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킨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아지자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승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으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 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에 정기적으로 성노예를 헌상하는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세종은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많은 성노예를 중국에 헌상했다. 세종은 중국의 위협을 빌려 국가를 통치한 것이다. 이순신이 활약한 것은 처음 두 달뿐이었다. 일본군이 무장하면 무력해지고,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했다. 그리고 출격 명령을 무시하고 도망쳤기 때문에 부하가 없는 군인에게 떨어졌다. 마지막은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철수하는 일본군을 배후에서 덮쳐 반격으로 죽었다. 이순신은 친필라 같은 비겁한 남자였다. 그것을 영웅에게 날조한 것은 이승만이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를 날조한 것도 이승만이다. 실제로, 거북선은 결함선이며, 출격한 기록은 전혀 없다.
공기업 다녔었죠. 아부하는 애들이 진급 진짜빠름. 묵묵히 일하는 사람은 열에 하나정도 진급. 조직문화 자체가 아부로 시작.아부로 끝남. 자기하나 편하면 회사가 어떻게되든 상관안함. 그런 공기업이 대부분의 경영진. 누구는 쇠밥통 이야기하는데 정권에서 그런 교체의 마음이 없는것뿐. 성실한 인제는 많다.
조선의 왕 선조를 위한 작은 변명을 하나 하자면, 일단 선조 입장에서는 이순신에 대한 정보를 선전관을 통해서나 알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교통이 좋고 통신 인프라가 있던 시절이 아니었기에 한양에 있는 왕이 남쪽 끝에 있는 장수에 대해 아는 방법은 제한적이었습니다. 왕들은 주기적으로 전선의 장수에게 선전관(직책 이름)을 파견해서 해당 장수가 일을 잘 하고 있는지, 혹시 왕이 부여한 군사력으로 역심을 품지는 않는지 조사해 오도록 합니다. 문제는 이순신과 그의 군대를 사찰하러간 선전관들이 하나같이 이순신을 부정적으로 봅니다. 어명을 거부하고 장기간 왜군과의 전투는 회피만 하고 (이순신 장군께서는 불리한 전투는 철저히 회피했습니다) 또 이순신 개인이 파벌 가입을 안하다보니 반대파벌에 속한 선전관들이 오면 괜히 쓸데없는 꼬투리를 잡아서 이순신이 부정부패한 장수라는 식의 보고서를 작성해서 왕에게 가져갑니다. 왕은 선전관들이 작성해온 보고서를 통해서만 해당 장수의 실적, 업무 태도, 도덕성, 법위반 유무를 파악할 수 있으니 당연히 선조는 이순신이 존나 무능하고 도덕적으로 해이해진 장수라는 인식을 가지게 됩니다. 선조 시대에 가장 청렴결백하며 유능했던 명재상 중 하나였던 이덕형(한음과 오성에서 그 한음 이덕형 맞습니다)조차 이순신을 매우 부도덕한 장수라고 판단했을 정도입니다. 전방에 파견됐던 선전관들의 보고서만으로 해당 장수의 면면을 파악해야 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었죠. 선조라는 왕은 이기적으고 컴플랙스로 똘똘 뭉친 왕이었지만 무능함과는 거리가 먼 똑똑한 왕이었습니다. 그 똑똑한 머리를 자기 권력과 보신을 하기 위한 방향으로만 써서 문제였지. 당연히 선조는 자기 권력 유지에 도움이 될 유능한 신하들을 발탁하는데에는 탁월했습니다. 젊은 시절 전투에서 패전해서 파직될뻔했던 이순신을 지휘관으로써의 재능만 보고 사면해서 복귀시켜준 것도 선조였고 파벌이나 뒷배경이 없던 이순신을 갑자기 삼군통제사로 발탁한 것도 선조였습니다. 허준이 동의보감을 쓰도록 국가 자원을 제공한것도 선조였구요. 선조는 자기한테 필요한 인재는 절대 죽이진 않습니다. 정철의 예로 보듯이 아무리 심해도 귀양 보냈다가 필요해지면 다시 복귀 시켜서 써먹고 그러던 왕이었거든요. 3줄 요약 조선시대는 교통이나 통신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수백킬로미터 밖에 있는 왕이 이순신에 대해 파악하는 방법은 선전관을 파견해서 조사시키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순신을 사찰하러 온 선전관들이 하나같이 이순신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고 당연히 이순신을 무능하고 부패한 장수라고 보고서를 써서 선조에게 보냈다. 해당 보고서를 통해 이순신을 파악할 수 밖에 없는 왕과 중앙 정부의 신료 재상들은 당연히 이순신을 파직하는 방향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킨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아지자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승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으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 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에 정기적으로 성노예를 헌상하는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hiroono1 1.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앞잡이 노릇을 한 조선 백성들이 있던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으며 일본군의 수탈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나자 조선 백성들은 의병이 되어 맞서 싸웠습니다. 전쟁 초반 빠르게 밀렸던 것은 건국 이래 200년간의 평화로 군사 부문이 많이 약해진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조선 백성들이 전부 일본의 앞잡이가 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경복궁을 불태우고 한 것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어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2. 부산, 동래 등이 빠르게 무너진 것은 맞으나 부산을 지키는 조선군은 당시 많이 쳐줘야 700~800, 백성까지 포함해도 2000을 못 넘깁니다. 동래성도 2000명 정도. 그에 반해 고니시의 1군은 대략 18700명으로 최소 9.35배~최대 22배 이상으로 몇 시간 버틴 것도 기적. 오히려 그 분투에 일본군이 예를 표할 정도였죠. 3. 조선 수군이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일부만 맞는 말. 원균 등이 이끄는 경상도 수군은 그냥 무너졌지만 전라도 수군은 건재했고 왜란 내내 수군의 핵심 전력으로 싸우며 맹활약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빠르게 출전하지 못한 것은 시시각각 변하는 전황이 제대로 파악되지도 않았는데 섣불리 군사를 움직였다가는 전라도 지방이 일본군에게 넘어가고 해로를 그냥 내줌으로써 조선이 패망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으로 전쟁터에서 불리한 전황임에도 함부로 군을 움직이는 것은 졸장들이나 하는 행위로 이 부분을 지적하며 이순신 장군의 명성이 날조되었다 하면 오히려 유능한 장수라 띄워주는 격입니다. 실제로 유능한 장수셨고요. 4. 조선 수군의 전술 지적 부분. 당시 조선 수군은 포격전을 위시한 원거리전으로 일본군의 배를 깨부수는 방침을 고수했는데 이는 유효한 전술. 일본군은 당시 육군을 주력으로 하며 배를 이용해 보급물자를 수송하는 수륙 병진책을 기본 전략으로 삼았습니다. 당시는 지금처럼 도로가 잘 정비된 시대가 아니었기에 수로를 통한 보급이 더욱 빨랐으며 이를 막기 위해 일본군의 배를 우선적으로 파괴한 것은 일본군의 기본 전략을 뒤흔드는 예리한 판단입니다. 그리고 백병전으로 이긴 것이 아니라고 폄하한다면 정말 우스운 소리인 것이 100여 년간 내전을 벌이며 백병전에 도가 튼 일본군 상대로 백병전을 벌여주는 것은 적을 이롭게 하는 행위로 제대로 된 지휘관이라면 해서는 안 되는 짓이죠. 아군의 강점인 원거리 공격력을 살리고 적의 강점인 백병전을 봉인시킨 부분은 이순신 장군이 명장이었음을 증명하는 부분입니다. 5. 거북선의 사용 관련. 거북선은 분명히 사용된 함선으로 거북선에 대한 기록은 조선의 실록은 물론 중국과 일본의 사료에서도 발견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거북선은 판옥선처럼 진을 갖추고 승선 병력이 화살을 쏘는 목적으로 개발한 것이 아닌 방어력을 믿고 적진으로 들어가 전방위로 포를 쏘며 적을 교란, 공포심을 심어주는 돌격선이었기에 굳이 궁사까지 고려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 장군의 모습은 그냥 상징적인 이미지로 날조는 아닙니다.
@@hiroono1 6. 일본군의 전략 수정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쟁 초기 육군이 빠르게 북상하며 수군이 보급을 책임지는 전략을 짰던 일본군은 수군의 연이은 패배로 보급망이 위협받기 시작하자 곡창 지대인 전라도를 장악, 육로를 통한 보급 계획을 세우고 공격을 감행하나 결사항전의 의지로 나선 조선군이 웅치에서 비록 패하면서도 일본군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고 이치에서는 아예 승리하면서 전략이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이것도 모자라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 대첩으로 일본군을 대파, 수군마저 다시 한 번 깨집니다. 이에 일본군은 전라도 공격을 위한 거점으로 진주성을 노리고 2~3만의 군사로 6일간 진주성을 공격하지만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과 휘하 3,800의 조선군과 백성들, 의병들의 분투로 막대한 타격을 입고 퇴각하니 웅치와 이치, 한산도, 진주성에서의 패전으로 일본군은 전라도 공격에 실패하며 기본 전략 자체가 좌절됩니다. 또한 북상했던 일본군은 보급이 끊기고 각지에서 의병이 달려들어 산발적인 전투로 계속 피해를 입게 되면서 퇴각, 퇴각해 남쪽에 성을 쌓고 농성하게 됩니다. 7. 일본군이 농성에 들어가자 이전에 비해 조선 수군의 출동 횟수가 감소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이는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이 무능해서가 아닌 옥포, 합포, 적진포,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한산도, 안골포에서 연이어 패배하며 재해권이 조선 수군으로 넘어갔고 이순신 장군이 부산포 해전에서 전선 피해 없이 20여 명의 전사자를 내며 100척이 넘는 일본군 선박을 수장시키면서 감히 일본군이 조선 수군에 맞설 생각을 못하게 된 것이 큽니다. 부산포가 일본군 본진이었음을 생각하면 본진에까지 쳐들어와서 포격으로 배를 깨부수고 가는데 전선 피해도 없고 전사자도 20명 정도인 장수와 군대에 맞서기는 어렵죠. 그리고 출동 횟수가 감소한 건 명나라가 자꾸 방해해서 그런 것도 있습니다. 8. 적전 도망의 죄 부분. 이건 명백한 당신이 뭔가 잘못 알고 계신 부분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공식적으론 임금을 기만한 죄로 잡혀가셨는데 내막은 이렇습니다. 외교 사기극을 벌이던 고니시는 1597년 정유재란 당시 1군 선봉장이었던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으로 건너갈 것임을 조선에 알려주는데 조선 조정은 이순신 장군으로 하여금 이를 요격토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순신 장군은 일본군이 바다로 나오지 못하도록 견제하기 위해 함대를 출동시킨 후 귀항하던 중 풍랑으로 일정이 늦어져 명령을 늦게 전달받았고 이때 이미 가토가 다대포에 들어와 있어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과 극도로 사이가 안 좋았던 원균이 이순신 장군을 모함했고 이순신 장군의 명성이 높아지고 민심이 이순신 장군에게 흐르자 이를 경계했던 선조 임금은 다짜고짜 조정에서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넘어간 일을 다시 끄집어내 이순신 장군을 압송합니다. 여러 사람의 변호로 백의종군의 처벌을 받게 된 이순신 장군, 나라가 명장이자 영웅을 그리 대해서는 안 됐지만 어쨌든 이 백의종군은 그냥 일시적으로 직위를 정지하는 수준의 처벌로 공을 세우면 다시 자동으로 복직되며 백의종군 중에도 이전 직위에 맞는 대우는 받았던 징계 조치입니다.
