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장편을 듣다보니, 도올 교수가 그의 유튜브 강의에서 "부처님의 카필라성 유적지를 직접 답사를 갔다왔었다"면서, "불경을 읽다보면 아방궁 정도 크고 대단했을 거라 상상하고 갔는데, 현장을 가봤더니 '시골 초등학교 운동장 정도'더라"더군요. "비유하자면 '왕자 출신'이란 말은 좀 뻥이고, '이장 아들' 정도였을 것"이라던 강의 내용이 기억나네요^^ 맹자 책에서도, 말끝마다 '(요순 임금이) 천자~' 운운하는 대목이 자주 등장하는데, 어떤 책에서 "이장" 정도였다면서, 인구수로 보나 지배 영역 넓이로 볼 때 '이장'으로 표현해야 팩트일 거라던 생각이 나네요^^ 고대 산동반도 한 구석에서 '이장하던 사람'이 나름 잘 했던가 본데 그 지역민 출신들이 차츰 영역을 넓혀가면서 '요순 등 조상' 이야기도 용비어천가 식으로 확대해 나가면서 '요순 시대에 지금 중국 강역을 통치했었던 듯 착각하게' 만들어 신격화해 오느라 ~ 했던 게 만장편 류가 아닐까 싶네요 ^^ 인류 역사는 (한줌의) 지배층들이 '백성들을 갖가지 방식으로 가스라이팅해 온 과정'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더 깊게 하네요^🤣^ 만장편, 맹자의 변명들이 요즘 '내로남불의 원조'란 느낌이 솔직히 강하게 드네요^😃^ 양혜왕을 질타할 땐 혼자 잘난 체는 다하더니, 만장이 막상 (그런 돈을 맹자 당신도 받고 있지 않느냐고) 질타하니까 '요즘 정치인들이 뇌물로 수사받게 되면 댓가성이 없었다. 정치자금일 뿐' 이란 변명과 그야말로 "오십보 백보"네요^😆^ '내로남불은 자연의 순리' 아닐까 싶고, 그게 '불편한 진실'이라는 느낌을 '맹자' 2회독을 통해 강하게 갖고 마치네요^😊
노평공과 맹자의 만남 불발을 천명론으로 돌린 걸로 보아 맹자를 운명론자로 평하셨는데, 저는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70세가 되어보니(이른바 '종심소욕불유구'?'), 맹자의 처신이 참으로 옳았다고 추정되네요 ^^ 어떤 일이 성사되고 안 되고는 꼭 노력이나 실력만으로 결정나지도 않고, 당장 성사된 일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큰 손해나 죽기보다 더한 패착이 되기도 하고, 안 돼서 그 땐 실망했지만 시간이 지나다보면 목숨을 건질 정도로 다행이었던 경우가 숱했더라구요😅 그래서 인생은 길게 봐야 되고, 일희일비해선 안 된다는 걸 깨닫게 되더라구요^^ 한 치 앞을 못 보는 게 인생이구요^😊^
양혜왕(위나라)편 초반부의 대화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bc341년 마릉전투로 위나라가 망할 뻔 했다가 겨우 제나라에 칭신하고서 멸망하는 건 벗어났었고 5년 뒤인 맹자가 36세인 bc336년 위혜왕을 방문한 때로 추정되옵고, 위혜왕(양혜왕)으로선 당시 일타강사로 드날리던 젊은 맹자를 초빙하여 재기를 꿈꿨던 걸로 보입니다. 결과는 서로 '동상이몽'(맹자는, 상앙이 진효왕을 두번째 만난 날 펼친, 왕도만 설했고, 양혜왕은, 맹자가 방연이나 손빈의 역할 정도를 해 줄 수 있겠나 싶어, 면접을 본 듯 보이고, 놓친 상앙이 진나라에 가서 변법으로 최강국으로 만드는 걸 보고서 맹자가 상앙 역할을 해줄수 있겠나 싶어 서로 '선문답'하다 서로 탐색전만 하다 "밥만 먹고" 헤어지고서, 맹자는 바로 제나라로 떠났던 성 싶네요^^ 그 이후에도 맹자는 위나라와 제나라를 왔다갔다 하다가 마지막으로 bc320년 맹자 52세, 위혜왕 80세쯤에 만나서 태자(후계구도)를 부탁해 보려 했던 듯 싶네요. 이때 맹자는 제나라 직하학당에서 활동하면서 재상급 예우를 받으면서 수백명 제자들과 함께 외출시 수레50대가 따르는 '최상급 예우'를 받던 시기였구요^^ 이무렵엔 제나라에선 종리춘. 손빈 등 병법가들이 직하학당의 '사실상 스파이 활동'을 문제삼아 존폐론이 일어나자 맹자학파도 이참에 차라리 위나라로 근거지를 옮길까 싶던 차로 보이고 서로 진지한 탐색전을 벌이다 밥만 먹고 헤어진 듯 추정됩니다 ^^ 이때 제선왕도 종리춘의 충간을 수용해 '개선책'으로 직하학당이 '스파이 활동'으로 변질되지 않게 제도를 보강하기로 결단하고, 종리춘을 '왕후'로 전격 발탁했고 이런 대임을 수행하는 '국정원' 같은 비밀기관을 운영키로 하고서, 맹자. 추연. 순우곤 등을 다시 초빙해 외견상 식객단 형식으로 하여 조직을 추스렸을 듯 싶네요. 이때 맹자는 54세쯤이었고요. bc302년 맹자 70세부터는 직하학당 학사들을 제도권으로 등용하는 즉 '대부'로 임명해 가면서 추연(음양가). 순우곤(유머 전문가). 접여(도가)를 대부로 임용했는데, 맹자. 고자 등은 그대로 명예직을 고수하면서 유가가 도가에 좀 밀리는 계기가 되었다는 학설도 있네요. 아무래도 뽀대는 명예직 고위급이 좋을 지 모르나, 정책결정권과 예산집행권이 주어지는 '대부' 직을 맡았던 음양가와 도가 계열이 급부상하는 계기가 되었을 듯요. 오늘날도 제나라 지역이던 산동반도엔 음양가. 노장 도가가 우세하다니, 우연이 아닌 듯 추정됩니다. 한 세대 후 직하학당 최고 지도자로 좨주를 도맡았던 유가학파 순자가 초나라로 떠난 배경에도 이런 분위기, 즉 실무직이냐 명예직이냐의 파워게임도 작용했지 않나 추정됩니다 ^😀^
