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려군이란 가수는? 이 내용은 인터넷의 여러자료를 모아 직접 적은 것이라 다소 틀린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약간의 수정으로 가하여 그대로 발췌한 부분이 있습니다. 위키백과와 기타 여러가지 자료들을 참고하여 엮어 작성 하였습니다. 틀린 부분이 있으면 지적바랍니다. ========================== 들어가기전 대만과 중국의 관계를 조금 알아야 된다. 지금의 중국은 공산당 1당의 독재체제의 사회주의 국가이지만, 20세기 초중반 까지만 해도 2개의 당이 존재 했었다. 바로 "장개석(장제스)"가 수장인 국민당과 "모택동(마오쩌둥)"이 수장인 공산당이다. 이 둘은 중국 내에서 극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에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 보다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의 세력이 조금더 강했었다. 지금과 다르게 천안문에 장개석의 사진이 걸려있었음. 이만큼 국민당이 공산당 보다 앞서고 있던 상황에서 판세를 뒤집은건 항상 중국이 세계에서 제일 강한 나라라고 자부하던 중국 국민들에게 19세기 아편전쟁 패배. 서양의 열강들과 일본과의 청일전쟁 패배로 중국인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죽어라 싸우던 국민당과 공산당 두당은 손을 잡고 서양열강과 일본에 저항하기로 한다. 이 "국공합작"으로 인해 중국인들에게는 서양열강 및 일본에 대한 강한 분노가 다시한번 불붙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우리가 세계의 중심이라 자부했던 한계를 알아버린 중국인들이 점차 국민당 보다 공산당을 지지게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두둥... 공산당의 모택동은 장개석 국민당의 무리들을 몰아내게 되고 장개석의 국민당 무리들은 중국 옆에 붙어있는 조그마한 섬으로 쫒겨 나게 된다. 그 섬이 지금의 대만(타이완, 중화민국)이다. 즉 중국이 두개로 분단되어 대륙의 공산당(중화인민공화국)과 섬의 국민당(중화민국) 각자의 땅에서 나라를 세워버리게 된 것이다.
그녀의 부친은 허베이 성, 모친은 상둥 성. 두분다 대륙 출신이다. 부친은 국민혁명군 직업군인으로 국공내전으로 대만으로 이주하였으며, 이 두분 사이에 1953년 1월 등려군이 대만 운림현에서 태어났다. 어릴때 부터 노래를 좋아하고, 잘불렀다고 한다. 14세에 봉양화기(중국어 키보드를 모르는 관계로 한글로 표기)라는 곡의 음반을 발매. 16세 되던해 1970년 가수로 정식 데뷔 하게되었고 당시 대만의 최고 인기 드라마였던 "정정"의 주제곡 "아일견니취소(당신만 보면 웃음이 나요)"를 부르면서 곧바로 대중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다. 얼마안가 그녀는 청아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며 큰 인기를 끌게된다. 1973년 홍콩 라이브하우스에서 노래를 부르는 중 한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이사람은 일본 최대 레코드사 폴리돌의 프로듀서 "후나키 미노루"이다. 그가 등려군의 노래를 듣고 명함을 한장 건내며 "일본에서 활동해 보지 않겠어요?"라고 말한다. 즉 그가 일본 진출 제안을 한 것이다. 이 기회로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음반시장이 일본에 진출하게 된다. 1973년 등려군은 "테레사 텐(Teresa Teng)"이라는 영문이름으로 일본 시장에 아이돌 계열의 노래인 1집 "오늘밤일까 내일일까"로 음반을 발매 하지만 큰 성과를 얻지 못한다.(당시 테레사 수녀를 존경해서 테레사로 지었지 않았나라고 알려졌지만 그녀가 죽고 난 후 알려진 바로는 천주교 신자로서 자신의 세례명을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곧바로 엔카 계열로 전환하여 2집 "공황"을 발매, 70만장 판매라는 대 히트를 하고 1974년 "레코드 대상 신인상"과 각종 상을 휩쓸었다.(여기 잠깐 아이돌, 엔카에 대해 부연설명을 하자면 아이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이돌을 뜻하며, 엔카는 우리나라의 트롯트 정도로 보면 된다. 사실 조용필도 락밴드 음악이지만 프로듀서?, 투자자? 의 요구에 의해 엔카 계열로 성공한 대표적 인물. 그래서 자세히 들어보면 등려군이나 조용필의 노래는 엔카 계열 노래와 다른 느낌이 많이 든다는 것을 알수 있다.) 등려군은 20대 중반에 최정상 자리에 오르며 한국(문화개방문제)을 제외한 홍콩, 중국, 일본, 말레이시아, 싱가포르등등 아시아에서 대 스타가 된다. 특히 "님은 언제 오시나요"라는 곡은 대만 군인들의 애국가와 같은 노래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79년 홍콩에 머물다 일본으로 입국한 등로군은 위조여권을 사용하였다는 이유로 일본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인도네시아 대사관에 의해 구속되고 만다. 입국당시 등려군이 사용했던 여권이 다른 사람의 여권이였던 것이다. 당시 대만은 중국의 영향으로 국교를 수립하지 않은 나라가 많아 비자, 여권 신청이 굉장히 까다로웠다. 해외 활동이 많았던 등려군은 급하게 일본으로 가야될 일이 생겨 인도네시아 친구에게 부탁하여 대신 여권을 만들어 그 여권으로 일본으로 갔던 것이다. 수용소에 갇히게 된 등려군의 소식을 언론을 통해 "위조여권 사용 파문"으로 급속도로 퍼지게 되었으며, 이에 대만 국민들은 "대만을 대표하는 가수가 어떻게 남의 나라의 여권을 사용할수 있냐"며 배신자, 반역자로 몰리며 대만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한다. 결국 등려군은 1년간 일본 입국 금지 처분을 받고 풀려나고 세간의 비난을 피해 모든연예활동 중단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기 위해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그 후 1년 뒤 1980년 대만 정부 관계자가 미국에 있는 등려군 찾아간다. 정부 관계자는 대만 수상의 지시로 등려군에게 대만으로 돌아와 달라고 부탁한다. (대만 정부는 등려군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할려고 했던 것이다.) 1980년 초 중국은 중국 주석 등소평에 의해 개혁, 개방 정책이 시행되었던 시기다. 30년 만에 교류가 부활한 것이다.(대륙인 중국과 섬인 대만은 한국과 비슷한 분단국가?라 일촉즉발 위기 상황이 언제 발생할지 몰랐던 시기. 대만 군인들에게 그녀의 노래는 그 어떤것도 대신 할수 없는 위안이 되었던 것이었다. 등려군은 군인이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인해서인지 군인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고한다. 그녀를 부르는 부대가 있으면 언제나 열일을 제쳐두고 공연에 임했다고 한다.) 등소평에 의해 개방된 중국에 등려군의 앨범이 정식으로 유통되기 시작한다. 등려군의 앨범은 중국인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아 버린다. 당시 중국과 대만의 관계 원만하지 못했던 시기에 대만 정부는 미국에서 쉬고있는 등려군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귀국을 적극적으로 추진 했던것이다. 영웅 대접을 받으며 대만공항에 당당히 입국한 등려군 그녀는 이용당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무언가 씁쓸한 생각이 든다.