@@hiroono1 9. 조선 수군의 부산포 해전 이후 전투가 모두 패전이라는 부분. 이것도 잘못 알고 계시는 부분입니다. 모함으로 이순신 장군을 밀어내고 수군 통제사가 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원균의 형편없는 지휘 능력으로 칠천량 해전에서 크게 패합니다. 이에 일본군은 임진왜란 발발 이후 처음으로 전라도를 들쑤시며 만행을 저지릅니다. 절체절명의 상황, 조선 조정은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 장군을 다시 수군 통제사로 복직시키고 이순신 장군은 칠천량 패전 이전 경상우수사 배설이 이끌고 도주한 12척의 판옥선을 넘겨받고 나중에 1척을 어떻게 더 확보해 13척의 배로 진도 앞바다 명량 해협에서 일본군 대함대(적게는 133척, 많게는 333척으로 보는데 명량 해협에 들어온 배가 133척, 후방의 함대까지 감안하면 333척으로 봐도 무방)에 맞서 31척을 수장시키고 그 외 수십 척의 배를 파손시키며 대승을 거둡니다. 일본군은 이 전투의 패배와 충청도의 직산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명나라 군에게 패배하며 다시 보급선이 차단될 것을 우려, 경상도 해안의 왜성들로 다시 철수합니다. 명량해전의 승리 이후 이순신 장군은 다시 절이도 해전에서 일본 배 수십척을 수장시키며 승리하고 이후 노량해전에서도 승리하십니다. 10. 조선은 명나라의 속국이 아니었고 성노예를 보내는 것도 명백한 날조. 조선의 외교는 사대교린 정책으로 조선보다 강한 국력을 가진 명나라를 황제국으로 인정하고 받들어주면서 명분과 이득을 챙기는 한편 여진, 일본을 상대로는 유화책과 강경책을 병행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사대라는 것은 이후 광해군~인조 시기를 거치며 무언가 이상해지지만 기본적으로는 명을 띄워주면서 더 많은 이득을 챙기는 실리적인 방식이었고 실제로 명나라는 조선에게 좀 덜 오면 안 되겠냐고 할 정도였습니다. 조선이 전쟁에 있어 명나라의 방침을 따르게 된 것은 앞서 언급한 외교 관계와 애석하게도 조선군의 병력이 당시 부족했고 명나라가 더 많은 병력을 동원했기에 발언권이 강한 부분이 컸습니다. 11. 노량해전 부분. 노량해전 즈음 일본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철군하는 분위기였으나 여전히 전쟁은 끝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조명 연합군은 여전히 육지와 바다에서 일본군을 공격하고 있었고 노량해전은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 진린 장군의 포위망으로 인해 고립된 고니시의 부대를 구원하러 온 일본군 병력과 고니시의 병력을 격파하기 위한 전투였습니다. 일본군은 철수하는 단계였지만 종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적을 공격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며 퇴각하는 적을 공격하는 것은 비겁한 것이 아닌 전략, 전술적으로 당연한 행위입니다. 인류의 전쟁사에서 퇴각하는 적을 확실히 밟아버리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지요. 그리고 퇴각하는 단계의 적을 확실히 물리쳐야 재침략 의지를 꺾어버릴 수 있으며 7년 간 한반도에서 만행을 저지른 일본군을 그냥 보내지 않고 크게 물리치면서 이순신 장군은 한민족의 자존심을 지켜주셨습니다. 관심을 받고 싶은 한국인이신지 친일파이신지 아니면 한글로 댓글을 단 일본인이신지는 모르겠는데 이순신 장군의 업적은 한국은 물론 중국, 일본의 기록에도 적혀 있으며 이순신 장군은 근현대의 일본 해군 제독들도 인정하며 경의를 표하고 미 해군의 체스터 니미츠 제독 등도 '한국의 이순신 제독'등의 표현을 사용하며 그 업적과 영웅적인 행적을 인정받고 계시는 한민족의 성웅이십니다. 한국의 사학자들은 이순신 장군이 정부에 의해 과장된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연구를 진행했지만 그 결과는 이순신 장군에게 가장 비판적이었던 건 이순신 장군 본인이었으며 연구를 하면 할 수록, 알면 알 수록 더 위대하고 존경스러운 인물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역사 날조는 한국인이 아닌 당신과 당신 같은 사람들이 하는 것 같네요. 그리고 이순신 장군을 깎아내리고 싶었나본데 당신의 말에는 모순이 있고 그 모순은 오히려 이순신 장군을 명장이라 인정하는 부분들입니다.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킨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아지자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승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으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 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에 정기적으로 성노예를 헌상하는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킨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아지자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승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으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 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에 정기적으로 성노예를 헌상하는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w hw 닛신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기 이전 한반도 인구는 700만명이었다. 일본의 승리에 의해 대한제국이 독립하자 일본은 대한제국의 노예를 해방하고 성을 가질 권리를 주어 호적을 만들었다. 그러자 인구는 1300만명으로 늘었다. 늘어난 수의 대부분은 전 노예이다. 1910년부터 한일병합인 35년간 한반도 인구는 2500만 명에 2배로 늘었다. 조선인은 일본에 의한 보호에 만족하고 매일 먹고 섹스하고 있던 확실한 증거이다. 일본인 남성이 전장에서 총을 쏘고 있을 때 조선인 남자는 잠자리에서 정자를 쏘고 있었다. 일본인 여성이 눈물을 흘리고 욱일기를 흔들고 있을 때 조선인의 여자는 타액을 흘려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한국인은 일본인이 조선인을 채찍으로 쳐 장구량을 수탈했다고 주장한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조선인은 채찍을 받고 사정하고, 물만을 마시고 모유를 낸 것이다. 조선인은 변태인가?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킨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아지자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승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으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 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에 정기적으로 성노예를 헌상하는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영상 초기에 나온 이순신 장군 말씀이 깊은 울림을 주네요. 장군으로 태어나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 들에서 농사짓는 것으로 충분하다. 자신에게 능력이 있으면 쓰고싶어서 안달이 날 수도 있을텐데, 자신에게 기회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태에서도 자신을 끊임없이 갈고 닦고, 그것을 발휘하지 못해도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 항상 무엇을 하면 어떤 도움이 될까 계산하는 저에게 큰 영감을 주네요.
저때나 지금이나 공정 청렴해도 현실은 승진도 제대로 못해요 이순신이 괜히 직급이 올랐다가 내려갔다를 반복했을까? 주변에는 꽉막혔다 별소리다하고 그리고 이순신은 인맥에 의지는 거의 안한거같음 이이의 사례랑 그리고 고을에서 활쏘기하다가 어느 정승을했던 대감이 활통좀 선물로 줄수없을까?하면서 인맥다질수 있는 기회있었는데 그냥 걷어차버렸음 그리고 이소식을 어느 명문가에서 들었는데 우리집안 사위가 되달라고 혼담이 왔었는데 그것까지 거절하셨으니 ㄷㄷㄷㄷ 물론 왜란직전에 류성룡의 추천을 받았기는 했지만
이순신은 문인/문신형 장수임. 집안도 이순신 이전에는 대대로 문신만 있던 집안이었고 이순신을 발탁한 류성룡의 인물평가에서 선비처럼 점잖다고 했고, 그 원칙적인 자세는 해야하지만 실제로 잘안지켜지는 문신의 윤리도덕에 가까움. 일단 다른 무신형 장수와 다르게 전투를 머리로 시뮬레이션해서 조금이라도 질거 같으면 절대 안나섰기 때문에 백의종군 강등당하고 선조한테 죽을뻔 한 것..
@@토왜박멸-p3i 그건 아니지 겨우 중세시대에 일본과의 해전에서 몇번 이긴거 잖아. 세계대전도 아니고 세계패권을 건 전쟁도 아니고 그냥 일본의 침략전쟁을 막은 장군인대 뭘 세계적으로 나오기 힘들어. 세계적으로 나오기 힘들다라고 하면 적어도 징기스칸과 쿠빌라이 칸수준은 되야지. 그리고 이제 한국에서는 저런 장군은 나오면 안되지 전쟁에서 모두가 똥을 싸는데 혼자 똥꼬쇼하는 끔찍한 상황에서 일본군의 침략에 버티는게 얼마나 끔찍한 상황이냐 지금은 각자 1인분을 해줘야지
지금 현대 군이 추구하는 리더상에 가장 부합되는 분이자 세계 어떤 병법서든 훌륭한 리더로 기록 될 수 밖에 없는 분입니다. 올바른 절차와 규정에 입각한 인사, 작전, 군수/ 평소에 철저한 교육훈련을 통한 병사들의 능력향상 완벽한 장교가 아닌가 생각이듭니다. 어떤 군에 있든 이순신 장군님의 생애는 본받을 점이 굉장히 많은 삶이네요. 존경할 수 밖에 없는 분.
