일만에 그 초소를 폐쇄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본부포대에서 전방OP와 교신하는 무전기가 설치되어 있었죠... 평소에는 그무전기 담당하는 우리과 상병이 교신이 안될땐 점검하고 오는데 이 사건이후로 저에게 점검을 시키더군요 그래서 사고후 보름만에 밤에 혼자 그 대공초소를 2번이나 다녀왔는데 솔직히 당시 좀 무서웠습니다 그리고, 탈영도 한건 있었는데 우리는 대대장님이 위에 보고한하고 일주일만에 찾아와서 조용히 근무시켰던 일도 있었네요..
저도 애인 변심으로 우는 후임병을 달래고 면담한 적이 있는데 좀 걱정되더라구요. 여친이 같은 직장에서 함께 근무했던 그의 친구와 눈이 맞아 고무신 거꾸로 신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임병은 그 두 사람을 쏴 죽이고 자기도 죽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런 하찮은 사람들 목숨과 왜 네 귀한 목숨을 바꾸려 하느냐고 설득했지요. 군복무 잘 마치고 나가면 그보다 훨씬 나은 아가씨를 만나게 된다고 달래고 또 달래서 겨우 진정시켰습니다.
저희땐 인제가면 언제오나 원통에서 못살겠네 하지만 입이 두개라도 양구보단 나으리 였읍니다 ㅎㅎ 제가 복무하는 동안 저희 중대내에선 탈영병은 다행히 없었지만 안타갑게도 두분의 죽음을 직접 목도하였읍니다. 한분은 석탄창고 대들보에 자살한 고참이고 한명은 제 후임인데 양양 파견 가서 훈련중 의문의 죽음이였는데 사인은 기도폐쇠였읍니다 당시 오열하던 부모님들의 모습이 지금도 아픈기억으로 남아있읍니다 전역후에도 한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릴 정도 였으니깐요.다시한번 이 기회를 빌어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탈영은 병사들만 하는건 아니었지요..3사 출신의 장교였습니다...80년 어느 여름쯤에 출동 지시가 내려서 저희 팀 중에서 가장 잘하는 4명이 추적조로 출동한 적이 있습니다.. 하루 종일 수색을 했는데도 소득없이 땀만 엄청 흘리고 돌아 왔습니다..대신에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예전에 국군의 날 뉴스에 나오는 정글 같은 숲으로 이루어진 곳이 있었구요...한탄강의 조화로움도 덤으로 구경했습니다..물론 정신이 없는 경황이었지만요..탈영의 원인 1순위는 여자문제 였습니다.. 자살도 그렇구요.. 군에서 가장 정신적으로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부모님들과 여자친구입니다.. 사제 사람들은 절대 모를겁니다.
장교가 탈영하다니~~ 그런 일도 다 있었군요. 암튼 여자 때문에 우는 병사들은 많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군생활 동안 고무신 거꾸로 신지 않은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중대 군종을 하면서 문제사병이나 관심사병과 면담도 여럿 했는데 그 중에 애인변심으로 고민하는 사람이 가장 많았습니다. 제가 그들을 대신하여 편지를 써준 적도 여러번 있었고요. 그러나 한 번 떠나간 님은 돌아오지 않더군요. 앞으로 고참시절 이야기에서 한두번 다룰 것입니다.
저희때도 전의경 탈영 엄청났죠 이유가 아직 적응전인데 구타부터 당하니 까요 처음 부대갔을때 다들 외박 짤려있더라구요 여러가지 사건 때문에요 저희부대가 사건 사고로 끔직한 부대라고 들었음니다 저역시 미복귀 2번하구여 그러다가 영창 9박10일 기율대 2주간 다녀오고요 상대적으로 도심서 군생활 하는 기동대가 탈영 상당하죠 우리소대만 하여도 탈영 저포함 여러명 존재 하였음니다 차기수 7개월만에 잡혀 오고요 저역시 전과 있다보니까 반가워 하였음니다 다들 말임니다 이경때 탈영한 차기수 고참 전역할때 까지 안잡이고요 전 아버지 문제 때문에 넘 힘들었음니다 군생활 손에 안잡히고요 그나마 아버지 돌아가시구 적응 되더라구요 탈영의 원인은 부대 적응과 대부분 구타로 알고있음니다 워낙에 전의경 구타로 유명하니까요 건 인터넷 존재하기전 현역 들도 알고있더라구요 으 점호 시간에 그 공포 말로 표현할수가 없을 정도임니다 난 최대한 아주 적게 때리고 전역하였음니다 고참 중에 자기 자신은 그리 구타 당하면서 몇명은 절때 후임들 노터치 하더라구여 몇분 짐도 생각남니다 시위현장에서 상급고참이 후임 두둘겨 패서 주위 시민들이 말렸다는 이야기 들었슴니다 마지막으로 진압작전 들가면 저포함 작한 후임들 눈빛이 틀려 지더라구요 아주 잡아다 작살을 내요 스트레스를 시위대한태 풀죠 사람인지 악마들인지
다 육군부대도 나름 인걸로 알고 있습니다...저희가 군직할 군단 배속인데.. 어느 날 군단 주임상사단이 불시에 검열을 나와서 본..저는 그 당시 무릅 부상으로 탄약고 근무 중 이었고..그 분들이 경악하며 하는 말이..일제 시대의 일본군 보다도 더한 .. 이라면서 혀를 찾다는..그 정도로 부대 내에서도 저희 소대는 심했습니다.. 사실 임무가 수색, 추적 작전을 주로하는 것이기도 했지만..크고 작은 휴우증들 많았습니다..주로 허리가 아작나죠.. 그리고 고막도 나가고.. 하루 종일 얼차례도 몇번 받아 본 ..그것도 연병장에서..별의 별것들을..내무반 에서는 일주일에 3~4일 정도.. 으슥한 곳에서는 꼭괭이 자루..하도 사고가 많이 나니까 80년 중반부터 집합만 해도 영창을 몇번 보냈지만.. 결국은 원위치죠..
