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Комментарии • 12

  • @minjunkim6950
    @minjunkim6950 6 месяцев назад +4

    북쪽의 왕자두마리 잡은 소식이 풍신수길에게 전해지는 시간이 얼마나 걸렸을지 궁금하네요 드라마상으로는 카톡으로 통신한 듯

  • @sjy7966
    @sjy7966 3 месяца назад

    여기 가토는 그래도 공손한 면이 있네ㅋㅋㅋ

  • @고래-q4b
    @고래-q4b 6 месяцев назад

    위엄 넘치는 키요마사 2:40

  • @파파울프-q1n
    @파파울프-q1n 4 месяца назад

    납작 엎드린 가등의 모습이 낮설기만 하구료.

  • @user-tp2sx5it3i
    @user-tp2sx5it3i 6 месяцев назад

    당시 일본이 인질정치를 했다고 하는데, 실제로도 풍신수길은 덕천가강과 전투로 맞붙어서 복날 개패듯 얻어 터지고, 그래서 힘으로는 상대가 안 돼서 직전신장의 차남 직전신웅을 회유해 아군으로 맞이해서 덕천가강이 싸울 명분을 없애버렸다. 그런데 덕천가강은 항복을 안 하고 개기고 있었다. 이에 풍신수길은 자기 여동생인 조일희를 강제로 이혼시킨 뒤 덕천가강에게 시집 보내고, 자신의 어머니인 대정소를 인질로 보내서야 겨우 항복을 받아냈다.

  • @크아아-m3e
    @크아아-m3e 6 месяцев назад

    임해군에게 저렇게 공손하다니 개구라 ㅋㅋ

    • @이시민-r3x
      @이시민-r3x 6 месяцев назад +1

      이게 원래 역사적 고증이 맞는거예요. 징비록에서 가토가 왕자들 업신여기고 구타한 건 오히려 반일감정 왜곡이었고요.

    • @크아아-m3e
      @크아아-m3e 6 месяцев назад

      @@이시민-r3x 망해가는 나라 왕자한테 저렇게 한다고요?? 청나라가 병자호란 때 하듯이 한 게 상식 아닙니따

    • @이시민-r3x
      @이시민-r3x 6 месяцев назад +2

      @@크아아-m3e
      실제로 일본 기록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기록도 그런데, 저런 일화에서 보면 청나라 때랑은 또 사뭇 달라요.
      저때가 임란 초창기라 일본군도 조선의 왕을 생포해서 정식 항복을 유도하는식으로 완전점령을 기도 했기에, 왕자 역시 협상의 카드로 쓸 수 있었에 아무리 가토라고 해도 관백의 신하이기도 해서 한나라의 왕자를 함부로 할 수가 없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