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후, 휴전선을 생각하다 : 베를린 장벽 (Berlin W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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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7 фев 2025
  • "베를린 장벽"
    냉전 시기에 동베를린의 서쪽 경계선에 존재했던 장벽으로,
    냉전과 독일 분단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구조물 중 하나이다.
    1961년 8월 13일에 동독(독일민주공화국)이 축조했으며,
    1989년 11월 9일에 동서 베를린 시민들에 의해 붕괴되었다.
    동독은 베를린 장벽을 넘는 자를 무차별 사살하라고 명령했고
    이에 따라 베를린 장벽은 죽음의 띠(Todesstreifen, Death strip)라는 별칭으로 불리었다.
    베를린 장벽이라는 명칭은 주로 서방 세계에서 통용되던 것이었고,
    공산권 국가들에서는 '반파시스트 방벽(Antifaschistischer Schutzwall)'이라고 불렀다.
    장벽은 1961년 8월 13일부터 수 개월에 걸쳐 축조되었으며,
    이후 1980년까지 지속적인 증축, 개량이 이루어졌다.
    1961년 8월 13일 야밤에 기습적으로 베를린 전 국경이 동독 군경에 의해 통제되었고, 날이 밝자 철조망이 설치되었다.
    며칠 후부터 벽돌과 모르타르를 이용하여 첫 장벽이 구축되었다.
    이후 콘크리트 장벽이 올라갔으며 개량을 거쳐 최종적으로 높이 3.6미터, 폭 1.2미터의 견고한 장벽으로 구축되었다.
    벽돌 장벽 구축 후 몇 주 후부터 장벽 바로 뒷편 동베를린/동독 영토에는
    60m ~ 70m (최소 15m ~ 최대 150m) 폭의 '죽음의 지대'라 불리는 민간인 통제 군사 구역이 설치되었다.
    이곳에 장벽을 보조하여 탈주를 막는 철조망, 지뢰, 도랑 등 각종 장치와 구조물이 설치되었다.
    이를 건설하기 위해 해당 지역의 주민들은 강제 퇴거, 이주당했고, 해당 지역에 있던 건물은 모두 철거되었다.
    죽음의 지대 내부에는 동독 국경군 등 군 관계자, 사전에 출입이 허락된 장벽 시설 관리자, 건설자 혹은 수선공만 검문을 받고 들어갈 수 있었다.
    죽음의 지대 내에는 감시탑 302개, 감시 벙커 20개, 전기 감지장치 127km,
    순찰통로 124km, 차량 방어용 도랑 105km을 설치했고,
    장벽을 감시하는 국경군 병력 1200명을 배치했다.
    야간에는 30m 간격으로 설치해둔 서치라이트를 켜두었다.
    죽음의 구역에는 반드시 지뢰가 1평 당 0~50개 정도 깔려 탈출을 막았고,
    지뢰 설치 지역마다 조명탄 인계철선이 늘어져 있어 인계철선이 당겨지면 조명탄이 튀어 올라가 그 주위를 밝히게 했다.
    그 외에도 죽음의 지대에는 반경 20~30m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수평으로 건너맨 외줄에 목줄을 연결시킨 군견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혹여 풀 숲에 탈주자의 모습이 가려질까 죄다 제초제를 뿌렸다.
    강이나 호수가 있어서 장벽 축조가 불가능한 경우에도
    물 속에 가시철망이 촘촘하게 달린 철제 바리케이드를 쫙 깔아 놓았고,
    모터보트를 타고 수시로 드나들며 감시했다.
    나중에 베를린 장벽과 죽음의 지대 아래로
    땅굴을 파고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는 사람들이 생기자,
    동독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죽음의 지대 아래에 긴 터널을 뚫기도 했다.
    장벽의 총 길이는 약 155km로, 그 중 도시를 둘로 나누는 장벽,
    즉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의 경계에 세워진 장벽은 약 43km였다.
    높이 3.6m의 콘크리트 장벽이 106km가량 뻗어 있었고,
    나머지 49km는 철조망이 3겹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1980년대의 최종 개량형 장벽은 맨 윗동에 둥그런 구조물이 추가되어,
    탈출자들이 잡고 넘어가기 힘들게 만들었다.
