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이거 보고 김고은씨 살벌한 연기에 소름 돋았고 엉엉 울었어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다 제치고... 눈앞에서 뫼시던 주군이.. 그것도 한 나라의 황후가 폭도들의 손에 그렇게 욕스럽게 마지막을 마무리되어야 했던 것을 지켜보던.. 그렇게 나라의 마지막을 가슴으로 느껴야 했던 설희가 너무 아파서 엉엉 울면서 봄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진짜 김고은씨 연기 너무 잘 해요 진짜 꼭 보시길...ㅠㅠ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은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은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은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은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은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wjdtlsckfifk 동의. 이러면 또 명성황후는 민비라고 격하해서 들을 만 했다 어쩐다 일뽕들 부들거리는데 남의 나라 왕비를 너네가 왜 격하시키냐고. 그 저의가 뭐라 생각함? 단순히 명성황후 한 사람만 격하시킨 의도일까? 조선, 조선인 전체를 격하 시키고 싶었던 일제의 저의가 호칭에서 나타나는 거임. 그래서 잘잘못을 떠나 후손인 우리들은 일제가 의도적으로 낮춘 민비라는 호칭은 써선 안됨
@@여행자꾸뻬 민비는 조선시대 민씨 왕비들을 부르는 말입니다...대표적인 명성황후 말고도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나 세종대왕의 모후인 원경왕후도 해당이 됩니다. 당신이 알고있는건 낭설이에요. 실제로 일본인들이 당시 얕잡아 민비라고 부른 기록은 없습니다. 언제적 낭설을 아직도 잡고 울고짖고 계시나요?
전 오늘 두번째 봤습니다. 무대 인사에서 정성화 배우님이 노래가 끝나면 영화관에서는 어색하시겠지만 박수를 부탁하시더군요. 다시 보며 화면 전환띠 검게 바뀌는게 남들은 촌시러운 연출이라고 하던데 그부분에서 박수치게 만든 장치라는걸 깨달았네요. 두번째 보지만 지금도 먹먹하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김고은 배우 대부분이 원래 많이 알려진 지금 이 노래 아니면 두번쨰 넘버 연출과 연기가 너무 좋았던 그대를 향한 나의 꿈을 많이 좋다고들 하는데 진가는 세번쨰 넘버 내마음이 왜이럴까라고 생각함 ㅠㅠ 씨지가 아쉬웠지만 연기와 노래가 합쳐져 심금을 울렸어요 진짜 자결하기전에 두려움이 너무 느껴져서 진짜로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이였음.. 꼭 보세요 김고은 노래 연기 듣는것만으로도 표걊했다고 생각합니다
윤제균 감독님 인터뷰중에 첫촬영을 고은 배우님이 먼저하고 현장 동시녹음도 하면서 윤감독님은 cg가 없어도되는 초소형 이어폰을 줬음 작아서 좋지만 반주가 안들리니까 볼륨을 최대한 높이고 혼자 고군분투 했는데 뮤지컬 10년 넘게했던 정성화 배우님도 그걸 끼고는 이렇게하면 안들려서 음정 박자 제대로 못맞춘다고 했을정도.. 그래서 다시 큰 이어폰으로 교체 고은배우님은 회식때 그 이야기 듣고 ㅜㅜ .. 그렇게 탄생한 장면임
영웅을 보고온후로 운전할떄 마다 영웅 ost 노래를 들으면서 다닙니다. 다 아는 내용이긴 하지만, 배우들의 열연과 노래, 뮤지컬영화가주는 힘이 확실히 있더라구요, 극장 다녀와서 다시 독립투사들의 뒷이야기 다큐를 많이 찾아보게되었는데, 근래에 일본 정부 문서가 공개되었을때, 안중근 의사와 같이 거사했던 우덕순은 3년 옥고를 치르고나서 철저하게 변절했더군요, 하얼빈에서 이한제한,(한인으로 한인을 통제한다), 독립군을 탄압하고 일제에 넘기는 조선인민회장을 맡아서 부를 쌓았네요, 김좌진 장군의 비서 이정 이란인물도, 모든 독립군의 생김새와 독립군 자금에대해서 매일같이 일제에 넘긴 보고서가 발견되었구요, 지금은 우덕순, 이정 둘다 건국훈장을 수여받고 현충원에 안장되어있습니다. 당시의 시대상황이 어떻건, 보훈처는 다시한번 검토하고 조사하고, 바로잡을건 잡아야될거같습니다. 친일파 이정의 위패옆에는 이정이 밀고하여 운명을달리하신 이홍래 독립투사가있습니다. 지하에서 얼마나 씁슬할까요? 역사를 잊지맙시다.
