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엄마가 폐비가 안되었음 좋은 왕 이 되었을수도 있는데 생모를 너무 그리워하는 바람에 시인의 감수성을 가진 연산군이었기에 더욱 견디기 어려웠는지 중전 신씨 가 왕비로서 손색없는 사람이었고 자식도 많이 두었는데 쫒겨나면 어린 자식들이 죽는데 어찌 그리 염두에 두지 않고 하고 싶은데로 하다 말로가 그리 되었을까. 비극 이로세 ㅠㅠ
한 마디로 욕약하자면 제사란 흩어져있는 가족들을 모이게 하는 방법 현대어로 풀이하자면 가족의 단합,모임! 알깐?! 이 마저도 없으면 흩어져 있는 가족들을 어떻게 함께 모일 수 있을까? 흩어져 있는 가족들이 빠질 수 없는 핑계거리를 못 만들게 하는 행사라고 생각하면 됨. 죽은 사람이 머 어쩌고 저쩌고 개 소리는 그만 하삼.
연산군 아들은 폐세자 황 영수,돈수 가 있었다던데 훗날 중종반정 때 반정 공신들이 연산군 아들들 살려두면 후환의 싹 을 키우는 것 이라 해서 사사 시키라고 주청 했죠. 하지만 중종은 조카들을 죽일 수 없었고 그런 마음이 들었으나 반정 공신들 의 압박에 어쩔 수 없이 사사를 명하게 됩니다.
보면 왕실과 혼인하고.. 다 끼리끼리... 공주의 딸, 공주의 아들이랑결혼하고, 대군의 딸, 아들과 결혼하고.. 명문가면 다 왕실이랑 혈연이 있네. 남자쪽으로만 쳐서 그렇지 왕족? 핏줄 진하기로만 따지면 어떤 명문가 딸이나 아들이 진할지 알 수가 없음. 외가의 핏줄이 왕실 핏줄인 사람이 또 왕실딸이랑 결혼하고, 성씨는 다르니 또 공주(의 엄마 또한 왕실의 외손의 친손이라든가)랑 결혼하고.. 등등 태조 이성계 , 태종이방원.. 그 핏줄 누가 제일 진하게 받았을까? 이씨말고 어디 김씨나 정씨 홍씨 박씨가 진하게 받았을 수도 있단거임.
요즘에도 결과적으로는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끼리 결혼 많이 하지만 저 때는 100%, 특히 상류층으로 가면 갈수록 중매 결혼을 했으니 끼리끼리 결혼이 지금보다 더 심했죠. 그나마 유교가 정착이 되어서 외가 쪽으로는 4촌이 넘어가면 비교적 관대해졌지만 친가 쪽으로는 동성동본간 혼인도 금했던 조선 시대는 양반이었죠. 그냥 왕가랑 혼인 맺을 만한 집안이 몇몇 집안에 국한된 수준이었던 거지. 그 이전 시대는 권력 유지를 위해 족내혼이 일반적이었어요;;; 심지어 삼촌-조카지간이면 양반인 수준이고 이복 형제끼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결혼함. 심한 곳은 동복 형제간에도 혼인하는 경우가 있었죠. 조선 같은 경우는 근친혼으로 인한 문제는 아니지만 그래서 학자 중에는 고대 왕국의 멸망 원인을 근친혼 때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어요. 근친혼을 거듭하다 보니 유전병이 생겼고 이로 인해 저능아나 정신병자가 왕이 되는 사태가 일어났죠. 성골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알 수 없다고는 하지만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이랑 만명부인이 야반도주까지 하며 혼인한 이야기가 아직도 역사책에 자주 등장하고 있을 정도니 그 시대엔 정말 장안의 화제였을 듯요. 성골이었던 만명부인이 진골 중에서도 가야계라 다소 낮추어 봐 지는 진골이랑 혼인을 하겠다고 했으니... 모두가 결사반대하고 나선 거죠;;; 신분제가 가장 엄격했던 신라에서요;;;
모후가 얼마나 그리웠으면 자신을 아기로 다루는 여자의 치마폭에서 울음을 삼켰을까? 안타깝다. 그의 행실은 비록 폭력적이었으나 그것에는 이유가 있었으니... 차라리 그 모후가 계속 후궁에 머물렀다면 좋았을 텐데. 그럼 적어도 부모에게 심리적으로 버려져 자라지는 않았을테니까.