'맹자 진심편 후반부'에서 맹자가 양혜왕을 심하게 뒷담화 치는 부분부터는 bc 319년경 양혜왕이 죽은 이후 bc 318년경 제나라(제선왕)에서 직하학궁을 재건하고 76명 유명인사를 대부급으로 행정 결정권을 갖는 실직을 부여했던 당시 맹자도 위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이주했던 듯 추정됩니다. 맹자는 평생 정치적 법률적 책임을 지는 '실직'은 맡지 않고 '명예직'이지만 장관급 예우를 받는 '객경 지위'로 자유롭게 활동했던 걸로 알려져 있기에, 이미 떠난 위나라에서의 위혜왕(양혜왕)과의 대화 등을 뒷담화로 삼았던 걸로 추정됩니다. 당시 제나라에서 '실직'을 받았던 손우곤 등과 맹자는 계속 사사건건 부딪혔던 듯 추정되고, 연나라에서 재상급 예우를 받았던 '추연(음양가)'과도 대립관계였던 듯 추정됩니다^^ 제선왕이 죽고 뒤를 이은 '제민왕' 대에서도 맹자는 제나라에서 활동을 이어갔던 듯 보이고, 전국시대 똥뽈 차기의 전문가였던 제민왕과 당시 제나라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맹상군'과 맹자는 매끄러운 관계를 갖지 못했던 듯 싶은 분위기가 "내가 출세하더라도 수십명의 미녀들의 시중을 받진 않겠다~~" 운운 등등은 맹상군 등 당시 4군자의 식객 운영 제도 활성화가 맹자에겐 강력한 '영업방해'로 작용했던 성 싶네요^^ 당시 제갈량의 롤모델 '악의'가 연나라를 주축으로 한 연합국 군대로 제나라 70개 성을 초토화시키던 무렵에 맹자가 고령(83세쯤)으로 사망했을 성 추정되고, 5년쯤 뒤에 제민왕이 피살되기에 제나라의 전쟁통을 맹자가 같이 겪지는 않고 타국으로 피신했을 걸로 추정되지만, 맹자 후반부에 나오는 제나라 궁궐 비축식량을 나눠주느냐 마느냐 등 논란이 있을 때쯤 맹자는 제민왕의 똥뽈 차는 정치 행태에 실망하고 제나라를 떠났을 개연성도 있어 보이네요^^ 맹상군의 '계명구도' 스토리텔링 전설이 일어났을 무렵이나 그 후 맹상군이 사실상 위나라로 축출되었던 무렵 전후엔 맹자도 제나라와의 인연을 정리했을 듯 추정됩니다^^ 열국지에는, '추나라'가 국상을 당했던 때 제민왕이 망명을 다니는 처지에 추나라에 와서 '천자 대우'를 요구하면서 문상을 하겠다고 하던 당시 아마도 맹자는 고향 추나라 국상에 참석했을 터이고, 추나라 조정이 제민왕의 문상을 거부할 때 논리정연한 말빨로 미루어보아 실은 맹자가 실질적 역할을 했지 싶네요^^ 그후 오도가도 못 하는 처지에 빠진 제민왕은 초나라에 땅을 크게 떼주기로 하고(어차피 '악의' 군대에 이미 다 점령당한 상태였고) 원군을 청했지만 초나라 원군 대장 요치?와 정벌 연합군 대장 '악의'가 밀약을 맺고 뒷통수 치는 바람에 제민왕은 비참하게 (기둥에 묶여) 죽었지요😤 진심편 후반부의, 맹자와 손우곤의 입씨름 등으로 추정컨대 당시 서로 '상대편 신도 빼내오기'도 치열했던 듯 보이고, 특히 맹자는 과거 배신자(배교자)라 불리는 자들도 돌아오면 '이단에 빠졌다 개과천선해서 돌아왔다'면서 신흥종교 집단에선 보기 드믈게도 통큰 포용정신으로 '몸집부풀리기'에도 주력했던 듯 보이네요^^ 1801년 신유박해 때, 정약용이 '학문연구 차원에서 천주실의 등 서학을 공부했을 뿐 신앙심으로 믿은 건 아니다'는 취지의 탄원서를 제출해서 큰형을 비롯해 일가친척들이 모두 주살되었을 때 ( 신유박해 때 처형된 대다수는 다산 선생의 일가 친인척임, 황사영 벽서 사건의 황사영은 다산 선생 큰형의 사위로 다산의 조카사위 ) 다산 선생은 정상 참작 되어 18년 유배형을 당했는데 바티칸 교황청에선 탄원서를 문제삼아 200여년간 '배교자'로 처리했다가, 바오로2세 교황이라던가가 한국방문 기념으로 사면령 은사를 내려서 배교자 명단에선 빼주었으나 '성인'에는 못 들어갔다는 요지의 글을 20여년 전에 '서울대 발행 한국정치사상사'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나는데 정확한 사실관계는 차이가 있을 수 있것지만 기억을 되살려 볼 때 큰 테두리에서의 요지는 맞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맹자의 돌아온 배교자 포용정신'은 오늘날 종교단체에서도 귀감으로 삼아야 할 자세가 아닐까 싶네요🙏🙏🙏
고자편에서, "왕을 대신해 나라를 지켜야했기에 예물을 대신 보내고 누구는 재상이라서 와서 예물을 ~~" 대목을 듣던 중 '당시의 예라는 게 그런 취지였는갑다'는 건 알것지만, 후대에 와선 '그런 진정한 취지의 예의 본뜻은 잊혀지고'허례허식과 약점잡아 공방전을 벌일 핑계꺼리만 제공하는 단초로 작용했을 법 하네요 ^😊^ 그런 대표적 사례가, 조선 현종 때 예송논쟁이고, 요새 더 기승을 부리는 거 아닌가 싶어 참~ 웃프네요. 한편, 사회적 지위보다는 학교 선후배. 문중 항렬이 우위를 점하는 문화의 기반이 되어갔던가 싶구요^😅^
전엔 맹자가 양혜왕을 좀 심하게 닥달하는 표현들이 많다~정도로, 어쨌든 초청받아 가서 쫒겨날 수 있었을텐데 꽤 소신발언을 했구나~ 정도?로 이해해왔는데, 열국지를 통해 마릉전투 전후 상황, 정세 등을 감안해서 듣다보니 맹자의 양혜왕과의 대화는 "이 인간도살자야, 아직도 그리 할 말이 더 있냐?~" 면서, 과거 김홍신 작가가 국회의원일 때 평민당 총재이던 김ㅇ중 선상님에게 "그 입을 공업용 재봉틀로 꿰매버리고 싶다"는 취지로 한 발언과 맥락이 같은 발언으로 들리네요^🤣^ 마릉전투 패배 이후 10여년이 지났던 시기였는데, 마릉전투 전쟁 패배 책임을 방연의 실책, 손빈과 방연의 악연으로 패해서 그 피해를 자기가 덤터기 썼다(자신의 태자가 죽은 것만 속상해 하면서)는 남탓 정신으로 '뭐 큰 거 한방 없나?' 골몰하면서 10년 세월을 보낸 듯 싶네요(끌려가는 소가 불쌍해 양으로 바꾸라 한 걸로, 자신이 도덕적 인간이라 자긍심을 가지는, 어쩜 히틀러와도 비견되네요). 요즘 정치인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네요^^ 맹자가 요즘 살았다면, "~~ 재봉틀~~"을 달고 살았을 듯요^😄^
세계사를 배우고 철학을 배우고 스토리를 알고 있다는 사실은 그 역사를 잘표현 할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소크라테스 맹자 묵자 장자를 살려내 봐야 합니다.모든 성인들을 살려내 볼 의향이 있어야 우리의 도를 펼칠수 있다면 도전해 봐야 합니다. 시대의 문화는 창조에 있습니다. 아직 죽지않고 살아있는 사대성인과 수많은 예언가 주술사 진정한 예술이란? 참으로 유구한 역사적 사실이든 허구이든 시대의 시공초월 입니다.이제 눈으로 보여주는 시대입니다. 그 에너지를 써볼 필요는 있습니다.