원래도 영화 보면서 잘 우는 편이지만, 이렇게 많이 울어본 건 처음이에요.. 김고은 배우님 이 장면과 나문희 선생님 장면에서 정말 버거울 정도로 속이 부글부글 하며 울었어요. 뮤지컬 영화를 아마 처음 본 것 같은데, 무대 인사까지 잘 보고 왔습니다ㅜㅜ 한 번 더 보러 가고싶어요..!
제 바람은 해외에서도 영화가 대박나서 안중근의사의 유해를 찾는 일에 도움이 되면 좋겠어요.
그러니까요...ㅜㅜ아직도 못찾았다는데..😢😢
그런일은 일어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저도 같은 바람입니다
@@utnt4498아가리 닥치시오.
@@utnt4498친일파 세요?
김고은 때문에 영화 한 번 더 봄,,,,,, 진짜 미침 다들 마지막에 울었는데 나는 솔직히 김고은 노래부터,,,,, 힘들었음
나는 시작부터 울었음ㅋㅋ
저도 김고은님 저 황후마마 한 장면 한번 더 보려고 영화 한번 더 봤어요..ㅡ진짜...너무 ...뭐라고 말을 못하겠더군요 ..연기..노래...
@@Suehehew 나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도 시작부터 단지동맹 나올때 울었음..흑
나도...ㅜㅜ애절 진짜ㅠ
진짜 김고은 진짜... 이건 초반부고 영화후반부 노래진짜.... 개 대박이니까 영화 꼭보세요....
님 댓글보고 제가 내일 보러갑니다
@@서해인-d5p ㅣㅣㅣㅣ
@@서해인-d5p 오늘 보고 왔습니다. 너무나도 슬프고 아직도 친일세력 정진석 같은 쓰레기가 우리나라 여당대표라니...눈물이 났습니다.
@@sangbumsuh 아직도 친일타령하노 ㅋㅋ
김고은만 대박임
1:53 이거 보고 김고은씨 살벌한 연기에 소름 돋았고 엉엉 울었어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다 제치고... 눈앞에서 뫼시던 주군이.. 그것도 한 나라의 황후가 폭도들의 손에 그렇게 욕스럽게 마지막을 마무리되어야 했던 것을 지켜보던.. 그렇게 나라의 마지막을 가슴으로 느껴야 했던 설희가 너무 아파서 엉엉 울면서 봄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진짜 김고은씨 연기 너무 잘 해요 진짜 꼭 보시길...ㅠㅠ
진짜 나라의 마지막은 경술국치이고... 명성황후와 설희간에 그정도로 돈독함이 있었나 싶어서 어색했는데...
@@bradleysbullm1673 없지만 영화이기때문에 만들어낸거겠져
@@가수는노래를잘해야한 영화라 해도 좀 묘사가 맘에 안드는게... 애당초 명성황후는 내가 나라의 왕비다 이런 소리 하면서 죽지도 않았어요.
@@bradleysbullm1673누가 그랬는데요?
@@bradleysbullm1673그냥 좀 봐라. 역사학자냐?
빨간드레스 입고 부르는노래 제발 영화관에서 봐주시길ㅠㅠ 그장면과 노래가 잊혀지지않음..
마자요…
그대향한 나의 꿈 말하시는 건가요?
알라딘 표절한 그부분? ㅋㅋ
@@Choiarin8229 그건모르겠네용ㅋㅋ 표절인건지 인상깊었을뿐ㅋㅋㅋㅋ
정말 김고은의 재발견임.
재발견이 아니고 김고은 보컬은 충무로에서 이미 알려진 사실임 ㅋㅋㄲㅋㅋㄱ
@@알렉스퍼거슨-m1h 재재발견
보컬이 문제가 아니라 진짜 표현력이 장난아닌듯
노래 잘부르는 배우라 그런지 감정전달 개지림ㅋㅋ
노래 잘하는줄은 알았지만 영웅 보고 정말 많이 놀랐어요 울어서 목이 다 쉰 상태로 노래하는게 마치 한서린 울부짖음 같았음.. 영화관에서 총 3번 봤는데 볼때마다 제일 인상깊었던 건 김고은이 노래하는 장면들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은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seromekim7798 멍소리도 길게도 써놓으셨네요;;
진심임 ??
