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은 논에 무기질이 풍부한 숙성된 거름을 많이 주고 땅에 좋은 비료도 충분하게 줘서 남한 논밭은 비옥해서 곡식이 잘되며 농사에 되해서 많은 연구를 해서 농민들에게 그 기술을 보급하기 때매 소출이 많이 납니다 그리고 요즘은 빵과 라면등 대처 식사거리가 많아 쌀소비가 적습니다 ㅎ
남한도 60~70년대에 어린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지금의 북한과 다르지 않았어요 그때는 쌀씻을때 돌 나올까봐 조리로 일어서 밥을 했었죠 어머니가 쌀을 여러번 일어서 밥을 했어도 밥먹을때 우리는 가끔씩 돌을 씹을때가 있었어요 그리고 국가에서 쌀소비 줄이려고 혼분식을 장려해서 보리밥이 싫은데 학교에서 검사를 하니까 보리쌀 잔뜩넣은 잡곡도시락 싸가고 그랬던 기억도 나네요..
제 나이 이제 60인데 말씀 들어보면 지금 북한이 남한 70년대 초하고 거의 비슷합니다.. 시골 면 소재지인데도 하루에 버스 2번 오고, 전기도 74년도에 들어왔는데 자주 정전도 됐고 처음 5w짜리 고추전구가 그렇게 밝을수가 없었어요..50년 전인데도 어제처럼 기억납니다.. 당연히 쌀도 조리로 일어 먹었고, 쌀 벌레도 있었지요..보리고개에는 대부분 점심은 감자로 먹었어요..중학생때는 보리베기, 모심기에도 동원됐었어요... 같은 민족인데 체제와, 지도자의 차이가 50년을 낙후하게 만들었네요..자유찿아 오신 분들 항상 응원합니다..
우리나라도 70년대까지는 벼농사를 전부 인력으로 했던 기억이 나는데 80년대부터 급속도로 기계화된것 같아요. 경제발전으로 축산물 수요가 많아지면서 비례해서 쌀소비가 엄청 줄어들었지요. 지금은 우리나라 축산물 소비량이 유럽, 미국이랑 비슷한것 같아요. 그래서 애들도 덩치만 엄청 커졌지요.
식문화가 바뀌어서 그래요 70-80년대까지만 해도 중고등학교 때에 도시락 가지고 다니고 외식문화도 그리 흔치 않았어요...지금은 패스트후드 음식이 번창하고 다른 먹을꺼리가 있다보니 아무래도 쌀 소비가 줄죠...한국도 1970년대까지 쌀먹걸리도 정부에서 못 만들게 했어요. 80년대 들어와서야 정부에서 허가했죠...그만큼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부족했다고 하더라구요...
제가 어느 탈북민의 유튜브를 봤는데요...그 분은 북한에서 옥수수 개량법(?) 그런걸 하는 전문직이었는데, 늘 쌀이 부족해 허덕이는 원인이 뭘까 고민하고 연구하다가 남한의 통일벼..뭐 그런 정보를 알게되어 직접 볍씨를 구해서 연구 끝에 옥수수 연구소 앞 땅에 농사를 지었답니다.그해 가을 엄청난 양의 추수를 하곤 너무나 흥분되고 기뻐 그걸 당시 최고 주석에게 보고해야겠다고 하니 당시 윗 간부선에서 적극 막았답니다. "너는 그렇게 눈치가 없냐..풍년이 드는걸 위에서 좋아할 것 같으냐.. 배가 고파야 인민들이 딴 생각을 안한다고 위에선 그런데 관심도 안가진다. 오히려 너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다.." 충격을 받은 이 분은 너무나 큰 배신감에 치를 떨었는데 탈북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했습니다..그 분 이름이 이민복님이었던가? 기억이 잘 안나는데 대북 쪽 왕성한 활동을 하는 분이었어요. 참 기가차서 할말을 잃게하는 일이지요.
김책공대 나오신 이민복 박사님이. 북한에서 옥수수 연구를 하면서 남한보다 수확량이 많게 농사를 지을수 있어 김일성에게 보고하였으나 오히려 조용히 있으라고 하고 이후 감시대상으로 분류가 되었다고 하네요. 박사님은 인민들이 배가 부르면 충성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농법이 발전될수 없다고 합니다.