노평공이 맹자 방문을 취소하게 된 '어머니 아버지 장례 문제'가 거론된 배경을 돌아볼 때, 맹자는 어려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어머니가 베를 짜서 생계와 학비를 댔기에 그 아버지는 맹자가 10대 초반에 사망했던 듯 보이고, 맹자의 어머니는 맹자가 50대 후반~60대일 때 즉 맹자가 거의 제후급 예우를 받으며 천하를 주유하던 때로 추정되기에 어머니의 장례가 아버지보다 호화로웠다는 게 크게 문제되었던 점으로 보아 "맹자의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여 홀어머니 슬하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투의 기록들은 마치 '성냥팔이 소녀' 동화 마냥 일종의 '맹자판 용비어천가'였을 개연성이 커보이네요^😄^ 성균관대 유학과, 유학대학원 석박사 과정에서 동양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이래 고대한국사(신라 시대 불교사) 박사, 고고미술사 박사, 고대건축학 박사 등등 7개 박사 학위를 소지하고 있는 7박사 자현 스님(중앙승가대 교수)이 불교방송 붓다로드 강의에서 "맹자의 아버지는 '어~엄~청~' 오래 살았다"더니, 자현 스님의 강의 내용이 훨~씬 신빙성이 있어 보이네요^🤣^ 맹자의 조상은 노나라 3가(맹손씨, 숙손씨, 계손씨)의 하나인 '맹손씨'라는 설로 보더라도, 맹자가 가난한 홀어머니 슬하에서 어렵게 성장했다는 설화는 '천상천하 유아독존~' 부처님 탄생설화 마냥 "조작된 걸로 볼 여지(자현 스님 불교방송 붓다로드 강의의 취지)"가 커보이네요. 불교방송 붓다로드 200개 이상 강의를 몇 차례 반복해 들었었는데, 저는 매우 신빙성 있고 객관적인 강의라 느꼈구요. 특히 "스리랑카 불치사를 직접 방문하여 부처님 치아 진신사리를 친견했었는데~ 아무리 보아도 '침팬치 어금니 이빨' 같더라" 해서 방청석이 웃음바다가 되기도 했었구요. (몇 달 후에 그 부분만을 삭제하고 다시 업로드했더라구요)^😀^
'맹자'를 몇 회독 청독하다보니~~ '맹자 양혜왕 편'을 '양혜왕'에만 초점을 맞춰 읽다보니 그간 독자들은 물론 전문가들도 좀 헷갈려왔던 거 아니었을까 싶네요(EBS 오디오북 프로에서도, '양양왕'을 '양혜왕'으로 퉁쳐서 읽네요)^^ 우선, 양혜왕(위혜왕). '그 아들 양양왕(위양왕)'. 제선왕이 등장하고, 양혜왕이 나오다 뒤에 양양왕과의 대화가 나오고 또 그 뒤쪽에 양혜왕과의 대화(항산 항심)가 나오는 등 편집상 연대적으로 뒤죽박죽 되어 '마치 이들이 무슨 원탁에 모여 대화하는 듯한 편집으로' 인해 축자적 해석을 하기 쉬워 그 대화들의 행간에 담긴 역사적 맥락을 간과하기 쉽게 '처세술 내지 정치기술 책'으로 오해받아 왔던 거 아닌가 싶네요^^ 맹자와 양혜왕과의 첫 대면 대화로만 보면, 그 구체적 역사적 배경은 사실 알기 어렵구요. "맹자가 40대 때 양혜왕을 처음 만났다~"는 취지로 읽어주셨지만, 사서들에 의하면 맹자가 36세때 즉 BC 336년 양혜왕이, BC 341년 제나라 손빈과의 마릉전투 패배로 사실상 멸망 직전까지 갔다가 제나라에 신하국으로 들어가기로 약속하고 겨우 멸망을 면했었는데 그 약속을 안 지키자 다음해 BC 340년 제. 진. 조의 연합군의 공격으로 수도를 대량으로 이전하였고 이때부터 '양나라'로 불리게 되는 수모를 겪게 되었거든요. 그래도 양혜왕은 똥고집을 부리다 외교적 교섭을 통해 BC 336년에서야 제선왕과 회동을 통해 제나라와 평화협의를 마쳤고 양혜왕은 한숨 돌리자 바로 그 해 맹자(36세). 순우곤. 추연 등 당시 명사들을 초빙해 부국강병을 강구하다 제나라의 감시망에 걸려들어 다음해 즉 BC 335년 제나라 견 땅으로 불려가 혼줄이 나기도 했습니다. 양혜왕은 BC 319년 사망하기에(67세), 양혜왕과 맹자의 마지막 만남(오십보 백보 대화)은 BC 318년으로 맹자는 54세 때입니다^^ 손빈은 60대초반, 제선왕은 30대 후반, 왕후 종리춘은 40대초중반, 맹자 54세로 추정됩니다 ^^ 곧 맹자 양혜왕 편 각 구절은 제각기 시대가 달라져 그 맥락이 다르기에, 달리 해석될 여지가 있구요^^ 양혜왕이 죽고, 마릉전투 때 죽은 태자 신을 대신해 즉위한 양양왕과의 대화는 최소한 BC 319년 이후에 이루어진 것이고 연령도 많아야 제선왕과 동년배이고 더 아래로 추정됩니다. 양혜왕이 "제나라와 ~ 큰아들(태자 신)이 죽고~"는 BC 341년 마릉전투 패배를 말하는 것이고, "서쪽 진나라~700리 땅을 잃고"는 그 다음해 즉 BC 340년 진효공 때 상앙이 계략을 써서 위나라를 쳐서 15개? 성읍을 빼앗은 전투를 말하는 듯 추정됩니다. 즉 맹자와 양혜왕은 맹자 36세, 양혜왕 50세에 처음 만난 걸로 추정됩니다 ^^ 마지막 둘의 만남은 맹자 52세, 양혜왕 66세로 추정됩니다. 이때 양혜왕은 후에 양양왕이 되는 새로운 태자 혁을 소개해 준 듯 보이고, 태자 혁(맹자 책에선 양양왕)은 "천하는 누가 통일 할 것 같은지~"를 물었던 듯 싶고, 맹자의 '선문답' 같은 답변에서 "제나라와 깝치면 뒤진다"는 취지를 읽어낸 성 싶네요. 실제 양양왕(위양왕)은 즉위 후에 제나라와 '깝치는' 사례가 없었다는 걸 사서들에서 확인됩니다^^ 오늘 저는 고전을 읽을 때, 그 구절 하나하나를 두고 그 역사적 배경을 확인해가면서 읽어야지 '축자적으로' 읽으면 3류 처세술 책으로 전락시킬 수 있단 교훈을 얻었네요^🤣^ 맹자 양혜왕편 몇 구절 속에만, 실은 최소 30~50년 동안 여러 차례 있었던, 글고 당사자도 제각기 서로 다른 대화 내용을 '마치 한자리 원탁에서 모여 나눈 대화 마냥' 달랑 몇 구절로 정리해 놔서 참으로 잘못 읽혀 왔지 않았을까 싶네요^😂^ 물론 저 혼자서만 그랬을 수도 있었겠지~ 하는 생각도 없진 않지만, 역사적 배경 특히 연대표 하나하나 적어가면서 살펴보지 않으면 대부분 오해하기 쉽지 않을까요? 정도전. 정몽주도 당시로선 연대표를 '교차체크'할 방법이 없었을 테지요?^😊^
어떤 책의 모든 내용이 다른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닌가 봅니다. '맹자'에도 전후 맥락이 모순돼 보이는 구절도 숱하게 보이고, 맹자가 양혜왕에게 쫑꾸줄 땐 마치 자신이 하느님의 대역자인 듯 몰아세우기도 하지만 제자 만장에게 약점을 공격당할 땐 '내로남불'의 전형을 보여주는구나 싶을 정도로 자기방어의 논리를 펴지만, 정도전은 그런저런 내용들은 다 구석으로 몰아넣고서 "혁성혁명"을 합리화시키는데 필요한 논리들만 핀센트로 집어내서 이용했군요^^ 연세대 신학과 김상근 교수는 마키아벨리 '군주론'을 강의하면서(기독교 신학 전공 교수가 마키아벨리 강의를 하는 것도 좀 뜬금없어 보이긴 하지만^^), '군주론'은 "마키아벨리 자신이 앞서 피렌체 공화정에서 외교관으로 재직하다 군주제 정권으로 바뀌어 축출당한 이후 다시 군주제 정권에 취직하려고 쓴 일종의 '취업용 자소서'임을 알고 읽어야 한다" 더군요. 그러나 "결국 취직은 커녕 '매국노 배신자'로 낙인찍혀 왕따 당하다 못해 생계유지 자체가 위협받자 자신의 독자들 중 피렌체 군주정에 반대하는 독자들을 모아 '야학'을 열어 생계를 해결하면서 사실상 피렌체 '군주정을 타도할 논리'를 개발해 가르치면서 그 강의안을 모은 게 '로마사논고'인데 이 로마사논고가 더 명저임에도 거의 관심두는 사람이 없다"더군요^^ 아마도 정치에 관심있는 독자들의 입맛엔 그 집필취지야 뭐였든 "사자의 용맹과 여우의 간사함"을 이야기한 군주론이 더 입맛에 맞을 거라서라 추정하더군요^^ 제 소견엔, '네이밍' 차이가 큰 영향을 준 게 아니었을까 싶네요. '군주론' 하면~ 그 책을 읽으면 군주가 되는 비결이라도 배울 거란 착각과 뭔가 있어보이지만 '로마사논고' 제목은 뭔가 고리타분할 거 같아 손이 안 가겠지요?^^ 당시로서도 망한 로마 역사에 관심 두는 독자들이 몇이나 있었을 지 원?^^ 책제목 네이밍 성공으로 일약 인류역사상 10대 사상가 반열에 오른 프로이드가 있는데, 그는 듣보잡이던 자신의 정신분석학을 홍보하기 위한 언론플레이용 노이즈마케팅으로 '오이디푸스왕' 신화를 트레이드마크로 삼아 '오이디푸스콤플렉스'라는 용어를 개발해서 20~21세기를 통틀어 모든 학문 분야를 휩쓰는 기염을 토했거든요^^ 그래도 막상 출판 후 초판은 8권 정도 팔렸었다는데 그 중 하나가 칼 융이 사가는 바람에 칼 융이 제자가 되면서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더군요^^ 쇼펜하우어도 대표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던가가 초판이 10권인가 팔려 낙담하고 있던 차 그 책을 사간 독자 중 잘 나가던 니체가 있어 "성서보다 위대한 책"이라 평하는 바람에 헤겔을 능가하는 사상가라고 떴다더군요^^ 고려말까지 사실상 금서 취급받던 '맹자' 책이 정도전이 읽고 조선 창건의 기초를 닦은 책이란 소문 덕분에 많이 팔렸다 보지만, 미래에도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의 보감으로 남지 않을까요?^^ 거듭 감사드립니다🤗😙
