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로부인 헌화가 등 설화는 김유신 사후 그 후손들이 정치적으로 계파가 나뉘어 갈등을 일으킨 정황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금관가야를 잇는 김유신 후손파와 그밖 가야계가 정치적으로 꼭 같은 파였을 거란 추론이 더 비합리적이 아닐까요? 서기 780년 혜공왕의 모후 만명부인은 직계 김유신 계열이고, 만명부인이 왕후가 되기 전에 왕비였던 사람은 이혼당했었는데 "김유신의 혼령이 미추왕릉으로가서 ~울었다"는 설화와도 연관이 있었던 게 아닌가 추정되구요^^ ruclips.net/video/LlMj8jP8uAw/видео.html 아래 링크는 김유신이 왕으로 추존된 역사스페셜입니다. ruclips.net/video/3VSzp5GFQkM/видео.html 이 역사스페셜에선, 김유신이 흥무대왕으로 추서되었다는 내용을 가십꺼리로 다루어 흥미진진하긴 하지만 그 경위에 얽키고 설킨 정치적 목적 내지 정치적 배경은 전혀 도외시하여 오히려 의문들만 증폭시킨 바가 없지 않은 성 싶습니다. 한상권 아나운서의 마지막 멘트처럼 "열쇠"가 될 가능성을 두고 추론해 본다면 어떨까요? 1ㆍ저는, 김유신이 흥무대왕으로 추서된 배경엔 단순히 3국통일의 영웅이라서 죽은지 160여년이 지나서 추서된 게 아니라 오히려 3국통일 이후 150여년이 지나서도 신라 내부엔 이질적인 출신으로 말미암아 진골급 귀족들간에 치열한 헤게모니 다툼이 끊이지 않았고, 그 다툼 속에서 김유신의 후손들 즉 가야계도 양분되었지만 여전히 권력향배를 가름하는 캐스팅보트 세력으로 위세를 떨치던 차, 가야계가 분열되는 바람에 780년 무열왕계 혜공왕이 피살되고 내물왕계인 김양상(선덕왕)이 쿠데타로 집권하자 가야계를 통합하여 중앙정계를 탕평책으로 아우를 필요성이 제기되어 가야계의 대부인 김유신을 '왕'급으로 추존할 정치적 필요성이 제기되었을 것이고, 당현종이 공자를 '문선왕'으로 추존하는 정치적 묘수를 본받아 흥덕왕 즉위년에 김유신을 '흥무대왕'으로 추존하고 자신은 '흥덕왕'으로 등극하는 신의 한수를 둔 셈이라 추정됩니다 ^^ ruclips.net/video/EH76EhZenOg/видео.html 이 영상은, 서기 780년 전후 즉 신라 혜공왕 시절 전후 무열왕계. 내물왕계가 사활을 걸고 격돌하던 모습을 탐정수사하듯 되짚어보는 역사추론입니다^^ 국어 교과서에서도 배웠던 "수로부인과 어느 노인의 헌화가"에 얽힌 역사적 배경과 역사적 사실을 짚어보고 그게 혜공왕의 죽임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신라를 중대와 하대로 나눌 정도로 큰 정치적, 사회적 변동을 가져온 그 사건에 얽힌 '가야계'의 캐스팅보트가 어떤 위력을 발휘했는지를 짚어보면서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공부할 좋은 기회로 사료됩니다^^ 즉 무열왕계는 김알지 후손 김씨가 아니라, 중국 5호16국 중 초기에 강력했던 북연 출신 모용 선비족 계열의 창씨개명 김씨(모용씨>모씨>김씨) 즉 모용씨인 법흥왕 계열이고, 780년 쿠데타를 일으켜 혜공왕을 죽인 김양상 등은 김알지 후손 김씨일 가능성이 클 것으로 분석됩니다. 중국 5호16국 시대가 통일되어가는 과정에서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던 모용씨 선비족(예맥족의 후예?) 