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구 #하종화 #이상열 #강호인 #문양훈 #한양대 #금성 한양대학교:금성 1991년 제8회 대통령배 배구 결승전 실업팀들을 상대로 승승장구 결승까지 올라온 한양대! 한양대에는 레프트 라이트 가리지 않고 잘하는 최고의 공격수 하종화가 있었다. 결승전 MVP 하종화가 맹활약한 경기 다시 보시죠.
네 진짜 한 5년은 더 국대 에이스로 활약할 수 있었는데.. 전성기가 너무 짧았죠ㅜㅜ 그래도 서강대-경기대 시절, 국가대표 활동의 임팩트가 워낙 강해 오래 기억하는 사람도 많지요... 1992년 국가대표로 재발탁되서 월드리그에서 초반에 맹활약하며 부활하나 했었는데 핀란드와 경기중 부상으로 또 암흑기에 접어들었죠ㅜ 저 때 이후론 무릎부상으로 경기에 잘 나오지 못하고 센터나 교체멤버로 활약했었죠 대한민국 배구계에서 가장 아쉬운 선수라고 생각되네요
88,89연속 우승팀인 고려증권은 스카웃 경쟁에서 패하며 세대교체 실패속에, 홍해천의 군복무로 고전 현대 독주를 예상했지만 ,현대는 매년 우수 대학선수 싹쓸이 스카웃영입으로 호화 맴버였지만 ,이때문에 선수들을 돌아가면서 기용했기에 조직력이 떨어졌고, 특히 세터 문제. 금성과 경기에서 대역전패후 금성에 내리 패하며 결승에도 진출 못함 한양대가 금성을 물리치고 우승. 이상렬이 마지막 전성기 활약한 시즌
전혀아닙니다 현대가 호화 맴버로 백구의 대제전 3,4,5회 3연속 우승을 했지만. 김호철의 이탈리아 재진출후 세터 불안과 조직력 부재로 고전하고 고려증권 새 감독으로 부임한 진준택 감독이 조직력 배구로 6,7회 연속 우승을 했습니다 현대는 매년 우수 대학 선수 영입을 했지만 ,반대급부로 조직력이 구멍이 생기고 ,세터 문제로 고려증권 한양대 상무에 밀렸어요 그러다 현대 강만수가 코치에서 감독으로 승격되면서 조직력이 생가고 세터 문제가 해결되며 11,12우승을 하고 13회 고려증권이 우승을 했어요
이때 4학년 하종화, 윤종일, 강성형, 장재원 4명은 우승후에 현대로 갔습니다. 이전에는 현대가 호화 멤버 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고려 증권에게 졌는데, 4명이 입단후에 2년이 지나고, 93~94 시즌부터 고려 증권을 이기고 우승을 하는 계기가 되었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양대가 현대에게는 약했고, 현대는 금성, 금성은 한양대에게 약했던 먹이 사슬이 존재하던 시즌이기도 했습니다.
현대는 91-92 시즌에 전년 한양대 우승 맴버 하종화-윤종일-문양훈-장재원에 ,경기대 인간 장대 제희경 까지 영입하지만 결승에도 실패. 다음해 한양대 강성형. 성균관대 박종천, 상무에서 제대한 김동천을 영입해서 92-93 우승을 노리지만 또 실패. 조직력과 세터 문제로 우승 실패. 다음해 하종화-윤종일-강성형-김동천으로 조직력이 붙기 시작하고, 성대 임도헌과 진창욱을 영입하며 우승을 노렸습니다. 그런데 생각하지 못 했던 한양대 중퇴생 김성형이 현대의 약점이던 세터문제를 해결하며 고려증권을 극복하고 우승에 성공합니다.
