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궁금해서 보게 되었는데 설명이 부족한 점이 꽤나 많습니다. 첫째로 독일 북부집단군이 레닌그라드를 목표로 삼은 점은 간단하게도, 소련에서 다섯손가락안에 꼽히는 대도시인데다가 발틱함대의 모항,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련 최대의 조병창 중 하나였습니다. 또한 레닌그라드를 처음부터 굶겨죽이려한것이 아니라 공격 중에 주코프의 활약으로 레닌그라드가 쉽사리 함락될 처지가 되지않았습니다, 이에는 붉은함대의 불침함, 마라의 활약이 두드러졌는데, 앞서말한 발틱함대의 모항이란 점으로 항구에 정박해있던 소련군 군함이 도시 방어전 내내 격침당한 상태로도 화력지원 포격을 가했죠. 더군다나 레닌그라드 전선이 그저 안정화된 전선이 아니였단 점을 기억해야합니다, 소련군과 최고사령부 스타프카는 레닌그라드에서 계속되는 지원요청과 참사에 관해 포위망을 뚫기위해 대규모 병력을 준비하고, 또 여러차례 끊임없이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북부집단군은 강과 숲을 끼고 방어선을 굳혀 도시 내부에서 시도되는 돌파와 외부에서의 침입을 계속해서 격퇴해가며 좌절시켰습니다. 특히나 앞서 말했던 레닌그라드로 공세를 시작할 대규모 병력은 독일군 중부집단군의 모스크바 진격 당시 소련군이 준비한 모스크바 방위군 약50만에서 60만가량의 병력이 독일군에게 포위된 상태로, 뒤이어 레닌그라드에서 모스크바 방어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주코프가 정말 악착같이 시간을 벌며 병력을 끌어모을 당시 모든 역량이 모스크바 방위에 모이기 위하여 레닌그라드를 위해 준비한 병력을 모스크바로 돌립니다. 당시 상황을 보면 매우 절박함이 묻어나는데, 독일군 SS기갑사단들과 온갖 정예병력을 상대로 포위된 50~60만의 부대가 몇주간 결사항전을 벌이는 동안, 제1SS기갑사단 다스라이히 등의 선봉대가 진격하고, 이를 막기위해 학도병, 사관생도 등등 찾을수있는 모든 병력을 모아 방어선을 구축해 하루라도 시간을 더 벌고자 하는 싸움들이 벌어졌습니다. 하루를 벌때마다 모스크바에 새로운 사단 하나가 도착했고, 제1SS기갑사단 다스라이히가 모스크바 남부, 오룔 방향에서 진격하자 그쪽에 배치된 병력이 전무한 상황, 스타프카는 오룔에 600명의 공수부대원을 긴급공수하고, 이들은 스탈린그라드(중공업도시로써 T-34 생산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요충지였습니다.)에서 조직된 소련군 신규 T-34부대가 철도로 도착할때까지 시간을 벌라는 명령을 수행했습니다. 이들 공수부대는 SS기갑사단을 하룻동안 묶어놓는 대가로 단 600명중 단 28명만이 남을때까지 싸웠고, 그 순간 도착한 스탈린그라드의 기갑부대가 제1SS기갑사단 다스라이히를 반격하며 돈좌시키는데 성공하죠. 이랬듯 처절하게 소련군은 독일군을 상대로 모스크바 방어를 단 하루라도 더 벌어 증원하기위해 사방에서 희생했습니다, 이를 단지 히틀러의 오판 정도로 치부하기도 힘든것이, 애시당초 북부, 중부, 남부 집단군으로 나뉜건 소련군 병력이 광범위하게 퍼져있을뿐만 아니라, 징병제인 소련군 특징상 빠르게 모든 지방에서 예비군 사단들이 소집되기 때문인데. 독일군의 빠른 진격과 광범위한 면적의 동시 점령은 이러한 예비군 사단들이 제대로 병력이 모이거나 준비되기도 전에 도착해 우리로 치면 몇몇 중대정도밖에 안모인 예비군들이 오래된 소총과 수냉식 중기관총만 가지고서 기갑사단과 기계화사단으로 몰려드는 독일군의 선봉을 상대해야하는 상황이 연출됬고, 여기서 승리하는건 그저 육탄돌격정도는 되야 가능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병력이 그 자살육탄돌격을 시도해 몸으로라도 독일군 기갑을 막고자했고, 상당수가 실패함으로서 소련군 우라돌격의 환상이 만들어졌죠. 성공한 부대들도 앞날은 밝지않았는데, 독일군의 바다에 고립된채 기갑부대는 다른 먹잇감을 찾아 후방으로 떠나고, 독일군 보병사단들이 도착해 이들을 포위하고 포격과 공군지원, 압도적인 머릿수와 화염방사기 등을 동원해 전멸시키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소련군은 란체스터 법칙을 비롯해, 애시당초 무장과 탄약 등이 부족했고, 지휘부는 절멸, 상대의 압도를 통해서 말도안되는 교환비를 강요받았습니다. 이는 독일군의 노련함이 만들어낸 상황이며, 소련군의 무력함이 빚어낸 상황이였습니다. 더군다나 레닌그라드를 비롯해 키예프, 모스크바는 그 자체로도 수십만이 주둔하는 대규모 군사도시이기도 합니다. 히틀러가 단순히 여기 패널들이 말한대로 모스크바에만 집중했더라면 당장 키예프에 주둔하던 60만 병력과 레닌그라드에서 내려오는 소련군 증원에 쌈싸먹혔을겁니다. 즉 소련 영토에대한 동시다발적인 강습은 불가피했다는것이고, 오히려 히틀러는 전쟁초기에는 올바른 판단을 내린게 맞습니다. 그리고 명령 270호에대한 왜곡이 상당히 강한데, 포로가 자기손으로 돌아오는 경우에도 범죄자가 되는 경우가 분명히 있지만, 면밀히 파고들어야합니다. 소련은 독일군 첩보부대가 전쟁초기 소련군으로 위장해 소련군 진지에 잠입하고 내부 파괴공작이나 암살, 교란 등으로 초기의 효과를 극대화한걸 알고 있습니다. 또한 독일군의 이러한 위장침입부대들은 스탈린그라드까지도 공공연하게 온갖 시설이나 부대에 침투하여 해당 부대를 전멸로 몰아간 전적이 매우 많습니다. 그런 위협에 대처하기위해 소련 정보부대인 NKVD, 즉 인민내무보안위원회와 그 소속인 정치장교들, 그리고 이런 포로가 되었던 아군들을 자주 심문한 "스메르쉬"를 기억해야합니다. 스메르쉬는 방첩부대로서, 이렇게 탈출한 소련군 포로가 돌아오면 그가 독일군에게 포섭된 자인지, 독일군을 이용해 이득을 보고 편을 바꾼 "변절자"인지, 아니면 독일군에게 부역한 반역자인지를 면밀히 조사하고, 또 심문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포로를 향해 온갖 당혹스러운 질문과 심문이 가해졌고, 여기서 말문이 막히거나 당혹스러워하는 자 등을 선별하여 명령 270호를 적용했고, 이 심문을 통과한 자들은 다시 원래 계급과 부대에 원상복귀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스탈린은 전쟁 중 전투중 포로로 잡히거나 부상을 입은 지휘관들은 270호의 대상에서 제외했고, 사지멀쩡하게 자기 의지로 항복한 자들에게 270호를 적용했습니다. 소련 관료체제와 스탈린은 흔히 이 영상의 패널들과 우리가 생각하는 것관 다르게, 물론 편집증적인 면이 강하지만, 생각외로 굉장하게 솔직한 편이였습니다. 소련관료체제는 수백만이나 되는 거대한 소련 징집군을 4년동안 관리하다보니 여러 실수가 나왔는데, 한 멀쩡한 징집부대 전체가 서류가 누락되어 유령부대가 되었고, 다시 발견된 이후로 이들은 형벌부대로 격하되었지만, 행정상의 실수라는 점을 인정해서 이들을 모두 면제시켜, 집으로 멀쩡히 돌려보낸 일화까지 있죠.
