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가로 덧붙이자면, 예전에 서울 배봉산에서 국군 참호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땅을 파다보니 국군이 자리잡은 곳 바로 아래에 고구려군 보루가 있었다고 하네요. 과거 고구려군이 자리잡은 보루에서 천년도 지나 후손들이 다시 그곳에 참호를 세운 거죠. ㄷㄷ 배봉산 보루라고 치면 나옵니다
대부분 고구려 개마무사만 찾는데 그거는 걍 간(지)알못이고 백제, 가야 갑옷이 진짜 정석임. 9:17 이부분에 고증이 조금 오류가 있는데 저 투구 양식은 '소찰주' 로 신라계열이고 오늘날 일본에 알려져있는 미비부주(차양투구)가 원래 백제 양식의 투구임. 걍 한국 사람들이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고구려, 신라투구 둘중 아무거나 대충 갖다박아 넣은거임. 바다와 인접하고 북부 인접지역과 정복전쟁을 벌이는 입장에서 견주어보면 절대로 저런 양식의 투구를 쓸리가 없음. 오늘날 일본 사무라이 갑옷이 4세기 친교맺고 전수받은 백제, 가야 찰갑의 개승작이라고나 할까..
고구려갑옷은 작은 철조각?판? 을 실로 여러겹 겹쳐입었기에 화살도 거희 대부분 튕겨내고 활동성도 좋았다고합니다. 그리고 추후 신라는 화려하게 고구려갑옷을 배끼고 백제도 배껴서 너나 나나 다쎴습니다. 참고로 당나라나 수나라,한나라의 갑옷은 대부분 옷에 투구와 가슴보호대만 얇은 철판으로 돼어있었고 고위장수들만 판갑을 입었습니다.
화려함 이러네...찰갑은 만들어서 엮어야하는 철편의 수가 수백~수천개이고 그만큼 생산도 오래걸리며 유지 보수도 까다로워서 생산단가가 높았던거임 의장용이나 왕실용이 아닌데 갑옷을 화려하게 만들 이유도 없고 그럴필요도 없는거임 그리고 화려함을 빼서 두정갑보급이 늘어난게 아니라 쓰는 철편수도 찰갑에 비해 훨씬적고,생산단가도 낮고 방어력도 월등하며 유지보수도 쉬워서 보급률이 늘어난거임
정보) 마지막에 삼국시대 갑옷이 백제는 판갑(통으로 이어진 갑옷)에 투구의 높이가 좀 낮은 형태이지만 실제로 저런 유형의 갑옷은 삼국시대 초기 한반도 남부 일부에서만 사용했고, 중기 이후에는 삼국 모두 주력이 판갑이 아닌 찰갑(영상에 고구려 참조)과 몽고발형주구(투구 위쪽이 뾰족한 투구)로 대체되었다. 초기 신라나 가야와 같이 한반도 남부 일부지역에서만 판갑을 사용했고, 한반도 중부에 위치한 마한, 백제, 신라는 찰갑과 판갑을 혼용했다. 특히 고구려가 전부 찰갑을 사용했는데 고구려군이 주변 국가들을 개박살 내고 패권국으로 올라오면서 그 위력을 실감한 주변국가들이 찰갑을 도입하면서 판갑은 한반도에서 도태되었다. 즉, 고구려군이 남하하면서 찰갑을 대중화하였다. 특히 백제 투구로 나오는 해당 투구는 실제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는데 드라마 근초고왕에서 백제를 돋보이게 하려고 채택한 드라마적 연출이다.(물론 괜찮은 선택이었음.) 그리고 한민족 계통의 국가들의 갑옷은 주변국과는 다른 특징이 하나 있는데 하나같이 목을 보호하는 형태를 채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민족의 주류였던 예맥족(부여, 고구려, 고조선 등)이 말을 자주타다보니 낙마사고를 예방하려고 저런 형식을 채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설이 있다.
님이 말씀하신것 방법을 안쓴것은 아니지만 조선 궁병들 화살 패용한것들 자료보면 상당수가 등에 패용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환도 패용을 거꾸로 하는 이유도 활을 당길때 걸리지 말라고 하는것이구요. 만주족같이 궁기병을 운용한 여러 나라들 자료들 보면 등에 패용한곳도 많습니다. 어깨 넘어로 화살을 빼기보단 손을 등쪽으로 돌려서 활을 빼는 식으로 씁니다. 화살을 꼽아 등에 매다는 가죽이 있는데 상당히 단단하게 화살이 고정되있어서 마상에서도 화살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하네요.
현재 남아있는 국궁은 개량카본궁과 개량각궁입니다. 국궁은 엄지손가락에 끼우는 '깍지'라는것이 필수이며 깍지가 없으면 쏘기가 불가능합니다. 한국에도 서양의 링메일 형태의 갑옷이 있는데 고려시대에 주로 사용된 쇄자갑(서양처럼 머리까지는 안하고 몸통만)과 쇄자갑에 철판을 추가하여 방어력과 장식성을 추가한 경번갑이 있습니다(조선초~중기까지도 썼음) 이후에는 두정갑(못의머리 라는뜻)이 주로 썼고 다시 평화시기가 오면서 두석린(놋쇠비늘)갑-어린갑-비늘갑-용린갑(다 비슷한의미)가 나타나며 여러겹의 천을 두텁게 만든 면제 배갑과 한지를 여러겹붙이고 옻칠로 마감한 지갑등이 있습니다. 삼국시대에는 찰갑과 판갑이 혼용되어 사용되었으며 국가별로 주력갑옷이 약간 차이를 보입니다(이상 졸업한지 10년 넘은 역사고고학 전공자였습니다 개복어님 영상 잘보고 있어요~ 후다닥)
갑옷의 발전은 크게 효능->멋->성능순으로 바뀌엇다 보면됨. 최초의 갑옷은 추위와 자잘한 부상들을 막는 가죽옷이고 그것에 멋을 치장해서 쇳판들을 달고 다니기 시작하고. 쇳판이 움직임을 방해하고 무겁고 방어력에도 크게 도움이 안되서쇳조각을 여려겹붙이는 형태로 진화햇으며 현재는 총알을 막기위해서 개량되엇음.
@지디랑생일만같음 아뇨 조선 이전 고려부터 사료 많지 않습니다 전부 중국이나 일본측 기록 교차비교해가며 연구해야하고요 조선을 제외하고는 거진 소실됬다고 봐야 맞습니다 국내 사학연구하시는 박사님들도 하나같이 하시는 말씀이신데 당최 사료가 많다는 주장은 어디서 들고오신것인지 궁금합니다 조선 기록만 많으면 그전 기록도 많은게 됩니까?
아 그리고 조선후기 우리나라 조총수들 사격능력이 엄청 났다고 합니다. 청나라 요청에 파병을 몇번 했는데 그당시 일반적 조총 명중률을 훨씬 상회하는 능력을 지녀 전투력이 엄천 났다고 하네요 암튼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기질이 활을 쏘든 총을 쏘든 원거리서 멀쏴서 맞추는데 특화됀 민족
과거의 갑주들이 현재의 군복과 비교했을때 더 멋져 보이는 이유는 전투의 방식 및 군의 사용 차이에 있는걸로 압니다. 현재 군의 전투는 전장 상관 없이 어디서든 전투를 하며 그 방식이 기습형태이기에 간단하고 가벼우며 이동에 용이하게 만듬에 비해 과거에는 대다수의 전장이 정해져 있었으며 현대의 총같은 중장거리가 아닌 창이나 검, 방패 같은 근거리 무장이 주를 이루었으며 중거리인 활이나 포 조차 사실상 시야 시야내에서 발사해야 맞을 정도로 현대에 비해 꽤나 근거리였습니다. 그렇기에 기동성보다는 방어에 더욱 치중하였고 칼날이 잘 들어오지 않도록 꽤나 두꺼운 천이나 강한 철을 갑주에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거기에 현대의 군에서도 의장대나 헌병같은 경우에는 일반적인 군복과는 다른 멋진 군복을 입는 것 처럼 당시의 군은 전투를 하는 직 이기도 했지만 사실상 의장 및 국력과시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고 또한 우리가 흔히 아는 고대갑주는 그 대다수가 장교나 지휘관이 사용하던 것이 많고 현대 한국처럼 국방의 의무 땜시 끌려가셨던 분들은 지금처럼 꽤나 수수(?)한 복장을 사용하셨다고 합니다.
