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시대의 명검 월왕구천검에 얽힌 고사와 전설 (중국사산책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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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21 дек 2024

Комментарии • 6

  • @뿌라비다-p8b
    @뿌라비다-p8b 4 месяца назад

    내용이 너무 좋아 다음편이 기다려 집니다

  • @해송-o6p
    @해송-o6p 4 месяца назад

    재미있는 이야기가 끝이 없네요.

  • @화타-m2i
    @화타-m2i 3 месяца назад +1

    고증과 현지답사 등 공을 많이 들인 귀한 영상을 올려주셔서 감사한 마음으로 시청하였습니다 👏👏👏👍👍👍
    역사적 배경을 추적하여 팩트 체크까지 해보자면, 간장과 막야 등이 살았을 당시 초나라 왕이라면 초평왕, 초소왕, 초혜왕 시기라서 이 설화 내용을 팩트체크 입장에선 102% dog "9라"로 보이네요^^
    다만, 당시로선 명검을 만드는 장인은 요즘의 핵무기 기술자(과학자 포함)에 버금 가는 초고급 인재였을 터라 인재 스타웃도 치열했을 것이고 적국의 명장 인재는 암살 1순위였을 터라 쫒고 죽이는 첩보전도 치열했을 거라 추정됩니다^^
    명검이나 유명한 종을 만드는 과정에서 예로 에밀레종 등에 얽힌 인신공양 설화가 숱하지만 최근 에밀레종(성덕대왕신종)에 관하여 과학적 조사를 한 결과 '인' 성분이 전혀 검출되지도 않았고, 만약 종 만드는 과정에서 인신공양을 했다면 '종을 칠 때 쉽게 깨지기에' 있을 수 없는 가짜뉴스로 판명났다고 kbs 역사스페셜에 방영된 바도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서기 780년 혜공왕이 폐위되어 죽임을 당했을 때 모후인 만월부인이 어린 아들 혜공왕의 안위와 치세를 위해 당시로선 거의 국력을 다 기울이다시피 해서 속칭 에밀레종이란 전후후무한 범종을 만들어 부처님에 대한 치성을 들이느라 국가경제가 파탄나고 민생이 파탄나서 결국 내란이 일어나 혜공왕이 피살되어 도로아미타불 된 경험을 빗대 '아들을 종 만드는데 던져넣었다'는 풍자와 조롱이었는데 후대에 와서 그런 조롱성 내용은 빠지고 우리가 흔히 아는 에밀레종 설화로 남았으리라 추정됩니다.
    불교가 이 땅에서 신라와 고려까지 천년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군림해왔었기에 지난 그 천년간 부정적 이미지를 줄 여지가 있는 내용 부분은 숨기고 부처님에 대한 신앙심을 고취시키는 부분 내용은 침소봉대해서 전승되어왔을 거로 추정됩니다 ^😂^
    참고로 혜공왕의 모후인 만월부인은 김춘추 태종무열왕계이고, 만월부인에 앞서 왕후는 '국어 책에도 등장하는 헌화가의 주인공으로 당시 신라 최고 미인이었다는 수로부인'의 딸이었고 헌화가의 내용이 김수로왕을 맞을 때 불렀다는 구지가와 일맥상통하기에 수로부인은 김유신 계열로 추정되기에 혜공왕이 즉위한 전후쯤엔 예전엔 찰떡궁합이었던 양김씨 계열이 '분열'되었던 것으로 추정되옵고, 불교계도 기존에 큰 종을 만들어 시주해서 복을 빌던 식의 '기복신앙 계열'과 새로운 선불교(9산선문)로 나뉘어 마치 유럽에서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 무렵 만큼 이전투구가 심해 에밀레종 조성을 계기로 불교계도 양분되고 동시에 정치권도 김춘추 계열이 패퇴하고 도매금으로 김유신 계열도 사실상 몰락했던 듯 추정됩니다. 대신 내물왕 계열이 부상하고 기존의 김춘추. 김유신 계열도 이합집산 되면서 '헤쳐모여' 했던 듯 추정됩니다. 그런 복잡다단한 역사적 흔적을 설화 형식으로 표현해서 전승 되어오는 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에밀레종 설화'로 추정됩니다.
    간장&막야 등 명검 설화도 이런 유형의 꾸며낸 설화일 확률이 102%로 추정되옵고, 동시에 "다이아몬드 스토리텔링 마케팅 기법의 춘추전국시대판"으로도 추정됩니다.
    "다이아몬드 스토리텔링 마케팅 기법"에 관해선 추가 댓글로 올려보것습니다. 하버드대 mba과정 교과서에 수록되었다 더군요. 동아미디어 자료를 참고 작성해 봤구요^🤗^

