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山城)의 나라(4) 백제 부흥군 최후의 거점, 주류성(周留城, 부안 우금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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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Опубликовано: 28 ноя 2024
- 백제 왕조는 서기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패하면서 의자왕을 비롯한 왕족이 모두 당나라로 끌려가 사실상 망했다. 하지만 백제 전역에서 부흥군이 일어나 3년여 동안 치열한 항전을 벌인다. 의자왕의 사촌동생 귀실복신과 승려 도침이 중심이 된 부흥군은 주류성(부안 우금산성)에 거점을 둔다. 둘은 백제 왕조의 재건을 명분으로 왜국에 있던 의자왕의 왕자 부여풍을 데려와 왕으로 삼고 왕조의 부활을 천명했다.
주류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으나 백강해전 등 여러가지 사정을 종합하면 현재의 우금산성이 가장 유력해 보인다.
부흥군이 주류성을 거점을 삼은 이유는 몇가지로 추정된다.
1. 금강을 통하면 부여로 곧장 이어지고, 육로도 부여까지 바로 열려 있으며
2. 만약의 경우 바다를 통해 동맹국인 왜국으로 탈출하기 좋으며
3. 앞으로는 대평야를, 뒤편으로는 험준한 산악지대를 끼고 있어 관측과 방어에 유리하다.
하지만 663년 8월, 왜국이 전국력을 쏟아 보낸 2만7천의 원군이 나당군에 대패하면서 고립무원이 된 주류성도 곧 함락되고, 백제는 영영 멸망하고 만다.
현재의 우금산성은 북벽 일부를 제외하고 거의 허물어졌으나 돌너덜 형태로 흔적은 잘 남아 있다. 둘레가 4km에 달하는 거성이다. 성벽을 따라 일주할 수 있는 길이 있지만 찾는 이가 많지 않아 여름철에는 거의 잡초에 묻힌다.
우금바위 아래에 있는 복신굴은, 서로간의 알력끝에 도침을 죽인 복신이 은거하고 있다가 풍왕(부여풍)에게 잡혀 죽임을 당한 곳이다.
전 주류성의 위치가 부여 외산지역이 가장 유력하고 두번째는 홍성남쪽 오서산 지역 세번째는 부안이라고 생각이되는데
겨울 12월 병술(丙戌) 초하루: 백제왕(百濟王) 풍장(豊璋), 그 신하 좌평(佐平) 복신(福信) 등은 사이노무라지(狹井連)[1], 에치노 타쿠츠(朴市秦 田来津)[2]와 의논하기를 “이 주유(州柔)[3]는 농토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가 척박하여 농업과 양잠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고, 이곳은 방어하기 좋아 싸울 만한 곳이다. 여기에서 오래 머문다면 백성들이 굶주릴 것이니 이제 피성(避城)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 피성은 서북쪽으로는 띠를 두르듯 고련단경(古連旦涇, 충남 당진군 신평면에 흐르는 신평천)이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깊은 수렁과 커다란 둑으로 된 제방이 자리하고 있으며, 땅으로 둘러싸여 있고 도랑을 터트리면 물이 쏟아진다. 꽃과 열매가 있는 나무에서 얻는 토산물은 삼한(三韓)에서 가장 기름질 것이며, 옷과 음식의 근원은 천지 사이에 숨어 있는 곳일 것이다. 비록 낮은 땅(평지)이라고 하지만 어찌 옮기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에치노 타쿠츠가 혼자 나아가 “피성과 적이 있는 곳과의 거리는 하룻밤이면 갈 수 있습니다. 서로 이렇게 매우 가까우니 만약 예기하지 못한 일이 있게 되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굶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망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지금 적이 함부로 오지 않는 것은 주유가 산이 험한 곳에 있어 모두 방어물이 되며, 산이 높고 계곡이 좁아 지키기 쉽고 공격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약 낮은 땅에 머물면 어찌 굳건히 살겠으며 흔들리지 않음이 오늘날에 미치겠습니까?”라고 간하였다. 끝내 (백제왕은) 간하는 말을 따르지 않고 피성에 도읍하였다.