멋내기에는 고려 경번갑이 제일 좋아보이는데 경번갑 위에 가죽을 얹어서 악세사리 느낌을 내던가[유동근] www.etoday.co.kr/news/view/865723 아니면 비단이나 천에 무늬를 새겨서 두르던가[무신 김준] www.headlinejeju.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0137
활을 다루는데 필요한 힘은 활의 장력에 비례하며, 평균적인 장력은 20.4~22.7kg이라고 합니다. 물론 45kg을 초과하는 전투활도 존재하지만, 이는 우리들이 아는 속사를 쓸 수 있는 활이 아니며, 숙련자가 아니면 당기기 힘들다고 합니다. 출처: ruclips.net/video/BEG-ly9tQGk/видео.html
우리나라 각궁은 진짜 그당시 최종병기가 맞음 활의 최종진화인 복합궁에 크기도 줄여서 휴대가 간편했고(그당시 청나라궁과 비교해서 크기가 엄청작음 최종병기활 영화화도 나오죠) 크기가 작다고 사거리가 짧았나 그것도 아님 서양 장궁과 함께 최대 사거리를 자랑함 거기에 편전(애기살이라고도하죠) 총이 일반화 돼기 이전에 이미 총신의 원리를 이용해 관통력을 극대화 시킨 화살을 만들어 낸거죠 대단함 우리 조상들
조선시대에 임란 이후 도입된 소형 머스킷인 조총은 점차 발전시켜서 나선정벌 이후 러시아제국군이 운용하던 '플린트락' (불을붙여서 쏘는게 아닌, 부싯돌의 마찰로 방아쇠만 당기면 나가는 머스킷총) 화승총까지 개발했으니...확실히 화력 덕후죠... 천보총과 같은 대구경 장거리 조총도 등장하는걸 보면 확실히 포수양성에 어느정도 힘을 기울인거같아요
Hawaiian Surf 시비 거는 건 아닌데...나선정벌 당시 플린트락 머스킷을 몇 정 노획한 것은 맞지만, 청나라가 그 대부분을 가져가는 바람에 그 수가 적기도 했고, 플린트락 머스킷은 당시 조선의 수지타산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양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만 조선이 구식 머스킷, 즉 흔히들 생각하는 줄에다가 불을 붙여 총을 발사하는 매치락 머스킷을 동양에서 최고 수준으로 생산해낸 것은 사실이고, 이외에도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천보총 같은 수준 높은 화약무기를 생산해내는 강국이었던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매치락 머스킷으로 러시아 원정대의 플린트락 머스킷을 잡은 건 대단한 일화. 여윽시 전투민족이다~
과거의 갑옷이 멋있을수 밖에 없는게 일단 주로 전투는 다 초근접전....바로 눈앞에서 갈휘두르고 창찌르고 도끼찍고 싸우니 당연히 방어력이 병사의 생사에 매우 중요했고 방어력을 올리려면 갑옷이 무거워야 했음 갑옷이 무거운 이유는 막아야 할 부위가 한두군데가 아니다보니 여기 덧대고 저기 덧대니 무겁고 멋스러운거...ㅋㅋㅋㅋ
9:30 장식성이 많은 갑옷은 돈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위와 재력을 나타내기 위해서일 뿐이지, 신라의 외교상황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비슷한 예로 중세 유럽이나 일본을 들 수 있겠네요. 두 경우 모두 주변에 자신의 무위를 보여 명성을 높이기 위해 눈에 띄여야 했고, 그 방법 중 하나가 갑옷이었죠. (물론 실력도 있어야 했지만요) 반대로 조선, 명, 근세 유럽 등을 보면 갑옷의 모양은 병과에 따라 달라지지, 개개인이 큰 편차를 보이지 않습니다. 조선이나 명의 예시는 알 테니 스킵하고, 근세 유럽의 예시를 의아하게 생각하실 까 싶어 첨언하자면, 19세기 유럽의 흉갑기병들은 다 비슷한 흉갑에 투구를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죠. 그 시대쯤 되면 갑옷을 입는 병과는 흉갑기병 뿐이긴 했지만요. 무엇보다도 신라의 갑옷이 저렇게 멋지게 뽑힌 이유로 외교 하나만을 드는것이 틀린 이유는 첫째로, 신라는 전쟁을 피하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기회를 포착하자마자 백제 성왕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한강유역과 철령 이북지역을 점령해버렸기도 하고, 백제 의자왕에게 성 40개가 털려가는 와중에도 끝까지 싸우고자 고구려를 찾아가고 당나라를 찾아가서, 결국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죠. 신라가 외교전을 많이 벌이는것이 눈에 띄는 이유는, 단순히 삼국중에 가장 약체였기 때문입니다. 중앙집권도 늦었고, 지방호족 견제도 해야하고, 그 와중에 백제는 옆에서 계속 털어먹으려 오고, 고구려는 방관하다가 이득만 주워먹으려는 상황에서 신라가 믿을 수 있는것은 경주 주변의 중앙군과 외세 뿐이었겠죠. (상구 주변에서 병사를 징발했더니, 전투중에 그 부대가 갑자기 깃발 방향을 바꾸어서 신라를 공격해버리면 골때리잖아요?) 그러니까 다른나라에 비해 외교에 신경을 더 많이 쓴 것이 기록에 남았을 뿐이지, 전쟁을 피하고 외교를 선택한 것은 절대 아니란 말이죠. 둘째로, 그래도 어린애는 전쟁터 안보내던 고구려나 백제와는 다르게, 신라는 화랑과 낭도라는 조직까지 만들어서 전쟁터에 보내는 호전성 강한 나라였거든요. 그런 조직에 보내는 게 영광이라 생각하던 나라이기도 했고요. 황산벌에서 화랑 관창도 계백에 의해 돌려보내졌을 때 아버지 김품일에게 욕지거리 얻어듣고, 군말없이 백제 진영으로 홀로 쳐들어갔잖습니까. 김품일도 관창도 진골로, 진골은 왕위 계승권이 없는 왕족이죠. 왕족이 전쟁터에 지휘봉 대신 칼 들고 직접 뛰어드는 곳이 신라였습니다. 이런 나라를 외교나 하려고 테이블에 앉아서 삐까뻔쩍한 갑옷을 입는다뇨? 애당초 외교할 때나 궁에 입궁할 때, 무장해제를 하는 것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법에 맞습니다. 삼국지의 조조가 구석(9가지 특권)을 받는것이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를 생각해봅시다. 그 아홉 특권 중 하나가 황제 옆에서 칼을 찰 수 있는 것이었거든요.
+ 신라가 최약체인데다 중앙집권이 늦었음에도 살아남은것은, 산맥으로 인해 외부에서 군대가 대규모로 넘어올 만한 길이 제대로 없기에, 신라 입장에선 병력의 기동과 집중으로써 외습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죠. 게다가 상대 입장에선 방어거점이 있는 그 산을 넘어오더라도, 또 다른 방어거점이 나오기도 했고. 위성지도로 보면 신라 땅이었던 현재의 경상도와 강원도는, 딱 봐도 우리나라에서 산이 가장 많은 지역입니다... 정 반대의 경우가 백제인데, 660년엔 탄현과 백강이 뚫리니 백제에겐 그럴듯한 방어거점이 없게 되었습니다. 최후의 보루인 사비성 뿐이었죠. 그래서 당군 상대로는 사비성에서 농성하고, 신라 상대로 황산벌에서 회전을 치르려고 했겠죠. 아마 황산벌에서 신라에게 승리했으면 그 병력으로 당군을 칠 생각이었을 겁니다. 이미 다른 선택지는 항복이나 지방의 군사를 기다리는 것 밖에 남지 않았으니까요. 그나마도 황산벌에서 패배한 이상 사비성의 함락은 지방군 결집 이전에 끝날 일인게 되어버리니, 그대로 항복한 것이죠. 쉽게 말하자면, 방어거점은 대신들간의 의견 차이로 이미 다 내어 준 다음에, 할 수 있는 것으로 남은 것이 '적 분산 후 각개격파' 뿐이라, 사비성에서 5천 병사를 뽑아서 황산벌에서 신라군 5만명을 막아라 한 거죠. 그러니 5천 결사대란 것이고. 그게 그나마 승리할 방법 중엔 가장 확률이 높은 방법이었으니까. 이런 식으로, 이미 한성백제가 고구려 장수왕에 의해 백제 개로왕 때 한번 망했던것도, 백제의 지형탓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고구려도 그대로 점령을 굳히는 것은 본인들의 국력 상 무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개로왕만 참수하고, 먹고 체하지 않을 만큼만 땅을 먹고 돌아갔겠지요. 한강 이북까지 고구려가 확장한 이유가 이것이라 생각하네요. 한강은 방어거점으로 쓸 수 있으니까요. 현대전에서도 강은 거대한 천연 장애물이거든요. ++ 한반도 고대의 판갑옷은 통짜가 아닙니다. 리벳(두정갑에서도 나온 정)이나 끈으로 단단히 고정한 철판이죠. 모양에 따라 종장판갑, 횡장판갑, 삼각판갑 등등 여러가지 있는데 중요하진 않으니 넘어가고... 유연성은 떨어지지만 같은 조건에선 통짜 판갑(풀플레이트) 다음으로 튼튼합니다. 그래서 주로 흉갑으로만 사용하고, 나머지 부위는 찰갑(끈으로 철판을 엮은 갑옷)으로 둘렀죠.
