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발터 모델과 롬멜이 저 당시 같이 있었다면....... 모델은 적어도 히틀러에 마음에 드는 공세적 방어전의 대가인데다가 적어도 히틀러가 한 번 마음대로 해 보라고 할 정도의 배짱도 있는 장군이었으니....... 어쩌면 서부전선에서 동부전선 최고의 방어전 전투인 르제프 전투급의 방어전으로 연합군을 1년 정도 노르망디에 묶어버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거기에 롬멜이 모델의 방법을 써서 공세적 방어전 식으로 서부전선 상황을 유지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식으로 히틀러를 설득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모델원수가 너무 늦게 들어갔어요. 모델원수도 서부전선에서 절망의 한달을 보낸다음에 1944년 9월 초부터 다시 전선을 정돈한것 같아요. 진짜로 Kluge대신에 모델이 들어갔으면, 상황이 조금 독일에게 유리하지 안을까 싶네요. 그런데, 미영의 unlimited air dominance 때문에, 방어든 공격이든 군대를 움직이기가 힘들었을것 같아요.
실제로 독일군이 연합군 항공기보다 연합군 함포를 더 무서워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이미 제 영상에 있었습니다. (ruclips.net/video/OQaoX_oa0p0/видео.html) 연합군 기갑부대 배치 논쟁이란 컨텐츠인데 15:09를 보시면 상륙 당일날 (44.6.6.)하도 상륙이 연기됐다 말았다를 반복했고 악천후가 계속되어 연합군의 함포지원이 부실했습니다. 그래서 오마하 때 독일군 방어선이 쌩쌩하게 살아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상륙당일날 기갑부대가 좀 해안 가까이에 있었으면 연합군은 출혈이 엄청나게 컸을 것이고 첫날에 교두보를 확보하지 못했을 확률이 높았습니다.
말씀하신 것이 맞습니다!! 해변에 쭉 기갑부대를 깔아놓자!! 이말 자체가 연합군이 어디로 올지 장소를 몰랐던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날짜와 장소까지 맞췄던 독일군 내 유일한 장성이 있었습니다! 마르크스 장군입니다. (ruclips.net/video/ilfCoG1eVw4/видео.html) 2차대전 인물열전에 소개된 바 있었습니다.
@@만물상자TV전쟁의신 그 영화 지상 최대의 작전에서 한 쪽 다리가 의족이었던 그 장군인 것 같군요. 그런데 그는 아이젠하워는 도박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이젠하워는 도박을 했으니...... 사실 잠시 동안 기상이 좋아진다는 예보 하나만으로 그냥 GO 했으니 말입니다.
연합군이 상륙지점을 속이기 위해서 진짜 뼈빠지게 고생을 했습니다. 포티튜트 작전 (연합군 기만작전 암호명) 실시 중 제1군이라는 허께비 군을 만들어서 그 군 사령관을 패튼으로 하고 파 드 칼레 지역을 노리는 곳에 제1군 아니 허께비 유령군을 주둔(?)시키고 그 유명한 못생긴 개를 데리고 항상 패튼 장군은 그 지역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독일군의 시선을 다 집중시켜야만 했으니....... 그래도 어떻게 보자면 패튼 장군도 그런 부분에서는 2차대전 승리에 한 몫을 했다고 해야 할 지.......
영미공군이 노르망디일대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는 상태에서는...롬멜이 선호하는 방법을 채택했어도...상륙군을 저지하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입니다. 롬멜의 생각이 타당하려면 독일공군이 영미공군을 약간은 견제할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이죠....롬멜의 주장대로 했다면 ...독일한테 그나마 남아있는 귀중한 기갑전력 모두가 6월에 영미공군의 밥이 되었을 겁니다.
롬멜에게 충분한 재량권을 줬으면 최소한 1944년 한해는 버텼을거라고 봅니다. 애초에 롬멜 자신도 전쟁에서는 패배했다고 봤습니다. 롬멜은 영미공군을 많이 상대해봤습니다. 더미탱크 운영하며 은폐엄폐로 최대한 유지시켰을겁니다. 말씀하신 롬멜에 대한 평가는 그의 북아프리카의 전적과 매치과 되지 않습니다. 한발 양보해서 막대한 기갑전력 손실을 가정한다 하더라도 아끼다가 똥만들자는 다른 장군들 판단보다 낫다고 봅니다. 이와는 별개로 롬멜은 결정적인 순간에 전선에서 자리비운게 가장 큰 잘못 이었던 것입니다. 기갑부대의 해안배치나 롬멜이 전선에 있었거나 둘중에 하나만 가능했어도 상륙은 성공하지 못했으리라 봅니다.
사실 동부전선의 소련공군은 독일 루프트바페 조종사들의 밥이었다고 봐도 무방했습니다. 격추스코어만 올려준 꼴이었죠. 때문에 동부전선에서 싸워왔던 장군들은 공군력 뭐 별게 있나? 이런 반응이 많았습니다. 1944년 시점으로 가보면 롬멜 빼고는 서부전선에서 연합군하고 치열하게 부딪혀본 장군이 없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죄다 동부전선에서만 싸워왔던 장군들만 득시글댔죠. 한스 위르겐 폰 아르님이 롬멜 후임으로 독일 아프리카 군단 사령관을 맡았지만 이 사람은 영국군 포로가 된 사람입니다. 롬멜 빼곤 정말 없었던 것입니다. 슈베펜부르크도 바르바로사 작전에 참가하는 등 동부전선에서만 싸워왔던 사람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사람이 그렇게 롬멜을 반대하더니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시작된 후 롬멜에게 사과편지까지 썼다는 것입니다.