1983년 중국에서는 중국 주석 등소평에 의해 "정신오염 반대 캠페인"(자본주의 문화 속에 있는 유해한 것들을 반대, 서방문화 비판으로 이어짐) 실시 선언을 한다. 중국은 대만이 등려군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한다는 걸 눈치 챈 것일까? 등려군의 대만 군인들에 대한 애착과 가사 내용등등의 이유로 등려군의 노래는 중국에서 특별히 강력하게 노래를 금지 시킨다. 등려군 앨범판매 금지! 유통된 앨범까지 모두 수거할 정도로 공산당에서는 자본주의 등려군의 노래가 위협적인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특히 "님은 언제 오시나요"라는 곡의 의미가 대륙에서 쫒겨난 국민당 정부의 대륙복권 의지가 담긴 불온한 노래로 지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녀의 노래를 듣고 마음을 뺏겨버린 중국국민들의 마음을 법으로 되돌리기에는 역 부족이였다. 급속도로 중국에 퍼져버린 그녀의 노래는 중국국민들의 마음을 단숨에 휘어잡아 버렸다. 당시 중국에서 등려군의 노래를 듣다 들키면 공안에 잡혀 공산당으로부터 가차없는 처벌받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몰래 음반을 팔거나 숨어서 들었다고 한다. 공산당에 의해 탄압받던 중국인들은 단속을 피해 몰래 등려군의 음악을 들으며 위로를 받곤 했다. 당시 중국국민들 사이에서 "중국의 낮은 등소평이 지배하고, 밤은 등려군이 지배한다" "등소평 대신 등려군이 필요하다" 라는 말이 유행처럼 떠돌았을 정도로 공산주의가 흔들릴? 정도로 대단한 인기였다. 그러던 중 등려군은 1984년까지 미국, 홍콩, 대만에서 활동하다 일본 활동 자격을 다시 얻어 일본 시장에 재 입성. "속죄, 애인"으로 각각 150여만장 판매. "세월의 흐름에 몸을 맡겨"로 200여만장을 팔리며 대 히트를 기록하게 된다. "전일본 유선방송 대상" "동서유선 대상" 최초로 3년 연속 대상 및 그랑프리를 수상하며 다시 정상 자리에 오른다. 1985년 12월에 NHK홀에서 단독 콘서트를 진했하였다. 또 같은해 조용필의 일본 활동 후 등려군이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일본어로 부르게 된다.
그 후 1989년 중국에서 큰 사건이 일어난다 "천안문사건". 민주화를 요구하며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서 시위를 벌이던 학생, 노동자들을 중국 정부가 무력 진압하면서 빚어진 대규모 유혈 참사 사건이다. 천안문 사건 참여자들을 지지하는 공연에 등려군이 참석한다. 그로인해 등려군의 노래는 중국 정부의 더욱더 거센 탄압을 받아 중국 어디에서도 등려군의 노래는 들을 수 없게 된다. 등려군은 좋은일도 많이 하였는데 천안문사건 이후 외국을 떠돌던 망명자들을 위해 어디든 찾아가 노래를 불렀고, 수많은 고아를 비롯해 상처받은 영혼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그녀가 있었다. 이 후 등려군은 모든 음악활동을 중단하고 종적을 감춘다. 그렇게 등려군은 사람들에게 점점 잊혀졌다.
그로부터 6년 후.... 1995년 5월 8일. 등려군의 갑작스러운 사망소식으로 큰 충격을 받고 중화권은 눈물 바다가 된다. 요양 목적으로 가끔 방문하던 "타이 치앙마이"의 "메이핀 호텔"에서 향년 42세의 나이에 천식 발작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녀가 죽을때 곁을 지킨건 프랑스인 남자친구 한명뿐... 중국인들에게 등려군의 사망 소식은 2년뒤 사망한 등소평의 사망과 버금갈 정도의 충격을 안겨 주었다. 5월 28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국장급의 장례가 치뤄진 장례식. 그런데... 이와중에 중국 거리에서 등려군의 노래가 울려 퍼지기 시작한 것!! 등려군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중국내에서 금지곡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목숨걸고 노래를 부른 중국국민들. 어마어마한 인파에 중국 공안들은 단속할 엄두도 못내고 구경만 해야했다. 등려군 장례식 당일 온통 그녀의 노래소리가 울려퍼진 중국과 대만. 전 세계 곳곳에 있는 그녀의 수많은 팬들의 애도 행렬이 이어졌으며 3만명의 팬들이 몰렸다. 동시에 당시 출반되었던 그녀의 음반들은 품절되는가 하면 그녀의 노래를 듣고자란 40대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그녀의 무덤 앞에 목놓아 울기까지하는 모습이 그대로 TV에 방영되기도 했다. 그녀의 관은 대만(중화민국) 국기와 국민당 당기로 덮였으며 묘 앞에는 동상과 레코드 장치가 설치되어 그녀의 노래가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사람들은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사체를 화장하지 않고 그대로 매장하였다. 사후 50년 정도 생전 모습 그대로 둘 예정이라 한다. 그녀가 숨지기 전까지 살았던 대만 스탠리마켓 근처에 있는 그녀의 저택은 현재 기념관으로 개조되어 그녀를 그리워 하는 많은 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20대에는 얼굴에 똥을 발라도 이쁘죠 ^^ 40대인데 그시절이 그립네요 나이가 들어보니 그절로 다시 간다면 세계 다 누비고 다닐거 같은데 이런 생각도 40대 이니까 하는거 겠죠 음악 들으면 어린시절 떠 올려보네요 나중에 20년 지나면 40대 그리워 하겠죠 암튼 열심히 하고픈거 다하고 살아야 겠어요
