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 통일] 견훤 vs 왕건! 왕건이 이길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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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14 дек 2024

Комментарии • 90

  • @archangel7882
    @archangel7882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31

    견휜 후계자 다툼으로 아작난 것 보면 왕정인 이상 후계자를 확실히 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노답이라는게 정답인가 봅니다.

    • @fresh-berry
      @fresh-berry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3

      왕건도 후계자는 확실히하지 않았음. 힘없는 정윤만 확실하고 이후는 니들이 알아서하라고 짬때림.

    • @ver4535
      @ver4535 9 месяцев назад

      선조도 확실하게 후계구도 광해한테 밀어줬으면.. 미친짓도 안하고 반정도 안당했을것같긴해요ㅎ

    • @daewookkim4795
      @daewookkim4795 9 месяцев назад

      @@fresh-berry 그래도 공식적으로 정해놓았다는 점이 중요하지요.
      후백제는 그런 것도 해놓지 않아서 결국 내분이 난 거니까 말입니다.

  • @박선우-e6r9x
    @박선우-e6r9x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19

    궁예는 금안대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이 있죠

    • @동호한-k3p
      @동호한-k3p 9 месяцев назад

      아지태 이전과 이후

  • @neoleft5064
    @neoleft5064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25

    궁예는 세력이 미약해서 권위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 있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폭군이라는 것도 생각해봐야할 점이 있음

    • @dongmoo00
      @dongmoo00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백성들 입장에선 폭군이 아니긴 합니다. 철원의 민담에서는 궁예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만큼 포악하진 않거든요 - 개성에서 무리하게 철원으로 수도 이전 했는데도
      제 생각엔 궁예의 포악성은 지배층에 국한 됐다고 봅니다

  • @rockstarpangmu
    @rockstarpangmu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3

    견훤이 신라를 핍박했던 데는 나름 이유가 있었습니다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에게 복수한다는 슬로건으로 세웠던 나라이기에 신라를 계속해서 갈궈야지만 결속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도 있습니다

  • @young-ilpark7405
    @young-ilpark7405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7

    1. 종례 장자 등 서남해 호죽들을 완전 포섭하는 데 실패하여 왕건(요즘 연구에선 궁예가 주도했다는 설도 있음)이 나주에 멀티 뜨게 해버린 점.
    2. 신라 정벌은 타이밍이 있는 법인데 대야성 공략에 너무 많은 힘을 뺐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경애왕을 자결하게 하고 황후와 궁녀들을 대놓고 욕보이는 만행을 저질렀음. 궁예같이 근본이 부족한(?) 사람도 김씨 성을 가졌다는 거 하나만으로 반은 먹고 들어가는 걸 보면 덩시 삼한 민심의 정통은 어디까지나 통일신라에 기반했는데 견훤은 그걸 놓쳤음.
    3. 후계자 승계 입장 정리 타이밍을 놓쳐버림. 신검이 아니다 싶음 박영규쪽을 더 키우든가 해서 금강이 후계룰 잇게 하는 게 맞는데 굳이 싹수노란 신검에게 자꾸 기회를 줌. 기록에도 최승우가 신검을 죽이자고 하는 내용이 나옴

    • @aa2095
      @aa2095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최승우가 신검을 죽이라한 얘기는 기록이 아니라 태조왕건에서 나오죠. 최승우는 기록이 거의 안 남아있습니다

    • @여기있었구만심영-i4b
      @여기있었구만심영-i4b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1

      그냥 이 사람 말하는내용 싹다 태조왕건 사극내용임 ㅋㅋㅋㅋ

  • @daewookkim4795
    @daewookkim4795 9 месяцев назад +1

    왕건은 민심을 우선시해서 절대로 신라를 얕잡아보는 행동을 하지 않았고
    동등한 국가로 예우하면서 예의를 지켰습니다.
    그래서 신라 백성들의 민심을 잡을 수 있었지요.
    그리고
    일찌감치 정윤을 확정지어서 자신의 후계구도를 공고하게 다져놓았습니다.
    견휜은 그런 모든 것들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결국 진 겁니다.
    특히 후계구도를 확실하게 자리잡아놓지 못한 것이 말이지요..........