남편분 영상 우연히 보고 찾아와 구독하고 갑니다 앞으로 행복하고 잘 살길 바라고요 제나이 44인데 저도 초등학교때 까진 (80년대) 쌀벌레 (바구미와 하얀 애벌레) 많이 있었죠. 돌도 많고… 어머니가 잘 골라 밥을 해도 늘 돌이 씹히고 벌레가 있었습니다 😊 지금 시골은 고령화로 농업이 한쪽으로 기웁니다. 농사좀 짓는 집엔 대부분 가정용 정미기가 있고 벌레 안생기게 그때 그때 필요한 만큼 도정하여 밥을 해먹습니다 그런 부분하고 저장 기술이 발전하여 벌레가 덜생기는 거죠. 지금도 어디든 도정한 쌀을 담아서 상온에 두면 희한하게 바구미가 생깁니다^^ 도시에 사는 분들이야 조금씩 사서 먹으니까 잘 모를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쌀 저장고나 그런게 없으면 냉장고도 활용하니까~^^ 남한 지역은 넓은 대표적인 4대 곡창지대가 있어서 산악 지대로 이루어진 북한보다 아무렴 기본 생산물량이 더 클수밖에 없어요. 거기다가 기온도 더 적당하고, 또한 가장 큰 차이는 생산량이 많고 병충해에 강한 꾸준한 품종 개량과 시골 논을 반듯하게 만든 농지정리를 통한 기계화,로 생산량이 많을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쌀 생산량이 넘처나 기존 농사를 지으시는 분들은 쌀깞이 떨어진다고 정부에 쌀깞 보장을 하라는 시위도 하잖아요. 사실 그건 시장경제 논리에 따라 쌀 소비가 줄어들고 다양한 식문화및 먹거리가 그 자리를 메웠기 때문에, 농촌에서도 변화를 해야할 부분입니다. 아무조록 대한민국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시길 바랍니다 😊🙏
학교급식은 더 최고랍니다. 제가 40대인데 그때는 보온도시락을 몇 개씩 싸서 다녔어요. 저희가 3남매인데.오빠들은 고등학교 때 아침점심저녁을 모두 도시락으로 먹었고.저는 초등학생이라 도시락을 하나만 싸갔어요. 엄마가 새벽부터 일어나셔서 도시락을 7개나 싸셨던 기억이나요ㅋ 요즘은 애들이 학교에 일찍가서 하는 0교시 수업도 야간자율학습도 없어요. 학교급식도 매일 고기반찬에 잡곡밥에 과일도 주니 좋아오 그 시절 엄마는 어떻게 도시락을그렇게 많이 싸셨는지 존경 😅 요즘은 도시락 안 싸줘도되니 편해요. 민희씨네도 예쁜 아이 낳으시고 학교도 보내시면 우리나라 급식에 고마워하실거에요. 쌀 얘기 하다가 급식 얘기까지 갔네요
1960년 중반까지 여기도 보릿고개가 있었다더라구요 가을에 수확한 쌀 떨어지고 아직 보리를 수확하기전이라 곡식이 떨어져 먹을것이 부족한 시기 잘은 모르나 쌀 품종 계량 적절한 비료 공급 잡초 없애는 제초제 그리고 농사 기계 보급 쌀 수확량 증대를 위한 국가 기관의 노력 수확량 증가할수록 농민들 수입이 증가되니 더 노력했을거구요 70년 초중반생인데 기억하기에 80년대 후반까지는 각 가정에 조리라고 돌 걸러내는 쌀 씻을때 쓰는 도구 있었어요
쌀에 벌레가 일 정도면 그 집은 오랫 동안 밥을 안해 먹고 귀찮아서 대부분 외식이나 주문으로 시켜 먹다 보니 쌀이 묵어서 벌레가 나는 것 같네요. 제가 국민학교(초등학교) 다니던 70년대에 쌀이 부족해서 정부의 혼분식 장려로 쌀밥 70%에 보리밥 30%를 섞어서 쌓아 와야 해서 선생님이 도시락 검사를 하였고, 부자 집 아이들이 쏘세지 반찬과 댄뿌라(어묵)무침 반찬이나, 계란 말이나 계란 후라이를 쌓아 오는 친구가 부자 집 아이였죠. 북한이 우리 70년대를 연상하게 하는 군요. ^^
대한민국 사람들은 지금 얼마나 좋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 망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타인의 인스타나 페북같은 SNS에 올라오는 사진들과 자신의 삶을 비교하면서 불행한 삶을 살고 있어요. 탈북민 유튜브를 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좋은 나라에서 살고 있는지 정신무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감사히 시청하고 있습니다.
한국도 70년도에는 탈곡기 두분이 탈곡기에 발로 눌러 탈곡 했읍니다. 그당시는 박아지 줄처럼 생긴 박아지가 나와 모두 사용하고, 쌀에서 흔들어 물을 살살 흔들어 끝에 돌을 여러분 골라네어 밥을 했습니다. 동네 마다 쌀집이 있었고 80년도경 쌀집 마다 돌들을 등 겨를 고르는 자동 기계를 개발하여, 쌀사러 가면 돌을 고른 쌀만 팔아 너무 좋았어요, ㅎㅎ
저도 일본에서 돌아와서 당근이란걸 안지 2년 조금 안됬는데 생활하는데 필요한 물품들을 저렴한 비용으로 구입하는 편입니다 아직은 대학교 다니는 자식이 둘이나 있어서 허리띠를 졸라 메야 되니까요 저도 나눔을 좋아하는데 잘 안입는 옷이 많아요 한번은 제가 마음에 드는 옷을 네고해서 20만정도에 샀더니만 이게 심심풀이로 검색해보니 희귀템이라 물경 천만원이 넘게 거래 되고 있었어요 부르는것이
대한민국도 곡물 부족 국가입니다. 쌀만 남아돌지 밀, 옥수수, 콩이 절대 부족해서 수입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사료용 옥수수는 100% 수입이고 콩의 자급률이 30%가 안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밀의 자급률도 0%에 가까운 2% 정도이고, 전체 식량 자급율이 23% 밖에 안되기 때문에 식량이 곧 안보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80년 이야기을 한번 더 해보면 (왜냐면 탈북자분들이 우리나라 70년대/80년랑 비슷하다고하시니) 쌀집에서 쌀이나 잡곡류을 되로 팔던 시절도있기는 했습니다..쌀은 가마로 팔기도했지만... 아침에 가면 쌀집앞에 쫘악 펼쳐놓으면 "아저씨 큰되 2개만 주세요.." 하면 주곤했던 기억이 나는데 언제부터 포장된 제품이 나오고 마트들이 등장을 하면서 쌀집들이 전부 사라졌죠..그때는 가마로 가면 쌀집아저씨한테 "아저씨 배달되죵.."하면 자전거로 해서 배달을 해줬던 기억도 나네요..쌀집이 사라진게 90년대중반쯤부터였던것같네요..그러고보면 80-90년대 있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사라진게 참 많네요..방앗간도 참 많았는데 거의 사라지다시피했으니말이죠.. 시골이나 가야...요즘은...