이 영화를 보고 홍콩에 사랑에 빠지고 이 노래를 매일 듣게 되었고 몇 년 전 5일 동안 홍콩을 다녀 왔어요. 이 영화와 이 노래는 저에게 홍콩과 제 환상을 심어준 고마운 영화입니다. 적어도 그 당시 홍콩 길거리에서 이 노래가 자주 흘러나와서 반갑고 신기하고 황홀했습니다. 마카오에서는 남녀노소 이 노래를 부르는 악가들도 보였고요. 이 때의 홍콩이 그립네요. 홍콩이 생각나고 사랑이 떠오르게 될 때마다 찾아오겠습니다. 매번 찾아왔던것처럼 업로드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영화를 보고 이 처럼 우리 다시 볼수 있으면 좋겠다 말한 당신. 그건 이루어 질수가 없겠군요~ 저의 시간이 이제 길지가 않군요~~ 함께 있을 때 잘 해주지 못함을 미안하오~~ 살아가면서 힘든 일이 생기더라도 견딜수 있는 강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바라오~~ 고마웠소~~
보면 볼수록 자꾸 슬퍼져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다 같은 추억.. 생각하면 가슴아프지만 그래도 생각하는 추억. 고백 못해 맘졸인 그때.. 고백하고 해줄게 없어서 후회하던 그때.,. 훗날 마주쳤을땐 서로의 다른 사랑을 곁에 두고 몰래 함께 마음 아파하는 서로의 눈빛을 느끼면서도 또 고백 못한 그때.. 이게 우리의 삶인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영상에 미소짓고 푸르렀던 그 시절을 회상하는 것이겠죠. 여러분 모두다..
25년이 지나 다시 보니 정말 불후의 명작입니다. 의리(정), 연민, 짝사랑, 운명 같은 사랑 등 각기 다른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면서도 중국본토, 홍콩, 대만, 미국화교 등 뿌리는 같지만 전혀 다른 체제와 환경에서 다양한 언어로(광동화, 보통화, 영어) 제각각의 삶의 목표를 향해 열심히 살아가는 (본디 하나였던) 중국인의 정체성을 묻는 근원적인 질문. 홍콩 반환을 앞둔 상황에서 그들이 느끼는 아주 복잡한 심경.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연결해주는 등려군의 아름다운 노래들이 돋보인 영화였습니다.
어머니가 몇주전에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엄마 사진을 보는데 저 유치원때 사진을 보니 유치원에서 생일파티(83년생) 사진이 있어서 봤는데 어머니 젊었을때(당시 36세) 어머니 모습이 장만옥님이랑 너무 닮았어요 20대 모습은 더 아름답구요 엄마가 그렇게 아름다운분인줄 돌아가시고야 알았습니다. 엄마 너무 보고싶어요 제가 이 글을 쓰는건 예전에 지인분 장례식장에 갔는데 지인이 어머니를 갑자기 이별하였습니다. 저에게 한말은 살아계실때 잘해라는 말이었는데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생각한게 이게 생각 나더라구요 너무 너무 보고싶어요 정말 너무 너무 보고싶어요 매일 매일 이건 꿈이야라고 말하면서 꿈에서 깨고 싶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현실이네요 너무 너무 보고싶어요 죄송합니다. 무거운 답글달아서 어머니를 닮은 배우가 나오는 영화의 OST를 다 보면서 답글을 답니다. 엄마 보고싶어요 불효자를 용서하세요..... 항상 사랑해요 엄마...
홍콩을 정말 좋아 했는데, 그 곳에서 사없을 위해서 거주 하면서 홍콩의 매력에 푹 빠졌어요. 그리고 홍콩에 대한 추억으로 더 감명 깊게 본 첨밀밀..벌써 8번을 봤어요. 등려군은 최고의 가수이며 이 영화속의 장만옥은 대체 불가한 연기를 보여줬어요. 최고의 영화 최고의 OST 그리운 그 시절의 홍콩........
어리고 어리숙하고 가진거 없던 시절.. 직장 초년생이라 나자신도 잊어버리고 열심히만 하던 그때 장거리 커플이라 자주 만나지 못해도 2년이라는 긴 시간 내옆에 있어준 그때 그사람이 그리울때 마다 첨밀밀을 봅니다.. 지금 당장 현실이 너무 힘들어도 자신에게도 옆에 잇는 사람에게도 좀더 신경 써주세요..지나간 사람은 다시 돌아 오지 않습니다.
등려군이란 가수는?
이 내용은 인터넷의 여러자료를 모아 직접 적은 것이라 다소 틀린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약간의 수정으로 가하여 그대로 발췌한 부분이 있습니다. 위키백과와 기타 여러가지 자료들을 참고하여 엮어 작성 하였습니다. 틀린 부분이 있으면 지적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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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전 대만과 중국의 관계를 조금 알아야 된다. 지금의 중국은 공산당 1당의 독재체제의 사회주의 국가이지만, 20세기 초중반 까지만 해도 2개의 당이 존재 했었다.
바로 "장개석(장제스)"가 수장인 국민당과 "모택동(마오쩌둥)"이 수장인 공산당이다.
이 둘은 중국 내에서 극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에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 보다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의 세력이 조금더 강했었다. 지금과 다르게 천안문에 장개석의 사진이 걸려있었음. 이만큼 국민당이 공산당 보다 앞서고 있던 상황에서 판세를 뒤집은건 항상 중국이 세계에서 제일 강한 나라라고 자부하던 중국 국민들에게 19세기 아편전쟁 패배. 서양의 열강들과 일본과의 청일전쟁 패배로 중국인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죽어라 싸우던 국민당과 공산당 두당은 손을 잡고 서양열강과 일본에 저항하기로 한다. 이 "국공합작"으로 인해 중국인들에게는 서양열강 및 일본에 대한 강한 분노가 다시한번 불붙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우리가 세계의 중심이라 자부했던 한계를 알아버린 중국인들이 점차 국민당 보다 공산당을 지지게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두둥... 공산당의 모택동은 장개석 국민당의 무리들을 몰아내게 되고 장개석의 국민당 무리들은 중국 옆에 붙어있는 조그마한 섬으로 쫒겨 나게 된다. 그 섬이 지금의 대만(타이완, 중화민국)이다. 즉 중국이 두개로 분단되어 대륙의 공산당(중화인민공화국)과 섬의 국민당(중화민국) 각자의 땅에서 나라를 세워버리게 된 것이다.