재결합시키는게맞지... 출가외인이라 부르면서 딸을 남의집 사람취급할땐 언제고 아버지 폐위당했다고 공주까지 연좌제냐 ㅋㅋ 출가외인이라 부를거면 아버지 죄를 딸에게도 씌우면 안되는게 맞지
골 때리는 조선이란 나라 ㅋㅋㅋ
부모님의 사랑을 온전히 못 받고 자란 연산군이었기에 자식을 사랑하는 방법에서도 여러 가지로 서투른 부분이 많았네요..비록 폭군이었지만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어찌 탓할 수만 있을까~연산군의 자식 중 유일하게 괜찮은? 삶을 살은 듯🙂
아빠의 조건없는 사랑을 탓하는 사람이 있나요?
딸에 대한 아버지의 무조건 적인 사랑은 당연한 것 아닌가요?
연산군의 딸은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잘 봤습니다.
공주 재결합해서 자기
쫒아낸 시아버지 계속
봐야하는 건가요?
연산군 제사 모시게 된
집도 참 답답하겠네요
역사되돌아보는거도쏠쏠하네요 감사합니다
연산군,, 엄마가 폐비가 안되었음 좋은 왕 이 되었을수도 있는데
생모를 너무 그리워하는 바람에
시인의 감수성을 가진 연산군이었기에 더욱 견디기 어려웠는지
중전 신씨 가 왕비로서 손색없는 사람이었고 자식도 많이 두었는데
쫒겨나면 어린 자식들이 죽는데 어찌 그리 염두에 두지 않고 하고 싶은데로 하다 말로가 그리 되었을까.
비극 이로세 ㅠㅠ
연산군은 미남이었고
감수성이 예민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상처가 더 크게 느껴졌겠죠.
냉철하지 못한 가슴이 따스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연산군의 생모는 폐비윤씨 아닌가요?
내 천성이나 인성때문이 아니라, 술을 마셨기때문에 폭력적인 행동을 했다. 와 비슷한 얘기인듯. 무엇인가 때문에 그정도의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면 인종, 경종, 정조 등도 똑같이 희대의 폭군이 되어야 마땅했을듯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 때문에
폐비가 악독하게 나쁜짓 많이
결국 사약 받았지
왕이될그릇은 아닌거 같고 엄마 복수한다고. 나라를 풍지박산 잔인한 행동은 오늘날 역사를 재평가해보면 주의환경이 얼마나중요한지 타고난인성 인격이갗추어도 간신배가 많어면 감성이풍부한 연산군을 부추게세우는. 조선최고의간신 임사홍도 한몱했어리라 생각됨
역사패치는 묘역도 알려주셔서 넘좋아요.. 산행중 간혹 화려한 묘역을 보면 늘 궁금했는데 혹시나 눈여겨 봐야겠어요^^
이번 에도 재미있게 봤어요 고맙습니다 ~~
역사기록은 언제나 승자(?)가 기록한것이였기에..저는 야사에 더 관심을 두는편인데...글이 아닌 이런 영상으로 접하는것은 참 좋으네요..감사합니다
거슬려 올라가나 지금이나 늘 국가를 이루는 근간이 되는 국민들의 삶은 항상 젤 힘들고 고위직 사람들은 호위호식하고 부정.부패는 늘 만연해 있음은 변치 않은 사실이네요...모두 그릇된 인간의 욕심과 사리 사욕에서 비롯된 것...
어린때 공주능에가서놀고 소풍도 많이갔었는데 ..장위동시절이그립다
그놈의 제사..제사...죽은사람이 뭘 안다고..
죽은사람을 위한게 아니라 산사람 마음
편하자고 하는게 제사임
과거야 서로 모여서
평소에 자주 못먹는맛있는음식 먹으면서
친인척도 모이는 행사였지만
지금을 세상이 변한거죠
자네 누구 밑구녕으로 나왔나? 어리석기는 눈앞의 편안함만 보려하지말고, 눈감고 자넨 쳐다보게나... 보일것이여.. 느끼고... 그것이 자네 조상과 한몸이란거여... 업이 삼대간다고 옛어르신들이 말하셨지않은가?? 지금은 유전자라하지...
한 마디로 욕약하자면
제사란 흩어져있는 가족들을 모이게 하는 방법
현대어로 풀이하자면 가족의 단합,모임! 알깐?!
이 마저도 없으면 흩어져 있는 가족들을 어떻게 함께 모일 수 있을까?
흩어져 있는 가족들이 빠질 수 없는 핑계거리를 못 만들게 하는 행사라고 생각하면 됨.
죽은 사람이 머 어쩌고 저쩌고 개 소리는 그만 하삼.