참...군인으로서 흠잡을 일이 거의 없는 롬멜.. 롬멜의 의견이 반영되어 오버로드작전 실패하고 연합군과 강화협상을 맺어 서부전선 안정화 시키고 , 독일이 소련을 뒈지게 두둘겨 패서 소련 국력을 거덜내고 휴전하고. 태평양 전선에서는 미국이 일본을 아작냈으면 우리나라 분단도 없었을것을... 선생님의 소중하고 정성스런 영상 잘 시청했습니다.감사합니다.
그럼 노르망디. 해안가를 붉은 군대. 장병들이 걸어 다녔을 것이며 전 유럽이 공산화 되는 최악의 결과가 나왔을 것 입니다. 빠아끄라띠온 작전에서 이미 중부집단군이 붕괴되면서 승부가 난 건 주지의 사실이고 만슈타인 이나 구데리안 등이 회고록등에서. 주장했던 대로 했다 한들 예견된 종말을 몇주 더 미루는데 불과 했습니다 실제 그 때부터 붉은 군대를 가로막는 것은 독일군이 아닌 열악한 보급체계와 인력난 이었습니다
그렇죠. 그것은 당연했습니다. 그걸 알았기에 롬멜은 전쟁 승리가 목적이 아니라 협상이 목적이었습니다. 협상을 위해서는 연합군이 순순히 오케이 하진 않을테니 타격을 입히자는 논리였죠. 타격이 크면 민주주의 국가 특성 상 협상이 더 쉬울 것으로 봤던 것입니다. 롬멜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시작되자마자 절대 승리할 수 없다고 봤습니다. (ruclips.net/video/6rJi7M6HtJ0/видео.html) "롬멜은 정말로 히틀러를 없애려고 했을까?" 란 영상입니다. 이 영상에도 나오지만 롬멜은 1944년 6월 15일부터 히틀러 면전에서 정치적 협상을 하자고 요구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연합군에게만 항복하고 소련군하고는 싸우겠다고 연합군에게 협상하려고 했습니다. 더 나아가 연합군이 거절하면 베를린까지 그냥 개방하려고 했습니다. 이건 사료에 증거로 나오는 사실입니다. 결국 항복하자는 말인데 히틀러 앞에서 이런 소리를 하고도 죽지 않은 사람은 롬멜 밖엔 없었습니다.
하지만 롬멜의 말대로 해안가에 기갑부대를 배치했으면 기갑부대 특성상 은엄폐가 어려워 상륙 직전이나 직후의 연합군의 대규모 함포사격과 공중공습에 싸워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전멸했을거라 봅니다 얕게 분산 배치해버리면 그정도 규모와 화력으로 연합군을 바다로 밀어낼거라 생각이 들지 않고요
먼저 독일의 기갑부대 배치논쟁 (ruclips.net/video/OQaoX_oa0p0/видео.html) 이 컨텐츠를 보시면 많은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말씀하신 기갑부대 특성상 은엄폐가 어려워 상륙 직전이나 직후의 연합군의 대규모 함포사격과 공중공습에 싸워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전멸했을거라 봅니다, 이 말은 이론적으로 맞습니다. 그런데 실제 역사를 보면 연합군은 이상하게도 상륙 첫날에 해안가를 제대로 포격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마하에서 그렇게 저항이 컸던 것입니다. 두번째 말씀하신 얕게 분산 배치해버리면 그정도 규모와 화력으로 연합군을 바다로 밀어낼거라 생각이 들지 않고요. 이 말은 저도 동의합니다. 롬멜도 그걸 알았습니다. 그런데 롬멜의 목적은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최대한 연합군에게 피해를 많이 줘서 강화협상을 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따라서 막아내지 못하더라도 인적 피해를 엄청나게 줄 수 있었습니다. 상륙 첫날에 연합군 기갑장비는 제대로 상륙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따라서 독일 탱크가 단 몇대라도 있었으면 연합군은 엄청나게 죽었을 것입니다.
@@만물상자TV전쟁의신 방어시설을 베톤의 집인지 뭔지 콘크리트 구조물이었지만 지붕도 안덮은 것도 있었고 롬멜이 노르망디와 캉 중간을 상륙지점으로 예상하고 있어서 어차피 못막았겠지만 인명피해가 만단위에서 몇만 단위로 올라갔겠죠.스핏파이어 출격범위안에 노르망디까지 포함되어 있어서 이곳을 의심한 자들도 있었다고는 하는데 폭풍치는데 인공부두 2개 만들어서 상륙시도 할줄은 아무도 예상못해서 결국 성공한 거지요.어차피 노르망디 상륙이 실패하면 핵으로 주요 거점을 폭격하고 다시 상륙할 계획도 있었으니 차라리 상륙작전 성공한게 프랑스와 독일 입장에서 더 나았을지도요.올림픽 작전처럼 유보트 항구와 주요 거점을 핵투발 하면 최초의 핵투발은 일본이 아니라 프랑스 해안이었을 테니까요.그냥 처칠의견대로 발칸반도에 상륙해서 제2전선 형성하는게 더 편했을 텐데 프랑스에 상륙해서 결국 유럽의 반은 공산화된 것 같습니다.
1944년 2월 총통은 리투아니아에서 한대의 손실 없이 러시아 기갑부대를 완벽하게 격파한 그로스 도이칠란트 의 본 만토이팰 장군을 투입해서 패튼 장군과 맞짱을 뜨게 했습니다. 제대로된 전차부대(판터를 제일 선호 했음)가 도착 하기전에 독촉을 받고 섣불리 공격을 했다가 패퇴 했습니다. 이후, 발지 전투에서도 제5 기갑군을 받고 선두에서 공격을 했다가 실패를 했습니다.
