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21세기와 이데올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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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16 янв 2025

Комментарии • 76

  • @skjcast
    @skjcast  3 года назад +37

    대략 70년 전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왜 사회주의인가?"라는 기고문에서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의 특성, 인간 능력의 기반이 되는 사회의 중요성, 사회의 위기와 희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과학은 목적을 창조할 수 없다. 이것을 사람에게 주입시키는 것은 더욱이 불가능하다. 기껏해야 과학은 이런 목적을 이루는 도구를 제시할 뿐이다. 목적을 인식하는 것은 높은 윤리적 이상을 갖춘 사람들이며, 이 목표가 사산한 것이 아니라 활력 있는 것이라면 이를 입양해서 키우는 것은 사회의 점진적인 진화를 결정하는 많은 사람들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사람 문제에 관한 한 과학과 과학적 방법을 과대평가하지 않아야 한다. 또 우리는 사회 조직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에 대해 의사 표시할 수 있는 사람이란 전문가들뿐이라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인간 사회가 위기를 겪고 있으며 안정성이 심각하게 무너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수없이 많다. 개인들이 크든 작든 자신 스스로가 소속된 집단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 이런 상황의 특징이다. 내가 말하는 뜻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개인적인 경험을 소개한다. 나는 최근에 지식인이며 인격자인 사람과 또 다른 전쟁이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다시 전쟁이 난다면 인류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을 것이라고 생각돼, 초국가 조직만이 이런 위험에서 우리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내 손님은 냉철하게 말했다. "인류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 왜 그렇게 반대하십니까?"
    한 세기 전만 해도 이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하는 이들이 없었음이 분명하다. 이런 발언은 자신의 평정을 찾는 데 실패하고 성공에 대한 희망조차 잃어버린 이들이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통스런 고독과 고립의 표현인데, 요즘 많은 사람이 이런 고통을 겪고 있다. 원인이 뭘까? 탈출구는 있는가?
    이런 질문을 제기하기는 쉽지만 어느 정도라도 확실한 답을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노력해볼 작정이다. 물론 나는 우리의 감정과 시도가 종종 서로 모순되고 모호하며 그래서 쉽고 간단한 수식으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사람은 언제나 고독한 존재인 동시에 사회적 존재이다. 고독한 존재로서 사람은 자신과 자기 주변 인물들의 존재를 지키려고 하고, 개인적인 요구를 만족시키려 하며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계발하려고 한다. 사회적 존재로서는, 주변 인물들에게서 평가받고 사랑을 받으려 하며 그들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위로하며 그들의 생활여건을 개선하려고 한다. 종종 모순적인 이런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점만이 사람의 특징을 설명한다. 또 사람의 심리적 평정은 이 두 가지 유형의 노력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이 노력은 사회의 복지에도 기여할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 고독한 존재라는 측면과 사회적 존재라는 측면 가운데 어느 면이 상대적으로 강하게 나타나느냐는 주로 유전에 의해 결정될 여지가 크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발현되는 인간의 개성은 대개 그가 자란 환경과 사회 구조, 그 사회의 전통, 그리고 특정 행위들에 대한 그 사회의 평가에 따라 형성된다. 개인에게 "사회"의 추상적 개념은, 자신의 동시대인 및 이전 세대 사람 전체와 맺는 직접, 간접적인 관계의 합이다. 개인은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고 노력하고 일할 수 있다. 그러나 물질적이고 지적이며 감성적인 존재로서 개인은 또한 많은 부분을 사회에 의존한다. 그래서 사회의 틀 밖에서 사람을 생각하거나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에게 음식, 옷, 집, 도구, 언어, 생각의 형태, 생각의 내용 대부분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사회'이다. 사람이 생을 유지하는 것은 '사회'라는 간단한 단어 뒤에 숨어있는 현재와 과거의 수많은 사람들이 한 일과 성과 덕분이다.
    그래서 명백한 사실은, 개인이 사회에 의존하는 것이 개미나 벌이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사라질 수 없는 본성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개미와 벌의 삶 전체가 세세한 부분까지 유전적 본능에 따라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과 달리, 인간 사회의 형태와 상호관계는 아주 다양하며 변화할 수 있다. 기억, 새로운 조합을 할 수 있는 능력, 언어라는 선물이, 사람에게 생물적 요구와 무관한 발전을 가능하게 한다. 이런 발전은 전통, 조직, 문학, 과학기술적 성과, 예술작품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은 사람이 자신의 행위를 통해 자신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고 이 과정에 의식적인 생각과 요구가 개입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해준다.
    사람은 유전을 통해 태어날 때 생물학적 특성을 갖춘다. 여기에는 인류를 특징짓는 자연적인 요청도 포함되는데, 우리는 이를 고정되고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 게다가 사람은 사는 동안 의사소통을 비롯한 다양한 통로를 통해 사회가 제시하는 문화적 특성을 받아들이게 된다. 문화적 특성은 시간이 흐르면서 바뀔 수 있는 것인 동시에, 상당한 정도까지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결정하는 것이다. 현대 인류학의 원시문화 비교연구 덕분에 우리는 사람의 사회적 행위가 사회를 지배하는 문화적 유형, 조직 형태에 따라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게됐다. 사람의 운명을 개선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사람은 인류의 생물학적 특성 때문에 서로를 멸망시키거나 잔인한 자기 파괴적인 운명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저주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 @skjcast
      @skjcast  3 года назад +10

      사물이나 현상을 구성소들로 분해해 나가면, 더 이상 분해될 수 없는 기본 요소들이 있고, 요소들의 상호작용으로서의 체계를 상정할 수 있습니다. 기계는 에너지를 사용해 일을 하여 그 자신이 아닌 무언가 다른 것을 생산합니다. 우주는 시간에 따라 무언가 다른 것이 되어가는 거대한 기계 체계로 볼 수 있습니다. 생명은 외부와의 경계를 형성하고 물질대사를 통해 자기 자신을 재생산합니다. 생명은 우주라는 거대한 기계 체계 내에 위치한 자기생산 체계로 볼 수 있습니다. 생물 상호간의 상호작용 및 생물과 환경과의 상호작용은 먹이 그물과 개체수 피라미드, 물질순환과 에너지 피라미드로 나타내어질 수 있는 체계를 형성합니다. 생물 체계가 주변의 기계 체계와 상호작용하는 체계를 생태 체계로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생물은 내부에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한 체계를 필요로 하는데 이를 심리 체계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생물은 개체들 간의 상호작용의 네트워크를 만들어내는데 이를 사회 체계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기계 체계, 생물 체계, 생태 체계, 심리 체계, 사회 체계를 기본적인 체계들로 상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체계의 뼈대와 얼개로서의 구조는 볼 수 있지만, 매우 제한된 조건을 벗어나면 가능한 요소들의 모든 조합들, 체계들의 상호작용의 전 양태들, 시간에 따른 체계의 진행 경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극초기 우주의 불안전성으로부터 폭발이 일어나 극고온의 우주가 팽창을 시작하고, 온도가 내려가면서 물질이 형성되어 은하단과 행성계 등 우주의 구조가 형성됩니다. 빛의 속도라는 한계를 지니고 물리법칙에 따라 상호작용하는 체계인 물질 우주는 전체적으로 엔트로피가 증가하면서 사용 가능한 에너지가 점차 사라져 가지만, 부분적으로는 엔트로피가 감소할 확률이 존재합니다. 특정한 물리화학적 조건 하에서 자기 자신을 재생산하는 물질의 패턴이 형성될 수 있는데, 이를 생명이라고 합니다. 생명은 물질대사를 통해 스스로를 재생산하며, 환경으로부터 에너지를 취하여 자신의 엔트로피를 낮추는 비교적 영속적인 패턴입니다. 달리 말하면 생명은 시간에 대해 저항하는 물질의 특수한 존재양식입니다.
      기본적으로 생물은 환경과의 경계를 짓습니다. 생물의 내부는 항상성을 유지하는 시스템이며, 외부 환경은 항상성에 대한 위협과 항상성을 유지할 자원이 존재하는 곳입니다. 시간이 경과되고 변이와 경쟁, 환경으로부터의 압력에 의해 시스템이 분화되면서 에너지 처리 체계, 형태 유지와 이동 체계, 환경과의 상호작용과 정보 처리 체계 등을 갖게 됩니다. 신경계를 가진 생물은 내부의 상태를 지각할 수 있고 외부의 환경을 내부에 반영하여 그려낼 수 있습니다. 신경계는 내부의 정보와 외부의 정보를 바탕으로 행동의 패턴과 가능한 상황의 전개를 저장하고 시뮬레이션하는 기능을 합니다. 신경계가 발달한 동물은 내, 외부의 정보를 바탕으로 과거, 현재, 미래라는 타임라인과 그 속에서의 자신의 위치 및 행동의 경로를 표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신경계의 발달은 조직화된 사회를 가능하게 하는데, 사회는 환경에 대해 또 하나의 항상성 체계를 형성하면서, 그 규모를 통해 개체의 생존 확률을 높이는 데 기여합니다. 사회성이 발달한 생물들은 서로의 행동 패턴을 자신의 적응 방향으로 바꾸는 의사소통 체계를 갖습니다.
      인간은 고도로 발달한 의사소통 체계를 갖고 있으며, 기본적으로 음성언어와 문자언어를 통해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의 행동과 기대를 조절하며 공통의 생활양식을 형성합니다. 인간에게 특수하게 정교화된 이것을 문화라 부릅니다.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문화의 구성소를 모방을 통한 복제자인 밈이라고 부르며, 유전자의 발현효과가 개체를 넘어서 영향을 미치는 사례로 꼽았습니다. 그 메커니즘은 앞서 아인슈타인이 말한 바를 통해 설명될 수 있을 겁니다. 두 발로 걷고 도구와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동물인 인간은 영장류의 다른 종으로부터 대략 300만 년 전에 분기하여, 3만년 전 현생 인류로 종으로서의 분화를 마쳤습니다. 장비, 벽화, 놀이, 장식, 교역, 매장 등 인간을 특징짓는 행동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지능과 의사소통 체계의 발달 과정에서 공유된 지식, 신념, 행위의 총체적 양식으로서의 종교가 발생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대략 기원전 1만 년에부터 수렵 채집민들이 만든 거대한 건축물이 발견되었고, 기원전 3천 년부터는 세계 곳곳에서 농경과 정착 생활이 시작되어 문명이 형성되었습니다. 잉여 생산물은 문자 체계와 유통 체계를 발달시키고, 사회의 규모 확장과 내적 분화를 촉진했습니다. 생물은 기본적으로 환경 및 다른 생물과 물질 및 에너지를 교환합니다. 생산 활동은 자기 자신과 번식 정도에 국한되며 개미나 비버와 같이 자신의 집을 생산하는 동물이 드물게 있습니다. 다른 생물에 비해 인간의 중요한 특성은 언어를 통해 매우 정교하게 정보를 교환하며, 자기 자신뿐 아니라 주변의 생활환경을 대규모로 재생산한다는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생산 활동이 인간성의 핵심이며, 생산력이 인간 사회의 근간이고 생산 수단과 맺는 관계가 다른 관계들을 결정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이 특징을 인간 역사의 핵심적 문제로 제기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류는 불을 발견하고, 석탄을 발견하고, 전기를 발견하고, 원자력을 발견했으며 이를 생산력으로 전환했습니다. 이러한 규모로 에너지를 동원하고 자원을 사용하는 동물, 고도로 분화된 사회관계와 생산과 교환의 체계를 보이는 동물은 지구상에 유례가 없습니다.