역시 사피엔스 스튜디오 입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진짜 이순신장군 영정을 보고 이상범 화백 그렸다는 이순신장군 영정을 영상에 올리셨네요! 보통 친일논란과 엉터리 고증으로 그려진 장우성화백 그림을 넣을텐데.. 믿고 보는 채널입니다. 그리고 늘 심용환역사 작가님에게도 좋은 역사강의 감사드립니다. 이순신장군 표준영정이 얼른 바껴야 할텐데.. ㅠㅠ이순신장군님이 노하시겠습니다...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킨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아지자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승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으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 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에 정기적으로 성노예를 헌상하는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항상 난세에 영웅이 나타나는 법이죠 임진년에 전쟁이 없었으면 이순신 같은 장군이 간단히 기록만 될뿐 후세에 위대하게 칭송 못받는일이 일어나겠죠 지금 우리나라도 이순신 장군과같은 잠재력을 가진 영웅들이 숨어있을수도 있습니다.. 너무 평화로워 기회가 없는 것 일뿐이죠 결국 이순신같은 영웅이 나타나는것도 국가가 1급위험에 쳐해야 나타나는것 입니다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난 이순신은 암만 능력이 뛰어나도 증명할 방법이없어 그저 평범한 조선 장군으로 기록됩니다
이순신 장군의 청렴은 일을 원리원칙에 따라 철저히 지킨 것에 비롯한 거라고봐요 다른 사람한테만 그렇게 하라고 강요했다면 이렇게 높은 평가를 받기 어려웠을텐데 그 원칙을 자기 자신은 더욱 철저하게 지켰기 때문이죠 그에 대한 결과는 23전 23승에 성웅이란 칭호마저도 부족하게 느껴질만큼 대단하게 다가왔습니다
경외 한다고 하죠 가까이 하긴 어렵지만 존경하는거요 카르타코 명장 한니발도 병사들 끌고 장장 17년을 로마에서 노숙했지만 탈영병은 한명도 없었다고 하죠 말도 없고 병사들과 같은걸 먹고 같은데서 자면 장군 근처를 걷는 병사들은 발소리를 줄여서 잠에서 깨지 않도록 조심했다고 하네요
@@dubbybubby3024 근데 흥미로운 기록이 있더라구요 명제독 진린한테는 성대한 주연도 열어주고 수급 베어다가 진린한테 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진린한테 호감을 사기 위해서 말이죠 이순신 장군 입장에서는 쨋든 진린한테 명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 됐는데 진린에게도 자신이 뻣뻣하다는 인상주면 왜군 잡기가 수월하지 못할까봐 그런것 같음 이런 기록보면 자신에게 조차 가혹하지만 군인으로서 목표를 이루기위해서는 예외적으로 융통성이란 것도 발휘한 것 같음 쨋든 신기한 인물같아요
3:02 와 핵공감... 해병대 이병으로 입대해서 1년여 군생활을 하고 상병이 되었을때 이 해병대라는 집단이 너무 너무 멋있고, 내 인생을 걸어도 좋겠다 싶어서 부사관 복무를 결심하고 부사관이 된 후, 병때는 기껏 고참이래봤자 많아봐야 나랑 두살정도 차이나는 또래였지만, 하사때 중사, 상사 선배들은 30대 40대 말그대로 어른들이었는데, 거기서 생긴 세대차이/격차를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선배들이 전날밤 술집에 가서 술마신 얘기들, 형수님이랑 다툰 얘기들, 이번 당직은 어떻게 빠질까, 다음 훈련은 어떻게 빠질까 이런 얘기들을 들으며 군 간부로서 어떻게 저런 얘기들을 할까 싶었고, 같은 간부인게 부끄러워 군을 나왔는데. 내가 나이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니 그 선배들의 마음이 이해가 되고, 나도 소위말하는 아재가 되고 꼰대가 되어가며 이제는 그 선배님들을 부끄러워했던 20대의 어린 내 모습이 부끄럽고, 지금 나도 그렇게 되어가는게 부끄럽다. 항상 남의 입장이 되어보고, 남의 기준을 이해하며 살아야 하는데..
원래 군대에서 무섭고 깐깐한 지휘관 밑에 있으면 귀찮고 짜증난다고 느낄수 있지만 가장 큰 축복을 받은거임 무능한 지휘관만큼 전장에서 위험한건 없기때문이지 실제로 이순신 장군 후예면 평생 떵떵거릴수 있는데 그 후예들은 이순신장군의 모습을 따라 청렴했고 전장에서 전사한 장군이 가장 많은 집안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먼저 나서서 전투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김훈 - 칼의 노래 소설에 난중일기 일부를 묘사한걸 보면 군졸이 쌀을 훔쳐 도망갔던 탈영병을 잡아왔다..목을 베었다... 1년전에 탈영했던 넘을 잡아왔다.. 목을 베었다.. 이런 부분만 떼어놓고 보면 목따기 전문가임.. 말 제대로 안들으면 그냥 목아지 날아가는거.. 그러니 훈련 수준이 높고, 연전연승한거... 물론 본인과 주변 장수들까지 똑같이 훈련하고, 애썼으니 가능한 결과이겠지만..
일반적으로 청렴하고 강직하게 사려면 ㅡ 정신적 올바름이 강해야하고 ㅡ 집안이나 자신이 돈이 있어야 유혹에 잘 넘어가지 않고 ㅡ 융통성없고 답답하다는 주위의 평을 당연시 여겨야하고 ㅡ 이권을 달리하는 주위 사람들의 거짓 루머에 견뎌야하고 ㅡ 바르게 사는 것을 방해하는 양심버린 악인들에게 더 악랄하게 싸워 작살내서라도 이겨야한다 ㅡ 상사나 동료들의 시기 질투를 견뎌야한다 ㅡ 같은 삶의 가치관을 공유하는 정신적 동지를 얻으면 삶에 대한 엄청난 위안과 용기를 얻을 것이다 이중에서 삶의 가치관이 옳바르다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하는 "경제력"을 가지는 것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월급을 받는 자는 월급 주는 자의 뜻을 거스르지 못한다
사실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 장군님이 만사가 꽉 막히신 분은 아닌게 부하들이랑 친근하게 지내면서 보드게임도 하고 집에 놀러가서 꽐라가 될 때까지 퍼마시기도 하고 활쏘기 내기도 하셨던 걸 보면 법도를 철두철미하게 준수하셨을 뿐이지 개인적으로는 의외로 유들유들한 성품이셨을 가능성도 있음. 특히 왜란 후기 때 진린을 조련(?)하는 걸 보면 코믹하기까지 함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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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킨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아지자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승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으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 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에 정기적으로 성노예를 헌상하는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무섭고 가혹하더라도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해줄수 있는 지휘관이 짱이지 뭐
사실 그게 정석인데, 우리 사회는 세상이 안정되니 효용성보다 명분론이 득세하는 듯.
밴드오브브라더스중 하사관들이 하극상을 모의 하는 장면이 나온다
현중대장과 임무에 투입될건지
중대장해임안을 건의하고 군법회의에 회부될건지 이야기하는데 군법에 회부될걸 각오하고 해임안을 결정한다
즉 무능한 지휘관은 믿지못한다는거죠
패튼 부하들 보면 바로 답이 나오지
@@shrimpbig2126 ㄹㅇ 비유찰떡. 근데 평시에는 패튼같은 장교는 피해야지 ㅋㅋ
@@SovietPikachu1945 그런데 패튼은 남부 출신임에도 인종차별이 거의 없었다고 하네요.
인종,출신 상관없이 죽어라 열심히 싸우면 포상하고 대우했으며 전선에서 두려워하면 누구라도 주먹 날리고 부하들을 차별 없이 대했다고 하더군요.
꽉 막혀 보이는 원칙주의자..
그러나 소통과 화합을 이룰 줄 아는 리더십..
부하들과 백성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당신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대를 떠나서 저런 원칙주의자는 살아남기조차 힘들죠..
저는 저런 사람들이 세상을 지키는 어벤져스라고 생각 합니다.
@@twahn7707 어벤져스보다는 성웅이시죠
@@황조-d2b
Good
이순신이 문재인테 날리는 일침
불통 문제앙 이랑 비교되네
참 외로우셨을듯. 그 초인적 의지와 능력에 감동하고 존경합니다. 감사합니다. 장군님.
이순신한테 불만이 있다?
원균을 보자.
불만이 사라진다.
최소 목숨은 부지함ㅋㅋㅋ
@@user-ce4lz4jj1d ㅋㅋㅋㅋㅋㅋ
ㅋㅋㅋ 말이 통하지 않는 자기 중심적 원균 장군아재
다시 안봐도 킹갓선녀(?)시다~ㅋ
ㅋㅋㅋ원균 이라는 이름으로 한방에 이해됨 ㅋㅋㅋ
4:11 관행이 지속되면 부패가된다...이건 시대가 지나도 절대 변하지 않는 진리임...
정치도 그러하듯..
절라도빨갱이들 염전노예 납치 인신매매 섬노예 성노예... 이개지랄 까는 온동네놈들 광주판사새끼가 관례라며 맨날 무죄석방하는거 모르냐
개절라도빨갱이쓰레기들
사람 사는 곳에는 질병유발 곰팡이와 같은 이들이 다 있다..
@@grassisgreenchicksarefree2 그게 갑자기 왜나옴?
@@수나2439
머리가 그리도 안돔?
우리나라에 세종대왕과 이순신장군이 있었다는 것은 후손들의 자랑이다 광화문 그자리에도 계속 지켜주시고 후인들이 본받을 수 있게 해주세요
세종은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많은 성노예를 중국에 헌상했다. 세종은 중국의 위협을 빌려 국가를 통치한 것이다.
이순신이 활약한 것은 처음 두 달뿐이었다. 일본군이 무장하면 무력해지고,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했다. 그리고 출격 명령을 무시하고 도망쳤기 때문에 부하가 없는 군인에게 떨어졌다. 마지막은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철수하는 일본군을 배후에서 덮쳐 반격으로 죽었다. 이순신은 친필라 같은 비겁한 남자였다. 그것을 영웅에게 날조한 것은 이승만이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를 날조한 것도 이승만이다. 실제로, 거북선은 결함선이며, 출격한 기록은 전혀 없다.