양구는 인제와 이웃하는 지역이었지만 인제보다 북쪽이고 또 그 사이 800~1000고지 산으로 가로막혀 있어서 기후나 생활 조건이 전혀 다른 지역이었습니다. 인제나 원통은 설악산이나 동해안 가는 차들이 많이 다니지만 양구는 외지로 통과하는 차량은 한대로 지나지 않기 때문에 외부와 소통할 수 없는 조건이라 열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5기갑 출신 이시군요...반갑습니다..79년인가 80년에 덕정에서 은현, 대암산 방향으로 고개 넘어서 창설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희 부대에서도 1명.. 저보다 1달 선임이 차출되어 기보대대로 갔죠..저희 부대에 중졸 2명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래서 간거라고 추측들을 했었지요..
탈영병..
86년 늦가을 대대훈련중 9중대 일병이 탈영을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우리 소대가 곧바로 21사 지역까지 수색작업을 했는데 찾지를 못했지요. 하루 이틀지나서 무전이 왔는데 21사 교회로 들어갔다더군요.
목사님께서 설득하여 자수를 했고 탈영 처분도 목사님이 변호하여 사단영창으로 마무리했습니다. 탈영은 여친변심 이었구요.😅
다른 사단 지역까지 들어갔으면 일이 커질 수도 있었는데 그태도 다행히 사단영창으로 마무리 되었네요.
지휘관들도 진급 등이 걸려있어 서로 경쟁심 때문에 다른 부대 문제점들은 봐주지 않고 원칙대로 상부 보고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당시에는 꼭 한두껀씨 있었죠 중대전원이 찾으러 다니고 했죠 ㅜㅜ
그렇군요.
다행히 저는 그런 일은 겪지 않았습니다.
제가 고참 분대장일때
저의 분대원중 한명이
탈영했었죠~~~
갖 자대온지 보름도 안된 신병이었는데~~~
유격훈련 들어가기전날 탈영 했었죠~~~
상병고참들이 집합시켜서 유격장가면 반죽었다고 겁을준 모양이었죠~~~
저녁에 세면장에 씻으로간다고 저한데 말을하고 갔는데 10분정도가 지나도 오지않아서 제가 가보니 없더군요.
즉시 중대 일직사관에게 보고하고 찿아보니 흙담벼락을 넘은 자국이 보이더군요.
그즉시 대대 연대로 보고 되었고, 3일후 양구대교에서 헌병에게 잡혔죠~~
탈영이유는 집이 춘천이었고, 군에 오기전에 어머니와여동생 셋이서 살았답니다
어머니가 몸이 많이 아파서 보고싶어서 탈영했다고 했습니다.
신병이 탈영하니 사단 헌병대 상사가 중대에와서 저희 소대장까지 조사하고 저한데도 욕을 하더군요~~
나중일이지만 너무 집안 형편이 너무도 어렵더군요~~ 영창40일정도 살고 왔지요~~
지금은 잘살고 있겠죠.
그래도 사단 위수지역에서 잡혀서 사단 영창만 다녀오는 것으로 끝났으니 다행이지요.
물론 고생은 했겠지만~~
만약 타 지역으로 넘어가서 잡혔으면 아마 남한산성까지 갔다 와야 했을 것입니다.
암튼 분대장으로 뜻하지 않은 일을 겪고 맘고생 많으셨을 것 같네요.
