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조시대(환국-배달국-조선)를 포함한 우리의 역사역년을 9천년사라고 합니다. 저도1960년대~70년대까지만 해도 동네 아이들과 함께 “1만 년 배달의 나라 ~”라고 노래를 부르고 돌아 다녔지요. 한국(환기 9214년), 신시개천 배달국(5914년), 고조선(4250년), 서기 2017년으로 기록했지요. 환국은 9천200년 전 12환국을 이루고 살았다. 환국은 1대~7대 환인이 3.301년간 다스렸다. 대홍수 이전에는 사람의 수명이 800~900년에 이르렀다는 말도 있다. 성경에도 하늘궁창(하늘 물 층)이 있어서 지금의 환경과 달랐다고 한다. 성경에 나온 노아의 나이가 900년에 이르렀다고 나온다. 대홍수는 서양이나 동양에서 비슷한 시기에 있었다는 것이다. 배달국은 개국한지 1.500년에 이르러 1대~18대 환웅이 통치했다. 치우천황이 배달국의 황제인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고조선은 개국 후 단군왕검이 구환족(九夷) 전체를 하나로 통일했다. 고조선은 47대 임금이 2.096년간 다스렸다고 한다. 고조선(BCE2333)은 1대~47대 단군이 다스렸다. 초대임금 단군왕검이 배달국을 개국한지 1500년에 이르러 9환족 전체를 하나로 통일해서 다스렸다. 일본 우익의 정한론자들과 식민사학자들이 환국-배달국-고조선의 7천 년 왕조사를 하느님 - 환웅 - 단군의 전설로 축약해 가르치게 하였다. 즉, 할아버지-아버지-자식의 가족사로 왜곡한 것이다. 즉, 어리석은 곰(토템)의 자손으로 짓밟은 것이다.
'도리이'가 바닷가 입구와 신당 앞에 주로 있는 이유는 한반도와 대륙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에 건너온 사람들을 반갑게 맞이하는 환영의 뜻을 의미하는 대문과 같은 의미가 아니었을까요? 도리이에 새가 앉아 있다는 것은 일종의 봉황, 까마귀와 같은 토템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네요. 우리 조상들의 왕관에 주로 봉황의 모습이 많이 보이잖아요. 일본에서 도리이를 많이 볼 수 있는 곳은 이상하게 일본 육지에서 바다 안쪽에 배가 닿을 정도로 어느 정도 들어와 있는 곳과 신궁 앞에 도리이가 세워져 있더군요. 왜일까요? 만주와 한반도에서 선진문물을 가지고 건너간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물론 당시에도 일본 열도의 토착민?이 있었을 것이고, 지도층은 문화가 발전한 도래인이었겠지요. 당시에 토착민과 도래인이 적지 않은 마찰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도래인 무사들의 득세가 전통적으로 내려왔을 것이고요. 자나깨나 그들 망국의 유민들의 숙원은 자자손손 대대로 고향인 대륙과 반도로 돌아갈 날만을 간절히 소원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일제시대 경기도 용인지역에 일본 천황궁을 옮기려고 터를 정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일본 천황가는 백제와의 인연을 자주 얘기하잖아요.
대마도에 갔을 때 다구두혼신사를 가보고 싶었으나 차편이 없어서 못갔는데, 이렇게 영상을 올려서 구경을 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꼭 참석하고 싶네요.
수고하셨습니다 ❤
삼성조시대(환국-배달국-조선)를 포함한
우리의 역사역년을 9천년사라고 합니다.
저도1960년대~70년대까지만 해도 동네 아이들과 함께
“1만 년 배달의 나라 ~”라고 노래를 부르고 돌아 다녔지요.
한국(환기 9214년), 신시개천 배달국(5914년), 고조선(4250년), 서기 2017년으로 기록했지요.
환국은 9천200년 전 12환국을 이루고 살았다.
환국은 1대~7대 환인이 3.301년간 다스렸다.
대홍수 이전에는 사람의 수명이 800~900년에 이르렀다는 말도 있다.
성경에도 하늘궁창(하늘 물 층)이 있어서 지금의 환경과 달랐다고 한다.
성경에 나온 노아의 나이가 900년에 이르렀다고 나온다.
대홍수는 서양이나 동양에서 비슷한 시기에 있었다는 것이다.
배달국은 개국한지 1.500년에 이르러 1대~18대 환웅이 통치했다.
치우천황이 배달국의 황제인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고조선은 개국 후 단군왕검이 구환족(九夷) 전체를 하나로 통일했다.
고조선은 47대 임금이 2.096년간 다스렸다고 한다.
고조선(BCE2333)은 1대~47대 단군이 다스렸다.
초대임금 단군왕검이 배달국을 개국한지 1500년에 이르러
9환족 전체를 하나로 통일해서 다스렸다.
일본 우익의 정한론자들과 식민사학자들이
환국-배달국-고조선의 7천 년 왕조사를
하느님 - 환웅 - 단군의 전설로 축약해 가르치게 하였다.
즉, 할아버지-아버지-자식의 가족사로 왜곡한 것이다.
즉, 어리석은 곰(토템)의 자손으로 짓밟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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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이'가 바닷가 입구와 신당 앞에 주로 있는 이유는
한반도와 대륙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에 건너온 사람들을
반갑게 맞이하는 환영의 뜻을 의미하는 대문과 같은 의미가 아니었을까요?
도리이에 새가 앉아 있다는 것은
일종의 봉황, 까마귀와 같은 토템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네요.
우리 조상들의 왕관에 주로 봉황의 모습이 많이 보이잖아요.
일본에서 도리이를 많이 볼 수 있는 곳은
이상하게 일본 육지에서 바다 안쪽에 배가 닿을 정도로 어느 정도 들어와 있는 곳과 신궁 앞에
도리이가 세워져 있더군요. 왜일까요?
만주와 한반도에서 선진문물을 가지고 건너간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물론 당시에도 일본 열도의 토착민?이 있었을 것이고, 지도층은 문화가 발전한 도래인이었겠지요.
당시에 토착민과 도래인이 적지 않은 마찰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도래인 무사들의 득세가 전통적으로 내려왔을 것이고요.
자나깨나 그들 망국의 유민들의 숙원은
자자손손 대대로 고향인 대륙과 반도로 돌아갈 날만을 간절히 소원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일제시대 경기도 용인지역에 일본 천황궁을 옮기려고 터를 정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일본 천황가는 백제와의 인연을 자주 얘기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