참 힘든 길을 가셨군요 보호막 없이 적이 얼마나 내외에 많았을까 가슴이저립니다
그 유일한 보호막이 류성룡뿐이었음
그것도 류성룡스스로 자청해서 한 보호막
@@람쥐썬더1 류성룡도 뒷통수침..좌파 전교조한테 역사 배움?
@@youto8160 역알못이면 그냥 쓰지마
이순신 장군은 사람 자체가 그냥 존경받을 점 밖에 없는 사람이다...
지금도 청렴하게 일만 하는 사람은 승진에서 밀리고, 아첨하는 사람에게 모함 받아서 상사에게 찍힙니다.
아부와 아첨을 무시하는 상사는 드물고요, 아첨꾼들 말만 듣고 일만 잘하는 사람을 몰라보기 쉽죠... 그런 사람의 공은 다 아첨꾼에게 돌아가기 쉽고요.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바뀐건 없네요. 특히 일 똑바로 안하고 아첨하거나 아부하는 인간들은 싹다 쓸어버려야하는데 지금의 현실이 안타깝네요.
공기업 다녔었죠.
아부하는 애들이 진급 진짜빠름.
묵묵히 일하는 사람은 열에 하나정도
진급.
조직문화 자체가 아부로 시작.아부로 끝남.
자기하나 편하면 회사가 어떻게되든 상관안함.
그런 공기업이 대부분의 경영진.
누구는 쇠밥통 이야기하는데 정권에서 그런 교체의 마음이 없는것뿐.
성실한 인제는 많다.
@@깜운쿠스락 아.. 공기업도 그래요?? 일반 중소기업도 그러던데.. 도대체 어딜 가야 하지..
근데 이순신은 유래가 없을 정도로 고속 승진한 사람이라 승진에서 밀린 것과는 거리가 멂
@@pq6543 초반엔 많이 밀리다가 1591년 급작스런 승진이었을뿐 그 이전엔 제대로 승진도 못해봤었습니다
올곧은 사람이 불이익 당하는건 예나 지금이나 😔 후대에게는 칭송받지만 살아생전 너무 많은 모함에 시달리셔서 이순신 장군을 생각하면 가슴 한구석이 답답함 ㅠㅠ
@Moving Stone Lee 아..
@Moving Stone Lee 개양아치 ㅋㅋㅋㅋ
몇몇은 도망간게 아니고 전략의 일부라고
하는데 진짜 개소리죠
조선의 왕 선조를 위한 작은 변명을 하나 하자면, 일단 선조 입장에서는 이순신에 대한 정보를 선전관을 통해서나 알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교통이 좋고 통신 인프라가 있던 시절이 아니었기에 한양에 있는 왕이 남쪽 끝에 있는 장수에 대해 아는 방법은 제한적이었습니다.
왕들은 주기적으로 전선의 장수에게 선전관(직책 이름)을 파견해서 해당 장수가 일을 잘 하고 있는지, 혹시 왕이 부여한 군사력으로 역심을 품지는 않는지 조사해 오도록 합니다.
문제는 이순신과 그의 군대를 사찰하러간 선전관들이 하나같이 이순신을 부정적으로 봅니다.
어명을 거부하고 장기간 왜군과의 전투는 회피만 하고 (이순신 장군께서는 불리한 전투는 철저히 회피했습니다)
또 이순신 개인이 파벌 가입을 안하다보니 반대파벌에 속한 선전관들이 오면 괜히 쓸데없는 꼬투리를 잡아서 이순신이 부정부패한 장수라는 식의 보고서를 작성해서 왕에게 가져갑니다.
왕은 선전관들이 작성해온 보고서를 통해서만 해당 장수의 실적, 업무 태도, 도덕성, 법위반 유무를 파악할 수 있으니
당연히 선조는 이순신이 존나 무능하고 도덕적으로 해이해진 장수라는 인식을 가지게 됩니다.
선조 시대에 가장 청렴결백하며 유능했던 명재상 중 하나였던 이덕형(한음과 오성에서 그 한음 이덕형 맞습니다)조차 이순신을 매우 부도덕한 장수라고 판단했을 정도입니다.
전방에 파견됐던 선전관들의 보고서만으로 해당 장수의 면면을 파악해야 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었죠.
선조라는 왕은 이기적으고 컴플랙스로 똘똘 뭉친 왕이었지만 무능함과는 거리가 먼 똑똑한 왕이었습니다.
그 똑똑한 머리를 자기 권력과 보신을 하기 위한 방향으로만 써서 문제였지.
당연히 선조는 자기 권력 유지에 도움이 될 유능한 신하들을 발탁하는데에는 탁월했습니다.
젊은 시절 전투에서 패전해서 파직될뻔했던 이순신을 지휘관으로써의 재능만 보고 사면해서 복귀시켜준 것도 선조였고
파벌이나 뒷배경이 없던 이순신을 갑자기 삼군통제사로 발탁한 것도 선조였습니다.
허준이 동의보감을 쓰도록 국가 자원을 제공한것도 선조였구요.
선조는 자기한테 필요한 인재는 절대 죽이진 않습니다.
정철의 예로 보듯이 아무리 심해도 귀양 보냈다가 필요해지면 다시 복귀 시켜서 써먹고 그러던 왕이었거든요.
3줄 요약
조선시대는 교통이나 통신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수백킬로미터 밖에 있는 왕이 이순신에 대해 파악하는 방법은 선전관을 파견해서 조사시키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순신을 사찰하러 온 선전관들이 하나같이 이순신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고 당연히 이순신을 무능하고 부패한 장수라고 보고서를 써서 선조에게 보냈다.
해당 보고서를 통해 이순신을 파악할 수 밖에 없는 왕과 중앙 정부의 신료 재상들은 당연히 이순신을 파직하는 방향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3줄이 아닌데여 ㅋㅋㅋㅋㅋㅋㅋ
@@Noble.6 그것을 통찰하는 능력 또한 왕재. 왕의 재능같습니다. 그러니 어리석다 하지요.
이순신 장군편도 다들 재미있게 보시는군요! 다시 한번 이순신 장군님 주제로 다뤄봐야겠네요! ^^
샘 강의를 듣고 있노라면 시간 가는줄~~😁 모릅니다.
아픈몸이 아프지않게 느껴질 정도로 시간이 훅~갑니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아들에게도 샘강의 들어보라고 얘기 합니다
감사합니다 샘~^^
캬ㅋㅋㅋ 신기하네요 쌤이 직접 댓글을 ㅋㅋ
늘 잘보고있습니다!!
👍👍👍
이순신 장군님에 대해 책 추천받을수 있을까요?
그리고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재밌어용
휘하 사람들에게 엄격했지만 풀어주기도 하고 상벌을 뚜렷하게 했으며 자신에게는 남들에게 요구하는 몇 배로 엄격했던 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라는 생각밖에 안 드네요
커가면서 이순신 장군에 대해 조금씩 더 알게 되었는데 알면 알 수록 위대하고 존경스러운 분입니다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킨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아지자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승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으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 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에 정기적으로 성노예를 헌상하는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hiroono1 1.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앞잡이 노릇을 한 조선 백성들이 있던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으며 일본군의 수탈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나자 조선 백성들은 의병이 되어 맞서 싸웠습니다. 전쟁 초반 빠르게 밀렸던 것은 건국 이래 200년간의 평화로 군사 부문이 많이 약해진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조선 백성들이 전부 일본의 앞잡이가 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경복궁을 불태우고 한 것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어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2. 부산, 동래 등이 빠르게 무너진 것은 맞으나 부산을 지키는 조선군은 당시 많이 쳐줘야 700~800, 백성까지 포함해도 2000을 못 넘깁니다. 동래성도 2000명 정도. 그에 반해 고니시의 1군은 대략 18700명으로 최소 9.35배~최대 22배 이상으로 몇 시간 버틴 것도 기적. 오히려 그 분투에 일본군이 예를 표할 정도였죠.
3. 조선 수군이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일부만 맞는 말. 원균 등이 이끄는 경상도 수군은 그냥 무너졌지만 전라도 수군은 건재했고 왜란 내내 수군의 핵심 전력으로 싸우며 맹활약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빠르게 출전하지 못한 것은 시시각각 변하는 전황이 제대로 파악되지도 않았는데 섣불리 군사를 움직였다가는 전라도 지방이 일본군에게 넘어가고 해로를 그냥 내줌으로써 조선이 패망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으로 전쟁터에서 불리한 전황임에도 함부로 군을 움직이는 것은 졸장들이나 하는 행위로 이 부분을 지적하며 이순신 장군의 명성이 날조되었다 하면 오히려 유능한 장수라 띄워주는 격입니다. 실제로 유능한 장수셨고요.
4. 조선 수군의 전술 지적 부분. 당시 조선 수군은 포격전을 위시한 원거리전으로 일본군의 배를 깨부수는 방침을 고수했는데 이는 유효한 전술. 일본군은 당시 육군을 주력으로 하며 배를 이용해 보급물자를 수송하는 수륙 병진책을 기본 전략으로 삼았습니다. 당시는 지금처럼 도로가 잘 정비된 시대가 아니었기에 수로를 통한 보급이 더욱 빨랐으며 이를 막기 위해 일본군의 배를 우선적으로 파괴한 것은 일본군의 기본 전략을 뒤흔드는 예리한 판단입니다. 그리고 백병전으로 이긴 것이 아니라고 폄하한다면 정말 우스운 소리인 것이 100여 년간 내전을 벌이며 백병전에 도가 튼 일본군 상대로 백병전을 벌여주는 것은 적을 이롭게 하는 행위로 제대로 된 지휘관이라면 해서는 안 되는 짓이죠. 아군의 강점인 원거리 공격력을 살리고 적의 강점인 백병전을 봉인시킨 부분은 이순신 장군이 명장이었음을 증명하는 부분입니다.
