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듣고있음다. 당시 최강국 황제국 고구려ㅡ만년천자국ㅡ으로는 못가니까 힘없는 백제.신라로 온 것 같습니다.그래서 이를 고구려가 용인한듯 싶구요. 고구려는 말갈을 명하여 신라 비열홀도 쳤었고, 낙양을 차지한 고환이 옥기.법주.준마.명주와 함께 9세 딸을 바치기도 했음다(535).-고구려사초략, 박창화 김성겸
오래간만에 다시 들었는데, 들어도 들어도 대단하다는 말밖에 안나오네요. 신라로써는 흉노 김일제도 그렇고, 모용선비도 그렇고 많은 영향을 받았군요. 이들은 고구려를 만들 때에도 주요한 주변국이었는데요. 남당유고 추모경에 보면 해모수의 사위가 흉노이기도 했고, 유화부인이 황룡국 출신이라고 하기도 했죠. 모두 다 섞여서 역사를 만들어갔다는 사실이 재미있습니다.
나당연합과 나당전쟁... 신라와 당나라가 한때는 우호적인 관계였다가 갑자기 적대적인 관계로 돌변하여 서로 전쟁한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본인은 이것을 신라 왕조의 변화와 맞물려서 생각한다. 신라를 선비계 왕조가 장악할 때는 같은 선비계인 당나라와 우호적이었고... 신라를 경주김씨 왕조가 회복된 이후로는 신라가 갑자기 당나라에 적대적으로 돌변하여 당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한다. 성골계급인 선덕/진덕여왕 까지는 선비족이 장악한 마지막 왕이었고... 진골이었던 김춘추는 정통 경주김씨의 후예로 신라왕권을 회복한 것이라고 본다. 그리하여 선비계가 장악한 시절에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경주김씨계가 장악한 시절에는 고구려 유민과 연합하여 당을 몰아내고 신라를 안정시키고 고구려 유민들에게는 발해를 건국할 수 있도록 도왔던 것이다. 여기에는 서역의 토번의 강성과 맞물려서 신라의 원교근공 전술로 당시의 강대국이었던 당나라와 싸워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김유신은 왜 선덕여왕을 살려뒀는가? 선비계 왕실이 약화된 시기에 어찌하여 선비족을 몰아내지 않고 그냥 놔뒀는가? 나도 모르겠다. . 연나라 모용 선비족이 고구려와 전쟁하다가 그 패잔병이 사로국까지 쫓겨 달아난다. 이때는 석씨가 장악하던 시기이므로 김씨들은 별로 힘을 내지 못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모용선비족 패잔병을 숨겨주고 먹여주고 재워주며 고국으로 돌아가도록 도와줄것을 조건으로 자신들(김씨가문)이 석씨를 몰아내고 사로국의 왕권을 찬탈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제안한다. 패잔병을 이끌던 모용선비족 왕자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김씨의 용병이 되어 석씨를 몰아내고 사로국을 김씨네가 장악하게 되고, 국호를 사로국에서 신라로 칭하게 된다. (전후한 교체기 왕망의 나라도 새로울"신"자를 쓰고 신라도 새로울"신"을 쓴다. 뭔가 치명적인 공통점이 느껴지지 않는가?) 이로써 내물 마립간이 왕권을 잡고 김씨왕조가 시작된 것이다. 나중에 고구려와 경쟁하던 북연이 탁발선비계에 밀려서 고구려에 복속하게 되고 일부는 신라로 망명을 신청하여 들어오게 된다. (모용운은 고구려계 사람이다. 연나라를 고구려에 통째로 바치는 것에 반발한 진짜 모용씨 왕족들이 반발하여 신라로 망명했으리라.) 모용선비족 도움으로 신라의 왕권을 장악한 김씨네들은 그 이후에도 계속 연나라와 친분을 쌓아왔고 강성하던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서도 더욱 연나라와 교류를 해왔던 것이므로 모용선비족이 신라에 망명을 오게 되는것도 사실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뽑아낸다는 말이 있듯이 망명자들이 신라에서 김씨왕조를 몰아내고 자신들이 왕권을 장악하는데 그것이 바로 법흥왕이다. (법흥왕 이전까지는 "마립간"이라 칭하다가 법흥왕 때부터 "왕"이라는 호칭이 등장한다.) 법흥왕 때 사람들의 엄청난 반발을 무릎쓰고 불교를 국교로 인정하게 되었는데... 전통적으로 김씨네들은, 아니 신라인들은 모두 천신(탱그리신)을 숭배하던 전통이 있으므로 불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독실한 불교신자인 모용선비족의 강압으로 불교는 신라의 국교가 되고 말았고, 또한 법흥왕때 가야를 침략하여 병합하였다. 원래 가야와 신라는 같은 김씨네 형제지간이 다스리는 나라였으므로 함부로 침략할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모용선비족이 신라왕권을 장악하면서 가야를 병합하고 고구려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한다. 신라가 그전까지는 고구려와 어느정도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고구려에 적대적이 된 배경은 원래 고구려와 적대적이던 연나라 왕족인 모용선비족이 신라의 왕권을 장악한 까닭이다. 그리고 그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신분계급이 신라왕족 내부에 생겨난다. 바로 성골과 진골이다. 같은 경주김씨 내에 성골과 진골로 나누어서 오직 성골출신만 왕이 될 수 있다는 규정을 세운 것이다. 이는 모용선비족이 스스로 경주김씨인 척 하며 진짜 경주김씨와 구별하여 자신들만 왕이 되겠다는 전략이다. 본래 연나라를 속칭 "황룡국"이라 불렀다. 그런데 법흥왕이 등장하면서 신라에 "황룡"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경주에 황룡사를 건축하고 황룡사지 석탑을 쌓아올리고... 이전에는 없던 용어인 "황룡"이 등장한 까닭이 무엇인가? 김씨네들은 본래 소호금천의 후예로 새를 숭배하는 토템이 있어왔다. 즉 봉황을 자신들의 상징동물로 여겨왔던 것이다. 황룡은 본래 모용선비족의 상징물이었는데 그것이 갑자기 신라에 등장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밖에도 신라에 선비족이 장악했던 증거가 수없이 등장한다. . 본인이 신라에서 처음으로 진골출신이 왕이 된 사건, 즉 김춘추(태종무열왕)의 등극이 모용선비족 왕조에서 경주김씨 왕조로 왕조교체가 일어난 사건으로 보는 이유는 이것이다. 현재 대한민국 청와대 벽면을 크게 장식하고 있는 부조물이 바로 그 증거이다. 만약에 모용선비족이 신라왕권을 끝까지 장악하고 있었다면 현재 청와대 벽면 부조물은 황룡이 새겨졌어야 맞다. 하지만 현재 청와대 벽면 부조는 봉황의 형상이 새겨져 있고 이것이 바로 경주김씨가 신라의 왕권을 회복했다는 증거이다. 원래 경주김씨든 김해김씨든 김씨네들은 다 소호금천씨의 후예로 새, 즉 봉황을 숭배하던 토템신앙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라의 왕권을 경주김씨가 회복한 가장 강력한 증거가 바로 문무왕의 비문이다, 비문에 이르기를 문무왕 자신을 흉노족 왕자인 김일제의 후손임을, 그리고 자신의 시조가 소호금천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만약 선비족이 계속 신라의 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면 과연 그런 비문을 새겨넣었겠는가? 사람이 죽음의 순간에는 거짓말을 안하는 법이다. 제아무리 스스로 경주김씨인 척 행세하면서 신라의 왕권을 장악하고 있었더라도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조상을 팔아먹는 거짓말은 하지 않는 법이다. 태종무열왕 때부터 경주김씨가 신라의 왕권을 회복한 것이 맞다고 본다. (태종무열왕 이전의 선비족 왕들은 같은 선비족 계열인 당나라와 우호적이었고, 당나라와 손을 잡고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태종무열왕 때부터 갑자기 당나라에게 적대적으로 변해서 고구려 유민과 합세하여 7~8년에 걸친 나당전쟁을 치루게 되고 신라의 완전한 독립을 회복하고 고구려 유민이 발해를 건국하도록 도와준다.)