그녀의 부친은 허베이 성, 모친은 상둥 성. 두분다 대륙 출신이다. 부친은 국민혁명군 직업군인으로 국공내전으로 대만으로 이주하였으며, 이 두분 사이에 1953년 1월 등려군이 대만 운림현에서 태어났다. 어릴때 부터 노래를 좋아하고, 잘불렀다고 한다. 14세에 봉양화기(중국어 키보드를 모르는 관계로 한글로 표기)라는 곡의 음반을 발매. 16세 되던해 1970년 가수로 정식 데뷔 하게되었고 당시 대만의 최고 인기 드라마였던 "정정"의 주제곡 "아일견니취소(당신만 보면 웃음이 나요)"를 부르면서 곧바로 대중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다. 얼마안가 그녀는 청아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며 큰 인기를 끌게된다. 1973년 홍콩 라이브하우스에서 노래를 부르는 중 한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이사람은 일본 최대 레코드사 폴리돌의 프로듀서 "후나키 미노루"이다. 그가 등려군의 노래를 듣고 명함을 한장 건내며 "일본에서 활동해 보지 않겠어요?"라고 말한다. 즉 그가 일본 진출 제안을 한 것이다. 이 기회로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음반시장이 일본에 진출하게 된다. 1973년 등려군은 "테레사 텐(Teresa Teng)"이라는 영문이름으로 일본 시장에 아이돌 계열의 노래인 1집 "오늘밤일까 내일일까"로 음반을 발매 하지만 큰 성과를 얻지 못한다.(당시 테레사 수녀를 존경해서 테레사로 지었지 않았나라고 알려졌지만 그녀가 죽고 난 후 알려진 바로는 천주교 신자로서 자신의 세례명을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곧바로 엔카 계열로 전환하여 2집 "공황"을 발매, 70만장 판매라는 대 히트를 하고 1974년 "레코드 대상 신인상"과 각종 상을 휩쓸었다.(여기 잠깐 아이돌, 엔카에 대해 부연설명을 하자면 아이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이돌을 뜻하며, 엔카는 우리나라의 트롯트 정도로 보면 된다. 사실 조용필도 락밴드 음악이지만 프로듀서?, 투자자? 의 요구에 의해 엔카 계열로 성공한 대표적 인물. 그래서 자세히 들어보면 등려군이나 조용필의 노래는 엔카 계열 노래와 다른 느낌이 많이 든다는 것을 알수 있다.) 등려군은 20대 중반에 최정상 자리에 오르며 한국(문화개방문제)을 제외한 홍콩, 중국, 일본, 말레이시아, 싱가포르등등 아시아에서 대 스타가 된다. 특히 "님은 언제 오시나요"라는 곡은 대만 군인들의 애국가와 같은 노래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79년 홍콩에 머물다 일본으로 입국한 등로군은 위조여권을 사용하였다는 이유로 일본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인도네시아 대사관에 의해 구속되고 만다. 입국당시 등려군이 사용했던 여권이 다른 사람의 여권이였던 것이다. 당시 대만은 중국의 영향으로 국교를 수립하지 않은 나라가 많아 비자, 여권 신청이 굉장히 까다로웠다. 해외 활동이 많았던 등려군은 급하게 일본으로 가야될 일이 생겨 인도네시아 친구에게 부탁하여 대신 여권을 만들어 그 여권으로 일본으로 갔던 것이다. 수용소에 갇히게 된 등려군의 소식을 언론을 통해 "위조여권 사용 파문"으로 급속도로 퍼지게 되었으며, 이에 대만 국민들은 "대만을 대표하는 가수가 어떻게 남의 나라의 여권을 사용할수 있냐"며 배신자, 반역자로 몰리며 대만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한다. 결국 등려군은 1년간 일본 입국 금지 처분을 받고 풀려나고 세간의 비난을 피해 모든연예활동 중단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기 위해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그 후 1년 뒤 1980년 대만 정부 관계자가 미국에 있는 등려군 찾아간다. 정부 관계자는 대만 수상의 지시로 등려군에게 대만으로 돌아와 달라고 부탁한다. (대만 정부는 등려군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할려고 했던 것이다.) 1980년 초 중국은 중국 주석 등소평에 의해 개혁, 개방 정책이 시행되었던 시기다. 30년 만에 교류가 부활한 것이다.(대륙인 중국과 섬인 대만은 한국과 비슷한 분단국가?라 일촉즉발 위기 상황이 언제 발생할지 몰랐던 시기. 대만 군인들에게 그녀의 노래는 그 어떤것도 대신 할수 없는 위안이 되었던 것이었다. 등려군은 군인이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인해서인지 군인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고한다. 그녀를 부르는 부대가 있으면 언제나 열일을 제쳐두고 공연에 임했다고 한다.) 등소평에 의해 개방된 중국에 등려군의 앨범이 정식으로 유통되기 시작한다. 등려군의 앨범은 중국인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아 버린다. 당시 중국과 대만의 관계 원만하지 못했던 시기에 대만 정부는 미국에서 쉬고있는 등려군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귀국을 적극적으로 추진 했던것이다. 영웅 대접을 받으며 대만공항에 당당히 입국한 등려군 그녀는 이용당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무언가 씁쓸한 생각이 든다.