맹자 엄마 호화 장례식 스캔들~~? 아빠 장례식보다 화려했다는 이유로~?^^ 맹자 공손추 편에서 '맹자의 엄마 장례식이 아빠 장례식 보다 화려했다'는 이유로 맹자가 엄청 비판을 받았고 심지어 욕을 먹었다는 대목이 너무 이상하지 않나요?^^ 맹자 아빠가 맹자 엄마에 앞서1~2년 차이로 돌아가셨다면 두 분의 장례식 호화 여부 비교가 되것지만, 맹자 아빠는 이미 50년전에 맹자가 어릴 때 돌아가셨다면 두 분의 장례는 비교 대상 자체가 안 되는 거 아닐까요?^^ 맹자가 어릴 땐 시골깡촌에서 💩9녕 찢어지게 살았을 때 아빠 장례는 아마도 헌 가마니에 똘똘 말아서 그냥 양지에 묻어만 줘도 호화장례였을 터이지만, 맹자가 50세쯤엔 '사실상 제후급 못지않은 대우를 받던 시절'이었는데 부조금도 제후들이 서로 다투다시피 하면서 황금 몇 수레를 보낼 정도였을 터였을 텐데 아버지보다 검소하게 해야한다고 해서 엄마 시신을 대나무 몇 개 쪼개 돌돌 말아서 음지에 묻어야만 제대로 장례를 치른 셈이 될까요?^^ 그렇다면, 합리적 추론상 우리가 알고 있듯이, 맹자 아버지가 맹자가 어릴 때 일찍 돌아가신 게 아니라, 7박사 자현 스님 말대로, 오래오래 살았고 아마도 엄마보다 최대 2~3년 정도 먼저 돌아가셨던 게 아니었을까 추정됩니다 ^^ 즉 맹자는 아빠 장례 때 들어온 부조돈이 남아있었기에 엄마 장례 때 그걸 보태서 하늘나라에서도 엄마 아빠가 알콩달콩 잘 지내시라는 효심으로 보탠 듯 추정됩니다^^ 맹자 성격상 부모님 장례식 때 들어온 부조돈을 챙겨서 '아파트 중도금 납부'에 쓰기는 좀 거시기했지 않았을까요?^🤣^ 맹자 체면에 그런 속사정까지 제자들에게 다 털어놓진 못했었것지요? 맹자가 엄마 장례를 아빠 장례보다 호화롭게 치렀다는 오해를 지난 2천4백년 동안 받아온 속사정의 진면목이, 실은 이런 속사정이 있었던 거 아닐까요?^😊
저도 20살 전에는 성리학이 고리타분하고 온갖 악습을 만들어낸 나라망하게 한 학문이고 작금의 꼰대들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해서 혐오했었습니다. 근데 성리학에 대해서 공부해보고 나서는 완전 입장이 바뀌었습니다. 불교도 말단에 가면 권력에 쩔어서 온갖 부패를 저지르고, 그리스도교도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고 면죄부를 사고파는 등 별 나쁜짓을 다 합니다. 그렇다고 중생을 구하겠다는 불교가 원래 나쁜게 아니고 모든 철학이나 종교가 인간의 욕망이 끼어들면 변질되기 마련입니다. 성리학도 마찬가지 입니다. 기득권이 이론을 욕심대로 해석해서 아랫사람을 누르는데 사용하고, 지나치게 이론에만 집착해서 본래 취지인 현실을 바꾸고 발전하지는 않고 당리당략에만 이용해서 나라가 망한거지요. 진짜 제대로 성리학했으면 우리나라 과학선진국에 도덕적으로도 세계 리더가 되었을 겁니다.
제자백가와 고대 그리스 소피스트와 똑 닮았네요. 요즘 '여야 성명전'과도요? 전당대회 출마자들 끼리 서로 공격하는 말투들이 훨씬 독하네요. 전국시대가 훨~ 신사적이었나 싶네요^🤣^ 몇회독인지 잊었는데요^😁^, 회독이 늘어날수록 '가끔 길가에서 외치는 사이비 종교 신도들의 논리'와 닮아 보여 더욱 놀라네요^😅^ 큰댁 동생이 '세계적인 종교지도자'인데, "(기독ㅇ라는 게 있는 줄 모르고 살다가 돌아가신) 우리 옛 조상들은 전부 지옥에 가셨다"고 핏대 올리면서 저를 설득하던 대학생 시절이 떠오르게 하네요. 나중에 알고보니, '단테의 신곡'이 그런 얘기더군요. 당대 주변 사람들이 단테에게 '우리 엄마 아빠는 지옥에 있더냐 천국에 있더냐'고 물어와서 단테가 도망다닐 지경이었다고, 연세대 신학과 김ㅇ근 교수가 플라톤아카데미 강의에서 하시더라구요 ^😊^
선생님,
고맙습니다. 인문 교양을 더해 주는 선생님의 귀한 오디오북들의 청취는 저의 60대 중반에, 인생 성찰의 기회들을 제공하여, 저의 삶에 귀한 의미를 많이 더해 주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뉴욕에서
먼 뉴욕에서 창가의 책들이 소중한 의미가 되고 있음이 감격스럽습니다. 지구상 어디에 있더라도 유투브로 청독을 할 수 있고 또 이렇게 소통할 수 있기에 참 좋습니다. 더욱 분발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름 맹자 선생님 ㅡ 이 내용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사랑합니다 ❤
맹자를 소중히 들으시니 고맙고 기쁩니다~^^
감사드립니다.
듣고있으니 새로워 집니다.
고맙습니다
많은 분이 책듣기에 도움을 주시지만 꾸밈없고 낮지않은 음성!
긴 시간 듣기에 불편하지 않은 아니 더욱 듣게 되는 ᆢ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저 역시 감사합니다. 귀로 읽는 고전을 통해 우리의 삶이 더욱 풍성해진다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좋은 강의에 순한 해설을 더해 주시니 .... 간결한 중에도 핵심을 들을 수 있어서 유익합니다. 귀한 공부를 하셔서 이렇게 후학들을 위해 베풀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독서의 유익함은 세상에 널려 있는 책을 들어 내 것으로 담는 귀하게 들으시는 분들의 몫이지요. 소중하게 들으시는 마음에 힘 입어 오늘도 정진합니다^^
잘 듣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수고많이하셨습니다
👍👍👍👍👍👏🏻👏🏻
👏🏻👏🏻👏🏻🙇🙏🏾
세상에.... 맹자 풀버전 맞나요 ?? 8시간 넘게 고생하셨습니다 😢🥲 인트로부터 중요한 내용 정리까지 너무 감동입니다 ... ❤️ 감사히 듣겠습니다 !! 20:42
양혜왕편 부터 다시 🎧 15:00
네~ 풀버전 맞아요. 소중하게 들으시니 낭독자로서 기쁩니다^^
@@bookwindow 사랑입니다 .... ❤️❤️ 이제서야 알게됐다니 ㅠㅠ 얼른 다 듣구 다른 책들도 열심히 들을게요 감사해요 🫶🏻
20:00
은퇴 후 서당에 다니며 맹자를 배웠습니다 하지만 기억의 한계로 잊기가 다반사 입니다 소중한 낭송으로 수시로 듣고 듣고 합니다 한자와 한문이 중요한게 아니라 그 삶의 방향을 배우는게 본질 인듯 합니다 소중한 노력에 감사를 보냅니다
맹자가 제선왕을 가지고 노네요^^
우리 초딩 때 샘들이, "이성계 장군은 100미터 앞에 있는 나무의 아래 잎을 화살로 맞췄다~는 등등"을 예로 들면서 훈계하던 시절이 생각나게 하네요^😊^
고맙습니다 좋아요
감사 합니다
창가님 덕분에 좋은 인생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스니다
맹자 2회독 도전합니다 🤗🤗🤗🤗🤗🤗🤗😁😊😄😂😃
유익한 공부...
벌써 두 번째 듣습니다.
앞으로도 더 많이 들을 생각입니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늘 안녕하시길 바랍니다~♡
벌써 두 번째 들으시는군요.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에 와 닿는 맹자인 것 같습니다. 환절기에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
다시 편집하셨군요. 부지런하십니다. 이제 새기면서 음미해 보고자 합니다. 내내 감사드립니다.