  • @choichoitrain_
    @choichoitrain_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1

    태조왕건과 후속작인 제국의 아침 초반부를 한번에 집약해서 본 느낌이였어요ㅋㅋ

  • @parkgoogle
    @parkgoogle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2

    고려왕조실록 좋아요

  • @김혜민-h4h
    @김혜민-h4h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3

    끊는 타이밍을 보니 네놈 머릿속에는 마구니가 가득 찼구나

  • @박준선-f4o
    @박준선-f4o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1

    예전에 복수법에 관해서 본적이 있는데 이 부분도 다뤄주실수 있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 @김민정-c5b6c
    @김민정-c5b6c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11

    견훤은 신라를 공포로 몰아넣었고 공포정치를 해서 실패한거고, 왕건은 신라를 포용해서 포용정치쪽으로 방향을 잡아서 성공한거임 그래서 신라백성들이 여론이 더 좋은 왕건을 선택한거고 애초에 견훤이 신라왕을 살해한게 젤 크나큰 실패의 원인이 됬지 누가 자기나라 왕을 살해한 다른나라 왕을 좋아하겠음

    • @dongmoo00
      @dongmoo00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10

      제 생각은 저시대 백성들 입장에선 견훤의 시해에 별 다른 감정 없었을 거라고 봄. 민심 잃은 신라 왕실에 과연 먹고살기 궁핍하다 못해 시도때도 없이 전쟁터에 끌려가는 백성들이 과연 견훤의 시해사건에 원한 가지겠음?
      견훤이 망한 건 후계자 문제인 듯

    • @jin.24.
      @jin.24.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dongmoo00 견훤이 서라벌로 진격하면서 후백제군이 약탈 오지게 했습니다. 왕족들이랑 기술자들도 납치해 갔고 왕도 죽인데다 백성들에게 실질적인 피해가 왔으니 왕가에 충성심이 있는 사람도 견훤을 싫어하고 충성심이 없다해도 싫어하게된거죠.

    • @하인즈-l1j
      @하인즈-l1j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근데 왕건이 신라를 우대해준게 그냥은 아님. 고창 전투 이전만해도 고려의 힘은 후백제에게 밀리고 있었는데, 그때 신라를 흡수했다면 국력도 안좋은데 신라지역 관리에 힘을 할애해야하고 후백제의 공세를 1대1로 직빵으로 받아야했음. 그러니 후백제의 힘의 방향이 분산되도록 신라가 온존하게끔 한 경향도 있음.

    • @mepardon8960
      @mepardon8960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5

      너무 유교적 도덕론적 해석이네요

    • @young-ilpark7405
      @young-ilpark7405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1

      핵심은 당시 민중은 진골 및 호족들의 식읍이나 성에 딸린 '하호(농노)'에 불과했고 우후죽순 난립했던 진골 및 호족들의 마음을 살 수 있었던 명분이 필요했던거죠. 신라 정벌은 필연적이었지만 마무리가 좋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고요.

  • @보라별-j4b
    @보라별-j4b 2 дня назад

    타이밍이라는게 있음~ 927년에 후백제군이 고려군을 대파하면서 기세를 잡았을때 계속 몰아부쳐서 끝장을 봤어야 했는데 결국 그러지 못하니 고려에게 회복을 시간을 주었고, 그 뒤로 후계 문제가 터지면서 사실상 자멸로 끝이 나버렸죠

  • @우쿠렐레-p9b
    @우쿠렐레-p9b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3

    태조왕건 진짜 사극명작이었지

  • @ototoglfdl96059
    @ototoglfdl96059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4

    그런데 조선실록은 이제 안하시나요?

