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가 고향인데 부여에 대한 역사이야기가 나오니 감회가 새롭네요...... 부소산은 학교다닐때 토요일마다 갔던 기억이 나네요 길바닥 빗자루로 많이 쓸었습니다..낙화암 위에 백회정 있는데 아쉽게 그설명은 없네요 왜정때 1920-30년대 부여 군수가 세웠다 하는데.... 제가 아름아름 기억하기로는 중학교때 국사 선생님이 일본에서 백화정 짓는데 관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3천궁녀중에 일본여자들도 많이 섞여 있어 같이 도망가면서 죽었을것이다라고 생각해서 일본에서 세우는데 관여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이야기는 역사 어디에도 기록이 없네요 당시에 일제 강점기다 보니 이미 역사도 구석구석 관여하고 통제 했던걸로 아는데... 특히 백제는 일본인들이 많이 들끓었습니다 일본학생들도 부여로 수학여행 많이 왔던 기억이 나요당시 국사 선생님은 60이 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쭈글쭈글 늙어 보이긴 했어요 백화정 세울당시 초등학생정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들고 그고장에서 태어나고 자랐고 백회정세우는걸 목격했을수도 있습니다정림사지 터는 제생각은 담장이 흙으로 되어 있었을겁니다 돌이 전혀 없는 흙언덕이 현재 돌담 으로 만든 곳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탑 테두리도 돌기둥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탑이 멋있게 안보인다고 철거하고 지금의 테두리로 만들었습니다.. 초딩땐가 중학교땐가 기억이 잘 안나는데 제가 뭐라고 했던거 같아요 그것도 하나의 유물인데 왜 철거하냐고....
조선상고사만 보더라도 삼천궁녀는 거짓이라고 신채호선생이 말씀하셨죠 일제의 터울에 역사를 새로이 편찬하고 그 되물림이 결국 해방과 6.25를 지난 시점 이상으로 계승된것도 문제죠 저도 90년대 국사시간에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침략을 당한 나라다라고 당당하게 말씅하신 선생님께배워서 의문을 품지 않고 지나간 학생이었으니 지금의 역사학계가 좀더 발전되고 폭넓게 다가가는 시점으로 바뀌었으면하는 바랍이 크네요
일단 가장 기본적인것 부터 짚고 넘어갑시다. 1. 의자왕의 의자는 왕이 죽은 뒤 내려주는 시호가 아니라 그냥 의자왕 이름이 의자일뿐입니다. 의자왕이 의롭고 자혜로워서 붙인 시호가 아닙니다. 2. 해동증자의 증자는 침착하고 사려가 깊다라는 뜻이 아니라 공자의 제자중 효의 상징인 증자를 따와서 의자왕이 증자만큼 효자라는 뜻입니다. 3. 그리고 조선시대때도 결혼적령기가 16~18세입니다. 백재시대때 왕이 20살이 넘어서 결혼했다는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불과 50년~60년대만 해도 10대말에 결혼은 당연한거 였습니다.
김건우 1. 시호가 아니러 이름뜻을 설명한거라 해야하는데 명칭의 실수 같네요 2. 공자의 제자인 증자 저도 압니다 ㅋㅋ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영상 런닝타임이 길어져서 간단히 설명한부분이구요 3. 20살이 넘어서 결혼했다는게 아니라 아들 나이로 어린잡아 의자왕 즉위때 나이를 추정한겁니다
잘못된 것은 지적해야죠. 그걸 문제삼으면 어떻합니까? 비평을 받아들여 더욱 완전하려고 노력해야하는데, 그 비평마져 거부하면 어떻합니까? 역사를 배우는 근본이유가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아 내일을 위해 거울을 삼는 것인데, 비평을 불쾌하게 생각한다면 아예 역사를 논하지 말아야지요. 그냥 역사를 취미로 하는 사람에게는 왕의 시호가 의미가 없겠지만, 왕의 시호나 묘호가 그 업적을 대변해주기도 합니다. 특히 방송이나 어린이잡지에서조차도 이런 떡밥을 던지는 경우가 있기에 반드시 경계해야 합니다. "역사교육의. 가치는. 비판적 사고를. 하는 데 있다."는 한국교원대 교수님의 말씀도 있습니다.
말갈은 당시 부족단위이지 외교적으로 손을 잡아야 할 대상은 아니었지요. 주인장님께서 '북방민족'이라고 잘 설명해주셨는데 그 사례를 말갈로 말씀해주셔서 약간 아쉽습니다. 북아시아 민족 즉 북방민족은 튀르크(돌궐) 제1제국이나 설연타로 사례를 들어주셨으면 좋았을 터인데요. 그래도 취지는 잘 전해져서 다행이라 생각하고 노고에 고마움을 전합니다.
한나야, 삼천이라는 숫자는, 당나라 시대 이백의 "망여산폭포: 비류직하삼천척에서 나온거야. 삼천이라는 숫자는 이백의 시가 알려지고 조선의 선비가 이를 인용했던거지. 여산 폭포가 어찌 천미터가 되겠나? 단지 폭포의 높이를 과장해서 그 당시 폭포를 본 이백의 심정을 나타낸 거지.