마지막으로, 이들 소련군이 그저 행정이나 목숨이 담보로 잡힌 가족들을 위해 싸운 무슨 폭탄목걸이를 찬 노예들인것마냥 말하는 것도 심각한 오류입니다. 소련군에겐 그들이 목숨을 바쳐서 싸울만한 이유와 동기가 있었습니다. 독일군이 소련으로 진격해들어오면서, 1941년 첫해에만 천만건이 넘는 강간이 일어났고, 독일군은 벨라루스 초토화 작전으로 벨라루스 인구와 국토의 3분의 1을 눈내리는 사막으로 만들어버렸으며, 우크라이나 일대에 인간의 시신을 불태운 뼛가루만으로도 4미터 두께의 불탄 인간뼛가루로 된 지층을 만들어버렸으며 이에 희생된 사람은 작게는 수만명에서 많게는 수십만으로 추정됩니다. 남은것 불탄뼛가루뿐인데, 그마저도 압착되어있고, 나치가 건장한 성인남성만을 대상으로 삼은게 아니라 다수의 여성이나 아이들까지 포함시켰기 때문입니다. 이는 소련군이 쿠르스크에서 승리함으로서 심화되는데, 독일군은 쿠르스크 이래로 방어전을 펼치기위해 우크라이나 전체를 초토화 시켜버립니다. 모든 철도를 뜯거나 파괴하고, 모든 기차역을 폭파했으며, 모든 농경지와 목장을 불을 지르고 닥치는대로 인구를 학살했으며, 노동가능한 인구는 전시노동을 위해 독일로 끌려갔습니다. 십몇년전, 오늘날 러시아에서 네오나치가 들끓을때 러시아 신문이 꽃다발을 든 채 구소련 군복을 입고 눈물을 닦고있는 한 2차세계대전 노병의 사진을 1면에 싣고, 그 옆에 네오나치들의 사진을 실으며 " 조상의 뼈위에서 춤추는 패륜아들 "이란 제목을 실었을때, 그때 그 노병은 2차세계대전 노병이 맞으며, 그는 독소전 초기에 숨어서 자기 어머니를 독일군SS장교가 총살하는걸 지켜봤고, 그의 고향 마을이 불타는 광경을 보고 살아남아 소련군에 자원입대했습니다. 그는 모스크바 전투에 참여했으며, 온갖 소련군의 주요전투에 참여했음에도 살아남아 마침내 베를린까지 도달해 제4제국의 마지막을 함께한 사람이였습니다. 이들이 과연 총구와 노역이 두려워서 그렇게 처절하게 싸운것은 아닐겁니다. 무엇보다도, 러시아인들은 12세기부터 조국이란 단어를 써온 사람들입니다, 제국시절 수많은 공산주의자를 황제의 친위대로서 죽여온, 내전 당시 왕당파에 서서 볼셰비키에 맞서 싸운 코사크족마저도,나치의 침공에 맞서서 '어머니-조국'을 위해 싸우겠노라고 청원을 넣었죠. 그들에겐 자신들을 수용소에 집어넣고 숲속으로 끌고가 총구 끝으로 자신들을 학살하던 그 붉은 러시아조차도 자신들의 어머니였던 셈입니다.
양측 다해 3천만이 넘게 죽은 독소전쟁은 2차대전 다른 전장을 다 합친것 보다도 더 스케일, 물량도 넘사지만 참혹한 절멸전도 처참하죠. 몇회정도로 연재해야 할 전장인데 바그라티온 작전도 그렇고 최후 베를린점령전도 조금만 더 디테일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네요. 사실 세바스토폴이나 데미얀스크 전투같은 국지전들 하나하나가 서사시죠.
'1917년 볼세비키혁명'은 새로운 국가라는 이름하에 [대숙청]. 무지막지한 피의 숙청-거기에 '스탈린'이 있군요.불가침조약이란 새삼 알게 되었어요. 독소전쟁도 독일군 편제에 독일에 점령당한 젊은이가 징집된 군대네요. 마찬가지로 소련군대도 마찬가지겠지요.전쟁은 한바탕 피비린내 풍기는 꿈이야기.마지막 명언 '전쟁이 끝나면 정치가 시작된다' 숨은 이야기 처음들은 이야기 많군요 고맙습니다
I.F. Hahn 이건 또 뭔 개소리인지;; 독일은 소련침공 초기부터 거의 대다수의 사단들을 동부전선에 투입시켰고 서부전선에는 2차대전이 시작할때부터 끝날때까지 소규모 사단밖에 없었는데 미,영이 영리한거라니;; 또한 당시 미국은 소련을 지원해줄수 밖에 없었습니다;; 소련이 초기에 무너졌으면 독일과 일본은 자원을 얻게되고 서로의 활발한 교류로 미국은 태평양에서 티거를 만났을것이고 대서양에선 영국이 일찍 무너졌겠죠. 그리고 미국의 물자지원은 이미 독일의 바르바로사 공세가 실패한 1942년 이후에 들어옵니다. 소련이 모스크바를 방어할때 미국의 지원없이 지켰단 소리죠.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바그라티온 작전은 규모에 있어서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차이가 많이 난다. 미-영-불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교두보를 형성한 시점에서 나치 독일이 서부전선에 전개한 사단 수는 약 20개 남짓, 반면 동부전선에는 300개가 넘는 독일군 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소련군이 이들을 말 그대로 다 갈아버리면서 들이닥친 게 바그라티온 작전이다. 이런 규모의 전투에서 승리하다 보니 결국 이 작전은 서부전선, 동부전선을 넘어 2차 대전의 전세 자체를 연합국 위주로 만들어버렸다. - 나무위키
토전사 15부 기이한 전쟁에서 겨울전쟁을 잘 들었습니다. 기회가 되시면 토전사에서 겨울전쟁을 다시한번 제대로 훌터주실수 있으신지요? 그런데 1.임교수께서 소련의 핀랜드 침공이유를 막대한 지하자원을 노렸기 때문이라고 하셨는데 소련의 핀랜드 침공이유는 언젠가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리라고 예상했기에 소련땅밖에 방어선을 만들려고 발트3국과 핀랜드를 침공 한것 아닌가요? 2.핀랜드가 만든 수오미기관단총과 소련의 따발총과의 관계를 자세히 밝혀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보로쉴로프는 스탈린과도 사적으로는 뺨을 서로 후려갈길정도로 친했습니다. 그는 유태인이었는데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독일의 침략행위를 상당히 규탄했습니다. 게오르기주코프의 경우에는 바실리 블류헤르가 해임되고나서 극동사령관에 임명되어서 싸웠습니다. 블류헤르는 정말 고통스럽게 죽었습니다. 그는 장고봉(하산호)에서 처음에 일본에 밀렸다는 이유로 해임되고 1938년에 고문을 당하는데 고문은 라브렌티베리야가 맡았습니다. 정말 고문을 억울하게 당하면서 외치기를 "스탈린 각하! 저 자가 잔혹하게 휘두르는것을 보고 계십니까?" 이렇게 울부짖다가 눈 한쪽이 빠져버립니다. 그는 죽고 그의 아내도 끌려와서 베리야에게 고문당합니다. 죽진 않았고, 후에 나와서 회고하기를 베리야는 잔혹하고 감정이 없었으며, 뭔가를 괴롭히고 그걸즐기는 새디즘적 취미를 지니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베리야는 스탈린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습니다. 스탈린이 조르게의 말은 모두무시하고, 그의 말만듣다가 낭패를 보기도 했는데 그 때 그가 한 말이: "영광스러우시고, 충성할 스탈린 각하께 바칩니다: 히틀러는 절대 1941년에 침략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숙청 때 부하린이 말한 스탈린은 이렇습니다: "그는 칭기즈칸이다. 