@@seromekim7798 친일파는 일본으로 쳐 가라 제발. 위안부가 합법이였다는 개소리를 하고있넼ㅋㅋㅋㅋㅋㅋ 거기 강제로 끌려갔다고 말하는 피해자분들 증언이 있다 ㅉ
김고은 울부짖으면서 노래하는 씬 나올때 나도 울부짖음.... 하..이 전율 절대 못잊을거같네요
모든 노래들이 현장에서 라이브로 동시 녹음했다는데.. 대단해요.
아 진짜요? 몰랐어요 ㅠㅠ 진짜 짱이네요...👍❤️
헉 라이브인가요!?대박.. 금방 어떤 영상에서는 김고은배우가 현장에서 라이브할려다가 노래는 안되겠어서 연기만 했다고 말한 인터뷰 봤는데..!
일부 씬 후시일수도 있긴 하지만 노래따로 연기따로 한게 아니라는 인터뷰 내용 있습니다
맞습니다. 현장에서 80%이상 녹음 했다고 해요👍
김고은배우는 현장녹음 맞다고 합니다.
저도 개봉 다음날 봤다가 김고은배우가 너무 절절하게 잘 불러서 깜놀했네요^^
와..어쩐지 연기랑 노래에 이질감이 없고 호흡이나 대사나 말하듯 부르는거가 찰떡이더라니...너무 잘한다..
죽이든 폐위를 시키든 대한제국이 스스로 해결해야할일이었다. 이것 하나만은 확실한 것이다. 옆집 마누라가 바람이 났다고 해도 옆집에 사는 내가 그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른것과 그것은 엄연히 다른선상의 이야기다.
맞음 혹시나 영화에서 미화했으면 어쩌나했는데 다행히 팩트만 실었음. 가령 황후로써 아무리 최악인 사람이었다고하더라도 한나라의 황후를 그것도 아무절차도없이 찾아와 저렇게 죽이는건 전세계적으로 찾아봐도 유래없는 개싸이코
인정합니다. 아무리 명성황후가 조선을 망쳤다 해도 폐위시키는건 조선이 스스로 했어야 했어요.
해결할 능력도 의지도 없으니까 해결해준 거잖아요
@@노시드 이완용 어서오고
@@건-o2z 학살자 민자영 후2장빨이 어서오고
"잠들래야 잠들 수 없는" 이 부분에서 긁히는 목소리와 애절하다 못해 절규하는 표정이 너무 생생하여 영화관에서 눈물이 주륵 나더라구요,,.
황후마마의 시체까지 난도질을하고 움직이는 심장을 꺼내고 불태우는 저 장면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옛 조선의 아픔을 기억하겠습니다.
어제봤는데
조금슬펐어요@!
영화보다 수천 배 더 잔인했을 것 생각하니 더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어요
업보죠 뭐..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은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김고은 배우가 비긴어게인이나 다른 프로에서 부른 노래들은 다 잔잔한 음악들이어서 이렇게 호소력 짙은 노래도 잘하시는줄 몰랐습니다.. 영화관에서 보다가 소름이 여러번 돋을 정도로 좋았어요ㅜㅜ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은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seromekim7798 이 글의 출처가 어떻게 되나요? 더 읽어보고 싶어요
@@seromekim7798 일제강점기 관련 영상마다 달리는 복붙 내용 진짜 ㅋㅋㅋㅋ
쒸익쒸익 니네 다 틀려써! 내가 마자!
언제까지 정신승리 할래 ㅋㅋㅋㅋ
@@시고르자브송 근데 저양반 되게 부지런하신거같아요 ㅎ
@@시고르자브송 ㅎㅎㅎㅎㅎㅎㅎ
정말 김고은 대박. 영화관에서 배우들 노래가 울려퍼질 때 더 감동. 꼭 극장에서 보셨으면...
진짜 영화보는동안 계속 와…진짜 와…이러면서 보다 감정몰입 제대로 되서 울고ㅠㅠㅠ 다들 꼭보세요
엄청 울었어유..ㅠㅠ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은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Serome kim 은 일본 우익의 후원받고 개소리 이론 만들어낸 뉴라이트 학자이신가. 애쓴다~
ㅇㅈ 계속 울었음
김고은이 노래부를때만 너무나도 소름이 돋고 눈물이 났음 ㅠㅠ
저는 김고은님도 대박이지만 나문희님 진짜 그거보고 울었어요ㅠㅠ
ㅇㅈ
@@3214dd ㅣㅣㅣ
@@50살차은우
저도 그 앞 장면에 가슴이 꽉 막혀 있다가 김고은 노래에 눈물이 터져 버렸습니다.