해석에 따라 판이하게 다릅니다...웅진방령이 모반을 했다면 그것을 막으려는 충신 열사들이 백제에 없었다고 봐야지요..자연스럽게 웅진성에 나와서 항복한 것을 보면 적어도 웅진성에서 항복하기로 왕을 비롯하여 대소 신료들이 의논을 헀다고 봐야 합니다..삼국사기에 그렇게 나타나 있고 예식진 비문에서도 예식진이 모반했다는 해석도 일방적입니다. "其大將祢植, 又將義慈來降" "그 대장 예식이 또한 의자왕을 이끌고 항복해 왔다"에서 a.그 대장 예식이 또한 의자왕을 모시고 항복해 왔다 b.그 대장 예식이 또한 의자왕을 청하여 항복해 왔다 c.그 대장 예식이 또한 의자왕을 도와 항복해 왔다 d.그 대장 예식이 또한 의자왕을 부축하여 항복해 왔다 로 내용이 바뀌면 의자왕 체포설과는 정반대의 해석이 되어 버립니다.
한나 님 전 역사학과를 들어간건 아니고 갠적으로 한국사를 공부하는 사람인데 삼국지 조선왕조실록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말고 또 다른 역사사가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네요 ㅎ 이야기체로 풀어쓴 책들말고 원본을 번역해서 구어체로쓴정도가 더 좋은것같아요 개인의생각이 이야기체에 비해 덜 들어갈테니 그리고 왕이 되지못한 세자들의 역사는 어디서 찾아볼수있을까요? 야사들말고 궁금합니다
조선시대에 국가주도하에 편찬된 동국통감과 안정복의 동사강목이면 충분하구요 . 고대사는 어차피 전쟁사이므로 이를 이해하는데는 각종 병법서등을 읽고 같이 매칭시키면 당시의 전쟁사가 보다 쉽게 이해가 됩니다. 손자병법과 육도,삼략, 이위공문대, 오자병법은 필독서라고 할만큼 좋습니다.
1궁녀사를 세운 의도와 진혼제를 지내는건 좋은데 궁녀 숫자는 없애도 되지않나 싶네요 2남자를 모르시네요 남자는 숟가락들수있는 힘만 있어도 하고 싶어하는데.. 3의자왕의 엄마가 선화공주라는것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혼인하지 않았을수도 있고요 미륵사 보수 공수 중에 석탑 안에서 발견된 사리 봉안기에 따르면 무왕 때에 '백제의 왕후는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었다고 명백히 기록되어 있고요. 의자왕이 40이된 늦은 나이에 태자가 되었다는건 정비 소생이아닌 기반이 약한 엄마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겠지요 삼국유사를 제외한 다른 기록에는 진평왕의 딸은 천명, 덕만 둘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익산 지역의 호족의 딸이라는 설도 있고요. 그리고 과거 왕들은 새로운 왕이 즉위하면 사면이 가장 널리 알리기 쉬운 방법이였기에 사면을 했다고 착한왕이라고 하는건 좀 맞지않는거 같습니다. 4인구가 620만이면 궁녀를 3천을 뽑을수도 있을법한데요? 궁녀가 3천이라고 해도 구지 그녀들에게 승은(?)을 안입혀도 될텐데... 그리고 인구가 620만인데 아무리 남녀성비가 안맞아도 아이와 유부녀를 제외하고 1.5만? 너무 적지 않나 싶은데요. 620만이 말도 안되는 인구라고 생각이듭니다. 삼국유사 삼국사기 당평백제비 기록이 다 다르지요. 62만이 아니였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래도 성비가 너무 안맞는데.. 오늘날 대전 충청 광주 전라 지역의 인구가 1000만 내외인데 그 당시에 그런 인구가? 저보다 많이 알고 많이 배우셨겠지요. 저는 그냥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보다 이런저런 기록이 있다. ㅇㅇㅇㅇ로 보아 이렇게 추정된다가 더 적절하지않나 싶네요. 아무튼 유익한 내용 알려주셔서 가ㅁ사합니다. 중간에 광고도 없어서 너무 좋네요. 구독하고 갑니다.