이제 거의 막바지 입니다. 곧 새로운 책 업로드가 가능해요^^
노고에 감사드리오
만장편을 듣다보니, 도올 교수가 그의 유튜브 강의에서 "부처님의 카필라성 유적지를 직접 답사를 갔다왔었다"면서, "불경을 읽다보면 아방궁 정도 크고 대단했을 거라 상상하고 갔는데, 현장을 가봤더니 '시골 초등학교 운동장 정도'더라"더군요. "비유하자면 '왕자 출신'이란 말은 좀 뻥이고, '이장 아들' 정도였을 것"이라던 강의 내용이 기억나네요^^
맹자 책에서도, 말끝마다 '(요순 임금이) 천자~' 운운하는 대목이 자주 등장하는데, 어떤 책에서 "이장" 정도였다면서, 인구수로 보나 지배 영역 넓이로 볼 때 '이장'으로 표현해야 팩트일 거라던 생각이 나네요^^
고대 산동반도 한 구석에서 '이장하던 사람'이 나름 잘 했던가 본데 그 지역민 출신들이 차츰 영역을 넓혀가면서 '요순 등 조상' 이야기도 용비어천가 식으로 확대해 나가면서 '요순 시대에 지금 중국 강역을 통치했었던 듯 착각하게' 만들어 신격화해 오느라 ~ 했던 게 만장편 류가 아닐까 싶네요 ^^
인류 역사는 (한줌의) 지배층들이 '백성들을 갖가지 방식으로 가스라이팅해 온 과정'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더 깊게 하네요^🤣^
만장편, 맹자의 변명들이 요즘 '내로남불의 원조'란 느낌이 솔직히 강하게 드네요^😃^
양혜왕을 질타할 땐 혼자 잘난 체는 다하더니, 만장이 막상 (그런 돈을 맹자 당신도 받고 있지 않느냐고) 질타하니까 '요즘 정치인들이 뇌물로 수사받게 되면 댓가성이 없었다. 정치자금일 뿐' 이란 변명과 그야말로 "오십보 백보"네요^😆^
'내로남불은 자연의 순리' 아닐까 싶고, 그게 '불편한 진실'이라는 느낌을 '맹자' 2회독을 통해 강하게 갖고 마치네요^😊
노평공과 맹자의 만남 불발을 천명론으로 돌린 걸로 보아 맹자를 운명론자로 평하셨는데, 저는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70세가 되어보니(이른바 '종심소욕불유구'?'), 맹자의 처신이 참으로 옳았다고 추정되네요 ^^
어떤 일이 성사되고 안 되고는 꼭 노력이나 실력만으로 결정나지도 않고, 당장 성사된 일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큰 손해나 죽기보다 더한 패착이 되기도 하고, 안 돼서 그 땐 실망했지만 시간이 지나다보면 목숨을 건질 정도로 다행이었던 경우가 숱했더라구요😅
그래서 인생은 길게 봐야 되고, 일희일비해선 안 된다는 걸 깨닫게 되더라구요^^
한 치 앞을 못 보는 게 인생이구요^😊^
그래 좋아
감사합니다
수고했어요
잘듣고있습니다
맹자 듣다 끝나면 장자 듣다 하루종일 밤샘도 하면서 왔다갔다 하다보니 각 10회 청독은 넘은 듯 싶건만, 더이상 카운트는 어렵게 됐네요^😂^
열정이 넘치십니다~~^^
당분간, 논어> 맹자> 장자>논어~~ 돌아가면서 뭔가 보일 때까지 가볼랍니다 😂🤣😁😊🤗
@@bookwindow 🤗😊🙆♂️
양혜왕(위나라)편 초반부의 대화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bc341년 마릉전투로 위나라가 망할 뻔 했다가 겨우 제나라에 칭신하고서 멸망하는 건 벗어났었고 5년 뒤인 맹자가 36세인 bc336년 위혜왕을 방문한 때로 추정되옵고, 위혜왕(양혜왕)으로선 당시 일타강사로 드날리던 젊은 맹자를 초빙하여 재기를 꿈꿨던 걸로 보입니다. 결과는 서로 '동상이몽'(맹자는, 상앙이 진효왕을 두번째 만난 날 펼친, 왕도만 설했고, 양혜왕은, 맹자가 방연이나 손빈의 역할 정도를 해 줄 수 있겠나 싶어, 면접을 본 듯 보이고, 놓친 상앙이 진나라에 가서 변법으로 최강국으로 만드는 걸 보고서 맹자가 상앙 역할을 해줄수 있겠나 싶어 서로 '선문답'하다 서로 탐색전만 하다 "밥만 먹고" 헤어지고서, 맹자는 바로 제나라로 떠났던 성 싶네요^^
그 이후에도 맹자는 위나라와 제나라를 왔다갔다 하다가 마지막으로 bc320년 맹자 52세, 위혜왕 80세쯤에 만나서 태자(후계구도)를 부탁해 보려 했던 듯 싶네요.
이때 맹자는 제나라 직하학당에서 활동하면서 재상급 예우를 받으면서 수백명 제자들과 함께 외출시 수레50대가 따르는 '최상급 예우'를 받던 시기였구요^^ 이무렵엔 제나라에선 종리춘. 손빈 등 병법가들이 직하학당의 '사실상 스파이 활동'을 문제삼아 존폐론이 일어나자 맹자학파도 이참에 차라리 위나라로 근거지를 옮길까 싶던 차로 보이고 서로 진지한 탐색전을 벌이다 밥만 먹고 헤어진 듯 추정됩니다 ^^
이때 제선왕도 종리춘의 충간을 수용해 '개선책'으로 직하학당이 '스파이 활동'으로 변질되지 않게 제도를 보강하기로 결단하고, 종리춘을 '왕후'로 전격 발탁했고 이런 대임을 수행하는 '국정원' 같은 비밀기관을 운영키로 하고서, 맹자. 추연. 순우곤 등을 다시 초빙해 외견상 식객단 형식으로 하여 조직을 추스렸을 듯 싶네요. 이때 맹자는 54세쯤이었고요.
bc302년 맹자 70세부터는 직하학당 학사들을 제도권으로 등용하는 즉 '대부'로 임명해 가면서 추연(음양가). 순우곤(유머 전문가). 접여(도가)를 대부로 임용했는데, 맹자. 고자 등은 그대로 명예직을 고수하면서 유가가 도가에 좀 밀리는 계기가 되었다는 학설도 있네요. 아무래도 뽀대는 명예직 고위급이 좋을 지 모르나, 정책결정권과 예산집행권이 주어지는 '대부' 직을 맡았던 음양가와 도가 계열이 급부상하는 계기가 되었을 듯요.
오늘날도 제나라 지역이던 산동반도엔 음양가. 노장 도가가 우세하다니, 우연이 아닌 듯 추정됩니다.
한 세대 후 직하학당 최고 지도자로 좨주를 도맡았던 유가학파 순자가 초나라로 떠난 배경에도 이런 분위기, 즉 실무직이냐 명예직이냐의 파워게임도 작용했지 않나 추정됩니다 ^😀^
'맹자 진심편 후반부'에서 맹자가 양혜왕을 심하게 뒷담화 치는 부분부터는 bc 319년경 양혜왕이 죽은 이후 bc 318년경 제나라(제선왕)에서 직하학궁을 재건하고 76명 유명인사를 대부급으로 행정 결정권을 갖는 실직을 부여했던 당시 맹자도 위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이주했던 듯 추정됩니다.
맹자는 평생 정치적 법률적 책임을 지는 '실직'은 맡지 않고 '명예직'이지만 장관급 예우를 받는 '객경 지위'로 자유롭게 활동했던 걸로 알려져 있기에, 이미 떠난 위나라에서의 위혜왕(양혜왕)과의 대화 등을 뒷담화로 삼았던 걸로 추정됩니다.