우릴 모두 죽이려들 것이다." 그리고 그가 쓴 유언이자 미망인이 1988년에 공개한 글에 따르면: "나는 죽음과 맞설 것이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도 프롤레타리아들의 숭고한 심판이나 핍박도 아니다. 다만 시간에 맞게 틀림없이 탁 멈추는 폭탄앞에서, 중세의 잔혹한 압제를 불러오는 앞에서 나는 무력함을 느낀다...." 스탈린이 냉정해지고 잔혹해지게 된 것은 1903년에 자신의 아내가 죽고난 이후부터 입니다. 그와 타플리스 신학교시절 동창이자 후에 정적이되는 이레마쉬빌리가 묘사하기를 스탈린을 찾아갔을 때, 그는 자신을 예전에 정적이 되기이전의 진구를 대하듯 슬프게 대해줬다고 해요. 그러면서 말하길 좋은 사람이 떠나갔다고, 그리고 황량하다고, 자기의 마음이 떠나가고 모든게 황폐화된만큼 황량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스탈린) 냉정하고 잔인해져갔다고 쓰고 있습니다. 이레마쉬빌리는 스탈린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묘사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어머니에게는 헌신적이었다는 이야기도, 그가 얼굴에 마마자국으로 흉이나있고, 한쪽 팔은 만성적으로 굽히기를 어려워했다고 말한 것도 다 그가 회고를 한 것입니다. 그의 팔이 그렇게 된 이유는 성가대원으로써 어릴 때 행진하다가 마차에 치여서 쓰러진채로 왔다고 합니다. 그 때 어머니가 하나뿐인 독자를 보며 통곡을 하셨는데 스탈린이 그 소리를 듣고 의식을 차리면서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가 신학교에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머니가 원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후에 스탈린 자신이 통치자로 있을 때 1937년경에 고향인 조지아의 고리로 돌아갑니다. 거기서 어머니는 소소(스탈린의 애칭)를 보고 "소소야. 너가 내 말대로 신학교에서 잘해서 신부가 되었다면 좋았을텐데 그러지 못해서 안타깝구나." 라고 말하니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항시 냉혹했던 그도 그날은 처음으로 어머니 앞에서 웃음을 터뜨리고 맙니다. 1년후 어머니가 세상을 뜹니다. 그가 신학교에 있던 시절을 후에 시몬 루드비히 라는 작가앞에서 말하게 됩니다. 루드비히가 어째서 현재처럼 됐느냐 그리고 가족들이 심하게 굴지 않더냐 하고 말하니 스탈린이 말하길 아무리 가난했어도 부모님에게는 원망도 구는것도 없다고 하고, 특히 어머니가 헌신적이라고 말하며, 자신은 현 상황에 대해서 언제든지 투사가 될 준비가 되어있었다고 말합니다. 신학교의 당시 세태를 물으니 그가 말하길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식사와 차를 마시기 위해 내려가는데 올라와보면 사물함이 뒤져진 흔적이있다면서 그런 곳에서 무엇을 배우겠냐며 언짢아합니다. 더군다나 타플리스 신학교는 스탈린이 입학하기 1년전인 1885년에는 교장이 조지아의 문화와 민족을 비하하는 연설을 하자 한 청년이 튀어나와 교장을 때려눕히고 팼는데 그것을 보고 신학생들은 환호했다고 합니다. 그 교장은 얼마안가 1년후에 라기예프 라는 조지아 출신 청년에게 조지아식으로 칼을 맞고 죽습니다. 스탈린은 당시 여러 금서들을 읽었는데 어느날은 방에서 그런 책들을 읽다가 디미트리 라는 이름의 신부가 들어오더니 "너는 내 모습이 보이지도, 내말이 들리지도 않는것이냐?" 나무라니 그에 말하기를 "저는 제 눈앞의 점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니 그날 이후로 제적되어서 살았습니다. 이레마쉬빌리는 스탈린이 항시 혼자 있었고, 높은 산이나 폭포, 자연 등을 바라보며 그런 곳을 개척하고 올라가는 듯한 생각을 많이했다고 묘사합니다. 그리고 그가 조지아출신이고 이는 즉, 아시아인 이기도 했다는 것이었는데, 일본의 외상 마쓰오카 가 방소해서 중립조약을 맺을 때 말하기를 "스탈린 각하는 아시아와 유럽을 비롯한 넓은 땅의 아시아인 지도자이시고, 우리 대일본제국은 아시아의 최강국이니 서로 공존하여 큰 사회를 유지하도록 노력합시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만 그 이후에 스탈린이 의미심장하게 말하기를 "지난 세월 일본에게 당한 것은 우리 역대의 역사이래로 희대의 치욕이자 지워지지 않는 상처였다. 이제 그 원한을 갚고, 그것을 치유할 때가 온 것이다." 그러면서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1945.8.8에 했지요.
독일이 레닌그라드를 공격한 결정적 이유중 하나는 핀란드를 끌어들이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소련에게 영토를 빼앗긴 핀란드를 설득해서 협공하기로 했었는데 문제는 핀란드가 자신들의 영토만 수복하고 스톱했죠. 그래서 레린그라드 인근에 도착했던 독일은 단독공격으로는 부담감을 느끼고 게다가 장애물까지 있어 결국 포위하게 된겁니다~
진짜 이 프로그램은 많은 교훈을 주고 좋은 것 같다. 역사에서 배울 건 잘 배워야지.
토전사는 정말 대단한 프로그램입니다. 4분의 호흡이 환상적입니다.*^^*
1:25 독-소 불가침조약 4:24 히틀러를 믿은 스탈린 05:28 독재가 나쁜 이유 5:54 대숙청(예조프시나) 7:56 바르바로사 작전 8:47 실수답습 11:13 명언 11:41 초반승리 12:37 항복 13:48 자유러시아군 조직 14:25 명령 270호 15:44 레닌그라드 포위전 18:53 주코프 등장 21:11 적의 장점들을 흡수하자 22:06 주코프의 데뷔.(노몬한 전투) 22:24 스탈린 의심. 25:28 주코프 성격 26:43 모스크바 공방전1 28:20 무기고. 32:13 모스크바 공방전2. 35:13 탈영급증 37:36 히틀러 오판 38:55 스탈린그라드 전투 40:55 성채작전 시작(쿠르스크 전투) 43:20 냉전시작,유럽연합 탄생 45:41 새로운 진실
한번 궁금해서 보게 되었는데 설명이 부족한 점이 꽤나 많습니다.
첫째로 독일 북부집단군이 레닌그라드를 목표로 삼은 점은 간단하게도, 소련에서 다섯손가락안에 꼽히는 대도시인데다가 발틱함대의 모항,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련 최대의 조병창 중 하나였습니다.
또한 레닌그라드를 처음부터 굶겨죽이려한것이 아니라 공격 중에 주코프의 활약으로 레닌그라드가 쉽사리 함락될 처지가 되지않았습니다, 이에는 붉은함대의 불침함, 마라의 활약이 두드러졌는데,
앞서말한 발틱함대의 모항이란 점으로 항구에 정박해있던 소련군 군함이 도시 방어전 내내 격침당한 상태로도 화력지원 포격을 가했죠.