5. 거북선의 사용 관련. 거북선은 분명히 사용된 함선으로 거북선에 대한 기록은 조선의 실록은 물론 중국과 일본의 사료에서도 발견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거북선은 판옥선처럼 진을 갖추고 승선 병력이 화살을 쏘는 목적으로 개발한 것이 아닌 방어력을 믿고 적진으로 들어가 전방위로 포를 쏘며 적을 교란, 공포심을 심어주는 돌격선이었기에 굳이 궁사까지 고려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 장군의 모습은 그냥 상징적인 이미지로 날조는 아닙니다.
@@hiroono1 6. 일본군의 전략 수정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쟁 초기 육군이 빠르게 북상하며 수군이 보급을 책임지는 전략을 짰던 일본군은 수군의 연이은 패배로 보급망이 위협받기 시작하자 곡창 지대인 전라도를 장악, 육로를 통한 보급 계획을 세우고 공격을 감행하나 결사항전의 의지로 나선 조선군이 웅치에서 비록 패하면서도 일본군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고 이치에서는 아예 승리하면서 전략이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이것도 모자라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 대첩으로 일본군을 대파, 수군마저 다시 한 번 깨집니다. 이에 일본군은 전라도 공격을 위한 거점으로 진주성을 노리고 2~3만의 군사로 6일간 진주성을 공격하지만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과 휘하 3,800의 조선군과 백성들, 의병들의 분투로 막대한 타격을 입고 퇴각하니 웅치와 이치, 한산도, 진주성에서의 패전으로 일본군은 전라도 공격에 실패하며 기본 전략 자체가 좌절됩니다. 또한 북상했던 일본군은 보급이 끊기고 각지에서 의병이 달려들어 산발적인 전투로 계속 피해를 입게 되면서 퇴각, 퇴각해 남쪽에 성을 쌓고 농성하게 됩니다.
7. 일본군이 농성에 들어가자 이전에 비해 조선 수군의 출동 횟수가 감소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이는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이 무능해서가 아닌 옥포, 합포, 적진포,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한산도, 안골포에서 연이어 패배하며 재해권이 조선 수군으로 넘어갔고 이순신 장군이 부산포 해전에서 전선 피해 없이 20여 명의 전사자를 내며 100척이 넘는 일본군 선박을 수장시키면서 감히 일본군이 조선 수군에 맞설 생각을 못하게 된 것이 큽니다. 부산포가 일본군 본진이었음을 생각하면 본진에까지 쳐들어와서 포격으로 배를 깨부수고 가는데 전선 피해도 없고 전사자도 20명 정도인 장수와 군대에 맞서기는 어렵죠. 그리고 출동 횟수가 감소한 건 명나라가 자꾸 방해해서 그런 것도 있습니다.
8. 적전 도망의 죄 부분. 이건 명백한 당신이 뭔가 잘못 알고 계신 부분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공식적으론 임금을 기만한 죄로 잡혀가셨는데 내막은 이렇습니다. 외교 사기극을 벌이던 고니시는 1597년 정유재란 당시 1군 선봉장이었던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으로 건너갈 것임을 조선에 알려주는데 조선 조정은 이순신 장군으로 하여금 이를 요격토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순신 장군은 일본군이 바다로 나오지 못하도록 견제하기 위해 함대를 출동시킨 후 귀항하던 중 풍랑으로 일정이 늦어져 명령을 늦게 전달받았고 이때 이미 가토가 다대포에 들어와 있어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과 극도로 사이가 안 좋았던 원균이 이순신 장군을 모함했고 이순신 장군의 명성이 높아지고 민심이 이순신 장군에게 흐르자 이를 경계했던 선조 임금은 다짜고짜 조정에서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넘어간 일을 다시 끄집어내 이순신 장군을 압송합니다. 여러 사람의 변호로 백의종군의 처벌을 받게 된 이순신 장군, 나라가 명장이자 영웅을 그리 대해서는 안 됐지만 어쨌든 이 백의종군은 그냥 일시적으로 직위를 정지하는 수준의 처벌로 공을 세우면 다시 자동으로 복직되며 백의종군 중에도 이전 직위에 맞는 대우는 받았던 징계 조치입니다.
@@hiroono1 9. 조선 수군의 부산포 해전 이후 전투가 모두 패전이라는 부분. 이것도 잘못 알고 계시는 부분입니다. 모함으로 이순신 장군을 밀어내고 수군 통제사가 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원균의 형편없는 지휘 능력으로 칠천량 해전에서 크게 패합니다. 이에 일본군은 임진왜란 발발 이후 처음으로 전라도를 들쑤시며 만행을 저지릅니다. 절체절명의 상황, 조선 조정은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 장군을 다시 수군 통제사로 복직시키고 이순신 장군은 칠천량 패전 이전 경상우수사 배설이 이끌고 도주한 12척의 판옥선을 넘겨받고 나중에 1척을 어떻게 더 확보해 13척의 배로 진도 앞바다 명량 해협에서 일본군 대함대(적게는 133척, 많게는 333척으로 보는데 명량 해협에 들어온 배가 133척, 후방의 함대까지 감안하면 333척으로 봐도 무방)에 맞서 31척을 수장시키고 그 외 수십 척의 배를 파손시키며 대승을 거둡니다. 일본군은 이 전투의 패배와 충청도의 직산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명나라 군에게 패배하며 다시 보급선이 차단될 것을 우려, 경상도 해안의 왜성들로 다시 철수합니다. 명량해전의 승리 이후 이순신 장군은 다시 절이도 해전에서 일본 배 수십척을 수장시키며 승리하고 이후 노량해전에서도 승리하십니다.
10. 조선은 명나라의 속국이 아니었고 성노예를 보내는 것도 명백한 날조. 조선의 외교는 사대교린 정책으로 조선보다 강한 국력을 가진 명나라를 황제국으로 인정하고 받들어주면서 명분과 이득을 챙기는 한편 여진, 일본을 상대로는 유화책과 강경책을 병행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사대라는 것은 이후 광해군~인조 시기를 거치며 무언가 이상해지지만 기본적으로는 명을 띄워주면서 더 많은 이득을 챙기는 실리적인 방식이었고 실제로 명나라는 조선에게 좀 덜 오면 안 되겠냐고 할 정도였습니다. 조선이 전쟁에 있어 명나라의 방침을 따르게 된 것은 앞서 언급한 외교 관계와 애석하게도 조선군의 병력이 당시 부족했고 명나라가 더 많은 병력을 동원했기에 발언권이 강한 부분이 컸습니다.
11. 노량해전 부분. 노량해전 즈음 일본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철군하는 분위기였으나 여전히 전쟁은 끝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조명 연합군은 여전히 육지와 바다에서 일본군을 공격하고 있었고 노량해전은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 진린 장군의 포위망으로 인해 고립된 고니시의 부대를 구원하러 온 일본군 병력과 고니시의 병력을 격파하기 위한 전투였습니다. 일본군은 철수하는 단계였지만 종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적을 공격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며 퇴각하는 적을 공격하는 것은 비겁한 것이 아닌 전략, 전술적으로 당연한 행위입니다. 인류의 전쟁사에서 퇴각하는 적을 확실히 밟아버리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지요. 그리고 퇴각하는 단계의 적을 확실히 물리쳐야 재침략 의지를 꺾어버릴 수 있으며 7년 간 한반도에서 만행을 저지른 일본군을 그냥 보내지 않고 크게 물리치면서 이순신 장군은 한민족의 자존심을 지켜주셨습니다.
관심을 받고 싶은 한국인이신지 친일파이신지 아니면 한글로 댓글을 단 일본인이신지는 모르겠는데 이순신 장군의 업적은 한국은 물론 중국, 일본의 기록에도 적혀 있으며 이순신 장군은 근현대의 일본 해군 제독들도 인정하며 경의를 표하고 미 해군의 체스터 니미츠 제독 등도 '한국의 이순신 제독'등의 표현을 사용하며 그 업적과 영웅적인 행적을 인정받고 계시는 한민족의 성웅이십니다. 한국의 사학자들은 이순신 장군이 정부에 의해 과장된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연구를 진행했지만 그 결과는 이순신 장군에게 가장 비판적이었던 건 이순신 장군 본인이었으며 연구를 하면 할 수록, 알면 알 수록 더 위대하고 존경스러운 인물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역사 날조는 한국인이 아닌 당신과 당신 같은 사람들이 하는 것 같네요. 그리고 이순신 장군을 깎아내리고 싶었나본데 당신의 말에는 모순이 있고 그 모순은 오히려 이순신 장군을 명장이라 인정하는 부분들입니다.
@@primehunter627 저 출처를 제시하십시오. 어떤 문헌에 쓰고 있는 거야?
한사람으로 인해 한가정으로나 한사회로나 한국가로나 모두가 덕을 보았으니 얼마나 큰 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이순신 장군님은 우리나라의 등불같은 영웅으로 빛날 것입니다.!!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킨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아지자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승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으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 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에 정기적으로 성노예를 헌상하는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이순신장군의 뒷모습엔
늘 외로움이 함께 했을지도.......
존경합니다.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킨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아지자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승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으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 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에 정기적으로 성노예를 헌상하는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hiroono1 와우 그럼 이걸 공인한 유네스코도 날조의 주역이란 뜻이네요?ㅋ
@@안상현-v3m 유네스코가 승인한 것은 조선왕조실록이며 선조실록은 그 일부이다. 선조실록에는 내가 쓴 내용의 사실이 적혀 있지만,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웠다는 설명은 없다. 덧붙여 난중 일기도 유네스코에 등록되어 있지만, 한국인에 의한 오역·날조가 많다.
@@hiroono1 일본인이죠?ㅋㅋ 그냥 지나갈게요
@w hw 닛신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기 이전 한반도 인구는 700만명이었다. 일본의 승리에 의해 대한제국이 독립하자 일본은 대한제국의 노예를 해방하고 성을 가질 권리를 주어 호적을 만들었다. 그러자 인구는 1300만명으로 늘었다. 늘어난 수의 대부분은 전 노예이다.
