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행부지의 1190년 2월 갑진일 기사는 무경총요 북번지리 동경 조 동경~건주 간 이정에서 그 세번째 중간 경유지 여산관이 건주 직전의 경유지인데 편찬 과정에서 잘못 기술된 것이다 하는 것을 입증하는 우선 근거로 삼은 것이 아닙니다 1) 무경총요 여산관 2) 요동행부지 여양 신현 이 두 개의 기록은 다른 고찰로서도 요사 지리지의 360 리 망평현 해구가 현 북진시 여양진~반금시 반산현 일대로 나타나고 특히 여양진 부근이 그 360 리 지점으로 보이는데 과연 현 여양진 부근이 ㅡ 요양시 백탑구에서 360 리 ㅡ 북진시에서 60 리 에 해당한다는 문헌 기록이 있는가 하는 여부에서 그 문헌 기록으로 제시한 것입니다
무경총요 동경 조 동경~건주 경로에서 여산관이 세번째 경유지로 제시된 것은 "의무려산 중에 있는"이라는 수식을 통해서 그 자체로 경유지의 순서가 뒤바뀐 것임이 드러나는데 이에 따르면 여산관은 건주 직전의 경유지로서 건주와 50 리 떨어져 있는 것이 됩니다 북진시~여양진의 동쪽에는 소택지가 있었기 때문에 이 50 리 떨어진 여산관은 응당 여양진 방면에서 그 부근에 위치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동행부지의 여양 신현 기사에서 저자 왕적은 북진시와 여양 신현의 거리가 60 리라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요동행부지 기사만으로도 현 반금만 북쪽에 연접한 여양진이 요양시 백탑구에서 360 리에 해당함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또한 더하여서 무경총요 동경 조 여산관과 요동행부지 여양 신현 이 두 기록이 그 거리를 파악하는 데에 상보적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결론 직전에 제시한 지도를 보시면 여양진의 북동쪽 10~15 리 경에 여산관을 표시하였습니다
11~12 세기 문헌에서 현 북진시와 요하 사이의 천연 소택지(흔히 요택)는 허항종의 선화을사봉사금국행정록에서는 양어무(금 망평현)에서 장의현(요 광주) 이정에서 제시돼 있고 무경총요 북번지리 거란 지리에서는 건주 조에서만 "옛 요택의 땅이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건주와 현주 모두 현 북진시에 있었는데 건주 조에서만 요택을 언급한 까닭은 건주 관할지에서 소택지의 특성이 상대적으로 두드러지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구글어스 위성지도에서 지형을 관찰해봐도 어느 정도 그 흔적이 보이는데 대체로 신민시 남동쪽에서 반산현 북쪽으로 소택지가 윗머리가 동쪽으로 기운 비스듬한 형태로 형성돼 있었고 그 남쪽인 북진시 동남쪽~반금시 반산현 북쪽이 그 가로폭이 상대적으로 넓었던 것이죠 이로 인해서 이 지역 여행자들은 반산현에서 여양진 방면으로 돌아서 의무려산의 동쪽 기슭을 따라서 북진시에 접근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무경총요 북번지리 동경 조에서 동경과 현주(건주)의 거리는 총 4 개가 제시돼 있습니다 1) 480 리 2) 300 리 3) 420 리 4) 현주와 동일 위치 이 가운데에서 420 리만이 그 중간 경유지가 구체적으로 제시돼 있는데 학주관, 요수관 등의 경유 지명을 통해서 이 420 리 이정이 소택지의 남쪽을 돌아가는 경로임을 알 수 있으며 또한 독사방여기요의 요양~광녕위(북진시) 이정 420 리와 일치함이 관찰됩니다
잘봤습니다.
고맙습니다
동경->학주관->요수관 이후 갑자기 의무려산 산중으로 점프한 기록은 단순 오류인건가요?
여양현을 옮겼다는 기록으로는 점프 현상이 설명되는것같지 않네요.