더군다나 레닌그라드 전선이 그저 안정화된 전선이 아니였단 점을 기억해야합니다, 소련군과 최고사령부 스타프카는 레닌그라드에서 계속되는 지원요청과 참사에 관해 포위망을 뚫기위해 대규모 병력을 준비하고, 또 여러차례 끊임없이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북부집단군은 강과 숲을 끼고 방어선을 굳혀 도시 내부에서 시도되는 돌파와 외부에서의 침입을 계속해서 격퇴해가며 좌절시켰습니다.
특히나 앞서 말했던 레닌그라드로 공세를 시작할 대규모 병력은 독일군 중부집단군의 모스크바 진격 당시 소련군이 준비한 모스크바 방위군 약50만에서 60만가량의 병력이 독일군에게 포위된 상태로,
뒤이어 레닌그라드에서 모스크바 방어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주코프가 정말 악착같이 시간을 벌며 병력을 끌어모을 당시 모든 역량이 모스크바 방위에 모이기 위하여 레닌그라드를 위해 준비한 병력을 모스크바로 돌립니다. 당시 상황을 보면 매우 절박함이 묻어나는데, 독일군 SS기갑사단들과 온갖 정예병력을 상대로 포위된 50~60만의 부대가 몇주간 결사항전을 벌이는 동안, 제1SS기갑사단 다스라이히 등의 선봉대가 진격하고, 이를 막기위해 학도병, 사관생도 등등 찾을수있는 모든 병력을 모아 방어선을 구축해 하루라도 시간을 더 벌고자 하는 싸움들이 벌어졌습니다.
하루를 벌때마다 모스크바에 새로운 사단 하나가 도착했고, 제1SS기갑사단 다스라이히가 모스크바 남부, 오룔 방향에서 진격하자 그쪽에 배치된 병력이 전무한 상황, 스타프카는 오룔에 600명의 공수부대원을 긴급공수하고, 이들은 스탈린그라드(중공업도시로써 T-34 생산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요충지였습니다.)에서 조직된 소련군 신규 T-34부대가 철도로 도착할때까지 시간을 벌라는 명령을 수행했습니다. 이들 공수부대는 SS기갑사단을 하룻동안 묶어놓는 대가로 단 600명중 단 28명만이 남을때까지 싸웠고, 그 순간 도착한 스탈린그라드의 기갑부대가 제1SS기갑사단 다스라이히를 반격하며 돈좌시키는데 성공하죠. 이랬듯 처절하게 소련군은 독일군을 상대로 모스크바 방어를 단 하루라도 더 벌어 증원하기위해 사방에서 희생했습니다, 이를 단지 히틀러의 오판 정도로 치부하기도 힘든것이,
애시당초 북부, 중부, 남부 집단군으로 나뉜건 소련군 병력이 광범위하게 퍼져있을뿐만 아니라, 징병제인 소련군 특징상 빠르게 모든 지방에서 예비군 사단들이 소집되기 때문인데.
독일군의 빠른 진격과 광범위한 면적의 동시 점령은 이러한 예비군 사단들이 제대로 병력이 모이거나 준비되기도 전에 도착해 우리로 치면 몇몇 중대정도밖에 안모인 예비군들이 오래된 소총과
수냉식 중기관총만 가지고서 기갑사단과 기계화사단으로 몰려드는 독일군의 선봉을 상대해야하는 상황이 연출됬고, 여기서 승리하는건 그저 육탄돌격정도는 되야 가능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병력이 그 자살육탄돌격을 시도해 몸으로라도 독일군 기갑을 막고자했고, 상당수가 실패함으로서 소련군 우라돌격의 환상이 만들어졌죠.
성공한 부대들도 앞날은 밝지않았는데, 독일군의 바다에 고립된채 기갑부대는 다른 먹잇감을 찾아 후방으로 떠나고, 독일군 보병사단들이 도착해 이들을 포위하고 포격과 공군지원, 압도적인 머릿수와 화염방사기 등을 동원해 전멸시키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소련군은 란체스터 법칙을 비롯해, 애시당초 무장과 탄약 등이 부족했고, 지휘부는 절멸, 상대의 압도를 통해서 말도안되는 교환비를 강요받았습니다.
이는 독일군의 노련함이 만들어낸 상황이며, 소련군의 무력함이 빚어낸 상황이였습니다.
더군다나 레닌그라드를 비롯해 키예프, 모스크바는 그 자체로도 수십만이 주둔하는 대규모 군사도시이기도 합니다.
히틀러가 단순히 여기 패널들이 말한대로 모스크바에만 집중했더라면 당장 키예프에 주둔하던 60만 병력과 레닌그라드에서 내려오는 소련군 증원에 쌈싸먹혔을겁니다.
즉 소련 영토에대한 동시다발적인 강습은 불가피했다는것이고, 오히려 히틀러는 전쟁초기에는 올바른 판단을 내린게 맞습니다.
그리고 명령 270호에대한 왜곡이 상당히 강한데, 포로가 자기손으로 돌아오는 경우에도 범죄자가 되는 경우가 분명히 있지만, 면밀히 파고들어야합니다.
소련은 독일군 첩보부대가 전쟁초기 소련군으로 위장해 소련군 진지에 잠입하고 내부 파괴공작이나 암살, 교란 등으로 초기의 효과를 극대화한걸 알고 있습니다.
또한 독일군의 이러한 위장침입부대들은 스탈린그라드까지도 공공연하게 온갖 시설이나 부대에 침투하여 해당 부대를 전멸로 몰아간 전적이 매우 많습니다.
그런 위협에 대처하기위해 소련 정보부대인 NKVD, 즉 인민내무보안위원회와 그 소속인 정치장교들, 그리고 이런 포로가 되었던 아군들을 자주 심문한 "스메르쉬"를 기억해야합니다.
스메르쉬는 방첩부대로서, 이렇게 탈출한 소련군 포로가 돌아오면 그가 독일군에게 포섭된 자인지, 독일군을 이용해 이득을 보고 편을 바꾼 "변절자"인지, 아니면 독일군에게 부역한 반역자인지를
면밀히 조사하고, 또 심문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포로를 향해 온갖 당혹스러운 질문과 심문이 가해졌고, 여기서 말문이 막히거나 당혹스러워하는 자 등을 선별하여 명령 270호를 적용했고,
이 심문을 통과한 자들은 다시 원래 계급과 부대에 원상복귀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스탈린은 전쟁 중 전투중 포로로 잡히거나 부상을 입은 지휘관들은 270호의 대상에서 제외했고,
사지멀쩡하게 자기 의지로 항복한 자들에게 270호를 적용했습니다. 소련 관료체제와 스탈린은 흔히 이 영상의 패널들과 우리가 생각하는 것관 다르게, 물론 편집증적인 면이 강하지만,
생각외로 굉장하게 솔직한 편이였습니다. 소련관료체제는 수백만이나 되는 거대한 소련 징집군을 4년동안 관리하다보니 여러 실수가 나왔는데,
한 멀쩡한 징집부대 전체가 서류가 누락되어 유령부대가 되었고, 다시 발견된 이후로 이들은 형벌부대로 격하되었지만, 행정상의 실수라는 점을 인정해서 이들을 모두 면제시켜,
집으로 멀쩡히 돌려보낸 일화까지 있죠.
마지막으로, 이들 소련군이 그저 행정이나 목숨이 담보로 잡힌 가족들을 위해 싸운 무슨 폭탄목걸이를 찬 노예들인것마냥 말하는 것도 심각한 오류입니다.