당시 제나라에서 '실직'을 받았던 손우곤 등과 맹자는 계속 사사건건 부딪혔던 듯 추정되고, 연나라에서 재상급 예우를 받았던 '추연(음양가)'과도 대립관계였던 듯 추정됩니다^^
제선왕이 죽고 뒤를 이은 '제민왕' 대에서도 맹자는 제나라에서 활동을 이어갔던 듯 보이고, 전국시대 똥뽈 차기의 전문가였던 제민왕과 당시 제나라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맹상군'과 맹자는 매끄러운 관계를 갖지 못했던 듯 싶은 분위기가 "내가 출세하더라도 수십명의 미녀들의 시중을 받진 않겠다~~" 운운 등등은 맹상군 등 당시 4군자의 식객 운영 제도 활성화가 맹자에겐 강력한 '영업방해'로 작용했던 성 싶네요^^
당시 제갈량의 롤모델 '악의'가 연나라를 주축으로 한 연합국 군대로 제나라 70개 성을 초토화시키던 무렵에 맹자가 고령(83세쯤)으로 사망했을 성 추정되고, 5년쯤 뒤에 제민왕이 피살되기에 제나라의 전쟁통을 맹자가 같이 겪지는 않고 타국으로 피신했을 걸로 추정되지만, 맹자 후반부에 나오는 제나라 궁궐 비축식량을 나눠주느냐 마느냐 등 논란이 있을 때쯤 맹자는 제민왕의 똥뽈 차는 정치 행태에 실망하고 제나라를 떠났을 개연성도 있어 보이네요^^
맹상군의 '계명구도' 스토리텔링 전설이 일어났을 무렵이나 그 후 맹상군이 사실상 위나라로 축출되었던 무렵 전후엔 맹자도 제나라와의 인연을 정리했을 듯 추정됩니다^^
열국지에는, '추나라'가 국상을 당했던 때 제민왕이 망명을 다니는 처지에 추나라에 와서 '천자 대우'를 요구하면서 문상을 하겠다고 하던 당시 아마도 맹자는 고향 추나라 국상에 참석했을 터이고, 추나라 조정이 제민왕의 문상을 거부할 때 논리정연한 말빨로 미루어보아 실은 맹자가 실질적 역할을 했지 싶네요^^
그후 오도가도 못 하는 처지에 빠진 제민왕은 초나라에 땅을 크게 떼주기로 하고(어차피 '악의' 군대에 이미 다 점령당한 상태였고) 원군을 청했지만 초나라 원군 대장 요치?와 정벌 연합군 대장 '악의'가 밀약을 맺고 뒷통수 치는 바람에 제민왕은 비참하게 (기둥에 묶여) 죽었지요😤
진심편 후반부의, 맹자와 손우곤의 입씨름 등으로 추정컨대 당시 서로 '상대편 신도 빼내오기'도 치열했던 듯 보이고, 특히 맹자는 과거 배신자(배교자)라 불리는 자들도 돌아오면 '이단에 빠졌다 개과천선해서 돌아왔다'면서 신흥종교 집단에선 보기 드믈게도 통큰 포용정신으로 '몸집부풀리기'에도 주력했던 듯 보이네요^^
1801년 신유박해 때, 정약용이 '학문연구 차원에서 천주실의 등 서학을 공부했을 뿐 신앙심으로 믿은 건 아니다'는 취지의 탄원서를 제출해서 큰형을 비롯해 일가친척들이 모두 주살되었을 때 ( 신유박해 때 처형된 대다수는 다산 선생의 일가 친인척임, 황사영 벽서 사건의 황사영은 다산 선생 큰형의 사위로 다산의 조카사위 ) 다산 선생은 정상 참작 되어 18년 유배형을 당했는데 바티칸 교황청에선 탄원서를 문제삼아 200여년간 '배교자'로 처리했다가, 바오로2세 교황이라던가가 한국방문 기념으로 사면령 은사를 내려서 배교자 명단에선 빼주었으나 '성인'에는 못 들어갔다는 요지의 글을 20여년 전에 '서울대 발행 한국정치사상사'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나는데 정확한 사실관계는 차이가 있을 수 있것지만 기억을 되살려 볼 때 큰 테두리에서의 요지는 맞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맹자의 돌아온 배교자 포용정신'은 오늘날 종교단체에서도 귀감으로 삼아야 할 자세가 아닐까 싶네요🙏🙏🙏
학문을 쌓으면 쌓을수록 성인을 향하는 마음이 한 마음으로 모아져 세상으로 다시 펼쳐져야 함에도 흩어져 각자도생 으로 제각기 나뉘어 흩뿌려지니 어찌해야 할까요?
구독하엿슴니다
어서 오세요~구독 감사드립니다
구독자입니다.
유주현의 장편소설 황진이를 님의 목소리로 듣고 싶습니다..
요청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작권 문제로 읽을 수 있는 책이 많지 않답니다. 맹자는 절판 도서로 낭독한 것이고요~
고자편에서, "왕을 대신해 나라를 지켜야했기에 예물을 대신 보내고 누구는 재상이라서 와서 예물을 ~~" 대목을 듣던 중 '당시의 예라는 게 그런 취지였는갑다'는 건 알것지만, 후대에 와선 '그런 진정한 취지의 예의 본뜻은 잊혀지고'허례허식과 약점잡아 공방전을 벌일 핑계꺼리만 제공하는 단초로 작용했을 법 하네요
^😊^
그런 대표적 사례가, 조선 현종 때 예송논쟁이고, 요새 더 기승을 부리는 거 아닌가 싶어 참~ 웃프네요.
한편, 사회적 지위보다는 학교 선후배. 문중 항렬이 우위를 점하는 문화의 기반이 되어갔던가 싶구요^😅^
전엔 맹자가 양혜왕을 좀 심하게 닥달하는 표현들이 많다~정도로, 어쨌든 초청받아 가서 쫒겨날 수 있었을텐데 꽤 소신발언을 했구나~ 정도?로 이해해왔는데, 열국지를 통해 마릉전투 전후 상황, 정세 등을 감안해서 듣다보니 맹자의 양혜왕과의 대화는 "이 인간도살자야, 아직도 그리 할 말이 더 있냐?~" 면서, 과거 김홍신 작가가 국회의원일 때 평민당 총재이던 김ㅇ중 선상님에게 "그 입을 공업용 재봉틀로 꿰매버리고 싶다"는 취지로 한 발언과 맥락이 같은 발언으로 들리네요^🤣^
마릉전투 패배 이후 10여년이 지났던 시기였는데, 마릉전투 전쟁 패배 책임을 방연의 실책, 손빈과 방연의 악연으로 패해서 그 피해를 자기가 덤터기 썼다(자신의 태자가 죽은 것만 속상해 하면서)는 남탓 정신으로 '뭐 큰 거 한방 없나?' 골몰하면서 10년 세월을 보낸 듯 싶네요(끌려가는 소가 불쌍해 양으로 바꾸라 한 걸로, 자신이 도덕적 인간이라 자긍심을 가지는, 어쩜 히틀러와도 비견되네요). 요즘 정치인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네요^^
맹자가 요즘 살았다면, "~~ 재봉틀~~"을 달고 살았을 듯요^😄^
끌려가는 소 얘긴 제선왕의 이야기입니다.
세계사를 배우고 철학을 배우고 스토리를 알고 있다는 사실은 그 역사를 잘표현 할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소크라테스 맹자 묵자 장자를 살려내 봐야 합니다.모든 성인들을 살려내 볼 의향이 있어야 우리의 도를 펼칠수 있다면 도전해 봐야 합니다.
시대의 문화는 창조에 있습니다.
아직 죽지않고 살아있는 사대성인과 수많은 예언가 주술사 진정한 예술이란? 참으로 유구한 역사적 사실이든 허구이든 시대의 시공초월 입니다.이제 눈으로 보여주는 시대입니다. 그 에너지를 써볼 필요는 있습니다.