1983년 중국에서는 중국 주석 등소평에 의해 "정신오염 반대 캠페인"(자본주의 문화 속에 있는 유해한 것들을 반대, 서방문화 비판으로 이어짐) 실시 선언을 한다. 중국은 대만이 등려군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한다는 걸 눈치 챈 것일까? 등려군의 대만 군인들에 대한 애착과 가사 내용등등의 이유로 등려군의 노래는 중국에서 특별히 강력하게 노래를 금지 시킨다. 등려군 앨범판매 금지! 유통된 앨범까지 모두 수거할 정도로 공산당에서는 자본주의 등려군의 노래가 위협적인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특히 "님은 언제 오시나요"라는 곡의 의미가 대륙에서 쫒겨난 국민당 정부의 대륙복권 의지가 담긴 불온한 노래로 지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녀의 노래를 듣고 마음을 뺏겨버린 중국국민들의 마음을 법으로 되돌리기에는 역 부족이였다. 급속도로 중국에 퍼져버린 그녀의 노래는 중국국민들의 마음을 단숨에 휘어잡아 버렸다. 당시 중국에서 등려군의 노래를 듣다 들키면 공안에 잡혀 공산당으로부터 가차없는 처벌받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몰래 음반을 팔거나 숨어서 들었다고 한다. 공산당에 의해 탄압받던 중국인들은 단속을 피해 몰래 등려군의 음악을 들으며 위로를 받곤 했다. 당시 중국국민들 사이에서
"중국의 낮은 등소평이 지배하고, 밤은 등려군이 지배한다"
"등소평 대신 등려군이 필요하다"
라는 말이 유행처럼 떠돌았을 정도로 공산주의가 흔들릴? 정도로 대단한 인기였다.
그러던 중 등려군은 1984년까지 미국, 홍콩, 대만에서 활동하다 일본 활동 자격을 다시 얻어 일본 시장에 재 입성. "속죄, 애인"으로 각각 150여만장 판매. "세월의 흐름에 몸을 맡겨"로 200여만장을 팔리며 대 히트를 기록하게 된다. "전일본 유선방송 대상" "동서유선 대상" 최초로 3년 연속 대상 및 그랑프리를 수상하며 다시 정상 자리에 오른다. 1985년 12월에 NHK홀에서 단독 콘서트를 진했하였다. 또 같은해 조용필의 일본 활동 후 등려군이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일본어로 부르게 된다.
그 후 1989년 중국에서 큰 사건이 일어난다 "천안문사건". 민주화를 요구하며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서 시위를 벌이던 학생, 노동자들을 중국 정부가 무력 진압하면서 빚어진 대규모 유혈 참사 사건이다. 천안문 사건 참여자들을 지지하는 공연에 등려군이 참석한다. 그로인해 등려군의 노래는 중국 정부의 더욱더 거센 탄압을 받아 중국 어디에서도 등려군의 노래는 들을 수 없게 된다.
등려군은 좋은일도 많이 하였는데 천안문사건 이후 외국을 떠돌던 망명자들을 위해 어디든 찾아가 노래를 불렀고, 수많은 고아를 비롯해 상처받은 영혼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그녀가 있었다. 이 후 등려군은 모든 음악활동을 중단하고 종적을 감춘다.
그렇게 등려군은 사람들에게 점점 잊혀졌다.
그로부터 6년 후.... 1995년 5월 8일.
등려군의 갑작스러운 사망소식으로 큰 충격을 받고 중화권은 눈물 바다가 된다.
요양 목적으로 가끔 방문하던 "타이 치앙마이"의 "메이핀 호텔"에서 향년 42세의 나이에 천식 발작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녀가 죽을때 곁을 지킨건 프랑스인 남자친구 한명뿐... 중국인들에게 등려군의 사망 소식은 2년뒤 사망한 등소평의 사망과 버금갈 정도의 충격을 안겨 주었다. 5월 28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국장급의 장례가 치뤄진 장례식. 그런데... 이와중에 중국 거리에서 등려군의 노래가 울려 퍼지기 시작한 것!! 등려군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중국내에서 금지곡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목숨걸고 노래를 부른 중국국민들. 어마어마한 인파에 중국 공안들은 단속할 엄두도 못내고 구경만 해야했다. 등려군 장례식 당일 온통 그녀의 노래소리가 울려퍼진 중국과 대만. 전 세계 곳곳에 있는 그녀의 수많은 팬들의 애도 행렬이 이어졌으며 3만명의 팬들이 몰렸다. 동시에 당시 출반되었던 그녀의 음반들은 품절되는가 하면 그녀의 노래를 듣고자란 40대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그녀의 무덤 앞에 목놓아 울기까지하는 모습이 그대로 TV에 방영되기도 했다. 그녀의 관은 대만(중화민국) 국기와 국민당 당기로 덮였으며 묘 앞에는 동상과 레코드 장치가 설치되어 그녀의 노래가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사람들은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사체를 화장하지 않고 그대로 매장하였다. 사후 50년 정도 생전 모습 그대로 둘 예정이라 한다. 그녀가 숨지기 전까지 살았던 대만 스탠리마켓 근처에 있는 그녀의 저택은 현재 기념관으로 개조되어 그녀를 그리워 하는 많은 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홍콩에 6개월있으면서
이노래듣고 많이도울었읍니다
가사도모르면서 뭐가그리슬펐는지...
이젠 그립네요 나이50이넘으니
20대에그곳에 있었던게 영화처럼지나갑니다
눈물나요
저는 중국 청도에 있을때 . 벌써 20년이 흘렀읍니다
엄마 힘내
찬란했던 20대가 그리워 눈물이 나네요.
같이 울어요 ㅎ
가슴에 남는 영화죠~♡
ㅜㅠ 기억에 남는게 결혼전ㅇㄱ였던 마누라 괴롭힌거요 ㅜㅠ 지금 반성 많이하고 머슴으로 살렵니다. 갱아야 미안해 ㅜㅠ
상상도 못했던 펜데믹 시대 비대면 상황을 다같이 잘 극복했음 바래요~~20대는 젊음과 시간이 부러울 따름~~~핵공감!!ㅠ
저도요
20대에는 얼굴에 똥을 발라도 이쁘죠 ^^ 40대인데 그시절이 그립네요 나이가 들어보니 그절로 다시 간다면 세계 다 누비고 다닐거 같은데 이런 생각도 40대 이니까 하는거 겠죠 음악 들으면 어린시절 떠 올려보네요 나중에 20년 지나면 40대 그리워 하겠죠 암튼 열심히 하고픈거 다하고 살아야 겠어요
이 영상이 최고인것 같아요
편집도 잘하셨고...