이제야 이해가 가는 듯하네요 어느 역사유투브 영상에서 경주에 있는 신라 왕릉들중 어느 시기를 기점(서기 6세기)으로 왕릉양식이 갑자기 변하는 것에 대한 (특징중 12지신상의 출현 및 이전 왕릉양식 보다 화려해짐) 신라내에 어떤 외부의 다른 문화세력이 기존의 집권세력을 밀어내고 집권한 증거라고 말한적이 있으며 이세력이 중국의 양자강 중류 하류를 기반으로 한 세력일 수있다(이지역에 12지신상 문화가 널리 퍼져있다고 함) 또 삼국사기 일식에 관한기록에서 현, 과학적 근거인 천문관측으로 본 신라시기 일식에 대해 일식을 볼수있는 장소가 경주가아닌 중국 남부지역인 양자강 하류지역이라고 함 여하튼 이 선비계 모씨의 신 신라세력이 이 선생님의 주장대로 중국 중원을(회수 북쪽) 기점으로 북동쪽의 지배자 선비계 모용씨 연나라 세력이였다면 6세기부터 신라문화의 색채가 좀 바뀌는 것은 당연했겠네요 신라의 여러 유적 유물의 미스테리가 조금씩 풀리는 것 같네요🤗
그렇지 않습니다. 신라에서 박, 석씨에 이어 김씨로 이어진 왕가는 흉노 왕자 김일제의 후손으로 한나라에 포로로 붙잡혔으나 한나라 투후까지(지금으로 치면 총리) 올라가고 한나라 왕을 교체하려다 실패하여 고향인 요동반도로 피신했으며 사위로 하여금 신나라를 세워 화폐를 다양히 주조하고 개혁을 단행하다 망하여 이후 한반도 경상도로 들어온 것입니다. 한반도로 온 이유는 가야 김수로 왕가가 있었기때문으로 추정되며 김수로왕의 조상은 같은 집안입니다. 때문에 비교적 평화롭게 나라가 흡수된 것이죠. 두 김씨의 조상은 소호금천, 아버지는 황제이며 이들은 배달국 사람입니다. 성이 금인 이유도 소호금천이란 이름처럼 금 입상을 만들어 천제를 지냈기때문이고 불상도 여기서 유래한게 아닌기합니다. 그 이유는 가야 김씨는 본인들이 석가족(석가모니)라고 신라가 고려에 이양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끝까지 주장했기때문입니다.
황룡사의 명칭 배경과 9층 탑의 각 층에 제압해야할 세력으로 배분했다는 생뚱맞았던 나라들이 모씨의 연나라 입장이라면 모두 맞아돌아가긴 하는데...중국,오월, 등등...그런데 가장 먼저 1층의 '일본'은 열도 역시 모씨 후손이 장악했다면 왜 대상에 들었는 지... 아 그 사이에 열도 천황계가 모씨에서 부여씨로 바뀌어서 일까요?...
31:09 예전의 나의댓글에 추가해서( 제대로 내용을 다 안봤었네 ) ◇ 정말 엄청나고 중요하고도 너무나 흥미로와서 ❤ 예전에 곤지가 임신한 형수를 데리고 일본에 가서 무령왕이 일본에서 태어나고 등등 참 이해가 안되었었는데 모~ 든 퍼즐이 풀리네요. 그런데 신라 백제 일본(왜) 까지 선비의세력이 장악 했는데 그후에 백제는 무령왕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신라는? 왜( 일본)는 천황이 무령왕계 라고 밝혔었고. 감사합니다 ☆ 그러면 신라는 계속 모씨가 김씨로 바꾸어서 왕위를 이어 갔을까? 통일도 하고 ☆
저는 최치원이 신라를 燕나라 사람들의 도피처라고 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신라는 처음 사로6부를 피지배층으로 단군조선 辰國人인 박혁거세 거서간(단군)이 지배한 나라입니다. 즉 신라는 조선 유민(위만조선)과 최씨낙랑국 유민 등 주민들이 사로6부를 구성한 나라입니다. 그리고 燕나라 사람 위만이 세운 위만조선에는 秦나라 유민도 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신라인을 秦韓人이라고도 했습니다. 燕은 제비라는 뜻으로 새토템 동이족입니다. 이들이 신라 사로6부로 들어 왔으므로 최치원은 漢나라에 망한 燕나라 사람들의 도피처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경남 김해 대성동 유물중 허리띠 장식 등 북방의 요녕성 라마동에서 출토된 부여 고분 유물인 허리띠 장식과 일치 모용선비계의 유물이 아닌 부여유물로 보는 견해가 보편적 견해인데 그럼 가야국을 이룬 연방체가 부여계 와 모용선비계의 연합체라는 견해인가요🤔 북방에서 부여가 모용선비에게 엄청 깨지는데 이는 적대국 즉, 두 체제가 섞일 수없다는 뜻
김홍도가 그린 풍속화 씨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게 바로 우리의 전통씨름인 오른씨름이다 오른손으로 상대방 다리쪽 샅바를 잡는것인데~ 개인적으로 알기로는 우리나라 조선팔도 (함경 평안 황해 경기 강원 충청 전라 경상 ) 전통씨름이 죄다 오른씨름을 하는것으로 알고 있는데. 유독 경상도만 왼씨름인것으로 그렇게 알고있다 너무 이상하지 않는가? 그렇다고 해서 특정 지역만 왼손잡이가 많다든지 그런것도 아닐텐데 하고 의아해 왔는데 아시다시피 1066년 노르만 콩퀘스트 이후 영국 지배층에 프랑스어가 유입되고 문화도 차츰 프랑스문화가 퍼지는 사례에서도 보듯이 이 씨름도 북연이라든지 흉노라든지 이런 외세의 영향으로 특정지역에 영향을 끼쳐서 이렇게 된거다 저렇게 된거다하고 이점에 대해 누구 잘 아시는 분이 언급해 주셨으면 하고 여기 댓글을 올려본다 덧붙여 현재의 용어가 아닌 옛적에 사용하던 씨름 용어에서도 어떤 실마리도 나오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아니면 백제를 세운 사람들도 연나라가 망할 때에 한반도로 이주해온 사람들이라면 백제라는 이름을 가진 나라가 대륙에 있었던게 아니라 연나라 유민왕족들이 연나라(북연이나 후연)의 천체기록물을 가지고 한반도땅에 유입되어 한반도 서쪽(호남과 경기기 충청남도 일대)에 마치 백제가 대륙에 있었던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건 아닐지?