양혜왕편은, 방연이 손빈에게 패해 죽고 그 여파로 수도를 '대량'으로 천도한 후 위혜왕에서 양혜왕으로 불리게 된 쯤으로 보이기에 양혜왕의 입장도 십분 이해는 되네요. 이후 몇년 뒤 양혜왕이 죽었기에 맹자의 이런 조언은 '죽은 아들 ××만지기' 식으로 들렸을 듯요^😥^
노평공이 맹자 방문을 취소하게 된 '어머니 아버지 장례 문제'가 거론된 배경을 돌아볼 때, 맹자는 어려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어머니가 베를 짜서 생계와 학비를 댔기에 그 아버지는 맹자가 10대 초반에 사망했던 듯 보이고, 맹자의 어머니는 맹자가 50대 후반~60대일 때 즉 맹자가 거의 제후급 예우를 받으며 천하를 주유하던 때로 추정되기에 어머니의 장례가 아버지보다 호화로웠다는 게 크게 문제되었던 점으로 보아 "맹자의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여 홀어머니 슬하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투의 기록들은 마치 '성냥팔이 소녀' 동화 마냥 일종의 '맹자판 용비어천가'였을 개연성이 커보이네요^😄^
성균관대 유학과, 유학대학원 석박사 과정에서 동양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이래 고대한국사(신라 시대 불교사) 박사, 고고미술사 박사, 고대건축학 박사 등등 7개 박사 학위를 소지하고 있는 7박사 자현 스님(중앙승가대 교수)이 불교방송 붓다로드 강의에서 "맹자의 아버지는 '어~엄~청~' 오래 살았다"더니, 자현 스님의 강의 내용이 훨~씬 신빙성이 있어 보이네요^🤣^
맹자의 조상은 노나라 3가(맹손씨, 숙손씨, 계손씨)의 하나인 '맹손씨'라는 설로 보더라도, 맹자가 가난한 홀어머니 슬하에서 어렵게 성장했다는 설화는 '천상천하 유아독존~' 부처님 탄생설화 마냥 "조작된 걸로 볼 여지(자현 스님 불교방송 붓다로드 강의의 취지)"가 커보이네요. 불교방송 붓다로드 200개 이상 강의를 몇 차례 반복해 들었었는데, 저는 매우 신빙성 있고 객관적인 강의라 느꼈구요. 특히 "스리랑카 불치사를 직접 방문하여 부처님 치아 진신사리를 친견했었는데~ 아무리 보아도 '침팬치 어금니 이빨' 같더라" 해서 방청석이 웃음바다가 되기도 했었구요.
(몇 달 후에 그 부분만을 삭제하고 다시 업로드했더라구요)^😀^
혹여, 이 댓글이 어떤 형식으로든 문제될 소지가 있으면 직권 삭제하셔도 좋습니다^🙆♀️^
괜찮습니다~~^^
@@bookwindow 🙇♀️🙇♀️🙇♀️💞
'맹자'를 몇 회독 청독하다보니~~
'맹자 양혜왕 편'을 '양혜왕'에만 초점을 맞춰 읽다보니 그간 독자들은 물론 전문가들도 좀 헷갈려왔던 거 아니었을까 싶네요(EBS 오디오북 프로에서도, '양양왕'을 '양혜왕'으로 퉁쳐서 읽네요)^^
우선, 양혜왕(위혜왕). '그 아들 양양왕(위양왕)'. 제선왕이 등장하고, 양혜왕이 나오다 뒤에 양양왕과의 대화가 나오고 또 그 뒤쪽에 양혜왕과의 대화(항산 항심)가 나오는 등 편집상 연대적으로 뒤죽박죽 되어 '마치 이들이 무슨 원탁에 모여 대화하는 듯한 편집으로' 인해 축자적 해석을 하기 쉬워 그 대화들의 행간에 담긴 역사적 맥락을 간과하기 쉽게 '처세술 내지 정치기술 책'으로 오해받아 왔던 거 아닌가 싶네요^^
맹자와 양혜왕과의 첫 대면 대화로만 보면, 그 구체적 역사적 배경은 사실 알기 어렵구요. "맹자가 40대 때 양혜왕을 처음 만났다~"는 취지로 읽어주셨지만, 사서들에 의하면 맹자가 36세때 즉 BC 336년 양혜왕이, BC 341년 제나라 손빈과의 마릉전투 패배로 사실상 멸망 직전까지 갔다가 제나라에 신하국으로 들어가기로 약속하고 겨우 멸망을 면했었는데 그 약속을 안 지키자 다음해 BC 340년 제. 진. 조의 연합군의 공격으로 수도를 대량으로 이전하였고 이때부터 '양나라'로 불리게 되는 수모를 겪게 되었거든요.
그래도 양혜왕은 똥고집을 부리다 외교적 교섭을 통해 BC 336년에서야 제선왕과 회동을 통해 제나라와 평화협의를 마쳤고 양혜왕은 한숨 돌리자 바로 그 해 맹자(36세). 순우곤. 추연 등 당시 명사들을 초빙해 부국강병을 강구하다 제나라의 감시망에 걸려들어 다음해 즉 BC 335년 제나라 견 땅으로 불려가 혼줄이 나기도 했습니다.
양혜왕은 BC 319년 사망하기에(67세), 양혜왕과 맹자의 마지막 만남(오십보 백보 대화)은 BC 318년으로 맹자는 54세 때입니다^^
손빈은 60대초반, 제선왕은 30대 후반, 왕후 종리춘은 40대초중반, 맹자 54세로 추정됩니다 ^^
곧 맹자 양혜왕 편 각 구절은 제각기 시대가 달라져 그 맥락이 다르기에, 달리 해석될 여지가 있구요^^
양혜왕이 죽고, 마릉전투 때 죽은 태자 신을 대신해 즉위한 양양왕과의 대화는 최소한 BC 319년 이후에 이루어진 것이고 연령도 많아야 제선왕과 동년배이고 더 아래로 추정됩니다.
양혜왕이 "제나라와 ~ 큰아들(태자 신)이 죽고~"는 BC 341년 마릉전투 패배를 말하는 것이고, "서쪽 진나라~700리 땅을 잃고"는 그 다음해 즉 BC 340년 진효공 때 상앙이 계략을 써서 위나라를 쳐서 15개? 성읍을 빼앗은 전투를 말하는 듯 추정됩니다.
즉 맹자와 양혜왕은 맹자 36세, 양혜왕 50세에 처음 만난 걸로 추정됩니다 ^^
마지막 둘의 만남은 맹자 52세, 양혜왕 66세로 추정됩니다. 이때 양혜왕은 후에 양양왕이 되는 새로운 태자 혁을 소개해 준 듯 보이고, 태자 혁(맹자 책에선 양양왕)은 "천하는 누가 통일 할 것 같은지~"를 물었던 듯 싶고, 맹자의 '선문답' 같은 답변에서 "제나라와 깝치면 뒤진다"는 취지를 읽어낸 성 싶네요. 실제 양양왕(위양왕)은 즉위 후에 제나라와 '깝치는' 사례가 없었다는 걸 사서들에서 확인됩니다^^
오늘 저는 고전을 읽을 때, 그 구절 하나하나를 두고 그 역사적 배경을 확인해가면서 읽어야지 '축자적으로' 읽으면 3류 처세술 책으로 전락시킬 수 있단 교훈을 얻었네요^🤣^
맹자 양혜왕편 몇 구절 속에만, 실은 최소 30~50년 동안 여러 차례 있었던, 글고 당사자도 제각기 서로 다른 대화 내용을 '마치 한자리 원탁에서 모여 나눈 대화 마냥' 달랑 몇 구절로 정리해 놔서 참으로 잘못 읽혀 왔지 않았을까 싶네요^😂^
물론 저 혼자서만 그랬을 수도 있었겠지~ 하는 생각도 없진 않지만, 역사적 배경 특히 연대표 하나하나 적어가면서 살펴보지 않으면 대부분 오해하기 쉽지 않을까요? 정도전. 정몽주도 당시로선 연대표를 '교차체크'할 방법이 없었을 테지요?^😊^
시디로 만들어 판매 하셔요
차에 타고 다니며 노래처럼 들의면 좋을듯 합니다
맹자가 논박하는 사례들을 듣다보니, 요새 '남북 성명전'이나 '여야 성명전' 또는 대선후보경선 때 '후보들 간의 성명전'과 한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아서 자다 일어나 한참 웃다가 겨우 다시 누웠구만유^🤣^
사람살이가 다 똑 같은 것 같아요~ 시간이 흘러도 변함이 없는 현상이 정치일선에서는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bookwindow 그러게요 😢
🤗👍🙏🙏🙏🙏🙏💓💞🤗
수많은 사람들이
한혜진.
내용은 좋으나 현실에는 전혀부합되지못했으니...이것도 참 난감한일이다
어떤 책의 모든 내용이 다른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닌가 봅니다.