채널의 컨텐츠에서 그 부분을 놓쳤을리가 없습니다. 그 내용 뿐만 아니라 롬멜의 마지막에 얽힌 숨겨진 이야기도 모두 다뤘습니다. ruclips.net/video/vKoAncIuMbc/видео.html 롬멜 완전 정복 1부 ruclips.net/video/dF52u-pwFMg/видео.html 롬멜 완전 정복 2부 말씀하신 롬멜의 그 일화는 전쟁 중에 롬멜과 롬멜의 부인이 서로 교환했던 편지에 있던 내용입니다. 따라서 거짓으로 꾸며낼 수가 없는 일입니다. 하긴 영국군 측 기록에도 몽고메리가 롬멜로부터 식수를 받은 답례로 독일군에게 와인을 선물했다고 하니 거짓일리도 없죠.
말씀하신 것과 관련해서 이 영상을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의외로 최고 에이스와 에이스들이 맞붙었던 것이 서부전선입니다. 대부분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팔레즈 전투 예고편 (ruclips.net/video/p4ZLY_LhChg/видео.html) 예고편이라 짧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본편도 영상 마지막에 안내되어 있습니다.
2차대전은 지금 한반도에 사는 모든 사람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른 채 늘 불안하게 사는 한반도 남쪽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운명이 2차대전 때 정해졌습니다. 아래의 컨텐츠를 연관 컨텐츠로 강추합니다. ruclips.net/video/3HD3YR5VW4o/видео.html (한반도의 분단을 가져온 루즈벨트의 대실수)
독일군 전사중 한명 더 있습니다. SS Standartenfuhrer 요킴 파이퍼 입니다. 1943년 하리코프 전투를 성공 시키고, (마이클 비트만) 과 함께 쿠르트스 전투에 참가 했습니다. 이후, 1944년 7월 중순 노르망디에도 투입 됐습니다. 1SS 기갑 사단 라이프스탄다르테 SS 아돌프 히틀러 (LSSAH)를 지휘 했습니다.
@@만물상자TV전쟁의신 총통은 1944년 서부전선을 우선 순위로 정했습니다. 동부전선은 힘겹지만 어차피 장기전을 예상 했습니다. 민주주의 와 언론 의 자유가 있는 미국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면 여론에 밀려 미국이 휴전, 태평양 전쟁 포커스, 중립국 선언을 할거라고 판단 했습니다. 그래서 독일군의 피해 와 승리 보다 미군의 피해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 결과가 절망적인 아르덴느 공세 입니다.
1944년의 서부전선의 독일육군은 참 안습....대부분의 정예사단은 소련군을 감당하느라 동부전선에 있고...어마무시한 영미공군은 차라리 얘기하지 않더라도.. 강력한 연합군 함대에 타격을 가해야 할 독일의 U보트함대는 만신창이가 돼 거의 도움을 못줬고...그럼에도 팔레즈회전까지 3개월을 버터낸 그들을 칭찬합니다.
갈대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2차대전 주요전투 굿우드 작전을 한번 보시지요. 정말로 이것은 인간승리 그 자체였습니다. 이런 생각 안해보셨습니까? 독일은 그 허접한 1~4호전차를 갖고도 빛나는 승리를 거뒀는데 그 강력한 티거와 판터를 가졌을 때 왜 그런 승리를 거두지 못했는지 말입니다. (ruclips.net/video/4WsiZ_baXEg/видео.html) 굿우드 작전 (ruclips.net/video/4dqtLpmggFE/видео.html) 팔레즈 전투를 보시면 그 답을 아실 수 있습니다.
@@만물상자TV전쟁의신 암만 잘 정비된, 훈련된 기갑사단도 적절한 공중지원없이는 결국은 무력해질것입니다. 그나저나 1944년 서부전역에 만쉬타인만 출전을 못했군요. 그가 그 전역을 맡았다고 해도 결과를 바꾸지는 못했겠지만....만물상자님은 되니즈장군한테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은 것 같습니다.^^
@@갈대-z1l 아! 1944년이 아닌 1940년 5월, 서부유럽 침공전에 참여를 못했습니다. 그 유명한 낫질작전. 그 작전을 창안한 사람이었지만 지방 보병군단장으로 좌천당한 상태였으니까요. 히틀러가 우연히 그 작전을 듣고 채택하지 않았습니까? 만슈타인 1부( ruclips.net/video/tcdRlJ2PgHU/видео.html)에서 자세히 다뤘었습니다. 되니츠 장군! 당연히 관심이 많습니다. 되니츠를 다루기 위해서는 자세한 사료 조사가 먼저 선행되야겠죠.
50만이 아니라 무려 150만 가까이 있었습니다. 롬멜이 맡은 B집단군만 해도 100만명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독일은 결정적으로 정보력에서 연합군에게 한참 뒤졌기 때문에 어디로 올지를 정확히 파악하질 못했습니다. 시기하고 작전명이 오버로드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제일 중요한 상륙장소를 몰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많은 병력이 분산되어 있었습니다. (ruclips.net/video/OQaoX_oa0p0/видео.html) 이 영상 노르망디 상륙을 막을 기갑부대 배치문제라는 컨텐츠와 롬멜과 패튼의 대결(ruclips.net/video/gmJkDp5L_E0/видео.html)이라는 컨텐츠를 함께 보시면 완벽히 서부전선 상황이 정리될 것입니다.