저도 자대전입후 2개월지난후쯤 다른포대 상병이 두번째 정기휴가다녀온후
애인변심으로 인해 마음을 추스리지 못하고 새벽에 대공초소에서 근무중 M16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사건이후로 군기세다는 곡사포대에서 밤에 무섭다고
3일만에 그 초소를 폐쇄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본부포대에서 전방OP와 교신하는
무전기가 설치되어 있었죠... 평소에는 그무전기 담당하는 우리과 상병이 교신이
안될땐 점검하고 오는데 이 사건이후로 저에게 점검을 시키더군요 그래서 사고후
보름만에 밤에 혼자 그 대공초소를 2번이나 다녀왔는데 솔직히 당시 좀 무서웠습니다
그리고, 탈영도 한건 있었는데 우리는 대대장님이 위에 보고한하고 일주일만에
찾아와서 조용히 근무시켰던 일도 있었네요..
저도 애인 변심으로 우는 후임병을 달래고 면담한 적이 있는데 좀 걱정되더라구요.
여친이 같은 직장에서 함께 근무했던 그의 친구와 눈이 맞아 고무신 거꾸로 신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임병은 그 두 사람을 쏴 죽이고 자기도 죽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런 하찮은 사람들 목숨과 왜 네 귀한 목숨을 바꾸려 하느냐고 설득했지요.
군복무 잘 마치고 나가면 그보다 훨씬 나은 아가씨를 만나게 된다고 달래고 또 달래서 겨우 진정시켰습니다.
@예비역병장 아주 잘 하셨습니다
저희땐 인제가면 언제오나 원통에서 못살겠네 하지만 입이 두개라도 양구보단 나으리 였읍니다 ㅎㅎ
제가 복무하는 동안 저희 중대내에선 탈영병은 다행히 없었지만 안타갑게도 두분의 죽음을 직접 목도하였읍니다. 한분은 석탄창고 대들보에 자살한 고참이고 한명은 제 후임인데 양양 파견 가서 훈련중 의문의 죽음이였는데 사인은 기도폐쇠였읍니다 당시 오열하던 부모님들의 모습이 지금도 아픈기억으로 남아있읍니다 전역후에도 한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릴 정도 였으니깐요.다시한번 이 기회를 빌어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저는 다행히 가슴 아픈 사건 사고는 보지 않았지만 자대 전입가니까 선임들에게서 우리 부대에서 있었던 사건 사고 이야기는 엄청 들었습니다.
탈영을하면 탈영병만 큰일나는게 아니라
그 위에 선임,부사관,장교들까지도 불똥이 튀죠
잡히면 조사결과에 따라서 윗선임,지휘관 들도 징계받는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그렇습니다.
단순히 여자문제나 가정사라면 간단한 징계로 끝나지만 만약 구타 등 부대생활이 문제라면 그 후폭풍이 거세었지요.
그것도 연대나 사단 차원에서 해결되면 그나마 다행인데 육본까지 올라가면 몇사람 옷을 벗어야하는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탈영은 병사들만 하는건 아니었지요..3사 출신의 장교였습니다...80년 어느 여름쯤에 출동 지시가 내려서 저희 팀 중에서 가장 잘하는 4명이 추적조로 출동한 적이 있습니다.. 하루 종일 수색을 했는데도 소득없이 땀만 엄청 흘리고 돌아 왔습니다..대신에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예전에 국군의 날 뉴스에 나오는 정글 같은 숲으로 이루어진 곳이 있었구요...한탄강의 조화로움도 덤으로 구경했습니다..물론 정신이 없는 경황이었지만요..탈영의 원인 1순위는 여자문제 였습니다.. 자살도 그렇구요.. 군에서 가장 정신적으로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부모님들과 여자친구입니다.. 사제 사람들은 절대 모를겁니다.
장교가 탈영하다니~~
그런 일도 다 있었군요.
암튼 여자 때문에 우는 병사들은 많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군생활 동안 고무신 거꾸로 신지 않은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중대 군종을 하면서 문제사병이나 관심사병과 면담도 여럿 했는데 그 중에 애인변심으로 고민하는 사람이 가장 많았습니다.
제가 그들을 대신하여 편지를 써준 적도 여러번 있었고요.
그러나 한 번 떠나간 님은 돌아오지 않더군요.
앞으로 고참시절 이야기에서 한두번 다룰 것입니다.
