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생각으로는 탑이 3기(목탑1기, 석탑2기)니까 그중 1기는 사택가문의 후원으로 만들어졌고, 나머지 2기를 무왕과 선화공주의 후원으로 만들었거나 각각 1기씩 사택가문, 무왕+선화공주, 다른 백제 귀족가문이 만들었을걸로 추측할 수도 있습니다. 2기의 탑에 봉안되었을 사리봉안기가 현존하는지 알 수 없으니 영원히 미스터리겠죠~ 하지만 센터에 자리잡은 목탑이 가장 중요했을걸로 생각되네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죠. 애초에 만들어진 이야기일 수 있구요. 선화공주가 무왕의 여러왕후중에 한명있을 수도 있고 더 나아가 선화공주의 후궁일 수도 있구요. 가능성은 적지만 무왕의 왕후였다가 폐비가 될 수도 있는거구요...그에대한 역사가 너무 부족하니 알 방법이 없습니다. 역사서를 보면 아직 신라에 비해서 고구려, 백제의 왕후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무한 상황이죠. 물론 신라도 본처, 제1왕후만 대부분 기록정도만 남았기에... 신라는 1부 1처제인갑다. 생각하는데 그런건 아니라고 합니다. 삼국지중 신라가 좀 있다는 거지.. 신라조차 왕의 자손이 태자나 활약한 왕자, 공주가 아니면 역사서에 없거나 자녀가 더 있었다 정도이고.. 왕이 정확히 언제태어났고 죽었으며 어디에 묻혔는지도 잘 나타나지 않으니까요...또한 삼국역사에도 엄청나게 많은 신사, 장수, 발명가, 음악가등 당대 최고의 인물들이 있었을건데 조선과 고려에 비해서 엄청 자료가 없습니다. 아무튼어느 왕실이든 자손이 귀하니까 단지 신라는 백제, 고구려에 비해서 성골, 진골제도가 있다보니 꼭 왕의 자식이 아니더라도 형제, 친척, 멀리아나가 같은 왕족출신에 대한 기회도 있었던 거죠.. 그러니까.. 여왕도 나온거구요...
1.익산의 미윽사탑 보다도 가장 오래되고 원형이 보존된 석탑은 점넘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천불산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는 운주사 주변에 도선국사가 세웠다는 천불 천탑을 조성 되었다한다.그러나 21기의 석탑과 100기의 석불이 남아 있다.일주면을 지나면 구층석탑 각층 탑신에 새겨진 문양은 꽃입모양 마름모 모양등을 새겨 놓은 9층석탑 이 남아 있다. 최근에 황룡사 9층목탑. 익산의 미륵사탑등의 탑이 있으나 최근에 복원한 탑이다.그렇다면 신라말기에 창건되어 지금까지 원형이 보존된 사탑으로 제일 오래되고 아름다운 문양으로 조각된 윤주사의 주변 9층석탑이 제일 오래동안 보존 된 사탑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모든일에 감사 하라 감사 합니다
백제의 사택씨는 귀족 성씨 중에 하나였습니다. 선화공주라고 불리는 분은 백재의 좌평처럼 신라에 총리격인 비지의 딸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당시 신라와 백제는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다만, 의지왕이 왕위에 오르는 나이가 적지 않았기에 왕비가 백제의 귀족이 아닐 수도 있다는 추측도 있긴 합니다.
무왕의 설화에서의 금은 금마저에서 왔을 것이며, 이건 固麻城입니다. 수도 또는 왕성이지요. 즉, 여기에서 왕위에 올랐던 왕 또는 이곳을 세우거나 정비한 왕의 일화가 뒤섞여 만들어진 이야기가 습합된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즉, 멀게는 문주왕이나 동성왕까지 가 닿는 이야기라는 거죠. 억지를 부려서, 沙宅을 사타로 읽고 ㅅㅎ 혼동을 활용해 하타로 읽으면 《일본서기》나 《신찬성씨록》 따위의 소위 일본 정사와 그 부록에 실린 하타/秦씨가 나오죠. 학계에선 아직도 신라계라고 추측하고 있을 걸요? 하타씨 관련 추측 중에서 진흙탕이었던 땅을 농지로 개간했다고 알려진 도래인 집단과 하타씨를 엮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영산강 하류를 일컫는 금강이 실제로는 삼국 초기에서 중기로 가기 까지의 상당 기간 동안 범진한계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그동안 진수의 《삼국지》를 비롯한 사서의 영향으로 변한으로 분류했던 가락국 또한 범진한계 국가로 치환해보면 어떨까 하는 데까지 나갈 수 있겠죠. 혹은 모래沙에 집宅이니까 모지씨라고 생각하면, 법흥왕(재위 514~540)의 휘로 알려진 모태/모진/모즉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이 시기 백제왕으로 알려진 이는 무령왕(재위 501~523)과 성왕(재위 523~554)인데, 도리어 성왕 딸이 신라에 시집을 가는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역으로 그려질 수도 있지요(무령왕 시기의 국가간 혼인 관련 불발 사례로 보면 법흥왕 9년 서기 522년 계춘에 가야왕이 청한 기사가 있긴 합니다. 이 시기 가야왕으로 불리는 것은 겸지왕이고 각간 출충의 딸 숙과 결혼했다 하지요. 이게 습합된 걸 수도 있습니다).