    • @skjcast
      @skjcast  3 года назад +7

      세계사적인 시대 구분법에서, 고대부터 중세까지는 관념들의 질서가 위계적으로 명확하고, 인간의 생활이 그 틀 안에서 조직된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지배적 양식이 종교입니다. 근세에 유럽에서 십자군 원정의 실패와 흑사병으로 인한 인구 감소 등의 사건으로 종교의 권위가 실추되고, 타 대륙으로의 항해와 상업이 활성화됩니다. 이를 바탕으로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정치적으로는 시민사회, 사상적으로는 개인주의가 자리잡으면서 종교는 배경으로 물러나고, 철학과 사상이 전면에 등장합니다. 이 시기가 근대입니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구분, 이윤 추구를 위한 상품 생산을 특징으로 하는 자본주의는 분업과 혁신을 통해 지속적으로 생산력을 증대시켜 가면서, 상품경제와 함께 자본주의에 걸맞는 생활양식을 전파하여 주변부 사회를 경제적, 정치적으로 포섭해갑니다. 경제가 바뀌면 생활 양식이 바뀌고, 생활 양식이 바뀌면 문화가 바뀝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자본주의는 전통적인 계급과 이해관계를 와해시켜 가면서 자신을 확대 재생산하며, 전통적 계급과 이해관계를 대체하는 것으로서 동일한 언어, 습속, 정체성 등 문화적 동질성을 공유하는 집단인 민족과 이를 바탕으로 한 정치적 집단인 국가가 형성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유럽에 시민사회와 근대국가가 형성되고, 아메리카와 아프리카가 유럽의 영향권 하에 놓이게 됩니다.
      식민지로부터의 자원 징발과 매장된 석탄을 기반으로 한 대규모 기술 혁신인 산업 혁명이 일어나고, 유럽의 생산력이 아시아를 넘어서게 됩니다. 한편 이 시기 생산력이 낙후되고 시민혁명과 근대국가의 설립을 이루지 못해 유럽에서 가장 후진국이었던 독일에서는 고도로 체계화된 철학이 나타나고, 헤겔의 역사철학과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이 탄생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역사적 위차와 전개 규칙을 연구한 마르크스 철학은 유럽 내, 외부에서 자본주의에 대항하면서 근대국가를 이룩하려는 세력들에게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집니다. 한편 인도와 중국이 영국에게 군사적으로 패배하면서 유럽이 전 세게의 패권을 쥐고 본격적으로 아시아에 진출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이 맞물리면서 우리도 서구 세력을 마주하게 되었고,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문화권에 완전히 동화되지 않았던 해양 세력이었던 일본은 가장 먼저 서구화를 추진하여 아시아의 패권을 노리게 됩니다.
      식민지 확보와 패권을 둘러싼 유럽 국가들 간의 과도한 경쟁은 1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사건을 촉발했습니다. 유럽이 전쟁으로 황폐화되어 세계 경제의 중심이 미국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 등장했습니다. 전후의 재건 사업과 산업의 활성화는 번영을 가져오는 듯했으나, 돌연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은 세계 경제에 엄청난 충격을 주어 많은 국가들이 혼란에 빠졌습니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식민지와의 경제적 연결을 강화하는 정책을 취했으나, 후진 국가들은 극심한 혼란에 빠져 파시즘과 마르크스주의가 정치적 해결책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지에서 파시즘이 채택되었고 이들은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대중 동원, 군사적 확장, 민족적 정체성의 강조, 배타적 팽창 정책 등의 특징을 공유합니다. 파시즘에 대항하는 형태로 자본주의 세계와 사회주의 세계가 일시적으로 연합 전선을 형성합니다. 소련이 독일의 침공을 막아내고, 미국이 태평양 전쟁에서 승리를 거둡니다. 전쟁은 연합 측의 승리로 종결되고, 또 한번 대규모 전장이 된 유럽은 경제적, 정치적 패권을 상실하여 대부분의 식민지가 독립하고 미국과 소련이 패권 국가로 떠오릅니다. 이와 함께 현대가 시작되며 미국과 소련의 체제 경쟁은 전 세계를 1세계, 2세계, 3세계로 가로지르는 냉전 구도를 형성하고 미국과 소련의 분할 점령으로부터 시작된 한국의 분단 역사도 냉전의 역사와 궤를 나란히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세기 후반 사회주의 국가들의 맹주였던 소련이 경제 침체를 극복하기 위한 개혁을 시도하던 과정에서 급속히 해체되었습니다. 소련 경제가 한계에 부딪힌 것은 계획 경제의 경직성, 산업 부문 간의 불균형, 과도한 군비 지출,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체르노빌 원전사고로 인한 국력 소모 등이 원인으로 꼽힙니다. 결국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은 생산력에서도 생산관계에서도 자본주의 사회를 넘어서지 못하였습니다. 자본주의 체제 역시 공황과 각종 사회 문제들을 겪으면서 시장만능주의에서 국가 개입과 복지 제도를 허용하는 수정자본주의를 도입하였고, 자본주의가 궁극적으로 승리했다, 이데올로기 문제가 종말을 고했다는 견해가 널리 퍼집니다. 지젝은 동유럽 출신으로 이러한 견해에 반박하며 등장한 철학자로, 소련 해체 이후 동유럽에서 득세한 배타적 민족주의, 아랍권에서 발흥한 이슬람 근본주의, 그에 대한 반응인 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 등 이데올로기가 사라지지 않았으며 단지 형태를 바꿨을 뿐이라는 연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헤겔과 마르크스가 제시한 근대사회의 핵심 조건과 한계들이 아직 극복되지 않았으며, 기술 혁명과 환경 오염, 생명 공학, 글로벌 난민과 같은 문제들은 전 세계 공동의 문제로 다루어져야 하고 이데올로기는 특정 집단의 이익을 옹호하는 것이 아닌 공동의 생활양식을 지키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지젝의 철학입니다.

    • @skjcast
      @skjcast  3 года назад +7

      오늘날의 문제의 어려움은 세계적인 문제를 지역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점에 있는 듯합니다. 저는 영상의 썸네일을 찾으면서 완전히 객관적으로 보이는 세계지도도 대서양 연안국과 태평양 연안국들이 각기 다르게 그린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우리는 세계의 지리적 좌표, 자원과 서비스, 인간과 사상의 이동과 그 네트워크는 볼 수 있지만, 각자의 위치와 입장에 따라 서로 다르게 중심화하여 이해하는 것입니다. 지역사회들의 총합을 세계사회로 볼 때, 사회는 내부적으로 계층화되어 분열되어 있고 그 계층화의 방식은 각 사회의 특성에 따라 서로 달라 사회들 간의 궁극적 동일성 지점은 설정되기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국가의 강화와 전통으로의 회귀는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는 반응이지만서도, 내부적으로는 사회적 배제를 낳고 외부적으로는 민족국가들 간의 적대를 강화함으로써 장기적으로는 새로운 전쟁 구도가 형성될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위기의 객관적 측면인 경제 시스템을 강조하고 유동적인 연대와 구체적인 실천 속에서 보편성과의 접점을 찾아아 한다는 지젝의 지적은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헤겔이 말했듯 세계사의 무대에는 구속력을 보장하는 법관이 없어서 국제연합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국제정치는 힘의 논리가 지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마르크스가 보이려 한 자본의 운동, 상품으로부터 국가의 내적 구조와 세계시장에 이르는 끝없는 순환은 점차 가속화되어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에서 거의 항구적인 것으로서 그 절정에 도달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현대가 근대 사상가들이 보이려 했던 것이 전면적으로 가시화된 세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마르크스 이후의 사회학자들은 근대 시스템이 어떻게 자리를 잡고 어떻게 현대로 이행하였는지와 현대성의 특성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베버는 근대를 형식합리성이 목적합리성을 대체해 가는 쇠우리와 같은 풍경으로 보고, 종교 영역으로부터 가치들이 독립적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가치의 제도화'가 일어났다고 보았습니다. 루만은 의사소통 매체가 분화됨으로서 소통 형식이 분화하고, 소통 형식이 분화함으로써 사회가 분화된다는 사회 진화 이론을 제시하였고, 사회가 수직적으로 분화되는 위계적 분화와 수평적으로 분화되는 분절적 분화를 거쳐 탈중심화된 기능체제들로 분화되는 기능적 분화가 현대사회의 특징으로 개별 자본이 국경을 넘은 순간부터 세계는 경계가 사라진 세계사회가 되었다고 보았습니다. 월러스틴은 근대를 애초부터 자본주의 세계시스템으로 보고 세계경제의 자본주의 중심부에의 종속구조와 패권의 이동을 분석하였고, 기술혁신과 함께 거대한 패권순환이 오는 콘트라티예프 파동이 곧 일어날 수 있고 전쟁의 위험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보드리야르는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이 소비사회로의 진입 양상을 적절히 다루지 못하며, 생산에서 소비로의 패러다임 이동에 따라 기호의 가치가 증식하여 현실을 덮어버린다고 보았습니다. 부르디외는 현대사회가 계급적으로 분화되었으며 각 계급들은 습관화되고 제도화된 계급적 실천들을 통해 자신의 계급적 생활양식을 재생산하고, 사회공간은 경제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의 양에 의해 상대적으로 정해지는 개인들의 위치관계에서 시간의 경과에 따라 유동적으로 구조화되며 제도화된 가치영역들은 그 나름대로의 규칙과 목표와 입장 조건을 가진 가진 내기의 장이 되어 개인들을 포섭한다는 위치와 입장 간의 복합적 구조를 이론화하였습니다. 하버마스는 사회가 정당성을 확보하는 공론장 영역이 후기자본주의로의 사회변동에 의해 위기를 맞고 있으며, 이를 보완하기 위한 보편적 의사소통의 규칙과 공론장의 확대 및 민주적 숙의의 과정을 이론화하였습니다. 앤서니 기든스는 현대 사회의 특성을 구조와 행위자 간의 관계로 개념화하면서, 과거에는 구조에 대한 지식이 제한되어 있어 구조가 행위자들을 강하게 제약하였으나, 구조에 대한 지식이 행위자들에게 일반화되는 오늘날에는 사회 구조에 대한 성찰이 직접적으로 사회 변동을 유발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었다는 성찰적 사회학 프로그램을 제시하였습니다.
      부르디외의 계급적 생활양식 및 위치와 입장 간의 부조응 이론은 영상에서 지젝이 미스테리하다고 언급한 부분, 왜 경제 외적인 면에서도 대중들이 파시즘적 경향에 이끌리는가 하는 점을 꽤나 잘 설명한다고 봅니다. 미디어가 구현하고 있는 환경은 리처드 도킨스식의 확장된 표현형 설명처럼 일종의 확장된 사회로 볼 수 있는데, 광장과 같은 생활공간에서부터 트위터와 같은 디지털 소셜 네트워크까지 대중을 타겟으로 벌어지는 정치적 올바름, 다문화주의적으로 초점화된 문화 공세들은 역으로 보수주의 담론에 대중을 입장시키는 효과를 유발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영화 에서 비참한 하층 계급인 기택 가족은 반지하 창문이라는 스크린으로 세상을 보는데, 취객이 오줌을 갈기는 그 스크린에 명문대생 친구는 정의의 사도로 그려집니다. 대홍수를 맞아서 그들의 사회적 위치를 매우 상징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반지하 집에서 탈출할 때, 기택의 아들은 다른 것이 아닌 부유한 명문대생 친구에게서 받은 돌덩이를 들고 나갑니다. 문화를 자체로 문제삼는 기획보다도, 정치경제적 지평 위에서 문화를 사회집단이 환경에 적응하는 양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보다 생산적인 논의가 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이론의 문제점은 그것이 공론장의 '특정' 위치를 설정함으로써 일상생활의 담론과 분리된다는 점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젝의 이데올로기 이론은 하버마스 식 공론장 민주주의에 대해 일상생활의 담론을 재개발하는, 의사소통과 공론장의 선험적 형식성의 한계를 헤겔과 라캉을 통해 보완하는 이론적 기획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skjcast
      @skjcast  3 года назад +9