일제시대, 미국식민시대 전에는 이렇게 평생 바쁘게 일해서도 살기어렵지 않아서, 슬로우 라이프였으니 가능했지, 지금 같아서는 온 국민이 서양의 노예라...ㅉㅉ
@@김해경-t9u 꼰대
저런 기회주의자에다 야비한 인품의 시아버지였다면 휘신공주가 재결합한후에 더이상 공주 대접도 못받는 처지에 얼마나 눈칫밥에 시집살이를 당했을지 안쓰럽네요.
근데 본인도 연산군 생전에 뇌물받고 떵떵거리며 산 죄가 있으니 안쓰러울것 까지는...안죽은게 다행이지요.
안죽은게 다행인데 무슨...
뭐가 안쓰럽다는건지 연산군이 저지른 악행을 보면 연좌제 아니라도 딸로서 반성하고 사는게 당연하지 조정에서 많이 봐 줫네요 이춘재 유영철 가족이나 마찬가지임 현대라면
@@뚜루뚜뚜-i9r 공주야 뇌물받았으니 죄가 있지만, 이춘재 유영철 가족은 죄없다고 생각하는데? 자기가족 편들며 피해자를 비하하거나 괴롭혔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엄밀히 말해선 가족이란 이유만으로 비난받을 이유가 있는건 아니지.
@@film1895 유영철 가족은 모르겠고 이춘재 엄마가 인터뷰한 거 보면 우리애가 착한애다, 이춘재가 처제 강간살인한 것도 전처가 원래 싸가지가 없는 애인데 그 사람이 가출 해서 홧김에 그런 거라고 옹호해요. 욕먹을만 하다 생각하네요.
휘신공주 시아버지 야비하내
임사홍과 신수근과 함깨 재거대상이었지만 뇌물을 바쳐서 살았고 며느리 휘신공주를 쫒아낸 시아버지 구수영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내는 야비함
구수영 안없애고 뭐 했는지
오늘도 잼있게보구가요!~~
연산군에 원한이 있는 집안이라 연산군 재사에 개밥 한그릇 올려놓고 지냈을듯 ㅋ
살아 있을때는 효도 안하고 돌아가시면
부인이 제사에 정성을 다하게 하는 남자들
감사합니다
예전에보던건데 저본것처럼 기간을두고 재업이되네요~ 오늘도 잘보고갑니다 =ㅎㅎ=
연산군 사후 재걸합한뒤 시댁가서 구박이나 안받았나 모르겠네
그래도 여자로 태어난 탓으로 황천길행을 면했네, 연산군의 아들들은 5살, 3살 짜리들도 모두 사약을 먹여 비명횡사시켰음, 단지 연산군의 아들이라는 죄로.. 너무 가엾고 불쌍함
평민으로 강등시켜 입양보낼것이이지.....
연산군의 딸 휘신공주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현대로 말하면 가정환경이 좋아아 그 자식이 그늘지지 안고 잘큰것같네
딱한 연산군...모든게 인수대비의 못된 성품으로 나온 것..
공주도 오래 살지는 못했고 ㅇ녀산군의 아들이 싸그리 죽음 당했다.
이 역사의 비극이 아주 못된 성질의 인수대비 때문에 비롯됐다 생각되네요 아들있는 며느리를 사형시키고 손자를 보더라도 어떻게 죽일것 까진 없잖아요 그렇게 불행하게 사는데 그냥두면 되지
연산군 이융 ~ 폐비 신씨 중전
신씨 부인 ~ 진성대군 (중종)
진성대군의부인이되는신씨부인은연산군의처중전신씨의동생이죠 훗날 빙시같은진성이 왕위에오르고 잠시 중전에자리에올랐으나 며칠가지못하고 박원종세력들에의해 폐비가되어 내쫒겨진 한많은여인 박원종일파에게 친언니인 중전신씨와 아버지인 신수근을 잃고 맙니다
신수근의 여동생 신씨가 연산군의 부인이고,
신수근의 딸 신씨가 진성대군의 부인이에요.
두 신씨는 자매가 아니고, 고모와 조카사이에요.
문자가 바르지 않네요
연산군 아들은 폐세자 황 영수,돈수 가 있었다던데
훗날 중종반정 때 반정 공신들이 연산군 아들들
살려두면 후환의 싹 을 키우는 것 이라 해서
사사 시키라고 주청 했죠.
하지만 중종은 조카들을 죽일 수 없었고 그런 마음이
들었으나 반정 공신들 의 압박에 어쩔 수 없이 사사를
명하게 됩니다.
걍 죽이고 싶었지 예의상 반대한거고
평민으로 강등시켜 살게하지ㅡ
인생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알 수 있다는 좋은 예인 것 같습니다.