미륵사지석탑은 못참지
저의 생각으로는 탑이 3기(목탑1기, 석탑2기)니까 그중 1기는 사택가문의 후원으로 만들어졌고,
나머지 2기를 무왕과 선화공주의 후원으로 만들었거나
각각 1기씩 사택가문, 무왕+선화공주, 다른 백제 귀족가문이 만들었을걸로 추측할 수도 있습니다.
2기의 탑에 봉안되었을 사리봉안기가 현존하는지 알 수 없으니 영원히 미스터리겠죠~
하지만 센터에 자리잡은 목탑이 가장 중요했을걸로 생각되네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죠. 애초에 만들어진 이야기일 수 있구요. 선화공주가 무왕의 여러왕후중에 한명있을 수도 있고 더 나아가 선화공주의 후궁일 수도 있구요. 가능성은 적지만 무왕의 왕후였다가 폐비가 될 수도 있는거구요...그에대한 역사가 너무 부족하니 알 방법이 없습니다. 역사서를 보면 아직 신라에 비해서 고구려, 백제의 왕후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무한 상황이죠. 물론 신라도 본처, 제1왕후만 대부분 기록정도만 남았기에... 신라는 1부 1처제인갑다. 생각하는데 그런건 아니라고 합니다. 삼국지중 신라가 좀 있다는 거지.. 신라조차 왕의 자손이 태자나 활약한 왕자, 공주가 아니면 역사서에 없거나 자녀가 더 있었다 정도이고.. 왕이 정확히 언제태어났고 죽었으며 어디에 묻혔는지도 잘 나타나지 않으니까요...또한 삼국역사에도 엄청나게 많은 신사, 장수, 발명가, 음악가등 당대 최고의 인물들이 있었을건데 조선과 고려에 비해서 엄청 자료가 없습니다. 아무튼어느 왕실이든 자손이 귀하니까 단지 신라는 백제, 고구려에 비해서 성골, 진골제도가 있다보니 꼭 왕의 자식이 아니더라도 형제, 친척, 멀리아나가 같은 왕족출신에 대한 기회도 있었던 거죠.. 그러니까.. 여왕도 나온거구요...
좍빨 척결 화이팅 😮
오늘 역사 이야기도 상당히 흥미롭네요.
passionating !
완전 최고의. 명당지에. 지었기에. 다시 재건축하고. 절로 만들어. 국민들이. 소원성득. 하셨으면. 합니다
1.익산의 미윽사탑 보다도 가장 오래되고 원형이 보존된 석탑은 점넘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천불산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는 운주사 주변에 도선국사가 세웠다는 천불 천탑을 조성 되었다한다.그러나 21기의 석탑과 100기의 석불이 남아 있다.일주면을 지나면 구층석탑 각층 탑신에 새겨진 문양은 꽃입모양 마름모 모양등을 새겨 놓은 9층석탑 이 남아 있다. 최근에 황룡사 9층목탑. 익산의 미륵사탑등의 탑이 있으나 최근에 복원한 탑이다.그렇다면 신라말기에 창건되어 지금까지 원형이 보존된 사탑으로 제일 오래되고 아름다운 문양으로 조각된 윤주사의 주변 9층석탑이 제일 오래동안 보존 된 사탑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모든일에 감사 하라
감사 합니다
New friend ❤
역사는 승리자의것
고로 신라인들의 날조 일수있지요
이래서... 참... 지금은 없어진.. 어디엔가 있을지도 모르는 다른역사책으로 전해지는 구고려사, 백제본기, 신라본기, 고구려본기, 있을지도 모르는 가야본기 같은 통일신라밀기 및 고려전기때 역사서가 나타나야함...