안녕하세요 사이다에서 남성분 인터뷰 보고 넘어왔어요. 그런데 궁금한게 생기네요. 북한에서 유학을 보낼 정도면 그 분야에 전문성이 있는데 새터민 분들은 한국에 와서 그 전공을 살리기 어려운 건지요? 그리고 가끔 김일성종합대학 출신인 분들이 유투브나 방송에 나올때가 있던데 그런 학교들은 명문일텐데 학력 인정을 해주거나 하지 않나요? 뭐랄까 옛날에 한국인들이 미국으로 이민갈때 학교 선생님이어도 세탁소 개업을 한다던가 이런식으로 자기 직업을 살리기 힘든 것과 비슷한 느낌이네요.
한국에도 60~70년 대만 해도 쌀을 일었어요 돌때문에 그때가 생각나네요 밥할때 마다 쌀을 조리로 일어서 뜨던 우리 어무이 그립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불편한것은 못참고
개선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한경희 스팀 청소기도
나왔다는 썰 이 있습니다
북한은 불편 극복하는데
사람 죽어나가도 개의치 않는것 보면
공산당이 확신 하네요
민희님!
똑순이 솔직토크 응원합니다.
북한에서 오신 과학자 분께서 말씀하셨어요. 자기 농사와 남의 농사와의 차이... 그 차이를 알고 위에 보고했다가 죽을뻔 하셨대요.
엇 이내용 유미카님 영상이었나?
거기서 올라온거 같은 기억이 ㅋㅋㅋ
그분 농업관련 과학자라 그랬던거같음. 종자연구하고 과학적농법 연구하고 그랬는데 결론은 집단농장방식은 수확량이 적다는 거였음. 그 결과를 김일성한테 직접 알렸다가 좌천됐다 그랬나 죽을뻔했다고 했나... 하여튼 농작물의 개인소유를 인정하면 수확량이 늘어나고 기대수확량의 105프로도 나온다고 그랬었음...
그래서 공산주의가 망하는 거지요. 게다가 일단 김씨 일가 배부터 채우고 난 다음에 내려오니 먹을 것이 어디있나 ㅎㅎ
한국도 70년대에는 쌀에 벌레가 많았어요.
그때는 가마니로 쌓아두고 먹으니 오래될 수밖에 없어 벌레가 많았지만
지금은 조금씩 사 먹으니 벌레가 생기기 어렵죠.
다양한 컨텐츠 조으네요.
남한은 논에 무기질이 풍부한 숙성된 거름을 많이 주고 땅에 좋은 비료도 충분하게 줘서 남한 논밭은
비옥해서 곡식이 잘되며 농사에 되해서 많은 연구를 해서 농민들에게 그 기술을 보급하기 때매
소출이 많이 납니다 그리고 요즘은 빵과 라면등 대처 식사거리가 많아 쌀소비가 적습니다 ㅎ
말씀을 너무 잘 하시네요.
완전 솔직하고 긍정적인 나민희님 응원합니다.❤❤제 작은아들 닮은 정국씨도요.❤❤
한국도 11월 쯤, 도시민들은 쌀 한 두 가마(80kg들이),연탄 수 백장,김치 100여 포기 이상 씩 김치를 담가서 겨울을 준비했죠.
70년대 까지 얘기입니다.
어제 생방송 잘 봤습니다
아이고, 저도 오늘 회사 점심시간에 반공기는 남기고 했는데... 제 일상에 다시금 감사함을 느껴야겠네요
손으로 뱅글 뱅글 돌리는 탈곡기 어릴적에 본거 같네요 ㅋㅋㅋ
먹고싶은대로 흰쌀밥 실컷 먹고 대신에 운동도 많이 하면 걱정 안해도 됩니다.
