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잘 들었습니다. ( ) 무아란 고정되고 불변하는 하나의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 순간 인연따라 변화하는 내가 있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나에 대한 집착없이 이 인연따라 움직이는 나를 잘 발전시키는 것이 불교 공부이자 수행이라고 말씀을 합니다. 그리고 반야심경의 오온개공을 말씀하면서 오온(색수상행식) 즉 몸과 마음이 모두 공하다...라는 것을 지적하면서 몸이 텅 비었고, 마음도 텅 비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진공이지만 묘유이기도 하다, 즉 텅 비었지만 인연의 작용도 있다고 말씀합니다. 몸이 비었고, 마음이 비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해에 별 도움을 주지 않는 무익한 수사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을 들으면 이해가 증진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의문, 즉 마음이 비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라는 의문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공 소리만 들으면 혼란스럽다는 공란의 보살까지 있는 것을 보면 공, 짧아서 좋기는 한데 오해도 가져오지요. 오온개공, 이 4자의 주석을 위해 8만 4천 개의 경전이 만들어 졌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스님 무아에 대한 이해가 올바르지 않은 것같습니다. 스님, 생각은 누가합니까? 탐진치, 욕심은 누가 부리고, 화는 누가 내고, 어리석은 생각은 누가 합니까? 순간 순간 인연따라 변화하는 내가 합니까? 생각하는 주체로써 내가 없고, 욕심 부리는 내가 없고, 화를 내는 내가 없는 것입니다. 생각은 잠시 도 쉬지 않고 일어나지만 이것을 하는 자가 없다는 것이 무아의 가르침의 요체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상식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황당해 보이기까지 하는 견해이지만, 이것이 사실이고 진실입니다. 제법무아, 즉 일체 현상에 내가 없다는 말은 자연현상이든 마음의 현상이든 그 현상을 일으키거나 행하는 독자적 주체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 제법무아의 사태 기술은 특정 종교의 종교적 교리가 아니라 과학적, 경험적 사실입니다. 허나 이해가 어렵다 보니 종교적 교리가 되어 믿음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일체 현상,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볼 수만 있다면 제법무아는 자명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일체 현상에 그 현상을 일으키는 독자적 주체가 없는 것일까요? 이 우주의 삼라만상은 모두 연기법에 따라 일어나기 때문이죠. 중중무진으로 서로 얽히고 의존하여 현상, 사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연기법은 마음, 혹은 정신의 세계에도 예외없이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내게 한 생각, 한 감정, 한 의도, 한 욕구가 일어났을 때 이것을 나라는 주체가 일으켰다면 이것은 바로 연기법에 위배되는 것이죠. 연기법의 세계에서 주체, 나 라는 것은 존재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허나 범부의 의식에는 내가 무엇을 한다는 자아의식이 생생히 존재합니다. 내가 무엇을 했고, 하고 있고, 할 것이라는 자아의식이 정말 뼈속까지 박혀있고, 세포 하나 하나에 까지 스며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내가 무엇을 했니, 네가 무엇을 했니 따지면서 울고 웃으며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게 바로 근본 무명이지요. 자아의식에서 기원하는 착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착각을 보아야 하겠지요.
변하는 모든 것은 괴로움이다. 나라는 것은 늘 변하는 오온으로 구성되어 괴로운 것이다. 열반은 변하지않는 영원한 것을 것인데 오온을 미워하고 버려서 열반에 들자. 열반은 경험하는 것이므로 표현할 수는 있되 온전하게 표현하지 못하므로 열반에 대해 무아에 대해 떠들어봤자 그림으로 아는 바나나와 먹어본 바바나 만큼의 큰 괴리가 있다. 무아의 진정한 정체는 열반입니다.