1910년부터 한일병합인 35년간 한반도 인구는 2500만 명에 2배로 늘었다. 조선인은 일본에 의한 보호에 만족하고 매일 먹고 섹스하고 있던 확실한 증거이다. 일본인 남성이 전장에서 총을 쏘고 있을 때 조선인 남자는 잠자리에서 정자를 쏘고 있었다. 일본인 여성이 눈물을 흘리고 욱일기를 흔들고 있을 때 조선인의 여자는 타액을 흘려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한국인은 일본인이 조선인을 채찍으로 쳐 장구량을 수탈했다고 주장한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조선인은 채찍을 받고 사정하고, 물만을 마시고 모유를 낸 것이다. 조선인은 변태인가?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500년 역사의 단 한 사람...대쪽 같은 이순신 장군...들을수록 존경스럽다..!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킨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아지자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승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으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 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에 정기적으로 성노예를 헌상하는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진짜 존경할 수 밖에 없는분.. 나라의 보물, 역사의 영웅이다
성웅,,영웅 정말 더한 극존칭으로 표현해 드려도 모자란 위대하신 분~ 이 분의 나라에서 사는게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정말 나라의 보물 , 역사의 보물👍🏻 이분의 후손이라는 것이 너무나 자랑스러움
이순신 장군은 엄격해도 본인이 모범을 보여서 병사들이 불만을 가질 이유가 없었죠
영상 초기에 나온 이순신 장군 말씀이 깊은 울림을 주네요. 장군으로 태어나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 들에서 농사짓는 것으로 충분하다.
자신에게 능력이 있으면 쓰고싶어서 안달이 날 수도 있을텐데, 자신에게 기회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태에서도 자신을 끊임없이 갈고 닦고, 그것을 발휘하지 못해도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 항상 무엇을 하면 어떤 도움이 될까 계산하는 저에게 큰 영감을 주네요.
진짜...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멋있을수있지..
나이 먹고 사회생활을 경험하다보니
정말 이순신장군은 하늘이 내린 위인이시다
존경합니다
더 멋진 나라,개인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공정ᆢ청렴 ᆢ 지금 우리국민들이 원하는거죠!
저때나 지금이나 공정 청렴해도 현실은 승진도 제대로 못해요 이순신이 괜히 직급이 올랐다가 내려갔다를 반복했을까? 주변에는 꽉막혔다 별소리다하고 그리고 이순신은 인맥에 의지는 거의 안한거같음 이이의 사례랑 그리고 고을에서 활쏘기하다가 어느 정승을했던 대감이 활통좀 선물로 줄수없을까?하면서 인맥다질수 있는 기회있었는데 그냥 걷어차버렸음 그리고 이소식을 어느 명문가에서 들었는데 우리집안 사위가 되달라고 혼담이 왔었는데 그것까지 거절하셨으니 ㄷㄷㄷㄷ 물론 왜란직전에 류성룡의 추천을 받았기는 했지만
와... 이순신 장군님은 관직 진출 초기부터 여러 사람에 눈에 띄던 인물이였구나..
진짜 무인을 위한 전쟁을 위한 삶을 위해 태어나셨다해도 과언이아님.. 저런사람은 지금은 당연하고 과거에도 나오기 어려울정도로 원칙주의자 그자체기때문에.. 타고나야 가능한길.
이순신은 문인/문신형 장수임. 집안도 이순신 이전에는 대대로 문신만 있던 집안이었고 이순신을 발탁한 류성룡의 인물평가에서 선비처럼 점잖다고 했고, 그 원칙적인 자세는 해야하지만 실제로 잘안지켜지는 문신의 윤리도덕에 가까움. 일단 다른 무신형 장수와 다르게 전투를 머리로 시뮬레이션해서 조금이라도 질거 같으면 절대 안나섰기 때문에 백의종군 강등당하고 선조한테 죽을뻔 한 것..
있어요.. 전인범 장군님
@@sungilsong4754 그분 성격 화끈했지요. 사창리 군인폭행사건당시 사창리땅에 발 디디지 마라ㅋㅋ 거기사는간부들 싹 군차보내서 통근시킴ㅋ 그때 살짝 군인대상 바가지요금 없어졌다가 금새 다시 부활함. 나쁜놈들
아주 좋은 컨텐츠인듯.
근데 진짜 이순신장군처럼 사회생활하기 쉽지 않지
어떻게저시대에 저런생각을 하셨을까..
소름돋는다..
저 시대 라기 보다는 모든 시대에 공통 부분 아닐 까요
sy kim 님...조선시대에는 저렇게 살기 지금보다 1000배는 더힘들어요....!!!!!
@@deuxksy 저땐 학연지연이 올바르던 시대라자나 뭘본거냐
@@바나나-t7h이때도 학연지연 있었죠 퇴계이황제자 남명조식제자 율곡이이제자들 어떤스승밑에서 과거시험준비했는지도 따지기도 했고 물론 일잘해야하는건 필수조건의 밑바탕이고
대나무처럼 청렴했지만,
유연하게 진린한테 수급주는 센스도 있었음
이게 진짜 레알 융통성 아시는분
진린이 왔을 때 정성을 다해 "아부"하셨음. 국가의 안위가 달린 것인데 그깟 아부를 못하랴. 류성용은 이순신이 융통성이 없어 진린에게 "섭섭하게" 할까봐 걱정했다고 함.
이순신같은 사회지도층+정치인이 많아지길 기원...
윤석열 대통령님이 되어서 너무 다행입니다 ㅎㅎ
그렇습니다. 윤석열 대통령 한동훈 장관님 이들이 이순신을 지향하는 고위공직자이길 간절히 바랍니다.
@@PD-rb5bn 지지도 28%역대 최저 ㅠㅠ
이재명씨가 맞죠~ 윤석열 같은 괴물을 뽑은 2찍들분들 앞으로 나라 거덜나는 거나 보세요~
@@aloakidstv3870 언감생시...바랄껄 바라세요.ㅎ.설마 진담은 아니시지요?
역시 이순신 장군님 존경합니다.
이순신이 율곡의 손을 빌렸으면...이라는 바램의 댓글이 많은 것 같은데
만약 그 손을 빌릴줄 아는.. 치트키를 쓸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이순신 장군이 아니라고 생각함...
쫌 꽉막힌 사람이 바로 이순신 장군 아닐까 싶다
안만났어도 이순신 장군님은 그당시 조정에서도 테클걸정도로 초고속 승진 하신분입니다 ㅋ
@Moving Stone Lee 임용한박사님 채널가서 뵐게요
???
이순신이 진린의 마음을 사려고 했던 행동을 반만 선조한데 했으면 저난리가 안났을꺼임
내가 가장 존경하던 이순신이지만
이순신의 최후는 그냥 부러진거임
@Moving Stone Lee 선조 개ㅅㄲ
선조입장에서는 이순신 초고속 승진도 시켜주고 계속 이기는데 내 말 갑자기 안듣지 반란인가? 그래도 다시 복직시켜준거 보면 최악까지는 아닌 왕인듯
평소에 다 닦아놓고 청소해놓고, 언제든지 쏠 수 있게 하고.. 이 부분 듣는데 뭔가 일상의 거룩함 같은 게 느껴지며 뭉클하네요.
청렴과 원칙의 리더십 이순신 장군님의 생애, 묵상할수록 감동입니다.
진짜 항상 깨끗하게 닦아놓는게 내일 당장 전투에서 전사해 못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각오와 무기를 언제든지 사용가능하게 준비해놓는게 언제라도 망설임 없이 적을 베기위한 각오가 정신적으로 너무 넘을수없는 분이네요
솔선수범이야 말로 가장 강력한 리더십이다. 충무공이야 말로 한반도 역사상 두 번 나오기 힘들 신이다.
세계적으로도 나오기 힘들죠
@@토왜박멸-p3i 그건 아니지 겨우 중세시대에 일본과의 해전에서 몇번 이긴거 잖아. 세계대전도 아니고 세계패권을 건 전쟁도 아니고 그냥 일본의 침략전쟁을 막은 장군인대 뭘 세계적으로 나오기 힘들어. 세계적으로 나오기 힘들다라고 하면 적어도 징기스칸과 쿠빌라이 칸수준은 되야지.
그리고 이제 한국에서는 저런 장군은 나오면 안되지 전쟁에서 모두가 똥을 싸는데 혼자 똥꼬쇼하는 끔찍한 상황에서 일본군의 침략에 버티는게 얼마나 끔찍한 상황이냐 지금은 각자 1인분을 해줘야지
@@AF-qk8ty 한때 해군 세계최강이였던 영국 왕립 해군 교범에 실려있을 정도면 말 다했지 뭐
@@AF-qk8ty 세계에서 명장으로 꼽히는 넬슨제독이 제일 존경하는 인물이 이순신장군입니다
@펭귄근우 아 그렇네요 제가 헷갈렸습니다
평시에는 FM을 불편해하는게 인간의 본성이죠
하지만 조직과 국가의 경쟁력은 소신과 원칙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질수록 강해집니다.
정말로 이순신 장군에 대한 불만이 컸다면 군사 반란이나 탈영 등이 남발했어야 했지만 그런 게 없다는 걸 보면 그만큼 신뢰도가 높다는 의미겠죠.
잘못한 것에 대한 벌은 엄정하고 가혹하게 했지만 잘한 것이나 공을 세운 건 반드시 상을 내리고 해서인가 봅니다
뭐라고 설명은 못하겠지만,눈물이 고이는 이야깁니다.좋네요~
진짜 보면 볼 수록 존경할만한 분.
공무원 청렴 교육 때문에 이순신의청렴 관련해서 영상을 보게되었는데 자세히 알고보니 정말 더욱더 존경스러운분. 실력과 인품을 모두 갖춘 공직자의 본보기.
그는 진정한 도덕책이었군요. 공정, 청렴 두 가지를 다 가진 사람이 저 시대에 있었을 줄이야.
거기에 능력 추가요.
지금 현대 군이 추구하는 리더상에 가장 부합되는 분이자 세계 어떤 병법서든 훌륭한 리더로 기록 될 수 밖에 없는 분입니다. 올바른 절차와 규정에 입각한 인사, 작전, 군수/ 평소에 철저한 교육훈련을 통한 병사들의 능력향상 완벽한 장교가 아닌가 생각이듭니다. 어떤 군에 있든 이순신 장군님의 생애는 본받을 점이 굉장히 많은 삶이네요. 존경할 수 밖에 없는 분.