북연이 탁발선비족 북위에 멸망당할 때 북연 왕과 더불어 100만명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투항(망명)해 왔다고 합니다. 북연 왕은 "실은 고구려 땅은 우리 선조들인 예족의 땅이다"는 입바른 소리를 했다가 장수왕이 죽여버렸다네요. 북연에서 망명해 온 100만명(당시 100만명은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인구라 합니다)의 처리에 골머리를 앓던 고구려 장수왕은 이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었기에, 광개토왕 때부터 관리해 오던 신라 땅 수비군사를 북연 군대와 교대시켰고, 일부 북연 군사들은 백제로도 들어가 용병 비슷하게 또 실권을 장악하기도 하는, 사서(삼국사기, 삼국유사)에는 "용, 흑룡. 황룡, 이리떼~" 등으로 표현하고 있는 세력들이 이 북연 출신 세력이고 백제의 '곤지', 신라의 법흥왕이 대표주자라는 설이 있습니다^^ 이 역사스페셜에서도 언급된 '곤지왕'의 계보가 실은 '열쇠'일 수도 있겠습니다. 곤지를 개로왕의 아우로만 치부하고 있지만 '혈연적' 아우가 아니라 '의형제' 내지는 백제로 이주한 북연세력의 대표로 기존 백제 개로왕과는 '연합정권'의 수장으로 볼 여지도 열어두고 연구할 필요도 있다고 봅니다. '곤지'가 왜(일본)을 간 것은 관광차 간 게 아니라 이 역사스페셜에서도 일부 언급되었듯이 일본(왜)를 정벌하러 가면서 형식상은 형수인 개로왕의 왕비가 임신한 상태임에도 ㅡ 나중에 무령왕이 되는 ㅡ "부인으로 삼아 데려가는" 기괴한 행동은 왕비가 인질이면서 일종의 '마복자' 역할이 아니었던가 추정됩니다. 실제 무령왕은 핏줄은 '개로왕의 아들'이지만 '곤지의 아들 자격'으로 일본 섬에서 자라고 나중에 백제 왕이 되거니까요. 화랑세기 필사본에도 언급되는 '마복자'는 신라 전통이라기보다는 모용선비족(예맥족?) 북연의 전통이었수도 있겠습니다. 신라 법흥왕의 뒤를 이은 진흥왕은 '황룡사'를 짓는데. 북연은 스스로 "황룡국"이라 불렀다는 설도 있습니다. 김알지 신라 김씨 왕통(대표주자는 내물왕)과 북연 출신 모용씨가 마복자로 양위받아 김씨로 창씨개명한 가짜? 김씨 왕통(대표주자 법흥왕, 진흥왕)은 대대로 경쟁하면서 거기에 김유신의 가야파가 어디로 캐스팅보트하느냐에 따라 향배가 갈렸던 듯 추정됩니다^^ 가야파도 알곡인 김유신파, 상대적으로 쭉정이였던 비주류 가야파도 있었겠지요?^^ 양지가 음지되고, 음지가 다시 양지되는 모습을 "(헌화가의 주인공) 수로부인의 딸로 왕비가 되었다가 이혼당한 삼모부인"과 "김유신 손자의 딸로 수로부인 딸인 왕비(삼모부인)를 제끼고 새 왕비가 되었지만 아들 혜공왕과 함께 죽임을 당한 또 다른 가야파 만월부인"의 운명이 뒤바뀌는 데서도 찾을 수 있고, 창씨개명한 김씨인 법흥왕의 후손들은 780년 혜공왕을 끝으로 무대에서 일단 내려온 듯 싶습니다. 이 시점에서, 혜공왕의 엄마인 만월부인은 에밀레종을 만들어 부처님의 가피로 국난을 타개해 보려 했다고들 그동안 역사에선 평해 왔는데, 제 소견으론 거대한 종을 만든다는 핑계로 귀족들에게 삥을 왕창 뜯어내(최우가 8만대장경 조판 핑계로 어마어마한 정치자금을 강화도로 끌어들였듯) 그 돈으로 군사력을 길러 당시 굴기하던 김알지 김씨 계를 척결하려다가 김알지 김씨계인 김양상이 상대적으로 소외받던 가야계ㅡ 같은 김유신 후손들이었지만 ㅡ와 손잡고 되치기한 성 싶습니다. 