태어났을 때 완전 핵울트라 다이아몬드 수저. 본인도 썩 인격자는 아니었네요. 친정 집안이 쪽박 나자 기회주의자인 시아버지에 의해 내쫓김. 다시 어느 정도 회복. (한데 저런 시댁에서 행복했을지... )
휘신공주 시아버지 구수영은 임사홍과 신수근과 함깨 재거대상이었지만 뇌물을 바쳐서 살았고 며느리 휘신공주를 쫓아냈죠 아들이 좋은 남편이었다면 행복했을것 같내요
외손을 통해 연산군의 피가 후대에 이어지게 되었군요
외손이면 소용없음.
그래도 폐비신씨의 유전은 이어졌을지도 모르고.
중종이 어차피 잇고 있으니 상관없음.
항상 유익한 정보를 알게 되어 감사합니다
세종도 자기 아들인 대군들에게 금품 바친 자들 청탁은 다 들어줌. 우리나라 전통
그게 왜 우리나라 전통이죠 청탁은 세계인이 공유한 전통입니다 외국왕실도 널리고널린일이었음
폭군이었지만 유배되어 탱자나무로 다 막혀있는 햇볓도들지않은곳에서 쓸쓸히 외롭게맞이했던 그였기에 씁쓸합니다~~ ㅠ ㅠ
폭군다운 최후죠 독살설이 있지만 절대권력을 누리다 폐위돼서 유배됐으니 견디지 못해서 화병 겸 역질로 죽었을 수도 있죠 왕비가 보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죠
회신공주도 불상하다 애비를 잘못만나서
아버지가 처신을 잘못해서 딸이 시집에서 쫓겨난 사례네요.
아니 대체 그놈의 제사가 뭐길래...
과거의사람들은대단하녜여...즉음이란게엄청슬픈거구!!고문이란게엄청!!공포스런건데!!
그걸 눈앞에서 보고!!
멘탈이대단한듯여!!생각할수록소름끼침!!ㅜ
자식들두...여의고...ㅜ엄청!!슬픈건데...ㅜ
왕들은 멘탈이엄청!!강하심!!아무리생각해두 정신병몇가지는갖고있을듯!!!
제사 물려주어다는거 반전세력 양심적으로 찔리는게 있게네요
반정
감사
보면 왕실과 혼인하고.. 다 끼리끼리... 공주의 딸, 공주의 아들이랑결혼하고, 대군의 딸, 아들과 결혼하고.. 명문가면 다 왕실이랑 혈연이 있네. 남자쪽으로만 쳐서 그렇지 왕족? 핏줄 진하기로만 따지면 어떤 명문가 딸이나 아들이 진할지 알 수가 없음. 외가의 핏줄이 왕실 핏줄인 사람이 또 왕실딸이랑 결혼하고, 성씨는 다르니 또 공주(의 엄마 또한 왕실의 외손의 친손이라든가)랑 결혼하고.. 등등 태조 이성계 , 태종이방원.. 그 핏줄 누가 제일 진하게 받았을까? 이씨말고 어디 김씨나 정씨 홍씨 박씨가 진하게 받았을 수도 있단거임.
끼리 끼리 권력 잡을여고 또 그런 집안이면 가문없다고 무시당하고
확실히 조선 초기 중기까지 왕실과 사돈맺는 집안들은 거기서 거기더군요. 아무래도 양반 중에서도 이름있는 명문가가 거기서 거기여서가.아닐까 싶네요
연산군의 아내인 신씨도 세종대왕 아들인.임영대군의 외손녀입니다. 세종대왕 고손자랑 외증손녀가 혼인한 셈인데... ;;;
요즘에도 결과적으로는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끼리 결혼 많이 하지만 저 때는 100%, 특히 상류층으로 가면 갈수록 중매 결혼을 했으니 끼리끼리 결혼이 지금보다 더 심했죠.
그나마 유교가 정착이 되어서 외가 쪽으로는 4촌이 넘어가면 비교적 관대해졌지만 친가 쪽으로는 동성동본간 혼인도 금했던 조선 시대는 양반이었죠. 그냥 왕가랑 혼인 맺을 만한 집안이 몇몇 집안에 국한된 수준이었던 거지.