@@seoul-countryman 이상열 선수의 서강대시절을 아는거 보면 올드팬이신 것 같네요.ㅋ 나이도 저랑 비슷하신데..ㅋ 저는 84년부터 배구를 보기 시작했습니다.ㅋ 국제대회였는데 강만수vs 중국의 왕가위 라이벌전 보고 그때부터 뻑가서 어린나이에 입문했죠.ㅋ 84 l.a올림픽때 우리팀이 최강의 멤버였는데 미국의 져주기 시합으로 우리팀이 한번 패한걸로 4강에 실패해서 그때부터 미국이란 나라를 안좋아하기 시작했습니다.ㅋ 저 경기도 집에서 본거 같은데 91년도 겨울이었던기억이 나네요.ㅋ 개인적으로 이상열 선수는 저하고 초등학교 대선배시고 그당시 연희동에 살아서 가끔씩 동네에서 보곤했네요.ㅋ 이상열선수를 응원했지만 냉정히 평가하자면 결정적일때 실수를 하는 선수로 기억됩니다.ㅋ 저 경기 진 것도 이상열 선수때문이라 생각되네요.ㅋ 저당시 금성팀에서는 강호인 선수가 잘했죠.ㅋ
@@지바냥-k8n 제가 77년도에 이사왔는데 사러가는 그당시에 있었구요. 연희동 칼국수는 80년대 중반부터 본 것같네요.ㅋ 예전에 사러가안에 독일빵집이라는 곳이 같이있었는데 요근래 가보니 맞은편으로 이사했더군요.ㅋ 지금 사러가 안에 피터팬이라는 제과점도 오래됐습니다. 사러가안에있는 피터팬 2호점말고 1호점이요.ㅋ 그 건너편 추어탕집도 굉장히 오래됐구요.ㅋ 구세군이라는 교회도 제가 이사오기전에 있던 교회입니다.
하종화 선수, 중학교때 진짜 많이 좋아했었는데... 대학생때 경기는 처음보네요. 옛날 배구가 너무 재미있네요.
이거 영상보니 옛날 생각나네 오관영 해설위원도 생각나고 예전에는 거포라고 했었죠 강만수이후 최고 거포로 하종화 등극 참 재미 있었는데 그시절이 너무 그립습니다
처음배구좋아하게된계기가 하종화랑 한양대우승멤버들이 현대자동차입단했을때부터인데 오랜만에 하종화보니 역시멋있네요
갠적으로 하종화의 라이벌은 나까가이찌였슴
상무입대 문제때문에 제대로 관리가 안되어서 너무 빨리 전성기가 지나간듯한 아쉬움이 크네요..
개인적으로 최고로 좋아하던 우리나라 거포였는데..
그러게요.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속이 문드러지는 거 같네요
누가뭐래도최고의선수 최고의기록 참금성은저멤버로. 한양대를못이기고 마지막 기회였는데 강두태 이상열 이경수. 누구한테도안지는선수였는데
하종화선수 저희학교 체육 선생님이심 ㅎ
일단 실력을 떠나서 하종화는 겁나 잘생김.
하종화 윤종일은 한양대 전설 👍👍👍
강성형.문양훈
이때 TV로 봤었죠.. 당시 하종화는 크레이지모드였어요.
나의 10대 시절 하종화 선수 응원하던 장충 체육관 추억 돋네요. 저 때는 1번이었지만 이후 등 번호 10번이었죠. 김연경, 김수지 선수 보면 과거 10번 하종화, 11번 윤종일 생각 나요.
하종화 선수가 10번 달았던것은 1991년 국가대표 시절이었습니다. 1992년부터 1994년까지 국대에서 1번이었고 소속팀 현대에서도 1번이었죠. ㅎㅎ
@@박대통령만만세 아하 그렇군요.😂
한일전할때 하종화 나까가이치 랠리가 아직도 기억나네요
나도하종하선수좋아 하지만 그시절솔직히실력은 나까가이치가한수위
1991년 3월 10일 일요일 챔피언결정전 2차전. 저날 주심 진짜 어리버리했죠. ㅋㅋ
하종화 진짜 좋아했었는데 .. 영상 보니 반갑고 추억돋네 ....
이상열선수 팬이었는데,
체중을 조금만 줄였어도,무릎부상 당하지않고 전성기를 조금더 끌고갈수 있었을듯..!!
네 진짜 한 5년은 더 국대 에이스로 활약할 수 있었는데.. 전성기가 너무 짧았죠ㅜㅜ
그래도 서강대-경기대 시절, 국가대표 활동의 임팩트가 워낙 강해 오래 기억하는 사람도 많지요...