요즘 차기 대선 예비후보들 레이스와도 너무 흡사해 소름이 끼치네요^^ 흥덕왕의 핏줄에 대하여 논란이 있으나 선덕왕 김양상의 쿠데타 성공 후 50여년이 지난 흥덕왕 즉위년에 김유신을 '왕'으로 추존하여, 혜공왕 지지 김유신계와도 화해하고 동시에 재갈을 물려버리는 것으로 보아 일종의 탕평책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김유신을 '왕'으로 추존한다고 해서 '큰 돈'드는 것도 아니고, 참 재미있는 신의 한 수로 보입니다^^ 요약하면, 북연 세력인 곤지의 친아들이 동성왕이고, 한성백제 기존세력인 개로왕의 친아들이자 곤지의 마복자인 무녕왕이며, 고구려 장수왕이 시퍼렇게 살아있고 '곤지'도 일본에 살아서 통치하던 때는 당연히 나이론 아우이지만 실세인 동성왕이 백제 왕을 잇는 게 당연지사로 여겨졌겠지만, 곤지도 죽고 장수왕도 죽어 문자명왕이 등극하여 한반도 정세가 요동치기 시작하던 501~502년 무렵은 백제 내부 갈등(한성백제계, 북연 이주세력계)도 심화되어갔을 터, 무녕왕이 동성왕 시해에 가담한 방법은 인조반정 보단 중종반정 때처럼 간접적으로 관여하여 개로왕계로의 왕권회복을 이루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여기서 최대 공로자인 '백가'는 죽여서 증거를 없앨 필요도 있었겠고, 귀족.백성들의 민심도 다독이고 '죽은 자는 말이 없기에' 인조반정 세력들이 '반정의 최대공로자인 김개시를 즉참했듯이' 무녕왕도 '백가'를 죽여 입을 막아버렸고, 수장하여 죄를 뒤집어 씌우고, 단독범행으로 역사에 기록하여 지금의 역사학자들까지 골탕 먹이고 있다는 게 합리적 추론이 아닐까요? 10.26사건을 '김재규 단독범행'으로 결론지은 신군부의 처결이 오버랩되는 건 저만의 뇌피셜일까요?^^ 선생님 덕분에 영상으로 수로공원 관람 잘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웅장하고 귀품 있는 수로부인 조각상
푸른바다가 아름답게 보이니 더없이
멋지네요 드론 촬영이라 그런지 상세히보여지고 있네요
인삼대장님 파이팅!!
수로부인 헌화가 등 설화는 김유신 사후 그 후손들이 정치적으로 계파가 나뉘어 갈등을 일으킨 정황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금관가야를 잇는 김유신 후손파와 그밖 가야계가 정치적으로 꼭 같은 파였을 거란 추론이 더 비합리적이 아닐까요? 서기 780년 혜공왕의 모후 만명부인은 직계 김유신 계열이고, 만명부인이 왕후가 되기 전에 왕비였던 사람은 이혼당했었는데 "김유신의 혼령이 미추왕릉으로가서 ~울었다"는 설화와도 연관이 있었던 게 아닌가 추정되구요^^
ruclips.net/video/LlMj8jP8uAw/видео.html
아래 링크는 김유신이 왕으로 추존된 역사스페셜입니다.
ruclips.net/video/3VSzp5GFQkM/видео.html
이 역사스페셜에선, 김유신이 흥무대왕으로 추서되었다는 내용을 가십꺼리로 다루어 흥미진진하긴 하지만 그 경위에 얽키고 설킨 정치적 목적 내지 정치적 배경은 전혀 도외시하여 오히려 의문들만 증폭시킨 바가 없지 않은 성 싶습니다.
한상권 아나운서의 마지막 멘트처럼 "열쇠"가 될 가능성을 두고 추론해 본다면 어떨까요?