영화 한편 다본것 같습니다
절대 지우지 마세요..자주 들어와 볼테니
네 절대 지우지 말아주세요
늘 감사하며 보고 있습니다 :)
제가 하고 싶은 말씀을 그대로 하셨네요 ㅠ 제 인생 으뜸영화예요
인생영화❤
이 영화는 언제봐도 눈물난다.... 그리고 이 노래도... 내 사랑도...
저도 그래요~~^^
이 영화를 보고 홍콩에 사랑에 빠지고 이 노래를 매일 듣게 되었고 몇 년 전 5일 동안 홍콩을 다녀 왔어요. 이 영화와 이 노래는 저에게 홍콩과 제 환상을 심어준 고마운 영화입니다. 적어도 그 당시 홍콩 길거리에서 이 노래가 자주 흘러나와서 반갑고 신기하고 황홀했습니다. 마카오에서는 남녀노소 이 노래를 부르는 악가들도 보였고요. 이 때의 홍콩이 그립네요. 홍콩이 생각나고 사랑이 떠오르게 될 때마다 찾아오겠습니다. 매번 찾아왔던것처럼 업로드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이시기에 홍콩을 간적이 있고 코로나 터지기 직전 홍콩을 갔었는데요...지금은 저때의 홍콩 느낌을 찾기 힘들더라구요..ㅠ그땐 아련한 홍콩 감성이 있었는데 지금은 되게 화려하고 찬란한 상업지구 느낌?
너무행복한시간 보내셧네요
그순간 모든걸 행복해야하는디 전 지금너무늣어버렷지만.항상 음악이랑영상으로 만족합니다
한창 홍콩시위때 방문했는데.. 지금은 뭐 그냥 중공한테 먹혔겠죠?
낭만적인 홍콩의도시를 다녀왔다니 마냥부럽습니다 가슴따뜻한 기억은 오랫동안 남는것같습니다
최고입니다 내생의
이렇게 아름답고, 사랑스런 홍콩을 이젠 볼수없다니...
😢😢
영화와 ost인 노래를 잘섞어 편집하셔서 더 아름답고 뮤직디오같아서 또다른 색다른 매력이에요
안타깝지만 ...청춘들에겐 냉정하고 차가운.. 현실.. 사랑해도 못 내 뱉고.. 환경에 치여 꾸역꾸역 삶을살지요.그러다 문득 떠오르지만...이미 현실은 ..누군가의 엄마~아빠 이지요 이것이 인생인듯 합니다용~
이 영화를 보고 이 처럼 우리 다시 볼수 있으면 좋겠다 말한 당신. 그건 이루어 질수가 없겠군요~ 저의 시간이 이제 길지가 않군요~~ 함께 있을 때 잘 해주지 못함을 미안하오~~ 살아가면서 힘든 일이 생기더라도 견딜수 있는 강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바라오~~ 고마웠소~~
안녕하세요
많이 쑥스럽지만 언제든
제가 부른 등려군님의 노래
첨밀밀도 한번 들어보아
주시겠는지요 감사합니다~^^
보면 볼수록 자꾸 슬퍼져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다 같은 추억..
생각하면 가슴아프지만 그래도 생각하는 추억.
고백 못해 맘졸인 그때.. 고백하고 해줄게 없어서
후회하던 그때.,. 훗날 마주쳤을땐 서로의 다른
사랑을 곁에 두고 몰래 함께 마음 아파하는
서로의 눈빛을 느끼면서도 또 고백 못한 그때..
이게 우리의 삶인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영상에 미소짓고 푸르렀던 그 시절을
회상하는 것이겠죠. 여러분 모두다..
만나야 할 사람은 언젠가 만나진다..
결혼한지 16년차인데..
이때 감성이 너무너무 그립네요..
다시는 돌아갈수 없는 ㅜㅜ
25년이 지나 다시 보니 정말 불후의 명작입니다. 의리(정), 연민, 짝사랑, 운명 같은 사랑 등 각기 다른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면서도 중국본토, 홍콩, 대만, 미국화교 등 뿌리는 같지만 전혀 다른 체제와 환경에서 다양한 언어로(광동화, 보통화, 영어) 제각각의 삶의 목표를 향해 열심히 살아가는 (본디 하나였던) 중국인의 정체성을 묻는 근원적인 질문. 홍콩 반환을 앞둔 상황에서 그들이 느끼는 아주 복잡한 심경.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연결해주는 등려군의 아름다운 노래들이 돋보인 영화였습니다.
인연은 항상 자신의 주변을 맴돌고 있습니다 ^^
이 편집본...정말 아카데미상 주고싶네요 ㅠㅠ...
👏🏻👏🏻👏🏻👍
진짜 편집본 기가막힙니다 영화 잘 간추려놨네요 ㅎㅎㅎ
방금 ebs에서 첨밀밀보고 옛감성 터져 눈물이 나네요
여명도 장만옥도 정말 멋지고 예쁘네요
영화 개봉당시 극장에서 보고 여명에게 푹 빠졌던게 어그제같은데 벌써 추억이 돼 버린 50대가 되었네요
20대에 홍콩영화 엄청 봤었죠
이제 중경상림보러 가야겠네요 ㅎㅎ
이 영화는 마지막 흑백회상 씬이 진짜 이 영화의 진가를 보여준다. 그게 다 했다
휴가 기간 드디어 관람하고.. 이 뮤비는 매일 보게 되네요.. 이 명작을 이제서야 보다니.. 볼때마다 아련하네요..
장만옥이 이렇게 아름다운지 이 영화를 보고 알았네요
2024년10월에 듣고있음❤🌺🍁👍
2002년 영화와 노래를 듣고 ... 손을번쩍 들어서 직장의 홍콩법인으로 파견 갔습니다 ! 6년 생활하고 영화를 다시 보면서 울면서 귀국했는데 ...이걸 다시 보면서 또 울줄이야 ㅠ
안녕하세요
많이 쑥스럽지만 언제든
제가 부른 등려군님의 노래
첨밀밀도 한번 들어보아
주시겠는지요 감사합니다~^^
그리운 나의 순수했던 그시절~~
등려군 노래 들으며 작다면 작은 크다면 큰 홍콩을 걸을때가 너무 그립네요.. 함께 결혼, 여행을 약속했던 그사람이 생각나네요 보고싶네요..