고구려와 선비족은 서로 말이 통했다고 하므로 같은 계통이라고 봐야죠 그리고 법흥왕은 지증왕의 장남인데, 지증왕과 관계없는 선비족의 외래인이라는 근거는 무엇인지요? 지증왕은 아들이 셋이었는데, 장남은 법흥왕이고, 법흥왕은 아들이 없이 딸만 있어서 차남 입종의 아들이 대를 이으니 그가 진흥왕이죠 그리고 지증왕의 셋째아들인 진종의 첫째 아들로부터 경주김씨, 둘째 아들로부터 안동김씨가 시작되는데 지증왕을 끝으로 신라의 김씨왕조가 끝나고 법흥왕으로부터 선비족 모씨 왕조가 시작됐다는 얘기는 역사를 너무 왜곡한 것 같습니다
고조선이 한나라에 패망당한후, 고조선의 중심부에서 유민들이 변두리로 뿔뿌리 흩어진거죠. 서북쪽으로 도망간 무리가 선비족 (그래서 이름도 조선비왕의 족속), 북쪽으로 도망간 무리가 부여, 동쪽으로 도망간 무리가 말갈, 남쪽으로는 고조선 왕족이 도망가서 삼한이 된거죠. 도망간 지역에도 벌써 사람들이 다 살고 있었고.
대륙백제는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입니다 백개의 소국을 점령하고 합친나라 백제 신라도 점령 하려다가 당나라 도움받아 신라가 백제 멸망시킴 그리고 백제영토 고구려와 나누어 가짐 이후 삼국통일 이후 당나라가 신라 괴롭힘 아직도 괴롭힘 신라 당나라 7년전쟁 신라 승리 임진왜란 7년전쟁 조선승리 아직도 괴롭힘 언젠가 더욱 더 막강해져서 싸우지 않코도 원수 값는 그날이 오길 바랍니다 최선을 다하면 후회는 없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 늘 건강하길 바랍니다 ^^
"신라의 왕이라는 자가 본래 백제사람인데 바다로 도망쳐 신라로 들어갔다?" 그럼 백제가 대륙에 있어야 이 말이 제대로 이해가 될 터인데요...바다로 도망칠려면 백제가 대륙에 있고 그 대륙에서 바다를 건너야 비로소 신라가 나오지 않나요? 백제가 한반도에 있었다면 굳이 바다를 건너 신라에 갈 필요가 있나요? 그러니까...백제가 대륙에 있을 수 밖에 없었다는 걸 반증해 주는 대목이 아닐까요?
아마도, 모용씨와 모여씨 였을것이다, 모씨와 관련 있다고 생각 되는 말들 : 모여라, 모시다, 모내기,모쓸놈, 법흥왕 부터 원래 김씨 아니고 모용씨 혹은 모여씨 ! 법흥왕 이름이 모진 이라 했던것 같은데 !연나라 모용황이 고구려 침입할때 아마도 이복 형제들을 험한길로 보냈는데 고구려군에 패해서 쫒겨서 신라로 들어 갔다는 썰이 있다 !
역사의 편린들에 대한 조합 능력이 탁월하시네요.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너 라도지? 어이구 열등한 것들!
대단합니다. 한국사의 새 지평을 여는 통찰입니다.
덕분에 도움많이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대단한 강의네요!
와우 지금껏 들어왔던 역사 이야기중 가장 재미나고 그동안의 의문이 풀리며 아귀가 들어맞아지네요 훌륭한 강의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기대하는 강의에요.
1년여 전에 들을 때는 잘 이해가 안되서 몇차례 반복해서 들어도 제자리걸음이었는데,
오늘 다시 들으니 지난번 보다 이해의 정도가 커져갑니다.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을 실감합니다.
아니, 아는만큼 들리는가 봅니다. ^^
이해는 되는데, 처음 듣는 이야기라 황당합니다.
잘 듣고있음다. 당시 최강국 황제국 고구려ㅡ만년천자국ㅡ으로는 못가니까 힘없는 백제.신라로 온 것 같습니다.그래서 이를 고구려가 용인한듯 싶구요. 고구려는 말갈을 명하여 신라 비열홀도 쳤었고, 낙양을 차지한 고환이 옥기.법주.준마.명주와 함께 9세 딸을 바치기도 했음다(535).-고구려사초략, 박창화 김성겸
언제나 고맙습니다,,,,,
참 차분하게 설 명 잘 하네요 법흥왕의 비밀 ㅡ국호 왕호 불교 바뀐 이유 설득력 있네요
오래간만에 다시 들었는데, 들어도 들어도 대단하다는 말밖에 안나오네요.
신라로써는 흉노 김일제도 그렇고, 모용선비도 그렇고 많은 영향을 받았군요.
이들은 고구려를 만들 때에도 주요한 주변국이었는데요.
남당유고 추모경에 보면 해모수의 사위가 흉노이기도 했고, 유화부인이 황룡국 출신이라고 하기도 했죠.
모두 다 섞여서 역사를 만들어갔다는 사실이 재미있습니다.
정말 스펙타클합니다. 한편의 블록버스터를 보는 듯 합니다. 나중에 영화로 나오길 기대합니다. 이기훈 선생님이 자문!