그때부터 계속... 멈추지를 않더군요.
진짜… 영화 보고왔는데…김고은 노래도 너무 잘하고… 연기도 잘한다는건 이미 알고 있었는데… 내가 생각한것 보다 더 너무 잘해서 진짜 놀람… 그 표정 감정이 너무 이입돼서 김고은만 나오면 울었던것 같음 ㅠㅠ
ㅇㅈ요ㅠㅠ
영화관에서 봤을 때 슬픈 감정에 압도되는 느낌이었습니다. 김고은의 설희 연기와 노래는 정말 훌륭하더라고요. 또 보러 갈 예정입니다.
👍
공감이에요 저도 영화 또보러가려구요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은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혜빈COME MY 𝑷𝑳𝑨𝒀𝑳𝑰𝑺𝑻🅥 너는 이 영상에서까지 그러고 싶냐;;
진짜 압도되는 느낌이였어요..대단한 배우
이 영상에 나온 부분이 영화에서 진짜 가장 인상깊었음.
1. 김고은 가창력
2. 일제의 만행(어떤 버전으로 봐도 욕만 나오고 분노만 차는..)
@@쇼오키-m1v실제로 임오군란때 시도했던 일ㅋㅋ
3. 영화에선 미화와 역사왜곡목적으로 철저하게 은폐된 황후마마의 진짜모습
김고은 노래 진짜 대박….영화관 가서 봤는데 이 노래 말고 다른 노래도 진짜 짱이었어요…ㅠㅠ!!
누가 죄인인가
그..만찬하는 곳에서 욱일기불타는장면과 노래는 잊혀지지가않는다
@@이노닉스-p9q 그 노래도 대박이죠ㅠㅠ
@@베리라즈-q3w 제가 노래를들으면서 눈물을흘릴줄은 몰랐음..오늘또그감동을느끼러 또보러갑니다
@@이노닉스-p9q 그대 향한 나의꿈
김고은씬들이 진짜 인상깊었듬... 김고은을 좀 더 잘 활용했으면 더 재밌었을텐데
노래 풀독창 3개 + 설희가 영화에서 안중근급으로 중요한 역할이라 보는데 충분히 잘 활용하지 않았나 싶어용
출연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은 편인데 이렇게 임팩트가 큰 거면 극본에서 설희역을 잘 활용한거고 그만큼 김고은이 잘 소화해낸 것도 있지
허구의 인물이라서 너무 많이 활용하면, 극중 사실전달에 오류가 있으니까 이정도면 충분한듯
활용?
원래 영웅 뮤지컬에서도 쫌 걷도는 케릭터임 설희 ㅋㅋ
아니 김고은은 매 작품을 찍을 때마다 재발견임 진짜 뭐야 김고은...
파묘도 너무 기대됩니다~~ ^__^
정말 영화보며 너무나도 몸에 전율이 돋고 명성황후 시해순간 애국심발로로 분노가 솟구쳐 가슴에서 뜨거운 피눈물이 터지더라구요 김고은 배우의 명연기와 정말 가슴절절 한 노랫소리와 표정에 압도당했네요
@@wjdtlsckfifk 동의. 이러면 또 명성황후는 민비라고 격하해서 들을 만 했다 어쩐다 일뽕들 부들거리는데
남의 나라 왕비를 너네가 왜 격하시키냐고. 그 저의가 뭐라 생각함? 단순히 명성황후 한 사람만 격하시킨 의도일까?
조선, 조선인 전체를 격하 시키고 싶었던 일제의 저의가 호칭에서 나타나는 거임. 그래서 잘잘못을 떠나 후손인 우리들은 일제가 의도적으로 낮춘 민비라는 호칭은 써선 안됨
의견전달은 다르지않구만요..
님의 의견에 동의 합니다.
다만 대한민국 국민은
일제가 부르던 `민비` 가 아닌 `명성황후` 라 부르죠.^^
@@여행자꾸뻬 민비는 조선시대 민씨 왕비들을 부르는 말입니다...대표적인 명성황후 말고도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나 세종대왕의 모후인 원경왕후도 해당이 됩니다. 당신이 알고있는건 낭설이에요. 실제로 일본인들이 당시 얕잡아 민비라고 부른 기록은 없습니다. 언제적 낭설을 아직도 잡고 울고짖고 계시나요?
임오군란때 병사들한태 잡혔으면 시해도 없었을탠대
작은아씨들에서도 소름 돋는 연기를 펼치더니 요즘 김고은 연기 포텐이 점점 터지는것 같다.