민희씨 우리도 그런 시절이 있어서 요 60년대
윤끼가 촤르르 반짝이는 햅쌀밥이 참 맛있죠~ 건강할때는 괜찮은것 같지만 나이들어 가면서 몸도서서히 안좋아 지죠~ 글고 쌀밥은 부드럽고 오래씹을 필요를 못느끼지만 잡곡은 오래씹어야 되죠(물론영양적인면에서도...)...오래씹어 먹으면 살도 안찌고 질병에도 노출이 덜되는 장점이 있고요^^ 정국,민희님 야기듣다 보면 70년대 어릴적 생각이 나네요 첩첩산중에서 산을 병풍삼아서 산골짜기에 시냇가에서 물고기도 잡으면서 살았더랬죠~그래서 팬인가보오~^^~지금처럼 예쁜가정 노저으면서 항상 건강하게 즐겁게 사는 모습 계속 볼께요~~~😊
남한도 60~70년대에
어린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지금의 북한과 다르지 않았어요
그때는 쌀씻을때 돌 나올까봐 조리로 일어서 밥을 했었죠
어머니가 쌀을 여러번 일어서
밥을 했어도 밥먹을때 우리는
가끔씩 돌을 씹을때가 있었어요
그리고 국가에서 쌀소비 줄이려고 혼분식을 장려해서 보리밥이 싫은데 학교에서 검사를 하니까 보리쌀 잔뜩넣은 잡곡도시락 싸가고 그랬던 기억도 나네요..
쌀 오래먹으면 맛이 없어요
민희,병국씨 항상 행복하세요 ~
응원 합니다 ~
굶겨야 오로지 먹는데만 신경을 써고 자유로운 사고의 영역이 넓어지면 북한의 거짓 선동정치가 탄로나고 위태로워지니 굳이 쌀생산 개선할 의지가 없겠지요
두분 늘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정국+민희,
지성미
넘치고 넘치는
멋진 부부!!!!!!!!!!!!!!!!
한국도 90년대 지역별 농협에서 추곡수매센터에서 현대화된 탈곡.정미 장비를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이전 80년대까지(이때는 마을별 소규모 정미소 체제.전국에 수천개 소형 정미소. 상당수 일제시대 도입한 장비)는 쌀에 '돌', '쌀벌레'가 가끔 보였어요....
제 나이 이제 60인데 말씀 들어보면 지금 북한이 남한 70년대 초하고 거의 비슷합니다..
시골 면 소재지인데도 하루에 버스 2번 오고, 전기도 74년도에 들어왔는데 자주 정전도 됐고 처음 5w짜리 고추전구가 그렇게 밝을수가 없었어요..50년 전인데도 어제처럼 기억납니다..
당연히 쌀도 조리로 일어 먹었고, 쌀 벌레도 있었지요..보리고개에는 대부분 점심은 감자로 먹었어요..중학생때는 보리베기, 모심기에도 동원됐었어요...
같은 민족인데 체제와, 지도자의 차이가 50년을 낙후하게 만들었네요..자유찿아 오신 분들 항상 응원합니다..
대한민국 70년대에사람굶어죽고 길거리에 꽃제비들 많앟나요?
@@Chduskdbej원글 쓴 분이 잘못 알아도 아주 단단히 잘못 알고 계신듯 한데요. 우리나라 70년대라도 사람이 굶어죽진 않았는데요. 개인의 상황에 따라서 배고프게 살기는 했어도 굶어죽지는 않았어요. 꽃제비는 더더구나 없었고요
저는 1950년생인데 전쟁때는 몰라도 70년대에 굶어죽은사람은 못보았습니다.@@Chduskdbej
저희 아버지 현재 80살이시고 엄마가 78살이신데 60~70년대때에도 한국은 굶어죽은 사람 없었다던데요 이상하네요
70년대에도 한국은 다 짜장면 먹고 매끼 쌀밥에 고등어 갈치 돼지고기 잘 먹고 살았어요~
우리나라도 70년대까지는 벼농사를 전부 인력으로 했던 기억이 나는데 80년대부터 급속도로 기계화된것 같아요. 경제발전으로 축산물 수요가 많아지면서 비례해서 쌀소비가 엄청 줄어들었지요. 지금은 우리나라 축산물 소비량이 유럽, 미국이랑 비슷한것 같아요. 그래서 애들도 덩치만 엄청 커졌지요.
요즘 보관 잘못하면 작은 구멍이나 찢어진것 있는데 모르고 몇달씩 방치해 놓으면 또는 습한곳에 오래두면 쌀에 벌레나 곰팡이가 생기더군요
종자 업그레이드
자동화 기계화
쌀벌레는 바구미 입니다.
그늘에 펼쳐놓은면 벌레가 스스로 모두 나갑니다,,
햇볕에놓으면 쌀이 갈라지니 반드시 그늘에 두세요...
식문화가 바뀌어서 그래요 70-80년대까지만 해도 중고등학교 때에 도시락 가지고 다니고 외식문화도 그리 흔치 않았어요...지금은 패스트후드 음식이 번창하고 다른 먹을꺼리가 있다보니 아무래도 쌀 소비가 줄죠...한국도 1970년대까지 쌀먹걸리도 정부에서 못 만들게 했어요. 80년대 들어와서야 정부에서 허가했죠...그만큼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부족했다고 하더라구요...
구독자 14만 임박~~
두분 목소리도 좋으시고 이야기듣고
있음 푹 빠져듭니다 ㅎㅎ
역시 똑순이^^ 똑똑햐~~
도시락이야기 들으니까 70년대 생각이 나네요 ㅎㅎ 한국70년대 그랬어요
저도 당근 많이 합니다
비결은 극가정책아닐까요?
인민이 배부르면 딴생각한다!
공산주의 경제체제가 문제인 것 같습니다. 내것처럼 열심히 안하니까요. 발전이없지요
최고!!!!!!!!!!!!!!!!
