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영상 퀄리티에 감탄하고 갑니다.. 데스크 리서치 하실 때만 해도 수 많은 사료를 보셔야 할텐데, 현장에 나가서 보고 촬영하시고 정리하고 편집하시는 것까지 생각하면 놀랍습니다. 업로드 주기가 빠른 건 구독자로서는 좋지만... 건강도 챙겨가며 해주세용. super thanks 금액은 적지만 나가셨을 때 커피 한 잔 값이라도 되길 바라며 드려요ㅎㅎ
웅진과 사비의 코앞이었으니 백제가 공격적일수 밖에 없었고, 신라가 방어를 꽤 잘해서 이쪽이 시원하게 뚫리지 않았어요, 배후에는 난공불락 삼년산성이 있었고 아직도 보루성들이 계속 발굴되고있으니 이제 대전까지 하면 100개 넘어가지 싶어요🤔 진짜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던것 같지요
삼국시대에서 가장 아쉬운 순간… 훗날 신라의 막장성을 보면 성왕이 전투를 이겼어야… 한민족이 한반도에 갇히는 망조가 사라지고 해외 식민지(?)가 사라지는 사태가 사라지는데…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정조대왕이 10년만 더 살았거나 능양의 반란이 실패하거나 수양군이 김종서에게 참살 당했다면 어떠했을지…
와...접경지역이라 산성이 어마어마합니다. 그러니까 산성의 집단군이 관산성을 총칭하며 그중 가장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 있고 그 일대에서 성왕이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군요. 역시 직접 올라가 보니 이것이 단순 전방소초인지 메인병력이주둔했던 산성인지 성격과 목적이 뚜렸이 보이는군요. 백제의 성왕이 매복기습으로 장렬히 전사하고 나라의 국운이 기우는 장소인데 돌와편만 듬성듬성....약간 허무하기도 합니다. 이런 것이 일본서기에서 밖에 기록에 없다니...인정하기는 싫지만 일본역사학자에게 고맙기도합니다. 그리고 사적돌님 덕분에 옥천지형을 보고 전방의 펀치볼과 모양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실제 우리나라에도 분명하진않지만 운석에 충동하여 생긴 것 같은 지형이 곳곳에 있는데 옥천도 그중 하나 같아 놀랐습니다. 역사는 사람과 지리가 만들어내는 시간의 소설!! 관산성전투에 대한 이해가 한층 늘어난 것에 사적돌님께 감사드립니다(꾸벅~). 나중에 애들과 이곳을 지날때 꼭! 이야기해주겠습니다.
오 어서오세요😌 도도는 삼국사기에 삼년산군 소속이라고 나오니 김무력이 남하할때 합류하여 창왕의 배후인 관산성을 차단한것이고 성왕은 포위망을 뚫다가, 혹은 실패하여 퇴각하다가 전사한것이지 않을까합니다. 성왕이 대가야군과 합류하여 금산에서 북상할때 군서면으로 갔다는것은 성왕전사지를 설명할수 있고 영동쪽으로 가서 핏골에서 패배했다라는것은 굴현의 창왕과 합류하려했다를 설명할수 있습니다. 이후 퇴각하다가 관산성 인근에서 전사하고요 개인적으로는 후자가 설명이 좀더 잘 되지않나 생각합니다🤔
성왕이 전사한걸 설명하실때 전투 과정중 그랬을거라는 가설을 처음 듣고 응? 내가 알았던 것 (일본서기 기록) 과 다르네? 하고 반감(?)이 들어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퍼즐조각이 맞혀지는 느낌이 드네요 궁금한점이 있습니다 부여창이 관산성 전투 승리 후 신하의 반대를 뿌리치고 무리하게 전진하다가 패배하였고 성왕은 그런 부여창을 도우러 갔다가 전사했다는 가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사적돌 다시 보니 제가 궁금했던 부분의 중점이 부여창이 관산성전투 승리 후 더 깊숙히 들어가는걸 신하들이 반대하였는가 여부였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개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일본서기 기록에 나오는 늙은 신료가 반대한 시기가 전쟁 전이 아니라 전쟁 중이었다는 가설입니다 어떤 논문에서 본 주장인데 논문 제목이 위덕왕 패전책임론과 관산성 전투의 전개 과정 입니다
오늘도 영상 퀄리티에 감탄하고 갑니다..