일년에 12번은 더 이 영상을 보고 듣는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
5:28 이장면 장만옥 연기는 정말...
명연기!.....❤
저는 수십년 후 늙어서도 흔들의자에 앉아 이 노래를 듣고 있을거에요,그러면 제 가족들이 저에게 묻겠죠
'아직도 그 노래를 들으세요?'
그러면 저는 이렇게 대답할거에요
'Always...'
이 영상은 최고란걸 보증합니다.
단 첨밀밀을 보셨던 분들만~~~
근데... 전...
이걸 계속 본다요 .... ㅋㅋ
나이를 먹으니 자꾸 머리속에 즐거웠던 옛 생각만 가득하네.
그때는 항상.....
수십번 들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옛생각에 가슴만 저려오네!
어머니가 몇주전에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엄마 사진을 보는데 저 유치원때 사진을 보니 유치원에서 생일파티(83년생) 사진이 있어서 봤는데 어머니 젊었을때(당시 36세) 어머니 모습이 장만옥님이랑 너무 닮았어요 20대 모습은 더 아름답구요 엄마가 그렇게 아름다운분인줄 돌아가시고야 알았습니다. 엄마 너무 보고싶어요 제가 이 글을 쓰는건 예전에 지인분 장례식장에 갔는데 지인이 어머니를 갑자기 이별하였습니다. 저에게 한말은 살아계실때 잘해라는 말이었는데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생각한게 이게 생각 나더라구요 너무 너무 보고싶어요 정말 너무 너무 보고싶어요 매일 매일 이건 꿈이야라고 말하면서 꿈에서 깨고 싶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현실이네요 너무 너무 보고싶어요 죄송합니다. 무거운 답글달아서 어머니를 닮은 배우가 나오는 영화의 OST를 다 보면서 답글을 답니다. 엄마 보고싶어요 불효자를 용서하세요..... 항상 사랑해요 엄마...
건강하게 잘자란 자식은 효자
얼마전에 겪으신 일이라 많이 힘드시겠습니다. 좋은 추억 많으신건 축복입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에 기대어 보세요...
저도 엄마가 돌아가신지 팔년이 됐고
아빠는 사년만에 엄마를 따라 가셨는데 세월은 멀어져가도 매일 매일 그립답니다
저는 단지 술한잔 마시고 울적할때 이 영상을 자주 보러 오는데 오늘 이 댓글을 보면서 생각이 많아지네요. 각자 인생의 시나리오는 다르지만 OST는 같은....두서없는 댓글 죄송합니다. 댓글 내용이 제 마음을 흔들어 주셨네요. 늘 행복하세요
홍콩을 정말 좋아 했는데, 그 곳에서 사없을 위해서 거주 하면서 홍콩의 매력에 푹 빠졌어요. 그리고 홍콩에 대한 추억으로 더 감명 깊게 본 첨밀밀..벌써 8번을 봤어요. 등려군은 최고의 가수이며 이 영화속의 장만옥은 대체 불가한 연기를 보여줬어요. 최고의 영화 최고의 OST 그리운 그 시절의 홍콩........
이때 영화가 좋은건 특유의 따뜻한 색감도 한몫 하는거 같아요 ㅎ
첨밀밀 편집영상 중 최고! 지금도 가끔 봅니다 지우기 없기♡
항상좋습니다
수십번을 봐도 질지지 않는 영화, 장만옥의 최고 연기작 중 하나. 엄청난 감독
오스카 작품상 정도 받었어야할 작품 ..시대가 바뀌어서 기생충도 받는데..완전 노스텔져를 불러오는 마력.
첨밀밀의 장만옥은 정말 최고 예요. 더 예쁜 얼굴의 배우는 있겠지만 그 누구도 장만옥보다 나을 수는 없어요.
옛생각에...눈물이납니다..
좋네요...
너무좋습니다
편집 너무나도 잘해주셨네요
눈물이납니다
고맙습니다
첨밀밀보고나서 ost듣고싶으면 꼭 이 영상으로 들으러 옵니다. 너무 편집을 잘해주셔서 계속 이걸로 듣게되네요!! ㅎㅎ
이영화 첨밀밀 영화에요?
한 영화에 두가지음악 나온건가요?
첨밀밀 영화고 노래가 첨밀밀과 월량아대표적심 인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랬던 중국일반인이 세뇌라곤 하지만,,,징그럽게 바뀌어가네요,,,,,,
그리운 과거 홍콩,,,,이젠 사라진 홍콩,,,,
올챙이가 개구리되더니ㅡ개구리알로 포식하는 개구리을 보는 듯,,,,
@@이상두-v1h첨밀밀 ost가 월량대표아적심
술한잔 하고 꿀꿀한 기분에 잘려고 누워서 듣는 나의 애창곡
어리고 어리숙하고 가진거 없던 시절.. 직장 초년생이라 나자신도 잊어버리고 열심히만 하던 그때 장거리 커플이라 자주 만나지 못해도 2년이라는 긴 시간 내옆에 있어준 그때 그사람이 그리울때 마다 첨밀밀을 봅니다.. 지금 당장 현실이 너무 힘들어도 자신에게도 옆에 잇는 사람에게도 좀더 신경 써주세요..지나간 사람은 다시 돌아 오지 않습니다.
기차 소리가 화이팅네요
정말 몇번을 본 영화인지.. 볼때마다 다른 느낌 명작은 세월이 흐르면 더 빛이 나네 깊은 여운이 이십여년 지나도 그대로..
편집을 너무 잘하셔서 어떤 첨밀밀 영화보다 계속 여기만 찾게 되네요 ^^
영화 편집을 정말 잘하셨네요. 한편을 모두 다 본 것 같습니다. 마지막에 장만옥 여명 두 배우의 미소에 비로소 내 눈의 눈물을 훔칠시간을 주네요..불청에서 피디가 빨리감기로 요약해주는거 보고 와 잘한다 하고 유튜브 검색해서 여기왔는데 정말 좋은 영상입니다.
장만옥이 60살이 다되었다니...슬프다...
그 때 울렸던건 경적소리였을까
그를 사모하는 내 마음이였을까
달빛이 내 마음을 비추는 것 처럼
우리도 서로를 비추길 애타게 바랬던 그 날..