배우가 노래를하니 더 몰입이잘되더라구요… 김고은님 원래 노래 잘하시는건 알았지만 듣자마자 울뻔했습니다..음색이너무예쁘네요
진짜 음색이 너무 좋네요
동감입니다 진짜 연기력에 가창력 까지 좋으니 몰입도가 장난없더라구요ㅜㅜ
김고은 정성화 두분은최고시죠
진짜 김고은 연기스펙트럼은 어디까지일까..... 뮤지컬영화까지 하나도 어색하지않고 호소력이 너무 깊어서 보면서 계속 울었다.......
"저 설희" 하는 순간..가슴을 후려치며 눈물이 주루룩
노래 진짜 좋은데 영화관에서 보면 진짜 소름이 쫙 돋아요 영웅 영화 처음에 너무 충격 먹어서 2회차 했는데 볼 때마다 김고은님 노래에 너무 진짜 압도되는 느낌 최고예요 영화 너무 잘 만들어졌어요
노래잘하는건 알았는데 이정도일줄은 몰랐고 김고은배우가 부르는 장면마다 눈물이 막 흐르더라구요 호소력장난아님..
Miris banget kisah ratu myeongseong 😭😭😭
인천 계양 은혜의집 😊
영화나 드라마보고 잘 안우는편인데 김고은 배우가 우는건 그 감정이 너무도 잘 와닿아서 항상 같이 울었음 여기서도 도깨비에서도
김고은 진짜 또한번 레전드
비명지르듯이 부르는 창법 너무 매력적이에요 이렇게 노래 잘 부르는 배우인 줄 몰랐어요 너무 잘 불러요 ㅜㅜ
오늘보고왔는데 ㅜㅜ 진짜 지금현실같았음 진짜 우리나라 국민들 다봐야함 연기자들은 또 얼마나잘하시는지 난계속울다가나온듯
김고은 캐스팅은 신의 한수였습니다. 오늘 세번째 보고왔습니다. 다음주 무대인사에 예매했는데 또 벅찬 감동의 물결이 벌써 부터 기다려집니다. 영웅 화이팅입니다. 꼬레아 우라!!!
I wish I am in South Korea to watch also.😭
김고은 배우 진짜 명배우
영화관 가서 보고 더 소름돋음... 노래인데 말하는 것 같고
감정을 토해내는 느낌이였음. 억울함 분노 슬픔 너무 잘 느껴졌음
와 김고은 배우님 진짜 노래 잘 부르시네요ㅠㅠ 영화관에서 고음 지르실 때 온 몸에 소름이 돋았어요,, ㄷㄷ
김고은님에 노래도 감동이지만
외국인들에게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에 행한 만행을 더 기억하고 느끼께 되길바래봅니다
그보다 우리가 잊지말고 기억하는게 더욱 더 중요 할듯
근데 우리가 남의 나라 여왕이 살해 당한걸 보면 같이 분노하게 될까요
그냥 정말 약하고 힘없는 나라라고 생각할듯
@@maudlewis7262 공감해요. 하지만 일본이 한 만행도 외국인들이 같이 욕하지 않을까요? 외국인들이 보면 두가지 생각이 다 날거 같아요!!
@@guichiken1105 제국주의 시대에는 그보다 심한 일도 많았고 명성황후는 저거 하나로 이미지 세탁한 걸 알면 되려 명성황후가 한심해 보일걸요?
김고은이 씹어먹음.. 진짜 미쳤어 잘하는거 알고 있었지만 그건 진짜 극히 일부였구나 싶을정도로 잘해서 완전히 압도당함.. 김고은 때문에 한번 더 보고 싶음
극장에서는 정신없이 우느라 제대로 못 들었는데
가사도 그렇고..가슴을 저미는 노래네요
김고은 배우가 이렇게 노래를 잘 하는지 몰랐어요
오늘 영화관에서 보고왔는데 진짜 돈이 안아까운 영화였어요. 특히 김고은님이 이 노래부를때 가슴에서 뭐가 올라오면서 왼쪽 손이 부르르 떨리더라고요.
김고은 배우 연기랑 노래가 미쳤음....