참 롬멜의 혜안이 탁월합니다. 탱크와 장갑차를 동원한 기동전이란 지상전에 국한했을 때 유용하지만 공중을 제합하지 못했을 땐 항공기에 그냥 희생물입니다. 이에 대해 탱크는 항공기에 대한 방어와 공격수단이 거의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롬멜은 이미 아프리카에서 미영군과 이런 경험을 했기에 그런 제한이 가능했겠지요. 결국 현대전은 공중우세가 결정적입니다. 우리의 경우를 대입한다면 KF-21의 본격적 배치와 제7기동군의 조합은 가장 이상적인 구상입니다. 결국 최종적인 점령은 기갑군과 기계화군의 몫이니까요. 유명하다는 타 방송에 진행되는 내용은 그냥 추상적이라 그건 나도 아는데 군에서 실병력을 지휘해 본 없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무엇을, 왜 했단 말인가? 우월한 인원과 장비라도 전략의 차이는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 본 방송은 제2차 세계대전의 실상을 파악하게 한 최고의 군사 체널이라고 칭찬을 하고 싶네요. 귀하의 견해와 노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감사합니다. 모두 사료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1944년 초에 B집단군 사령관이 된 롬멜. 그 당시 서부전선의 지휘관의 면면을 쭉 볼것 같으면 하나같이 독일이 잘 나가던 시기에 동부전선에서 싸워봤던 인물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독일군 장군들 중에서 오로지 롬멜만이 연합군의 제공권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짜피 연합군이 상륙하면 연합군 항공기가 하늘을 온통 뒤덮을 것이라고 예상했고 독일군은 낮엔 기동도 못할 것을 예상했습니다. 그럴 바엔 차라리 해안에 기갑부대를 붙여놨다가 바로 연합군을 쓸어버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독일군 장교들 심지어 히틀러도 그것을 실감하지 못했고 상륙이 벌어지고 나서야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현대전은 공중우세와 기동군의 조합이라는 생각도 어쩌면 독일식 기동전과 마찬가지로 과거의 것일 수 있습니다. 상황은 항상 변화하는 것이니 정해진 정답은 없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상황과 피아의 능력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융통성 있고 유연하게 대비하는 것이 승리의 기본이 아닐까요?
히틀러가 문제지 슈베펜부르크가 문제가 아니라고 하셨는데 거꾸로 되었습니다. 장군들 간의 의견이 분분하고 합치가 안되니까 히틀러가 나서게 된 것입니다. (ruclips.net/video/OQaoX_oa0p0/видео.html) 를 같이 보시면 의문이 풀리실 겁니다. 롬멜 vs 다른 장군들 간에 이 문제로 논쟁이 치열하니까 히틀러가 나선 것입니다. 히틀러는 어느쪽에도 힘을 실어주지 않고 기갑부대를 갈갈이 찢어서 나눠놨죠. 양측의 의견을 다 만족시킨 것입니다. 해변 근처에도 찔금, 기동방어전을 하기 위해 파리 근교 후방에도 찔끔. 어느쪽에도 힘을 실어주지 않은 것이죠. 결국 독일군은 통일된 전략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이도저도 아닌 전략으로 연합군을 맞게 됩니다.
@@만물상자TV전쟁의신 튀니지,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롬멜의 도를 넘는 월권행위가 방어전략의 혼선을 가져왔고 결국 어쩡쩡한 히틀러의 절충안이 채택되었지요. 이탈리아에선 카리스마 있는 케세링 총사령관이 히틀러에게 어필해 서부전선으로 내쫓아내었지만 선비인 룬트슈테트원수는 그렇지못했습니다.
독일군부가 2차대전 직전에 그토록 양면전쟁을 두려워했죠. 그래서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독소불가침 조약도 맺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시작되면서 양면 전쟁이 아니라 3면전쟁이 됩니다. 첫번째 북프랑스 서부전선, 두번째 이탈리아 남부전선 , 세번째는 소련과의 동부전선 이렇게 삼면 전쟁이 됩니다. 이런 이유때문에 롬멜이 그렇게도 고민을 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롬멜은 연합군을 막아보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6월 26일에 히틀러에게 완전히 마음을 접게 됩니다. (ruclips.net/video/6rJi7M6HtJ0/видео.html) 롬멜은 정말로 히틀러를 죽이려고 했을까? 그 진실을 알아봅니다란 영상에서 이 주제를 자세하게 다뤘습니다.
롬멜생각대로 2-3개 완편 기갑사단을 노르망디일대에 전개했다면...수천대의 연합군 "야보"가 그 일대 하늘을 뒤덮었을 것이고 동시에 연합군 함대에서 엄청난 화력이 독일기갑사단을 강타했을 것이다. 독일기갑이 그 곳에서 전멸했다면 ...독일이 아르덴느에서 마지막 회심의 일격을 가할 수 있도록 시간을 많이 벌어준 팔레즈 회전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만물상자TV전쟁의신 연합군 수뇌는 당연히 영미공군과 연합군 함대가 해안에 전개된 독일기갑을 대부분 정리한 후에 상륙부대를 해변에 내려 놓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럴 수 있는 역량이 있었고요.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상륙군을 독일기갑 전면에 두게 되면...연합군이 비록 이긴다 해도 지나친 피해를 입게 됩니다.
보통 무능한 장군들이라면 결과를 똑부러지게 봐도 자신이 맞다고 우길겁니다 슈베펜베르크는 자신에 작전이 틀려다는것을 롬멜한테 ㅇㅈ한거보면 괜히 능력있는 장군이 아니긴합니다 능력있는 장군은 능력있는 장군이 ㅇㅈ할수있습니다 비록 서방국에대한 경험은 없지만 한번에 실수로 바로 알아채리고 ㅇㅈ하는거보면 사실 슈배펜베르크도 보통 실력이 아닌거죠 하지만 서방국가들에 가장잘아는것은 롬멜이죠 결국엔 경험이 없다는 전제하에서 능력이 있어도 단점이있는 장군이있는 장군이었죠 이건 롬멜 구데리안 만슈타인 마찬가지죠 어느장군이든 장단점이 있기마련이죠 하지만 그런 단점을 ㅇㅈ하는 장군이야말로 이열악한 전선에서 앞을보고 나아갈수있습니다 이런 앞을보고 나아가는 장군들이 명장이 됄수있는 기회가 얼마든지있죠
1944년 6월 이전 즉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전만해도 서부유럽은 그나마 평온했습니다. 프랑스는 독일군에게 휴식같은 낙원이었습니다. 그나마 이탈리아 전선이 있긴 했지만 이탈리아 전선에서도 연합군의 공군력을 제대로 맛본 전선은 아니었습니다. 롬멜을 빼고는 대부분은 독소전만 경험했던 독일군 장성들은 허접하고 만만한 소련공군만을 상대해봤기에 롬멜의 말을 체감하지 못했던 것은 이해가 되는 대목입니다.