      저 자신은 헤겔과 마르크스를 칸트로부터 다시 출발하는 모델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역사상 유례가 없이 복잡하고 연결되고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를 살고 있으며 이는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의 역동성과 생산력, 사회적으로는 매스미디어의 폭발력, 문화적으로는 전례 없는 문화의 전 지구적 혼성화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의 탁월한 성과들을 인정하면서도, 그 이론과 결부된 사회정치적 운동들이 헤겔과 마르크스가 제기한 문제적 지평을 너무 이르게 마감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헤겔이 제기한 역사의 최종심급인 세계사의 무정부성과 미래의 열려 있음, 마르크스의 유명한 테제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에서 아직 자본주의의 문제적 조건이 충분히 변화되지 않았음에도 간과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현대야말로 이 근대사상가들의 이론이 전면적으로 가시화된 시대이며, 한편으로는 그리스에서 로마로 넘어가는 문명의 과도기, 알렉산더의 대정복과 제국 붕괴 직후의 혼란 속에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 뒤섞이고 정치적으로 혼란한 가운데 피어난 에피쿠로스적 쾌락주의와 스토아적 세계시민주의가 오늘날의 상황과 매우 유사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헤겔은 영국을 참조하여 군주제를 최적의 정치 모델로 제시하면서, 이 모델에서 군주는 아무런 실권이 없는 텅 빈 형식이며 그저 "그렇다."고 승인하는 존재로서 남아있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군주제가 완전히 폐지된 국가들도 충분히 정치적으로 잘 기능하고 있는 사례들이 많으나, 헤겔의 이 모델은 문화에 관해서 매우 유용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문화는 우리가 '즉시 폐기하거나 대체될 수 없는 이전부터 있어온 것'들을 승인하는 기능을 하며, 그 실권은 정치 영역에 넘겨주는 것입니다. 한편 마르크스는 애서 인간이 맺는 관계의 총체를 '교통형태'라는 용어로써 생산과 대등한 것으로 제시하는데, 이는 으로 넘어가면서 생산관계라는 규정에 자리를 넘겨주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성의 중대한 특징인 생산활동은 그 이전에 생물 일반이 행하는 교환행위, 인간이 행하는 상징적 교환행위와 떼놓을 수 없으며, 사회적 생산의 체계를 사회적 교환행위이자 생태체계와의 교환행위로 새로이 자리매김하는 마르크스 이론의 체계이론적 패러다임 전환이 있다면 21세기의 상황에 걸맞는 이론으로써 대단한 비판적 생산력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한편으로 시민으로서 실천의 모델은 칸트의 세계시민주의, 이성의 사적 사용과 공적 사용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마련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칸트는 국제연합의 사상적 근원이 되는 영구평화론에서 특정한 민족과 국가의 입장을 넘어서서 개인들과 국가들을 공통의 세계 또는 인류의 성원으로서 파악하는 세계시민법을 구상하고 그 조건으로 인간의 자유로운 통행을 제시하였습니다. 오늘날에야말로 칸트가 말하는 세계시민적 상태가 가능해졌습니다. 물자, 인구, 사상 및 무기와 질병의 이동까지도 세계시민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인 것입니다.
      근대 국민 국가의 역사는 대개 식민 지배와 경제적 착취와 사상적 혼란과 피튀기는 저항과 내전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역시 일제의 지배와 한국전쟁으로 이를 뼈저리게 경험하였고 그 과정은 우리의 역사와 국경선에 새겨져 있습니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독립하기까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라는 어마어마한 세계사적 사건을 거쳐야 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적 결속력을 가진 시민사회와 국민경제를 운영할 수 있는 자본과 정치체제를 갖춘 국가는 특히 오늘날과 같은 글로벌 자본주의 상황의 세계사의 무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적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활관계를 조율하고 내수 산업을 보호 육성하고 목표와 규범을 설정하기 위해서입니다. 세계에는 이 지점에 도달하지 못한 사회들이 많이 있으며, 그들은 잔혹한 착취와 초법적 군벌의 지배 등으로 끔찍하게 고통받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혁명은 외주할 수 없는 것이어서, 우리는 세계시민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대신해줄 수도, 그저 방기할 수도 없는 채로 국민 국가의 형식 속에서 먹고 사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외에 달리 수가 없습니다. 한편 직업적 정치인은 국가의 이익과 자신의 집권 가능성을 우선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역시 세계시민적인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형식들 속에 불가피하게 갇혀 있는 사람들이 개입의 기회를 얻지 못하는 이 지점에서, 보다 넓은 시야가 허용되고 비판적 개입을 할 수 있는 지식인이 사회에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지젝이 말하듯, 대학이 사회에 필요한 기술들을 가려내서 교육할 수 있다면(마치 스탈린 식 사회주의의 이상) 좋겠으나, 기능적으로 분화된 사회의 각 부문들 간의 자율성과 비정합성은 이를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이런 상황을 불균등 발전으로 부르고, 특히 에른스트 블로흐는 '시간이 쪼개져 있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대단히 개성적인 개념으로 이를 지적했습니다. 특히 오늘날의 디지털화된 사회를 자세히 보면, 사회적 시간의 좌표는 에른스트 블로흐의 탁월한 표현대로 끝없이 쪼개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은 대표적인 사례로, 지나간 사건들이 현전화하고, 위치좌표상에서는 전혀 동떨어진 공간이 눈앞의 공간처럼 펼쳐지고.. 문화생활의 영역에서는 옛날 TV방송을 시청하는 것과 같은 정해진 타임 테이블이 사라졌습니다. 이는 후기자본주의 소비사회 문화생활의 끝없이 전치되는 특성을 구현하는 것인 동시에, 칸트가 말한 이성의 공적 사용의 열린 공간이기도 합니다. 칸트는 이성의 사적 사용을 특정 집단의 일원으로서 발언하는 것, 이성의 공적 사용을 단독자로서 공개적으로 대중을 향해 발언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말하듯 인간이 코나투스적인 생명의 목적을 위해 살아가면서도, 사회의 본질적 중요성을 깨닫고 그를 위해 헌신해가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일상의 형식 속에서 사적 관심에 쫓기면서도 공적 대중을 향한 이성의 사용이 급진적으로 허용되는 공간이 디지털 공간이라고 봅니다. 여기서 지젝을 논하고 그에 대해 긴 평론을 다는 것 역시 그런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논의와 관점의 훈련은 지젝이 말하는 일상생활의 구체적 사레를 보편적인 것과 연결하여 재발명하는 실천의 출발점으로도 매우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 @skjcast
      @skjcast  3 года назад +10

      제가 지식인이 필요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모든 것에 대해 말한다든가 전지전능한 지도력으로 문제를 즉시 해결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종군기자가 전쟁을 촬영하듯이, 그 자신은 전쟁을 막을 힘이 없지만 그 참상을 조명함으로써 인간의 소통 체계에 호소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뜻에서입니다. 즉 문제를 비추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근래에 지젝이나 가라타니 고진 등 주변부에서 출현한 보편적 지식인의 사례를 보면서 우리에게 그러한 참조점이 부족하지 않은가 하는 갈증을 느꼈습니다. 그 경제적 수준에 비해 아직 사상적인 면에서는 세계사적 장면에 기입될 만한 것이 등장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력, 군사력을 보유한, 한편으로는 러시아, 중국, 일본, 미국의 이해관계 사이에 놓인, 유례가 드문 급속 발전에 성공하고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펼쳐져 있는 이 기구한 나라야말로 주변부의 모든 것이 흘러드는 결절점이 아닌가, 지적 네트워크를 비트는 인물이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지젝이라면 "우리가 기다리던 사람은 바로 우리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아쉬움을 토로하면서, 제가 생각하는 헤겔-마르크스적 지평에서 칸트적인 세계시민주의의 입장의 실천의 모델로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헤겔적인 군주제 모델을 문화 영역에 적용하여, 문화는 사회에서 '즉시 폐기되거나 대체될 수 없는 이전부터 있어온 것'들을 칭하는 이름이며, 불변의 실체가 아닌 환경에의 집단적 적응양식으로서 생활을 조직할 실질적 권한은 정치 영역에 넘겨줍니다. 세계사회의 경제 상황은 자본주의 세계시스템의 작동이라는 지평에서 파악하고, 마르크스의 생산에 치중된 개념도식을 교환과 비등하게 하고, 교환의 개념을 의사소통적, 기호적 교환과 환경과의 물질 및 에너지 교환으로 다시 파악하여 21세기의 생태적 상황과 문화적 변동에 걸맞는 이론으로 전환합니다. 경제적 하부구조와 문화적 상부구조를 매개하는 정치적 영역이 입법적 개입을 통해 사회를 재구조화하는 것이 의회민주주의의 기본 도식이라면, 지젝이 말하는 일상생활의 재발명이라는 하부구조에서의 투쟁과 디지털 공간에서의 이성의 공적 사용이라는 상부구조에서의 투쟁이 새로운 변혁의 거점이 됩니다. 이상이 내수용 모델이며, 국제적 모델은 다음과 같습니다. 진화 이론의 수리적 모델에서, 어떠한 행동 전략이 진화적으로 안정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그 행동 전략이 다른 행동 전략에 의해 생존 가능성이 파괴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평형을 이루어야 하며, 그 전략을 채택한 집단 구성원의 수가 그 전략을 채택하지 않는 구성원의 수보다 많아야 합니다. 첫째 조건은 사회, 특히 무정부적 세계사회에서의 진화적 군비경쟁과 관련이 있습니다. 힘의 균형이 깨지면 더 이상 그 전략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둘째 조건은 헤게모니적 투쟁과 관련이 있습니다. 어떤 사안에 대한 비전을 설득 내지는 납득시킴으로써 구성원들을 행동을 특정 적응방향으로 돌리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첫째 조건에 의해 군사적, 경제적 자위력이 필수로 요구됩니다. 둘째 조건에 의해 헤게모니적 정당성, 상황이 파국적으로 돌아갈 경우에 주변국의 과반 이상을 납득시킬 역량이 있어야 합니다. 세계사회의 지적 네트워크에 비판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식인들의 역할이 요구되며, 시민들은 국민국가의 이익을 넘어서 개인들과 국가들을 공통의 세계 또는 인류의 성원으로서 파악하는 세계시민적 관점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국경을 넘나드는 상품, 물자, 서비스, 사상, 인간 등을 포함하는 자본주의 세계시스템은 끝없는 기술 혁신과 함께 세계경제의 역동성과 문화적 혼성화를 추동한다. 이에 문화는 헤겔적인 군주의 역할로서 단지 환경에의 집단적 적응양식의 지위로 물러난다. 경제는 생태체계 속에, 생산과 교환관계의 총체로서 다시 자리매김된다. 생활의 구체적인 영역들이 시대적 요구에 응해 리폼되면서, 사회의 확장인 광대한 디지털 공간은 소비사회의 풍경일 뿐만 아니라 공적 이성의 공간으로서 활용된다. 국제정치의 무정부적 국면 속에서 나의 생존의 가능 조건을 파괴할 수 있는 상대의 행동의 가능성을 제약할 수 있는 군사적, 경제적 역량을 비축해 가면서, 세계사회의 지식의 네트워크에 참여하여 비판적 개입의 가능성을 확보한다. 개인으로서의 나는 인간의 생활주기와 생활형태들 및 역사적 조건들에 의해 제약되고 사적 관심에 이끌리지만, 그러한 것들의 가능 조건이자 극복의 대상인 사회와 삶의 형식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공적 영역에 참여한다.."

  • @handavid6421
    @handavid6421 3 года назад +4

    34:04 한국 관련
    41:22

  • @김상권-v8p
    @김상권-v8p 3 года назад +1

    돌아오셨군요..기다렸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 @적당히허자
    @적당히허자 2 года назад +46

    Sk j 복귀 서명운동 시작합니다

  • @evenride
    @evenride 3 года назад +1

    정말 감사합니다. 번역 질도 높고 선정도 잘 하신 이런 보물같은 영상을 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박화목-x1b
    @박화목-x1b 3 года назад

    항상 영상과 댓글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 @손명국-x1q
    @손명국-x1q 3 года назад

    선리플 후감상입니다 감사합니다

  • @르마무
    @르마무 3 года назад

    기다렸습니다 ㅜㅜ 올려주신 영상 꼭꼭 씹어서 보겠습니다!

  • @Fashiondetails-y8s
    @Fashiondetails-y8s 2 года назад

    영상 넘 감사합니다

  • @handavid6421
    @handavid6421 3 года назад

    감사합니다.

