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덕도 외양포 마을_하늘에서본부산_Busan from the sky_4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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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20 сен 2024
  • 가덕도 외양포는 1904년 초부터 기초조사를 시행하였고, 8월부터 12월까지 공병 소좌 마쓰이(松井庫之助)가 주관하며. 일본인 청부건설업자 나카타니 히로요타가 공사를 하여 조성했다. 1904년 12월에는 진해만 요새 포병대대 제2중대가 상륙해서 주둔했으며, 12월 20일에는 중포병대대가 주둔했다. 1905년 4월 진해만 요새사령부가 외양포로 이전하여 사상 최대로 확대되었고, 1909년 중포병대대로 격하되어 유지되었다.
    이때 울릉도와 독도에도 군사용 망루를 설치하려 했다. 1905년 1월 28일 일본 내각회의에서 독도를 다케시마로 하고 시마네현 담당으로 지정했고, 2월 22일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했다. 울릉도에는 1904년 9월, 독도에는 1905년 8월 망루를 세웠다. 1905년 4월 외양포 기지에 요새사령부가 이전할 정도였다면 매우 긴박한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1905년 초 여순항과 러시아 함대가 공격을 받고, 일부 함정이 침몰하자 러시아는 세계최강으로 자부하는 제2 태평양함대 소위 발트함대를 극동으로 파견한다. 그러나 발트함대는 이집트의 수에즈운하를 통과하지 못하고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장장 2만9000km를 운항하게 된다. 중간에 석탄과 음식을 보충해야 하지만, 각 국가의 항구마다 영국의 압력을 받아, 러시아 함대의 기착과 휴식, 물자 보충을 거부한다. 지칠 대로 지친 발트함대는 마다가스카르쯤에서 여순항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는다.
    러시아 발트함대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배 밑에는 따개비가 너무 붙어 함정의 속도도 나오지 않았고, 겨우 확보한 동남아 기착항에서는 만약을 대비해 많은 석탄과 물자를 실었다. 결국 군함의 운항 속도는 느렸고, 석탄을 배 뒤에 실었기에 함정의 선두가 들리는 현상도 나타나 지휘소인 조타실에서 앞의 상황이 잘 안 보이는 현상도 나타났다.
    진해항 입구인 거제도와 가덕도에 대규모 군사기지를 만드는데, 특히 가덕도의 국수봉 일대는 사령소, 관측소, 감시소, 발전소, 조명소, 엄정소, 탄약고, 탄환고, 포구고, 작약전실소, 장약조제소, 장교숙박소, 병사숙소, 감수위사, 기름창고, 계선장, 저수고, 통신교통설비, 화장실 등을 영구 시설로 구축한 것이다. 또 거제도와 저도에 이르는 통신케이블도 설치했으며, 산악고지에 산악 보루(작은진지) 5개도 설치했다.
    일제는 1904년부터 1945년까지 가덕도의 외양포를 중포병부대로 구축한 주요 시설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당시의 군사시설이 남아있는 곳은 가덕도가 유일하다. 중국 여순에서 치열했던 203고지나 봉천, 랴오령, 압록강, 사허 전투지를 살펴봐도 가덕도만큼 일본군의 군사 진지가 남아있는 곳이 드물 정도이다. 부산 가덕도 외양포를 세계전쟁사의 중요한 장소임을 알고 찾는 사람은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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