감정 전달이 이렇게 잘될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나와서 울기만 하면 울고있는 나를 발견,,,,,
세곡 다 너무 좋더라구요. 특히 기차씬ㅠㅠ
아ㄹㅇ 그씬이 진짜 ㄹㅈㄷ
맞아요
첫소절부터 눈물 광광ㅠㅠㅠㅠㅠ 😭 😭 😭ㅠㅠㅠㅠ
마지막기차씬은 레전드ㅠㅠㅠㅠㅠㅜ
영웅본이후로 설희가 떠나질 않네요. 오늘 세번째 보러갑니다
전 오늘 두번째 봤습니다.
무대 인사에서 정성화 배우님이 노래가 끝나면 영화관에서는 어색하시겠지만 박수를 부탁하시더군요.
다시 보며 화면 전환띠 검게 바뀌는게 남들은 촌시러운 연출이라고 하던데 그부분에서 박수치게 만든 장치라는걸 깨달았네요.
두번째 보지만 지금도 먹먹하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근데 김고은 원래 노래 진짜 잘함 그 무슨 바닷가 예능 같은데서도 그렇구 유열의 음악앨범 홍보하러 나왔을때도 노래 듣고 깜짝 놀랐음ㅜㅜ근데 여기선 노래로 호소력까지 짙어서 두번반했어… 언니……. 최고야 최고
김고은 배우 대부분이 원래 많이 알려진 지금 이 노래 아니면 두번쨰 넘버 연출과 연기가 너무 좋았던 그대를 향한 나의 꿈을 많이 좋다고들 하는데 진가는 세번쨰 넘버 내마음이 왜이럴까라고 생각함 ㅠㅠ 씨지가 아쉬웠지만 연기와 노래가 합쳐져 심금을 울렸어요 진짜 자결하기전에 두려움이 너무 느껴져서 진짜로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이였음.. 꼭 보세요 김고은 노래 연기 듣는것만으로도 표걊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끝나고 나서도 김고은 배우의 노래가 인상깊었어요 진짜 몰입감있고 완벽했어요 노래 너무 잘 불러서 놀랐어요
김고은 아니면 누가 할 수 있을까요….????? 정말 찬란한 배우가 되었어요. 어쩜 노래도 잘해 ㅜㅜㅜㅜ
잘하는걸 넘어 감정이 실려 넘 애처로워요 ㅠㅠㅠㅠㅠㅠ 하.. 눈물나
유튜브나 컴퓨터 스피커로 듣는 소리와 실제 극장에서 듣는 소리는 차원이 틀리네요..
극장에 두번 가서 봤는데..세번도 가서 보고 싶을 정도로 멋진 영화입니다.
노래 너무잘 했어요 김고은 양최고였어요 화이팅 입니다 ㅎㅎ ~~♡♡♡
아..... 김고은 보석이다...........은은하면서 단단하게 영원히 빛나는....... 대배우가 될것같다.
너무좋아....미쳤나봐.....ㅠㅠㅠ........... 뮤지컬 영웅도 굉장히 사랑하는데... 미쳐따리......김고은님...너무좋아...
꼭 영화관 가서 보세요! 유튜브와는 비교도 안될만큼 감정 전달, 목떨림이 잘 느껴집니다.
그대 향한 나의 꿈도 올려주세요...!!
김고은님 나올 때마다 울었음... 어떻게 노래 끄고 표정만 봐도 이렇게 절절할까요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어도 망국에서 치열하게 투쟁했을 조선의 모든 딸들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나 진짜 처음 시작할때(손가락그부분)부터 울뻔하다가 옆에 친구도 있고 하니까 참고 있었는데 김고은 노래부분부터 눈물샘 터져서 끝날때까지 거의 오열함..
맞음 ㅠㅠ
이거 외에도 김고은의 ‘그대 향한 나의 꿈’도 보고서 진짜 감탄했음
일장기 1초만에 타서 없어지는장면 너무 속 후련했음ㅋㅋㅋ
와... 진짜 김고은이라는 배우 다시보게되네요. 젊은 인재입니다. 항상 밝혀주길...
아픈 슬픈역사를 저리 애달프게 슬프게 표현하는 김고은님 보는내내 한국사람으로 눈물과 가슴 뜨거운 아픔을 느껴요
영화보면서 많이 울었는데 설희 장면마다 울었어요.. ㅜㅜ
영화 찍으며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었네. 김고은 다시 봤다. 기특하다.
이 부분 노래들으면서 눈물 줄줄 흘렸는데,,, 김고은님이 직접 부르신줄 몰랐어요 가창력도 대단하시네요
@@babbim7 머리에 문제 있니? 굳이 시비를 걸고 그래
직접 부르신 거 아닌가요??