군복 디자인은 한 나라의 국력을 나타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조선은 유교를 신봉하고 중국의 제후국을 자처한 나라라 천자국이라 자처한 고구려 백제 신라의 갑옷들보다는 실용성에 더 치중한듯합니다. 유럽에서도 천년을 이어온 국가는 로마제국이 유일합니다.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천년이상 혹은 천년 가까이 국가를 유지한 국가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뿐입니다. 그만큼 강성했고 자부심이 있었던 국가들이었겠죠.
우리나라 사극에서의 허접한 복식과 달리 실제로는 우리 고대 국가들 군복이나 갑옷 등 복식이 화려하고 멋진게 많은데 아쉽게도 제작비때문에 그거 전부 구현해서 사극을 찍을 수가 없어서 죄다 허접해보이는 복식으로 대충 간추려서 찍거나 갑옷만 해도 출처도 알수없는 판타지갑옷에 중국갑옷 일본갑옷 대충 있어보이는거 섞어서 엉망진창으로 찍어대는 바람에 그게 진짜인줄 아는 사람이 많아 아쉽습니다. 외려 일본사극에서 우리나라 갑옷등의 복식 고증이 확실한 경우가 있었을 정도니... 그나마 넷플릭스의 킹덤 정도가 나름 빠방한 제작비로 국내 사극들보다 복식구현의 정도가 낫다고 알고 있습니다.
갑주는 생명을 지키기 위한 것이니 더욱 신경써서 만들다 보니 기술력과 재료, 잔손이 많이 가죠. 기술과 물자, 인력의 집약체 중 하나니 갑주를 화려하게 한다는 건 그만큼 그 국가의 잠재적인 실력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고대일수록 대체로 왕권이 미약하니 각지의 토호들에게 왕이 외관상이라도 멋있어보여야 하지 않았을까요? 명색이 권력자거나 지휘자라면 뭔가 상징성이 있어보이는 장식을 해야 병사들한테 위엄이 서죠. 귀족과 평민이 똑같이 입으면 위엄이 설 수 없죠. 지역별 부족별로 서로 자기들끼리 더 돋보이려는 과시 목적으로 화려한 갑주를 썼을 거라고 봅니다. 눈에 띠어야 어느 부족, 어느 지역 가문이 전장에서 분전하며 활약해야 누가 공을 세우는지 확실히 알릴 수 있어서 나중에 상찬받고 명성을 드높일 수 있죠. 하급장교들 입장에서는 명령을 받을 때도 수월하고, 왕을 지킬 때나 왕이 오는지 가는지도 확실히 알아야 군사로 배알할 수 있으니 갑주가 화려해야 할 겁니다. 보통 유물로 남은 것들은 대체로 권력자가 사용했거나 부장품으로 묻은 갑주일 경우가 많으니 권력자의 것이라서 화려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평민 병사가 입을 것까지 화려하게 치장할 필요는 없죠.
우리나라 옛 갑옷 특이 목보호대 하고 투구의 뿔 입니다 이건 저희 나라의 큰 특징이라고 생각하세요 장군마다 뿔의 외형이 달라 이로 왜구들이 식별했다고도 합니다 이게 고구려가 처음 쓰기시작했는데 남하하면서 고구려의 이러한 갑옷의 위력을 보고 가야 신라 백제가 영향을 받아서 죄다 그리 만들었어요 거기에서 각국의 특징에 맞게 또 변형이 되서 외형이 조금씩 다른겁니다 저는 수수하면서 아름다운 백제갑이이 멋지다고 느끼지만 화려함은 외교가 많았던 신라가 제일이고 고구려는 갑옷의 효율성에 중점을 두었다고 봅니다
삼국시대에 비해 조선의 갑옷이 후달려보이는 이유는 저의 짧은 생각으론 조선은 초기이후론 붓쟁이 문관예우가 있었고 훈구파가 조선초에 다 쓸려나간 부분도 있고 삼국시대에는 틈만나면 전쟁에 동맹국도 수시로 바뀌고 주위나라들이 사라지고 새로생기는 일도 비일비재하니 늘 전쟁을 대비해야되니 발전했다고봄
과거 갑옷이 더 멋있는건 고려 통일 이후 평화가 아주 오래도록 지속되면서 무관천시가 오랜기간 이어져 내려왔기 때문도 있죠. 서양이나 일본은 1500년도까지 저들끼리 엄청 치고박아서 무관의 지위가 상당히 높고 그에따라 자연히 갑옷도 화려했지만, 고려와 조선은 건국 이후 불교와 유교의 도리아래 살생을 금하거나 청빈을 강요하고 안빈낙도를 중시하는 등 무관에 불리한 쪽으로 나라 전체가 흘러갔습니다. 특히 조선은 고려가 무관의 반란에 의해 어떻게 망했는지 날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무관에 대한 의식이 안좋았죠.
삼국시대 에 나오는 갑옷들 다 귀족 장군들의 갑옷이에요.......일반 징집 농민 보병 들은 걍 몸통만 보호하는 갑옷들을 입는데 그게 조선시대때 까지 계속 이어졌습니다.그리고 시대가 발전하면서 조선시대 두정갑으로 전부 변환이 되었는데 두정갑이 특히 투사무기에 대한 방어력이 더 좋았습니다.그리고 유지 보수도 상당히 쉬웠구요.그래서 점차 두정갑으로 대체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나선파병때 러시아군에게서 신식 소총을 노획하긴 했는데 그당시 조선군에서 실험을 해보니까 좋긴 한데 그당시 신식 총이 화승총 형식이 아니라 부싯돌 부딪쳐서 격발시키는 거였는데 그당시 조선에서 부싯돌로 쓸만한 수석이 비쌌다고 합니다. 그리그 비오면 먹통되는건 화승총이나 머스킷이나 거기서 거기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군에 보급시키는 게 너무 비싸다는 이유로 빠꾸먹이고 이전의 화승총을 그대로 쓴겁니다.
@@이상민-f3s 근데 그당시에 비용문제로 빠꾸먹인거 자체는 나름 합리적인 이유였어요. 머스킷이 좀더 좋긴 한데 화승총에 비해 보급이 어렵고 대량생산이 힘들다는 소리인데 머스킷 300정 만들 돈으로 화승총 1000정 만들 수 있다면 화승총 1000정 쥐여주는게 화력이 더 좋거든요. 머스킷 빠꾸먹일 당시에는 북벌정책을 추진중인 상황이여서 국방정책에 어느정도 신경썼을 시기였습니다. 문제는 그 이후죠.
추가로 덧붙이자면, 예전에 서울 배봉산에서 국군 참호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땅을 파다보니 국군이 자리잡은 곳 바로 아래에 고구려군 보루가 있었다고 하네요. 과거 고구려군이 자리잡은 보루에서 천년도 지나 후손들이 다시 그곳에 참호를 세운 거죠. ㄷㄷ 배봉산 보루라고 치면 나옵니다
어차피 군사적 요충지는 과거나 지금이나 지형이 비슷하기에 거기서 가지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가만보면 과거 삼국시대때 요충지가 조선시대에도 요충지고 지금도 군부대 들어와있음
현재 육군사관학교가 있는 곳도 중랑천이랑 한강이 흐르는 요충지라 임진왜란때는 왜군을 무찔렀고 정묘호란때는 기병이 주둔한 곳이라죠 ㅎㅎ
고구려 개마무사 갑옷 진짜 멋있던데
저두요.제가 고구려에 미칠때
엄청좋아했어요.
ㅎㄷㄷ소장하고 싶다
난 개마무사 별로고 백제 미비부주랑 가야의 충각부주가 멋있음
@@GuNdAmWiThYoU 백제랑 가야가 워낙 미적 감각이 좋았으니. 고구려 갑옷이 포스는 더 좋음
대부분 고구려 개마무사만 찾는데 그거는 걍 간(지)알못이고 백제, 가야 갑옷이 진짜 정석임.