저희때도 전의경 탈영 엄청났죠 이유가
아직 적응전인데 구타부터 당하니 까요
처음 부대갔을때 다들 외박 짤려있더라구요
여러가지 사건 때문에요 저희부대가 사건 사고로 끔직한 부대라고 들었음니다 저역시 미복귀 2번하구여 그러다가 영창 9박10일 기율대 2주간 다녀오고요 상대적으로 도심서 군생활 하는 기동대가 탈영 상당하죠 우리소대만 하여도 탈영 저포함 여러명 존재 하였음니다 차기수 7개월만에 잡혀 오고요 저역시 전과 있다보니까 반가워 하였음니다 다들 말임니다 이경때 탈영한 차기수 고참 전역할때 까지 안잡이고요 전 아버지 문제 때문에 넘 힘들었음니다 군생활 손에 안잡히고요 그나마 아버지 돌아가시구 적응 되더라구요 탈영의 원인은 부대 적응과 대부분 구타로 알고있음니다 워낙에 전의경 구타로 유명하니까요 건 인터넷 존재하기전 현역 들도 알고있더라구요 으 점호 시간에 그 공포 말로 표현할수가 없을 정도임니다
난 최대한 아주 적게 때리고 전역하였음니다 고참 중에 자기 자신은 그리 구타 당하면서 몇명은 절때 후임들 노터치 하더라구여 몇분 짐도 생각남니다 시위현장에서 상급고참이 후임 두둘겨 패서 주위 시민들이 말렸다는 이야기 들었슴니다 마지막으로 진압작전 들가면 저포함 작한 후임들 눈빛이 틀려 지더라구요 아주 잡아다 작살을 내요 스트레스를 시위대한태 풀죠 사람인지 악마들인지
전경들은 현역들보다 더 험악했네요.
그래도 미귀 두번이나 했는데도 간단한 처벌 받은 것은 현역보다는 유하네요.
@@예비역병장 가정사 때문에 뭐라 할말이 없어요 부관 소대장 중대장 저때 문에 고생하시구요 실질적 보호자 저혼자다 보니까요 두번째는 에라이 될대로 대라 자포자기 심정이었슴니다
다 육군부대도 나름 인걸로 알고 있습니다...저희가 군직할 군단 배속인데.. 어느 날 군단 주임상사단이 불시에 검열을 나와서 본..저는 그 당시 무릅 부상으로 탄약고 근무 중 이었고..그 분들이 경악하며 하는 말이..일제 시대의 일본군 보다도 더한 .. 이라면서 혀를 찾다는..그 정도로 부대 내에서도 저희 소대는 심했습니다.. 사실 임무가 수색, 추적 작전을 주로하는 것이기도 했지만..크고 작은 휴우증들 많았습니다..주로 허리가 아작나죠.. 그리고 고막도 나가고.. 하루 종일 얼차례도 몇번 받아 본 ..그것도 연병장에서..별의 별것들을..내무반 에서는 일주일에 3~4일 정도.. 으슥한 곳에서는 꼭괭이 자루..하도 사고가 많이 나니까 80년 중반부터 집합만 해도 영창을 몇번 보냈지만.. 결국은 원위치죠..
@배회영-j2w
시집살이 당해 본 며느리가 시어머니 되면 며느리에게 더 혹독한 시집살이 시킨다는 옛말처럼 악순환이 계속되었지요.
아 그런일이 있었군요. 인제가면 언제가나 원통해서 못살겠네... 그러나 양구 보다 (훨)나으리 라는 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양구는 인제와 이웃하는 지역이었지만 인제보다 북쪽이고 또 그 사이 800~1000고지 산으로 가로막혀 있어서 기후나 생활 조건이 전혀 다른 지역이었습니다.
인제나 원통은 설악산이나 동해안 가는 차들이 많이 다니지만 양구는 외지로 통과하는 차량은 한대로 지나지 않기 때문에 외부와 소통할 수 없는 조건이라 열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94년12월군번입니다 26개월군생활 1만원군월급 5기갑39전차2중대출신입니다
구타와암기는기본 선임병업시혼자서공등전화불가 외박시누스지역
의정부 덕정리에서 근무햇습니다~~
기갑이 군기가 세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저보다 14년 뒤에 입대하셨는데도 분위기는 비슷하네요.
물론 저희 때는 공중전화는 없었고 복무기간도 33개월이었지요.
5기갑 출신 이시군요...반갑습니다..79년인가 80년에 덕정에서 은현, 대암산 방향으로 고개 넘어서 창설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희 부대에서도 1명.. 저보다 1달 선임이 차출되어 기보대대로 갔죠..저희 부대에 중졸 2명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래서 간거라고 추측들을 했었지요..
지는 여친없어서 ㅋ
그것이 어쩌면 가슴앓이 안하고 더 좋은 것이었습니다.
여친이 고무신 거꾸로 신었다고 울고불고 할 일은 없었을 테니까요.
@예비역병장 그래도 부럽긴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