  • @huigeong
    @huigeong 3 года назад

    감사합니다 !!

  • @skyboy879
    @skyboy879 3 года назад

    와 오랜만입니다 영상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catch-bc2iy
    @catch-bc2iy 3 года назад

    감사합니다 기다리고있었다고요 ㅠㅠ

  • @김태훈-d8s4p
    @김태훈-d8s4p 3 года назад

    3번 봐야겠네요. 감사합니다.

  • @daeunyang1250
    @daeunyang1250 3 года назад

    번역 감사합니다 ~! 잘 보고 갑니다~

  • @hba3144
    @hba3144 3 года назад

    오랜만에 좋은 영상 올려주시니 감사합니다.

  • @진영주-s5w
    @진영주-s5w 3 года назад

    오랜만입니다 영상 감사히 잘 보겠습니다

  • @박주영-d5t
    @박주영-d5t 3 года назад

    최근 영상이 벌써 반년이나 된 줄 몰랐는데.. 오랜만에 영상, 더불어 지젝 관련 영상이라서 더욱 달콤하네요 선생님

  • @온누리-h4f
    @온누리-h4f 2 года назад +1

    sk j님 보고싶어요ㅠㅠㅠ잘 지내시나요🥺 돌아오는 그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ppsd86
    @ppsd86 2 года назад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다나카홍길동
    @다나카홍길동 3 года назад

    감삼다

  • @성이름-m7p7j
    @성이름-m7p7j 3 года назад

    6개월만의 영상 넘나 감사하다고 할 수 있겠다

  • @정현우-d8k9g
    @정현우-d8k9g 2 года назад

    유튜브 최고의 채널

  • @handavid6421
    @handavid6421 2 года назад

    아니, 이게 우크라이나 사태 이전 영상인데 한 말이 잘 맞아떨어지는군요. 역시 대단한 학자입니다.

  • @김현수-o2k5j
    @김현수-o2k5j 3 года назад

    양질의 번역 영상 감사합니다.

  • @채권총론
    @채권총론 3 года назад +8

    대부분의 SF소설에서 중세 왕정으로의 회귀를 그리는건 단순히 판타지란 설정을 풀어내기 용이하기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는 벌써부터 그 한계를 내비치고 있으니까요.
    요즘은 자유민주주의가 고대의 정치체제보다 더 우월하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하고 회의감을 느낍니다.
    우엘벡의 복종을 읽고선 어마어마한 통찰이라 느꼈는데, 지젝도 역시 같은 문제를 지적하네요.
    특히 중반부에 자유에 대해 말하는 지점에서
    국가가 자유를 보장한다며 더 많은 규제를 하고,
    이는 오히려 자유를 앗아가기 때문에 저항을 낳는다고 하는데,
    N번방 방지법을 둘러싼 지금의 우리나라의 갈등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페미니즘에 대한 이대남의 극렬한 백래시는
    (여러 측면에서 볼 수도 있으나)
    이러한 지점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 대해서 작은 나라의 비극이라 일컫는 점은 심히 공감됩니다.
    청년으로서 직면하는 한국의 문제,
    입시 - 대학 - 취준or수험으로 이어지는 지나친 경쟁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그 근본 원인은 노동시장 이중구조 탓이고, 이는 수출대기업 위주로 국부를 유지해야만하는 대한민국의 지정학적 사연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깨달으면서 결국 절망하게됩니다.
    내놓을 수 있는 해답이야 상층노동시장의 유연화같은 더 힘든 길 뿐이죠.
    신좌파의 의제에 공감하기 힘든게 자본주의를 문제삼지 않기 때문이었는데, 지젝도 이에 동의하네요.
    어쩔땐 너무 나가서 이런 생각도 하는데,
    소설 표백에서 이르듯이
    어쩌면 역사의 종말에 다다른걸수도 있죠.
    인류가 지성사를 거쳐서 최적의 균형을 이뤄냈지만
    최적임에도 새로운 문제들을 극복하긴 어려운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좌파들은 괜히 자신들의 나르시즘을 위해 까부느라 오히려 사회를 좀먹을 뿐이구요.
    항상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부족한 배경지식 탓에 완벽히 알아먹진 못하지만
    평소에 고민하던 지점들과 비슷한 주제라 너무 재미있네요.

    • @skjcast
      @skjcast  3 года назад +7

      마르크스는 에서 어떻게 공화제 민주주의를 통해서 제정이 복권되었나 하는 '역사의 희극'을 분석하면서 당시 프랑스 사회의 권력구조를 해부해가는데, 마르크스의 결론은 당시 의회는 토지, 공업, 금융 등을 기반으로 한 부르주아의 각 부문들을 대표하는 이익관계들로 분열되어 있었고, 인구상으로는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나 의회 내에는 그들의 대표가 없는 농민들의 불만이 가득하던 상황 가운데 나폴레옹 3세가 '모든 계급의 이익의 대리자'로 자신을 내세우면서 나폴레옹 판타지에 기반한 민중의 지지를 통해 그러한 코미디가 가능해졌다는 것입니다. 가라타니 고진은 이를 두고 "나폴레옹 3세는 모든 계급에 증여를 약속했다"고, 지젝은 이를 프로이트가 설명한 꿈의 메커니즘에 빗대어 "정치적 대표의 꿈 작업"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념 대립이 옅어지고 계급관계가 다원화하고 정책들이 평준화된 오늘날에 이런 '모든 계급의 이익의 대리자'로서의 정치인 상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것이 되지 않았나 합니다. 한편으로 급속한 경제 발전에 성공한 한국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서 볼 때, 지도자에 대한 나폴레옹적 판타지를 내세우는 기이한 형태의 보수주의 담론은 눈부신 경제 성장에 대한 향수를 재점화하는 효과를 자양분으로 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부르디외적인 관점에서, 사회공간을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의 상대적인 양에 의해 시간의 경과에 따라 구조화되는 개인들 간의 관계구조라고 볼 때, 모든 계급의 이익을 대리한다는 것은 사회가 보유한 가용 자원의 한계로 인해 사실상 불가능하지만 정당은 그러한 언명을 통해 지지를 유도하여 정권을 획득하고 한정된 자원을 분배하고 공식적인 법률적 공간에서 정책 집행 및 목표 설정과 규범 형성을 주도합니다. 말씀하신 청년 문제, 특히 이대남 문제를 생각해보면 오늘날의 사회문화적 상황과 그것이 공식적으로 논해지는 정치무대에서 이대남은 구조적으로 소외되어 있다(혹은 적어도 그렇게 느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바와 같이 자원이 없고 국토가 좁고 인구가 적은 한국은 세계시장에서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 대외무역에 의존도가 높은 기술집약형 산업을 위주로 수출에 치중하는 경제구조를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고도성장을 마친 경제는 성장률의 한계에 접하고 있고, 교육열과 취업 경쟁은 어느 때보다도 치열하고, 거대한 기술 혁명이 예고되어 있습니다. 한편 서구 사회에서 70년대부터 일어났던 문화적 변동들이 10~20년 내외의 단기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치열한 교육과 취업 경쟁의 결과로 대체 가능한 직업군을 떠돌면서 물가 상승과 급격한 문화접변을 견뎌야 하는 것이 현 청년 세대의 사회경제적 위치이고, 이대남은 페미니즘과의 정책적 갈등 및 정치권에서의 '인정투쟁'에서까지 패하고 장기적으로는 AI에게 가장 먼저 대체될 수 있는, 생산수단에의 접근 가능성은 물론이요 생존의 기본 조건조차 위협받는 대표자 없는 계급과 유사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장기적으로 볼 때 사회의 노령화로 인한 노동 가능 인구의 감소 및 출산율 감소로 인한 인구 전체의 감소는 현재의 진행 추세를 고려했을 때 더없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국가의 존속을 위해서는 어느 시점에서는 '그린뉴딜'처럼 대규모 '청년뉴딜'이 필요해지지 않을까 합니다. 그 구체적인 사안은 현재 저의 역량으로는 제대로 사유하지 못하겠습니다만, 우선은 고용 안정성 및 사회 안전망 강화, 직업교육 강화, 페미니즘의 포퓰리즘적 사용에 대한 반대, 국제관계와 국내의 사회구조 내에서 청년층이 처한 계급적 상태에 대한 자각이 일보 전진을 위한 거점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skjcast
      @skjcast  3 года назад +8

      그리스 경제위기에 재무장관을 지냈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야니스 바루파키스는 현대사회가 (재)봉건화되는 '테크노 봉건주의' 경향이 나타나고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예를 들어 아마존은 인터넷 플랫폼을 제공하면서 개별 사업자들에게 마치 중세의 영주와 같은 지위를 얻게 됩니다. 한편으로 서브프라임 모기지발 대침체에서, 미국 정부는 기업들의 줄도산을 막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재정 지원을 (시장 메커니즘에 따르면 망해서 사라져야 할) 기업들에 행했는데, 바루파키스는 이를 '정부가 기업의 시녀가 되었다'고 평합니다. 세계경제의 중심지이자 신자유주의의 화신이라 믿어지는 미국의 상태가 이렇습니다. 완벽하게 합리적인 개인들이 가능한 모든 정보를 취합해 미래를 예측하고 시장이 스스로를 조절해간다고 믿는 유사 신학적 이데올로기(우리는 여기에 공물을 바치고 있다)가 한계를 드러낼 때, 어떻게 사회가 구조화되어 있고 계급 간의 이익관계들이 충돌하는 장인가를 말하는 정치경제학을 다시 쳐다보게 됩니다.
      청년이 어떻게 남녀 갈등을 중심으로 구조화된 현재의 이데올로기적 지평을 넘어설 것인가에 대해 제가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모델은 이렇습니다. 경제인류학자 칼 폴라니는 에서 세계경제사를 인류학적으로 추적하면서 자본주의라는 대략 500년 전에 돌출해 나온 경제시스템에 의해 토지, 노동, 화폐라는 시장화되어서는 안 되는 것까지 시장화되었고, 경제는 본래 사회에 품어져 있는(embeddedness) 것이며 지나치게 비대해진 경제를 사회로 되돌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경제학자로서 출발해 시스템 이론을 경유하여 사회학과 생태철학에 폭넓은 연구를 남긴 케네스 볼딩은 현대의 경제학이 교환에만 치중해 있으며, 증여 또한 경제학의 대상으로 삼아 핵전쟁, 자원 고갈, 기아, 빈곤, 환경오염 등의 인류 공통의 문제에 대응하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 문제는 일차적으로 교환관계에 의해 증여관계가 무시되는 것에 기원하는 것으로, 사회의 최소 단위인 가족은 증여관계에 기반하는 것임에도 모든 가치가 교환체계에 의해 규정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가사노동이 사회적 교환체계로서의 노동에 포함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본주의가 도입하는 기계화와 전통적 이해관계의 해체를 통해서만 남녀의 신체가 갖는 물리적 한계와 전통적 성 역할이 극복될 기반이 조성될 수 있다는 역설적 상황입니다. 이 역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적인 것이 정치화되는 핵심 메커니즘으로, 특히 자본주의 중심부의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전면화될 조건이 갖추어집니다. 저는 여기에 대해서, 특히 가정생활의 핵심 요소인 양육과 교육은 구성원을 재생산하는 사회의 공동문제로서 그 비용을 사회가 증여하며, 그 규모는 사희의 생산력 발전의 정도와 구성원들의 합의에 기초해야 한다고 봅니다. 또한 여성의 사회진출에 따라 원칙적으로 남녀는 차별을 받지 아니하되, 그 구체적인 내용은 각 부문 내지는 분야의 특성에 의해 조정되어야 합니다. 가사노동은 증여관계로서 원초적 사회계약의 대상이며, 한편으로 결혼관계의 제 형태 자체가 사회변동 속에서 나의 요구와 기대가 배우자의 요구와 기대와 양립할 수 있는, 그러면서 친족, 친구, 직장, 취미, 기타 사회관계들과의 시간적 관계 속에서 지속될 수 있는 형태로 지속적으로 조정되어야 합니다. 즉 요약하자면 자본주의 사회의 메커니즘 자체가 유발하는 경제, 정치, 문화의 급변 속에서 제도로 뒷받침되는 남녀관계의 증여적 성격의 회복과 일상적 실천을 조직화하는 정치적 역량의 강화입니다.
      현 시점에서 제가 떠올릴 수 있는 청년층 연대의 모델은 중국에 대항하고자 하는 대만, 홍콩, 태국 청년들의 국제적 온라인 연합체인 밀크티 동맹 같은 것입니다. 이들은 태국 민주화 운동, 미얀마 민주화 운동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고 이 시대에도 청년들이 (파시즘적으로 쓰임을 기다리는 안타까운 형태와 사뭇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라고 생각됩니다.