그 이전 시대는 권력 유지를 위해 족내혼이 일반적이었어요;;; 심지어 삼촌-조카지간이면 양반인 수준이고 이복 형제끼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결혼함. 심한 곳은 동복 형제간에도 혼인하는 경우가 있었죠. 조선 같은 경우는 근친혼으로 인한 문제는 아니지만 그래서 학자 중에는 고대 왕국의 멸망 원인을 근친혼 때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어요. 근친혼을 거듭하다 보니 유전병이 생겼고 이로 인해 저능아나 정신병자가 왕이 되는 사태가 일어났죠.
성골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알 수 없다고는 하지만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이랑 만명부인이 야반도주까지 하며 혼인한 이야기가 아직도 역사책에 자주 등장하고 있을 정도니 그 시대엔 정말 장안의 화제였을 듯요. 성골이었던 만명부인이 진골 중에서도 가야계라 다소 낮추어 봐 지는 진골이랑 혼인을 하겠다고 했으니... 모두가 결사반대하고 나선 거죠;;; 신분제가 가장 엄격했던 신라에서요;;;
@@꽃말-y6l 가야의 왕손과 결혼한 신라의공주인거죠. 가야가 망하지만 않았어도 외국으로 시집간 왕비가 됐을텐데.....
@@0fh374 개인적으로는 가야가 망하지 않았어도 성골인 만명 부인이 약소국 왕에게 시집 가는 일은 없었을 것 같습니다. 진골 정도 귀족을 보내면 모를까... ㅎㅎ
연산군 이해됩니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간신배들 땜시 균형무너짐
아빠로서는 만점
뭐든지 다해주는 게 만점인가요?
절도를 모르는 망나니로 클텐데?
군주로서는 빵점
연상군도 불상하지요. 어린나이에 부모없이 모친이 역모에 그리 죽었으니.
연산군은 죽어서 제사밥 먹는것도 눈치보며 제사밥을 얻어먹었겠군~~
모후가 얼마나 그리웠으면 자신을 아기로 다루는 여자의 치마폭에서 울음을 삼켰을까? 안타깝다. 그의 행실은 비록 폭력적이었으나 그것에는 이유가 있었으니... 차라리 그 모후가 계속 후궁에 머물렀다면 좋았을 텐데. 그럼 적어도 부모에게 심리적으로 버려져 자라지는 않았을테니까.
연산군
결론이 안좋네요
그 시대를
잘못 만난 탓도
있겠지요
임금은 아무나
하나요
마음이 태평양 이
되어야지요
08**** great 👏👏👏👏👏👏👏
역사에듣지못한얘기들이네요
연산군은 뭐 한치도 옹호할 가치가 없는 왕.. 조선은 연산군 집권 이전과 이후로 오르막이냐 내리막이냐를 보면 된다
염려하고 병을 낫게 해주는 할머니 소리시네.
조선 역사상 연산군의 집권 초기가 제일 태평성대였음. 노비도 살찌게 했다함 말 다했음.
와!
그런데 연산군의 아내인 폐비신씨는 남편이 지나치게 엽기적인짓을많이하고 남편때문에 폐비가되었는데 마음이 어때었을까... 그리고 폐비신씨와 연산군사이에는 7명의 자식들이 있었다네요, 장녹수는 어머니로생각하고 신씨는 아내로생각하고
안타까운 마음이었갰죠
내자식이 내실핏줄 같으면 남의 자식도 그러하거늘...
연산군의 딸~도봉구, 정희공주등 무덤 많음
사랑을 못받았다고 폭군이겠냐 그 애미의 복수가 그 연산군 만들었지 애미노릇이 피몯ㅈ은 옷 남긴 그 조모가 미친짓한것 결국 손주를 망하게 했네
??연산군 딸도 있었군요!!!
연산군 딸무덤 방학동 연신군 무덤 뒤에있어요.
원수의제사를 지내라고 형벌이냐
와....태어났는데 아부지가 연산군이네....
애비나 그딸이나 하는행동은 똑같았네...
ㅎ
공주시절에 뇌물받고 안죽은게
다행이네 ..
조선 오백년이 결국 왜놈한테 빼앗기는 수모가 됐다 저런 일들이 있으니
미안한데 강산도 오년이면 바뀐다고 연산군 집권 이후로는 연산군 책임 아님.
그 오백년의 마지막은 흥선, 고종, 민비 이 트리오로 수모 겪은 거임.
제사가
뭐가 그리 중요합니까?
저때는 중요했어요
연산은 얼굴이 조선 왕중가장잘생겼고 글 씨를 가장잘쓴 간신 으로 더 않좋은 폭군의 길로ㅡ
흠
지금의 인철수 윤석열 김무성 유승민 이었네요
어떻게보면 기회주의자인 시아버지때문에 고초를 덜 겪었다고볼수도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