'맹자'에도 전후 맥락이 모순돼 보이는 구절도 숱하게 보이고, 맹자가 양혜왕에게 쫑꾸줄 땐 마치 자신이 하느님의 대역자인 듯 몰아세우기도 하지만 제자 만장에게 약점을 공격당할 땐 '내로남불'의 전형을 보여주는구나 싶을 정도로 자기방어의 논리를 펴지만, 정도전은 그런저런 내용들은 다 구석으로 몰아넣고서 "혁성혁명"을 합리화시키는데 필요한 논리들만 핀센트로 집어내서 이용했군요^^
연세대 신학과 김상근 교수는 마키아벨리 '군주론'을 강의하면서(기독교 신학 전공 교수가 마키아벨리 강의를 하는 것도 좀 뜬금없어 보이긴 하지만^^), '군주론'은 "마키아벨리 자신이 앞서 피렌체 공화정에서 외교관으로 재직하다 군주제 정권으로 바뀌어 축출당한 이후 다시 군주제 정권에 취직하려고 쓴 일종의 '취업용 자소서'임을 알고 읽어야 한다" 더군요. 그러나 "결국 취직은 커녕 '매국노 배신자'로 낙인찍혀 왕따 당하다 못해 생계유지 자체가 위협받자 자신의 독자들 중 피렌체 군주정에 반대하는 독자들을 모아 '야학'을 열어 생계를 해결하면서 사실상 피렌체 '군주정을 타도할 논리'를 개발해 가르치면서 그 강의안을 모은 게 '로마사논고'인데 이 로마사논고가 더 명저임에도 거의 관심두는 사람이 없다"더군요^^
아마도 정치에 관심있는 독자들의 입맛엔 그 집필취지야 뭐였든 "사자의 용맹과 여우의 간사함"을 이야기한 군주론이 더 입맛에 맞을 거라서라 추정하더군요^^
제 소견엔, '네이밍' 차이가 큰 영향을 준 게 아니었을까 싶네요. '군주론' 하면~ 그 책을 읽으면 군주가 되는 비결이라도 배울 거란 착각과 뭔가 있어보이지만 '로마사논고' 제목은 뭔가 고리타분할 거 같아 손이 안 가겠지요?^^ 당시로서도 망한 로마 역사에 관심 두는 독자들이 몇이나 있었을 지 원?^^
책제목 네이밍 성공으로 일약 인류역사상 10대 사상가 반열에 오른 프로이드가 있는데, 그는 듣보잡이던 자신의 정신분석학을 홍보하기 위한 언론플레이용 노이즈마케팅으로 '오이디푸스왕' 신화를 트레이드마크로 삼아 '오이디푸스콤플렉스'라는 용어를 개발해서 20~21세기를 통틀어 모든 학문 분야를 휩쓰는 기염을 토했거든요^^
그래도 막상 출판 후 초판은 8권 정도 팔렸었다는데 그 중 하나가 칼 융이 사가는 바람에 칼 융이 제자가 되면서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더군요^^
쇼펜하우어도 대표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던가가 초판이 10권인가 팔려 낙담하고 있던 차 그 책을 사간 독자 중 잘 나가던 니체가 있어 "성서보다 위대한 책"이라 평하는 바람에 헤겔을 능가하는 사상가라고 떴다더군요^^
고려말까지 사실상 금서 취급받던 '맹자' 책이 정도전이 읽고 조선 창건의 기초를 닦은 책이란 소문 덕분에 많이 팔렸다 보지만, 미래에도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의 보감으로 남지 않을까요?^^
거듭 감사드립니다🤗😙
맹자 엄마 호화 장례식 스캔들~~?
아빠 장례식보다 화려했다는 이유로~?^^
맹자 공손추 편에서 '맹자의 엄마 장례식이 아빠 장례식 보다 화려했다'는 이유로 맹자가 엄청 비판을 받았고 심지어 욕을 먹었다는 대목이 너무 이상하지 않나요?^^
맹자 아빠가 맹자 엄마에 앞서1~2년 차이로 돌아가셨다면 두 분의 장례식 호화 여부 비교가 되것지만, 맹자 아빠는 이미 50년전에 맹자가 어릴 때 돌아가셨다면 두 분의 장례는 비교 대상 자체가 안 되는 거 아닐까요?^^
맹자가 어릴 땐 시골깡촌에서 💩9녕 찢어지게 살았을 때 아빠 장례는 아마도 헌 가마니에 똘똘 말아서 그냥 양지에 묻어만 줘도 호화장례였을 터이지만, 맹자가 50세쯤엔 '사실상 제후급 못지않은 대우를 받던 시절'이었는데 부조금도 제후들이 서로 다투다시피 하면서 황금 몇 수레를 보낼 정도였을 터였을 텐데 아버지보다 검소하게 해야한다고 해서 엄마 시신을 대나무 몇 개 쪼개 돌돌 말아서 음지에 묻어야만 제대로 장례를 치른 셈이 될까요?^^
그렇다면, 합리적 추론상 우리가 알고 있듯이, 맹자 아버지가 맹자가 어릴 때 일찍 돌아가신 게 아니라, 7박사 자현 스님 말대로, 오래오래 살았고 아마도 엄마보다 최대 2~3년 정도 먼저 돌아가셨던 게 아니었을까 추정됩니다 ^^
즉 맹자는 아빠 장례 때 들어온 부조돈이 남아있었기에 엄마 장례 때 그걸 보태서 하늘나라에서도 엄마 아빠가 알콩달콩 잘 지내시라는 효심으로 보탠 듯 추정됩니다^^
맹자 성격상 부모님 장례식 때 들어온 부조돈을 챙겨서 '아파트 중도금 납부'에 쓰기는 좀 거시기했지 않았을까요?^🤣^
맹자 체면에 그런 속사정까지 제자들에게 다 털어놓진 못했었것지요? 맹자가 엄마 장례를 아빠 장례보다 호화롭게 치렀다는 오해를 지난 2천4백년 동안 받아온 속사정의 진면목이, 실은 이런 속사정이 있었던 거 아닐까요?^😊
맹자 공자 하다가 나라 망했는데....
망하지않은 나라가 있더냐
저도 20살 전에는 성리학이 고리타분하고 온갖 악습을 만들어낸 나라망하게 한 학문이고 작금의 꼰대들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해서 혐오했었습니다. 근데 성리학에 대해서 공부해보고 나서는 완전 입장이 바뀌었습니다.
불교도 말단에 가면 권력에 쩔어서 온갖 부패를 저지르고, 그리스도교도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고 면죄부를 사고파는 등 별 나쁜짓을 다 합니다. 그렇다고 중생을 구하겠다는 불교가 원래 나쁜게 아니고 모든 철학이나 종교가 인간의 욕망이 끼어들면 변질되기 마련입니다.
성리학도 마찬가지 입니다. 기득권이 이론을 욕심대로 해석해서 아랫사람을 누르는데 사용하고, 지나치게 이론에만 집착해서 본래 취지인 현실을 바꾸고 발전하지는 않고 당리당략에만 이용해서 나라가 망한거지요.
진짜 제대로 성리학했으면 우리나라 과학선진국에 도덕적으로도 세계 리더가 되었을 겁니다.
무식하기는… 좀 들어라 읽기라도 싫으면. 여기까지 들어와서 헛소리래
😂😅😊@@강태공-e3s
제자백가와 고대 그리스 소피스트와 똑 닮았네요. 요즘 '여야 성명전'과도요? 전당대회 출마자들 끼리 서로 공격하는 말투들이 훨씬 독하네요. 전국시대가 훨~ 신사적이었나 싶네요^🤣^
몇회독인지 잊었는데요^😁^,
회독이 늘어날수록 '가끔 길가에서 외치는 사이비 종교 신도들의 논리'와 닮아 보여 더욱 놀라네요^😅^
큰댁 동생이 '세계적인 종교지도자'인데, "(기독ㅇ라는 게 있는 줄 모르고 살다가 돌아가신) 우리 옛 조상들은 전부 지옥에 가셨다"고 핏대 올리면서 저를 설득하던 대학생 시절이 떠오르게 하네요. 나중에 알고보니, '단테의 신곡'이 그런 얘기더군요. 당대 주변 사람들이 단테에게 '우리 엄마 아빠는 지옥에 있더냐 천국에 있더냐'고 물어와서 단테가 도망다닐 지경이었다고, 연세대 신학과 김ㅇ근 교수가 플라톤아카데미 강의에서 하시더라구요 ^😊^
아니
중공 공산당이 공자 맹자를
팽시키고 철저히 제거하는데
그런 자를 일컬어 지혜의 진수라니
어참 이렇게 어리석다니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니
중공 공산당이 공자 맹자를
팽시키고 철저히 제거하는데
그런 자를 일컬어 지혜의 진수라니
어참 이렇게 어리석다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