북연이 고구려에 이주한🤣 것이 아닌 투항한 것이라 표현이 맞죠 한국사를 주인의식으로 고찰해야죠 추후 북연세력이 고구려에 흡수 동화됬으니 말이죠 이주라뇨 🤣🤣🤣
이기훈 선생님 강의는 한국 고대사 교수들이 배워야 할 지식입니다 감사합니다
대단한 강의입니다. 학교에서 배운 역사는 뜬구름 잡았던 수준이네요.
선비계인 신라가 같은 선비계 나라인 당나라와 연합했서 고구려와 백제를 쳤다고 볼 수 있겠네요
일본 사람들 대화하는 거 들으면 마치 경상도 사람들 말하는 것과 거의 흡사한 억양이던데 이 또한 이해가가네요. 신라문화는 아주 독특하게 이질적이었다는 주장에 어느정도 설명이 됐습니다.
아주 좋은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김춘추는 어찌 되는 것입니까? 모용씨가 김씨로 성을 바꾸고 을 자처하며 왕위를 계승했다고 하면, 김춘추와 김유신은 로 김알지계와 김수로계가 된다는 것인지? 분명 문무왕비에는 라고 했으니, 김춘추부터 다시 김알지계가 왕위에 올랐다는 것이 아닌지요?
14:45
사실 부여멸망후 요동에 다시 부여를 부활시킨게 선비족입니다. 그 후 곧 백제에 근초고왕이 나오죠. 선비가 부여도 공격했었고 동시에 부활도 시킵니다. 선비중에서 부족나름인 거 같습니다.
늘 보고 있어요. 학교역사 다시 써야겠어요.
경주김씨는 상당수가 가짜 김씨인 모용씨라는 얘기네요
대단합니다~!
덕분에 역사공부 잘합니다~
나당연합과 나당전쟁...
신라와 당나라가 한때는 우호적인 관계였다가 갑자기 적대적인 관계로 돌변하여 서로 전쟁한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본인은 이것을 신라 왕조의 변화와 맞물려서 생각한다.
신라를 선비계 왕조가 장악할 때는 같은 선비계인 당나라와 우호적이었고...
신라를 경주김씨 왕조가 회복된 이후로는 신라가 갑자기 당나라에 적대적으로 돌변하여 당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한다.
성골계급인 선덕/진덕여왕 까지는 선비족이 장악한 마지막 왕이었고...
진골이었던 김춘추는 정통 경주김씨의 후예로 신라왕권을 회복한 것이라고 본다.
그리하여 선비계가 장악한 시절에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경주김씨계가 장악한 시절에는 고구려 유민과 연합하여 당을 몰아내고 신라를 안정시키고 고구려 유민들에게는 발해를 건국할 수 있도록 도왔던 것이다.
여기에는 서역의 토번의 강성과 맞물려서 신라의 원교근공 전술로 당시의 강대국이었던 당나라와 싸워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김유신은 왜 선덕여왕을 살려뒀는가?
선비계 왕실이 약화된 시기에 어찌하여 선비족을 몰아내지 않고 그냥 놔뒀는가?
나도 모르겠다.
.
연나라 모용 선비족이 고구려와 전쟁하다가 그 패잔병이 사로국까지 쫓겨 달아난다.
이때는 석씨가 장악하던 시기이므로 김씨들은 별로 힘을 내지 못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모용선비족 패잔병을 숨겨주고 먹여주고 재워주며 고국으로 돌아가도록 도와줄것을 조건으로 자신들(김씨가문)이 석씨를 몰아내고 사로국의 왕권을 찬탈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제안한다.
패잔병을 이끌던 모용선비족 왕자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김씨의 용병이 되어 석씨를 몰아내고 사로국을 김씨네가 장악하게 되고, 국호를 사로국에서 신라로 칭하게 된다.
(전후한 교체기 왕망의 나라도 새로울"신"자를 쓰고 신라도 새로울"신"을 쓴다. 뭔가 치명적인 공통점이 느껴지지 않는가?)
이로써 내물 마립간이 왕권을 잡고 김씨왕조가 시작된 것이다.
나중에 고구려와 경쟁하던 북연이 탁발선비계에 밀려서 고구려에 복속하게 되고 일부는 신라로 망명을 신청하여 들어오게 된다.
(모용운은 고구려계 사람이다. 연나라를 고구려에 통째로 바치는 것에 반발한 진짜 모용씨 왕족들이 반발하여 신라로 망명했으리라.)
모용선비족 도움으로 신라의 왕권을 장악한 김씨네들은 그 이후에도 계속 연나라와 친분을 쌓아왔고 강성하던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서도 더욱 연나라와 교류를 해왔던 것이므로 모용선비족이 신라에 망명을 오게 되는것도 사실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뽑아낸다는 말이 있듯이 망명자들이 신라에서 김씨왕조를 몰아내고 자신들이 왕권을 장악하는데 그것이 바로 법흥왕이다.
(법흥왕 이전까지는 "마립간"이라 칭하다가 법흥왕 때부터 "왕"이라는 호칭이 등장한다.)
법흥왕 때 사람들의 엄청난 반발을 무릎쓰고 불교를 국교로 인정하게 되었는데...
전통적으로 김씨네들은, 아니 신라인들은 모두 천신(탱그리신)을 숭배하던 전통이 있으므로 불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독실한 불교신자인 모용선비족의 강압으로 불교는 신라의 국교가 되고 말았고, 또한 법흥왕때 가야를 침략하여 병합하였다.
원래 가야와 신라는 같은 김씨네 형제지간이 다스리는 나라였으므로 함부로 침략할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모용선비족이 신라왕권을 장악하면서 가야를 병합하고 고구려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한다.
신라가 그전까지는 고구려와 어느정도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고구려에 적대적이 된 배경은 원래 고구려와 적대적이던 연나라 왕족인 모용선비족이 신라의 왕권을 장악한 까닭이다.
그리고 그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신분계급이 신라왕족 내부에 생겨난다.
바로 성골과 진골이다.
같은 경주김씨 내에 성골과 진골로 나누어서 오직 성골출신만 왕이 될 수 있다는 규정을 세운 것이다.
이는 모용선비족이 스스로 경주김씨인 척 하며 진짜 경주김씨와 구별하여 자신들만 왕이 되겠다는 전략이다.
본래 연나라를 속칭 "황룡국"이라 불렀다.
그런데 법흥왕이 등장하면서 신라에 "황룡"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경주에 황룡사를 건축하고 황룡사지 석탑을 쌓아올리고... 이전에는 없던 용어인 "황룡"이 등장한 까닭이 무엇인가?