백제멸망당시의 인구수는 조금.... 기록을 그대로 믿으시면 좀 곤란합니다. 7세기에 백제가 620만명이라면 신라도 400만은 넘을것이고 고구려도 500-600만명을 될텐데 그러면 3국합해서 1500만이 넘어갑니다. 한반도만 해도 최소 1200-1300만이됩니다.... 말도 안되는 숫자가 되버려요....이정도 인구수가될려면 1000년은 더 기다리셔야해요. 조선 초기에 인구가 600만정도에요... 인구 1000만 넘을려면 18세기는 되야해요...20세기 들어와야 1500만되고요...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十七年春正月(십칠년춘정월) :17년 봄 정월, 拜王庶子四十一人爲佐平(배왕서자사십일인위좌평) :왕의 서자 41 명을 좌평으로 임명하고, 各賜食邑(각사식읍) :그들에게 각각 식읍을 주었다. 딸과 적자들을 제외한 서자만 41명이니까, 그 자녀는 최소 41명 이상입니다. 딸과 적자를 제외한 서자만 41명이면.... 딸,적자까지 합하면 자식만 100명에 가깝다는것 조그마한 백제 왕이 자식이 100명에 가까우면 사생활은 음탕 난잡 한건 사실 인듯~
어마어마한 인구와 광활한 영토를 가졌다 해서 당태종이 1일 3떡을 할 수 있는건 아니죠. 땅이 넓건 좁건간에 남성이 여자를 취하는건 체력간에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하루 한번이상은 힘들다는겁니다. 본인도 하루 10번까지 해본적만 있고 하루 2번 이상은 힘들어서 못하겠더군요. 하루 10번은 일생에 딱 한번뿐이었습니다. 그땐 안 죽더군요. 딸래미가 퉁퉁 부었습니다. 그래도 자비를 두지 않았습니다. 백제왕자식이 100명이 넘는다는게 문제도 아니고 핵심도 아닙니다. 본인도 그걸 지적하는건 아니에요.남자가 여자 좋아하는건 죄가 아니죠. 자연의 섭리입니다. 의자왕도 당연히 여자 좋아할 수 있죠. 남자가 여자 좋아하는게 뭐가 문제겠습니까. 헌데 그 사실이 있다고 해서 백제 의자왕이 여자 때문에, 사치향락에 빠져 나라를 멸망시켰다고 하는 내용에는 동의를 하지 않는다는겁니다. 즉, 지금까지 알려진것과는 완전히 반대로 이해를 해야 한다는거죠. 즉, 사치향락때문에 망한게 아니라, 나라가 먼저 망하고 나서 사치향락에 빠졌다는 것이죠. 신라에게 끔살당하고 난 이후 더 이상 뭘 할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으니까요. 소위 말하는 폐인이 되어버린 거죠. 폐인이 되었으니 할 수 있는건 사치향락, 술 밖에 안 남은거죠. 왜 우리 사회에서도 보지 않습니까? 정말 일도 열심히 잘하고 자기 일도 잘하던 사람이 어떤 사건을 계기로 폐인이 되면 술에만 빠져서 개판치는 장면을요. 즉, 사람 망가지는 모습들을 흔하게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의자왕이 바로 이렇게 되었다고 보는거죠. 그렇게 열정적이도록 신라를 공격하고 성도 빼앗고 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에 갑자기 사치향락에 빠져 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여자를 좋아해도 그렇게 되는건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결국 의자왕이 사치향락, 주지육림에 빠진건 뒤에 나타난 모습이라 말입니다. 그 모습의 원인으로 지목할 수 있는게 신라의 반격으로 인하여 백제군이 사실상 깨끗하게 전멸, 몰살당한 것이 제일 결정적이었다고 보는 것이죠. 백제의 국력을 모두 쏟아부어 육성했던 군사가 신라에게 모조리 도살당했으니 더 이상 뭘 할 수가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거죠. 644년부터 신라가 백제에게 빼앗긴 성을 되찾아오고 648년에는대야성까지도 되찾아오는데 그때까지 학살당한 백제군의 숫자가 6만이 넘거든요. 백제의 전쟁역사에서 최대의 피해가 발생을 한겁니다 그것도 당나라의 협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라군 혼자에 의해서만이죠. 이 사실로서 신라가 고구려 백제 연합을 막을 힘이 없었떤게 아니라, 여주, 즉, 선덕여왕이 전쟁을 싫어했기 때문에 소극적으로 대응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거죠.
대신라혼 땅이넓고 인구가 많고 나라가 부강 하다는건... 그리고 중국은 그당시 전세계 패권국이였죠...패권국 황제가 처작식을 거느릴수 있는 부와~ 한반도 끝트머리 조그마한 변방국가 왕인 의자의 처자식이 거느릴수 있는 부는 차원이 다르죠!! 의자 자식이 진짜 100명이 넘었다면 그 자식들 과 그자식의 처자식들 먹여살리는데 얼마나 많은 민초들의 피를 빨아 먹었을까요? 중국이야 워낙 스케일이 크고 부강한 나라니 황제가 식솔이 많아도 민초 들에겐 부담이 들가지만... 코딱지 만한 백제 왕 자식이 100명이 넘고 그 자식의 처자식 까지 먹여 살리려면... 아마도 민초들 뼈에 골수까지 빨았을게...합리적 추론이죠~~ㅋㅋㅋㅋ
@@f-killer7537 신라의 선덕여왕은 그당시 백제를 대국이라 칭했고 신라는 소국이라 감히 칠 엄두를 못내었다. 라고 기록되있다. 백제 무왕과 의자왕은 신라 대야성을 비롯해 40여개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신라 서라벌 앞마당까지 공격해들어갔다. 나당연합군이 공격해올때 백제군이 5000명밖에 없던이유는 백제의 정규군은 신라와의 국경지대에 배치되있었고 계백이 이끌던 5000병력은 의자왕의 친위대 였다.