제가 어느 탈북민의 유튜브를 봤는데요...그 분은 북한에서 옥수수 개량법(?) 그런걸 하는 전문직이었는데, 늘 쌀이 부족해 허덕이는 원인이 뭘까 고민하고 연구하다가 남한의 통일벼..뭐 그런 정보를 알게되어 직접 볍씨를 구해서 연구 끝에 옥수수 연구소 앞 땅에 농사를 지었답니다.그해 가을 엄청난 양의 추수를 하곤 너무나 흥분되고 기뻐 그걸 당시 최고 주석에게 보고해야겠다고 하니 당시 윗 간부선에서 적극 막았답니다. "너는 그렇게 눈치가 없냐..풍년이 드는걸 위에서 좋아할 것 같으냐.. 배가 고파야 인민들이 딴 생각을 안한다고 위에선 그런데 관심도 안가진다. 오히려 너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다.." 충격을 받은 이 분은 너무나 큰 배신감에 치를 떨었는데 탈북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했습니다..그 분 이름이 이민복님이었던가? 기억이 잘 안나는데 대북 쪽 왕성한 활동을 하는 분이었어요. 참 기가차서 할말을 잃게하는 일이지요.
매 번 이야기가 새롭네요^^
북한은 아직도 70년대에 멈춰있구나
북한은 지구상에 후진국가에 머물고. 지구상에 선진국으로 통하는 국가와 비교는 넌센스..
70 년도가아니라 60년도라할수있죠 70년도엔 그래도 지금에북한보단 훨 나았어요 북한은 사람살곳이 아니네요😢😢😢
체제때문인것같아요농민들이엄청관리하거든요자식롤보듯이요
민희씨, 건강 생각해야해요~~ 당뇨 무서운 병입니다~ 북한에서 생활한것 처럼 잡곡밥에 유산소운동 ㆍ근육운동 일부러 하셔야합니다~~
김책공대 나오신 이민복 박사님이. 북한에서 옥수수 연구를 하면서 남한보다 수확량이 많게 농사를 지을수 있어 김일성에게 보고하였으나 오히려 조용히 있으라고 하고 이후 감시대상으로 분류가 되었다고 하네요.
박사님은 인민들이 배가 부르면 충성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농법이 발전될수 없다고 합니다.
70년대 생각나네요. 어서속히 정은이 일당 무너지고 북한에도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기를 소망합니다
남편분 영상 우연히 보고 찾아와 구독하고 갑니다 앞으로 행복하고 잘 살길 바라고요
제나이 44인데 저도 초등학교때 까진 (80년대) 쌀벌레 (바구미와 하얀 애벌레) 많이 있었죠. 돌도 많고…
어머니가 잘 골라 밥을 해도 늘 돌이 씹히고 벌레가 있었습니다 😊
지금 시골은 고령화로 농업이 한쪽으로 기웁니다. 농사좀 짓는 집엔 대부분 가정용 정미기가 있고 벌레 안생기게 그때 그때 필요한 만큼 도정하여 밥을 해먹습니다 그런 부분하고 저장 기술이 발전하여 벌레가 덜생기는 거죠. 지금도 어디든 도정한 쌀을 담아서 상온에 두면 희한하게 바구미가 생깁니다^^ 도시에 사는 분들이야 조금씩 사서 먹으니까 잘 모를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쌀 저장고나 그런게 없으면 냉장고도 활용하니까~^^
남한 지역은 넓은 대표적인 4대 곡창지대가 있어서 산악 지대로 이루어진 북한보다 아무렴 기본 생산물량이 더 클수밖에 없어요.
거기다가 기온도 더 적당하고, 또한 가장 큰 차이는 생산량이 많고 병충해에 강한 꾸준한 품종 개량과 시골 논을 반듯하게 만든 농지정리를 통한 기계화,로 생산량이 많을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쌀 생산량이 넘처나 기존 농사를 지으시는 분들은 쌀깞이 떨어진다고 정부에 쌀깞 보장을 하라는 시위도 하잖아요.
사실 그건 시장경제 논리에 따라 쌀 소비가 줄어들고 다양한 식문화및 먹거리가 그 자리를 메웠기 때문에, 농촌에서도 변화를 해야할 부분입니다.
아무조록 대한민국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시길 바랍니다 😊🙏
보리밥먹으면..신체건강해..노래도있었습니다...방구..겁나게나옴니다..😅😅.80년대..애둘만나아잘기르자...ㅋㅋㅋ인구억제정책도있습니다😊.시골에서80kg쌀마대에보내온적도있어요...쌀벌레당연히있습니다
찰현미 찰흑미 찰보리 귀리 넣어먹으면 맛나유~~
저 민희씨랑 나이 비슷한데
저 어릴때 그렇게 쌀펼쳐놓고 벌레뺀적있어요 할머니랑 ㅋㅋ
쌀 찐지 오래 되면 삼복 더위에 벌래 나죠. 요즘은 쌀도 보통 10키로 짜리 사서 먹고 삼복 더위에 집에 에어컨 틀고 하니까 벌레 못 봅니다..