김씨네들은 본래 소호금천의 후예로 새를 숭배하는 토템이 있어왔다.
즉 봉황을 자신들의 상징동물로 여겨왔던 것이다.
황룡은 본래 모용선비족의 상징물이었는데 그것이 갑자기 신라에 등장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밖에도 신라에 선비족이 장악했던 증거가 수없이 등장한다.
.
본인이 신라에서 처음으로 진골출신이 왕이 된 사건, 즉 김춘추(태종무열왕)의 등극이 모용선비족 왕조에서 경주김씨 왕조로 왕조교체가 일어난 사건으로 보는 이유는 이것이다.
현재 대한민국 청와대 벽면을 크게 장식하고 있는 부조물이 바로 그 증거이다.
만약에 모용선비족이 신라왕권을 끝까지 장악하고 있었다면 현재 청와대 벽면 부조물은 황룡이 새겨졌어야 맞다.
하지만 현재 청와대 벽면 부조는 봉황의 형상이 새겨져 있고 이것이 바로 경주김씨가 신라의 왕권을 회복했다는 증거이다.
원래 경주김씨든 김해김씨든 김씨네들은 다 소호금천씨의 후예로 새, 즉 봉황을 숭배하던 토템신앙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라의 왕권을 경주김씨가 회복한 가장 강력한 증거가 바로 문무왕의 비문이다,
비문에 이르기를 문무왕 자신을 흉노족 왕자인 김일제의 후손임을, 그리고 자신의 시조가 소호금천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만약 선비족이 계속 신라의 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면 과연 그런 비문을 새겨넣었겠는가?
사람이 죽음의 순간에는 거짓말을 안하는 법이다.
제아무리 스스로 경주김씨인 척 행세하면서 신라의 왕권을 장악하고 있었더라도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조상을 팔아먹는 거짓말은 하지 않는 법이다.
태종무열왕 때부터 경주김씨가 신라의 왕권을 회복한 것이 맞다고 본다.
(태종무열왕 이전의 선비족 왕들은 같은 선비족 계열인 당나라와 우호적이었고, 당나라와 손을 잡고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태종무열왕 때부터 갑자기 당나라에게 적대적으로 변해서 고구려 유민과 합세하여 7~8년에 걸친 나당전쟁을 치루게 되고 신라의 완전한 독립을 회복하고 고구려 유민이 발해를 건국하도록 도와준다.)
시조새는 익룡이다. 몸통은 황룡이고 날개는 봉황일걸요.삼한일통.
발해는 스스로 고구려라고 지칭한 말이 일본 문헌에 있다고 합니다. 당나라에서 지어진 역사와 이름일뿐. 정치적 이유로
태종 무열왕 김춘추가 당과 동맹을 했지 않았나요.
그아들 문무왕이 나당 전쟁을 했지요.
나당전쟁은 신라가 소정방을 유인하여 죽임으로. 신라는 당에게 원군을 청하기 전에 가장 먼저 고구려에게 다음은 왜에게 원군을 청했음. 당시 가장 약한 세력이었는데 백제 칭공에 살아 남기 위한 전략이었다고 봄
발해와 신라는 최상의 적국이었는데 뭔 신라가 발해 건국을 도와줘야? 미친 소설쓰냐 이 선비족놈아
그당시 이해안되었던 퍼즐이 맞춰진 기분!
충분히 일리있는 가설입니다. 그러면 신라의 대륙지배설(요서의 북연, 산동의 남연)도 설명이 되고, 법흥왕 이후의 신라의 갑작스런 개혁도 설명되고,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임나일본부설도 설명이 되고, 굳이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드린 이유도 설명이 됩니다.
동의합니다
맞습니다 ☆임나 일본부가 문제가 될것 같은데...사실이던 아니던
이제야 이해가 가는 듯하네요 어느 역사유투브 영상에서 경주에 있는 신라 왕릉들중 어느 시기를 기점(서기 6세기)으로 왕릉양식이 갑자기 변하는 것에 대한 (특징중 12지신상의 출현 및 이전 왕릉양식 보다 화려해짐) 신라내에 어떤 외부의 다른 문화세력이 기존의 집권세력을 밀어내고 집권한 증거라고 말한적이 있으며 이세력이 중국의 양자강 중류 하류를 기반으로 한 세력일 수있다(이지역에 12지신상 문화가 널리 퍼져있다고 함) 또 삼국사기 일식에 관한기록에서 현, 과학적 근거인 천문관측으로 본 신라시기 일식에 대해 일식을 볼수있는 장소가 경주가아닌 중국 남부지역인 양자강 하류지역이라고 함 여하튼 이 선비계 모씨의 신 신라세력이 이 선생님의 주장대로 중국 중원을(회수 북쪽) 기점으로 북동쪽의 지배자 선비계 모용씨 연나라 세력이였다면 6세기부터 신라문화의 색채가 좀 바뀌는 것은 당연했겠네요 신라의 여러 유적 유물의 미스테리가 조금씩 풀리는 것 같네요🤗
그렇지 않습니다. 신라에서 박, 석씨에 이어 김씨로 이어진 왕가는 흉노 왕자 김일제의 후손으로 한나라에 포로로 붙잡혔으나 한나라 투후까지(지금으로 치면 총리) 올라가고 한나라 왕을 교체하려다 실패하여 고향인 요동반도로 피신했으며 사위로 하여금 신나라를 세워 화폐를 다양히 주조하고 개혁을 단행하다 망하여 이후 한반도 경상도로 들어온 것입니다. 한반도로 온 이유는 가야 김수로 왕가가 있었기때문으로 추정되며 김수로왕의 조상은 같은 집안입니다. 때문에 비교적 평화롭게 나라가 흡수된 것이죠. 두 김씨의 조상은 소호금천, 아버지는 황제이며 이들은 배달국 사람입니다. 성이 금인 이유도 소호금천이란 이름처럼 금 입상을 만들어 천제를 지냈기때문이고 불상도 여기서 유래한게 아닌기합니다. 그 이유는 가야 김씨는 본인들이 석가족(석가모니)라고 신라가 고려에 이양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끝까지 주장했기때문입니다.
황룡사의 명칭 배경과 9층 탑의 각 층에 제압해야할 세력으로 배분했다는 생뚱맞았던 나라들이 모씨의 연나라 입장이라면 모두 맞아돌아가긴 하는데...중국,오월, 등등...그런데
가장 먼저 1층의 '일본'은 열도 역시 모씨 후손이 장악했다면 왜 대상에 들었는 지...
아 그 사이에 열도 천황계가 모씨에서 부여씨로 바뀌어서 일까요?...