9:17 이부분에 고증이 조금 오류가 있는데 저 투구 양식은 '소찰주' 로 신라계열이고 오늘날 일본에 알려져있는 미비부주(차양투구)가 원래 백제 양식의 투구임.
걍 한국 사람들이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고구려, 신라투구 둘중 아무거나 대충 갖다박아 넣은거임.
바다와 인접하고 북부 인접지역과 정복전쟁을 벌이는 입장에서 견주어보면 절대로 저런 양식의 투구를 쓸리가 없음.
오늘날 일본 사무라이 갑옷이 4세기 친교맺고 전수받은 백제, 가야 찰갑의 개승작이라고나 할까..
고구려갑옷은 작은 철조각?판? 을 실로 여러겹 겹쳐입었기에 화살도 거희 대부분 튕겨내고 활동성도 좋았다고합니다. 그리고 추후 신라는 화려하게 고구려갑옷을 배끼고 백제도 배껴서 너나 나나 다쎴습니다. 참고로 당나라나 수나라,한나라의 갑옷은 대부분 옷에 투구와 가슴보호대만 얇은 철판으로 돼어있었고 고위장수들만 판갑을 입었습니다.
수나라, 당나라 같은 국가들은 대외 전쟁을 자주 벌였기 때문에 이동과 기동성을 고려해서 경갑을 입은걸로 알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때 궁도(국궁)을 배운적이 있었는데 활 시위에 화살걸고 엄지쪽에 착용한 깍지로 잡아서 당겨야되서 악력이랑 상체 힘에 하체로 지지해야되서 사실상 전신힘을 사용해야되는 힘몰빵 운동입니다. 초중고생때까지 육상선수였는데 그전에 운동하면서 멀리뛰기랑 200미터 선수로 활동하면서 기른 민첩함은 쏜 화살 다시 수거하러갈때 빼고는 쓸모가 없었습니다.
첫날 팔뚝에 멍들어야 국룰
과거 갑옷은 왕족이나 유력 호족들들만 주로 사용가능했었고 조선시대 갑옷은 나라예산으로 병사들까지 챙겨줘야하니 화려함이 사라지고 효율성과 가성비만 살아남아서 간지는 고대시대 갑옷이 와따입니다
가죽갑옷에 덥수룩한 수염.
캬..간지폭풍.
무장의 정도 차이일 뿐이지 고대에도 병사들은 갑주를 착용했다...뭔 개소리냐
첨주형 투구가 고려에서 중국으로 유행이 번진 경우죰
화려함 이러네...찰갑은 만들어서 엮어야하는 철편의 수가 수백~수천개이고 그만큼 생산도 오래걸리며 유지 보수도 까다로워서 생산단가가 높았던거임 의장용이나 왕실용이 아닌데 갑옷을 화려하게 만들 이유도 없고 그럴필요도 없는거임 그리고 화려함을 빼서 두정갑보급이 늘어난게 아니라 쓰는 철편수도 찰갑에 비해 훨씬적고,생산단가도 낮고 방어력도 월등하며 유지보수도 쉬워서 보급률이 늘어난거임
오히려 조선시대땐 갑옷을 병사 개인이 구비했어야함
맞아요 ㅋㅋㅋㅋ 검케는 오히려 덱스케고 활케가 오히려 힘케에요. 검술은 힘으로 하는게 아님.
정보) 마지막에 삼국시대 갑옷이 백제는 판갑(통으로 이어진 갑옷)에 투구의 높이가 좀 낮은 형태이지만 실제로 저런 유형의 갑옷은 삼국시대 초기 한반도 남부 일부에서만 사용했고, 중기 이후에는 삼국 모두 주력이 판갑이 아닌 찰갑(영상에 고구려 참조)과 몽고발형주구(투구 위쪽이 뾰족한 투구)로 대체되었다.
초기 신라나 가야와 같이 한반도 남부 일부지역에서만 판갑을 사용했고, 한반도 중부에 위치한 마한, 백제, 신라는 찰갑과 판갑을 혼용했다.
특히 고구려가 전부 찰갑을 사용했는데 고구려군이 주변 국가들을 개박살 내고 패권국으로 올라오면서 그 위력을 실감한 주변국가들이 찰갑을 도입하면서 판갑은 한반도에서 도태되었다. 즉, 고구려군이 남하하면서 찰갑을 대중화하였다.
특히 백제 투구로 나오는 해당 투구는 실제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는데 드라마 근초고왕에서 백제를 돋보이게 하려고 채택한 드라마적 연출이다.(물론 괜찮은 선택이었음.)
그리고 한민족 계통의 국가들의 갑옷은 주변국과는 다른 특징이 하나 있는데 하나같이 목을 보호하는 형태를 채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민족의 주류였던 예맥족(부여, 고구려, 고조선 등)이 말을 자주타다보니 낙마사고를 예방하려고 저런 형식을 채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설이 있다.
한민족 보시면 솔직히 인종유전자로 따지면 예맥족(북방계) 삼한인 마한 진한 변한(남방계) 섞여서 만들어진게 한민족인게 팩트인가싶기도 하고 뭐 나중엔 여진족 퉁구스계 중국 한족 일본 조몬인 몽골 선비족 이렇게도 섞여겟지만
이런 고급진 정보들은 어디서 구하시나요
@@ktollottjol1462 책 같은거에도 나오고 옛날에 선생님한테 물어봐서 알았음
@@박준섭-z4d 북방계 남방계 비율이 7:3에서 8:2 정도 된다고들 하죠. 한국은 예맥계, 한(韓)계 제외하고는 미미한데 그나마 유전자 풀을 많이 차지하는게 퉁구스족(만주족) 정도라고 하더군요
4:07 예전에 그 마블에서도 당기는힘찍어야하잖음ㅋㅋㅋㅋㅋ
깊은 뜻이었네
현-명
화살통 왠만하면 뒤에다 매지 않는다고 합니다.. 화살 빼기와 이동이 불편해서 허리춤에 매거나 아님 손에 한두발씩 잡아서 쓴다고 합니다.
뒤에 화살통이 있으면 남은 화살도 확인하기 힘들기도 하고 ㅎㅎ
진영 갖추고 싸울땐 등에 매고있던 화살통 바닥에 세워두고 쐈죠
등에 매는 건 왠만하면 보급병이겠네 그럼
@궁예 장인들은 활시위 당기는 손에 화살 5 6발씩 들고 쐈다고 하던데 ㄷㄷ
님이 말씀하신것 방법을 안쓴것은 아니지만 조선 궁병들 화살 패용한것들 자료보면 상당수가 등에 패용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환도 패용을 거꾸로 하는 이유도 활을 당길때 걸리지 말라고 하는것이구요. 만주족같이 궁기병을 운용한 여러 나라들 자료들 보면 등에 패용한곳도 많습니다. 어깨 넘어로 화살을 빼기보단 손을 등쪽으로 돌려서 활을 빼는 식으로 씁니다. 화살을 꼽아 등에 매다는 가죽이 있는데 상당히 단단하게 화살이 고정되있어서 마상에서도 화살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하네요.
현재 남아있는 국궁은 개량카본궁과 개량각궁입니다. 국궁은 엄지손가락에 끼우는 '깍지'라는것이 필수이며 깍지가 없으면 쏘기가 불가능합니다.
한국에도 서양의 링메일 형태의 갑옷이 있는데 고려시대에 주로 사용된 쇄자갑(서양처럼 머리까지는 안하고 몸통만)과 쇄자갑에 철판을 추가하여 방어력과 장식성을 추가한 경번갑이 있습니다(조선초~중기까지도 썼음) 이후에는 두정갑(못의머리 라는뜻)이 주로 썼고 다시 평화시기가 오면서 두석린(놋쇠비늘)갑-어린갑-비늘갑-용린갑(다 비슷한의미)가 나타나며 여러겹의 천을 두텁게 만든 면제 배갑과 한지를 여러겹붙이고 옻칠로 마감한 지갑등이 있습니다.
삼국시대에는 찰갑과 판갑이 혼용되어 사용되었으며 국가별로 주력갑옷이 약간 차이를 보입니다(이상 졸업한지 10년 넘은 역사고고학 전공자였습니다 개복어님 영상 잘보고 있어요~ 후다닥)
9:48
개복어는언제유바를외치는가 이제는 이름을 외워버렸다;;;
유바
제가 느끼는 최고로 멋지고 좋은갑옷은 원장수의 뱃살갑옷이 최고라생각합니다.