요동행부지의 1190년 2월 갑진일 기사는
무경총요 북번지리 동경 조 동경~건주 간 이정에서 그 세번째 중간 경유지 여산관이
건주 직전의 경유지인데 편찬 과정에서 잘못 기술된 것이다 하는 것을 입증하는 우선 근거로 삼은 것이 아닙니다
1) 무경총요 여산관
2) 요동행부지 여양 신현
이 두 개의 기록은
다른 고찰로서도 요사 지리지의 360 리 망평현 해구가
현 북진시 여양진~반금시 반산현 일대로 나타나고
특히 여양진 부근이 그 360 리 지점으로 보이는데
과연 현 여양진 부근이
ㅡ 요양시 백탑구에서 360 리
ㅡ 북진시에서 60 리
에 해당한다는
문헌 기록이 있는가 하는 여부에서
그 문헌 기록으로 제시한 것입니다
무경총요 동경 조 동경~건주 경로에서
여산관이 세번째 경유지로 제시된 것은
"의무려산 중에 있는"이라는 수식을 통해서
그 자체로 경유지의 순서가 뒤바뀐 것임이
드러나는데
이에 따르면 여산관은 건주 직전의 경유지로서 건주와 50 리 떨어져 있는 것이 됩니다
북진시~여양진의 동쪽에는 소택지가 있었기 때문에 이 50 리 떨어진 여산관은
응당 여양진 방면에서 그 부근에 위치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동행부지의 여양 신현 기사에서
저자 왕적은 북진시와 여양 신현의 거리가
60 리라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요동행부지 기사만으로도
현 반금만 북쪽에 연접한 여양진이
요양시 백탑구에서 360 리에 해당함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또한 더하여서
무경총요 동경 조 여산관과
요동행부지 여양 신현
이 두 기록이 그 거리를 파악하는 데에 상보적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결론 직전에 제시한 지도를 보시면
여양진의 북동쪽 10~15 리 경에
여산관을 표시하였습니다
11~12 세기 문헌에서
현 북진시와 요하 사이의 천연 소택지(흔히 요택)는
허항종의 선화을사봉사금국행정록에서는
양어무(금 망평현)에서 장의현(요 광주) 이정에서 제시돼 있고
무경총요 북번지리 거란 지리에서는
건주 조에서만 "옛 요택의 땅이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건주와 현주 모두 현 북진시에 있었는데
건주 조에서만 요택을 언급한 까닭은
건주 관할지에서 소택지의 특성이 상대적으로 두드러지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구글어스 위성지도에서 지형을 관찰해봐도 어느 정도 그 흔적이 보이는데
대체로 신민시 남동쪽에서 반산현 북쪽으로
소택지가 윗머리가 동쪽으로 기운
비스듬한 형태로 형성돼 있었고
그 남쪽인
북진시 동남쪽~반금시 반산현 북쪽이
그 가로폭이 상대적으로 넓었던 것이죠
이로 인해서
이 지역 여행자들은
반산현에서 여양진 방면으로 돌아서
의무려산의 동쪽 기슭을 따라서
북진시에 접근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무경총요 북번지리 동경 조에서
동경과 현주(건주)의 거리는
총 4 개가 제시돼 있습니다
1) 480 리
2) 300 리
3) 420 리
4) 현주와 동일 위치
이 가운데에서 420 리만이
그 중간 경유지가 구체적으로 제시돼 있는데
학주관, 요수관 등의 경유 지명을 통해서
이 420 리 이정이 소택지의 남쪽을 돌아가는 경로임을 알 수 있으며
또한 독사방여기요의 요양~광녕위(북진시) 이정 420 리와 일치함이 관찰됩니다
각론집 1권은
요나라 말기로서 동경도의 영역이 완숙된
도종~천조제 시기의 동경도 영역을 파악하여서 큰 논의를 위한 기본 전제를 갖추는 데에 집중하였습니다
동경 이치와 영역 문제는
각론집 2에서 다루게 됩니다
형님 잘보고잇슴다 이해는 못해여
사라야, 반갑다
너네 회사식당 밥 잘 나오는 거 같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