    • @화타-m2i
      @화타-m2i 3 месяца назад

      명검 신화와 브랜드 스토리텔링 마케팅 기법
      '간장&막야' 명검 이야기는, 팩트 체크상 높게 쳐줘도 0. 03% 이하로 추정됩니다.
      다만 브랜드스토리텔링 마케팅 기법으로 보면 다이아몬드 스토리텔링 마케팅 성공 사례와 비견될 정도로 대성공을 거둔 스토리텔링 마케팅으로 봐도 손색이 없어 보입니다.
      조선미디어에 실린 아래 기사를 참고로 소개합니다. "하버드대 MBA과정 교과서에 실린 내용"이란 이야기도 30여년전에 읽은 적이 있었는데, 맹상군 이야기를 듣다보니 다시 생각나 소개해 봅니다 ^💞^
      기사~퍼오기~
      금보다 인기 없는 '비싸기만 한' 다이아몬드가 전세계 결혼식의 필수품이 된 비결
      '오스카의 여인' 조안 크로포드가 원했던 건 '영원한 아름다움'이 아닌 '영원한 사랑'
      다이아몬드는 단순한 보석에서 벗어나 ‘영원한 사랑’을 상징하는 징표가 됐다.
      다이아몬드는 사실상 흑연과 분자 구성에서 다를 바 없는, 그저 희소성 높은 광물일 뿐이다. 하지만 한 다이아몬드 사업가의 이야기가 널리 퍼지면서 다이아몬드가 영원한 사랑의 상징이 되었고, 이로써 다이아몬드의 가치가 더욱 커졌다. ‘그가 당신을 영원히 사랑한다면, 그는 다이아몬드를 선물할 것이다.’
      ◆ 반짝이는 돌멩이가 ‘영원한 사랑’의 징표가 된 이유
      세상 모든 여성들은 이 말에 매혹되었다. 다이아몬드가 사치품에서 필수적인 보석으로 빠르게 변모할 수 있던 이유는 여성이 언제나 사랑을 필요로 하고, 사랑은 삶에서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공식이 계속되는 한 다이아몬드 사업가의 돈줄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
      드비어스(DE BEERS)의 슬로건인 ‘영원한 사랑’은 이 브랜드가 가진 이야기 자본의 핵심이 되었다. 모든 것이 변해도 다이아몬드는 변하지 않는다면서, ‘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The diamond is forever).’라고 말한다.
      다이아몬드는 ‘금강석’이란 광물질로 2800년 전 인도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다이아몬드의 단단함에 놀라워하며 하늘에서 내린 선물이라 생각해 악귀와 재난을 막는 데 사용했다. 그리고 중세 시대에는 지위와 권력을 상징하여 황실의 귀족이나 성직자만 지닐 수 있었다.
      1869년, 남아프리카의 한 농장에서 원주민 소년이 눈부시고 큰 다이아몬드를 발견하면서부터 한바탕 다이아몬드 캐기 열풍이 불었다. 계속해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었고, 순식간에 다이아몬드는 귀부인들 사이에 부를 과시하는 값비싼 장신구가 되었다. 한 영국인이 1859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세운 드비어스 광산 회사는 세계에서 제일 큰 다이아몬드 원석 공급 업체가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전 세계 80% 이상의 다이아몬드 원석 채굴과 판매를 독점했다.
      경제적 성장과 함께 서구 사회는 순식간에 화려함을 추구했고, 다이아몬드의 판매량도 안정적으로 상승했다. 당시 미국의 후버(Herbert Hoover) 대통령 역시 환희에 넘쳐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빈곤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제 빈민굴은 미국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 1929년 뉴욕 증시 폭락과 함께 파산 위기에 몰린 드비어스
      그러나 드비어스가 결정적인 한방을 준비하고 있을 때 서구 사회에 경제적 암흑기가 찾아왔다. 1929년 10월 24일, 뉴욕 증시가 폭락한 것이다. 하룻밤 사이에 열 한 명의 은행가가 자살했다. 경제 수준은 순식간에 16년 이상 퇴보했으며, 사람들의 통장 잔고는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드비어스도 대공황의 재난을 피하지 못했다.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 드비어스의 회장인 어니스트 오펜하이머(Ernest Oppen-Himer)는 상품의 90%를 처분하기로 결정하고, 다이아몬드 무역회사 설립에 착수함과 동시에 다이아몬드 브랜드를 재정비했다. 