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최초의 여소야대! 그런데 이걸 3당합당 한다고?

Поделиться
HTML-код
  • Опубликовано: 3 апр 2024
  • #여소야대 #3당합당 #노태우 #국회의원선거 #삼당합당 #김영삼 #김대중 #한국현대사 #역사쓱해설
    1988년. 노태우가 13대 대통령에 당선되며 다시 한번 군 장성 출신이 정권을 잡게 됩니다.
    하지만 앞서 간접선거로 막강한 권력을 가진 채 대통령이 된 두 인물들과는 달리, 노태우는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앞선 두 인물과는 괴를 달리하고 있었습니다.
    노태우는 대통령에 당선되긴 했지만, 득표율 36.6%라는 저조한 지지율로 입지가 매우 낮을 수밖에 없었고, 대통령에 당선되지는 못한 경쟁 후보들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은 대선 이후 시작된 13대 총선에서도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요.
    대통령이면서 민주 정의당의 총재였던 노태우는, 13대 총선에서 헌정 사상 처음으로 집권 여당이면서 의석수 과반을 채우지 못한 불명예를 얻게 돼버립니다.
    이른바 여소야대.
    3개의 야당이 국민들의 엄청난 지지를 받으며,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여당이 야당보다 의석 수가 적은 상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제 대통령이라고 해서, 집권 여당이라고 해서 소수 야당을 무시할 수는 없어졌으며, 모든 국회의 안건은 4개의 당이 대립과 조율을 통해 처리해야만 했습니다.
    여러 개의 파벌이 국가 발전을 위해 함께 고민한다는 것은 민주주의 체계에서 가장 완벽한 모습이라 일컬어지는 이상향이기도 했습니다.
    첫 번째 대통령이 배출되고 50여 년 만에 드디어, 부정선거나 무력을 동원하지 않고, 국민의 손으로 이룩한 민주주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여야의 대표 인사들은 이 상황이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노태우의 입장에서 여소 야대는 있을 수 없는 현상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대통령을 지지하는 여당은 항상 의석 과반을 차지하며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었고, 그것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대통령의 의지가 곧 여당의 의지였고, 여당의 의지가 곧 대통령의 의지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야당들과 내용을 공유하고 조율하는 데 힘을 써야 한다니.
    노태우의 입장에서 딱히 유쾌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야당의 대표들도 이 상황이 못마땅한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른바 구 군부인 박정희 정권에서 막강한 실세를 누렸던 김종필은 제3야당으로 밀려버린 이 상황이 너무나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이는 김영삼도 마찬가지였는데요.
    한때 민주화의 선봉에 서며 자신의 지지율을 한층 끌어올렸고, 이에 대통령선거만 직선제로 개헌된다면 자신이 대통령이 될 것이란 것에 일체의 의구심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대통령은 고사하고, 라이벌 관계였던 김대중에게 밀려 제1야당도 아니고, 제2야당으로까지 뒤처져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제1야당이 된 김대중은 어땠을까요?
    김대중은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었습니다.
    극심한 지역감정으로 절대로 변하지 않을 표밭이 존재했고, 이것은 추후에도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의미하고 있었습니다.
    모두에게 못마땅한 이 상황을 타계할 수 있는 것은, 두 당을 하나로 합치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 고.는.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야 대표들은 쉽사리 합당을 진행하지는 못하고 있었는데요.
    우선 김대중과 김영삼은 군부 타도를 외치며 민심을 얻어온 사람들입니다.
    그런 두 사람이 군부 출신인 노태우나 김종필과 합당한다는 것은 기껏 쌓아온 민심을 잃기에 충분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김대중과 김영삼 두 대표가 합당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겠지만,
    애초에 두 사람은 같은 당 소속이었음에도 대통령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면, 그 갈등으로 갈라선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영향으로 영남과 호남의 지역감정이 격화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는데, 그런 그들이 합당한다는 것은 또 다른 비판 여론을 만들기에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눈치만 보고 있을 상황에서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신 민주공화당의 김종필이었습니다.
    1989년 3월.
    김종필은 노태우에게 2당 합당 제의를 합니다.
    김종필의 입장에서 제일 힘없는 제3야당으로 남을 바에야, 합당을 하여 제1여당이 되는 게 더 나았기 때문입니다.
    합당 제의를 받은 노태우는 엄청 기뻤습니다.
    김종필의 신 민주공화당만 합당해도 여소야대를 붕괴시키고 여당이 의석의 과반을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두 사람은 군부 출신이라는 공통점도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지지하는 국민들의 반발도 거의 없다 싶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때다 싶었던 노태우는, 국민 대 통합이라는 미명하에 4개의 정당을 하나로 합치는 구상을 하게 되는데요. 명목상 지역감정 해소와 보수 대통합을 내세웠지만, 사실상 추후 대선에서의 표를 모으는 동시에 군사정권의 색채를 지우고자 하는 목적이 강했습니다.
    어쨌든 김종필의 합당 의사를 확인하고 5개월이 지난 1989년 8월.
    노태우는 김영삼을 만나 합당을 권유하게 됩니다.
    그런데, 군부 시 대 때 민주화의 선봉에 서며 군부독재 타도와 하나회 숙청을 외치던 그가, 어째서인지 노태우의 합당 제의를 생각보다 쉽게 수용합니다.
    이에 김영삼을 지지하던 국민들은 물론, 같은 당의 당원들까지 이에 반발했고, 일부 소수 인사들은 탈당하는 사태로 이어지게 됩니다.
    뭐, 당내 예서야 어쨌든,
    이로써 노태우의 여당은 총 의석의 과반을 넘어, 3/2를 차지하는 초 거대 정당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노태우는 이때는 몰랐을 겁니다. 자신의 입지를 드높혀준 이 인물이, 앞으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말이죠.
    자, 이제 3개의 정당이 합당 의사를 밝혔고, 마지막으로 제1야당,
    김대중의 평화민주당만 남았습니다.
    노태우는 가벼운 마음으로 김대중을 만났는데요.
    그런데 김대중은 국민들이 투표를 통해 만들어 놓은 여소야대를, 정당들의 이해관계로 하나로 합치는 것은,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정치윤리를 망치는 일이라며 완고하게 거부하게 됩니다.
    이로써 평화민주당은 유일한 야당으로 남게 되었고, 이듬해인 1990년 1월 22일.
    유일무이한 야당인 평화민주당을 제외한 세 개의 정당은 합당 발표하며, 총 의석수 217석릉 차지하는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이 출범하게 됩니다.
    그리고 민주자유당의 총재로 노태우가, 당 대표 최고의원으로는 김영삼이, 최고위원직으로 김종필이 각각 자리에 앉게 됩니다.

Комментари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