@@OK-xe6cx요즘은 벌레찾기가 더 힘들죠
학교급식은 더 최고랍니다. 제가 40대인데 그때는 보온도시락을 몇 개씩 싸서 다녔어요. 저희가 3남매인데.오빠들은 고등학교 때 아침점심저녁을 모두 도시락으로 먹었고.저는 초등학생이라 도시락을 하나만 싸갔어요. 엄마가 새벽부터 일어나셔서 도시락을 7개나 싸셨던 기억이나요ㅋ
요즘은 애들이 학교에 일찍가서 하는 0교시 수업도 야간자율학습도 없어요. 학교급식도 매일 고기반찬에 잡곡밥에 과일도 주니 좋아오
그 시절 엄마는 어떻게 도시락을그렇게 많이 싸셨는지 존경 😅 요즘은 도시락 안 싸줘도되니 편해요.
민희씨네도 예쁜 아이 낳으시고 학교도 보내시면 우리나라 급식에 고마워하실거에요.
쌀 얘기 하다가 급식 얘기까지 갔네요
말씀을 잘. 하시네요.
감사합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집에 쌀통에 쌀이 가득하면 부자된거 같고 뿌듯하고 하셨지요. 쌀조리개 라는걸 젊은 사람은 모를거에요.
어렸을때 밥할때 쌀안에 돌을 고르던 기구가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쌀벌레 돌 이런게 없어졌어요.
쌀하니까 30년 전쯤 수입산이 몰아치니까 신토불이라고 우리농산물 이용하자 전국적으로 캠페인했던 생각이나네요 국가에서 농민보호에 힘을 많이써서 농업유지가 잘 되는것같아요 ㅎㅎ
비결? ---> 자영농
벌레먹은 쌀은 밥맛이 없어지니까 단시간에 처분하고싶어서 나눔하는것이여.....
북한이야 그렇다고 해도 요즘에 벌레있는 쌀을 누가 먹으라고
나눔할까
당근에 버릴물건 나눔하는 사람들 있던데.
일제시대때
보리밥에 질려서
보리밥 냄새만 나도 식사를 못할정도라고 말하셨던게
생각이나서.......
하얀밥만 먹게된다는 말에
동감합니다.
복 많은 얼굴상이네요...ㅎㅎㅎ😊
우리나라가 잘하는기술로 자동차 조선소 각종전기제품 수출하고 모자라는 식량은 수입하니까 풍족해진거죠 (자유 시장 개방정책)
쌀은 무조건 냉장보관해요~
곰팡이,벌레 생길까봐.
어르신들은 벌레 해볏에 널어서 기어나가면 드시는데 젊은사람들은 질색하고 다 버리죠ㅎㅎ
1960년 중반까지 여기도 보릿고개가 있었다더라구요 가을에 수확한 쌀 떨어지고 아직 보리를 수확하기전이라 곡식이 떨어져 먹을것이 부족한 시기 잘은 모르나 쌀 품종 계량 적절한 비료 공급 잡초 없애는 제초제 그리고 농사 기계 보급 쌀 수확량 증대를 위한 국가 기관의 노력 수확량 증가할수록 농민들 수입이 증가되니 더 노력했을거구요 70년 초중반생인데 기억하기에 80년대 후반까지는 각 가정에 조리라고 돌 걸러내는 쌀 씻을때 쓰는 도구 있었어요
옛날(5-60년대)엔 남한도 쌀에 돌과 벌레기 있어 상 위에 쌀을 깔아놓고 이물질을 골라내는 게 일상사.
남한을 그것을 개선하기 위해 끓임없이 노력했고, 북한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차이로 보임.
반갑습니다응원합니다 어릴적 시골에서 엄마가 쌀벌레 햇볕에쬐인느낌을 보았어요
곡물은 날씨가 더운 여름에는 쌀벌레가 생기게 마련이죠
바로바로 도정한 쌀을 조금씩 자주 사서 먹는게 좋아요
쌀에 벌레가 일 정도면 그 집은 오랫 동안 밥을 안해 먹고 귀찮아서
대부분 외식이나 주문으로 시켜 먹다 보니 쌀이 묵어서 벌레가 나는 것 같네요.
제가 국민학교(초등학교) 다니던 70년대에 쌀이 부족해서 정부의 혼분식 장려로 쌀밥 70%에 보리밥 30%를
섞어서 쌓아 와야 해서 선생님이 도시락 검사를 하였고, 부자 집 아이들이 쏘세지 반찬과 댄뿌라(어묵)무침 반찬이나,
계란 말이나 계란 후라이를 쌓아 오는 친구가 부자 집 아이였죠.
북한이 우리 70년대를 연상하게 하는 군요. ^^
쌀을 많이 소비하지 않기도 하고 비싸지도 않고 외식한번 덜하면 1-2달 편하게 먹을수 있으니 닭모이 용도로 나눔을 하게 되네요
한국도 60년대에는 도시락반찬이 소시지가들어있으면 그래도 중산층이라했죠 그런데 그핑크색 소시지가 몸엔 안좋답니다
몇해전 시골 방앗간에서 현미40kg샀다가 벌레때문에 다버린적이있습니다 (새들먹이로 주었죠)
❤❤
so good 👍
쌀벌레를 바금이(바구미)라고도 합니다.
1:18 당연하다 싶이 -> 시피
4:27 쌀을 수확할 때 -> 벼(나락)를 수확할 때. 벼를 찧어 껍질을 까면 그게 쌀.