술먹고 집에 갈려고 대리운전 부른후 바로 이영상부터 킴...술먹으면 이 노래가 그렇게 좋게 들리네ㅋㅋ 가장 편집이 훌륭해서 술먹으면 자주 듣네요. 감사합니다.
들을때마다 눈물이 나는 마법같은 노래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첨밀밀이 전혀 중화영화란 느낌이
들지않기 때문입니다!
아!~나의 20대여~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첨밀밀은 홍콩영화입니다
중공과는 엄연히 다른곳이며 중공은 저런 영화 못만듭니다
중화는 무슨ᆢ
남자배우 중에서 진짜 청아하다는 말을 할 수 있는 배우가 여명인 것 같습니다
세상에 저장해논거 사라져서 심장 떨어질뻔요. 재업로드 감사합니다:)
볼때마다 가슴이 뛰어요...옛 생각도 나고...
홍콩이 이젠 그립고 마음 아픈 곳이 되었네..ㅠㅠ
정말요 ㅜㅜㅜㅜㅜㅜ
저두요... 홍콩만의 그 축축한 분위기를 잊을 수가 없어요. 가끔씩 너무나 사무치게 그리워요.
미키마우스도 너무나 감동인 장면이었네요
편집을 너무 잘해주셔서 2020년이 끝나기전 또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22년 6월 왔다감
2023년 7월 4일 ~~나오라 오바
10년후쯤 이글을 다시 볼수 있을까~~
벌써 20년도 지난 영화의 감동이 ~~아직도
감독이 천재네..
첨밀밀 영화가 추억을 담은 영화인데
이 영화를 보던 그 시절도 추억이 되네요.
간만에 첨밀밀 보러 갑니다.
두배우 모두 선남선녀다
잘봤습니다
진짜잘만드신듯
생각나는 그때가 있어요~
;;이거 보고 들을때마다 생각날듯합니다;;
감독님 천재
진짜... 한달에 80번 이상 들립니다..
영화도 좋고, 음악은 더 좋고...장만옥 너무 좋고, 등려군도 넘 좋고 개인적으로 아직도 등려군처럼 맑은 목소리는 거의 못들어봤슴
잘보고 잘 듣고 갑니다...감사합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인가 극장에서 봤었는데 그때는 몰랐던 감정들이 아저씨가 되니 많이 와닫네요. 첨밀밀 다시 찾아봐야겠어요
맞아요....동감합니다.
이 영상은 두고두고 보고싶어요 진짜 최고
❤❤
올려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정말 여러모로 최고에요 첨밀밀!
없어져서 서운했었는데 다시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유튜브 영상 중 최고ㅋㅋ
크락션 울리는 장면부터 심장터질것같다...
그때 울린 게 크락션이었을까, 내 마음이었을까
영상 편집을 어찌 이렇게 잘 하셨나요… 정말 너무너무 감사해요.. 감사합니다 볼 때마다 감탄이에요
영상편집이 너무 좋아요
저도 깡촌에서 상경한지라 여명과 장만옥의 홍콩 초창기 모습이 이해 갑니다.
20년전 까페라는데를 처음갔는데 종업원이 저한테 진동벨을 주는데 이건 머하는 물건인고...그때의 뻘줌함은 정말...
넷플릭스에서 보게됐는데
너무 좋더라구요!! 8090년대 홍콩영화 감성 넘 좋습니당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아요!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간만에 생각나서 찾아봤는데 없어졌음 너무 슬플뻔 했어요 ㅠㅠ
우연❤
연못에 비친 달빛( 🍰)
Estelle & amid 옮김
마음이 넘실거려요
평생토록 평안하게 존대해 드릴게요
그것이 스며들고 있어요
영영 존대할게요
영영 존대할게요
태초부터
본래까지
멀리, 멀리 비친
진심으로 당신께 그것을 드려요
어떠한 풍랑 조차도
평생토록 평안하게
멀리, 멀리 비친
평생토록 평안하게
멀리, 멀리 비친
이노래는 꼭 이영상과 함께봐야된다 나는 중국인이 아니라서 등려군의 노래엔 관심이 없고 나의 10대 그시절의 내가 좋아하던 영화의 일부니까 그시절 내가 그립네
진자 이영화는 평생의 걸작
우리가 사랑했던 홍콩. 그립다.
장만옥도 연기 잘하지만.. 여명은 진짜..
이 영화 남주배역에 너무 잘 맞음. 잘생겼지만 뭔가 무력하고 초라해보이는 이 배역을 여명 아니고서는..누가 소화하려나.
이영화를 보고 눈물흘리지 않았다면 당신은 정말 불행한 사람이다
목록에 삭제된 영상으로 떠서 깜짝 놀랐습니다. 재 업로드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연말만 되면 자꾸 다시 들리게 되네요.
감사합니다요 ~~
왜 눈물이 나지?
영상 감사합니다♡
찾던건데 다시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진짜 많이 울었는데...
정말 잘 만드셨어요! 한동안 영상이 사라져서 계속 찾았어요!
有緣千里來相會(유연천리래상회)
인연이 있으면 천리 밖에서도 서로 만나고
無緣對面不相逢(무연대면불상봉)
인연이 없으면 얼굴을 대하고도 서로 만나지 못한다.
會者定離 去者必返(회자정리 거자필반)
만남이 있으면 헤어지게 마련이고 떠난 사람은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지나가던 기억이 스쳐가네요
술한잔 하고나면 꼭 이노래를듣네요
옛날 첫사랑도 생각나고 추억들이 아련하네요..L.m.j 0 love
너무 좋아
유부남이된 남주...미키마우스를 무서워한다던 여주...현실은 분륜...그치만 둘이 이뤄지길 영화가 끝날때까지 마음으로 빌며 보던 영화...
그리운 아날로그 감성 그립고 그립다...
우왕 넘 좋아요 아련한 슬프고도 아름다웠던 그 멜로디 !!
이 노래만 들으면 아련해지고 가슴이 미어지네요
개인적으로 장만옥씨의 인생작이지 않은가 생개됩니다.정말 멎진 배우시지요.^^
감사합니다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비비님도 같은 상황인지는 모르지만
전 이영화 침 흘리면서 봣어요.
몰입감 최고!
감사합니다 이 영화를 보진 않았지만 너무 아름답게 잘 만드신거같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꼭 보고 싶은
영상 이였는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