데스크 리서치 하실 때만 해도 수 많은 사료를 보셔야 할텐데, 현장에 나가서 보고 촬영하시고 정리하고 편집하시는 것까지 생각하면 놀랍습니다.
업로드 주기가 빠른 건 구독자로서는 좋지만... 건강도 챙겨가며 해주세용.
super thanks 금액은 적지만 나가셨을 때 커피 한 잔 값이라도 되길 바라며 드려요ㅎㅎ
매번 감사드립니다😌 항상 시간과의 싸움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도움주시니 힘이 납니다😄
더욱 고민해서 좋은 영상으로 보답하겠습니다😌
항상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ㅎㅎ 다시 생각하게하고, 고대사 기록이 없는게 아쉽네요ㅠㅠ 흥하세요:)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화두를 던지는것의 제가 할수 있는 한부분이지 않을까합니다😄
오오오~ 첫 댓글 당첨! 영광입니다. 좋은 영상과 정보 늘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 별일 없으신가요😄 시청 감사드립니다😌
Like 68~덕분에 올려주신 영상 즐청 즐감했습니다.
오늘 하루도 즐거운 날 되시기 바랍니다
시청 감사드립니다😌😄
영상 너무 잘 봤습니다^^
시청 감사드립니다😌
신라통일시기의 접경지 설명은 볼 수록 1차대전 참호전이 생각날만큼 처절하네요. 저 일대의 땅이 당시의 JSA고 GP GOP라고 생각하면 백제가 얼마나 간절하게 작전을 수행했을지, 또 신라가 외세를 받을만큼 얼마나 위기감에 두려워했을지...
웅진과 사비의 코앞이었으니 백제가 공격적일수 밖에 없었고,
신라가 방어를 꽤 잘해서 이쪽이 시원하게 뚫리지 않았어요, 배후에는 난공불락 삼년산성이 있었고
아직도 보루성들이 계속 발굴되고있으니 이제 대전까지 하면 100개 넘어가지 싶어요🤔 진짜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던것 같지요
항상 감사합니다. 요즘 폭염이라 영상을 따라 답사하지 못하지만 선선해 지면 흔적을 따라 답사해볼 요량입니다. 감사합니다
모두 답사하기 어려운 곳들입니다, 답사간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과거와의 소통 창구십니다. 영상 퀄리티에 경의를 표합니다. 흥하세요.
즐겨봐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상세하게 설명해주시니 너무너무 쟘있네요 👍
시청 감사드려요😄😌
후백제 時代의 역사도 올리셨음 하네요~~^^♡
꼭 그리하겠습니다😌
삼국시대에서 가장 아쉬운 순간…
훗날 신라의 막장성을 보면 성왕이 전투를 이겼어야…
한민족이 한반도에 갇히는 망조가 사라지고 해외 식민지(?)가 사라지는 사태가 사라지는데…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정조대왕이 10년만 더 살았거나 능양의 반란이 실패하거나 수양군이 김종서에게 참살 당했다면 어떠했을지…
우리나라 역사에 몇몇 분기점이 있는데
성왕전사도 가장 안타까운 쪽이 아닌가 합니다🤔
어릴적 삼양리 산성 바로 아래 살았는데 반갑네요.
유서깊은 곳에 사셨네요😄
잘 보고 있습니다. 저는 요즘 당간지주를 위주로 갈 수 있는 지역들을 가끔 다닙니다. 영상중 동선안에 있으면 목록에 넣구요 ^^
폐사지의 고적함은 유난히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것 같습니다😄 시청 감사드립니다😌
보존이많이아쉽네요...
언제나 백제는 왠지 소외되어 보이네요...
그래도 옥천군에서 관산성전투에 관련된 성들을 발굴하고 보존하는데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어요
좀 늦었지만 지자체가 나서주니 다행이다싶습니다😄
와...접경지역이라 산성이 어마어마합니다. 그러니까 산성의 집단군이 관산성을 총칭하며 그중 가장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 있고 그 일대에서 성왕이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군요. 역시 직접 올라가 보니 이것이 단순 전방소초인지 메인병력이주둔했던 산성인지 성격과 목적이 뚜렸이 보이는군요. 백제의 성왕이 매복기습으로 장렬히 전사하고 나라의 국운이 기우는 장소인데 돌와편만 듬성듬성....약간 허무하기도 합니다.
이런 것이 일본서기에서 밖에 기록에 없다니...인정하기는 싫지만 일본역사학자에게 고맙기도합니다.