올여름 더워서 쌀을 냉동고에 넣었네요 혼자사니까 10kg도오래먹는편 한국은 여러곳에서 수입함으로 여러가지가풍부하기지만 반대로 북한은 돈없어 물자가없어 궁핍함
바구미...
쌀을 점점 안먹는 추세라서 저희도 4kg 짜리 사다가 벌레 생길까봐 김냉에넣고 먹어요...당근 사기 많으니 조심하세요...돈 먼저 송금하는거 절대 하지 마시구요~
류희진님 한번 초대해주세요..근황이 궁금하네요 ㅋ
대한민국 사람들은 지금 얼마나 좋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 망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타인의 인스타나 페북같은 SNS에 올라오는 사진들과 자신의 삶을 비교하면서 불행한 삶을 살고 있어요. 탈북민 유튜브를 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좋은 나라에서 살고 있는지 정신무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감사히 시청하고 있습니다.
공감 합니다
70~80년대에는 쌀을 덜말리거나해서 오래보관하면 바구미라고 벌레가 있었지요 지금은 논에서 추수해서 도정공장에가면 수분함량에맟게 말려서 도정을하고 포장하니 벌레가 없지요
50년전 우리도 쌀에 벌레 많았어요^^
73년도 국민2학년때 담임선생님 가정방문 오셔서 우리어머니 밥했는데 담임선생님 돌 씹었던 추억 .........
쌀에는 단백질이나 특정 비타민 함량이 낮아서 콩 같은 잡곡이랑 같이 먹으면 부족한 부분을 상당수 커버해 줄 수 있대요
국민들 나누어주라고 보냈던 구호품들을 도중에 슬쩍 했던 쌀~~~
당근할때 유의 하세요 유물~ 으하하하
쌀벌레는 안에서 저절로 생기는 것인가? 외부에서 들어온 것일까?
@@흰눈이소복소복
쌀을 습한곳에 오래 두면
안에서 저절로 생긴답니다
한국쌀에 돌이 없는이유?
정미 과정에서 자동으로 벼가 덜벗겨진것(뉘)과 돌을 거르는 과정을 100% 거칩니다...
쿠팡에서도 팔아요 ㅋㅋㅋ
한국도 70년도에는 탈곡기 두분이 탈곡기에 발로 눌러 탈곡 했읍니다. 그당시는 박아지 줄처럼 생긴 박아지가 나와 모두 사용하고, 쌀에서 흔들어 물을 살살 흔들어 끝에 돌을 여러분 골라네어 밥을 했습니다.
동네 마다 쌀집이 있었고 80년도경 쌀집 마다 돌들을 등 겨를 고르는 자동 기계를 개발하여, 쌀사러 가면 돌을 고른 쌀만 팔아 너무 좋았어요, ㅎㅎ
탈곡기에서 바로 벼가 쌀이 되지 않습니다.
탈곡기에서 벼가 나오고, 벼를 창고에 넣어 건조시키고, 건조된 벼를 정미소에서 쌀로 정미합니다. 정미 과정에 돌 등 불순물을 자동으로 걸러냅니다.
나민희님ㆍ방송 잘보고 있어요
한국쌀에 돌이없는 이유는 탈곡도 깨끗하게 하지만 정미소에서 도정할때 석발기를 거쳐서 나오도록 되있어서 그렇고요 ,갈라진쌀 여물이 덜된 청취 이런쌀들이 다 골라져서 그렇답니다ᆢ저도 어린젊은 시절 정미소 운영을 했댓시유 ᆢ😅
70년대까지는 쌀집이 따로 있어서
가마니에 담아 팔기도하고 큰대박, 작은대박,
저울에 달아서 쌀을 팔기도 했습이다
민희씨 어린 시절이 80대인 저희 부모님 세대가 겪었던 어린 시절과 같네요. 저희 어머님도 어릴때 흰쌀밥으로만 먹는게 소원이셨데요. 손님이 오실때는 흰 쌀밥을 대접 하셨는데..제~발 남기고 가셨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으셨다네요. 그래서인지 자식인 저는 자라면서 잡곡을 먹어본적이 없었어요. 어머님의 흰 쌀밥 사랑은 지금도 진행형이고 건강상 아무리 권해도 기승전 흰쌀밥 입니다.
저도 봤어요, 그 항아리. 처음엔 5,000원인 줄 알았는데, 5,000만원 이더군요.😅
젏은사람들 벌레난쌀 그냥 바로 다 버리 던데요
아이면 비둘기 먹이로 줍니다
나눔하는 쌀은 사람 먹으라는 게 아니라, 닭 먹이로 주라는 겁니다. 모든 지역 카페에는 쌀을 닭모이로 나눔하는 글이 수시로 올라옵니다.
현미는 당일 도정해서 인터넷으로 다음날 받아서 먹습니다. 그래서 소량 단위로 사먹지요.
저도 쌀 나눔 10kg 2개 했네요
이사갈때 옷장도 수십만원주고 샀는데
나눔 했고요 tv 나눔 하는거 받아온적도
있고요 당근 진짜 개꿀임
저도 일본에서 돌아와서
당근이란걸 안지 2년 조금
안됬는데 생활하는데
필요한 물품들을 저렴한
비용으로 구입하는 편입니다
아직은 대학교 다니는
자식이 둘이나 있어서
허리띠를 졸라 메야 되니까요
저도 나눔을 좋아하는데
잘 안입는 옷이 많아요
한번은 제가 마음에 드는 옷을
네고해서 20만정도에 샀더니만
이게 심심풀이로 검색해보니
희귀템이라 물경 천만원이 넘게
거래 되고 있었어요
부르는것이
어허이~~~젊을때 미리미리 잡곡밥 잡쏴요!!!