    • @시공석
      @시공석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1

      아 그러네 ㅋㅋㅋㅋ 알고리즘으로 들어왔는데 채널명이 조선이네 ㅋㅋㅋㅋ

    • @광화문-n9p
      @광화문-n9p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고려거란전쟁편 끝나고 조선사를 하는거면 광해군부터인데 후삼국통일과정을 먼저 할지 아니면 조선사를 계속 이어가실지 모르겠네요

    • @질문빌런-f5i
      @질문빌런-f5i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역주행-한국사

  • @user-maniaKim
    @user-maniaKim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3

    왕건의 승리는 정치와 외교의 승리...
    싸움은 견훤이 한 수 위였지만 항우가 싸움 못 해서 패한 게 아님.

    • @동호한-k3p
      @동호한-k3p 9 месяцев назад

      나주에서 그렇게 쳐발렸는데 견훤이 위라 보기 어렵지 ㅋㅋㅋㅋㅋㅋㅋ

  • @nakhwayousoo-g2f
    @nakhwayousoo-g2f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11:06 자막이 고려사가 아니라 고려서로 되어있네요

  • @우성훈-q6e
    @우성훈-q6e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2

    후백제가 쳐들어 올때 고려가 신라에 지원군을 보낸 상황이 백제가 쳐들어올때 신라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원군을 보낸게 생각나네요

    • @dongmoo00
      @dongmoo00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1

      If론이지만 광개토태왕, 장수왕시절에 통일 됐으면 한민족 역사가 더욱 더 확장돼서 정설로 받아들여졌을텐데 그 점이 아쉽습니다. 중국의 소수민족역사의 일부분도 한민족의 역사인데 그 점을 국제적으로 표력하지도 않고 인정 받지도 못 하는 현실을 보면 일반인 입장에선 참으로 한국 사학계가 본연의 구실을 못 하고 있는 것 같네요.

    • @ZaiKerizm
      @ZaiKerizm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1

      @@dongmoo00장수왕때가 아쉽죠 광대토대왕이 다 해놔서 몇걸음만 해도 통일인데

    • @RedOne-r5c
      @RedOne-r5c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ZaiKerizm 장수왕 중간에 30~40년정도 기록이 사라진적이 있는데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서신내용도 그렇고 그게 내분때문이라는 설이 많은데 그정도로 나라가 막장이라면 통일 못햇죠 천도한다고 세력이 갈려서 싸운거같은데

    • @RedOne-r5c
      @RedOne-r5c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ZaiKerizm그리고 장수왕이 정리 다하고 정복 다시 시작한 시점을 감안한다면 이미 왕은 늙었고 황금기는 다 지났다고 생각합니다 한반도 북부와 달리 중남부는 평야가 많아서 백제랑 신라는 인구가 고구려보다 많기때문에 쉽게 이길수있는거도 아니고요

    • @shellingford6519
      @shellingford6519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RedOne-r5c 맞음.. 고구려는 농업 생산량이 백제에 비해 부족했을거고..
      더군다나 단순히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과 점령하고 다스리는 건 또 많이 다른 문제...
      그래서 역사학자들도 고구려가 백제, 신라를 점령하기에 역량이 부족했을 거라고 하는 거 많이 봄

  • @0.K.J.W.0
    @0.K.J.W.0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2

    왕건의 최대에 실수는 제대로 후계를 정하고 그 세자에게 힘을 키우게 했어야했다 그랬다면 아마도 왕건이 죽은후 왕자들끼리에 권력다툼이 덜 했겠지

    • @케이스케만타로
      @케이스케만타로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태자😢

    • @ZaiKerizm
      @ZaiKerizm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그래도 광종이 죽위해서 고려를 고친게 다행이죠 (호족들에겐 매일 악몽이었겠지만 ㅋㅋㅋ)