  • @sunjaeyoon7624
    @sunjaeyoon7624 4 месяца назад

    시점이 유니크한 사람이니만큼 생각할 거리들을 많이 던져주네요
    화두들을 한국에 대입해 보면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무너진 이념의 빈자리를 민족주의가 빠르게 메웠다는 대목에서 바로 국경 너머에 명백하게 덜떨어진 체제를 세운 '같은 민족'이 존재하는 덕에 민족 우월주의를 있는 그대로 주창할 수 없었던 부분이라던가
    아니면 공산주의가 구시대를 효과적으로 파괴함으로서 자본주의로 향하는 과도기적 체제로 기능했다는 대목에서는 식민 통치와 한국 전쟁이 구체제를 총체적으로 박살내버려 초기부터 꽤 성공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로 진입했던 부분이라던가...

  • @psilomagazine
    @psilomagazine 3 года назад

    46분 와… 정말 감사합니다 🙇🏻‍♂️🙇🏻‍♂️🙇🏻‍♂️

  • @practicehardwork1174
    @practicehardwork1174 3 года назад

    정말 감사합니다

  • @hba3144
    @hba3144 3 года назад +2

    14:30 부분에 자막 오타가 좀 있는 것 같습니다. 30%의 진실 70%거짓이 맞는 것 같습니다.

    • @skjcast
      @skjcast  3 года назад +1

      어 맞네용 설명란에 추가했습니다

  • @벅범-l5g
    @벅범-l5g 3 года назад +1

    혹시임용치고오셨나요? 기다렸습니다!

  • @user-tq6qf8bp1q
    @user-tq6qf8bp1q 3 года назад

    혹시 하이에크 영상도 번역 가능해주실수 있으신가요

  • @WhishingRaven
    @WhishingRaven 3 года назад

    오랜만

  • @강수빈-j9t
    @강수빈-j9t 2 года назад +2

    이 영상을 두 번째 정주행 중인데 문득 궁금한 게 생겼습니다 sk j님 시간 괜찮으실 때 한 번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해당 영상에서 아주 짧게 지젝이 언급하는 대부분의 게임에서 한국이 뛰어난 모습을 보이는 것에 대하여 전에 언급했던 적이 있을까요? 예를 들어, "내가 생각하는 게임은~ , 이런 의미에서 한국이 대부분에 게임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이는 것은 ~ "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것인데 지젝이 언급하는 부분을 보니 갑자기 생각나서.. 제가 대략 생각해보기에는 게임을 잘 한다는 말은 어느 정도 창의성(예를 들어, 정해진 규칙이 있는 게임에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자신만의 방식으로 게임을 변양시키는 것) 혹은 창의성과 연결되는 IQ)과 연결된다고 생각하는데 확실치 않아서 여쭤봅니다.
    2. 최근 올림픽에서 개인의 휴대폰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조치, 중국의 한국에 대한 문화 동북공정 연구사업(김치, 올림픽 영상 속 한복과 윷놀이) 등 중국의 최근 행보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해당 영상에서도 지젝이 언급했듯 중국은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룩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굳이?' 저런 행보들을 보여야 되나 싶거든요.(민족주의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 자신들이 해체했던 역사를 다시 통합하려는 시도인가요?) 또한 혹시 이 부분을 최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대립까지도 연결시켜 볼 수 있을까요?
    3. 최근 정치 형태가 '나에게 도움이 될 사람을 뽑자'에서 '이왕 이렇게 된 거 아무나 뽑자' 라는 방식으로 이동했다는 절망적인 말을 많이 듣습니다. 근데 이 말을 단순히 바라보면 이번 선거에서 뽑을 후보자들이 없다 라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혁명(우리나라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위한 촛불시위가 있었죠) 후 기대 이하의 지도자를 보면서 하는 희망이 결여된 절망적인 말로도 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지젝이 언급하는 브이포 벤데타2의 느낌처럼 혁명의 에너지가 부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 @skjcast
      @skjcast  2 года назад +3

      1. 지젝이 한국의 게임 실력과 관련해서 추가적인 언급을 한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ㅠㅠ 영상에서 지젝이 언급하는 그리스 전 재무장관 야니스 바루파키스가 게임 이론의 대가이고, 지젝과 활발히 교류하고 있지만 지젝 본인이 게임에 대해서 심도있게 논의한 바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관련해서 제 생각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약간 결이 다른 이야기인데, 저는 지젝이 한국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동구권과 서구권의 교착지에서 독자적인 입장을 발전시킨 지젝이, 비슷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한국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갖고 있는지, 여기서 참조할 만한 것은 뭐가 있을지를 가늠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저서, 기고문 등에서 심심치 않게 한국을 언급하는 지젝이지만, 특히 영상 하나를 참조하자면 ruclips.net/video/DJmaM1MDZ44/видео.html (현재 미디어에 퍼져있는 지젝의 방한 강연들 중에 제가 가장 번역의 질이 괜찮은 축에 든다고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젝은 이탈리아 철학자 프랑코 베라르디를 인용하며 한국 사회를 급격한 변화 속에 여러 시대적 특성이 뒤섞여 있는, 세계자본주의의 모순이 응축된 공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지젝의 자택에서 한국과 전혀 관련이 없는 리포터와 다양한 사례를 놓고 진행된 본문 영상은 지젝이 보는 한국을 가장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다고 봐도 좋을 듯합니다. 대략 종합하자면 지젝은 한국을 눈부신 발전에 성공한 후발 자본주의 국가이자, 개도국들이 마주하게 될 미래로 간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경제학의 게임 이론에서, 게임의 정의는 대략 "효용극대화를 추구하는 합리적 행위자들의 전략적 상호작용"입니다. 이 이론은 수리적 모델의 도출을 가능하게 하며, 생물학의 진화 이론에서부터 심리학,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에 걸쳐 계산성을 가진 유기체들의 행태와 조직화를 이해하는 데에 학제적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그 정밀성이나 범용성으로 볼 때, 저는 이것이 현재까지 나온 게임에 대한 가장 뛰어난 정의라고 봅니다(물론 우리가 현실의 무수한 정보와 그 복잡성을 모델링하는 추상화 과정에서 일부 정보의 손실과 왜곡은 피할 수 없으나 현재까지 개발된 도구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의미에서).
      일상적인 의미에서 게임은 규칙, 경쟁, 유희성이 있는 경기를 말합니다(이러한 정의에서, 게임을 정의하기 위해 사용된 경기라는 단어는 그 정의를 살펴보면 게임과 거의 동어반복에 가깝다. 게임을 다른 단어를 통해 지시적으로 정의하려는 이런 시도가 난관을 마주하는 이유로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게임 이론, 언어는 '규칙 따르기'이자 '삶의 양식의 습득'이라는 주장을 떠올려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게임은 지시적 언어의 가능 조건인 원초적인 삶의 양식이다. 한편 정치철학자인 지젝의 관점에서 볼 때,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규칙 따르기'와 '삶의 양식의 습득'만을 말하고 '규칙 바꾸기'와 '삶의 양식의 변형'까지 나아가지 않았다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 역시 유작 에서 규칙들의 총체로서의 세계그림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상이한 세계그림들 간의 충돌에서 필요한 것은 설득이라고 한 바에서 그 역시 생의 말기에 지젝이 겨냥하는 지점을 돌파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의 이 마지막 글은 다른 것들에 비해 많이 연구되지 않았고, 그는 대체로 완고한 천재의 이미지로 그려지고 있다).
      현대에 특수화된 의미에서 게임은 정보처리 기계인 컴퓨터를 통해 프로그래밍되고 구현된 디지털 환경에서의 규칙, 경쟁, 유희성이 있는 경기를 지칭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게임이 창의성 및 지능과 연관이 있을까? 저는 적어도 게임을 만드는 과정, 특히 컴퓨터 게임 제작에는 고도의 창의성이 필수적이라고 봅니다. 또 적어도 게임을 풀어내는 데에 있어서 지능(문제 해결 능력 플러스 알파로서의)이 필수적이라고 봅니다. 게임의 수행, 변형, 창조 능력와 유기체가 가진 계산성, 지능, 창의성의 연관은 매우 크다고 생각됩니다. 그 상관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정량적으로 실증하기는 어려우나, 게임의 참여자들이 게임을 풀어내고, 그 규칙을 이해하고, 이를 변용하는 데 필요한 조건을 따져 보면 그렇습니다. 더불어 인간의 창의성 및 지능은 매우 언어 능력에 의존적이라는 것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보는 컴퓨터의 인터페이스와 사용자 언어 아래에는 0과 1로 이루어진 기계어, 프로그래밍 언어 등이 깔려 있습니다. 인간의 일상적 의사소통에서부터 정교한 학문적 논의, 고도로 분화된 사회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압축적인 정보 처리와 의미 이해와 집단 형성을 가능하게 하는 언어 체계의 힘입니다. 인간은 손을, 도구와 기계를, 추상화 능력을, 정교한 언어를 가진 두 발로 걷는 동물입니다.
      왜 한국이 세계적으로 게임에서 뛰어난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컴퓨터 게임 분야에서 한국 선수들이 최고의 기량을 보인 것은 사실입니다. 여기에 어떤 요인들이 얽혀 있는지 체계적으로 따져 보자면, 첫째로 한국인의 유전적 특성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한국인이 유전적으로 게임에 유리한 특성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둘째로 한국의 인구수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인구수가 많다면 비율적으로 게임에 뛰어난 사람도 많이 나올 것입니다. 셋째로 관련 산업 인프라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게임 관련 산업 인프라가 잘 갖추어져 있을수록 뛰어난 게이머가 많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로 게임과 관련된 제도 및 정책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정책적으로 게임 분야에 지원이 이뤄진다면 뛰어난 게이머가 많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다섯째로 게임과 관련된 문화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사회 구성원들의 신념, 지식, 행위양식 등이 게임에 친화적이라면 뛰어난 게이머가 많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요인은 딱히 근거가 없어 보입니다. 예를 들어 반응속도라든지 하는 게임에 유리한 신체적 특성이 한국인에게 유달리 발달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둘째 요인은 딱히 결정 요인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한국 게이머들은 인구로 압도적인 중국, 인도, 미국 등보다 스타크래프트나 롤 등을 잘합니다. 셋째 요인은 애매한데, 한국의 인터넷 보급률과 통신망의 질, 고성능의 컴퓨터를 구매하기 위한 경제력 등은 우수한 편이나 국내 기업들이 게임과 관련해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넷째 요인은 오히려 부정적인 측면이 강한데, 예를 들어 청소년의 게임 이용 제한 등이 그렇습니다. 다섯째 요인을 고려하게 되면 사안은 극히 모호해지는데, 에를 들어 고전적 게임의 대표격인 체스나 바둑의 경우 서양에서 대단히 활성화된 체스는 국내에 그랜드마스터 랭크에 오른 사람이 아직 없고, 반대로 아시아에서 활성화된 바둑의 패러다임(요즘의 컴퓨터 게임에서는 메타라고 부르는 것) 및 랭킹 변화는 한중일의 역사적 상황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물론 여기서 더 많은 요인들, 더 다양한 측면들을 고려하여 다른 결론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겁니다. 저는 현재로서는 잘 파악하지 못하겠습니다.
      컴퓨터 게임을 비롯해서, 게임을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예컨대 국제경제, 국제정치, 국제사회를 게임이론적 행위자들간의 상호작용으로 본다면)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것, 세계 10위권의 경제규모를 갖게 된 것, 문화컨텐츠의 성공 등에서 한국은 게임을 비교적 잘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여기에 학문 분야에서의 세계적 성과가 더해지기를 기대하고 있으며, 그 대표적인 지표는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 @skjcast
      @skjcast  2 года назад +2