아래에 힌두교의 아트만을 한자 번역에서 무아의 아라고 했기에 오류가 있다 했는데 그게 오류의 본질은 아니구요. 물론 오류는 있어요. 붓다의 견성 무아트만은 한자로 한다면 무의식이 맞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무의식의 일종, 무의식의 최하층, 본능 등으로 이해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아트만은 무의식속의 나라고 볼 수 있죠. 즉, 무아트만은 무무의식 즉, 본능의 최하층이지만 접근 불가, 존재불가한 가상의 그것이라 볼 수 있죠. 숫자로 말하면 제로의 개념이죠. 아트만이 의식으로 정의될 수도 있고 무의식으로 정의될 수도 있는 선배들의 상황이 된 겁니다. 상기의 아트만과 무아에 대한 불교와 선 가에서 혼동스런 정의가 존재하는 건 그것을 말하는 선사들이 무의식과 의식과의 관계와 그 존재 자체를 모르기 때문이죠. 과학에서 말하는 벡터 (방향성) 의 개념으로 불교의 깨달음 그리고 과거 석가의 깨달음과 그 설명을 이해해야 합니다. 본능까지를 버리면 완전한 무아 즉, 죽음만이 남기에 본인이 말하는 모든 것이 부정됩니다. 따라서 부처 즉 깨달은자 누구를 포함하여 본능까지 제거하는 것은 불가한 한계속에 있죠. 불교와 붓다의 논리에서 그리고 힌두교도 마찬가지지만 논리 오류는 무의식의 존재를 몰랐기에, 즉 아트만이라는 것을 의식이면서 동시에 무의식을 총괄하는 전체의 나로 보았기에 그런 겁니다. 당시 힌두교도들이 breath 를 아트만이라 본 것도 그들이 상상하는 나라는 것은 오직 의식의 존재와 세계 뿐인데 그것을 호흡 (=전 생명체 즉, 참나를 포함하는 전 인간체) 과 동일시 (착각) 했기에 무아의 이해와 정의에 혼돈이 존재하는 겁니다. 무아란 무의식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며 붓다가 당시에 깨달은 것도 이 상태 (무의식의 최하층, 생의 본능만이 남은 상태) 를 의미하는 겁니다. 붓다의 설법에 마치 이것이 무의식과 잠재의식 그리고 본능까지 모든 것을 초월한 즉, 시공을 초월하여 전 우주를 보고 전 우주와 합체가 된 듯한 표현은 과언입니다. 당시의 붓다 역시 그 자신의 시공속에 갖혔던 한 육신의 한계적 존재였던 겁니다. 당시 그가 우주와 합일됐다는게 그가 직접 한 말인지 아니면 후대에 누가 첨언한 것인지 모르지만, 만일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소위 전지전능 시공초월 또는 우주 자체인 그가 중생의 고통을 구제하려 했는데도 당시 해결치 못하고 왜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지옥속에서 헤메이게 놔뒀을까요 ? 논리적으로 말이 안되죠.
우리나라 불교의 가장 큰 문제점은, 한문으로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무아'할 때, '아는 '나'가 아니라, 아트만입니다. 당시 우파니사드 종파에서 아트만을 주장했는데, 붓다는 그런 아트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고, 그것을 한자로 옮긴 것이 무아입니다. 그런데, 아를 '나'로 풀이해서, 자꾸 '내가 없다'는 식으로 이해하니 안타깝네요. 남방불교에서는 공 사상을 '텅 비었다'가 아니라 '(아트만이) 없다'로 풀이합니다. 그런 해석에 대한 근거는 초기경전에 있구요. 홍익학당 윤홍식씨는 붓다가 아트만이 있다고 주장했다고 하는데, 붓다의 제자 사티(Sati)가 그런 식으로 주장했다가 붓다에게 큰 꾸지람을 들었다는 내용이, 초기경전 Majjhima Nikaya 제38장에 나옵니다. 한마디로 윤홍식씨가 틀린 것이지요.
오온개공. 사대로 이뤄진 육신과 (색) 수상행식 이것이 “무아”. 라 한것. 아트만이 아님. 견성. 참나. 본래면목. 불성. 이것을 힌두교에선. 아트만. 이라한것. 소승과대승이 짬뽕된 오늘날 한국불교. 뭐이 제대로된 수행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될까? 반야심경을 제대로 이행하고 깊은 뜻을 아는 수행승이 한국 불교에 있을까? 깨달음의 세계? 업장은 어찌할겨!!! 돈오를 말하면서. 돈수와보임을 말하지 않는다.