소련군에겐 그들이 목숨을 바쳐서 싸울만한 이유와 동기가 있었습니다. 독일군이 소련으로 진격해들어오면서, 1941년 첫해에만 천만건이 넘는 강간이 일어났고,
독일군은 벨라루스 초토화 작전으로 벨라루스 인구와 국토의 3분의 1을 눈내리는 사막으로 만들어버렸으며,
우크라이나 일대에 인간의 시신을 불태운 뼛가루만으로도 4미터 두께의 불탄 인간뼛가루로 된 지층을 만들어버렸으며 이에 희생된 사람은 작게는 수만명에서 많게는 수십만으로 추정됩니다.
남은것 불탄뼛가루뿐인데, 그마저도 압착되어있고, 나치가 건장한 성인남성만을 대상으로 삼은게 아니라 다수의 여성이나 아이들까지 포함시켰기 때문입니다.
이는 소련군이 쿠르스크에서 승리함으로서 심화되는데, 독일군은 쿠르스크 이래로 방어전을 펼치기위해 우크라이나 전체를 초토화 시켜버립니다.
모든 철도를 뜯거나 파괴하고, 모든 기차역을 폭파했으며, 모든 농경지와 목장을 불을 지르고 닥치는대로 인구를 학살했으며, 노동가능한 인구는 전시노동을 위해 독일로 끌려갔습니다.
십몇년전, 오늘날 러시아에서 네오나치가 들끓을때 러시아 신문이 꽃다발을 든 채 구소련 군복을 입고 눈물을 닦고있는 한 2차세계대전 노병의 사진을 1면에 싣고, 그 옆에 네오나치들의 사진을 실으며
" 조상의 뼈위에서 춤추는 패륜아들 "이란 제목을 실었을때, 그때 그 노병은 2차세계대전 노병이 맞으며, 그는 독소전 초기에 숨어서 자기 어머니를 독일군SS장교가 총살하는걸 지켜봤고, 그의 고향 마을이 불타는 광경을 보고 살아남아 소련군에 자원입대했습니다. 그는 모스크바 전투에 참여했으며, 온갖 소련군의 주요전투에 참여했음에도 살아남아 마침내 베를린까지 도달해 제4제국의 마지막을 함께한 사람이였습니다. 이들이 과연 총구와 노역이 두려워서 그렇게 처절하게 싸운것은 아닐겁니다.
무엇보다도, 러시아인들은 12세기부터 조국이란 단어를 써온 사람들입니다, 제국시절 수많은 공산주의자를 황제의 친위대로서 죽여온,
내전 당시 왕당파에 서서 볼셰비키에 맞서 싸운 코사크족마저도,나치의 침공에 맞서서 '어머니-조국'을 위해 싸우겠노라고 청원을 넣었죠.
그들에겐 자신들을 수용소에 집어넣고 숲속으로 끌고가 총구 끝으로 자신들을 학살하던 그 붉은 러시아조차도 자신들의 어머니였던 셈입니다.
멋집니다. 추천 박고 가요.
@@임태균-g9q 다스 라이히는 제2SS기갑사단입니다.
제1SS기갑사단은 LSSAH입니다
@@stoner63a9 쏘리...
장황하게 써놔도 눈에 안 들어오면 소용없는 것 같은데..
인체공학 따위는 무시한 설계....에서 빵 터졌어요 ㅋㅋㅋㅋㅋ 대본 쓰시는 분의 센스와 이세환
기자님의 말투가 찰떡이에요 ㅋㅋㅋㅋ
체제가 건강하지 않으면 전략보다 정치가 앞선다는 말씀!! 깊이 새깁니다!!
토전사 진짜 역대급 프로그램.... 다시해줬으면 합니다!!!
토전사에서 세계대전을 다시 해줘야한다~~솔직히 10부작 이상은 논해야 세계대전 이야기가 되지 않겠냐...
요즘 시리즈 보면 20부 이상 해야 함 ㅋㅋㅋ
결국 강제방송종료시킴
독소전쟁 하나만으로 10부작 이상 만들 수도 있을 듯 ㅋㅋㅋ
이번편 명언
체제가 건강하지 않은 국가는 전략보다 정치가 앞서게 된다
문재인 정부네요
sieun lee ㅏ
sieun lee ㅓ
ㅐ
sieun lee ㅓㅐㅓㅐㅑ ㅑ
ㅏㅏㅑㅓ ㅔㅜ
주코프랑 스탈린하면 이제 공산주의 유머밖에 안떠오름ㅋㅋㅋㅋ
주코프가 혼잣말로 '멍청한 콧수염쟁이!'라고 한걸 정보요원이 스탈린에게 밀고했더니,
스탈린 왈 : 자네가 멍청한 콧수염쟁이라고 욕한걸 들었다는데 누굴 욕한건가?
주코프 : 히틀러를 욕한겁니다.
스탈린 : 그러면 요원동지는 멍청한 콧수염쟁이를 누구라고 생각하고 보고한건가?
요원 :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요원 사상이 더 의심스러움.
없는적 찾아내 죽이는 강철대원수 클라쓰
누구 한명은 죽어야 됨ㅋㅋㅋ
실제로 주코프랑 스탈린 절친이어서 저런 상황도 가능했을듯
양측 다해 3천만이 넘게 죽은 독소전쟁은 2차대전 다른 전장을 다 합친것 보다도 더 스케일, 물량도 넘사지만 참혹한 절멸전도 처참하죠. 몇회정도로 연재해야 할 전장인데 바그라티온 작전도 그렇고 최후 베를린점령전도 조금만 더 디테일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네요. 사실 세바스토폴이나 데미얀스크 전투같은 국지전들 하나하나가 서사시죠.
만약 전개과정 설명과 같이 여러 전투까지 깊이 들어갔다면 오데사, 브레스트 요새 포위전, 민스크, 스몰렌스크, 키예프, 우만, 툴라, 로스토프, 하르코프 ㄷㄷ
그냥 독소전 연구자료를 찾아보는게 되겠군요.
전후 몽고메리가 2차대전의 승리의 전환점은 엘 알라메인 전투와 노르망디 상륙전이라고 하니까 주코프가 화가나서 바로 반박함
사단 군단급 전투였던 서부에 비해 동부전선은 백만명씩 아예 집단군으로 전투를 밥먹듯이 치뤘으니 스케일이 남다름
인류역사상 이런 전쟁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3천만죽은 가운데 1500~2000만은 소련군,소련국민이였다는건 비밀...
ㄹㅇ 막말로 제일 좃같았던 전선은 동부전선이랑 태평양전선이었는데 지들이 참전한 전선이라고 서부전선만 물고빨고 난리부르스죠 누가 보면 프랑스 땅에서만 2차대전 한 줄
진짜 펙트인게 실력이있어야 당당할수있다
'체제가 건강하지 않은 국가는 전략보다 정치가 앞서게 된다' 이번영상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말이네요
오늘도 좋은 명강의 말씀 잘 듣구 갑니다~ 영상도 다 보고 댓글들도 다 읽어보았네여 ㅎ
히틀러가 지고 스탈린이 이긴 이유는 히틀러는 그 누구도 믿지 않았고 스탈린은 주코프라는 유능한 군인 한명이라도 믿었기 때문이다.
독일군 장성들이 괜히 수백번 히틀러 암살을 시도한 게 아니다.. 그렇게 똑똑하고 유능하고 히틀러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던 롬멜이 오죽했으면 '독일국을 구한다는 명목' 으로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했을까..
클루게는 자살까지 했죠...
윤지연 아나 너무 이뻐요 ㅜㅜ
엄마말씀 잘 들어야지? 아나,작전을 시작한다.