1992년 국가대표로 재발탁되서 월드리그에서 초반에 맹활약하며 부활하나 했었는데 핀란드와 경기중 부상으로 또 암흑기에 접어들었죠ㅜ
저 때 이후론 무릎부상으로 경기에 잘 나오지 못하고 센터나 교체멤버로 활약했었죠
대한민국 배구계에서 가장 아쉬운 선수라고 생각되네요
전성기가 짧아서 전성기에도 들어가지않은 한참 후배를 질투해서 폭행..
초등학교 선배고 같은동네(연희동) 살았지만 폭행한 인간은 사람취급 안합니다.
실력보다 인성이 우선입니다.
아쉬웠던건 그 전성기가 짧았다는 것
잘하긴 참 잘했지 하종화가...
하종화 정말 대단했군요 그믜 딸 페퍼의 하혜진 선수도 기량이 아주 뛰어나고 외모도 아주. 예쁜 선수죠
88,89연속 우승팀인 고려증권은 스카웃 경쟁에서 패하며 세대교체 실패속에, 홍해천의 군복무로 고전
현대 독주를 예상했지만 ,현대는 매년 우수 대학선수 싹쓸이 스카웃영입으로 호화 맴버였지만 ,이때문에 선수들을 돌아가면서 기용했기에 조직력이 떨어졌고, 특히 세터 문제. 금성과 경기에서 대역전패후 금성에 내리 패하며 결승에도 진출 못함
한양대가 금성을 물리치고 우승. 이상렬이 마지막 전성기 활약한 시즌
현대의 스카웃 싹쓸이가 한국 남자배구 퇴보의 원인이기도 했다고 보이네요
전혀아닙니다
현대가 호화 맴버로 백구의 대제전 3,4,5회 3연속 우승을 했지만. 김호철의 이탈리아 재진출후 세터 불안과 조직력 부재로 고전하고
고려증권 새 감독으로 부임한 진준택 감독이 조직력 배구로 6,7회 연속 우승을 했습니다
현대는 매년 우수 대학 선수 영입을 했지만 ,반대급부로 조직력이 구멍이 생기고 ,세터 문제로 고려증권 한양대 상무에 밀렸어요
그러다 현대 강만수가 코치에서 감독으로 승격되면서 조직력이 생가고 세터 문제가 해결되며 11,12우승을 하고 13회 고려증권이 우승을 했어요
_우와~ 저 경기장에 내가 있섰는데.._
생생하게 기억니시나요?
@@지바냥-k8n 넵. 여러명 단체로 단거리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하종화, 나까가이치...... 당시 한일 최고의 에이스 였죠.
아 허주 아나운서 목소리 그립습니다 씨름에서도. 중계 많이 했죠
전성기가 너무 짧아서 아쉬운 분
허주 선생님의 배구 유도중계 재밌었는데
허주 캐스터 주 중계가 배구 씨름 유도 였죠 ㅎ
씨름이 더 잘어울리셨던것 같아요
역대급캐스터
한양대 팬이었는데 윤종일 선수 사망기사 보고 깜짝 놀랐던 일이
금성 노란색 배구 유니폼 참 괜찮았음
서남원 톨게이트 나오자마자 하종화 선수 스파이크 그립다
네터치 오심, 포히트 오심, 터치아웃 오심 등 아주 오심의 왕국이었던 경기
와 금성 이게 얼마만이냐 ㅠㅠ
금성은 지금도 있는데요?? GS도 있고, LG도 있고...
@@michaels3520 영어말고 럭키금성요 ㅎ
@@michaels3520 ㅉㅉ
강만수-장윤창의 뒤를 잇는 차세대 에이스의 등장
이때 4학년 하종화, 윤종일, 강성형, 장재원 4명은 우승후에 현대로 갔습니다.
이전에는 현대가 호화 멤버 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고려 증권에게 졌는데, 4명이 입단후에 2년이 지나고, 93~94 시즌부터 고려 증권을 이기고 우승을 하는 계기가 되었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양대가 현대에게는 약했고, 현대는 금성, 금성은 한양대에게 약했던 먹이 사슬이 존재하던 시즌이기도 했습니다.