위에 보듯 주류성의 특성을 설명한 곳이 부여 외산 홍성 남쪽 오서산 부안쪽입니다. 일단 3지역은 토지와 척박하고 산세가 험한 지역이지요. 그런데 그다음에 피성으로 옮기는것이 좋다는것으로 봤을때 서쪽은 당진쪽 고련단경 동남쪽에 제방을 말한것을 보아 예당호를 뜻하는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위치가 주류성과 가까운 피성을 생각하면 지금 피성은 지금 충남도청이 있는 지역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게다가 피성은 저지대에 평지입니다. 피성 위치가 김제라면 고령단경과 제방에 대해 설명하기가 애매해집니다.
제 생각에는 주류성의 위치가 부여 외산지역이나 홍성 남쪽 오서산근처였는데 그쪽에서 너무 먹고 살기 힘들어서 지금 충남도청 지역으로 옮겼다가 다시 쫓겨난것인것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두륭윤성과 주류성이 같이 함락되었다는것을 볼때 두륭윤성(청양 정산) 더더욱 위치가 저쪽일 개연성이 높다고 보입니다.
주류성을 부여 외산면 지역으로 보시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주류성을 공부하면 할수록 부안 우금성 주류성 설을 부정하게 됩니다.
김제 성산의 피성 설 또한 어느것도 고증되지 않은 추측에 불과할 뿐인데 지금은 정설이 되버렸습니다.
주류성은 수많은 유민들과 함께하는 상상하기 힘든 산악지역 넓은 공간으로 추측합니다.
희미한 역사의 기억의 계단을 다시 되밟아 가다보면 결국은 산성으로 가게 마련이네요. 구글 어스의 버드스 이이와 술미 작가님의 역사해석력이 조화를 이뤄 다음 편을 또 기다리게 하네요.
청장님께서 댓글까지 달아주시고...응원에 감사드립니다. 원래는 드론으로 찍어볼 계획이었는데 언제 될까 기한이 없다가 구글 덕분에 편하게 작업합니다. 아직 너무 부족해서 미안할 따름입니다
@@SOOLMEEE 제 사는데 골몰해서 너무 늦었네요ᆢ 성원합니다. 나중에 장관님과 현장을 답사하는 리얼영상을 만들어 보는것도 좋겠어요ᆢ
@@조조용연-l9i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저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생님,개모성,건안성도 해주세요.
잘 봤습니다 그런데 주류성은 정확한 위치가 밝혀지지 않았다고 하던데 보시기에는 부안의 저 성이 기록 상의 주류성과 일치한다고 생각하시나요?
기록과 입지, 현장답사 결과 저는 이곳이 주류성이라고 봅니다. 홍성 장곡산성도 후보로 거론되지만 부흥군이 기댈 데가 왜국뿐이어서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해안이 가까워야 하고, 백강과도 근접해야 하며, 사비성과도 적당한 거리여야 하는 점 등을 고려하면 우금산성이 가장 유력해 보입니다. 울금바위에 전하는 복신굴의 전설도 그렇고, 1만 이상의 병력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에서도 유력해 보입니다. 의견 감사합니다.
@@SOOLMEEE / 아 ㅎ 답변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부여풍이 주류성에서 잠깐 옮겼다는 피성도 추정하신 곳이 있나요? 신라군의 공격으로 다시 주류성으로 옮겼다고 하던데 기록을 보면 주류성과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 같아서요
@@saljook 잘 아시겠지만 피성은 김제와 당진이 후보로 거론되는데, 일본서기의 기록과 주류성에서의 거리를 감안하면 대평야 가운데에 자리한 김제가 유력한 듯합니다. 김제시내 서쪽 성산공원에는 아직도 옛 성벽이 남아 있고 이름도 성산(城山)이며, 주민들은 백제의 주성(主城)으로 부르는데 왕(부여풍)이 잠시 있었다는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부안 주류성에서의 거리도 25km로 근접해 있고 육안으로도 서로 보입니다. 피성으로 옮길 때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방어능력이 좋은 주류성을 후방 가까이에 둬야 안심이 되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고 봅니다. 감사합니다.
@@SOOLMEEE / 아 ㅎ 상세하게 알려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ㅎ
이 앱 이름이 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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