유익한 정보 감사합니다. 국방TV 역사 왜곡없는!!!!!! 진실된 방송 계속 해주세요
'1917년 볼세비키혁명'은 새로운 국가라는 이름하에 [대숙청]. 무지막지한 피의 숙청-거기에 '스탈린'이 있군요.불가침조약이란 새삼 알게 되었어요. 독소전쟁도 독일군 편제에 독일에 점령당한 젊은이가 징집된 군대네요. 마찬가지로 소련군대도 마찬가지겠지요.전쟁은 한바탕 피비린내 풍기는 꿈이야기.마지막 명언 '전쟁이 끝나면 정치가 시작된다' 숨은 이야기 처음들은 이야기 많군요 고맙습니다
박사님 짱이에요
이건 10년이 지나도 개꿀잼 컨텐츠입니다.ㅋㅋㅋㅋㅋㅋ
독소전에서 활약했던 소련 장군들 중에 토사구팽 당하지 않은 거의 유일한 최고 지휘관급 장군이 주코프입니다.
스탈린의 소방수로 활약했죠
독소전쟁 : 둘 중 누가 또라이인가를 겨루는 전쟁
독소전 때 독일 제6기갑사단을 하루동안이나 막은 대두포탑 김병이 kv-2도 빼 놓을수 없죠
2차세계대전 지금 다뤘으면 10편은 족히 분량 넘었을거같은데... 아쉽네요
킹정합니다
10편이라니요 2차대전 100편다뤄도 모자름
역전다방이 태평양전쟁 가지고 10편정도 뽑아낸거 같은데..
히틀러가 저 짓거리 하니, 오죽하면 무능하다고 욕먹는 파울루스 장군이 스탈린그라드 전투 후 포로로 잡힌걸 까대니까 이렇게 말했을까, "오스트리아 상사놈 말 들을 바엔 포로가 되고만다".
학교에서 아예 전쟁사를 따로 가르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치열함이 있었다는 걸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같아요 ㅠㅠ
맞아요 학교에서 2차대전을 배울때 거의 대부분 노르망디나 서부전선만 있고 독소전쟁은 거의 안나옵니다 나오더라해도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다 아니면 스탈린그라드 전투밖에 안나와요 2차대전 배울때는 독소전쟁을 몰라서는 안되는데 말이죠....
교과서 역사도 제대로 안 가르치고 배우려고도 안 하는데 전쟁사라...
친미주의자들이 가르치는데 뭘 제대로 하겠어요 다 알고서 그러는거지
@@표현의자유-f1p느그어미 빨치산
@@표현의자유-f1p혹시 친증 친북하는 2찍 윤항문 지지자세요?
이전에 냉전으로 묻힌 사실이있죠. 만약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지 않았다면 영국과미국이 어떤작적을 펼쳤고 그작전이 성공했을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독소전쟁에서 승패가낫다했죠
I.F. Hahn 이건 또 뭔 개소리인지;; 독일은 소련침공 초기부터 거의 대다수의 사단들을 동부전선에 투입시켰고 서부전선에는 2차대전이 시작할때부터 끝날때까지 소규모 사단밖에 없었는데 미,영이 영리한거라니;; 또한 당시 미국은 소련을 지원해줄수 밖에 없었습니다;; 소련이 초기에 무너졌으면 독일과 일본은 자원을 얻게되고 서로의 활발한 교류로 미국은 태평양에서 티거를 만났을것이고 대서양에선 영국이 일찍 무너졌겠죠. 그리고 미국의 물자지원은 이미 독일의 바르바로사 공세가 실패한 1942년 이후에 들어옵니다. 소련이 모스크바를 방어할때 미국의 지원없이 지켰단 소리죠.
어느 븅딱 팩폭당하고, 댓삭하고 튀엇네.
제 피셜입니다만 영상에도 나왔듯 독일이 침공을 안했어도 소련이 나중에 쳐버렸을 것이고 아마 연합국측에서도 소련을 어떻게든 참전시켰겠죠. 어떻든 간에 결국 2차대전의 향방은 소련의 참전여부가 결정적이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s.w.p4431 이건 뭔개소리노 독일이 소련 침공 하기전에는 둘이 든든한 동맹국이었는데 ㅋㅋ석유 지원 해준것도 소련이고
@@숙삼-f1s 이건 뭔 개소리노? 동부전선 240만 투입 서부전선 360만 투입인데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바그라티온 작전은 규모에 있어서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차이가 많이 난다. 미-영-불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교두보를 형성한 시점에서 나치 독일이 서부전선에 전개한 사단 수는 약 20개 남짓, 반면 동부전선에는 300개가 넘는 독일군 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소련군이 이들을 말 그대로 다 갈아버리면서 들이닥친 게 바그라티온 작전이다. 이런 규모의 전투에서 승리하다 보니 결국 이 작전은 서부전선, 동부전선을 넘어 2차 대전의 전세 자체를 연합국 위주로 만들어버렸다. - 나무위키
왜 원인을 인문학적으로 풀어주는게 너무 좋네요.
4분의 케미가 환상 입니다~^^
특히 허준 MC 님 너무 잘 하시네요.
더 많은 활약 기대합니다~^^
제 인생 처음으로 국방티비에서 재미를 느끼네요 ㅋㅋ
독소전 당시 모스크바 15마일 앞까지 다다른 독일군을 격퇴하기 위해 스탈린은 극동군 사령관 이었던 주코프 장군(당시 45세)을 불러 들이고 주코프는 시베리아에서 잘 단련된 12개 사단을 투입해 독일군을 타작하기 시작했죠.
도대체 이거는 어떻게 멈추질 못하겠네..아파치 보다 여기 까지 왔네.
샤를세환 5년전에도 똑똑했었네요.
허준도 ..대머리 박사도
이때가 최강의 조합.
5년. 지나서야 후속작 역전다방. 좋습니다
전쟁사 중에서도 제일 재밌는게 2차 대전이고 2차 대전에서도 제일인게 독소 대전이고 독소 대전안에 갑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인데 그냥 패스하듯 넘어가 아쉽네요.독소전 다시 최소 3부작으로 다시 해줬으면 원이 없겠네요ㅜㅜ
독소전쟁 넘나 재밌음.. 추후 한 3편정도로 특징으로 다뤄주세요
토전사 15부 기이한 전쟁에서 겨울전쟁을 잘 들었습니다. 기회가 되시면 토전사에서 겨울전쟁을 다시한번 제대로 훌터주실수 있으신지요?
그런데 1.임교수께서 소련의 핀랜드 침공이유를 막대한 지하자원을 노렸기 때문이라고 하셨는데 소련의 핀랜드 침공이유는 언젠가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리라고 예상했기에 소련땅밖에 방어선을 만들려고 발트3국과 핀랜드를 침공 한것 아닌가요?
2.핀랜드가 만든 수오미기관단총과 소련의 따발총과의 관계를 자세히 밝혀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재미있게 보고있어요 감사합니다
후르시쵸프 왈
'우리는 스탈린 때문에 독일에 이긴 것이 아니라, 스탈린이 있었음에도 독일 나치를 이겼다!"
세계가 놀란 대 연설이라고 불리우는 명연설중에 하나였죠.
근데 솔찍히 스탈린이 초반전 망하긴 했는데 후반전때 진짜 잘함, 후르시쵸프가 정권 틀어쥘려고 스탈린 까기 한거임. 또 스탈린이 공업화의 주역이라... 소련은 스탈린 전에는 큰 베트남이였어요.
흐루쇼프는 그 집권의 정당성, 정통성 확보 차원에서 필요한 것 이상으로 스탈린 격하운동을 주도한거고(정치적인 목적)
실제 스탈린의 무자비한 공업화 정책 추진으로 전쟁에 도움이 되었다고 그 주코프가 회고록에서 인정하기도 했음
00:40 윤지연 졸귀다
역사를 공부할 때 '난 나폴레옹처럼 저런 실수는 안 할거야'라며 과거 사람들이 실수한 이유를 생각하지 않고 실패한 결과만 암기하려는 자세를 가장 경계해야 한다.