로스트 테크롤러지에 몇가지 더 있던데 중국 자금성 안에 있는 바닥 타일도 있고 흔히 블랙버드라고 불리는 검은색 초음속 정찰기도 여기에 분리되더군요
그거 DEX가 민첩으로 번역이되서 그런데 DnD에선 손놀림이나 손과 눈의 반응연계속도, 균형감 그런거라 명중치같은거 보정하는 느낌이야
힘으로만 활을 쏜다고 맞출 수는 없으니까
발게이 같은 게임보면 활 큰거 쓸수록 근력 제한도 있는데 명중치랑 데미지는 dex를 씀
5:00 형 60년대 맞긴 한데 "1860" 년대.....
ㅋㅋㅋㅋㅋㅋ
1960년대는 영국 자존심 바닥 찍고 있을때...... 이후로 영국은 포클랜드 전쟁 승전으로 반짝한 이후로 사실상 계속 내리막길...
우리가 아는 런던 스모그는 1952년에 일어난 일이어서 크게 틀린 말은 아닙니다.
드라마가 고증 다 망친 사례.....(는 제작비 압박도 있겠지만....)
다마스쿠스 무늬는 철을 겹치면서 단조를하며 나타는납니다.
밀덕이라 현대더 .....:
당연히 옛날 갑옷이 더 멋져야죠
코앞에서 싸우는데 갑옷이 멋져야 상대방 기죽이지
갑옷의 발전은 크게 효능->멋->성능순으로 바뀌엇다 보면됨. 최초의 갑옷은 추위와 자잘한 부상들을 막는 가죽옷이고 그것에 멋을 치장해서 쇳판들을 달고 다니기 시작하고. 쇳판이 움직임을 방해하고 무겁고 방어력에도 크게 도움이 안되서쇳조각을 여려겹붙이는 형태로 진화햇으며 현재는 총알을 막기위해서 개량되엇음.
왕겜처럼 드라마로 만들어서 저런 고대무구들 보고싶넹...
제대로 된 사료들만 남아 있었으면 우리도 기사,사무라이 그 이상 가는 멋과기술의 우리나라에 갑옷들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었는데 아쉽네요...
제일 중요한건 홍보를 개떡같이한거죠...
그런건 버려두고 김치만 오지게 홍보한 결과입니다....ㅠ
@@홍콩프리 이미 상당수 소실되엇고 복구하기엔 먹고살기 바빳죠
@@홍콩프리 개소리고 연구를 할래도 자료 자체가 많이 소실되서 고려이전역사들 같은 경우는 중국 자료를 이용해야 연구가능한 수준인게 큽니다. 뭔 홍보입니까...
확실히 옛 역사적 자료들이 보다 더 자세하게 많이 남아있었다면 좋았을텐데.. 개인적으로 황룡사 9층 목탑이 소실돼 지금 터만 남아있는게 아쉽네요
@지디랑생일만같음 아뇨 조선 이전 고려부터 사료 많지 않습니다 전부 중국이나 일본측 기록 교차비교해가며 연구해야하고요 조선을 제외하고는 거진 소실됬다고 봐야 맞습니다 국내 사학연구하시는 박사님들도 하나같이 하시는 말씀이신데 당최 사료가 많다는 주장은 어디서 들고오신것인지 궁금합니다 조선 기록만 많으면 그전 기록도 많은게 됩니까?
다마스커스 검은 접쇠 방식과 재료로 쓰인 인도에서 생산되던 구츠강을 재료로 썼던게 비결이었죠. 인도에서 캐던 구츠강이 더 이상 생산되지 않아서 다시 만들어 내는게 불가능할 뿐이죠.
다마스쿠스무늬 진짜 예쁜데....
그냥 강철 수십번 접쇄한 무늬임
아 그리고 조선후기 우리나라 조총수들 사격능력이 엄청 났다고 합니다. 청나라 요청에 파병을 몇번 했는데 그당시 일반적 조총 명중률을 훨씬 상회하는 능력을 지녀 전투력이 엄천 났다고 하네요 암튼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기질이 활을 쏘든 총을 쏘든 원거리서 멀쏴서 맞추는데 특화됀 민족
병인양요 신미양요때도 프랑스,미군들이 신기해 했다고... 박물관에서나 보이는 머스킷을 아직도 쓰고 있어서 그래서 조선은 가장 좋은 화승총을 가진 나라라고도 했다더군요(단 이때는 이미 구식중 구식이었지만ㅋㅋ)
그 오래된 사극 드라마에 나온 패딩갑옷 얘기하는줄ㅋㅋㅋㅋㅋㅋ
그거 안쪽에 전부 쇠판으로 되어 있어요
@@현수-y4b 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8/read/32552215
여기 첫 사진에 나오는 갑옷 말하는거에요 ㅋㅋㅋㅋㅋ
@@현수-y4b 님이 생각하는건 두정갑,
이분들이 말하는건 드라마만들때
추위때문에 진짜로 패딩입고 찍은거 말하는거임
과거의 갑주들이 현재의 군복과 비교했을때 더 멋져 보이는 이유는 전투의 방식 및 군의 사용 차이에 있는걸로 압니다. 현재 군의 전투는 전장 상관 없이 어디서든 전투를 하며 그 방식이 기습형태이기에 간단하고 가벼우며 이동에 용이하게 만듬에 비해 과거에는 대다수의 전장이 정해져 있었으며 현대의 총같은 중장거리가 아닌 창이나 검, 방패 같은 근거리 무장이 주를 이루었으며 중거리인 활이나 포 조차 사실상 시야 시야내에서 발사해야 맞을 정도로 현대에 비해 꽤나 근거리였습니다. 그렇기에 기동성보다는 방어에 더욱 치중하였고 칼날이 잘 들어오지 않도록 꽤나 두꺼운 천이나 강한 철을 갑주에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거기에 현대의 군에서도 의장대나 헌병같은 경우에는 일반적인 군복과는 다른 멋진 군복을 입는 것 처럼 당시의 군은 전투를 하는 직 이기도 했지만 사실상 의장 및 국력과시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고 또한 우리가 흔히 아는 고대갑주는 그 대다수가 장교나 지휘관이 사용하던 것이 많고 현대 한국처럼 국방의 의무 땜시 끌려가셨던 분들은 지금처럼 꽤나 수수(?)한 복장을 사용하셨다고 합니다.
민첩과 덱스가 1대1로 대응하지 않아서 그런것 같습니다.
제가 알기로 덱스는 반응이나 재주도 포괄하는 의미라서 투사무기의 명중률에 영향을 줘니까 활에 민첩계수가 달려 있는것 같네요.
유익한 영상이구만...
고구려 몽골, 당나라 상대로도 굽히지않았던 간지폭풍 군대인데 너무 아쉽 ㅠㅠ. 갑옷도 백제, 신라에 비해 몸가리는 부위 세부적으로 많았다던데...
초보자들이 손으로 검을 막는다는 습관을 알고 손쪽에 갑주를 둘러서 손이 잘리는 경우를 감소시켰죠
고구려는 북방기마민족이라 전투도 잘했죠 백제도 잘했도 근데 신라가 ㄹㅇ 약골이였음
팩트: 신라가 다 조진 나라들이다 나중에는 당나라도 전투 및 말 잘해서 이겼다.
멋내기에는 고려 경번갑이 제일 좋아보이는데
경번갑 위에 가죽을 얹어서 악세사리 느낌을 내던가[유동근]
www.etoday.co.kr/news/view/865723
아니면 비단이나 천에 무늬를 새겨서 두르던가[무신 김준]
www.headlinejeju.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0137
활을 다루는데 필요한 힘은 활의 장력에 비례하며, 평균적인 장력은 20.4~22.7kg이라고 합니다.
물론 45kg을 초과하는 전투활도 존재하지만, 이는 우리들이 아는 속사를 쓸 수 있는 활이 아니며, 숙련자가 아니면 당기기 힘들다고 합니다.