한국의 고대사의 미스테리한 조각이 조금씩 풀리는건가요? 진위여부를 떠나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습니다.
진위를추구해야지개인의썰은필요치않은것임
지증왕이 사로 6부족장에게 중국식 성씨인 이 최 정 손 배 설씨를 하사한것으로 보아 개연성이 있는거 같아요..,
양나라 사신도에 고구려 백제가 품위있는 복장이며 신라는 간편한 복장이며 왜는 완전히 사냥꾼 모습이던데( 신발도 안신고)
31:09 예전의 나의댓글에 추가해서( 제대로 내용을 다 안봤었네 ) ◇ 정말 엄청나고 중요하고도 너무나 흥미로와서 ❤ 예전에 곤지가 임신한 형수를 데리고 일본에 가서 무령왕이 일본에서 태어나고 등등 참 이해가 안되었었는데 모~ 든 퍼즐이 풀리네요. 그런데 신라 백제 일본(왜) 까지 선비의세력이 장악 했는데 그후에 백제는 무령왕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신라는? 왜( 일본)는 천황이 무령왕계 라고 밝혔었고. 감사합니다 ☆ 그러면 신라는 계속 모씨가 김씨로 바꾸어서 왕위를 이어 갔을까? 통일도 하고 ☆
이 내용 세번째로 듣는데 오늘 드디어 90% 이해 했어요 ❤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선비족과 혹시 조선시대 선비라는 용어가 관계가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선비족의기원은 그들이 선비산에서 기원했기때문이라 아무상관없습니다
지도에 후연의 강역이 맞는건가요?
중국측 지도인가요? 아님 역사사료를 검증해서 표현한 지도인가요?
저는 최치원이 신라를 燕나라 사람들의 도피처라고 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신라는 처음 사로6부를 피지배층으로 단군조선
辰國人인 박혁거세 거서간(단군)이 지배한 나라입니다. 즉 신라는 조선 유민(위만조선)과 최씨낙랑국 유민 등 주민들이 사로6부를 구성한 나라입니다.
그리고 燕나라 사람 위만이 세운 위만조선에는 秦나라 유민도 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신라인을 秦韓人이라고도 했습니다.
燕은 제비라는 뜻으로 새토템 동이족입니다.
이들이 신라 사로6부로 들어 왔으므로 최치원은 漢나라에 망한 燕나라 사람들의 도피처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제비토템은 상나라 기록에도 나타나는데 연이 상의 후예 인가요?
대륙백제 의구심 조각이 딱 맞아 떨어지는듯요.고대사 한중일 정말 한번 정리해서 바로 잡아야할 듯
잘 봤습니다!
연의 고구려투항이 최치원 생시에서 1200년전이란 것은 잠시 계산착오하신 것 같네요....
신라의 기존 세력이 낙랑계 김씨세력이다. 할때 여기서 “낙랑계” 는
낙랑.대방 할때 낙랑 인가요?
대륙백제 대륙신라의 미스테리가 이제야 해결. 윤여동설과 이 영상이 그 해답을 주어 마음이 후련함. 나에게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발해 고려의 피와 더불어 선비계 연나라 황룡국의 피도 흐르는걸 알게됨. 헛소리하는 강단사학이나 재야사학자들이 꼭 봐야할 영상들.
선비세력은 고조선 침입부터 수나라의 고구려 침입, 나당 연합으로 고구려 백제 멸망까지 원수지간 처럼 지내는데 같은 예맥족으로 분류된다면 끊임없는 다툼의 이유가 무엇일까요?
유산을 놓고 형제간에 피터지게 싸우는 거 보면 이해될겁니다.
모용씨 중심세력은 결국 왜로 갔는데
100곳을 점령했다면 어떤 성씨로 남아 있을 듯 한데
일본 왕실이 가야에서 백제로 바뀐 것이 이들때문인가요
역사의 키워드는 부여사 이다 ~ 부여를 알면 역사가 보인다
고조선 부여족 4번의 세계 정복 있었다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모용선비는 동이계인데 왜 화하족(한족) 이 주체세력인 주나라의 후인 연이란 국호를 사용했죠 ?
한족이 주체세력인 중원 왕국이 있었나요?...
유전자를 보면 주나라 왕가는 흉노계입니다. 화하족이란 하나라+주나라에서 따온 것이고 주나라 당시에는 그런 개념이나 말이 없었겠죠.
대개 주의 혈족에게 지방을 맏기는 봉건제였지만 연은 예외적인 자에게 제후로 봉한것!
다른 관점이라 제법 재미는 있는데 곤지의 둘째 아들 사마가 무령왕이라는데 개로왕의 아들이라니 쩝 누구 말이 맞는지 모르겠네
네 무령왕릉 발굴로 개로왕 아들임이 밝혀졌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일제와는 어떤관계인가요?
일본이 사용하고 있는 카다가나 가 신라어라고 일본학자가 밝혔는데 신라(사로)가 4세기까지 이 카다가나를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는 얘기인가요?
문자만 한문의 변형이고 언어(말)는 고대 한국어와 매우 흡사할것입니다.
모용씨 선비들이 사용한 이두문자임
절을 지은 이는 다음 왕이던 진흥왕대인데 정정하시면 어떨까요
남당유고에 법흥왕의 이름이
慕珍인데 성이 모용씨인지는
한자어 그릴 "모"자 우연?
문무왕.김인문의 묘비에 흉노가 조상이라고 했을까요?
일본 "야마토"는 나라방언의 해는 "히야"로 ㅎ탈락
이야ㅡ야(日)로 추정 밑(本)의 아래아 ㆍ "마토"입니다
12:00 신라는 본래 진한에서 나왔는데 진한인들은 진나라에서 왔다고 한다. 하지만 마한인들이 왕을 하였다.
법흥왕전에도 그런 기록은 있습니다.
삼국지 권30 위서 오환선비동이전에 보시면 있을껍니다.
모용씨 선비족이 아니라 부여 계통 아닌가요 발견된 동복이 부여계 동복유물과 같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다면 연나라를 한국사에 집어넣어 가르쳐야 하는 ?...
지증왕이 얼마나 큰 일들을 많이 했는데..그의 아들 법흥왕의 바지란다 ㄷ ㄷ
어차피 선비족도 우리와 조상이 같은 동이족의 자손들
탁발=연타발, 모돈=문덕
강의 잘들었습니다. 고등학교때 세기별로 왜 삼국이 서로 이합집산 했는지. 지금 이해가네요
제가 교수님의 다른영상은 못 보고 처음 본 영상인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드네요 이제 그러면 우리는 역사적으로 중국과 하나가 되는건가요? ㅎㅎㅎ 선비족은 보통 중국의 역사로 알고 있는데~ 우리도 중국이 되는군요~
법흥의부모는 누구인가요 황당함
충분히 개연성있는 해석이십니다.