참 재미있게 진행 하네요
흥미롭고 자꾸 보게 되네요
이러다 중독될것 같아요
고맙습니다.역사의 스캔들에서 진실을 알고 갑니다. 역사 알면 알수록 재미있네요~~^^
ㅋㅋ 지루할 수있는 내용 잼나게 해주시니 감솨~~ 아름다우십니다.♥
부여가 고향인데 부여에 대한 역사이야기가 나오니 감회가 새롭네요......
부소산은 학교다닐때 토요일마다 갔던 기억이 나네요
길바닥 빗자루로 많이 쓸었습니다..낙화암 위에 백회정 있는데 아쉽게 그설명은 없네요
왜정때 1920-30년대 부여 군수가 세웠다 하는데....
제가 아름아름 기억하기로는 중학교때 국사 선생님이
일본에서 백화정 짓는데 관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3천궁녀중에 일본여자들도 많이 섞여 있어 같이 도망가면서 죽었을것이다라고
생각해서 일본에서 세우는데 관여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이야기는 역사 어디에도 기록이 없네요
당시에 일제 강점기다 보니 이미 역사도 구석구석 관여하고 통제 했던걸로 아는데...
특히 백제는 일본인들이 많이 들끓었습니다
일본학생들도 부여로 수학여행 많이 왔던 기억이 나요당시 국사 선생님은 60이 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쭈글쭈글 늙어 보이긴 했어요
백화정 세울당시 초등학생정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들고
그고장에서 태어나고 자랐고 백회정세우는걸 목격했을수도
있습니다정림사지 터는 제생각은 담장이 흙으로 되어 있었을겁니다
돌이 전혀 없는 흙언덕이 현재 돌담 으로 만든 곳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탑 테두리도 돌기둥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탑이 멋있게 안보인다고 철거하고 지금의 테두리로 만들었습니다..
초딩땐가 중학교땐가
기억이 잘 안나는데 제가 뭐라고 했던거 같아요
그것도 하나의 유물인데 왜 철거하냐고....
몰랐던 이야기를 많이 알게 되었네요~ 너무 감사합니다!
진짜 잘들었습니다 똑
한능검 강의보다가 보러왔어요 :) 늘 좋은 영상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님들아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내가 한창 아프리카 전성기때 한나님 잠깐봤었는데 컨셉 바뀐건가요?? 그때는 이런 컨셉이 아니였던거같은데
한나쌤!밀*티 보고 왔습니다!잠깐 보여주셨는데도 너무 재밌어요!!이런 역사풀이 너무 취저예요오ㅜ
같은말을 너무 반복하는것만 아니면..^^
몰랐던 사실을 알게되어 감사드립니다~~
재밌는 내용이네요ㅎㅎ
의자왕
의롭고 자애로운 왕이란 뜻
역사는 승자의 기록
백제의 멸망을 비꼬는 표현에서 시작된 것을 의미함이 아닐런지...
조선상고사만 보더라도 삼천궁녀는 거짓이라고 신채호선생이 말씀하셨죠
일제의 터울에 역사를 새로이 편찬하고 그 되물림이 결국 해방과 6.25를 지난 시점 이상으로 계승된것도 문제죠 저도 90년대 국사시간에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침략을 당한 나라다라고 당당하게
말씅하신 선생님께배워서 의문을 품지 않고 지나간 학생이었으니 지금의 역사학계가 좀더 발전되고 폭넓게 다가가는 시점으로 바뀌었으면하는 바랍이 크네요
역사는 승자의 것이죠
의자왕은 당시 나당연합군에 패하면서 당나라로 끌려갔고, 끝까지 신라를 괴롭혔던 훌륭한 군주라고 알고 있습니다.
잘못된 역사는 빨리 교정되어야 하며, 지금도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라는 노래로 아이들에게 세뇌되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부여살고 있습니다.질문받습니다
일단 가장 기본적인것 부터 짚고 넘어갑시다.
1. 의자왕의 의자는 왕이 죽은 뒤 내려주는 시호가 아니라 그냥 의자왕 이름이 의자일뿐입니다.
의자왕이 의롭고 자혜로워서 붙인 시호가 아닙니다.
2. 해동증자의 증자는 침착하고 사려가 깊다라는 뜻이 아니라 공자의 제자중 효의 상징인 증자를 따와서 의자왕이 증자만큼 효자라는 뜻입니다.
3. 그리고 조선시대때도 결혼적령기가 16~18세입니다. 백재시대때 왕이 20살이 넘어서 결혼했다는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불과 50년~60년대만 해도 10대말에 결혼은 당연한거 였습니다.
김건우 1. 시호가 아니러 이름뜻을 설명한거라 해야하는데 명칭의 실수 같네요 2. 공자의 제자인 증자 저도 압니다 ㅋㅋ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영상 런닝타임이 길어져서 간단히 설명한부분이구요 3. 20살이 넘어서 결혼했다는게 아니라 아들 나이로 어린잡아 의자왕 즉위때 나이를 추정한겁니다
건우. 그래. 니 잘났다.