@@옛날고유의개 채널에 롬멜관련 컨텐츠가 무척 많습니다. 어느 채널에서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다양한 주제의 롬멜관련 컨텐츠입니다. 이것들을 보셔도 아시겠지만 롬멜은 나치독일의 장군들 중에서 가장 인간적이고 나치답지 않은 장군이었습니다. 때문에 롬멜 1부 (ruclips.net/video/vKoAncIuMbc/видео.html) 제목을 "착한 독일군이라 불린 독일 장군"이라고 지었습니다. 실제로도 연합국에서는 그를 그렇게 불렀습니다.
원수나 장군급은 몰라도 대령~소장까지 나온 별도 사이트같은 것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본 채널 2차대전 인물열전(ruclips.net/p/PLZmdkuHOpnlFcKT5XIZZplE3BK1UeUIXq) 에서 그나마 아쉬움을 달래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전혀 모르셨던 인물들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펼쳐지니까요.
이때가 1944년이었습니다. 무려 5년전 폴란드 전부터 세계최초로 집단화된 기갑부대를 실전에서 운용한 최초 지휘관이 구데리안이었습니다. 그 전술로 승리만 거듭했던 사람이 구데리안입니다. 1941년 말 모스크바 점령에 실패하자 히틀러에게 후퇴를 주장했다가 해임당했죠. 그로부터 무려 3년이 지났습니다. 그 시간동안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연합군에게는 집단화된 기갑부대가 먹이감에 지나지 않게 된 것입니다. 항공력이 강력하지 않은 소련군에게 하늘이 완전히 점령당해 유린당한 경험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구데리안은 실제로 미군과는 싸워보지도 않았죠.
롬멜에게 한가지 약점이 있다면, 전선을 이탈했다는 겁니다. 아내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전선을 이탈하다니.. 아무리 유능한 부하들이 있어도, 결정적인 순간에 지휘관이 부재하면, 그건 지휘관으로서의 임무를 소홀히 한 겁니다. 롬멜이 아내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그리고 적이 도저히 상륙하지 못할 것 같은 기상이 지속될 것임을 확신하고) 잠시 전선을 이탈해도 괜찮을 것이라는 안일함은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하는 데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습니다. 영국해협은 파고가 높고, 풍랑이 심해서 대규모 상륙작전을 하기 어려운 천혜의 장벽 역할을 합니다(영국에서 프랑스 방향으로 상륙하는 것도, 그 반대방향의 상륙도). 게다가 기상까지 안 좋으니, 당시 독일군이 방심할만 했습니다. 반면에, 연합군은 성난 파도와 악천후를 돌파하여 상륙하려는 입장에서 절대로 방심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지속되는 악천후를 보고 상륙작전이 실패할 것을 두려워하고, 긴장했으며, 게다가 이대로 가만 있다가는 수많은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절대로 상륙을 못할게 될 정도로 파고와 기상 조건이 악화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섣불리 결정을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이러한 어려운 여건에서도 롬멜처럼 잠시 전선을 이탈하는 연합군 장교는 없었습니다(다만, D-Day와 밀접한 보안 누설을 하여 대령으로 강등된 후 미국 본토로 강제 복귀되어 불명예 전역한 공군사령관 헨리 장군과 같은 사례는 있었습니다). 실제로 노르망디 상륙작전 예정일은 6월 5일이었는데, 당일 기상 상태가 도저히 상륙작전을 실행하지 못할 정도였으므로, 상륙작전은 취소되고 잠정 연기되었습니다. 이에 연합군 내부에서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도대체 언제 실행될지 이견이 많았지만, 누구도 적합한 날짜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6월 5일 밤에 역사적인 결단이 이루어졌습니다. 바로 그 다음 날인 6월 6일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강행이 결정된 겁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해당 결정은 아이젠하워 원수의 전격적인 결단에 의한 것이며, 놀라운 사실은 당시 아이젠하워 원수는 휘하 기상 장교의 희미하지만 희망적인 조언을 들었다는 겁니다. 즉 기상 장교가 말하기를 '각하, 내일의 기상은 오늘보다 안 좋을 것이고, 그 이후로는 파고가 더욱 높아져서, 우리 상륙정들이 독일군이 설치한 기뢰를 발견하지 못하고, 폭사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희망을 말씀드리면, 6월 6일의 특정 시간대에 상륙하기 좋은 기상이 일시적으로 지속될 것 같습니다만, 그게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릅니다. 2시간 일수도 있고, 1시간 일수도 있습니다.' 이에 아이젠하워 원수는 그 희망적인 시간대를 믿고, 6월 6일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결정합니다(심지어 희망적이지 않더라도, 상륙작전이 지연되면 '빠드깔레와 조지 패튼'으로서 독일군을 속인 양동작전 계획이 간파되므로, 노르망디 상륙을 강행해야 했습니다).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얼마나 어려운 계획이었냐면, 무려 400만 명 규모의 연합군 총사령관인 아이젠하워 원수조차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실패시 전 세계에 대한 보도용으로서 '우리는 노르망디에 전략적인 상륙거점을 확보하지 못했으며, 우세를 점하지 못한 연합군은 유럽 전선으로부터 후퇴한다.'라는 내용의 쪽지까지 작성 후 보관할 정도였습니다(아이젠하워 원수는 해당 쪽지를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후 몇일 후에 거리낌없이 부관에게 줍니다). 요약하면, 연합군과 독일군의 분수령이 된 그 찰나의 시간대(1~2시간)에서 롬멜은 전선 이탈을 하였고, 그 라이벌 격인 패튼은 전선을 이탈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는 결국 연합군의 군세가 독일군을 압박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한편, 연합군 내부에서 조차 악화되는 기상 조건으로 상륙 여부가 반신반의했는데도, 에리히 폰 마르크스 장군은 어떠한 논리로 6월 6일 노르망디에 연합군의 상륙을 예상했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마치 아이젠하워 원수의 생각을 읽은 것 같이..