      2. 중국이나 러시아의 동향은 지정학적으로 볼 때는 대륙 세력이 해양으로의 진출로를 확보하려는 움직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내부적으로 또 대외적으로 정당화하고 재생산하기 위해서는 내러티브적 면이 필요한데, 문화적으로 보수화되고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재중심화'를 꿈꾸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련 붕괴 이후 (기술적으로는 디지털화, 뉴미디어 등..) 정치적, 문화적으로 탈이데올로기화, 탈중심화되어온 세계에서 텅 빈 중심의 자리에 '위대한 중국', '위대한 러시아'라는 기표를 다시 채워넣고자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충돌이 가시화되는 오늘날, 국가 단위든 국제 단위든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상황은 누군가가 중심을 차지하고 나머지를 수직적으로 재구조화하는(전형적인 파시즘의 제스처로, 근대 이후 사회를 단일한 수직 구조로 고정시키는 것이 가능한지는 매우 회의적으로 숙고해 봐야 할 문제이다) 것이고, 또한 제국주의나 소련식 사회주의도 심각한 병폐가 역사적으로 드러난 잘못된 형식입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탈중심화와 재중심화 사이에서 텅 빈 중심을 점거하고 '공동생활의 최소 조건'을 투쟁의 기표로 삼자는 것이 지젝이 제시하는 공산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지젝의 철학이 오늘날 매우 유효하며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 우리나라가 갖고 있는 고착화된 분단이라는 지정학적 특수성과 역사적이고 사회정치적인 맥락에서 공산주의라는 기표는 너무나도 트라우마적인 것이기에, 이를 어떻게 수용할 수 있을지 비판적이고 성찰적으로 고민해보고 있습니다. 이에 관련된 내용은 제 고정 댓글을 읽어보시면 될 듯합니다.

    • @skjcast
      @skjcast  2 года назад +4

      3. 인간 사회는 패러다임과 내러티브라는 두 면을 갖습니다. 패러다임은 사물들의 작동으로 파악될 수 있는,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체계이고 내러티브는 동기, 정동, 의지를 가진 행위자들의 기대가 투영되는 소통과 관찰의 공간입니다. 인지 능력이 있는 생물들 중에서 인간은 유독 기억력, 상상력, 언어와 그를 통한 정보처리 능력이 발달했기 때문에 인간 사회의 작동 양상을 파악하는 데는 이 두 면에 대한 통일적 사고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경제는 패러다임적 면으로 봤을 때는 희소자원과 관계하는 인간행동의 체계를 말합니다. 반면 내러티브적 면으로 봤을 때는 인간의 욕구가 반영된, 어떤 상품이 다른 상품에 대해 어떤 가치를 갖는지 말해주는 기호화된 이야기 체계로 볼 수 있습니다. 정치는 패러다임적 면으로 봤을 때는 자원의 분배, 규범의 형성, 목표 설정과 같은 권력의 조직과 행사에 대한 체계입니다. 반면 내러티브적 면으로 봤을 때는 집단 구성원들의 정체성과 이해관계가 무대화하는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화는 패러다임적 면으로 봤을 때는 한 집단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기대, 신념, 행위의 교환체계입니다. 반면 내러티브적 면으로 봤을 때 문화는 우리가 서로에게 무엇을 기대하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 어떤 집단에 소속하고 있는지와 관련된 밑그림을 재생산하는 서사적 체계입니다. 개인과 개인 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이 두 면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내러티브는 행위자성을 기반으로 하는 기대, 소통, 관찰의 체계로, 패러다임은 사물의 작동에 관한 체계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내러티브 공간은 자기반영성, 재귀성 등으로 불리는 아주 특이한 성질을 갖습니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을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네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 간단한 예를 들어 가위바위보 게임에서 나는 상대방이 무슨 수를 낼지를 예상하며, 상대방 역시 그렇습니다. 좀 더 복잡한 예로 주식 시장을 보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생각하는 가치에 투자를 합니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을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네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 내러티브적 면은 타자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타자에 대한 나의 관계를 표현하는 구조를 갖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기분이라고 하는 것은, 배가 고프다거나 하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생물의 항상성의 요구에 충실한 부분도 있지만 사회적 동물로서 타인의 반응에 매우 민감하게 움직입니다. 내가 어떤 모임에 나갔고 뭔가 흥미로운 일이 일어났다고 합시다. 우리는 사태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반응을 살피며, 우리의 반응 양식은 그 사회적 분위기에 맞추어 조절됩니다. 또 다른 예로 우리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특정인을 보고 웃는 게 아니라(물론 특정인이 주된 동인을 제공하였을 수 있으나) 그 주변인과 방청객의 웃음을 따라 웃습니다. 우리의 사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미-어딘가에서-보고-들은-사고의 결을 따라 사고하며, 뉴스를 보다가 어떤 판단을 내리기 이전에 스크롤을 내려서 다른 사람들의 댓글을 확인해보곤 합니다. 여기서 인간의 심리를 두 면으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생리적, 정서적, 신경적 수준 등에서 호르몬이나 뉴런의 전기신호 등으로 상호작용하는 인지행동적 체계가 패러다임적 면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을 타인들과 상호작용하는 행위자로 여기는 기대, 소통, 관찰의 체계가 내러티브적 면입니다.
      저는 이 '패러다임+내러티브=사회'라는 접근을 통해서 라캉과 지젝의 연구를 생물학과 인지과학, 사회학에 보다 생산적으로 접목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라캉의 악취미적으로 난해한 말들, 대표적으로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등등.. 앞선 논의들을 통해 우리는 라캉이 저 언명을 통해 어떤 구조를 말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 식대로 말하자면 사회의 내러티브적 면입니다. 라캉은 심리분석의 틀을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라는 세 장(field)과 이를 얽어매는(entangled) 주체로 구성되는 보로메오 매듭이라는 구조로 제시했는데, 제 식대로 말하자면 상상계는 기대, 상징계는 소통, 실재계는 사물에 대응합니다. 주체는 관찰에 대응합니다.
      저는 희망과 절망은 패러다임적 면의 자원 및 에너지 상황과, 행위자이자 관찰자인 내가 내러티브적 면과 맺는 관계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말씀하신 바와 같은 경우에, 문자적으로 같은 말이 어떤 의미로 해석되는가 하는 것은 내가 어떤 입장에 서는가에 의해 결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물론 생리적, 정서적 반응 및 이익과 손해를 고려하는 뇌의 계산성 등 패러다임적 면에서 진행되는 과정이 있으며, 통상 인간은 부정적인 감정에 더 민감하고, 손실 회피를 선호하며, 게임 이론의 연구에 따르면 불확실성이 지배적인 상황에서의 선택은 손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수렴한다고 한다). 사회의 방향성(말씀하신 것처럼 혁명적 에너지가 부정적 방향으로 흘러갈지)은 우리가 자원 및 에너지를 어떻게 확보하고 분배하며, 사람들이 어떤 비전을 공유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제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방향성은 사회의 부와 후생이 증진되고, 개인의 다양성이 인정되면서 구성원들의 만족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지속가능한 체제입니다.
      저도 궁극적으로 (유일한 하나의) 답은 모릅니다. 현대 사회 자체가 경제, 정치, 문화에 걸친 전 영역에서 기술 혁신, 시장 개척, 입법, 여론, 매스미디어, 대중문화 등 다양성과 변동성을 허용할 뿐 아니라 장려하는 속성을 갖습니다. 전지적 관찰자 시점을 허용하지 않는 그런 구조적 이유로 저는 제 위치와 입장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행위자성에 매몰되어 있는 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역설적으로, 그 미약함 때문에 보편적인 것을 갈구하고 부르짖는 주체의 입장에 설 수 있기도 합니다. 오로지 사물의 작동, 그러니까 패러다임적인 면에서만 봤을 때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것, 세계 10위권의 경제규모를 갖게 된 것, 문화컨텐츠의 성공 등에서 한국은 '객관적 지표에 있어서는' 이전보다 좋아진 바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지도자(후보)들의 수준 내지는 행태가 기대 이하인 것에 동감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어쩌면 이 시기가 (대통령 탄핵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분기점으로, 지도자에 대한 전근대적인 판타지가 공적 공간에서 해체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지도자에게 초월적 역할을 기대할 수 없다고 하는, 지젝 식으로 말하면 대타자의 결여가 만천하에 드러나는 '벌거벗은 임금님' 같은 상황이 아닌가 합니다. 그 결여를 헤겔 식으로 말하자면 인정-투쟁하면서 어떤 식으로 이를 채울 것인지가 공개적으로 시민사회의 몫으로 던져지는, 자기입법과 자기책임, 자율성의 무게를 짊어지지 않을 수 없는, 현대성의 만개를 알리는 이벤트라고 저는 봅니다.

    • @강수빈-j9t
      @강수빈-j9t 2 года назад

      @@skjcast 항상 양질의 답변 감사합니다.
      심리학을 공부하고 있지만 철학적 사변들을 떼어놓고서는 인간에 대해 제대로 논할 수 없다는 걸 계속해서 느낍니다. 영상과 댓글들이 혼자 공부하는 제게 정말 큰 도움이 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김종오-n5x
    @김종오-n5x 3 года назад

    돌아오신 기념으로 무려 46분..!

  • @HissingGeotrauma
    @HissingGeotrauma 2 года назад

    지젝은 노골적일 정도로 솔직한 태도가 인기요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마 자기 철학이 그걸 가능하게 하는 거겠지만요.

  • @westgunner8919
    @westgunner8919 2 года назад +2

    우주는 왜 만들어졌고, 우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연구하는 분야를 뭐라고 하나요?

    • @skjcast
      @skjcast  2 года назад +3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해서 고대에는 종교가, 근대 이후에는 인문학이라고 불리는 역사, 문학, 철학, 예술 등의 분야들이 그러한 기능을 맡고 있습니다. 우주가 왜 만들어졌는지 고대에는 신화로 묘사되었고, 근대 이후 과학적 설명 체계가 발달합니다. 우주의 물리적 특성과 구성을 연구하는 연구하는 것은 물리학과 천문학의 영역이고, 우주의 기원이나 역사를 다루는 것을 특정하여 우주론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빅뱅 우주론은 천문학자 허블이 과거 우주의 잔상인 우주 배경 복사를 관측하여 정설로 채택되었습니다.

    • @사다새-h6l
      @사다새-h6l Год назад

      좀더 인간중심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인류원리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 @ans9795
    @ans9795 3 года назад

    오오

  • @JJO_1
    @JJO_1 2 года назад +1

    이제야 발견한건데... 지젝 뒤에 붙어있는 지도의 정체가 GTA5 인게임 지도네요? 지젝이 비디오 게임을 즐긴다는 말을 한 적이 있나요? 이게 도대체 무슨 조합이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심지어 GTA5 지도 뒤에 붙어 있는 건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1 포스터네요. 지젝 아들이 붙여 놓은 건가...