강성형도 현대로 갔지만 1년 후배고 4학년 4인방중 하나는 문양훈 입니다
@@신실한날라리 맞네요. 강성형이 아니라 문양훈 이였네요.
그러나, 우승은 93년에 강성형까지 입단한 후에 이루어졌죠.
현대는 고려증권에 약하고, 금성 지금 LG는 항상 현대 밥이었음
4학년아닙니다 3학년입니다 농구는연세대 배구는한양대가 대학팀으로우승했는데 농구문경은4학년배구 하종하3학년입니다 배구는고3때대학입학팀에서경기하고 대학4학년때는실업팀으로출전했어요
@@윤유원-v7b 아. 맞네요.
그 당시에는 졸업예정자는 미리 입단해서 실업팀 선수로 뛰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로부터 몇년후에 대학팀의 이의제기로 사라진 제도였죠.
허주아나운서기억나요~실업의노련미와 대학의패기가맞붙는 오관영해설~ 하종화 윤종일 문양훈 장재원 4인방 현대차 써비스입단했죠..마낙길 임도헌 거포싹쓸이했었죠^
1991년 아닌가요?
현대는 91-92 시즌에 전년 한양대 우승 맴버 하종화-윤종일-문양훈-장재원에 ,경기대 인간 장대 제희경 까지 영입하지만 결승에도 실패. 다음해 한양대 강성형. 성균관대 박종천, 상무에서 제대한 김동천을 영입해서 92-93 우승을 노리지만 또 실패.
조직력과 세터 문제로 우승 실패.
다음해 하종화-윤종일-강성형-김동천으로 조직력이 붙기 시작하고,
성대 임도헌과 진창욱을 영입하며 우승을 노렸습니다.
그런데 생각하지 못 했던 한양대 중퇴생 김성형이 현대의 약점이던 세터문제를 해결하며 고려증권을 극복하고 우승에 성공합니다.
철원에서 내무반장하던 그 시절이네요.
어릴때 아부지 따라 장충체육관에가서 직관했습니다. LG 배구단 강호인-서남원-이상열 세 선수가 정말 잘했더랬죠. 한양대도 황금멤버구요. 지금 다시 보니 한양대의 블락이 더 좋았내요.
사실 마낙길 노진수가 있는 현대가 결승에 올라왔으면 더 재밋었을텐데
온종일이 결승떼 잘했음
아들이 롯데자이언츠 투수
그당시 한양대 4인방 중 1명하고 어떻게 친분 생겨서 옛날 배구 얘기 많이했었다 ㅋㅋㅋㅋㅋ
10:02 포히트인데 심판이 저걸 못잡네
심판 진짜 뭐같네
영상올릴때 폭행범은 모자이크 하고 올렸어야죠
아..강호인
오락게임보다 더잘함
하종화 윤종일 문양훈 트로이카
혜진이 아빠
배구는 한양대, 농구는 연세대
정작 현대는 저 멤버들 다 데리고 가 놓고도 다음 해 우승을 못하죠
하종화 감독으로썬 흑역사썼지 역대급 작전타임 ㅋㅋ 개그수준 남자답게 화이팅 끝~~~
오버타임이면 바로 끊어야지 한심하네
영원한 No.3 금성의 마지막전성기: 홍기택 김찬호 최영준 이상렬 강호인 서남원
그전에 강두태.이범주.은흥기 선수도 있었죠..ㅋ
75년생인데 내가 어떠케 알지? ㅋㅋ
제목은 하종화인데.. 이상렬만 보이네요 ㅡㅡ
저 체격에 다이빙 리시브 ㅎㄷㄷ
하종화 운이 없는 게 .. 같은 아시아에서 나까가이치가 나왔고 90~93학번에서 괴물들이 나와서 국제 국내에서 묻히게 되는ㅜㅜ
실업가서 하종화 떨어짐
북두 …. 왜 팼냐? 선수를
금성쫀나 한양대한테 깨지고 현대한테는이기고..한양대는 현대한테 깨지고..