@@만물상자TV전쟁의신 방금 말씀하신 영상을 보았습니다. 핵심을 제대로 지적해주셨습니다. 그런데도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관련하여 아직도 이례적인 비밀(?)이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는 당시 기상이 계속 악화되었는데도 단 몇 시간 동안만 연합군에게 노르망디에 상륙할 좋은 기회를 주었던 기상 비밀(?)이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시간, 상륙지점을 제대로 예측한 에리히 폰 마르크스 장군의 예측 능력입니다. 구체적으로 그 예측 능력의 근거가 연합군의 양동 작전의 의도를 간파하면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자체 비밀 정보망을 운영하고 있던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단순히 전쟁 감각에 의한 것인지, 정말로 궁금합니다. 2차 대전 기간을 고려하면, 6월 6일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아주 작은 부분이긴 합니다. 연합군의 입장에서는 상륙 작전에 실패해도, 다른 방식으로 독일을 공력할 역량이 남아 있었으며, 심지어 전쟁 초반인 1942년 7월 경에, 바로 프랑스로 상륙하려는 야심찬 쇠메작전(Sledgehammer)이 계획되었습니다. 해당 작전은 당시 미 육군참모총장 마셜과 아이젠하워 중장 및 미국 고위 군사기획관들이 적극적으로 주장했으나, 실행 직전 단계에서 처칠과 영국 고위 군지휘관들의 반대(우선은 북아프리카에서 연합군이 공세를 하자는 전략)로 무산되었습니다. 과연 당시에 쇠메작전이 실행되면 성공했을까? 연합군의 희생은 어느 정도였을까? 등에 대하여 '만약'의 상황을 놓고 군사 전문가 간 다양한 예측 및 논쟁이 2차 대전 이후로도 이어졌습니다. 저는 요즈음 전쟁의 전체 방향과 대전략보다는, 소규모 전투라도 나중에 밝혀지는 '이례적 요인'에 관심이 가고 있으며, 이러한 맥락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모든 이례적 요인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냥 가볍게 볼만한 내용이라는 생각 밖에 안 듭니다.. 댓글 적어놓으신 거 봤는데 장군들 의견 합치가 왜 안되었겠습니까? 상륙지점을 정확히 예측을 못했으니 합치가 안되었던 거지요. 슈베펜부르크가 예비대를 뒤로 빼놓은 결정적인 이유이구요 롬멜 말대로 했으면 상륙작전을 막을 수 있었을까요? 저는 아니요라고 답하겠습니다.
사실 롬멜이 불리한 부분이 있었다면 그는 독일 군부 내에서 아웃사이더 였던 것도 요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프로이센 군인귀족들 (융커) 출신들이 주축이 된 독일 군부 내에서는 롬멜은 평민인데다가 참모교육도 받지 않고 다만 히틀러가 초창기부터 총애해서 장군 달고 원수 달고 그런 낙하산 인사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고 합니다. 사실 롬멜이 기갑사단을 지휘하기 전 맡은 직책이 총통경호대장 이었으니...... 게다가 지금 세계 국가지도자들이 가끔 보여주는 오픈카 퍼레이드를 히틀러가 처음 하게 된 것인데 그것을 알려준 사람이 롬멜이었다고......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저 당시 독일 군부는 롬멜을 히틀러의 서커스 광대 라는 식으로 뒤에서 비웃었다고 합니다.
@@daewookkim4795 그런면이 분명 있다고 봅니다. 아프리카 전선도 최고 사령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돌출행동으로 전선을 확대... 선전거리가 필요했던 히틀러의 지원을 받게되고, 동부전선으로갈 물자와 병력이 아프리카로... 그러나 지중해를 건너다가 절반이상 써보지도 못하고 격추,격침 손실. 이걸 막겠다고 되니츠 제독의 반대에도 불구 U-보트 투입하여 전량손실... 소련으로 가는 랜드리스 물자 차단에 마이너스. 대전략으로 보면 히틀러의 비호하에 이루어진 북아프리카 전선의 약진은 북아프리카에서의 성공 여부에 관계없이 결과적으론 트롤짓이 되버렸죠. 거기에 더해서 미국에서 건너온 신삥 미군이 패튼의 지휘아래 강군으로 거듭난 것도 북아프리카 전선의 결과물입니다.
독일군이 모든 것을 세계최초로 했던 (예를 들면 전격전 등 )최고의 명장들을 갖고도 끝내 패배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연합군은 임무형 지휘체계 (즉 목표만 제시하고 세부적인 것은 알아서 하는 명령체계) 를 했지만 독일군은 최고의 장군들이 있었음에도 임무형 지휘체계가 완전히 무너진 상태에서 싸웠기 때문입니다. 히틀러가 처칠과 루즈벨트의 리더십을 배웠다면 연합군 물량을 극복했을까? | 2차대전 논쟁점 (ruclips.net/video/j48aG0yXRq8/видео.html) 를 보시면 더욱 명확히 알게 되실 것입니다.