건우 불편하네
참 잘나셨네요.
잘못된 것은 지적해야죠. 그걸 문제삼으면 어떻합니까? 비평을 받아들여 더욱 완전하려고 노력해야하는데, 그 비평마져 거부하면 어떻합니까? 역사를 배우는 근본이유가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아 내일을 위해 거울을 삼는 것인데, 비평을 불쾌하게 생각한다면 아예 역사를 논하지 말아야지요.
그냥 역사를 취미로 하는 사람에게는 왕의 시호가 의미가 없겠지만, 왕의 시호나 묘호가 그 업적을 대변해주기도 합니다. 특히 방송이나 어린이잡지에서조차도 이런 떡밥을 던지는 경우가 있기에 반드시 경계해야 합니다. "역사교육의. 가치는. 비판적 사고를. 하는 데 있다."는 한국교원대 교수님의 말씀도 있습니다.
의자왕 아버지 책상 ㅋㅋ 어머니걸상 초딩때 그런지알았는데
일제가 한국역사를 아주 많은 부분을 수정했죠
의자는 호가 아니라 이름입니다.
그르게 역사는 승리한 자들에의해 쓰여진 거기 때문에 지들이 다른나라 정권을 찬탈한 이유를.정당화할 명분이 필요해서 폐망한 국가의 왕을 저속하게 기록할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여 지는 부분이네요ㅠ역사는 승자들의 기록이니 모순이 많다 보여집니다ㅠㅠ
슬픈역사입니다. 의자왕의 진실을 이 시대에 어둠으로 보여진것은 역사날조한 자들이 있었던 것.
말갈은 당시 부족단위이지 외교적으로 손을 잡아야 할 대상은 아니었지요. 주인장님께서 '북방민족'이라고 잘 설명해주셨는데 그 사례를 말갈로 말씀해주셔서 약간 아쉽습니다. 북아시아 민족 즉 북방민족은 튀르크(돌궐) 제1제국이나 설연타로 사례를 들어주셨으면 좋았을 터인데요. 그래도 취지는 잘 전해져서 다행이라 생각하고 노고에 고마움을 전합니다.
한나야, 삼천이라는 숫자는, 당나라 시대 이백의 "망여산폭포: 비류직하삼천척에서 나온거야. 삼천이라는 숫자는 이백의 시가 알려지고 조선의 선비가 이를 인용했던거지.
여산 폭포가 어찌 천미터가 되겠나? 단지 폭포의 높이를 과장해서 그 당시 폭포를 본 이백의 심정을 나타낸 거지.
14:17 멸망 당시 인구가 620만명인데
15:37 백제의 인구 중 연소/노약자 뺀 성인 여성 수가 1만 5천?????
레알 620만?
조선말 2천만도 안되던데요.
1천년전에 백제만 620만이 가능?
@@yhansookim7850 조선시대말 천만 초반대입니다...
세계적으로 인구는 100년만에 왕창 증가한것임...
비운의 왕이지요...
결전을 준비하고 궁을 옮겨 산성에서 항전 태세 갖추고 있다가... 신하의 모반으로 항복하게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모반한넘은 당나라에서 극진대우받고...
패자의 아픔..
해석에 따라 판이하게 다릅니다...웅진방령이 모반을 했다면 그것을 막으려는 충신 열사들이 백제에 없었다고 봐야지요..자연스럽게 웅진성에 나와서 항복한 것을 보면 적어도 웅진성에서 항복하기로 왕을 비롯하여 대소 신료들이 의논을 헀다고 봐야 합니다..삼국사기에 그렇게 나타나 있고 예식진 비문에서도 예식진이 모반했다는 해석도 일방적입니다.
"其大將祢植, 又將義慈來降" "그 대장 예식이 또한 의자왕을 이끌고 항복해 왔다"에서
a.그 대장 예식이 또한 의자왕을 모시고 항복해 왔다
b.그 대장 예식이 또한 의자왕을 청하여 항복해 왔다
c.그 대장 예식이 또한 의자왕을 도와 항복해 왔다
d.그 대장 예식이 또한 의자왕을 부축하여 항복해 왔다 로 내용이 바뀌면 의자왕 체포설과는 정반대의 해석이 되어 버립니다.
왜사람들은 능력과 도덕성을 비례한다고 보는것일까 실제로 현재에도 능력있는자들이 돈벌고 권력있듯 돈많고 능력좋은 분들에게 여자들이 따르는건 당연한건데 그렇다면 능력과 도덕성은 반비례해야 정상아닌가?
진짜 삼천명의 궁녀가 다뛰어내렸다면 그중에 약 삼백명 정도는 안죽고 헤엄쳐서 나오지 않았을까? ..
고구려/백제는 몽골계. 신라/당나라는 같은 투르크계 입니다
같은 민족들이니...나당 연합군이 당연하지요.