    • @qkr7804
      @qkr7804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광종이 아버지 왕건을 많이닮음 아버지왕건은 온화한 군주라면 광종은 흑화한왕건 장남인 혜종(왕무)는 아버지의 싸움실력만 닮음

    • @shellingford6519
      @shellingford6519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1

      사실 첫째 부인이 왕자 낳고 그 왕자가 자질에 심각한 결점이 없었다면 그게 제일 베스트였을거임
      근데 첫째 부인은 왕자를 못 낳고 죽어버리고
      상대적으로 다른 호족 가문들에 비해 역량이 부족할 수밖에 없던 둘째 부인(나주)의 아들이 후계자가 되어서 더 심화되었을거임

    • @choichoitrain_
      @choichoitrain_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왕건이 후계는 제대로 정한거 맞아요 서열상 혜종으로 불리는 왕무가 왕건의 장남이고 두번째 부인 장화왕후의 아들이지만 첫번째 부인인 신혜왕후에게선 후사를 못봤으니 왕무가 세자가 아닌 태자가 되는 것이 맞죠 다만 왕건의 실수라고 한다면 장화왕후 오씨의 집안의 세력이 다른 부인들 집안에 비해 세력이 약했기 때문에 후견인 설정을 잘했어야 했는데 그 후견인을 왕건의 최측근인 박술희가 맡았지만 박술희는 태조왕건만 천상 군인인 사람이라 정치력은 없는 사람이였고 또다른 후견인인 왕규는 혜종의 장인이였지만 왕건의 장인이기도 했던 사람이라 언제든 왕권에 위협이 될 인물이였죠

  • @seedAndc
    @seedAndc 6 месяцев назад

    신라를 존중한 왕건의 태도가 후백제의 견훤을 이긴 이유입니다.
    한나라 유방도 초의제를 존중했기에 초패왕
    항우를 이길 수 있었습니다.

  • @nn6194
    @nn6194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1

    그냥 견원이 왕건보다 나이 많아서 실패한듯 만약에 완건이 나이가 많앗더라면 똑같은 후계자일에 휘말려들엇을것이고 대하드라마 제국의 아침 에서 이미 왕건후계자땜에 피바람도 불엇슴

    • @Tripleaxelyang
      @Tripleaxelyang 8 месяцев назад

      맞춤법때문에 읽기 힘들다

  • @이휘원-l3l
    @이휘원-l3l 9 месяцев назад +1

    고구려가 고려에요.

  • @iuiuiuiu1234
    @iuiuiuiu1234 9 месяцев назад

    왕규 잡밥인줄알았는데 아니였군요 ㄷㄷ

  • @임수민-q3d
    @임수민-q3d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1

    신순겸 장군 덕분이죠

    • @daewookkim4795
      @daewookkim4795 9 месяцев назад

      신숭겸 장군님.

    • @임수민-q3d
      @임수민-q3d 9 месяцев назад

      @@daewookkim4795 역사도 나보다 모르는 놈이 아는거 나왔다고 아는척은 ㅋ 역겹네

  • @minnak4451
    @minnak4451 2 месяца назад

    심지어 후백제 본토에 있는 나주까지 왕건의 지지세력으로 전향한 거 보면 확실히 호족들 구워삶는 데 도가 튼 건 확실함.

  • @유튜브하더
    @유튜브하더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1

    우리가 알지 못하지 고려초기에도 왕좌의 게임이 벌어진 것 같네요

    • @daewookkim4795
      @daewookkim4795 9 месяцев назад

      조선 초기에도 왕자의 난이 있었고
      광종이 확실하게 모든 것들을 다져놓았기 때문에
      현종 때 고려 최대 위기 상황인 고려거란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현종 때까지도 지방 호족들의 기세가 꽤 강했던 것을 보면
      그나마 광종 때 지방 호족들을 그나마 확실하게 눌러놓았으니
      그래도 고려가 국가로서 기틀을 유지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 @지렌-p9l
    @지렌-p9l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2

    발해건국과 청해진의 경험으로....