선화공주 존재를 믿고 싶은 입장에서 당시 백제인과 신라 사이에 관계를 생각하면 백제에서 왕비로 살아가기위해 고위관료인 사택씨에 양녀로 입적하여 신분세탁? 할 수도 있지 않을까하고 행복회로로 생각해봅니다~~😅
선화공주 사후에 재혼 한 왕후가 사택씨가 아니었을까?
백제의 사택씨는 귀족 성씨 중에 하나였습니다.
선화공주라고 불리는 분은 백재의 좌평처럼 신라에 총리격인 비지의 딸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당시 신라와 백제는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다만, 의지왕이 왕위에 오르는 나이가 적지 않았기에 왕비가 백제의 귀족이 아닐 수도 있다는 추측도 있긴 합니다.
선화공주와 백제 무왕 때 중흥기 였다고 들었.....
사택적덕의 수양딸이 선화공주
그러므로 사택적덕의 딸이 미륵사 창건을 요청했다는 말도 맞는 것
선화공주라고 적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됨 왕후가 무슨 공주..
봉영기는 미륵사 창건당시 기록이고 삼국유사 선화공주 설화는 그로부터 600련 후 지은 책인데 어느게 진실인지 논란이 필요한가? 600년 후 기록이 진실이라고 믿는건가요?
무왕의 설화에서의 금은 금마저에서 왔을 것이며, 이건 固麻城입니다. 수도 또는 왕성이지요. 즉, 여기에서 왕위에 올랐던 왕 또는 이곳을 세우거나 정비한 왕의 일화가 뒤섞여 만들어진 이야기가 습합된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즉, 멀게는 문주왕이나 동성왕까지 가 닿는 이야기라는 거죠.
억지를 부려서, 沙宅을 사타로 읽고 ㅅㅎ 혼동을 활용해 하타로 읽으면 《일본서기》나 《신찬성씨록》 따위의 소위 일본 정사와 그 부록에 실린 하타/秦씨가 나오죠. 학계에선 아직도 신라계라고 추측하고 있을 걸요? 하타씨 관련 추측 중에서 진흙탕이었던 땅을 농지로 개간했다고 알려진 도래인 집단과 하타씨를 엮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영산강 하류를 일컫는 금강이 실제로는 삼국 초기에서 중기로 가기 까지의 상당 기간 동안 범진한계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그동안 진수의 《삼국지》를 비롯한 사서의 영향으로 변한으로 분류했던 가락국 또한 범진한계 국가로 치환해보면 어떨까 하는 데까지 나갈 수 있겠죠.
혹은 모래沙에 집宅이니까 모지씨라고 생각하면, 법흥왕(재위 514~540)의 휘로 알려진 모태/모진/모즉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이 시기 백제왕으로 알려진 이는 무령왕(재위 501~523)과 성왕(재위 523~554)인데, 도리어 성왕 딸이 신라에 시집을 가는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역으로 그려질 수도 있지요(무령왕 시기의 국가간 혼인 관련 불발 사례로 보면 법흥왕 9년 서기 522년 계춘에 가야왕이 청한 기사가 있긴 합니다. 이 시기 가야왕으로 불리는 것은 겸지왕이고 각간 출충의 딸 숙과 결혼했다 하지요. 이게 습합된 걸 수도 있습니다).
선화공주는 무녕왕설과 동성왕설이 있어.
나는 지금의 무왕설은 안맞다고 생각해.
그때는 신라와 사이가 너무 안좋았거던.
1:07
삼국사기에 진평왕의 딸은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뿐이다. 선화공주는 없다. 더구나 선덕여왕은 이름이 덕만, 진덕여왕은 이름이 승만이니 진평왕에게 딸이 더 있었다면 그 이름은 0만이 되어야지 선화는 아니었을 것이다. 왜 역사소설가들은 이 사실을 무시하는가?
걍 선화공주는 신화일뿐이라고 보는게 제일 그럴듯하지
서동이 무왕이 아닐수 있다는 의견도 많습니다. 무령왕이나 동성왕일수 있다는 얘기도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삼국유사가 구라네 기록이 확실하지 않다는거네 근데 부정하게되면
우리 역사가 흐트러지니 부정할수도 없고 뭐 그런거네 삼국유사 삼국사기
고려사 기록은 정확하지 않다는것
조선실록에 비하면
멍청한 ㅅ썬킴 탑이 3개인데...하나가 사택가문 것이면 다른2개의 탑에도 주인이 있었겠지.
개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