잘보고 갑니다..굿
스탈린그라드 전투이후 남부집단군 사령관에 폰 만슈타인 원수가 임명되며 주코프와 심리 두뇌전을 치르며 주코프 마저 만슈타인의 두뇌전에 속아 패퇴했던 전투가 1943년3월 제3차 하르코프 전차였죠.
15:14 넘 귀엽 ㅠㅠ
독소전이 이렇게 분량이 적나
40:23 자막 지적드립니다. 히틀러의 소방수는 주코프가 아니라 발터 모델이라는 독일군 지휘관입니다.
아마 스딸린의소방수같에여
스탈린그라드 전투나 바그라티온 작전, 베를린 공방전에서 활약한 추이코프도 언급해주시길 했는데 아쉽네요..
한회로 다루기엔 너무 무리죠ㅎ 아마 나중에 세분화해서 방송해주시길ㅠ
1942년 10월과 11월 스탈린그라드 전투당시 주코프 원수가 임무를 맡긴 장군은 바실리 추이코프 장군이죠 시가전에 탁월한 명장이었죠
참 예쁘네요. 얼굴도 작고 피부도 하얗고 다리도 예쁘고 ~ 의상도 깔끔하게!!
풀메이크업 빤스반바지에 속고있내 ..
Yu Mu 너무흥분됩니다
그런거 속는지 안속는지 따질때가 아니야 있내랑 있네 받아쓰기 공부부터 다시 하고 오렴.
끔찍하니까 그런 농담은 자제를
얼굴은 넙데대해보이는데ㅋㅋ
병자호란에 대해서 찍는 것도 좋다고 생각됩니당
김승현. 병자호란말고 명나라청나라전쟁
@@im1JC8AP 읭? 프랑스는 병인양요 아닌감?
@@im1JC8AP 프랑스의 조선침공전은 병인양요 입니다:D
병자호란편 있어요
분위기와 자기 감정에 쉽게 휘둘리는 사람은 일단 걸러야 득이온다..
8:54 “왜 저 똑똑한 사람이 그런 실수를 하지?”
또 하나의 장군 바실리 추이코프 장군도 스탈린 그라드 시가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죠 훗날 천수를 누리다 세상을 떠났죠 이분도 대단한 지휘관 중 한명이죠^^
이것보다가 테크트리로 소피아로렌의 해바라기 보는데 재미있네요
발터모델이 등장하는 전쟁도 보고 싶어요 ㅠㅠ
휘르트겐 숲 전투
이때당시 임용한 교수님 정말 마르셨구나..........
소련군 초기전략: 먹어서 응원하자
독일군 대응전략: 먹이기 싫으니 죽인다
이탈리아가 그리스 먹는다고 시간 보내는 바람에 소련 침공이 늦어졌다는 얘기가 있어요
성채작전 또는 요새작전 독일어로 치타델레 작전(1943년7월5일~7월12일)이었죠 독일은 전략적으로 실패한 셈임데 히틀러의 오판이 결국 전쟁의 승패를 갈라놓았죠
2차세계대전에서 독소전쟁이 70%이상인데 너무 짧게 다뤘내..
무려 구소련 지역에서만 3천만이 죽어나간 어마어마한 전쟁이였는데
전후 서방과의 냉전 때문에 2차대전의 일부분으로만 세계에 알려짐
독소전이 없었으면 독일은 전쟁에서 이겼겠지만 서부전선이 없었어도 어쨌든 독일는 전쟁에서 졌겠죠
@@Αρκαδία-ρ8μ 서부전선 없었으면 소련이 독일 다먹고 프랑스까지 내려갔을듯 ㅋㅋㅋㅋㅋ
국방티비는 이런 거는 가끔보면 재미지더라구요 ㅋㅋ
40:21 이게 아마 천왕성 작전인데 이거 당시 소련군 총참모장인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작품 아니었나요??
2020년 지금 봐도 재미있는 토크멘터리 전쟁사!!
그런데 스탈린그라드는 지금은 현재 볼고그라드로 개명된 상태입니다.
윤지연 아나운서 팬될듯..
독일은 1차2차 세계대전 저지르고도 지금까지 안망하고 잘사는거 보연 참 대단하다
독소전과 몽골제국을 비교하면서 느꼈던 건 기병, 기갑으로 전격전을 할 때 상대가 땅이 넓어서 빠른 시일 내에 점령못하면 보급이 못따라가서 개털린다는 것이다.
모스크바 공방전에 투입된 소련의 시베리아 군단은 그야말로 최정예 부대중 하나였다죠 거기에 카튜샤 로켓과 대전차 포를 발사하며 독일 중부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죠
독소전쟁 2부 부탁드립니다ㆍ구데리안ㆍ만슈타인ㆍ주코프 다른장군들의 활약상 자세히좀 부탁드립니다ㆍ존경하는 임용한박사님
롬멜
중일전쟁편은 없나요?
유익하고 재밌고 넘나 꿀잼
토크멘터리 전쟁사를 보다가 갑자기 궁금해서 질문을 드림니다.
2차대전 당시 일본과 러시아는 적대국 이였는데 일본은 왜 러시아는 공격을 안했나요? 둘사이 뭔가 우리가 모르는 조약이 체결 된 건가요?
몽골 거쳐 러시아 진격하려고 했다가 주코프 장군한테 개박살나죠. 몽골 국경에서 벌어진 할힌골 전투입니다
일본은 당시 미국하고 뜰라고 준비하고 있어서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둘이 말로만 동맹국이지 지리적 한계도 있어서 그리 많은 군사,전략 정보 교류가 없었다고 해요.
우리나라 독립운동한것도 다뤄주세요
요새작전(성채작전) 이것이야 말로 2차대전의 승패가 갈리죠
보로쉴로프는 스탈린과도 사적으로는 뺨을 서로 후려갈길정도로 친했습니다.
그는 유태인이었는데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독일의 침략행위를 상당히 규탄했습니다.
게오르기주코프의 경우에는 바실리 블류헤르가 해임되고나서 극동사령관에 임명되어서 싸웠습니다.
블류헤르는 정말 고통스럽게 죽었습니다. 그는 장고봉(하산호)에서 처음에 일본에 밀렸다는 이유로 해임되고 1938년에 고문을 당하는데 고문은 라브렌티베리야가 맡았습니다.
정말 고문을 억울하게 당하면서 외치기를
"스탈린 각하! 저 자가 잔혹하게 휘두르는것을 보고 계십니까?"
이렇게 울부짖다가 눈 한쪽이 빠져버립니다. 그는 죽고 그의 아내도 끌려와서 베리야에게 고문당합니다. 죽진 않았고, 후에 나와서 회고하기를 베리야는 잔혹하고 감정이 없었으며, 뭔가를 괴롭히고 그걸즐기는 새디즘적 취미를 지니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베리야는 스탈린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습니다.
스탈린이 조르게의 말은 모두무시하고, 그의 말만듣다가 낭패를 보기도 했는데 그 때 그가 한 말이:
"영광스러우시고, 충성할 스탈린 각하께 바칩니다: 히틀러는 절대 1941년에 침략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숙청 때 부하린이 말한 스탈린은 이렇습니다:
"그는 칭기즈칸이다. 우릴 모두 죽이려들 것이다."