@@herbtea8994 직접 부른거 맞아요 현장 라이브입니다
노래 잘하는줄 알았지만 진짜 최고였어요 연기며 노래며 우리나라 탑👍
눈물없이못볼것같은
우리의아프고복받치는
일본의만행을잊어선안될것
호소력이장난없었음...김고은배우 도대체 못하는게있는지
영웅진짜 최곱니다 👍
♥ 김고은은 명품배우였구나.. 영화보고 감동했어요
영상으로 볼때마다 눈물이 나는... 그당시에 그랬을까, 더 슬프고 가슴이 찢기게 서러웠겠지.
실수와 아픔이 반복되지않게 역사는 기억되어야한다.
영웅을 만나게 돼 감사할뿐입니다.
윤제균 감독님 인터뷰중에
첫촬영을 고은 배우님이 먼저하고
현장 동시녹음도 하면서
윤감독님은 cg가 없어도되는
초소형 이어폰을 줬음
작아서 좋지만 반주가 안들리니까
볼륨을 최대한 높이고
혼자 고군분투 했는데
뮤지컬 10년 넘게했던
정성화 배우님도 그걸 끼고는
이렇게하면 안들려서 음정 박자
제대로 못맞춘다고 했을정도..
그래서 다시 큰 이어폰으로 교체
고은배우님은
회식때 그 이야기 듣고 ㅜㅜ ..
그렇게 탄생한 장면임
연기 잘 하시는 줄은 알았는데 노래를 이렇게 잘하는 줄 몰랐어요 ㅠㅠ 영화관에서 김고은님 부분에서 얼마나 울컥했는지..
이 클립보고 극장에서 영화 직접 보고 왔는데 너무 좋았습니다 .....정말 좋은 영화입니다 많은 분들이 보길 바라요
김고은배우님.. 너무멋져요^^.... 실제그때의 설희분이신듯 연기 너무나 잘봤어요 감동크게 받았어요... 고마워요^^♡귀엽기만한줄 알았는데.. 너무나 좋은연기 고마워요~~~ ㅎㅎ
전 김고은 배우님이 이렇게 노래 잘하시는줄 모르고 영화보다가 너무 놀라고 가슴이 먹먹하고 벅차고 그랬어요ㅠㅠㅠ 김고은 배우님이 노래만 하시면 자동눈물버튼..ㅠㅠㅠ
배우님 이렇게 노래 잘하시는지 처음 알았어요 목소리와 연기 모두 너무 좋았고 설희 나오는 장면은 모두 펑펑 울었어요
진짜 김고은 연기 노래 진짜 ... 대박임 후회 없다
초반부터 눈물이였지만
김고은 배우 카부키 하고 눈물 흘리는 씬에서 개 오열했습니다…
그 장면하나로 모든게 다느껴지는 느낌..
후반에 열차 마지막 노래는 진짜
독립의 염원과 간절함,애통함으로 울부짖는 느낌이였어요..정말 최고입니다…
김고은이 자꾸 생각나서 영화 또 보러갔음..
이 장면보고 엄청울었어요.. 김고은배우 노래도연기도훌륭했어요
정말 최고의 넘버였죠
김고은 배우님이 나오는 신 마다 노래를 그냥 잘 부르는 게 아니라 감정선이 그누구보다 더 뚜렷하게 나타나서 내가 설희 본인이 된 것 마냥 이입해서 울게되는 장면들이었어요.. 가히 인생 영화라 할 수 있음😭😭
"아저찌 샤랑해여"이 이미지가 오늘로서 다 사라지고 오늘 부터 김고은씨 팬이 됐습니다.
오 숨은 보석였어!
도깨비 13화에선 진짜 쩔었는데 전 아직도 그장면의 김고은배우의 울음소리를 잊지못합니다
김고은 배우 이역활을 연기해줘서 한국인으로서 감사할 지경이다. 노래까지 완벽한게 비현실적일 정도ㅠㅠ
영화천재 김고은 노래면 노래 연기면 연기 발성 모두 .. 새계 최고 언젠가 아카데미 상 받을 배우라고 생각합니다
영화관에 서 다 봤는데 안 울 수가 없써... 너무 울었씀 이장면들.. 보면서 또 울엇네.. 이런 고은이 너무 노래 연기 다 잘해..