출처: ruclips.net/video/BEG-ly9tQGk/видео.html
몽골이나 타타르 및 중앙아시아 쪽에도 삼국시대 스타일 갑옷이랑 많이 비슷한 갑옷입고 다님ㅇㅇ
수은갑: 갑옷에 수은 발라놓으면 반짝반짝 이뻤다고함. 주로 근위병이 입었다고
우리나라 각궁은 진짜 그당시 최종병기가 맞음 활의 최종진화인 복합궁에 크기도 줄여서 휴대가 간편했고(그당시 청나라궁과 비교해서 크기가 엄청작음 최종병기활 영화화도 나오죠) 크기가 작다고 사거리가 짧았나 그것도 아님 서양 장궁과 함께 최대 사거리를 자랑함 거기에 편전(애기살이라고도하죠) 총이 일반화 돼기 이전에 이미 총신의 원리를 이용해 관통력을 극대화 시킨 화살을 만들어 낸거죠 대단함 우리 조상들
조선시대에 임란 이후 도입된 소형 머스킷인 조총은 점차 발전시켜서 나선정벌 이후 러시아제국군이 운용하던 '플린트락' (불을붙여서 쏘는게 아닌, 부싯돌의 마찰로 방아쇠만 당기면 나가는 머스킷총) 화승총까지 개발했으니...확실히 화력 덕후죠... 천보총과 같은 대구경 장거리 조총도 등장하는걸 보면 확실히 포수양성에 어느정도 힘을 기울인거같아요
폴린트락형식의 총은 나선정벌때 노획한 러시아군의 무기를 토대로 개발하려했지만,
실제로 도입하진 않았습니다
Hawaiian Surf 시비 거는 건 아닌데...나선정벌 당시 플린트락 머스킷을 몇 정 노획한 것은 맞지만, 청나라가 그 대부분을 가져가는 바람에 그 수가 적기도 했고, 플린트락 머스킷은 당시 조선의 수지타산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양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만 조선이 구식 머스킷, 즉 흔히들 생각하는 줄에다가 불을 붙여 총을 발사하는 매치락 머스킷을 동양에서 최고 수준으로 생산해낸 것은 사실이고, 이외에도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천보총 같은 수준 높은 화약무기를 생산해내는 강국이었던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매치락 머스킷으로 러시아 원정대의 플린트락 머스킷을 잡은 건 대단한 일화. 여윽시 전투민족이다~
@@서동하-k8d두분다 맞는 말씀입니다. 조선은 플린트락 머스킷까지 개발했지만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도입은 하지 않았죠. 제가 빠트린 부분을 추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홍콩프리 보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Hawaiian Surf 그러게요 생각해보니까 개발했다고 했지 양산했다고는 안하셨구나...역시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 한다.
9:40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보다도 군복이 더 멋진 법이다. ㅡ애설플래드ㅡ
예전에 두정갑 관련 영상 본적 있는데 방어도가 엄청 좋아서 소총도 못뚫는다고 했던거 같은데요 ㅋㅋㅋ 보이기는 멋 없어도 완전 고급기술이라고 들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겨울이 있어서 쇠가 살에 닿지않아서 따뜻하다는 기능성 까지
소총도 못뚫었으면..... 신미양요가 그 모양었을까요? 임진왜란에서는 조선군이 야전무쌍이었겠네요 ㅋㅋ
2:16 마다스쿠스검 오타 ㅋㅋㅋㅋㅋ
제일 화려한갑옷:신라갑옷
기마병들이 입으면 매우 좋을거 같은 갑옷:고(구)려 갑옷
일거같네요
역시 한반도에서는 두정갑이 최고지요. 서양 판금갑옷 다음 가는 방어력을 자랑하고 추위에도 최적화 된 갑옷이거든요.
활쟁이의 민첩함은 날랜 몸놀림을 연상케 하는거일듯
덱스가 최소뎀 힘이 최대뎀 을 상징하고 활쟁이는 민첩함 정확도 어질 같은 계념이니까 힘보다는 민첩함이 맞을듯
@@dri13829 전쟁상황에서의 병과를 말씀 하시는거고 그게 맞지만 게임에서의 스탯은 보통 영웅과 같은 특수이고 그것은 보통 서양권 판타지 그중 엘프가 즐겨 사용하는 활을 모티브로 제작 되었기에 기본적으로 민첩 스텟을 준다는 말이 었습니다.
이런거 좋다
다마스커스검이 검날이 쪼개져도 날카로움을 유지해서 계속 싸울수있었던건데 현재 만드는 칼이랑은 비교도 못함 현재 만드는 칼이 더 강하고 날카롭지
그 옛날 다마스쿠스 검보다 동네 철공소에서 강철판 잘라다가 그라인더로 날 세워서 만든 검이 더 튼튼할 수준이라서 ㅋㅋ
다마쿠스 지역 특산물인 철을 이제는 구하지 못해서 복원을 못 한다죠 아마...
@@gkdtjr81 인도의 우츠지역임.
여름에 저런 갑옷입고 돌아다녔다가는 쪄죽겠다. 저는 고구려 목깃이 뽀인트를 살려서 너무 멋짐
과거의 갑옷이 멋있을수 밖에 없는게
일단 주로 전투는 다 초근접전....바로 눈앞에서 갈휘두르고 창찌르고 도끼찍고 싸우니 당연히 방어력이 병사의 생사에 매우 중요했고 방어력을 올리려면 갑옷이 무거워야 했음
갑옷이 무거운 이유는 막아야 할 부위가 한두군데가 아니다보니 여기 덧대고 저기 덧대니 무겁고 멋스러운거...ㅋㅋㅋㅋ
복어형 유튜브가 대항해시대 하면서 보기딱이야 고마워
와 목소리에 빠져듭니다
9:30 장식성이 많은 갑옷은 돈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위와 재력을 나타내기 위해서일 뿐이지, 신라의 외교상황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비슷한 예로 중세 유럽이나 일본을 들 수 있겠네요. 두 경우 모두 주변에 자신의 무위를 보여 명성을 높이기 위해 눈에 띄여야 했고, 그 방법 중 하나가 갑옷이었죠. (물론 실력도 있어야 했지만요)
반대로 조선, 명, 근세 유럽 등을 보면 갑옷의 모양은 병과에 따라 달라지지, 개개인이 큰 편차를 보이지 않습니다. 조선이나 명의 예시는 알 테니 스킵하고, 근세 유럽의 예시를 의아하게 생각하실 까 싶어 첨언하자면, 19세기 유럽의 흉갑기병들은 다 비슷한 흉갑에 투구를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죠. 그 시대쯤 되면 갑옷을 입는 병과는 흉갑기병 뿐이긴 했지만요.
무엇보다도 신라의 갑옷이 저렇게 멋지게 뽑힌 이유로 외교 하나만을 드는것이 틀린 이유는
첫째로, 신라는 전쟁을 피하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기회를 포착하자마자 백제 성왕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한강유역과 철령 이북지역을 점령해버렸기도 하고, 백제 의자왕에게 성 40개가 털려가는 와중에도 끝까지 싸우고자 고구려를 찾아가고 당나라를 찾아가서, 결국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죠. 신라가 외교전을 많이 벌이는것이 눈에 띄는 이유는, 단순히 삼국중에 가장 약체였기 때문입니다. 중앙집권도 늦었고, 지방호족 견제도 해야하고, 그 와중에 백제는 옆에서 계속 털어먹으려 오고, 고구려는 방관하다가 이득만 주워먹으려는 상황에서 신라가 믿을 수 있는것은 경주 주변의 중앙군과 외세 뿐이었겠죠. (상구 주변에서 병사를 징발했더니, 전투중에 그 부대가 갑자기 깃발 방향을 바꾸어서 신라를 공격해버리면 골때리잖아요?) 그러니까 다른나라에 비해 외교에 신경을 더 많이 쓴 것이 기록에 남았을 뿐이지, 전쟁을 피하고 외교를 선택한 것은 절대 아니란 말이죠.
둘째로, 그래도 어린애는 전쟁터 안보내던 고구려나 백제와는 다르게, 신라는 화랑과 낭도라는 조직까지 만들어서 전쟁터에 보내는 호전성 강한 나라였거든요. 그런 조직에 보내는 게 영광이라 생각하던 나라이기도 했고요. 황산벌에서 화랑 관창도 계백에 의해 돌려보내졌을 때 아버지 김품일에게 욕지거리 얻어듣고, 군말없이 백제 진영으로 홀로 쳐들어갔잖습니까. 김품일도 관창도 진골로, 진골은 왕위 계승권이 없는 왕족이죠. 왕족이 전쟁터에 지휘봉 대신 칼 들고 직접 뛰어드는 곳이 신라였습니다. 이런 나라를 외교나 하려고 테이블에 앉아서 삐까뻔쩍한 갑옷을 입는다뇨? 애당초 외교할 때나 궁에 입궁할 때, 무장해제를 하는 것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법에 맞습니다. 삼국지의 조조가 구석(9가지 특권)을 받는것이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를 생각해봅시다. 그 아홉 특권 중 하나가 황제 옆에서 칼을 찰 수 있는 것이었거든요.