1ㆍ저는, 김유신이 흥무대왕으로 추서된 배경엔 단순히 3국통일의 영웅이라서 죽은지 160여년이 지나서 추서된 게 아니라 오히려 3국통일 이후 150여년이 지나서도 신라 내부엔 이질적인 출신으로 말미암아 진골급 귀족들간에 치열한 헤게모니 다툼이 끊이지 않았고, 그 다툼 속에서 김유신의 후손들 즉 가야계도 양분되었지만 여전히 권력향배를 가름하는 캐스팅보트 세력으로 위세를 떨치던 차, 가야계가 분열되는 바람에 780년 무열왕계 혜공왕이 피살되고 내물왕계인 김양상(선덕왕)이 쿠데타로 집권하자 가야계를 통합하여 중앙정계를 탕평책으로 아우를 필요성이 제기되어 가야계의 대부인 김유신을 '왕'급으로 추존할 정치적 필요성이 제기되었을 것이고, 당현종이 공자를 '문선왕'으로 추존하는 정치적 묘수를 본받아 흥덕왕 즉위년에 김유신을 '흥무대왕'으로 추존하고 자신은 '흥덕왕'으로 등극하는 신의 한수를 둔 셈이라 추정됩니다 ^^
ruclips.net/video/EH76EhZenOg/видео.html
이 영상은, 서기 780년 전후 즉 신라 혜공왕 시절 전후 무열왕계. 내물왕계가 사활을 걸고 격돌하던 모습을 탐정수사하듯 되짚어보는 역사추론입니다^^
국어 교과서에서도 배웠던 "수로부인과 어느 노인의 헌화가"에 얽힌 역사적 배경과 역사적 사실을 짚어보고 그게 혜공왕의 죽임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신라를 중대와 하대로 나눌 정도로 큰 정치적, 사회적 변동을 가져온 그 사건에 얽힌 '가야계'의 캐스팅보트가 어떤 위력을 발휘했는지를 짚어보면서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공부할 좋은 기회로 사료됩니다^^
즉 무열왕계는 김알지 후손 김씨가 아니라, 중국 5호16국 중 초기에 강력했던 북연 출신 모용 선비족 계열의 창씨개명 김씨(모용씨>모씨>김씨) 즉 모용씨인 법흥왕 계열이고, 780년 쿠데타를 일으켜 혜공왕을 죽인 김양상 등은 김알지 후손 김씨일 가능성이 클 것으로 분석됩니다. 중국 5호16국 시대가 통일되어가는 과정에서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던 모용씨 선비족(예맥족의 후예?) 북연이 탁발선비족 북위에 멸망당할 때 북연 왕과 더불어 100만명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투항(망명)해 왔다고 합니다. 북연 왕은 "실은 고구려 땅은 우리 선조들인 예족의 땅이다"는 입바른 소리를 했다가 장수왕이 죽여버렸다네요.
북연에서 망명해 온 100만명(당시 100만명은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인구라 합니다)의 처리에 골머리를 앓던 고구려 장수왕은 이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었기에, 광개토왕 때부터 관리해 오던 신라 땅 수비군사를 북연 군대와 교대시켰고, 일부 북연 군사들은 백제로도 들어가 용병 비슷하게 또 실권을 장악하기도 하는, 사서(삼국사기, 삼국유사)에는 "용, 흑룡. 황룡, 이리떼~" 등으로 표현하고 있는 세력들이 이 북연 출신 세력이고 백제의 '곤지', 신라의 법흥왕이 대표주자라는 설이 있습니다^^
이 역사스페셜에서도 언급된 '곤지왕'의 계보가 실은 '열쇠'일 수도 있겠습니다. 곤지를 개로왕의 아우로만 치부하고 있지만 '혈연적' 아우가 아니라 '의형제' 내지는 백제로 이주한 북연세력의 대표로 기존 백제 개로왕과는 '연합정권'의 수장으로 볼 여지도 열어두고 연구할 필요도 있다고 봅니다.
'곤지'가 왜(일본)을 간 것은 관광차 간 게 아니라 이 역사스페셜에서도 일부 언급되었듯이 일본(왜)를 정벌하러 가면서 형식상은 형수인 개로왕의 왕비가 임신한 상태임에도 ㅡ 나중에 무령왕이 되는 ㅡ "부인으로 삼아 데려가는" 기괴한 행동은 왕비가 인질이면서 일종의 '마복자' 역할이 아니었던가 추정됩니다.
실제 무령왕은 핏줄은 '개로왕의 아들'이지만 '곤지의 아들 자격'으로 일본 섬에서 자라고 나중에 백제 왕이 되거니까요.
화랑세기 필사본에도 언급되는 '마복자'는 신라 전통이라기보다는 모용선비족(예맥족?) 북연의 전통이었수도 있겠습니다. 신라 법흥왕의 뒤를 이은 진흥왕은 '황룡사'를 짓는데. 북연은 스스로 "황룡국"이라 불렀다는 설도 있습니다.