삼천궁녀에 대해선 인원수가 너무 많았나 합리적인 의심을 했군.
역사는 강자의 편이죠,,,,,
궁녀이름이 삼천일수도..
우와.... 천재다
3000 궁녀 이건 300 이던
알바가 아니지만~
한나 님 유툽 잘 됫음~ 바람.
한나 님 전 역사학과를 들어간건 아니고 갠적으로 한국사를 공부하는 사람인데 삼국지
조선왕조실록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말고 또 다른 역사사가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네요 ㅎ
이야기체로 풀어쓴 책들말고 원본을 번역해서 구어체로쓴정도가 더 좋은것같아요 개인의생각이 이야기체에 비해 덜 들어갈테니 그리고 왕이 되지못한 세자들의 역사는 어디서 찾아볼수있을까요? 야사들말고 궁금합니다
조선시대에 국가주도하에 편찬된 동국통감과 안정복의 동사강목이면 충분하구요 . 고대사는 어차피 전쟁사이므로 이를 이해하는데는 각종 병법서등을 읽고 같이 매칭시키면 당시의 전쟁사가 보다 쉽게 이해가 됩니다. 손자병법과 육도,삼략, 이위공문대, 오자병법은 필독서라고 할만큼 좋습니다.
의자왕이 그렇게 방탕한 생활을하고 나라를 돌보지 않았는데 왜 당나라가 필요한가 신라가 그렇게 약했나
의자왕의 이름은 「부여 의자」에요??
한소성 녜. 부여의자입니다. 의자는 시호가 아닙니다.
김건우 마지막 왕은 왕의 이름으로 보통 시호 쓰지 않나요? 제가 잘 몰라서요....
한소성 시호가 아니라 성씨는 부여이고 이름이 의자 입니다...후대의 왕이 있어야 시호를 지어 줄텐데 너무 갑작스레 멸망한지라.....
신라 경순왕은 마지막 왕이지만 시호가 맞습니다. 성과이름이 "김부" 이니까요.
의자왕도 폄하됐어.. 역사는 승자의것이니 ㅠ
우리나라 교육에 일본은 빠지지를 않네.
1궁녀사를 세운 의도와 진혼제를 지내는건 좋은데 궁녀 숫자는 없애도 되지않나 싶네요
2남자를 모르시네요 남자는 숟가락들수있는 힘만 있어도 하고 싶어하는데..
3의자왕의 엄마가 선화공주라는것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혼인하지 않았을수도 있고요
미륵사 보수 공수 중에 석탑 안에서 발견된 사리 봉안기에 따르면 무왕 때에 '백제의 왕후는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었다고 명백히 기록되어 있고요. 의자왕이 40이된 늦은 나이에 태자가 되었다는건 정비 소생이아닌 기반이 약한 엄마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겠지요
삼국유사를 제외한 다른 기록에는 진평왕의 딸은 천명, 덕만 둘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익산 지역의 호족의 딸이라는 설도 있고요.
그리고 과거 왕들은 새로운 왕이 즉위하면 사면이 가장 널리 알리기 쉬운 방법이였기에 사면을 했다고 착한왕이라고 하는건 좀 맞지않는거 같습니다.
4인구가 620만이면 궁녀를 3천을 뽑을수도 있을법한데요? 궁녀가 3천이라고 해도 구지 그녀들에게 승은(?)을 안입혀도 될텐데...
그리고 인구가 620만인데 아무리 남녀성비가 안맞아도 아이와 유부녀를 제외하고 1.5만? 너무 적지 않나 싶은데요. 620만이 말도 안되는 인구라고 생각이듭니다. 삼국유사 삼국사기 당평백제비 기록이 다 다르지요. 62만이 아니였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래도 성비가 너무 안맞는데.. 오늘날 대전 충청 광주 전라 지역의 인구가 1000만 내외인데 그 당시에 그런 인구가?
저보다 많이 알고 많이 배우셨겠지요. 저는 그냥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보다 이런저런 기록이 있다. ㅇㅇㅇㅇ로 보아 이렇게 추정된다가 더 적절하지않나 싶네요. 아무튼 유익한 내용 알려주셔서 가ㅁ사합니다. 중간에 광고도 없어서 너무 좋네요. 구독하고 갑니다.
1965년이라...냄새가 나네요
디스...스포일...
요것도 봐주고 ~..-
이슬만 먹고 사실거같습니다
의자왕의 이름 이 의롭고 자비로워서 의자왕이 아닙니다. 그냥이름이 의자였고 왕이 죽고난뒤 정부가 없었기 때문에 시호를 만들수없었기에 그냥 의자왕으로 남은겁니다
궁녀 이름이 삼천?
궁녀로 뽑았다고 해서 꼭 관계할 필요는 없잖아...
두보의시 백모 삼천 에서 나온말 삼천이란 많다는 뜻이 랍니다
그럼 무슨 의미인가요?
옛 마한의 귀족, 지금의 전라도 땅의 귀족들이 의자왕 뒤통수쳤잖음.