오랜 세월 풀리지 않았던 의문이 해결되는 중요한 강의들입니다. 간혹 등장하는 중공 동북공정의 지도만 수정해서 올리면 좋겠네요~!!!
경남 김해 대성동 유물중 허리띠 장식 등 북방의 요녕성 라마동에서 출토된 부여 고분 유물인 허리띠 장식과 일치 모용선비계의 유물이 아닌 부여유물로 보는 견해가 보편적 견해인데 그럼 가야국을 이룬 연방체가 부여계 와 모용선비계의 연합체라는 견해인가요🤔 북방에서 부여가 모용선비에게 엄청 깨지는데 이는 적대국 즉, 두 체제가 섞일 수없다는 뜻
김해 대성동 유물운 모용씨 선비들의 유물로 봐야 함
부여 유물이라는 것도 부여 사람이 잡혀가서 생긴 무덤이라는 가정 자체가 억지스러움
김수로왕을 참칭왕 모용씨 세력이 김해를 정복하고, 그 의 아들 7왕자가 남큐슈로 간고,
그러다가 왜왕이 된다..............
고대사의 지문 #08: '왕'의 시대_법흥왕과 재등극한 황제 편
신라와 사산조 페르시아
ruclips.net/video/d8CTrEnlR9k/видео.html
백제인이 왜 바다로 도망하나요?
세숫대야가 모용씨 선비 문화였네
김홍도가 그린 풍속화 씨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게 바로 우리의 전통씨름인 오른씨름이다
오른손으로 상대방 다리쪽 샅바를 잡는것인데~
개인적으로 알기로는
우리나라 조선팔도 (함경 평안 황해 경기 강원 충청 전라 경상 ) 전통씨름이 죄다 오른씨름을 하는것으로 알고 있는데. 유독 경상도만 왼씨름인것으로 그렇게 알고있다
너무 이상하지 않는가?
그렇다고 해서 특정 지역만 왼손잡이가 많다든지 그런것도 아닐텐데 하고 의아해
왔는데
아시다시피 1066년 노르만 콩퀘스트 이후
영국 지배층에 프랑스어가 유입되고 문화도
차츰 프랑스문화가 퍼지는 사례에서도 보듯이
이 씨름도
북연이라든지 흉노라든지 이런 외세의 영향으로 특정지역에 영향을 끼쳐서 이렇게 된거다 저렇게 된거다하고
이점에 대해 누구 잘 아시는 분이 언급해 주셨으면 하고 여기 댓글을 올려본다
덧붙여 현재의 용어가 아닌 옛적에 사용하던
씨름 용어에서도 어떤 실마리도 나오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아니면 백제를 세운 사람들도 연나라가 망할 때에 한반도로 이주해온 사람들이라면 백제라는 이름을 가진 나라가 대륙에 있었던게 아니라 연나라 유민왕족들이 연나라(북연이나 후연)의 천체기록물을 가지고 한반도땅에 유입되어 한반도 서쪽(호남과 경기기 충청남도 일대)에 마치 백제가 대륙에 있었던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건 아닐지?
지증왕 세력이 모씨가 아니라 풍씨라고 해야 맞지 않나..
그러니까 사실상은 신라법흥왕이 고구려사람 고씨 라는거네요?
고구려 사람 고씨면 뭐해요?
신라의 법흥왕때부터 ㆍㆍㆍ
우리나라의 전통을 완전히 단절시키고 ㆍㆍ
불교를 국교 국가로 만들면서 부터 ㆍㆍㆍ
오늘날의 우리나라를 이렇게ㆍㆍㆍ
쪼그랑 망탱이로 만든 사람인데요 ㆍㆍㆍ
뜬금없이 왠 이상한 논리?
백제에서 동성왕이 암살당하고 부여게로회귀한 이후 일본 지배층의 정세는 얻댓나요?
@@sang-hoonkim7733 저는 저 얘기가 역사적 사실로 보기 힘듭니다.
1745..개로왕이 북부여왕 군초고왕계라고 하는데..근초고왕이 부여계란 근거가 있나요?
^^~
마리칸 머리칸 대칸입니다.마니산
마리는 머리라고 봅니다. 쇠머리....
텍스트에서 커서를 움직이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내용에 집중이 되지 않습니다.
큰일날 강의 입니다. 너무 놀래서. 공부 다시 하세요 백제 신라가 일본에 기대다니요. 큰나라라고햇다고요. 고서기 읽어보세요. 재미있게 듣다가 깜짝놀랩니다.
가야 대성동 고분군과 조양의 라마동 고분군의 부장품이 후연이 아닌 부여계 유물이란 건 주지의 사실이고 6세기가 아닌 4세기 유물로 아는데...억지로 끼워맞춘 느낌이 드네요.
근데 왜 바다로 도망쳐 신라로 들어갔다고 나올까요? 백제에서 신라는 바다로 갈 필요가 없지 않나요?
자기 가족들 수십명이면 육지로 갔겠지만 신라를 장악할 만큼의 세력이라면 최소 수백명에서 수천명인데 그럼 당연히 배로 가야지,
산동반도 대륙백제에서 한반도 신라를 점령
지증왕 아들래미가 법흥왕인데 그럼 지증왕도 백제인이란 말이요? 뭐가 진실인겨??
법흥왕이 흉노족 출신으로 알고 있는데 백제출신설은 ....
당시 중국, 일본이 존재하지 않았는데 중국, 일본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은 적절히 않습니다.
이거 사실 굉장히 중요한 얘기임~!!!
황룡사9층탑에 있었다 함. 둘 다.
전체 훌륭한 강의에서 중국 중국... 많이 거슬리더군요. 아마 이해를 돕기위한 습관으로 생각합니다.
고구려와 선비족은 서로 말이 통했다고 하므로 같은 계통이라고 봐야죠
그리고 법흥왕은 지증왕의 장남인데, 지증왕과 관계없는 선비족의 외래인이라는 근거는 무엇인지요?
지증왕은 아들이 셋이었는데, 장남은 법흥왕이고, 법흥왕은 아들이 없이 딸만 있어서 차남 입종의 아들이 대를 이으니 그가 진흥왕이죠
그리고 지증왕의 셋째아들인 진종의 첫째 아들로부터 경주김씨, 둘째 아들로부터 안동김씨가 시작되는데
지증왕을 끝으로 신라의 김씨왕조가 끝나고 법흥왕으로부터 선비족 모씨 왕조가 시작됐다는 얘기는 역사를 너무 왜곡한 것 같습니다
고조선이 한나라에 패망당한후, 고조선의 중심부에서 유민들이 변두리로 뿔뿌리 흩어진거죠.