김알지 신라 김씨 왕통(대표주자는 내물왕)과 북연 출신 모용씨가 마복자로 양위받아 김씨로 창씨개명한 가짜? 김씨 왕통(대표주자 법흥왕, 진흥왕)은 대대로 경쟁하면서 거기에 김유신의 가야파가 어디로 캐스팅보트하느냐에 따라 향배가 갈렸던 듯 추정됩니다^^
가야파도 알곡인 김유신파, 상대적으로 쭉정이였던 비주류 가야파도 있었겠지요?^^
양지가 음지되고, 음지가 다시 양지되는 모습을 "(헌화가의 주인공) 수로부인의 딸로 왕비가 되었다가 이혼당한 삼모부인"과 "김유신 손자의 딸로 수로부인 딸인 왕비(삼모부인)를 제끼고 새 왕비가 되었지만 아들 혜공왕과 함께 죽임을 당한 또 다른 가야파 만월부인"의 운명이 뒤바뀌는 데서도 찾을 수 있고, 창씨개명한 김씨인 법흥왕의 후손들은 780년 혜공왕을 끝으로 무대에서 일단 내려온 듯 싶습니다.
이 시점에서, 혜공왕의 엄마인 만월부인은 에밀레종을 만들어 부처님의 가피로 국난을 타개해 보려 했다고들 그동안 역사에선 평해 왔는데, 제 소견으론 거대한 종을 만든다는 핑계로 귀족들에게 삥을 왕창 뜯어내(최우가 8만대장경 조판 핑계로 어마어마한 정치자금을 강화도로 끌어들였듯) 그 돈으로 군사력을 길러 당시 굴기하던 김알지 김씨 계를 척결하려다가 김알지 김씨계인 김양상이 상대적으로 소외받던 가야계ㅡ 같은 김유신 후손들이었지만 ㅡ와 손잡고 되치기한 성 싶습니다. 요즘 차기 대선 예비후보들 레이스와도 너무 흡사해 소름이 끼치네요^^
흥덕왕의 핏줄에 대하여 논란이 있으나 선덕왕 김양상의 쿠데타 성공 후 50여년이 지난 흥덕왕 즉위년에 김유신을 '왕'으로 추존하여, 혜공왕 지지 김유신계와도 화해하고 동시에 재갈을 물려버리는 것으로 보아 일종의 탕평책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김유신을 '왕'으로 추존한다고 해서 '큰 돈'드는 것도 아니고, 참 재미있는 신의 한 수로 보입니다^^
요약하면, 북연 세력인 곤지의 친아들이 동성왕이고, 한성백제 기존세력인 개로왕의 친아들이자 곤지의 마복자인 무녕왕이며, 고구려 장수왕이 시퍼렇게 살아있고 '곤지'도 일본에 살아서 통치하던 때는 당연히 나이론 아우이지만 실세인 동성왕이 백제 왕을 잇는 게 당연지사로 여겨졌겠지만, 곤지도 죽고 장수왕도 죽어 문자명왕이 등극하여 한반도 정세가 요동치기 시작하던 501~502년 무렵은 백제 내부 갈등(한성백제계, 북연 이주세력계)도 심화되어갔을 터, 무녕왕이 동성왕 시해에 가담한 방법은 인조반정 보단 중종반정 때처럼 간접적으로 관여하여 개로왕계로의 왕권회복을 이루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여기서 최대 공로자인 '백가'는 죽여서 증거를 없앨 필요도 있었겠고, 귀족.백성들의 민심도 다독이고 '죽은 자는 말이 없기에' 인조반정 세력들이 '반정의 최대공로자인 김개시를 즉참했듯이' 무녕왕도 '백가'를 죽여 입을 막아버렸고, 수장하여 죄를 뒤집어 씌우고, 단독범행으로 역사에 기록하여 지금의 역사학자들까지 골탕 먹이고 있다는 게 합리적 추론이 아닐까요? 10.26사건을 '김재규 단독범행'으로 결론지은 신군부의 처결이 오버랩되는 건 저만의 뇌피셜일까요?^^
선생님 덕분에 영상으로 수로공원 관람 잘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강대봉님 방문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