    • @skjcast
      @skjcast  2 года назад +3

      지젝의 아들이 게임 매니아라서 한국에 와서 피씨방부터 갔다고 합니다 ㅋㅋ

    • @JJO_1
      @JJO_1 2 года назад

      @@skjcast 이건 처음 안 사실이네요ㅋㅋㅋ다 아들이 붙인 포스터였군요

  • @Leonardo_Wilhelm_DiCaprio
    @Leonardo_Wilhelm_DiCaprio 2 года назад +2

    형 6개월...됐어

    • @skjcast
      @skjcast  2 года назад +2

      요즘 글을 쓰고 있어서 영상을 못만들고있네용.. ㅜㅜ

  • @강수빈-j9t
    @강수빈-j9t 2 года назад +2

    안녕하세요 sk j 님
    영상을 보면 볼수록 이해했다고 생각한 것도 다 잘못 이해했다는 것을 깨닫고, 그에 따라 궁금한 것도 더 많이 생겨서 질문 하고 싶은 것이 늘어납니다.. (너무 질문을 자주 드리는 것 같아서 한편으로 죄송합니다) 시간 괜찮으실 때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 영상 속 지젝이 말하는 민주주의가 뭔가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합 그 자체가 위기에 처했습니다, 끝난겁니다"
    "자본주의는 금세 혹은 장기적으로 민주주의를 가져온다는 겁니다"
    라는 말을 통해 어떤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인지 잘 이해가 안갑니다.
    2. 영상 마지막 즈음에 한국을 언급하면서 "이들은 그냥 자유시장으로 성공을 일구어낸 게 아닙니다. 강력하고 정교한 국가의 역할과 결합한 자본주의인 겁니다"
    에서 지젝이 생각하는 정교한 국가의 역할이란 무엇인가요??
    3. 지젝이 말하는 잘못된 문화적 투쟁(제가 보기엔 정치적 올바름 즉, 최근의 트랜스젠더에 관한 이슈, 페미니즘 등을 말하는 것 같은데)이 우리가 진정으로 담화를 형성해야 하는 것에서 시선을 돌리게하고 그럼으로 정치적 역량을 심각하게 낭비시킨다는 점, 그것을 약화하고 정말 필요한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다라는 점은 이해했는데 혹시 왜 꼭 이 시점에 그것들이 '성적인 것'으로 나타나야만 했는가 라는 것에 대해 지젝이 말한 적 있을까요??
    4. 예전 Bill-c16에 이어 최근에 Bill 67 이라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영상이 피터슨 교수 유튜브에 올라오는데 '캐나다'에서 특히나 이런 정치적 올바름 무브먼트가 타국에 비해 더 많이 일어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미국에서 일어난 영상들도 많이 봤고 어느 정도 급진적인 담론으로까지 이어지긴 했지만, 법제화 하려고 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혹은 그 이유가 제가 그 주제와 관련해서 봤던 영상들이 대부분 그 쪽(캐나다)이라서 일 수도 있겠지만 ) 그게 아니고 만약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그와 관련한 역사적 배경 같은 게 있을까요??
    5. 저번에 댓글로 남겨주신 조던피터슨 교수님을 이해하기 위한 칸트-융-니체로 이어지는 사상적 배경 에 대해 설명해주신 글이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됐었는데 혹시 가능하다면 (제가 본 영상 속) 지젝의 철학적 입장 - 시니피앙의 논리로 헤겔 읽기, 라깡을 통해 헤겔을 읽고, 헤겔을 통해 라깡을 읽자 에 대해서 조금만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ruclips.net/user/shortsHEmD7pJ0Qek?feature=share

    • @skjcast
      @skjcast  2 года назад +2

      괜찮습니다^^
      1. 민주주의란 대략 국민주권, 법치주의, 삼권분립, 다수결 등을 원리로 하는 의사결정 과정과 제도, 사상, 정치체제를 포괄적으로 이르는 명칭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특히 영국)이 가지고 있던 패권이 미국으로 넘어가고 소련과 체제경쟁을 합니다. 약소국들 및 신생 독립국들에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하는 등 더 많은 국가들을 체제 내로 포섭하려는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과도한 군비 지출과 계획경제의 비효율성으로 경제성장의 한계에 접하고 있던 소련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실패, 체르노빌 원전 사고 등의 내, 외부적 출혈로 말미암아 급속히 붕괴하면서, 초강대국으로서 미국이 주도하는 새로운 국제질서가 형성되는 한편 많은 나라들에서 정치적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초기에 대부분 권위주의 정권이 집권했으나, 자본주의를 도입한 많은 경우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고 민주주의가 자리잡았습니다. 남미, 동유럽, 동남아 등 사례가 아주 많습니다. 한국은 그 중 대단한 성공사례입니다. 이를 두고 자유주의 정치학자들은 자본주의의 도입은 민주주의를 가져온다(그 역도 마찬가지)는 견해들을 내놓았습니다. 즉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결합된, 서로가 서로를 이끄는 한 몸 같은 관계라는 겁니다(마치 자본주의를 경제, 민주주의를 정치, 자유주의를 사상적 원리로 하는 현대판 삼위일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젝은 이전부터 이라크 전쟁과 9.11 테러 등 서방과 중동의 갈등이 세계자본주의의 부작용(고유한 생활양식이 급속히 해체되는 것에 대한 저항)이며 자유주의자들은 그 중핵을 보지 못한다고 꾸준히 지적해 왔습니다. 근래 자본주의를 도입한 (그러나 여전히 공산당 독재 체제인) 중국의 엄청난 성장,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 체제인 국가들에서의 권위주의의 집권 등 새로운 현상이 뚜렷이 가시화되고 있는데, 지젝은 이것이 세계정세의 새로운 국면 내지는 분기점이라고 보는 겁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합 그 자체가 위기에 처했다"는 지젝의 진단은 우리가 더 이상 '가만히 두면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가져다주겠지..', '민주주의 국가들 간에는 전쟁이 나지 않는다고 했어..' 같은 마술적 기대를 가지기 어려운 국면을 마주하고 있다는 겁니다.
      2. 한국의 기적적인 경제발전에 결정적으로 중요했던 계기를 몇 가지 꼽자면, 산업화의 기반을 조성한 박정희 정권의 경제 개발 n개년 계획과 정보화의 기반을 조성한 김대중 정권의 IT 벤처기업 육성 정책을 들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국가의 정교한 역할의 사례이며, 국제적으로 4차 산업 및 에너지 전환이 예고된 현 시점에도 그러한 역량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근대 이후의 사회에서 '성적인 것이 정치화'되는 메커니즘은 이미 마르크스가 150년 전에 말했습니다. 마르크스는 '기계의 도입'을 통해 남녀의 물리적 차이가 극복됨으로써 여성이 사회로 진출하며, 대공업(과 생산력 발전)은 가족이나 양성 관계의 보다 높은 형태를 위한 경제적 기초를 만들어내고, 여성과 아동의 교육이 인간적 발전의 원천이 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지젝은 근래에 성을 둘러싼 투쟁이 마르크스가 지적한 바와 같은 정치경제적 기초를 포기하고 정체성 논리에만 집착하는 것이 비생산적이고 초점이 엇나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4. 저도 캐나다의 정치적 상황을 빠삭하게는 모릅니다만, 캐나다의 정당 구성이나 의회 의석 수, 역대 집권 기록 등을 살펴보면 캐나다의 정치적 지형(및 사회문화적 배경)에 좌파 성향이 우세한 것 같습니다.

    • @skjcast
      @skjcast  2 года назад +3

      5. 지젝이 라캉의 기표 논리로 헤겔-마르크스-레닌을 어떻게 반복하는지는 이전에 설명한 바 있습니다만 보충해서 읽어드리겠습니다. 라캉의 전기에 따르면 학창 시절 라캉은 스피노자에 열광했었다고 합니다. 코제브라는 철학자가 프랑스에서 헤겔의 강의를 했는데, 당대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라캉도 여기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라캉의 근본개념 주이상스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매우 난해한 개념인 주이상스는 대략 '주체가 자신의 판타지와 관계맺는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단 라캉은 헤겔의 절대지, 절대정신 같은 것은 철저히 거부했습니다. 라캉은 이를 두고 '최후의 심판적 관점'이라 칭하고, 역사의 끝에서 모든 것을 전지전능하게 종합하는 관점 같은 것은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지젝은 라캉과 헤겔의 관계를 다시 정립하기 위해 이렇게 덧붙입니다. "헤겔에게 라캉적 대상 a가 보충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통상 자기를 외화했다가 다시 내화하며 모든 것을 아는 어쩌구로 파악되는 헤겔의 정신에 라캉적 실재, 총체적 앎이 불가능하게 하는 얼룩, 흔적, 오염 등을 추가하겠다는 것이며, 이를 통해 지젝은 헤겔과 라캉을 자유자재로 호환 가능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지젝에게 헤겔 변증법은 모순이 정과 반을 통해 마술적으로 더 높은 합으로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모순이 구조적으로 필연적임을 인정하는 것, 불가능성을 승인함으로써 가능성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라캉 이론에서 상징적 질서와의 동일시로 형성된 자아가 상징계의 결여를 깨달을 때 주체가 되고 상징 질서를 재구성할 수 있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가능성을 어떻게 사회적 실천으로 연결할 것인가 하는 지점에서 지젝은 근대의 역사적 조건과 변화의 지평을 제시한 사상가이자 최초의 이데올로기 비판자인 마르크스를 호출합니다. 지젝은 마르크스의 상품 분석에서 자본주의의 무의식을 읽어내면서 라캉과 마르크스를 호환시킵니다. 무의식의 선구자 프로이트의 꿈 해석 방법은 이렇습니다. 표면에 드러난 꿈-내용이 있고, 이면의 꿈-사고가 있습니다. 꿈-사고가 꿈-내용으로 변환되는 기제가 꿈-작업입니다. 그리고 꿈-작업은 압축과 전치라는 메커니즘에 의합니다. 무의식의 메커니즘은 압축과 전치라는, 사고 형식의 왜곡입니다. 라캉은 이를 은유와 환유라는 언어학의 모델에 연결지었습니다. 우리가 말을 할 때 일어나는 기표의 연쇄들, 한 문장을 지우고 다른 문장으로 고쳐 쓸 때, 한 단어를 다른 단어로 교체할 때, 단어가 대상을, 한 단어가 다른 단어를, 단어와 단어가 서로 지시하면서 끊임없이 이어져 나가지만 결코 완결되지는 않는, 형식에 의해 일시적으로 고정되는 의미의 작용이 라캉이 본 무의식의 메커니즘입니다(기표 논리 또는 시니피앙의 논리는 이 메커니즘을 일컫는 말입니다). 또한 언어는 그 본성상 사회적이며, 외부로부터 부가되는 것이며, 의사소통 구조를 따라 끝없이 순환하게 되어 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다'라는 라캉의 언명이 가리키는 언어, 담론의 구조란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젝은 이를 이렇게 비유합니다. "무의식은 수레에 담긴 내용이 아니다. 무의식은 수레 그 자체다." 다시 말해 무의식은 우리 사고를 구조화하는 언어의 형식변환 그 자체입니다. 이러한 형식변환이 끝없이 가능한 것은 언어 질서인 상징계가 불완전하기 때문으로, 이를 깨닫고 형식변환을 능동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 때 라캉식 정신분석이 완료됩니다. 지젝은 라캉을 통해 마르크스를 읽습니다. 지젝이 본 자본주의 사회의 무의식은 상품교환의 형식 그 자체입니다. 이윤 추구를 위한 상품 생산을 특징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상품이 되어 교환의 대상이 되고, 상품의 가치는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결정되며, 이 교환의 질서는 궁극적으로 화폐라는 주인에 의해 보증됩니다. 이 주인의 전능함에 대한 신뢰를 가리키는 이름이 '보이지 않는 손'이며, 기술혁신에 의한 환경 파괴, 과잉생산, 투기, 빈부격차, 계급 갈등 등은 주인의 실패를 가리키는 사회적 실재의 이름입니다. 지젝은 상징화의 실패, 오물, 결여인 이러한 사회적 실재를 떠맡는 것을 그리스도적 사랑으로, 상징적 관계들을 포함한 사회관계의 형식변환을 레닌적 혁명으로 개념화합니다. 우리가 상징화된 세계를 살고 있으며, 완전한 상징화는 항상 불가능하며, 이 불가능성을 떠맡아 공동의 생활양식 관계를 재구조화할 수 있다는 것. 이게 지젝이 헤겔-라캉-마르크스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방식입니다. 왜 헤겔인가? 왜 라캉인가? 왜 마르크스인가? 왜 레닌인가? 지젝의 견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헤겔은 근대 이전의 세계에서 근대 이후의 세계로 넘어가는 짧은 기간에, 이전과 이후에는 보이지 않게 된 사유의 독특한 차원을 이론화한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라캉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구조주의를 거쳐 후기구조주의로 넘어가는 사회정치적 상황과 문화적 변동 속에서, 문화 자체가 불완전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대안을 찾아 분투한 분석가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근대화 과정에 핵심적인 자본주의의 운동을 분석할 모든 도구들을 주조하였기 때문이다. 레닌은 객관적 참조점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상황 내에서의 선택뿐 아니라 상황 자체를 다시 쓰는 선택이 가능함을 보인 최고의 사례이기 때문이다.