  • @테리짱-x5i
    @테리짱-x5i 2 месяца назад

    유금필이 있어서. 간단한겁니다

  • @정유주-l7e
    @정유주-l7e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1

    고려거란전쟁2ㅡ고려거란전쟁1ㅡ후삼국지ㅡ삼국지가요?

  • @제임스-y5v
    @제임스-y5v 9 месяцев назад

    그냥 견훤이 10년만젊었어도 통일은 후백제가 햇을텐데... 곡창지대에 인구도 고려보다 배는많으니.. 후계다툼으로 민심을 잃어 순식간에 멸망..

  • @2345pok
    @2345pok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오 왕건 후삼국 ㅋ 잼나네요

  • @jay-g9987
    @jay-g9987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2

    후계자 문제는 두번째이고 신라에게 그렇게
    잔혹하게 대한게 제일 큰 문제였음...

  • @kkyfilm2021
    @kkyfilm2021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궁예의 재평가가 있어야겠지.

  • @kyun051
    @kyun051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신라 >> 고려 >> 조선 >> 대한민국.///// 고구려 >> 발해 >> 여진 >> 금 >> 여진 >> 청 >> 중국
    신라의 정통성을 이어 받은 대한민국 만세~~~~~~~~~~~~~~

  • @농-d3q
    @농-d3q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2

    조선 역사보다 고려 역사가 더 재밌네요

  • @완순박-d1p
    @완순박-d1p 5 месяцев назад

    왕건에 비해 이성계는 왕씨몰살 이라는 만행을 저질렀음.

  • @이물개
    @이물개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1

    최수종이면 다 정리됌

  • @k프리먼
    @k프리먼 9 месяцев назад

    궁예보릿자루 맞아죽은것아닌가여?

  • @user-nb5lm2vl
    @user-nb5lm2vl 9 месяцев назад

    아닙니다 유금필만 없었으면 왕건이 몰락했습니다

  • @이불밖은위험해-c4n
    @이불밖은위험해-c4n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궁금해

  • @봉중강
    @봉중강 9 месяцев назад

    왕건과 견헌 차이는 자식농사 에 있는것 같다 그리고 견훤은 부모 하고도 갈등이 있었고

  • @dongmoo00
    @dongmoo00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견훤이 통일하지 못한 이유
    후계자 문제
    호족 포용 실패

  • @starbucks3368
    @starbucks3368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견훤 실패이유: 쉰거미 끝! ㅇㅇ;

    • @ZaiKerizm
      @ZaiKerizm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늙었어!

    • @알루미늄-d6h
      @알루미늄-d6h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신검의난도 왕위다툼 때문이지않을까 하고 추정하는거뿐임

  • @sungjunchoi8641
    @sungjunchoi8641 9 месяцев назад

    정종이 형 죽이고 왕위 찬탈한다음에 역사조작한거 아닌감? 그런 생각만 드는데.

  • @정정-t5s
    @정정-t5s 9 месяцев назад

    수달이가죽어서실패함

  • @이거빠스잖아
    @이거빠스잖아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아자개 를 얻지 못하여 견훤은 패배 하였다

  • @kyun051
    @kyun051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정종이 자객을 보냈고, 실패 하자, 독살 함. 혜종의 후원자인 술희를 죽임. 그리고, 이를 모두 알아차린, 또 다른 실권자이자 혜종 후원자인 왕규를 죽이고, 모든 죄를 왕규에게 덮어 씌움.
    덤으로, 혜종은 왕건과 함께 통일전쟁을 같이 수행한, 무력만점의 장군 출신임.

  • @KiaMotors750
    @KiaMotors750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저때. 중원을 차지 했어야 했는데

  • @재훈이-e8d
    @재훈이-e8d 9 месяцев назад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켯다는데 첫화면이 고려/백제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