맛지마니까야 38경 갈애의 부숨에 대한 경 이 내용이 아트만 하고 무슨 연관인지? 인간의 육근의으로 경험된 의식을 설하신 경인데. 오온의. 식에 해당되는 말씀인데. 이게. 아트만??? 좀더 공부하세요. 공부는 학교에서 배우듯 경전이나 선지식의 말씀으로만 되는것이 아닙니다. 체험과 끝없는 자기 자신의 반조로 이뤄지는것. 석가세존은 오온의 무아 를 말씀하신것
Jehum Jong Majjhima Nikaya 제38장 도입부를 보면, Sati가, 전생의 consciousness와 현생의 consciousness는 같다고 주장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말은 곧, Sati가 consciousness(식)를 atman으로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붓다의 다른 제자들이 이 사실을 붓다에게 알렸고, 붓다가 Sati를 불러 꾸짖었다는 것이, 제38장 초반에 나옵니다. (Majjhima Nikaya 38.1 ~ 38.5)
진공의 무아를 체득하면 객체가 모두 모두가 무아이니 무아는 머무는 것이란 말이 성립안될것 같네요,
스님, 법문 잘 들었습니다. ( )
무아란 고정되고 불변하는 하나의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 순간 인연따라 변화하는 내가 있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나에 대한 집착없이 이 인연따라 움직이는 나를 잘 발전시키는 것이 불교 공부이자 수행이라고 말씀을 합니다.
그리고 반야심경의 오온개공을 말씀하면서 오온(색수상행식) 즉 몸과 마음이 모두 공하다...라는 것을 지적하면서 몸이 텅 비었고, 마음도 텅 비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진공이지만 묘유이기도 하다, 즉 텅 비었지만 인연의 작용도 있다고 말씀합니다.
몸이 비었고, 마음이 비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해에 별 도움을 주지 않는 무익한 수사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을 들으면 이해가 증진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의문, 즉 마음이 비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라는 의문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공 소리만 들으면 혼란스럽다는 공란의 보살까지 있는 것을 보면 공, 짧아서 좋기는 한데 오해도 가져오지요.
오온개공, 이 4자의 주석을 위해 8만 4천 개의 경전이 만들어 졌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스님
무아에 대한 이해가 올바르지 않은 것같습니다.
스님, 생각은 누가합니까?
탐진치, 욕심은 누가 부리고, 화는 누가 내고, 어리석은 생각은 누가 합니까?
순간 순간 인연따라 변화하는 내가 합니까?
생각하는 주체로써 내가 없고, 욕심 부리는 내가 없고, 화를 내는 내가 없는 것입니다.
생각은 잠시 도 쉬지 않고 일어나지만 이것을 하는 자가 없다는 것이 무아의 가르침의 요체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상식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황당해 보이기까지 하는 견해이지만, 이것이 사실이고 진실입니다.
제법무아, 즉 일체 현상에 내가 없다는 말은 자연현상이든 마음의 현상이든 그 현상을 일으키거나 행하는 독자적 주체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 제법무아의 사태 기술은 특정 종교의 종교적 교리가 아니라 과학적, 경험적 사실입니다. 허나 이해가 어렵다 보니 종교적 교리가 되어 믿음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일체 현상,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볼 수만 있다면 제법무아는 자명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일체 현상에 그 현상을 일으키는 독자적 주체가 없는 것일까요? 이 우주의 삼라만상은 모두 연기법에 따라 일어나기 때문이죠. 중중무진으로 서로 얽히고 의존하여 현상, 사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연기법은 마음, 혹은 정신의 세계에도 예외없이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내게 한 생각, 한 감정, 한 의도, 한 욕구가 일어났을 때 이것을 나라는 주체가 일으켰다면 이것은 바로 연기법에 위배되는 것이죠.
연기법의 세계에서 주체, 나 라는 것은 존재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허나 범부의 의식에는 내가 무엇을 한다는 자아의식이 생생히 존재합니다. 내가 무엇을 했고, 하고 있고, 할 것이라는 자아의식이 정말 뼈속까지 박혀있고, 세포 하나 하나에 까지 스며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내가 무엇을 했니, 네가 무엇을 했니 따지면서 울고 웃으며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게 바로 근본 무명이지요.