서북쪽으로 도망간 무리가 선비족 (그래서 이름도 조선비왕의 족속), 북쪽으로 도망간 무리가 부여, 동쪽으로 도망간 무리가 말갈, 남쪽으로는 고조선 왕족이 도망가서 삼한이 된거죠. 도망간 지역에도 벌써 사람들이 다 살고 있었고.
신라는 어째서 당나라와 손을 잡고 백제와 고구려를 멸했을까요?
궁금합니다.^^
안그러면 신라 자신이 망할것 같으니까 당나라에게 도와달라고 했겠지요...땅 절반은 넘겨준다든지 하고...
대륙백제는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입니다
백개의 소국을 점령하고 합친나라 백제
신라도 점령 하려다가
당나라 도움받아 신라가 백제 멸망시킴
그리고 백제영토 고구려와 나누어 가짐 이후 삼국통일
이후 당나라가 신라 괴롭힘
아직도 괴롭힘
신라 당나라 7년전쟁 신라 승리
임진왜란 7년전쟁 조선승리
아직도 괴롭힘
언젠가 더욱 더 막강해져서
싸우지 않코도
원수 값는 그날이 오길 바랍니다
최선을 다하면 후회는 없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
늘 건강하길 바랍니다 ^^
"신라의 왕이라는 자가 본래 백제사람인데 바다로 도망쳐 신라로 들어갔다?" 그럼 백제가 대륙에 있어야 이 말이 제대로 이해가 될 터인데요...바다로 도망칠려면 백제가 대륙에 있고 그 대륙에서 바다를 건너야 비로소 신라가 나오지 않나요? 백제가 한반도에 있었다면 굳이 바다를 건너 신라에 갈 필요가 있나요? 그러니까...백제가 대륙에 있을 수 밖에 없었다는 걸 반증해 주는 대목이 아닐까요?
별자리 천문 과학 사실 역사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 대륙에 있었습니다
후에 신라는 한반도에도 있었습니다
신라는 대륙신라 한반도신라 두곳
백제는 한반도에 없었습니다
아직도 한반도에서 왕궁주춧돌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 ^^
장수왕이 까부는 북연왕을 죽였지만.
그 무리들은 결국 고구려를 벗어나 백제와 신라, 왜까지 장악 했구나.
선비족이 보면 강인한 민족성이 있었던거 같음.
수나라, 당나라도 다 선비족계였고
백제인이면 법흥왕은 골품제를 무시하고 왕이 되었나?
내 조상중에 신라6왕이 있었다는데 그중에는 법흥왕도 있던데
일본서기에는 汶得知
문씨로 기록되었다
신라 법흥왕 후손은 금.김씨 연나라 모씨후손이 맞습니다
@@東方不敗-x5v ㅋㅋㅋ
태종 무열왕(김춘추) 때 다시 경주 김씨[흉노계열]로 복귀 합니다.
@@東方不敗-x5v ㅇ 법흥왕은 백제에서 신라로건너온 사람인데 신라왕이되고 백제와 싸웠다고 하잔아 .
그전에는 백제.신라는 고구려의 침략을 막기위해 동맹국이었고 . .
원래 옛날 나라들 족보는
뒤죽박죽 개족보가 맞네.
@@xuanxihuangdi7772 중국비석1000전기록 외교대국 섬기는기록으로봅니다
실지 기록 비석 경북울진 신라왕이 모씨로 나옵니다.
부여의 유물을 모용선비 유물로 예기하시는 것부터 틀렸습니다
방송에서 중국학자 말을 보니 부여사 선비는 유사하지만 분명 달았던 것 같더군요.
납득이 될만큼의 증거가 없다고 생각이 됩니다.
솔치키... 노벨 동아시아 역사학상끕.. 대단대단..삼국사는... 강단사학 제로 베이스로 보고 안다 생각하는데 범위내에선 앞뒤맞아들어가고..
그전은 잘모르는데 한번보는거 세번보는거 볼때마다 또 달리 다가옴
ㅡㅡㅡ 글고 듣는인간들 특히 재야사학중 특정정치부류..... 이사람은 학자임... 본인양심허용하 중국정부 정치동북공정도 까는거 같은데ㅡ 한국특정부류도 방향만다르지 똑같은거 같은데.. 한국인이라 대놓고 까진 못하는듯.. 어느챕터 목소리가 올라가는거봐선 그쪽에도 까고 싶은거같은.. 그거이전 있는그대로 까발리는 그자체.. 당신들 정치관에안맞다고 매국노시각 몰면... 위축되면... 못파면 전체가손해라고 생각.. 상식적으로 유럽 게르만 이동도 똑같은거. 자연스러운거
법흥왕 모씨에서 창씨계명 했나보네 김씨로
추측해서 하는강의는 아닌지? 확증을 가지고 하는 강의인지?
잘듣고 있는데 한가지 궁금한점이 있습니다. 말씀하시는 근거가 어느 책에 있늘건가요?
제발~~!!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켜야지ㅜㅜ 재야사학이라고 무조건 배타하고 무시하고 나랏님들 사학에 관심좀 갖으세요 ㅜㅜ
법흥왕이 모씨라니 그무슨 무식한..모즉지매금왕이라고 모씨라는건 좀..그동생은 사부지인데 사씨인가?
4세기 선비계통의 문화가아니라 부여계통의 문화입니다.......
아마도, 모용씨와 모여씨 였을것이다, 모씨와 관련 있다고 생각 되는 말들 : 모여라, 모시다, 모내기,모쓸놈, 법흥왕 부터 원래 김씨 아니고 모용씨 혹은 모여씨 ! 법흥왕 이름이 모진 이라 했던것 같은데 !연나라 모용황이 고구려 침입할때 아마도 이복 형제들을 험한길로 보냈는데 고구려군에 패해서 쫒겨서 신라로 들어 갔다는 썰이 있다 !
소리좀 크게 하세요 속삭이는 듯.
동북 공정에 앞서는 사람 보이네? 중국인가? 글제목이 오해 소지가 있군요. 연나라 사람이 신라에 몇명이나 왔나요??? 모르는 사람 보면 연나라 사람 대다수가 온것으로 착각할정도
역사를전공으로배우고연구한학자인가?
삼국사기에 애매한 부분이 있고 모순되는 부분도 분명히 있지만 법흥왕이 백제계라고 하질 않나? 무슨 판타지소설 쓰시나? 역사를 너무 가볍게 보시는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