그리고 그가 쓴 유언이자 미망인이 1988년에 공개한 글에 따르면:
"나는 죽음과 맞설 것이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도 프롤레타리아들의 숭고한 심판이나 핍박도 아니다. 다만 시간에 맞게 틀림없이 탁 멈추는 폭탄앞에서, 중세의 잔혹한 압제를 불러오는 앞에서 나는 무력함을 느낀다...."
스탈린이 냉정해지고 잔혹해지게 된 것은 1903년에 자신의 아내가 죽고난 이후부터 입니다. 그와 타플리스 신학교시절 동창이자 후에 정적이되는 이레마쉬빌리가 묘사하기를
스탈린을 찾아갔을 때, 그는 자신을 예전에 정적이 되기이전의 진구를 대하듯 슬프게 대해줬다고 해요. 그러면서 말하길 좋은 사람이 떠나갔다고, 그리고 황량하다고, 자기의 마음이 떠나가고 모든게 황폐화된만큼 황량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스탈린) 냉정하고 잔인해져갔다고 쓰고 있습니다.
이레마쉬빌리는 스탈린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묘사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어머니에게는 헌신적이었다는 이야기도, 그가 얼굴에 마마자국으로 흉이나있고, 한쪽 팔은 만성적으로 굽히기를 어려워했다고 말한 것도 다 그가 회고를 한 것입니다. 그의 팔이 그렇게 된 이유는 성가대원으로써 어릴 때 행진하다가 마차에 치여서 쓰러진채로 왔다고 합니다. 그 때 어머니가 하나뿐인 독자를 보며 통곡을 하셨는데 스탈린이 그 소리를 듣고 의식을 차리면서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가 신학교에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머니가 원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후에 스탈린 자신이 통치자로 있을 때 1937년경에 고향인 조지아의 고리로 돌아갑니다. 거기서 어머니는 소소(스탈린의 애칭)를 보고 "소소야. 너가 내 말대로 신학교에서 잘해서 신부가 되었다면 좋았을텐데 그러지 못해서 안타깝구나."
라고 말하니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항시 냉혹했던 그도 그날은 처음으로 어머니 앞에서 웃음을 터뜨리고 맙니다. 1년후 어머니가 세상을 뜹니다. 그가 신학교에 있던 시절을 후에 시몬 루드비히 라는 작가앞에서 말하게 됩니다.
루드비히가 어째서 현재처럼 됐느냐 그리고 가족들이 심하게 굴지 않더냐 하고 말하니
스탈린이 말하길 아무리 가난했어도 부모님에게는 원망도 구는것도 없다고 하고, 특히 어머니가 헌신적이라고 말하며, 자신은 현 상황에 대해서 언제든지 투사가 될 준비가 되어있었다고 말합니다.
신학교의 당시 세태를 물으니
그가 말하길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식사와 차를 마시기 위해 내려가는데 올라와보면 사물함이 뒤져진 흔적이있다면서 그런 곳에서 무엇을 배우겠냐며 언짢아합니다.
더군다나 타플리스 신학교는 스탈린이 입학하기 1년전인 1885년에는 교장이 조지아의 문화와 민족을 비하하는 연설을 하자 한 청년이 튀어나와 교장을 때려눕히고 팼는데 그것을 보고 신학생들은 환호했다고 합니다. 그 교장은 얼마안가 1년후에 라기예프 라는 조지아 출신 청년에게 조지아식으로 칼을 맞고 죽습니다.
스탈린은 당시 여러 금서들을 읽었는데
어느날은 방에서 그런 책들을 읽다가 디미트리 라는 이름의 신부가 들어오더니
"너는 내 모습이 보이지도, 내말이 들리지도 않는것이냐?"
나무라니 그에 말하기를
"저는 제 눈앞의 점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니 그날 이후로 제적되어서 살았습니다.
이레마쉬빌리는 스탈린이 항시 혼자 있었고, 높은 산이나 폭포, 자연 등을 바라보며 그런 곳을 개척하고 올라가는 듯한 생각을 많이했다고 묘사합니다.
그리고 그가 조지아출신이고 이는 즉, 아시아인 이기도 했다는 것이었는데, 일본의 외상 마쓰오카 가 방소해서 중립조약을 맺을 때 말하기를
"스탈린 각하는 아시아와 유럽을 비롯한 넓은 땅의 아시아인 지도자이시고, 우리 대일본제국은 아시아의 최강국이니 서로 공존하여 큰 사회를 유지하도록 노력합시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만 그 이후에 스탈린이 의미심장하게 말하기를
"지난 세월 일본에게 당한 것은 우리 역대의 역사이래로 희대의 치욕이자 지워지지 않는 상처였다. 이제 그 원한을 갚고, 그것을 치유할 때가 온 것이다."
그러면서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1945.8.8에 했지요.
주코프 원수는 스탈린에게 할말을 하는 최고의 리더쉽을 가진 소련의 영웅이라 생각합니다.
32:52 크램린궁이 라고 말씀하시는데 성바실리성당을 보여주네요
독소전 초기 브레스트 리토포스크 요새 전투가 가장 치열했다죠
소련 명장하면 주코프 라고 생각할수도 있지만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라는 사람이 소련 명장입니다.
동부전선부터 만주작전도 지휘한 사람이기도 하고여
맞습니다. 저도 주코프, 바실렙스키, 추이코프를 소련의 3대 명장이라고 뽑습니다.
독일이 레닌그라드를 공격한 결정적 이유중 하나는 핀란드를 끌어들이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소련에게 영토를 빼앗긴 핀란드를 설득해서 협공하기로 했었는데 문제는 핀란드가 자신들의 영토만 수복하고 스톱했죠. 그래서 레린그라드 인근에 도착했던 독일은 단독공격으로는 부담감을 느끼고 게다가 장애물까지 있어 결국 포위하게 된겁니다~
흥남철수는 상트 페테르부르그(=레닌그라드)이며, 천안독립기념관에 있는 조선총독부건물은 여기에서 가져와 건축한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의 백미는 동부전선입니다.
히틀러의 전기톱과 스탈린의 오르간
피의전쟁 스탈린그라드 전투 책에서 본 내용들 잘 다루시네
주코프 원수가 최고의 전략 전술을 발휘한건 1939년 여름 할힌골 전투(노몬한 전투)였죠.
존나 재밌네 이거진짜 국방부 채널이란말인가;;
그리워요 토전사
카튜샤 로켓포에 T-34/76과 KV-1 위력은 실로 엄청났죠
기다렸습니다!
한국의 육사 출신 엘리트들은 전략이 있을까?
또보러왔어요 언젠가는 10회로 늘려서 해주실거죠?
저 토크멘터리 전쟁사 핀란드 이야기는 어디서 나오나요????
기전사 편에나옴
치타델레 작전 1943년7월5일~7월12일
체제가 건전하지 않은 국가는 전쟁에서 전략보다 정치가 앞서게 된다....임용한
현재 우리도 힘들어진다 나라는 ㅜㅜ 서로를 불신하므로
역시 우리 소련에 위대한 스탈린형아❤
스탈린의 순수군사전략은 무능했으나 스탈린만의 가능했던 공업화는 소련의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죠
모가지 댕겅을 너무심각하게한게
공업화한게 가려지는듯
그거 때문에 러시아,우크라이나 곡창지대농민들이 많이 죽음
5년만에 다시보는데 독소전이
우크라이나 침공이랑 딱이네요 딱
미친 푸틴
독일이 보급을 제대로 못한 큰 이유는 기차길 때문이였다. 소련군들이 도망가면서 기차길을 폭파를 했었고, 또 결정적인 이유는 유럽과 소련의 기차길 폭리 달랐다,, 소련이 유럽보다 폭이 좀 넒었다.. 그레서 기차길이 있지만 독일 기차는 달릴수가 없었던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