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 되는 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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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Опубликовано: 10 фев 2025
- JD Cloud School 제주캠퍼스 주일예배
마태복음 26:33-34
33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34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0.믿음의 길
사순절 다섯번째 주일이다.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믿음을 갖게 하신 과정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을 알아보겠다.
예수님을 믿게 되는 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고 한 순간에 일어나는 일이지만, 믿음을 갖게 되는 과정이 있다. 믿음을 갖게되는 과정은 하나님이 전적으로 주도하시지만, 인간에 해야할 몫도 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하느냐"라는 질문 이후로 예수님의 교육과정이 바뀐다. 기적을 일으키기보다는 제자교육에 집중하셨다. 오늘 예수님 말씀은 베드로를 위한 개인 맞춤교육이었다. 이 교육을 통해서 베드로를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시킨 예수님의 방법을 알아보자.
베드로는 예수님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놓을 수 있다고 스스로도 생각했고 다른 사람들로 인정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베드로가 자신을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1. 베드로의 두려움
예수님은 베드로가 부인할 것을 어떻게 아셨을까? 베드로의 마음에 두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는 달리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 베드로의 과장된 모습은 그의 본모습을 감추기 위한 위장이었다.
베드로의 내면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마태복음 14:30에서 베드로는 물 위를 걷는 기적을 체험했다가 두려움 때문에 물에 빠지고 말았다.
마 14: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본문 33절에서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결코 주를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만 말해도 될 것을 굳이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라고 말한다. 마음에 평안이 있는 사람은 그 마음만 표현한다. 그의 내면이 스스로 굳건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의식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다른 사람과 경쟁한다.
마음 속의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서 혹은 극복하기 위해서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라는 말을 덧붙인다. 베드로의 다소 과장된 행동은 어쩌면 두려움을 감추거나 극복하기 위한 노력에서 나온 것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겉모습에 속지 않으셨다. 베드로 마음에 자리한 두려움을 아셨다. 그래서 베드로가 두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도망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스스로는 몰랐지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길을 가게되는 건 필연적인 일이었다.
좀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다. 베드로처럼 목숨 걸고 예수님을 따른 사람이 예수님을 부인하는 게 필연이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자신도 모르게 정해진 필연을 향해 가고 있다. 어떻게 하면 필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2. 예수님이 이끄신 곳
예수님이 도와 주셔야한다. 예수님은 어떻게 도와주실까? 오늘 본문에 답이 있다. 예수님은 우리의 눈을 열어주심으로 필연에서 벗어나게 하신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할 것을 알려주셨다. 왜 이 말씀을 하셨을까? 이 사실을 알려주었어도 베드로는 이대로 행동했는데 말이다. 예수님이 이 사실을 알려주신 건 베드로가 자신을 보는 눈을 열리도록 인도하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베드로 안에 있는 두려움을 볼 수 있었다. 베드로 안에서 두려움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 보셨다. 베드로가 겉으로 어떤 말과 행동을 해도 말이다. 베드로의 과장된 행동, 경쟁적인 용기, 과시적인 열성 안에서 작동하는 두려움을 분명히 보고계셨다.
정작 베드로는 자신을 보지 못했다. 자기가 용감하고 열정적인라고만 생각했다. 그 행동들이 두려움의 다른 표현이라는 걸 보지 알지 못했다.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예수님은 보지만, 베드로는 보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 안에 있는 두려움이 밖으로 드러나서 베드로가 볼 수 있도록 인도하셨다. 베드로가 자기 내면을 볼 수 있어야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 다니다보면 내가 죄인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죄인임을 깨닫는다는 건 자신을 보게 된다는 말이다. 대부분 자신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생각과 다르게 보지 못한다.
예수님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기적을 여러번 일으키셨다. 이게 영적인 세계에 관한 비유이다. 보지 못하는 사람에 관한 가르침이다. 또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도 행하셨다. 이것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에 관한 가르침이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자신을 보는데서 시작한다. 예수님이 우리 내면을 드러내서 보여주실 때 감사해야 한다. 눈이 뜨여지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3. 믿음의 눈
베드로가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던 것처럼 나도 두려움에 잡힌 사람이었다. 종류만 다를 뿐 대부분의 사람이 두려움에 잡혀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두려워하고, 어떤 사람은 실패를 두려워한다. 어떤 사람은 가난을 두려워하고 어떤 사람은 무능력을 두려워한다.
이 두려움이 운명처럼 우리를 우리가 원하지 않는 필연으로 이끌어간다. 두려움이 믿음을 갖지 못하게 막는다. 믿음을 가지려는 순간 꼭두각시를 조종하듯이 마귀가 두려움을 자극하면 믿음을 저버리게 된다.
누가복음 22:31-32에서는 예수님이 이렇게 표현하셨다.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두려움을 자극해서 믿음을 갖기 못하게 가로막는 마귀의 매카니즘을 이해하면 굳건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요한계시록 21:8
8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동격이다. 이 두 가지가 사실 같은 것이다.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중요한 건, 용기있는 것처럼 막말을 하거나 과장된 행동을 해서 두려움이 사라지고 믿음이 강해지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총을 쏘거나 칼을 휘두른다고 어둠이 사라지지지 않는 것처럼 막할하거나 과장된 용기를 보여준다고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는다.
빛이 들어와야 어둠이 사라진다. 눈이 떠져야 믿음이 생긴다. 믿음은 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보기 위해서는 내면에 감추어졌던 것이 드러나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4.두려워하지 말라
히브리서 2:14-15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의 길을 가신 이유는 우리가 따라갈 수 있도록 길을 내신 것이다. 그 길을 가면 된다.
두려워하는 마음은 절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다. 베드로처럼 두려움을 실체로서 보게 될 때, 감사하자. 눈이 뜨여질 기회이고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될 순간이다. 믿음의 길에서 수직상승하는 시점이다.
기도
주 예수님, 두려움에 사로잡혀 앉은뱅이된 저희를 자유케해 주시옵소서. 죄에 눈이가리워져 맹인된 저희를 볼 수 있게해 주시옵소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땅에 내려와 담대하게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님! 주님이 인도하는 곳에 끝까지 따라가서 홀연히 변화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