지금 현대에도 저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근데 적들로부터 공격당하고 매도당했거나 아직 묻혀있어서 모르는 걸 수 있다. 후세들은 알게될지도..
그런 사람들은 라인을 못타서 애초에 장군까지 올라가지도 못하고 중위 전역임ㅋㅋㅋㅋ
전인범 장군님이라고 한분 나왔었죠
전인범 장군....
역시 사피엔스 스튜디오 입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진짜 이순신장군 영정을 보고 이상범 화백 그렸다는 이순신장군 영정을 영상에 올리셨네요! 보통 친일논란과 엉터리 고증으로 그려진 장우성화백 그림을 넣을텐데.. 믿고 보는 채널입니다. 그리고 늘 심용환역사 작가님에게도 좋은 역사강의 감사드립니다. 이순신장군 표준영정이 얼른 바껴야 할텐데.. ㅠㅠ이순신장군님이 노하시겠습니다...
오오 이건 몰랐네요
@@user-ce4lz4jj1d 엘리자베스 키스라는 영국화가가 그린 무인도가 있는데 이순신장군이 유력하다고 들었어요. 링크걸어들릴께요^^
n.news.naver.com/article/011/0003751299
바껴야 ㅡㅡ> 바뀌어야
@@어제와오늘-t8l 감사합니다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킨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아지자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승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으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 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에 정기적으로 성노예를 헌상하는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이순신 장군님 부하가 되서 모신다는건 큰 영광일 것 같습니다.. 버티기 힘들겠지만
군법에 대해서는 지독하게 엄격한분이라 버티기 엄청 힘들거에요....
저런 사람 모시려면 중간 간부가 잘해야함. 상관의 뜻대로 원리원칙 준수하면서 동시에 밑에 쫄병들 사이에 빡센거에 대한 불만을 해소해줘야 하므로 이중으로 바쁘지.
@@XT55555 ㄹㅇ 이순신 휘하 간부들이 진짜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영웅이라고 봄
@@XT55555 실제로 이순신 휘하의 중간간부들도 공신으로 임명받을 정도로 평이 좋았음
@@XT55555 이순신장군 휘하에 충직하고 강직한장수들많았습니다. 송희립,나대용이두명은 만호장(현제 대령) 이순신(동명의인) 등등 나대용은 추후 전라좌수사까지 지닌인물입니다. 이순신이 가장 아꼈던부하장수는 송희립입니다. 영화명량에서는 대장기올리다가 총맞고 낑낑거릴때 이순신이 자기소매 찢어서 붕대매주는 그사람이 송희립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한결같은 곧은 마음에 존경을 표합니다. 이순신의 리더십과 사람됨은 현대사회까지도 여러가지 영감을 주고 배울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건 소설 속에나 나오는 말도 안될 법한 이야기다... 사람이 저렇게 청렴,결백한 것이 얼마나 힘든지 사회생활하면서 뼈저리게 느껴지는 요즘
근데 실화라는 것이 너무 감동이긴 합니다
만화 캐릭터 설정도 저렇게하면 오버한다고 할텐데
항상 난세에 영웅이 나타나는 법이죠 임진년에 전쟁이 없었으면 이순신 같은 장군이 간단히 기록만 될뿐 후세에 위대하게 칭송 못받는일이 일어나겠죠 지금 우리나라도 이순신 장군과같은 잠재력을 가진 영웅들이 숨어있을수도 있습니다.. 너무 평화로워 기회가 없는 것 일뿐이죠 결국 이순신같은 영웅이 나타나는것도 국가가 1급위험에 쳐해야 나타나는것 입니다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난 이순신은 암만 능력이 뛰어나도 증명할 방법이없어 그저 평범한 조선 장군으로 기록됩니다
진짜 다른 거 다 떠나서 어떻게 45전 무패야....? 진짜 레전드 오브 레전드......
메이웨더
이순신같은 사람을 주변에서 만났을 때
답답하고 꽉 막혔다고 화낼 시간에
소신과 원칙있는 사람을 만난 것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됩시다
어렵고 힘들때, 진짜 인재가 나타난다는데 과거의 역사로 남아있지만 이순신같은 인물이 우리나라 현재 한사람만 있어도 나라를 구하고도남을듯
최고 수준의 위인! 😌 다른 나라에 이런 훌륭한 위인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이정도 인 분 없을 거야!!!
없을듯.... 신의경지임
이순신은 비겁하기 싫었던 거 아닐까. 쪽팔린 거 난 안해! 자존감이 대단한 인물.
자존감 강했으면 백의종군하라고 할때 그냥 자살했겠지
난중일기 보면 이순신도 사람이라서 스트레스로 각종 신경성 만성질환을 앓았던 기록이 보임. 그사람도 사람이었음. 스트레스가 몸으로 와서 온전히 홀로 견디는 성격임. 신경이 예민한 사람들이 일기 쓰는 습관이 많음..
@@turksaie1550 강하다고 자살하는 선택지만 있는 건 아니잖음
@@turksaie1550 자존감=/=자존심
백의종군때 자결안했다고 자존감이 높지 않다니ㅋㅋ 이건 해석이 과함
무슨 시련있을때 마다 자결을 선택하면 우리가 아는 위인 태반은 업적도 없이 자결했어야함 자결이라는 것을 너무 미화하시는듯
2:25 부분 공감 합니다
그런 분이 계셨으니 우리 민족이 존재 하는 것이죠
이순신의 2~30대 기록이 많이 없는게 아쉽지. 그의 성격상 분명히 청년때도 일기가 있을거 같은데 발견된다면 매우 흥미롭겠지...
이순신장군 유년시절 의외로 쌩판다른사람이에요...ㅎㅎㅎㅎ 기록에보면 지금시대로치면 동네 양아치 일진 이런부류... 어떤일이있었는지 사람이 확변함
청년때 일기였으면, 아마 확고한 의지는 똑같겠지만,, 젊은혈기라 개족같은색히십색히들, 말이 실수해서 떨어졌는데 겨우 그거가지고 낙마시켜? 🖕이거나 먹어라 이랬을듯..
아.. 이순신 장군님께는 죄송..ㅠ
정말 죄송..
조선시대 평균수명이 40-50대였다고 보면
32살에 겨우 과거 급제 했으니
@용동 ✌🏻😆✌🏻 ㅋㅋㅋ 아 근데 그런일이..설마.. 그래도 웃김..ㅎㅎㅎ
유년 시절 기록보면 동네짱이었다는데 ㅋㅋ
이순신 장군의 청렴은 일을 원리원칙에 따라 철저히 지킨 것에 비롯한 거라고봐요
다른 사람한테만 그렇게 하라고 강요했다면 이렇게 높은 평가를 받기 어려웠을텐데 그 원칙을 자기 자신은 더욱 철저하게 지켰기 때문이죠
그에 대한 결과는 23전 23승에 성웅이란 칭호마저도 부족하게 느껴질만큼 대단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융통성은 이순신보다 원균이 더없었다는게 아이러니함 이순신은 군율은 엄격하긴해도 일만잘처리하면 휴식도 주고 놀고싶으면 놀수있게도 해줬음
안그래도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는데 말씀을 들으니 더욱 존경의 마음이 생깁니다.
심용환작가님 해설 너무 좋습니다.
찾아보고있습니다.
오로지 정직만를 지킨다는게 거의 인생을 포기한다는것과 같으니..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작가님 감사합니다. 역사저널그날에서 뵙고 이 채널도 계속 보고 있습니다.
가끔 이순신 장군 일대기를 보다보면 미래에서 온 사람이 아닐까 싶음,,
세종대왕도..
황현필 선생님도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구독하실 것같은데, 추천드립니다.
황현필 한국사.
미래에서 온 거 맞음. 이순신 장군이 확립한 수군 명령 계통은 근대적 함대 운영법임. 현대는 공군이 나와서, 달라졌지만
@@baseboy5152 으 빨간 냄새
이런 장군님도 개인 다이어리에 원균을 원흉이라고 쓸만큼 빡쳐하는 인간적인 면모도 있으셨다고함
원균이 얼마나 등신이었을지 짐작이 감
경외 한다고 하죠 가까이 하긴 어렵지만 존경하는거요 카르타코 명장 한니발도 병사들 끌고 장장 17년을 로마에서 노숙했지만 탈영병은 한명도 없었다고 하죠
말도 없고 병사들과 같은걸 먹고 같은데서 자면 장군 근처를 걷는 병사들은 발소리를 줄여서 잠에서 깨지 않도록 조심했다고 하네요
정말대단하신
이순신 장군님
정말 대단하고 감사합니다
파도파도 미담뿐인 이순신 너란사람...
왜반말이야? 니까짓게 이순신장군께 반말이냐? 예의를갖춰라
@@comelyjh 이보세요 당신이나 예의를 지키세요..! 처음보는 사람한테 말뽄새가 그게 뭡니까??!
@@삼공-n2c 이순신장군께 버르장머리없이 반말하는 새끼는 욕쳐먹어도 싼것을 예의를바래? 이런 ㅉㅉㅉ 거울이나보고살어
@@comelyjh 죄송한데요... 너란사람 저거 반말이 아니고 일종의 유머에요... 기분 나쁠 수 있는데요 저 유머는 사람을 크게 칭찬하거나 찬양할 때 쓰는 표현이구요 쩝
@@삼공-n2c 유머로 하는 말이면 반말이 반말이 아닌게 되나요
유머로 하는 말이 반말이 아닐거 같으면
직장 상사에게도 하고 할아버지한테하고 이순신님 묘에 가서도 해보시죠
저런 유머는 사람을 가려가면서 해야죠
싸가지 없게 어디 조선시대 구국의 성웅에게 반말입니까 반말이
율곡선생과 충무공은 같은 덕수이씨 문중인데 이조판서로 재직중인 율곡선생이 만나자고 하였는데 일부러 피한것을 보면 충무공을 대단하다고 해야할지 앞뒤가 꽉막힌 사람이라고 해야할지...
