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TV] 스위스 취리히 츠빙글리와 그로스뮌스터 Zwingli & Grossmün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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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9 фев 2025
  • 스위스 취리히 바서교회 앞에 서 있는 츠빙글리의 동상은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있다.
    츠빙글리는 1484년 1월 1일 스위스 토겐부르크(Toggenburg) 지방 빌트하우스(Wildhaus)에서 출생하였다. 1506년 9월 16일 사제 서품을 받고, 1515년 용병제도를 비판하며 군종 신부를 사임하였다.
    1519년 취리히의 대성당의 설교자가 되어, 체계적인 성경강해를 하며 성서를 새롭게 해석하여 설교하는 설교가로 유명해지기 시작하였다.
    1522년 츠빙글리는 단식계율(斷食戒律)을 어기고 친구들과 만찬에 참석하였는데 이때 취리히 교구의 경고를 받았다. 츠빙글리는 성서에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친구들을 변호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음식의 선택과 자유에 관하여' 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종교개혁적 사상을 외부에 표현한 최초의 글이었다.
    1522년 츠빙글리는 아내를 가진 10명의 사제들과 함께 결혼을 허락해 달라는 청혼서를 주교에게 제출하였다. 그는 성서에 합치되는 내용을 주장하면서 취리히의 종교개혁은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는 시 당국이 기획한 토론회에서 '67제안(提案)' 를 발표하여, 시 당국을 설득시켜 종교개혁에 호응하도록 하였으며, 또 제2회 토론회에서는 성화상(聖畵像) 폐지에서 십자가 ·제단 ·오르간의 폐지까지 제의하였다.
    1529년의 마르부르크회담에서, 성찬(聖餐)에서의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피와 몸의 상징으로 해석하여, 이른바 ‘상징론’을 주장함으로써 루터와 대립하였다. 가톨릭과의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자 취리히군의 종군목자로 참전하여, 카펠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그 후에는 스위스의 종교개혁 운동은 불링거와 칼뱅에게로 넘겨졌다.
    그로스뮌스터는 구시가의 한 모퉁이에 우뚝 솟아 있는 스위스 최대의 로마네스크 양식 건축물이다. 지금의 건물은 11세기에서 13세기에 세워진 것인데, 이 자리는 본래 취리히에서 순교한 세 수호성인의 무덤터였고, 일찍이 카를 대제(742~814)가 세운 교회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츠빙글리와 블링거는 스위스 개혁교회의 신학과 신조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츠빙글리는 12년 동안 그로스뮌스터 교회의 설교자로서 교회와 사회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블링거는 44년동안 취리히의 목회자로 섬기면서 개혁교회의 근간을 세우는 일을 하였다. 그로스뮌스터 근처에 블링거와 츠빙글리의 집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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