마흔 넘어가고 건강검진 자주 받고 자꾸 조심하라는 소리만 듣게되니, 요새는 흰쌀밥 보기만해도 무셔워지네요,
그러니 외식도 꺼려지고 식사 약속도 안잡게되고, 술 약속도 반에 반으로 줄어버리고,,, 건강은 좋아지나 재미가 없네요 ㅎㅎㅎ
냥이동무 쌀필요하면 말씀하시라요 냥이동무 드릴쌀은 있습네다 다이어트가 걱정입네다 ㅜㅜ
공업제품 수출로 외화를 많이 벌어서 식량을 수입하니까요. 곡물기준 식량 자급율이 23%라 합디다. 소, 돼지 먹는 옥수수 사료도 수입하니 낮지요. 그러니 쌀 소비량은 주는 거죠.
대한민국도 곡물 부족 국가입니다. 쌀만 남아돌지 밀, 옥수수, 콩이 절대 부족해서 수입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사료용 옥수수는 100% 수입이고 콩의 자급률이 30%가 안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밀의 자급률도 0%에 가까운 2% 정도이고, 전체 식량 자급율이 23% 밖에 안되기 때문에 식량이 곧 안보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ruclips.net/video/6SxTFJeGkI0/видео.html 이 영상이 민희님의 궁금증에 대한 답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벌레생긴 쌀 음식물쓰레기에 넣지않고 나눔하시는분 참 좋으신분인가봐요ㅠㅠ
요소비료를 줘야죠....인분말고 ㅋㅋ
아이고 이쁜 민희씨는 그것도 몰라
여기 사람들은 밥을 적게 먹는대신
간식을 많이 하잔아 여기는 매년 쌀이 남아돌아 쌀 창고마다 쌀이
가득해서 골치를 알아 또 국제법상
쌀이 남아 돌아도 일정량 수입을
하게 되 있어요 북한에 주고싶어도
줄수도 없는처지 나 하지야 알지
요즘은 쌀을 바로 사기보다는 햇반을 비치해 두기도 합니다. 식구들 먹는 시간이 다르고 외식도 잦아서.. 집에 밥통이 있는데 안쓴지 몇년 된것 같아요..
80년 이야기을 한번 더 해보면 (왜냐면 탈북자분들이 우리나라 70년대/80년랑 비슷하다고하시니) 쌀집에서 쌀이나
잡곡류을 되로 팔던 시절도있기는 했습니다..쌀은 가마로 팔기도했지만... 아침에 가면 쌀집앞에 쫘악 펼쳐놓으면 "아저씨 큰되 2개만 주세요.." 하면 주곤했던 기억이 나는데 언제부터 포장된 제품이 나오고 마트들이 등장을 하면서 쌀집들이 전부 사라졌죠..그때는 가마로 가면 쌀집아저씨한테 "아저씨 배달되죵.."하면 자전거로 해서 배달을 해줬던 기억도 나네요..쌀집이 사라진게 90년대중반쯤부터였던것같네요..그러고보면 80-90년대 있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사라진게 참 많네요..방앗간도 참 많았는데 거의 사라지다시피했으니말이죠.. 시골이나 가야...요즘은...
근데 나눔이라는 게, 버리는 게 아니고 남에게 베푸는 건데 못먹는 쌀이면 안되잖아요^^ 두 분 젊고 건강하니까 흰쌀밥 드셔도 되요,,저도 흰밥이 젤 맛있어서 그거만 먹어요 😊과자도 먹고 콜라도 먹는데 흰쌀이 어때서
얼마전에 집에 전자렌지가 고장나서 당근으로 1만원주고 LG전자렌지 이사가시는분한테 완전싸게 사서 너무나 잘 사용하는중. 당근 최고!!!
안녕하세요 사이다에서 남성분 인터뷰 보고 넘어왔어요. 그런데 궁금한게 생기네요. 북한에서 유학을 보낼 정도면 그 분야에 전문성이 있는데 새터민 분들은 한국에 와서 그 전공을 살리기 어려운 건지요? 그리고 가끔 김일성종합대학 출신인 분들이 유투브나 방송에 나올때가 있던데 그런 학교들은 명문일텐데 학력 인정을 해주거나 하지 않나요? 뭐랄까 옛날에 한국인들이 미국으로 이민갈때 학교 선생님이어도 세탁소 개업을 한다던가 이런식으로 자기 직업을 살리기 힘든 것과 비슷한 느낌이네요.
선진국의 학력은 인정하지만 후진국의 학력은 인정하지 않죠,, 한국인도 미국가면 거기서 다시 학위 따야되잖아요,,탈북민이 젊은 나이면 대학을 한국에서 다시 가면 되는데 나이드신 분들은 그게 힘드니 사는게 어려울 것 같아요
지난 5년간 쌀값만 안올ㅇ라..쌀이 제일 싸요,.그래서 싸~싸~아~ㄹㄹㄹ 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