1960년대에 개봉된 '생과사'라는 2차 대전 영화로써 1944년의 독일군 상황을 잘 드러내는 영화인대, 미육군 항공대 소속 P-47십여기의 기총소사에 어느 프랑스 시골의 오솔길위에서 행군중인 수백명의 독일보병부대대열이 공습으로 지리멸렬 당하는 장면은 요즘영화에 없는 명장면이자 2차 대전 후반부의 다무너져가는 독일군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1944년의 뜨거운 여름 즉 1944년 6월~8월 까지의 서부전선 전사에 대해 관심이 무척 많습니다. 본 영상에 표현된 것은 하나도 과장이 아니라 100%의 사실입니다. 애니그마를 어느정도로 신뢰했길래 연합군에게 다 뚫려버린 것을 그렇게 몰랐는지 참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운데요. 그토록 롬멜앞에서 자신만만하게 기갑부대를 후방에 놨다가 연합군이 상륙하면 공격하자던 슈베펜베르크이 멘붕에 처할 정도로 연합군 항공력은 엄청났습니다. 연합군 공군이 슈베펜베르크의 기갑집단 본부를 불바다로 만든 것도 모두 애니그마 암호 해독 덕분이었습니다.
@@pedrogim6952 그래서 제가 이전에 기갑부대 배치 논쟁 누가 맞았을까? (ruclips.net/video/OQaoX_oa0p0/видео.html) 이 영상에서 이미 결론을 확실히 냈습니다. 롬멜 말대로 했다면 알보병 연합군은 완전히 아작이 났을 거라고 말입니다. 기갑부대를 뒤로 빼자는 이유 중 하나가 해군함포 때문이었는데 당시에 연합군은 해군 함포사격도 제대로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마하 비치에서 독일의 허접한 동방부대에게도 그렇게 피해가 컸던 겁니다. 그때 기갑부대가 있었다면 어찌되었겠습니까? 한번 저 영상을 다시 보신다면 더 확실히 느끼시게 될 것입니다.
독일군 장군 중에서 노르망디 상륙작전 (1944년 6월) 이전에 연합군 공군력의 뜨거운 맛을 제대로 봤던 사람은 롬멜이 거의 유일했습니다. 슈베펜부르크도 주로 동부전선에서 허접한 소련공군만 봐왔기 때문에 연합군 공군력에 대해서는 잘 몰랐습니다. 이 영상과 관련되어 연합군 상륙을 막아라! 독일기갑부대 배치 논쟁 (ruclips.net/video/OQaoX_oa0p0/видео.html) 을 함께 보시면 좋습니다!
전쟁의 패러다임은 계속 바뀝니다. 고급 지휘관이 이걸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를 보여주는 케이스. 드론과 대기갑 집속탄, 그리고 ECM이 추가된 21세기 현재의 전장환경을 대한민국 군은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지 솔직히 의심스럽습니다. 기갑 집중 운용을 통한 기동전은 단 몇발의 대기갑 집속탄만으로도 돈좌된다는 전훈이 이미 동부 우크라이나에서 몇년전 현실화 되었습니다. 기동군단에 화력 몰빵하는 것은 멋있어 보이지만... 글쎄요...
전쟁 패러다임은 계속해서 변한다! 명언을 해주셨네요. 2차세계대전 초반에는 구데리안의 집중화된 탱크 부대는 한마디로 넘사벽이었습니다. 소련군을 대상으로는 대전 말까지도 잘 먹혔죠. 그렇지만 1944년 영미 연합군에게는 그냥 먹이감으로 전락했습니다. 롬멜은 이미 북아프리카에서 선행학습을 했기에 미리 알았던 것 뿐입니다.
상륙을 허락하고 그 다음 내륙에서 기갑부대로 막는 건 저 당시 독일로선 무모한듯 후보지인 칼레와 노르망디 해안가에 기뢰와 지뢰를 도배하고 대공포와 참호를 2중 3중 도배하고 바로 뒤쪽에 기갑전력을 배치해서 치고 빠지면서 갈리폴리처럼 상륙지점에서 승부를 내고 아작을 내야함 ㅎㅎ
롬멜의 전략이 바로 그거였습니다! 연합군이 어디로 올지는 모르지만 기갑부대를 해안근처에 끌어다 놓는다면 연합군이 상륙했을 때 최대의 타격을 가할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동료장군들이 모두 다 반대했습니다. 이해를 못했죠. 더구나 상륙 당일날은 연합군 해군 함포지원도 부실했기 때문에 한줌의 기갑부대라도 있었다면 연합군은 몇배의 피해를 보고도 상륙을 못할 뻔했습니다. 그럴법도 한 것이 1940년 프랑스 전역 대승리 이후 1941년 6월에 독소전이 시작되죠. 룬트슈테트, 구데리안, 슈베펜베르크, 클루게 모두가 동부전선에서 싸우게 됩니다. 롬멜만이 프랑스 전역 이후에도 계속해서 연합군과 싸워왔습니다. 누구보다도 연합군을 잘 알수 밖엔 없었습니다.