    철조망도 윗쪽을 죄다 뾰족한 철침으로 만들어 움켜잡으면 손에 구멍이 나도록 설계했다.
    이 장벽은 후에 동독과 각별했던 북키프로스에도 수출되었다.
    장벽 건설에 사용된 비용은 1970년까지 1억 동독 마르크(현재 환율로 1조 773억 원)에 달한 것으로 추산된다.
    베를린 장벽에는 동독 국경군(Grenztruppen)이 배치되었다.
    동독 국경군은 동독의 전 국경에 배치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베를린 장벽에 배치되는 부대는 정예 부대였다.
    소련과 그 위성국가에는 육해공군 이외에 국경군이 존재했으며, 체제 유지를 위해 국경군의 중요성이 막강했다.
    특히 자본주의 서독과 맞닿아 있는 동독 국경군은 육해공 이상으로 중요했다.
    때문에 국경군은 매우 대우가 좋았고, 제대 후에도 국경군 출신들에게는 취업과 대학 진학 등에서 특혜를 줄 정도의 엘리트 부대였다.
    동독 국경군은 본인과 친척에 대한 엄격한 출신 성분 조사 및 철저한 사상 검증 후 선발되었다.
    동독 국경군은 사격, 추적, 수색 등 국경을 넘어 탈주하는 사람들을 색출, 처단하기 위한 각종 훈련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국경을 넘는 이들에 대해 가차 없이 사살할 수 있도록 철저한 정신교육을 반복적으로 받았다.
    1982년 동독은 국경에서의 즉각사살 명령(Schiessbefehl)을 법제화했으며
    동독 국경군의 주 임무는 국경을 넘어 서베를린으로 도망가는 자국 국민들을 막는 것이었다.
    국경을 넘는 자(반역자)에 대해서는 발견되는 대로 즉각 사살하라는 명령(Schiessbefehl)이 내려졌다.
    이는 동독 전 국경에 하달된 명령이지만, 넓은 민간인 통제구역이 설정된 일반 국경과 달리
    불과 수십미터의 죽음의 구역이 존재하여, 서베를린의 건물에서 바로 현장을 목격할 수 있는 베를린 장벽에서 보다 극적인 사살 장면이 목격되었다.
    동독 국경군 병사가 서베를린으로 탈주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반드시 3인 1조로 근무했다.
    2인 1조로 배치해도 둘이 서로 마음이 맞을까 봐 3인 1조 근무를 기본으로 편성한 것이다.
    또 미리 탈출 계획을 세울 수 없도록 수시로 근무 시간이 변경되었다.
    또 수많은 슈타지 요원들이 동독 국경군의 복장을 하고 위장 잠입하여 병사들이 서독으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감시했으며
    베를린 장벽에서 근무한 동독 국경군 중에서 사망자가 다수 있었다는 사실이 독일 통일 후에 밝혀졌다.
    근무 중 서베를린으로 탈출을 시도하다가 다른 동료에게 발각되어 사살당한 경우,
    베를린 장벽을 넘으려는 동독인들에게 살해당한 경우, 복무 중 스트레스로 자살한 경우 등이 있었다.
    1961년부터 1989년까지 베를린 장벽을 넘다가 사살된 인원은 140~200명으로 알려져 있다.
    베를린 장벽 사망자 명단. 기록되지 않은 사망자는 훨씬 많으리라고 추정한다.
    베를린 장벽을 제외한 동서독 국경에서 탈출하려다가 사살된 사람도 천 명이 넘었으며,
    베를린을 포함하여 약 1,245명으로 추정된다.
    사살은 면하였으나, 서독으로 탈출 시도 혐의로 동독에서 처벌받은 사람은 60,000명에 달하며, 평균 4년 동안 감옥에서 복역했다.
    베를린 장벽 탈출
    동독은 국경을 넘어 탈출하려는 자를 발견하면 명령없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즉각 사살하라는 명령까지 내렸지만, 자유를 갈망하는 이들의 목숨을 건 탈출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장벽이 무너지기 직전이었던 1989년 가을까지 약 5천 명이 탈출에 성공했다.