+ 신라가 최약체인데다 중앙집권이 늦었음에도 살아남은것은, 산맥으로 인해 외부에서 군대가 대규모로 넘어올 만한 길이 제대로 없기에, 신라 입장에선 병력의 기동과 집중으로써 외습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죠. 게다가 상대 입장에선 방어거점이 있는 그 산을 넘어오더라도, 또 다른 방어거점이 나오기도 했고. 위성지도로 보면 신라 땅이었던 현재의 경상도와 강원도는, 딱 봐도 우리나라에서 산이 가장 많은 지역입니다...
정 반대의 경우가 백제인데, 660년엔 탄현과 백강이 뚫리니 백제에겐 그럴듯한 방어거점이 없게 되었습니다. 최후의 보루인 사비성 뿐이었죠. 그래서 당군 상대로는 사비성에서 농성하고, 신라 상대로 황산벌에서 회전을 치르려고 했겠죠. 아마 황산벌에서 신라에게 승리했으면 그 병력으로 당군을 칠 생각이었을 겁니다. 이미 다른 선택지는 항복이나 지방의 군사를 기다리는 것 밖에 남지 않았으니까요. 그나마도 황산벌에서 패배한 이상 사비성의 함락은 지방군 결집 이전에 끝날 일인게 되어버리니, 그대로 항복한 것이죠. 쉽게 말하자면, 방어거점은 대신들간의 의견 차이로 이미 다 내어 준 다음에, 할 수 있는 것으로 남은 것이 '적 분산 후 각개격파' 뿐이라, 사비성에서 5천 병사를 뽑아서 황산벌에서 신라군 5만명을 막아라 한 거죠. 그러니 5천 결사대란 것이고. 그게 그나마 승리할 방법 중엔 가장 확률이 높은 방법이었으니까. 이런 식으로, 이미 한성백제가 고구려 장수왕에 의해 백제 개로왕 때 한번 망했던것도, 백제의 지형탓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고구려도 그대로 점령을 굳히는 것은 본인들의 국력 상 무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개로왕만 참수하고, 먹고 체하지 않을 만큼만 땅을 먹고 돌아갔겠지요. 한강 이북까지 고구려가 확장한 이유가 이것이라 생각하네요. 한강은 방어거점으로 쓸 수 있으니까요. 현대전에서도 강은 거대한 천연 장애물이거든요.
++ 한반도 고대의 판갑옷은 통짜가 아닙니다. 리벳(두정갑에서도 나온 정)이나 끈으로 단단히 고정한 철판이죠. 모양에 따라 종장판갑, 횡장판갑, 삼각판갑 등등 여러가지 있는데 중요하진 않으니 넘어가고... 유연성은 떨어지지만 같은 조건에선 통짜 판갑(풀플레이트) 다음으로 튼튼합니다. 그래서 주로 흉갑으로만 사용하고, 나머지 부위는 찰갑(끈으로 철판을 엮은 갑옷)으로 둘렀죠.
고구려는 전투민족이니까 움직이기 편하고 치장은 줄였던것 같고 백제는 사무라이랑 비슷해보이는 판금? 느낌이고 신라는 유럽기사같은 느낌임
정조 과금 좀 했었네 조선시대때
과거에는 전쟁이 빈번했고 전투민족이였는데 점점 내려오면서 전쟁에서의 전투보다는 내부에서 편가르고 주둥이로 싸우기 시작하면서 부터 갑옷이 점점 퇴보한게 아닐까요?ㅋㅋㅋ
갑옷과 현대식 군복은 총기의 유무에 달렷습니다.
0:14화통?
군복 디자인은 한 나라의 국력을 나타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조선은 유교를 신봉하고 중국의 제후국을 자처한 나라라 천자국이라 자처한 고구려 백제 신라의 갑옷들보다는 실용성에 더 치중한듯합니다. 유럽에서도 천년을 이어온 국가는 로마제국이 유일합니다.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천년이상 혹은 천년 가까이 국가를 유지한 국가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뿐입니다. 그만큼 강성했고 자부심이 있었던 국가들이었겠죠.
옛날에 활당기는 거 오래한 사람들은 등? 어깨?가 안으로 ( 이케 굽는다고 하더라고요 ㄷㄷ
6:50 형.. 임오군란..
우리나라 사극에서의 허접한 복식과 달리 실제로는 우리 고대 국가들 군복이나 갑옷 등 복식이 화려하고 멋진게 많은데
아쉽게도 제작비때문에 그거 전부 구현해서 사극을 찍을 수가 없어서 죄다 허접해보이는 복식으로 대충 간추려서 찍거나
갑옷만 해도 출처도 알수없는 판타지갑옷에 중국갑옷 일본갑옷 대충 있어보이는거 섞어서 엉망진창으로 찍어대는 바람에 그게 진짜인줄 아는 사람이 많아 아쉽습니다.
외려 일본사극에서 우리나라 갑옷등의 복식 고증이 확실한 경우가 있었을 정도니...
그나마 넷플릭스의 킹덤 정도가 나름 빠방한 제작비로 국내 사극들보다 복식구현의 정도가 낫다고 알고 있습니다.
갑주는 생명을 지키기 위한 것이니 더욱 신경써서 만들다 보니 기술력과 재료, 잔손이 많이 가죠. 기술과 물자, 인력의 집약체 중 하나니 갑주를 화려하게 한다는 건 그만큼 그 국가의 잠재적인 실력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고대일수록 대체로 왕권이 미약하니 각지의 토호들에게 왕이 외관상이라도 멋있어보여야 하지 않았을까요? 명색이 권력자거나 지휘자라면 뭔가 상징성이 있어보이는 장식을 해야 병사들한테 위엄이 서죠. 귀족과 평민이 똑같이 입으면 위엄이 설 수 없죠.
지역별 부족별로 서로 자기들끼리 더 돋보이려는 과시 목적으로 화려한 갑주를 썼을 거라고 봅니다. 눈에 띠어야 어느 부족, 어느 지역 가문이 전장에서 분전하며 활약해야 누가 공을 세우는지 확실히 알릴 수 있어서 나중에 상찬받고 명성을 드높일 수 있죠.
하급장교들 입장에서는 명령을 받을 때도 수월하고, 왕을 지킬 때나 왕이 오는지 가는지도 확실히 알아야 군사로 배알할 수 있으니 갑주가 화려해야 할 겁니다.
보통 유물로 남은 것들은 대체로 권력자가 사용했거나 부장품으로 묻은 갑주일 경우가 많으니 권력자의 것이라서 화려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평민 병사가 입을 것까지 화려하게 치장할 필요는 없죠.
다마스쿠스강은 로스트 테크놀러지가 아닙니다. 십자군 전쟁 당시 유럽에도 전파되었고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우리나라 옛 갑옷 특이 목보호대 하고 투구의 뿔 입니다 이건 저희 나라의 큰 특징이라고 생각하세요 장군마다 뿔의 외형이 달라 이로 왜구들이 식별했다고도 합니다 이게 고구려가 처음 쓰기시작했는데 남하하면서 고구려의 이러한 갑옷의 위력을 보고 가야 신라 백제가 영향을 받아서 죄다 그리 만들었어요 거기에서 각국의 특징에 맞게 또 변형이 되서 외형이 조금씩 다른겁니다 저는 수수하면서 아름다운 백제갑이이 멋지다고 느끼지만 화려함은 외교가 많았던 신라가 제일이고 고구려는 갑옷의 효율성에 중점을 두었다고 봅니다
여기서 추가하자면 삼국시대에는 황칠나무로 추출한 염료로 갑옷에 발라 황금처럼 빛났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시대에는 수은을 입혀 마치 갑옷이 은처럼 반짝 거렸다고 한다
삼국시대에 비해 조선의 갑옷이 후달려보이는 이유는 저의 짧은 생각으론
조선은 초기이후론 붓쟁이 문관예우가 있었고
훈구파가 조선초에 다 쓸려나간 부분도 있고
삼국시대에는 틈만나면 전쟁에
동맹국도 수시로 바뀌고 주위나라들이 사라지고 새로생기는 일도 비일비재하니
늘 전쟁을 대비해야되니 발전했다고봄
2:13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투명 드래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개인적으로 잉카의 황금 갑옷이 궁금하다 스페인 애들이 깽판치니까 대응하려고 황금으로 갑옷 만들었다고 하던데 ㅋㅋ (황금 고블린 느낌일듯?)
과거 갑옷이 더 멋있는건 고려 통일 이후 평화가 아주 오래도록 지속되면서 무관천시가 오랜기간 이어져 내려왔기 때문도 있죠. 서양이나 일본은 1500년도까지 저들끼리 엄청 치고박아서 무관의 지위가 상당히 높고 그에따라 자연히 갑옷도 화려했지만, 고려와 조선은 건국 이후 불교와 유교의 도리아래 살생을 금하거나 청빈을 강요하고 안빈낙도를 중시하는 등 무관에 불리한 쪽으로 나라 전체가 흘러갔습니다. 특히 조선은 고려가 무관의 반란에 의해 어떻게 망했는지 날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무관에 대한 의식이 안좋았죠.