예쁘다
유튭댓보면 참 자기잘난맛에 사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오지랖도 쩔고요.ㅎㅎ
혹시라도 삼천궁녀설 믿는 분들
낙화암 실제로 가보시고 그 절벽에 궁녀 삼천이나 서있을 수 있나
그럴 공간이 되나 직접 보세요
어디 인터넷 댓글중에 천년간 풍화와 침식작용으로 낙화암이 작아진거라는
X소리도 하시던데...
직접 보시면 됩니다
백제멸망당시의 인구수는 조금.... 기록을 그대로 믿으시면 좀 곤란합니다.
7세기에 백제가 620만명이라면 신라도 400만은 넘을것이고 고구려도 500-600만명을 될텐데 그러면 3국합해서 1500만이 넘어갑니다.
한반도만 해도 최소 1200-1300만이됩니다.... 말도 안되는 숫자가 되버려요....이정도 인구수가될려면 1000년은 더 기다리셔야해요.
조선 초기에 인구가 600만정도에요... 인구 1000만 넘을려면 18세기는 되야해요...20세기 들어와야 1500만되고요...
궁녀수 계산도 이상해요.. 인구 620만 잡고 계산해봅니다.
대충 대충 쉽게 계산해보면
인구절반 여자라고 치면 300만 이상이 여자에요..이중 16-20세정도로 궁녀를 뽑는다면 대충 여자인구중에 10%정도보고(인구가 정규분포라면 1/12 이하인데 대충 10%라고 퉁치죠) 대략 30만정도가 해당됩니다...이중 3000명이면 1%정도고요 이거저거 사정고려해서
후하게잡아도 1.5%는 안넘어요....
현실적인 인구로 약 200만정도로 잡아도 5%가 안넘어가요...
그래도 궁녀 3000명은 말이 안되게 많은 숫자인거는 확실해요.
ㅇㅇ. 역알못이라 잘 몰라도 20세기초 2천만도 안댓고,
병충해에 강한 볍씨와 미국원조하의 1963년 첫 통계에서 2천만이 좀 넘는데,
1200~300년전에 백제인구만 600만이 넘는다니 ㅋㅋㅋ.
삼국 다 합쳐도 600만이 안댓을거 같음.
3천을 먹이고 입히고 재울 능력이 되나...
조선시대 궁녀가 몇명이죠?
5~600 명
역시 진실은후손이 다안다고 임마!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十七年春正月(십칠년춘정월) :17년 봄 정월,
拜王庶子四十一人爲佐平(배왕서자사십일인위좌평) :왕의 서자 41 명을 좌평으로 임명하고,
各賜食邑(각사식읍) :그들에게 각각 식읍을 주었다.
딸과 적자들을 제외한 서자만 41명이니까,
그 자녀는 최소 41명 이상입니다.
딸과 적자를 제외한 서자만 41명이면....
딸,적자까지 합하면 자식만 100명에 가깝다는것
조그마한 백제 왕이 자식이 100명에 가까우면 사생활은 음탕 난잡 한건 사실 인듯~
어마어마한 인구와 광활한 영토를 가졌다 해서 당태종이 1일 3떡을 할 수 있는건 아니죠. 땅이 넓건 좁건간에 남성이 여자를 취하는건 체력간에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하루 한번이상은 힘들다는겁니다. 본인도 하루 10번까지 해본적만 있고 하루 2번 이상은 힘들어서 못하겠더군요. 하루 10번은 일생에 딱 한번뿐이었습니다. 그땐 안 죽더군요. 딸래미가 퉁퉁 부었습니다. 그래도 자비를 두지 않았습니다.
백제왕자식이 100명이 넘는다는게 문제도 아니고 핵심도 아닙니다. 본인도 그걸 지적하는건 아니에요.남자가 여자 좋아하는건 죄가 아니죠. 자연의 섭리입니다. 의자왕도 당연히 여자 좋아할 수 있죠. 남자가 여자 좋아하는게 뭐가 문제겠습니까. 헌데 그 사실이 있다고 해서 백제 의자왕이 여자 때문에, 사치향락에 빠져 나라를 멸망시켰다고 하는 내용에는 동의를 하지 않는다는겁니다.
즉, 지금까지 알려진것과는 완전히 반대로 이해를 해야 한다는거죠. 즉, 사치향락때문에 망한게 아니라, 나라가 먼저 망하고 나서 사치향락에 빠졌다는 것이죠. 신라에게 끔살당하고 난 이후 더 이상 뭘 할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으니까요. 소위 말하는 폐인이 되어버린 거죠. 폐인이 되었으니 할 수 있는건 사치향락, 술 밖에 안 남은거죠.
왜 우리 사회에서도 보지 않습니까? 정말 일도 열심히 잘하고 자기 일도 잘하던 사람이 어떤 사건을 계기로 폐인이 되면 술에만 빠져서 개판치는 장면을요. 즉, 사람 망가지는 모습들을 흔하게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의자왕이 바로 이렇게 되었다고 보는거죠.