    베를린 장벽 축조 결정이 내려진 뒤 최초의 탈출자로 기록된 인물은 사진의 콘라트 슈만 동독 국경군 하사이며
    그가 베를린 장벽을 넘은 날짜는 1961년 8월 15일이다.
    베를린 장벽이 구축되기 시작한 지 이틀이 지난 시점으로 이때까지는 철조망만 놓여 있는 상황이었다.
    슈만은 사전에 서독 경찰과 장벽을 탈출하기로 합의하였고, 장벽을 만들 자리에 임시로 설치된 철조망 앞에서 경비를 핑계로 어슬렁대고 있었다.
    서독 경찰이 "Komm darüber!"(이쪽으로 넘어와!) 라고 외치자 그는 재빨리 철조망을 넘어 서독 경찰이 준비한 차량에 탑승하여 탈출하였다.
    탈출에 성공한 그는 이후 서독에 정착하게 되었고 바이에른에 거주하며 잉골슈타트의 아우디 공장에서 설비 관리자로 일했다.
    사진이 상당히 극적으로 촬영되었고, 또 첫 탈출자가 동독 공권력의 일원인 경찰이었다는 점에서 자유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지만
    이 기록 때문에 슈만은 동독에서 거물급 반역자로 낙인찍혔고,
    슈타지가 자신을 암살하러 올지 모른다고 불안해하며 살아야만 했다.
    통일 후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반역자 가족으로 낙인찍혀 고생한 가족과 친척들의 냉대를 극복하지 못하고 다시 돌아왔다.
    통일 후에도 자신의 탈출로 잘리거나 고초를 겪은 전직 동독 국경군 대원이 복수하러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우울장애에 시달리다가
    1998년 56세의 나이로 목을 맨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장벽 밑에 땅굴을 파고 탈출한 사례도 상당수 있었다.
    베르나워슈트라세에서 있었던 일인데 대로변 근처에 위치한 어느 가정집의 화장실 변기를 뜯어내고
    저수조를 우회해 장벽 너머 145m 떨어진 서베를린의 빵집까지 땅굴을 팠고,
    이 땅굴로 57명이 탈출에 성공했다.
    서베를린의 대학생들이 주축이 된 탈출 협조단도 지질학과 학생까지 동원해 정교한 땅굴을 파내려 갔고,
    동베를린에 심어둔 비선 조직과 연계해 탈출자들을 서베를린으로 인솔했다.
    다만 이 방법도 훗날 꼬리가 밟혀서, 탈출을 위해 땅굴을 파내려가다가 동독 국경경비대에 덜미를 잡힌 이들도 많았다.
    발견된 땅굴에도 탈출 시도가 불가능하도록 최루탄 가스와 수류탄 세례가 퍼부어졌고, 이후 모두 메워졌다.
    급기야 이것 때문에 동독 국경경비대는 지하에 터널을 파서 순찰을 했다.
    서독 출신의 남자가 동독에 사는 자신의 여자친구를 탈출시키기 위해 좋은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는 매번 동독과 서독을 오갈 때 학자마냥 항상 큰 가방에 책을 가득 넣고 다녔다.
    동독 국경경비대원들은 이것을 보고 매번 수상히 여겨 그가 국경을 오갈 때마다 철저하게 검문했지만,
    항상 가방 안에는 책만 잔뜩 있었기 때문에 매번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는 국경경비대원들이 그를 기억하고 '또 저 양반이네…'하는 식으로 그를 그냥 보내주기 시작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동독을 방문하고 서독으로 갈 때도 동독 국경경비대원들은 조사를 대충 하고 그냥 보내주었는데,
    그 때 그 서독 남자의 가방 속에는 책이 아닌 자신의 여자친구가 있었다.
    Filming date : 2023. 12. 9 - 14.
    Shooting equipment : A7M4
    Place : 독일 베를린, 베를린 장벽 기념관
    producer : Director Hong
    hongsangpyo7@naver.com
    #독일 #베를린 #베를린장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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