우리 마마 어케 너무 슬퍼 낭인들 죽이고 싶었씀 ㄹㅇㅜㅜㅜㅜㅜㅜㅜ마마ㅏㅏ😭😭😭
연기도 노래도 최고 김고은 최고
영웅을 보고온후로 운전할떄 마다 영웅 ost 노래를 들으면서 다닙니다. 다 아는 내용이긴 하지만, 배우들의 열연과 노래, 뮤지컬영화가주는 힘이 확실히 있더라구요, 극장 다녀와서 다시 독립투사들의 뒷이야기 다큐를 많이 찾아보게되었는데, 근래에 일본 정부 문서가 공개되었을때, 안중근 의사와 같이 거사했던 우덕순은 3년 옥고를 치르고나서 철저하게 변절했더군요, 하얼빈에서 이한제한,(한인으로 한인을 통제한다), 독립군을 탄압하고 일제에 넘기는 조선인민회장을 맡아서 부를 쌓았네요, 김좌진 장군의 비서 이정 이란인물도, 모든 독립군의 생김새와 독립군 자금에대해서 매일같이 일제에 넘긴 보고서가 발견되었구요, 지금은 우덕순, 이정 둘다 건국훈장을 수여받고 현충원에 안장되어있습니다. 당시의 시대상황이 어떻건, 보훈처는 다시한번 검토하고 조사하고, 바로잡을건 잡아야될거같습니다. 친일파 이정의 위패옆에는 이정이 밀고하여 운명을달리하신 이홍래 독립투사가있습니다. 지하에서 얼마나 씁슬할까요? 역사를 잊지맙시다.
정말요? 그런 변절자들이 왜 현충원에...화가 나네요
첨에 봤을때 이 노래가 후반부분에 나올줄 알았는데 초반부분에 나와서 놀랐고 후반부분 노래들도 너무 소름돋고 좋았어요 김고은 연기도 잘하고 노래도 진짜 대박이심 고음 쩌심..
가창력에 더해서 중저음이 매력적이고 배우라서 그런지 감정이 뛰어납니다.
김고은씨 워낙예쁜데 영웅에서 더예쁘고 매력있는 역활로 나와서 반했어요.김고은씨역이 실존인물이 아니여도 이런분들도 그시대에있을법한 배역이란 생각도들었어요.노래너무슬프고 애절.
크으~김고은 노래잘하고~연기력 최고배우~
감동이다~♡
영웅~~
이런 감동을주는 영화가 또있을까?
깊은여운~~
아직도가슴이먹먹합니다~~
김고은이라는 배우 나왔다고 너무 몰아주지 않은것
너무 감정 담긴 노래 보여줌
그 외 음악도 탄탇
잘봤어요 극장에서
김고은언니가 노래잘하는건 알지만..
목소리가 눈물난다ㅠㅠ 눈물.. 와....... 슬퍼 ..
영화관에서 처음 볼 때 눈물 많이 났던 장면이다. 그 뒤로도 계속 ost 찾아들었는데 풀버전 공개해주셨네요😊 김고은님 더 팬이 되었습니다
이거보고 영화를 보러 안갈수가 없었습니다...제발 극장에서 보셔야해요...큰 소리로 듣는건 정말 다르네요....
비싸시면...조조로라도해서...ㅜㅠ 꼭 보세요ㅠ 주인공이 안중근역할이신 배우분인건 알았은데 설희도 그만큼 존재감 장난 아니더라고요...개쩜
나라가 약하면 안된다
나라가 약해지지 않으려면 개인 개인이 강해져야합니다. 개인이 모여 마을이되고 나라가 돼듯이. .
너무 슬퍼 진짜… 후유증 남는 영화 ㅜㅜ
계속 또 보고 싶음 ㅜ
원래도 영화 보면서 잘 우는 편이지만, 이렇게 많이 울어본 건 처음이에요.. 김고은 배우님 이 장면과 나문희 선생님 장면에서 정말 버거울 정도로 속이 부글부글 하며 울었어요. 뮤지컬 영화를 아마 처음 본 것 같은데, 무대 인사까지 잘 보고 왔습니다ㅜㅜ 한 번 더 보러 가고싶어요..!
진짜 상상이상으로 잘하셔서 몰입도 장난없었어요ㅜㅜㅜㅜㅜ
연기도 가창력도 ...ㄷㄷ
진짜 가슴벅차게 봤어요~~
영웅 보고 왔는데 김고은 노래도 연기도 처절하게 잘해서 진짜 좋았음
볼때마다 화가나내요 김고은님 목소리들을때마다 슬퍼요 잊을수없는 마마의 죽음에 정말이지 감히 마마를
노래부르면서 숨 들이쉴때 살짝 나오는 목소리가 꼭 절규, 오열같아서 가슴을 저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