자아의식에서 기원하는 착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착각을 보아야 하겠지요.
tiger easy 오온이 내가아니다 ㅡ색수상행식이 내가 아니다
부처님말씀입니다
그냥존재하는 나
그냥존재하는 우주
잡소리 그만하고,,, 이런건 아무짝에 소용없는 헛소리로 알아서,,, 수행에 전념하시오
당신들,,, 이런소리 하라고 부처께서 설법하신거 아니여
아는체하고, 겸손함이 없다면 부처의 모든말씀 텅빈 종이조각에 불과할뿐이지,,,
변하는 모든 것은 괴로움이다. 나라는 것은 늘 변하는 오온으로 구성되어 괴로운 것이다.
열반은 변하지않는 영원한 것을 것인데 오온을 미워하고 버려서 열반에 들자.
열반은 경험하는 것이므로 표현할 수는 있되 온전하게 표현하지 못하므로
열반에 대해 무아에 대해 떠들어봤자 그림으로 아는 바나나와 먹어본 바바나 만큼의 큰 괴리가 있다. 무아의 진정한 정체는 열반입니다.
여기 깨달은자 투성이로군,,,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어제의나와 오늘의 내가 같지않다 어제는 괘로움이심했는데 잠자고난 오늘은 기분이 홀가분해 만일 어제의 내가 오늘의내가같다면 3살때 내가8십넘은내가같다 이는아니지요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합장합니다.
모르시면 말을 하시면 안됩니다.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공묘유
소립자세계에도 부합하는 개념
아래에 힌두교의 아트만을 한자 번역에서 무아의 아라고 했기에 오류가 있다 했는데 그게 오류의 본질은 아니구요. 물론 오류는 있어요. 붓다의 견성 무아트만은 한자로 한다면 무의식이 맞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무의식의 일종, 무의식의 최하층, 본능 등으로 이해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아트만은 무의식속의 나라고 볼 수 있죠. 즉, 무아트만은 무무의식 즉, 본능의 최하층이지만 접근 불가, 존재불가한 가상의 그것이라 볼 수 있죠. 숫자로 말하면 제로의 개념이죠.
아트만이 의식으로 정의될 수도 있고 무의식으로 정의될 수도 있는 선배들의 상황이 된 겁니다. 상기의 아트만과 무아에 대한 불교와 선 가에서 혼동스런 정의가 존재하는 건 그것을 말하는 선사들이 무의식과 의식과의 관계와 그 존재 자체를 모르기 때문이죠.
과학에서 말하는 벡터 (방향성) 의 개념으로 불교의 깨달음 그리고 과거 석가의 깨달음과 그 설명을 이해해야 합니다.
본능까지를 버리면 완전한 무아 즉, 죽음만이 남기에 본인이 말하는 모든 것이 부정됩니다. 따라서 부처 즉 깨달은자 누구를 포함하여 본능까지 제거하는 것은 불가한 한계속에 있죠.
불교와 붓다의 논리에서 그리고 힌두교도 마찬가지지만 논리 오류는 무의식의 존재를 몰랐기에, 즉 아트만이라는 것을 의식이면서 동시에 무의식을 총괄하는 전체의 나로 보았기에 그런 겁니다. 당시 힌두교도들이 breath 를 아트만이라 본 것도 그들이 상상하는 나라는 것은 오직 의식의 존재와 세계 뿐인데 그것을 호흡 (=전 생명체 즉, 참나를 포함하는 전 인간체) 과 동일시 (착각) 했기에 무아의 이해와 정의에 혼돈이 존재하는 겁니다.
무아란 무의식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며 붓다가 당시에 깨달은 것도 이 상태 (무의식의 최하층, 생의 본능만이 남은 상태) 를 의미하는 겁니다. 붓다의 설법에 마치 이것이 무의식과 잠재의식 그리고 본능까지 모든 것을 초월한 즉, 시공을 초월하여 전 우주를 보고 전 우주와 합체가 된 듯한 표현은 과언입니다.