그렇게 열정적이도록 신라를 공격하고 성도 빼앗고 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에 갑자기 사치향락에 빠져 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여자를 좋아해도 그렇게 되는건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결국 의자왕이 사치향락, 주지육림에 빠진건 뒤에 나타난 모습이라 말입니다.
그 모습의 원인으로 지목할 수 있는게 신라의 반격으로 인하여 백제군이 사실상 깨끗하게 전멸, 몰살당한 것이 제일 결정적이었다고 보는 것이죠. 백제의 국력을 모두 쏟아부어 육성했던 군사가 신라에게 모조리 도살당했으니 더 이상 뭘 할 수가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거죠. 644년부터 신라가 백제에게 빼앗긴 성을 되찾아오고 648년에는대야성까지도 되찾아오는데 그때까지 학살당한 백제군의 숫자가 6만이 넘거든요.
백제의 전쟁역사에서 최대의 피해가 발생을 한겁니다 그것도 당나라의 협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라군 혼자에 의해서만이죠. 이 사실로서 신라가 고구려 백제 연합을 막을 힘이 없었떤게 아니라, 여주, 즉, 선덕여왕이 전쟁을 싫어했기 때문에 소극적으로 대응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거죠.
대신라혼 땅이넓고 인구가 많고 나라가 부강 하다는건...
그리고 중국은 그당시 전세계 패권국이였죠...패권국 황제가 처작식을 거느릴수 있는 부와~
한반도 끝트머리 조그마한 변방국가 왕인 의자의 처자식이 거느릴수 있는 부는 차원이 다르죠!!
의자 자식이 진짜 100명이 넘었다면 그 자식들 과 그자식의 처자식들 먹여살리는데 얼마나 많은 민초들의 피를 빨아 먹었을까요?
중국이야 워낙 스케일이 크고 부강한 나라니 황제가 식솔이 많아도 민초 들에겐 부담이 들가지만...
코딱지 만한 백제 왕 자식이 100명이 넘고 그 자식의 처자식 까지 먹여 살리려면...
아마도 민초들 뼈에 골수까지 빨았을게...합리적 추론이죠~~ㅋㅋㅋㅋ
16억 인구가 정부 하나 먹여 살리는건 일도 아니지만~
5천만 인구가 정부 먹여살리는 거완 차원이 다르죠~~ㅋㅋㅋㅋ
그리고 저당시엔 무소불위 황제,왕이 권력을 휘두를 때인데~~ㅋㅋㅋ
생방은졸린데 유튜브는잼나네
의자왕이 일본에보낸건 바둑알이 아니고 바둑판 입니다.
그것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잉 이분 먼가아는분이네ㅋ
삼국사기 다 믿으면 안된다
김종성 그럼 환단고기는요????
이거 패러디도 있죠. ㅋㅋ
설씨와 똑같네요
매일 다른 여자랑 잔다고 하니까 졸 부럽네
백제인구가 620만명 된데요
구리멍텅 잘해야 150만~200만명 정도에 불과해요.
@@f-killer7537 그건 신라인구가 그정도이고. 백제는 대국이였다. 그당시에는
@@조상필딸 백제가 뭔대국?
도대체 백제 인구가 얼마이기에?
@@f-killer7537 신라의 선덕여왕은 그당시 백제를 대국이라 칭했고 신라는 소국이라 감히 칠 엄두를 못내었다. 라고 기록되있다. 백제 무왕과 의자왕은 신라 대야성을 비롯해 40여개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신라 서라벌 앞마당까지 공격해들어갔다. 나당연합군이 공격해올때 백제군이 5000명밖에 없던이유는 백제의 정규군은 신라와의 국경지대에 배치되있었고 계백이 이끌던 5000병력은 의자왕의 친위대 였다.
@@f-killer7537 당나라아니였으면 신라는 백제에게 멸망당했을것이다.
이뻐 죽어요.
잘못된설명이,,역사를..왜곡할수도
댓글159의자왕 삼천궁여 오바
식민사관에 찌든놈들이 댓글에 몰려와서 똥싸놓고 갔네
20년간 합산, 외거궁녀도 있었겠지요.
아니라고 여러군데서 울거먹은 걸 왜 또해
궁녀 3000명이면 밥값만 하루에 얼만가? 그것이 더 알고 싶당
그렇구나
난 삼도천 같이 건너갔다는
의미로 알고있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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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후의 이야기를 성경속 예수님께서 전해주고 계십니다 영원한 친구되신
예수님
페미를 외치면서 뛰어내렸다
이쁜것이 생각도깊네
대한민국 여자들은 머리는 해골
이고 배때기에는 오물이 썪어
넘처 흐른다는 말이 있는데
틀이 완전히 깨지는 순간이네요
앞으로 항상 응원 할께요
요즘 2030 세대의 롤모델 의자왕 ㅋㅋㅋㅋㅋㅋㅋ 요즘 2030 애들도 의자왕처럼 삼천궁녀랑 놀고싶거든 ㅋㅋㅋㅋㅋ
이분 귀엽고 이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