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대첩과 착해진 왜장, 이순신의 한산대첩과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대결과 영향, 그리고 행주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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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11 сен 2024
  • 이순신의 한산대첩은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강감찬의 귀주대첩과 함께 한국사의 3대 대첩이라고 불린다.
    한산대첩으로 말미암아 임진왜란 시기에 일본의 수륙병진작전은 좌초되어 평양(6.14 함락)까지 진출했던 소서행장은 발이 묶이게 되었다.
    이순신의 조선 수군에게 연패하자 분노한 풍신수길은 키즈가와구치 해전에서 6척의 철갑선으로 모리의 무라카미 수군 600척을 물리친 해전의 명수 구키 요시타카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동시에 용인전투에서 1500의 병력으로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모인 5만의 삼도근왕병을 격퇴시킨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해군으로 차출하여 이순신과 조선 수군을 토벌하도록 지시하였다.
    1500명의 병력으로 5만의 조선근왕병을 격퇴한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조선군을 깔보는 마음이 컸다.
    한편 전라좌수영의 함대를 거느린 이순신장군이 전라우수영 이억기와 경상우수영의 원균의 함대와 함께 한산도 근해에 머물며 5척의 판옥선으로 유인하였다.
    그러자 견내량에 머무르던 와키자키의 72척의 왜선은 단독으로 견내량해협을 통과하여 한산도 앞바다로 진격하였다.
    속도가 빠른 일본의 전함은 상대적으로 속도가 느린 조선의 판옥선을 따라잡기 위해 속도를 높였다.
    그리하여 와키자카의 전함들은 한산도 앞바다로 깊숙이 유인되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이순신의 함대가 학익진을 펼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학익진의 허리를 갈라놓고자 속도를 높였다.
    그때 이순신의 함대는 일제히 왜선의 선두를 향하여 함포를 발사했다.
    당시 왜군 조총의 사정거리는 50m에 불과했고 그들의 장기는 배 위로 올라가서 백병전으로 승리를 쟁취하는 등선육박전술이었다.
    당시 전국시대를 겪었던 일본의 칼을 든 왜병 한 명은 조선 수군 5명과 비슷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잘 알고 있었던 이순신 장군은 사정거리 1000m의 화포를 이용하여 왜선을 먼거리에서 격침시켰다.
    왜선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침몰하였고 급한 추격으로 뒤처져 있었던 왜선만이 그 광경을 보고 놀라 달아나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결국 와키자카의 73척의 함대중 59척이 한산도에서 침몰하였다.
    그리고 뒤처져 있었던 14척의 왜선만이 간신히 도망쳤다.
    그때가 1592년 7월 8일이었다.
    이를 본 구키 요시타카는 퇴각하여 안골포에 머물렀으나 7월 10일 이순신 장군의 함대에 발각되어 42척의 전함중에 20여척의 손실을 입고 간신히 도주하였다.
    한산해전에서 패배한 후 풍신수길은 일본 수군에게 바다위에서의 조선 수군과의 교전을 금하고 조선의 수군을 만나면 무조건 도망치라고 명령하였다.
    이를 통해 조선의 서해를 통한 일본군의 보급은 철저히 차단되고 곡창지역인 전라도 지역이 지켜짐으로서 임진왜란은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한산대첩 이전에 평양성에서 소서행장은 의주로 몽진했던 선조에게
    “서해 바다로 우리 일본군 10만 병력이 올라올 것인데 이제 어디로 도망가시렵니까?”라는 조롱의 서신을 보냈고 선조는 두려움에 떨었다.
    하지만 한산대첩으로 선조는 희망을 찾았고 소서행장은 보급차질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으로 상황이 역전되었다.
    한산대첩 이후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한반도의 대부분의 강들이 서해로 흐르는 상황에서 바다를 통한 왜군의 보급이 끊기고 아군이 보급을 받는 상황이 연출됨으로서 임진왜란의 향방은 크게 바뀌게 된다.
    행주산성에서 농성하던 권율장군도 해상을 통한 해군의 보급을 받아 행주대첩의 신화를 썼다.
    행주산성 전투에서 조선군의 화살이 떨어지며 패색이 짙어질 때쯤 기적 같은 지원이 이루어졌다. 충청 수사 정걸이 배 2척에 화살 수만 발을 실어 한강을 거슬러왔던 것이다.
    더욱이 양천으로 가는 수십 척의 전라도 조운선이 지나갔는데 이것이 일본군에게는 이순신이 인솔하는 조선 수군의 원군으로 보였다.
    이들이 적의 후방쯤에서 내릴 기색을 보이자 일본군도 당황하여 비로소 물러나기 시작했는데 이때 조선군이 추격하여 일본군을 패퇴시켰고 이때 일본군 1백여 명 이상을 참살했다.
    이는 한산대첩으로 서해와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편 화살을 맞아 부상당했던 왜장 와키자카는 대장선이 침몰하자 쾌속선으로 갈아타고 당시 무인도였던 한산도에 상륙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13일 동안이나 솔잎과 미역을 먹으며 버티다가 간신히 불에 탄 널빤지로 뗏목을 만들어 거제도를 거쳐 김해로 돌아갔다.
    와키자카는 한산도 해전에서 큰 교훈을 얻은 듯 이후 매사에 신중하고 겸손하게 처신하였다
    그리고 한산해전이 일어났던 7월 8일에는 와키자가 가문은 다른 음식을 삼가고 미역만을 먹는 전통을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한편 와키자카는 “내가 가장 증오하는 자는 이순신이요, 자장 미워하는 자도 이순신이다. 그리고 가장 두려워하는 자도 이순신이요 가장 존경하는 자도 이순신이다. 그리고 같이 한잔 나누고 싶은 자도 이순신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공명심에 불타 큰 패배를 경험했지만 실패를 교훈삼아 한층 성숙해진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나름 대단한 인물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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