세상에 이런 사람 없습니다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엄격한 원칙주의자. 임진왜란 아니었다면 진즉에 축출되었겠지요ㅜㅠ
어느정도 공감이 되는 말씀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랬기 때문에 이순신이라는 사람이 성웅칭호 받는것 일수도있음 이순신이 자신의 신념에 어긋나도 적당히 편하게 타협할 줄 아는 인물이었으면 명량이나 노량같은 해전은 없었을것 같아요
@@범생이한량 뛰어난 장수 + 앞뒤 꽉 막히고 자기자신에게조차도 타협하지 않는게 이순신이지요. 요즘같으면 흔히들 말하는 말 안통하는 공무원, 말해도 못알아먹는 또라이지요. 레미제라블의 자베르경감같은 타입. 그래서 더 멋있는것 같습니다.
@@dubbybubby3024 근데 흥미로운 기록이 있더라구요 명제독 진린한테는 성대한 주연도 열어주고 수급 베어다가 진린한테 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진린한테 호감을 사기 위해서 말이죠 이순신 장군 입장에서는 쨋든 진린한테 명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 됐는데 진린에게도 자신이 뻣뻣하다는 인상주면 왜군 잡기가 수월하지 못할까봐 그런것 같음
이런 기록보면 자신에게 조차 가혹하지만 군인으로서 목표를 이루기위해서는 예외적으로 융통성이란 것도 발휘한 것 같음
쨋든 신기한 인물같아요
@@범생이한량 이야... 정치감각 까지 겸비했었네요.
상사가 이순신같이 원리원칙을 들이대도 그 입장또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내가 리더가 되었을 때 구성원의 불만을 이해하고 들을 수 있는 진짜 리더가 될 수 있다.
소통은 일방통행이 아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아요. 아랫사람을 보면 윗사람을 알 수 있는 거겠네요!!
오늘날의 공무원들이 보고 배워야 할 점 모든 공무원들 국회의원 등등
3:02 와 핵공감... 해병대 이병으로 입대해서 1년여 군생활을 하고 상병이 되었을때 이 해병대라는 집단이 너무 너무 멋있고, 내 인생을 걸어도 좋겠다 싶어서 부사관 복무를 결심하고 부사관이 된 후, 병때는 기껏 고참이래봤자 많아봐야 나랑 두살정도 차이나는 또래였지만, 하사때 중사, 상사 선배들은 30대 40대 말그대로 어른들이었는데, 거기서 생긴 세대차이/격차를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선배들이 전날밤 술집에 가서 술마신 얘기들, 형수님이랑 다툰 얘기들, 이번 당직은 어떻게 빠질까, 다음 훈련은 어떻게 빠질까 이런 얘기들을 들으며 군 간부로서 어떻게 저런 얘기들을 할까 싶었고, 같은 간부인게 부끄러워 군을 나왔는데. 내가 나이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니 그 선배들의 마음이 이해가 되고, 나도 소위말하는 아재가 되고 꼰대가 되어가며 이제는 그 선배님들을 부끄러워했던 20대의 어린 내 모습이 부끄럽고, 지금 나도 그렇게 되어가는게 부끄럽다. 항상 남의 입장이 되어보고, 남의 기준을 이해하며 살아야 하는데..
진짜 정직하시다 장군님... 승진이 보장되는 이이와의 만남을 미루다니...
울어도 되요? 눈물납니다
그저 킹갓제너럴 이순신 장군님
원칙과 청렴하면 떠오르는 또 한분 생각나네요
이순신 장군의 내면적인 아름다움(?)을 알게 해주는 내용입니다. 감사합니다.
원래 군대에서 무섭고 깐깐한 지휘관 밑에 있으면 귀찮고 짜증난다고 느낄수 있지만 가장 큰 축복을 받은거임
무능한 지휘관만큼 전장에서 위험한건 없기때문이지
실제로 이순신 장군 후예면 평생 떵떵거릴수 있는데 그 후예들은 이순신장군의 모습을 따라 청렴했고 전장에서 전사한 장군이 가장 많은 집안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먼저 나서서 전투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더웃긴게 율곡이이집안 문관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이순신집안은 무관만나옴ㅋㅋㅋㅋㅋ문관으로 급제한자는 딱한명뿐이고 ㅋㅋㅋㅋㅋㅋ
5:40..... 성룡이형아의 테스트를 간파한 이순신제독....😏😏😏
사람이 아니야.... 사람이 저럴 수가 없어 ㅡ,.ㅡ;;
와 대단하다. 같은 민족인게 자랑스럽당 . ^^
면피제도 지킨다고 자기밑에서 몇년이나 싸우고 공도 세운 맏아들과 조카들도 무과 못보게한 분이 이순신장군이신데.....
이런 킹갓제너럴 이순신장군조차 학을 떼신 그 균은 대체...
존경합니다 이순신장군님
진짜 역사을 알아가고 들을수록 감격의 쓰나미가 오지
지금도 옳곧고 훌륭하신 능력있는 분들 많이 있다!
우리가, 국민들이 주변에서
못알아보고
못지켜주고
못 키울 뿐이지...
역시 레전드 오브 레전드~~!!
깔 게 없어.
김훈 - 칼의 노래 소설에 난중일기 일부를 묘사한걸 보면 군졸이 쌀을 훔쳐 도망갔던 탈영병을 잡아왔다..목을 베었다...
1년전에 탈영했던 넘을 잡아왔다..
목을 베었다..
이런 부분만 떼어놓고 보면 목따기 전문가임..
말 제대로 안들으면 그냥 목아지 날아가는거..
그러니 훈련 수준이 높고, 연전연승한거...
물론 본인과 주변 장수들까지 똑같이 훈련하고, 애썼으니 가능한 결과이겠지만..
전시에 탈영은 지금도 총살감이죠.
군율은 지켜져야죠 ㅎㅎ
다른 지휘관도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다른점이라면 뒷배경을 보지않고 군율대로 행한거고 당시 군역기피는 현재 군역기피와는 다릅니다
군영무단이탈은 즉결처형이고 군기가 가혹하다해도 엄격하지 않으면 따르는자가 생기니 군율이 엄격한겁니다
손자병법의 손자도 초빙되어서 초빙한군주가 선생의 전법을 내후궁들에게 써서 정병으로 만들수 있겠소 조롱하죠
손자가 후궁들중 두무리로 나누어 두명을 각각 두무리의 머리로 삼의며 진법을 펼치지만 후궁들이 손자를 희롱하여 북에 맞춰 진을 펼치지 않고 킥킥대기만 하죠
이에 손자가 두무리의 머리격인 후궁둘의 머리를 군율에 의해 배어버리죠
두후궁의 머리들이 날아가자 북에 맞추는 후궁들의 몸놀림이 달라지죠
즉 군기는 군율의 엄격함에 따라 달라지고 군세에 영향을 준다는거죠
존경스럽네요..
킹갓제네럴 이순신..당신의 미담의 끝은 어디입니까..
평시는 모르겠고 전시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최고지. 살아돌아가서 가족들을 볼 수 있게 해주잖아
증말 털어도 털어도 미담만 나오는 충무공...
음악 소리 쪼끔 줄여주시면 엄청좋겠네요 역사 공부에 방해가되네요
이순신 장군님과 같은 분들이 일반적이게 되면 위인이 아니게 되듯이 정말 훌륭한 분이신듯
뭐야… 너무 완벽하잖아…. 멋져 👍
근데 군대에서 상사가 참군인이면 당장 몸이 힘들어도 따르게 됩니다. 저희 중대도 중대장이 참군인일때는 맨날 훈련에서 1등했는데 깐깐하고 짜증만 많은 중대장으로 바뀌니깐 다들 혼나기 싫으니 아무도 나서서 뭐 안해서 훈련성적이 뚝 떨어졌었죠.
좋은 감동 감사. 좋은 장면 캡쳐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청렴하고 강직하게 사려면
ㅡ 정신적 올바름이 강해야하고
ㅡ 집안이나 자신이 돈이 있어야
유혹에 잘 넘어가지 않고
ㅡ 융통성없고 답답하다는
주위의 평을 당연시 여겨야하고
ㅡ 이권을 달리하는 주위 사람들의
거짓 루머에 견뎌야하고
ㅡ 바르게 사는 것을 방해하는
양심버린 악인들에게
더 악랄하게 싸워 작살내서라도 이겨야한다
ㅡ 상사나 동료들의 시기 질투를
견뎌야한다
ㅡ 같은 삶의 가치관을 공유하는
정신적 동지를 얻으면
삶에 대한 엄청난 위안과 용기를 얻을 것이다
이중에서 삶의 가치관이 옳바르다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하는
"경제력"을 가지는 것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월급을 받는 자는 월급 주는 자의
뜻을 거스르지 못한다
글이 좋아서 그런데 출처가 어디인가요?
@@DavidLee-ge3nx
좋아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냥
제가 섰는데요
근데 융통성은 어느정도 있기는했데요 진린대한거랑 무기정비도 잘하면 상도주고 놀게하면서 구경하고 했다고하니
좋은 강의 감사합니다
사실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 장군님이 만사가 꽉 막히신 분은 아닌게 부하들이랑 친근하게 지내면서 보드게임도 하고 집에 놀러가서 꽐라가 될 때까지 퍼마시기도 하고 활쏘기 내기도 하셨던 걸 보면 법도를 철두철미하게 준수하셨을 뿐이지 개인적으로는 의외로 유들유들한 성품이셨을 가능성도 있음. 특히 왜란 후기 때 진린을 조련(?)하는 걸 보면 코믹하기까지 함ㅋㅋㅋㅋ
좋아하는 이유가 다 있다고요
존경심은 그냥 생기는게 아님.멋있어
세상에 불만 없는 부하들이 어디.있겟나..
원칙대로하면 융통성없어서 당장은 문제가 생기는것 같아도 결국은 그게 효율적인것...👍👍
오늘날 모두가 배워야할거같아요
ㅎㅎ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전시에야 이순신 장군같은 상관이 든든하지만 일반 회사생활 등에서 내 상사가 저런 분이면 겁나 FM대로 하고 원칙대로 뺑이치느냐고 숨막혀 죽을지도.
꿈보다 해석이라고 님의 해석도 아주 멋진 작품입니다~~~^^
근데 원칙적이고 엄격하더라도 공정하고 스스로에게도 철저하면 아랫사람들이 알아서 잘 따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