    • @강수빈-j9t
      @강수빈-j9t 2 года назад +2

      @@skjcast 제가 아마 놓친 댓글이 있었나 봅니다. 다시 꼼꼼하게 읽어보겠습니다!
      항상 정성스런 답변들과 영상들 정말 감사합니다 써주신 댓글들 읽는 게 너무 재밌네요. 공부 열심히 하겠습니다!!

  • @정현우-k8g
    @정현우-k8g 2 года назад

    4:20 논의의 중심이 영화판이 된 것에 대해 앨런 무어가 침을 뱉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 @igenselil4823
    @igenselil4823 3 года назад

    와 진짜 영상감사합니다..내가 제일 사랑하는 지젝...(근데 난 신자유주의자..)

  • @치타목살
    @치타목살 2 года назад +1

    4:16 뭘 판다고요?ㅋㅋㅋㅋ

  • @치타목살
    @치타목살 2 года назад

    인간 중의 인간으로 평가받는 괴테의 dna에 해답이 있지 않을까?
    브이포벤데타2가 아니라
    인간 자체의 개량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유전자가위를 이용해서 정말로 인간다운 인간, 아름다운 사회를 이루자

  • @ma-uh2ow
    @ma-uh2ow 2 года назад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피터슨보다 지젝의 비판이 서유럽 좌파에 대해서 더 촌철살인으로 디스하는거 같네요

  • @강수빈-j9t
    @강수빈-j9t 2 года назад +1

    안녕하세요 SK J님 시간 괜찮으실 때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항상 정성스런 답변 감사합니다.
    이 영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ruclips.net/video/la1ociEX2o8/видео.html
    (다 쓰고 보니 제 글에 의문문이 정말 많네요. 가독성이 떨어질 수 있는 점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엄밀하고 논리적으로 글을 구성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이 영상에서 벤 샤피로가 말하고자 하는 논지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기술이 발전하는데로 두면 어떨까? 수레바퀴 제조인들이 자동차의 발명으로 인해 일자리를 잃어버렸지만 또 자동차가 발명되고 자동차 디자인, 카센터(점검), 자동차 판매원, 자동차 부품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일자리가 만들어지는 것을 경험하지 않았나? 과학기술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는 주장은 다소 무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단순히 과학기술을 제한하는 것만이 바람직한가?”
    (여기에 다른 영상에 써주셨던 글이 비교해보면서 생각해봤습니다. 한나 아렌트의 글로 대략 인간의 조건으로 세 가지를 제시한 부분이었습니다.)(철학적으로 이해는 하지 못했지만 제 나름대로 조합해봤습니다 혹시 틀린 부분이 있으면 지적해주세요)
    (제가 생각하기에) 그 중 활동은 커뮤니케이션의 장으로서의 정치에 참여하는 것으로, 벤 샤피로가 영상에서 했던 말을 인용해서 "사람들이 정책의 탓이라고 주장하는 ~" 문장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물론 이상적인 형태는 모든 사람들이 지식에 관심을 가지고 커뮤니케이션의 장으로서의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겠지만(깊은 대화), 현실에서 지식을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사실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사람들이 정책의 탓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상 그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논리적) 저항(우리가 봤을 때는 소극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한나 아렌트의 일 개념을 일종의 저항으로 본다면)?
    복잡성이 증가하면서 사람들이 목표를 잃고 방황하고 있다는 주장도 물론 타당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혹시 다른 이유가 있진 않을까요? 예를 들어, 인간의 활동영역이 점점 축소(소비재의 생산의 영역이 점점 줄어들면서 생물학적 요구를 점차 위협받는 : 한나 아렌트의 노동개념)되면서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개체들이 어떤 정보들을 흡수하면서)사회적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범죄가 증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만약 초인공지능이 탄생하고(모든 방면에서 인간보다 한 차원 뛰어난) 그 인공지능이 인간이 사라져야만 하는 이유를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조리 있게 주장한다면 어떨까요?
    벤 샤피로와 같이 논리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구성할 수 있는 사람 혹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정도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겠지만, 영상에서 나오듯 배달기사는(피치 못할 사정, 이런 특정한 요소들은 제외하고 오로지 논리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구성할 수 있는 능력과 교육 측면에서 일종의 하위 위계를 차지하는 것으로 본다면 )순순히 자신의 운명(죽음)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초인공지능을 일종의 신적 자연의 비유로 본다면 그런 사람들은 단순히 자연 도태되는 것이라고 여겨야 할까요?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그들에게 지식을 강요해야만 할까요? 라는 말들이 생겨나고, (지능의 측면에서 봤을 때) 그것이 또 다른 엘리트’주의‘로 이어지지는 않을까요?(확실하게 알고 있지는 않지만 지능마다 패턴을 인식하는 레벨이 다르다는 조건에서)
    1. 다시 질문으로 돌아와서, 최근 학교에서 떠나는 학생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안타까운 뉴스를 봤습니다. 단적으로 대학교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지방에 있는 대학교들은 점점 학과가 줄어들거나 통합되고 심지어 폐교를 할 정도로 학생 모집에 실패하고 있죠. 전문가들을 일하게 하려면 개인들이 똑똑해져야 하고, 배우고 질문해야 한다는 점은 명확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위에서 말씀드렸듯 지식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드물고 가능성을 가진 학생들마저도 학교를 떠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지식을 강요해야 할까요?? 떠나는 학생들을 강제로 다시 앉혀야 할까요?? 오늘날 교육의 개념 혹은 교육 프로그램을 급변하는 시대에 맞게 재조정해야 할까요? 급변하는 과학에 대한 윤리적 담론을 형성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요? 대책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습니다.
    철학사를 읽고 있는데 지금 막 읽고 있는 부분이 그리스의 정치 윤리 쪽이라 문득 이 영상과 관련이 깊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아서 흥미로움을 느끼고 질문드립니다 ㅋㅋㅋㅋ
    2. 윤리란 개념과 엔트로피라는 개념에 대해 질문드려도 될까요? 대략 책을 읽으면서 도덕 개념은 제 나름대로 이해를 한 것 같습니다. 제 방식대로 설명해보자면 도덕이란 일종의 옳음과 그릇됨으로 실천적 뉘앙스를 포함한 ‘당위’의 개념을 가지는 것 같습니다. “해야만 돼. 하면 안돼” 윤리란 제가 생각하기에 좋음 과 나쁨으로 도덕이 당위의 개념을 가진다면 윤리는 요청의 개념을 가집니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선~ 좋은 국가를 만들기 위해선~‘ 하지만 좀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으니 많이 헷갈리네요. 엔트로피라는 개념을 혼자 찾아보려 했는데 일종의 복잡성이라는 말로 설명되는 것 이외에는 다르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찾아보면 열역학, 여러 수식, 실험 등이 나오는 데 그쪽 분야에 문외한인 저로서는 어떤 식으로 이해를 하면 좋을지 잘 모르겠네요. 엔트로피라는 개념은 여러 댓글들을 읽다가, 또 LSD 관련된 책을 읽다가 LSD, 실로시빈 같은 약물을 엔트로피를 가지고 설명하는 글을 읽어봤는데 잘 이해가 안가서 질문드립니다.

    • @skjcast
      @skjcast  2 года назад +5

      1. 저는 4차 산업 혁명이 미칠 파급은 지식의 강요를 넘어서 제도적 안전망으로 대비해야 하는 문제라고 보고 있습니다. 인공 지능의 발전은 이를 우리 사회 제도 속에 어떻게 위치시켜야 하는가라는 새로운 문제를 낳습니다. 가령 인공 지능이 튜링 테스트를 통과한다면 이를 인격체로 인정하는 것인가, 인정한다면 인공 지능은 인간과 동일한 의미에서 법적 인격권을 갖는가, 인공 지능의 노동 시간은 어떻게 정할 것인가 같은 것들입니다. 마찬가지로 공장이 로봇과 사물인터넷 시스템 등으로 자율화되어서 현재와 같은 의미에서의 육체노동이 사라진다면,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임금을 어떻게 구하고 생산품은 누가 어떻게 소비할 것인가와 같은 문제가 생겨납니다.
      실제 산업 혁명기의 사례들은 사회 변동과 관련하여 기존의 사회적 관계들이 비틀리는 거대한 혼란을 증언하고 있습니다(잘 알려진 혹독한 노동 시간, 극도의 빈부 격차 등). 노동자의 권리, 독점 방지법, 소비자의 권리 등이 제도적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한 세기 이상에 걸친 정치적 투쟁을 통해서입니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기본적으로 시장의 원리(주류 경제학 관점에서 본다면 수요와 공급,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본다면 자본의 이동과 기술 혁신의 피드백 고리)에 따라 움직이게 될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내 직업이 다음 달부터 사라진다면 '시장에 맡긴다'는 진단은 더 이상 위안거리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수레바퀴, 자동차, 비행기 등의 변화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모릅니다(가령 자동차는 6~70년대 이후 핵심 산업이자 중산층의 상징이 되지만, 그 이전에 대량 생산된 것은 탱크였다는 것도 함께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 불확실성 때문에 제도와 담론이, 또 비판이 필요한 것입니다. 삶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는 것은 서민이고, 그렇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시대가 변한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싶으시면 발자크의 과 데이비드 하비의 를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개인의 정신세계는 물론 사회의 층위와 구성 원리 자체가 바뀌게 됩니다.
      2. 엔트로피란 본래 물리학의 핵심 개념인데, 간단히 말하자면 에너지가 시간에 대해 사용이 불가능해지는 정도를 말합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은(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수명 내지는 사용 기한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냉장고는 10년, 자동차는 20년, 주택은 30년 등입니다. 인간은 오래 살면 8~90년을 삽니다. 대부분의 동물은 인간보다 수명이 짧습니다. 나무나 신진대사가 느린 동물들 중에서 백 년 이상을 사는 것이 있습니다. 행성과 항성도 몇십 억 년 단위긴 하지만 수명이 있고, 은하나 우주도 보다 단위는 크지만 수명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작동이 불가능해집니다. 달리 말하자면 시간의 경과에 따라 질서 있는 상태에서 무질서한 상태로 이행하고, 이를 다시 질서 있는 상태로 돌리려면 더 큰 에너지를 투입해야 합니다. 엔트로피란 에너지가 사용 불가능한 방향으로 진행하는 경향으로, 우주의 근본적인 법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자역학의 파동방정식을 만든 학자이자, 분자생물학의 새 지평을 연 슈뢰딩거의 책 를 보면 슈뢰딩거는 생명의 본질은 정보이며, 생명 있는 것의 특징을 '외부의 에너지를 먹어서 자신의 엔트로피를 낮추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실로 우리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일생을 살며, 세대를 건너 자신의 구성 정보를 전달합니다.
      체코의 철학자 빌렘 플루서는 생명에 관한 슈뢰딩거의 고찰을 사회학적으로 확장시켜 미디어 이론에 적용했습니다. 플루서가 보기에 커뮤니케이션 활동은 정보를 표상하고 질서를 형성함으로써 엔트로피를 낮추는, '죽음이라는 한계에 저항'하는 활동입니다.
      도덕이나 윤리가 필요한 이유는 단적으로 말해서 지식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우리는 서로에 관해서 결코 완전한 앎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의 행동을 특정 방향으로 제한하는, 외부화된 강제력 있는 규칙이 필요해지는 것입니다. 미래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장래에 일어날 일을 특정한 사건으로 고정시킬 수 있다면 당위, 요청 등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당위나 요청이 필요하며, 자유라는 영역이 인간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