그리고 사적돌님 덕분에 옥천지형을 보고 전방의 펀치볼과 모양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실제 우리나라에도 분명하진않지만 운석에 충동하여 생긴 것 같은 지형이 곳곳에 있는데 옥천도 그중 하나 같아 놀랐습니다.
역사는 사람과 지리가 만들어내는 시간의 소설!! 관산성전투에 대한 이해가 한층 늘어난 것에 사적돌님께 감사드립니다(꾸벅~). 나중에 애들과 이곳을 지날때 꼭! 이야기해주겠습니다.
시기에따라 대전과 옥천사이에서 밀고밀리는데
아무래도 사비와 가까워서인지 백제의 축성이 상당히 공격적이네요🤔
아직 본격적인 발굴이 안되고 있는데 옥천군에서 사적지정을 위해 예산을 투입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명문와가 쏟아져준다면 우리나라 고대사에 전환점이 되지않을까요😄
보은에서 옥천이 생각보다 가까운걸 알고나니 성왕의 비극이 이해가 되더군요.
관산성연재 4편에서 당시 상황을 추론해보겠습니다😌
굴산성이 고타모라새라면 태자 부여창은 이미 삼년산군과 김무력이 이끄는 신주군과 대치 중이었을테고 그러면 관산성의 성왕을 기습한 병력 좌지촌의 도도는 서라벌에서 보낸 중앙군 즉 영동 쪽에서 올라온 것일지요?
오 어서오세요😌
도도는 삼국사기에 삼년산군 소속이라고 나오니 김무력이 남하할때 합류하여 창왕의 배후인 관산성을 차단한것이고
성왕은 포위망을 뚫다가, 혹은 실패하여 퇴각하다가 전사한것이지 않을까합니다.
성왕이 대가야군과 합류하여 금산에서 북상할때 군서면으로 갔다는것은 성왕전사지를 설명할수 있고
영동쪽으로 가서 핏골에서 패배했다라는것은 굴현의 창왕과 합류하려했다를 설명할수 있습니다. 이후 퇴각하다가 관산성 인근에서 전사하고요
개인적으로는 후자가 설명이 좀더 잘 되지않나 생각합니다🤔
@@사적돌 전투의 과정이 그려집니다 설명 감사드립니다
시체를 계단에묻어 사람들이 지나갈때 밟게했다죠ㅠㅠ
기록은 그렇습니다.
저도 한동안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당시의 사회분위기상 그렇게하지 않았을거라는 분석이 많더라고요🤔
우리 고대사 기록이라던가 유적,유물이 많지 않아서 매우 아쉽습니다...😢
참 어렵습니다. 시대가 바뀔때마다 너무 파괴적인 문화말살이 벌어졌어요😞
625전쟁 영상도 올려주실 수 있을까요
오 여기있습니다😄
ruclips.net/p/PL1-Ii4ff4VkHbcf_dDKMiID1Sml7nPyKn
@@사적돌 그걸 다봐서 몇개 더 올려주실 수 있을까요? 다부동 전투라던지 해서...
@@누구-i5b 오 그러시군요 ㅎㅎㅎ 조만간 파로호 올라가고 안강포항 공방전 올라갑니다😄
성왕이 전사한걸 설명하실때 전투 과정중 그랬을거라는 가설을 처음 듣고
응? 내가 알았던 것 (일본서기 기록) 과 다르네? 하고 반감(?)이 들어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퍼즐조각이 맞혀지는 느낌이 드네요
궁금한점이 있습니다
부여창이 관산성 전투 승리 후 신하의 반대를 뿌리치고 무리하게 전진하다가 패배하였고
성왕은 그런 부여창을 도우러 갔다가 전사했다는 가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적진깊숙히 가서 포위된것이 맞는것 같습니다,🤔
@@사적돌 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적돌 다시 보니 제가 궁금했던 부분의 중점이
부여창이 관산성전투 승리 후 더 깊숙히 들어가는걸 신하들이 반대하였는가 여부였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개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일본서기 기록에 나오는 늙은 신료가 반대한 시기가 전쟁 전이 아니라 전쟁 중이었다는 가설입니다
어떤 논문에서 본 주장인데
논문 제목이
위덕왕 패전책임론과 관산성 전투의 전개 과정 입니다
지금 상무대로 향하는 나는 내가 죽어버리겠다...
오 교육가시나요 😄
@@사적돌 상무대에 ㅊㄱㅂ하러...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