역사쌤이었나? 학교다닐때 쌤이 저 에밀래 종에 거는 부분에 긴 봉이 있는데 그게 너무 오래되서 교체를 하는데 아무리 다른걸로 교체할려고 해도 휘어서 결국엔 원래 있던 종이 만들어질때 사용한 봉을 계속 사용한다는 말이 있던데 진짠가..?
네 포스코에서 몇번을 시도했는데 다 휘어버리는 바람에 기존것과 부분결합하였다고 합니다
@@TV-pp9oe 와.. 이쯤되면 그때의 기술을 얼마나 대단한건지..
첫번째는 백린탄 비슷한거 같음 백린탄은 공기가 차단되지 않는한 물로도 안꺼지는뎅
황룡사 9층 목탑 짓는 법
고려 청자 만드는 법
궁수에 민첩 박은 거는 판타지에서 엘프 궁수가 민첩 하다고 해서 그렇게 했을 꺼라 추측합니다
전투용활은 엄청 나다고 하더라고요
형 8:16 여기랑 8:55 여기 사진 똑같아 편집을 잘못한것 같어
삼국시대 에 나오는 갑옷들 다 귀족 장군들의 갑옷이에요.......일반 징집 농민 보병 들은 걍 몸통만 보호하는 갑옷들을 입는데 그게 조선시대때 까지 계속 이어졌습니다.그리고 시대가 발전하면서 조선시대 두정갑으로 전부 변환이 되었는데 두정갑이 특히 투사무기에 대한 방어력이 더 좋았습니다.그리고 유지 보수도 상당히 쉬웠구요.그래서 점차 두정갑으로 대체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과거가 더 멋있는 건 당연하죠. 현대로 치면 전투복이자나요. 크으...전투복
국내 남아있는 활제작법은 연습용활이라 장력이 약함.
카페에서 보니까 우리나라에 서양식 갑옷이 없는 이유가 이미 화력전에 집중된 전쟁이 많아서 라던데
열병기사용이 빠르기도했고 중갑기병이 빠르게 쇠하고 궁기술이 상당한것도 이유가있습니다. 중간부터 발전이 멈춰서 문제였지요ㅋㅋㅋ
애초에 동양인데 서양식갑옷있는게 이상한데?
천하에 중국도 서양식갑옷 안썼음
쇠는 산화하기 때문에 관리하기가 어려운게 있음 그래서 조선들어서 두정갑이 대세가 된거임
개복어 형님 혹시 한국의갑옷 관련 자료 필요하시면 연락주세요 ^^
선덕대왕신종같은경우는 연구원들이 종의 시료를 채취해서 성분검사를 해본결과 인간의 몸에 들어있는 구성성분인 인이 검출이 되지않아 그냥 설화일 뿐이라는게 학계의 정설
국군 사관 정복 두정갑스타일로 바꾸자ㅋㅋ
관리하기가...ㅋㅋㅋㅋㅋ
역시 원시고대템....
근데 우리나라 군사들 복장같은거는 잘 모르지 않나 외국은 그림으로 그려져있는데 우리나라는 그런게 있나...?
고려까진 사실 기록은커녕 그림도 거의 없는데, 고구려는 그나마 천만다행히 벽화로 잘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군대 고증할 때 조선 다음으로 고구려를 그당시와 비슷하게 재현할 수 있습니다.
자료가 없어서 고구려보다 500년 뒤 고려군이 고증하기 더 힘듭니다.
갑옷 고증 잘하니깐 멋있구만 왜 드라마에선 포졸복이나 입혀두는건지..
갑옷은 그래서 서양의 풀 플레이트가 멋있음
보이기엔 멋있지 입으면 오우
아 부천 활박물관
그래도 두정갑이 효율이 더 좋으니 두정갑으로 바뀐거겠지.
요즘 군복 저래나오면 욕 오질라게 먹기 때문
나는 우리나라갑옷이 제일 멋있는거 같음
뭔가 서양갑옷에서는 안나올 포스가 나옴
한마디로 느낌있음
로스트만보고 로스트아크생각남
워크 씹ㅋㅋㅋㅋ맞긴맞지 예전 블자는 지금 블자로는 복원 못하지ㅋㅋㅋㅋ
지금 블자는 PC의 앞잡이 !
옛날 갑옷이 더 멋있는 이유.
게임에서 고대의 OOO 이 더 뽀대나고 간지난 거라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음.
옹씨 있는거 봤는데
백제 갑옷 싸울아비..
고구려 보면 강철검 생각만 난다 그 시커먼 갑옷하고
형 우리나라 일본이 들어오기전에 한국에 조총이 널렸음. 너무많아서 중국이나 일본에 수출할정도로 많았고 기록에따르면 대장간들마나 총이 너무많아서 상소문이 올라갈정도 많았음.
문젠 서양은 후장식 소총쓸때도 우린 머스킷처런 전장식이였다는게 흠이지만
나선파병때 러시아군에게서 신식 소총을 노획하긴 했는데 그당시 조선군에서 실험을 해보니까 좋긴 한데 그당시 신식 총이 화승총 형식이 아니라 부싯돌 부딪쳐서 격발시키는 거였는데 그당시 조선에서 부싯돌로 쓸만한 수석이 비쌌다고 합니다. 그리그 비오면 먹통되는건 화승총이나 머스킷이나 거기서 거기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군에 보급시키는 게 너무 비싸다는 이유로 빠꾸먹이고 이전의 화승총을 그대로 쓴겁니다.
@@hsh6036 21세기 과학시대인 지금도 장비의 중요성을 모르는 포방부인데 조선시대때는 더했죠. 그놈의 공자왈 맹자왈 그 왈왈들 댕댕이들모임이라서 현실은 못보고 돈만들어가면 정신력이 문제라고 돈은 안주고 지들 배속부터 채우기 바쁘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이상민-f3s 근데 그당시에 비용문제로 빠꾸먹인거 자체는 나름 합리적인 이유였어요. 머스킷이 좀더 좋긴 한데 화승총에 비해 보급이 어렵고 대량생산이 힘들다는 소리인데 머스킷 300정 만들 돈으로 화승총 1000정 만들 수 있다면 화승총 1000정 쥐여주는게 화력이 더 좋거든요. 머스킷 빠꾸먹일 당시에는 북벌정책을 추진중인 상황이여서 국방정책에 어느정도 신경썼을 시기였습니다. 문제는 그 이후죠.
@@닥치통조림 제가 말하는건 일제시대입니다
갑옷의 발전이 멈추게 된 이유가 총의 발달 때문이라고 알고있음
갑옷을 암무리 딴딴하게 만들어도 총으로 쏴버리면 사람이 죽기 때문
ㅇㅇ 그유럽의 플레이트아머는 초기의 총은 20m내에서만 갑옷을 뚫을수있었음
그 플레이트아머 뚫을려고 만든게 총임
@@홍콩프리 뭔말인지 이해가...
ruclips.net/video/dQfcRLT18IY/видео.html
이것처럼 초기의 총은 갑옷 못뚫었다고
그것도그런데 전술변화가 영향이 더컷죠
갑옷이야 총발전하기전에도 크로스보우같은거에 뚫리기도했고 둔기류로 처박아버리기도했으니깐요...
백년전쟁때 중갑기병과 장궁병구도가 유명한것처럼요ㅋㅋ
백제갑옷이랑 일본의 사무라이랑 비슷한 부분이 많네요.
일본이 백제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무라이 갑옷과 백제 근초고왕 시기 갑옷을 나란히 두고 보면 유사한 게 많이 보이죠
로아 아바타로 저거 나오면 어떨까?
조선 임란시대에 일반 병졸들은 자신의 군복조차 사비로 맞춰 입어야 했는데 모두 저런 갑옷을 입는 것이 표준이였다는 건 좀 이상합니다. 아마도 있는 집 사람들만 저렇게 입고 싸울 수 있었겠죠 ?
임란 때 조선이 휘청거리긴 했지만 임란 전에도 병졸들은 갑옷을 입고 있어고 임란 후에도 나라에서 지원 통해 대부분 갑옷을 입게 됩니다.
그리고 일본측에 있던 포르투갈 선교사는 조선의 군대를 보고 모두 검은 갑옷으로 무장했다고 기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