새롭게 단장한 모습으로 사람들의 다이아몬드 구매 욕구를 자극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당시 드비어스는 샤넬(Chanel)과 ‘패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새 다이아몬드 상품을 개발하고, 정교하고 아름다운 디자인의 주얼리를 대량으로 출시했다. 하지만 다이아몬드는 고가인 데다 시장이 매우 좁았다. 게다가 경제 대공황 상태에서 부의 과시는 더 이상 눈길을 끌지 못했다. 결국 ‘패션 프로젝트’는 실패로 끝났다. 드비어스 임원진의 의견도 제각각이었다. 심지어 일부는 다이아몬드 시대가 이미 한물 지났으니 사업을 접고, 지금이라도 수요가 어느 정도 있는 골드 주얼리 사업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오펜하이머 회장은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결정을 미루기 위해 일단 쌓여 있는 다이아몬드 주얼리를 처분하기로 했다. 이에 그의 아들 해리 오펜하이머(Harry Oppen-Himer)는 할리우드와 손을 잡고 드비어스의 주얼리 제품을 아카데미 시상식에 협찬하기로 했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화려한 시상식에 협찬하여 쌓여 있는 재고를 줄이겠다는 것은 매우 기발한 생각이었다. 해리의 또 다른 속셈은 그 광고 효과로 대중에게 다이아몬드 주얼리를 각인시켜 인지도를 높이고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 여배우의 푸념에서 ‘영원한 사랑’이라는 세계적인 카피를 찾다
      1945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배우는 영화 ‘밀드레드 피어스(Mildred Pierce)’의 조안 크로포드(Joan Crawford)라는 미녀 배우였다. 해리는 고심해서 고른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오스카의 여인 조안 크로포드에게 전달했다. 이 매력적인 배우는 24캐럿 다이아몬드가 박힌 목걸이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녀는 감탄하며 말했다.
      "정말 아름다워요! 무엇으로 만든 거죠?" 해리가 대답했다.
      "우리 회사의 24캐럿 다이아몬드 목걸이입니다." 조안이 다시 물었다.
      "이 보석에 특별한 의미가 있나요?" 해리는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의 아름다움은 다이아몬드처럼 영원할 것입니다."
      해리는 조안이 자신의 설명을 듣고 기뻐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스카의 여인은 침울해하며 말했다. “다이아몬드같이 영원한 사랑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실 조안 크로포드는 불행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열여섯 살에 이미 아버지가 세 명이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결혼생활도 평탄치 않았다. 더글라스 페어뱅크스 주니어(Duglas Fairbanks Jr.), 프랑수아 톤(Francoise Tone)과 차례로 이혼했다. 그녀는 끊임없이 영원한 사랑을 갈망했지만 그것은 얻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래서 ‘다이아몬드처럼 변치 않는 사랑을 하고 싶다.’는 소망을 말한 것이었다. 해리는 눈부신 스타가 무심코 드러낸 감정에서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찾아냈다. 바로 ‘영원한 사랑’이었다.
      드비어스는 이런 배경 속에서 바로 ‘영원한 사랑’이라는 세계적인 카피를 찾아냈다. 다이아몬드는 지구상에서 가장 단단한 물질 중 하나다. 어떤 것으로도 쪼갤 수 없으며, 화학적으로 안정적인 성질로서 어떤 반응도 일으키지 않아 시간이 흐른다고 변질되지 않는다.
      이상적인 사랑은 또 어떤 형태인가? 사랑 또한 어떤 것으로도 깨지지 않아야 한다. 사랑은 시간이 흐른다고 변하거나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
      @ 여기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다이아몬드는 영원한 사랑의 상징"이라는 '9라' 마케팅이랄까요?^🤣^

  • @yjh643
    @yjh643 Месяц назад

    고조선의 철 제련 기술이 오나라로 넘어 간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