당시의 붓다 역시 그 자신의 시공속에 갖혔던 한 육신의 한계적 존재였던 겁니다. 당시 그가 우주와 합일됐다는게 그가 직접 한 말인지 아니면 후대에 누가 첨언한 것인지 모르지만, 만일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소위 전지전능 시공초월 또는 우주 자체인 그가 중생의 고통을 구제하려 했는데도 당시 해결치 못하고 왜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지옥속에서 헤메이게 놔뒀을까요 ? 논리적으로 말이 안되죠.
우리나라 불교의 가장 큰 문제점은, 한문으로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무아'할 때, '아는 '나'가 아니라, 아트만입니다. 당시 우파니사드 종파에서 아트만을 주장했는데, 붓다는 그런 아트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고, 그것을 한자로 옮긴 것이 무아입니다. 그런데, 아를 '나'로 풀이해서, 자꾸 '내가 없다'는 식으로 이해하니 안타깝네요. 남방불교에서는 공 사상을 '텅 비었다'가 아니라 '(아트만이) 없다'로 풀이합니다. 그런 해석에 대한 근거는 초기경전에 있구요.
홍익학당 윤홍식씨는 붓다가 아트만이 있다고 주장했다고 하는데, 붓다의 제자 사티(Sati)가 그런 식으로 주장했다가 붓다에게 큰 꾸지람을 들었다는 내용이, 초기경전 Majjhima Nikaya 제38장에 나옵니다. 한마디로 윤홍식씨가 틀린 것이지요.
fortunekidvonhong
오온개공. 사대로 이뤄진 육신과 (색) 수상행식 이것이 “무아”. 라 한것. 아트만이 아님. 견성. 참나. 본래면목. 불성. 이것을 힌두교에선. 아트만. 이라한것. 소승과대승이 짬뽕된 오늘날 한국불교. 뭐이 제대로된 수행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될까?
반야심경을 제대로 이행하고 깊은 뜻을 아는 수행승이 한국 불교에 있을까?
깨달음의 세계? 업장은 어찌할겨!!! 돈오를 말하면서. 돈수와보임을 말하지 않는다.
맛지마니까야 38경 갈애의 부숨에 대한 경 이 내용이 아트만 하고 무슨 연관인지?
인간의 육근의으로 경험된 의식을 설하신 경인데. 오온의. 식에 해당되는 말씀인데. 이게. 아트만???
좀더 공부하세요. 공부는 학교에서 배우듯 경전이나 선지식의 말씀으로만 되는것이 아닙니다.
체험과 끝없는 자기 자신의 반조로 이뤄지는것. 석가세존은 오온의 무아 를 말씀하신것
Jehum Jong 한자 무아는 팔리 말 Anatta, 산스크리트 말 Anatman 을 번역한 것입니다. 나머지 내용은 아래 링크를 따라가 보세요. www.britannica.com/topic/anatta
Jehum Jong Majjhima Nikaya 제38장 도입부를 보면, Sati가, 전생의 consciousness와 현생의 consciousness는 같다고 주장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말은 곧, Sati가 consciousness(식)를 atman으로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붓다의 다른 제자들이 이 사실을 붓다에게 알렸고, 붓다가 Sati를 불러 꾸짖었다는 것이, 제38장 초반에 나옵니다. (Majjhima Nikaya 38.1 ~ 38.5)
엉뚱한 아트만 논의로 변죽을 때리는구나.
나 =공=우주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한생각 일어나면 모두 틀린얘기,,,
스님 법문을 잘 들었습니다. 견성이후에 제대로된 수행입니다. 무아. 무엇이 무아인지. 제대로된 설명이 부족합니다
아공. 법공이 뒤썩인 말씀입니다. 아공을 먼저 알고. 법공을 깨달음뒤. 육도만행이 자동으로 이뤄지는법. 오온색신으로 행하라는 말씀이군요. 그러니. 힘들고. 괴롭죠. 이것이. 고. 입니다.
수행? 삶을 살아가는것이 수행이죠. 가부좌틀고. 무념무상으로 삼매를 찾아다닌는것이 수행이라 말하면 그것아니라 할수 있죠. 항상 내가 무슨생각으로 어떤 마음으로 행동하는가를 깨어서 지켜보며 살아가는것이 수행이죠.
아 폰 부탁드립니다
아
거참 시끄럽네,,,,
쓸데없는 소리좀 그만하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