포히트도 아니고 파이브히트인데 그걸 못보고 ㅋㅋㅋ 넷터치도 어이없고 터치아웃은 눈길도 안주고..저정도면 승부조작이지 ㅋㅋㅋ
배구는 고려증권이죠
결승에서 현대 많이 발랐죠
심판 판정 너무하네요 일반인이 봐도 바로 알정도인데... 바로 휘슬불어 정리해야지
저날 주심 진짜 어리버리했죠. 한양대에서 오버타임한것도 놓쳐서 금성에서 항의하다 황현주 선수 퇴장당하기도 했죠. ㅋㅋ
네 결승 내내 심판 판정 정말 최악이었습니다. 저 고1때 집에서 중계방송 봤었는데 어처구니가 없는 판정이 너무 많아서 소리지르다 엄마한테 뒤통수맞음ㅋ
의도적 편파판정이었던거 같았네요
@@seoul-countryman
이상열 선수의 서강대시절을 아는거 보면 올드팬이신 것 같네요.ㅋ
나이도 저랑 비슷하신데..ㅋ
저는 84년부터 배구를 보기 시작했습니다.ㅋ
국제대회였는데 강만수vs 중국의 왕가위 라이벌전 보고 그때부터 뻑가서 어린나이에 입문했죠.ㅋ
84 l.a올림픽때 우리팀이 최강의 멤버였는데 미국의 져주기 시합으로 우리팀이 한번 패한걸로 4강에 실패해서 그때부터 미국이란 나라를 안좋아하기 시작했습니다.ㅋ
저 경기도 집에서 본거 같은데 91년도 겨울이었던기억이 나네요.ㅋ
개인적으로 이상열 선수는 저하고 초등학교 대선배시고 그당시 연희동에 살아서 가끔씩 동네에서 보곤했네요.ㅋ
이상열선수를 응원했지만 냉정히 평가하자면 결정적일때 실수를 하는 선수로 기억됩니다.ㅋ
저 경기 진 것도 이상열 선수때문이라 생각되네요.ㅋ
저당시 금성팀에서는 강호인 선수가 잘했죠.ㅋ
연희칼국수와 사러가는 그 당시에도 있었나요?
@@지바냥-k8n
제가 77년도에 이사왔는데 사러가는 그당시에 있었구요.
연희동 칼국수는 80년대 중반부터 본 것같네요.ㅋ
예전에 사러가안에 독일빵집이라는 곳이 같이있었는데 요근래 가보니 맞은편으로 이사했더군요.ㅋ
지금 사러가 안에 피터팬이라는 제과점도 오래됐습니다.
사러가안에있는 피터팬 2호점말고 1호점이요.ㅋ
그 건너편 추어탕집도 굉장히 오래됐구요.ㅋ
구세군이라는 교회도 제가 이사오기전에 있던 교회입니다.
당시 배구는 경기대. 장윤창 이종경 강두태 이경석 신영철 이상열 구본왕 후인정
대학팀한테 깨지면 실업선수들 월급 받기 쪽팔리지 않았을까요
체면이 말이 아니엇겟죠... ㅋ 근데 저때는 대학이 실업 씹어 먹고 그랫음.. 농구도..
그래도 배구는 저때 한번 빼고는 계속 실업이 이김
내가 본 80년말 90년 초 한국 배구 공격수중 임펙트 따지면
장윤창 임도헌 하종화 3명.
임도헌 빠지고 최천식이죠 90년대면
김세진, 이상렬은 어디 갔나요?
이상렬 최천식은 외모만 임펙트 있었음. 물론 내 개인적인 느낌이거 전문가들이나 팬들은 2선수에 대한 평가가 다르겠지. 한양대 하종화 윤종일 한테 밀려 결국 우승못한 이상렬의 모습이 기억에 남았다. 김세진은 90년대 초에 잘 몰랐다.
하종화,임도헌,마낙길 최고인 줄 알았는데 중국 블로킹에 개발리는거 보고 충격먹었는데. 김호철,장윤창 시절과 김세진,신진식 시절이 최고였지. 쟤네들은 중국에 꼼짝도 못했다. 과거 미화하지 마셈.
재미는 엄슴... 스파이크는 "강만수"지... 강만수,하종화 ->진주태생
강만수 하동출신
하종화 진주출신 (진주동명고 졸)
거기에 강두태까지.
윤석열 열성지지자~^^
심판이 완전 꼰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