아닙니다. 권총 자살이라뇨~ 롬멜의 모든것 2부를 (ruclips.net/video/dF52u-pwFMg/видео.html) 를 참조하세요. 부인과 아들과 마지막 이별을 했습니다. 히틀러가 그냥 죽어주면 너네 가족은 무사할 것이다. 라고 했기 때문이죠. 마치 영화 같은 상황인데요. 결국 롬멜은 가족때문에 죽게 된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전사에 대해 깊이 알면 알수록 만슈타인은 정말로 틀린 말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만슈타인이 창안했던 낫질작전 또한 단순히 프랑스 점이 아니라 아예 연합군 전체를 포로로 잡고 전쟁을 끝낼 정도의 대승리를 거두는 것이 목표라는 것을 알게 된 후에 참으로 놀랄 수 밖엔 없었습니다. 채널에서 만슈타인의 그 낫질작전에 대해 무척 자세히 다룬 컨텐츠가 있습니다. ruclips.net/video/lxB_hqPS8vE/видео.html (전설의 시작 만슈타인 1부)
좋은 의견 감사드립니다. 롬멜이 완벽한 군인처럼 묘사되었다고 느끼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도 롬멜에게 반대했던 슈베펜부르크 대장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시작된 후 직접 사과편지를 쓴 것도 역사적 사실입니다. 아마 롬멜의 실수라고 한다면 보급 문제 신경 안쓰고 닥치고 돌격했던 북아프리카 전역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에도 사실 이유가 있었습니다. 말씀주신 것은 후에 다뤄봐야 겠네요~
노르망디에서 롬멜에 실수라면 일기예보보고 아내생일 잔치해주러간거죠 이런중요한날에 생일잔치라니 이게 롬멜에 실책이고 슈베펜부루크는 동부전선에서에 전형적인 장군이자 프로이센에 전통인 기동포위섬멸을 주장하는 장군입니다 야크트판터도 공군보내면 고철덩아리가 됄텐데 영미공군상대로 기동전은 자살행위죠 소련군은 저그같은 느낌이라면 영미애들은 테란같은 느낌입니다 많은쥐와 적은고양이에 차이라고 봐야죠 독일군한테는 둘다 물량이지만 롬멜이 전략이 부족하고 과대평가됄만한 인물은 아님니다 하지만 영미연합군을 누구보다 잘알고있는 장군이라면 롬멜말고는 보기힘듬니다 구데리안조차도 항상기동전을 추구햇고 노르망에서 롬멜에 정적인방어를 추천으로 구데리안에 화딱지가 낫죠 슈베펜부르크는 동부전선걸맞는 전형적인 프로이센 전술느낌이지만 롬멜은 아님니다 말그대로 상황에맞게 전술을 쓰는 장군이죠 밀덕들이 롬멜과 모델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전형적인 허세충 귀족나부랭이가아닌 병사들이 환장하는 평민출신이기때문이죠 유명한 독일 장군들중 영미연합군과에 전투에서 여러번에 승리를 이끈 대표적인 장군이라면 전 롬멜과 모델을 뽑습니다 무엇보다 어쩔수없는게 역사상 독일은 영국과 전쟁을 여러번 해본 경험이없습니다 1차 2차말고는 영국과 제대로 싸워본적이없습니다 독일에 전술은 러시아나 프랑스같이 돌파력이 약한 물량에 정점을 둔군대에 강한전술이 특화적이죠(나폴레옹시절빼고) 하지만 부대 하나 하나에 큰 방어력과 돌파력을 가진 군대인 미군과 영국군을 많이 상대해본적은 없습니다 2차세계대전에 독일군이 사용됀 프로이센 전술은 러시아와 프랑스에 특화됏을뿐 영국과 미국한테는 먹히기 힘든 전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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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막으려면 상대방보다 더욱 강력한 전쟁 억지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전쟁 억지력없는 평화는 공허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만약 발터 모델과 롬멜이 저 당시 같이 있었다면.......
모델은 적어도 히틀러에 마음에 드는 공세적 방어전의 대가인데다가
적어도 히틀러가 한 번 마음대로 해 보라고 할 정도의 배짱도 있는 장군이었으니.......
어쩌면
서부전선에서
동부전선 최고의 방어전 전투인 르제프 전투급의 방어전으로
연합군을 1년 정도 노르망디에 묶어버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거기에 롬멜이 모델의 방법을 써서
공세적 방어전 식으로 서부전선 상황을 유지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식으로
히틀러를 설득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모델원수가 너무 늦게 들어갔어요. 모델원수도 서부전선에서 절망의 한달을 보낸다음에 1944년 9월 초부터 다시 전선을 정돈한것 같아요. 진짜로 Kluge대신에 모델이 들어갔으면, 상황이 조금 독일에게 유리하지 안을까 싶네요.
그런데, 미영의 unlimited air dominance 때문에, 방어든 공격이든 군대를 움직이기가 힘들었을것 같아요.
@@PurpleCat9794 그 놈의 시간과 타이밍......
한 반년 전 쯤 동부전선을 안정시킨 직후
바로 갔다면....
방어야 만슈타인에게 맡기고 말입니다.
독일 기갑 부대가 성공적인 전투를 해도 해변가까지는 접근을 못 합니다. 1944년 안지오 전투에서 독일군 공수부대가 거의 성공하기 직전, 해변가에서 미군 함포 사격에 녹아 났죠.
실제로 독일군이 연합군 항공기보다 연합군 함포를 더 무서워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이미 제 영상에 있었습니다. (ruclips.net/video/OQaoX_oa0p0/видео.html) 연합군 기갑부대 배치 논쟁이란 컨텐츠인데 15:09를 보시면 상륙 당일날 (44.6.6.)하도 상륙이 연기됐다 말았다를 반복했고 악천후가 계속되어 연합군의 함포지원이 부실했습니다. 그래서 오마하 때 독일군 방어선이 쌩쌩하게 살아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상륙당일날 기갑부대가 좀 해안 가까이에 있었으면 연합군은 출혈이 엄청나게 컸을 것이고 첫날에 교두보를 확보하지 못했을 확률이 높았습니다.
그래서 미리 해변 쪽에다 숨겨놨다가 적이 상륙할때 투입하자는거죠.
@@만물상자TV전쟁의신 아.....만물상자님의 말이맞네요
전쟁사를 보다보면 전쟁을 막지못한 정치는 이미 실패한 정치란걸 실감하게되네요.
롬멜이 영미군의 실력을 알고있었던건 맞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들의 상륙지점은 잘몰랐던게 확실합니다.
그는 노르망디 상륙후에도
그게 기만전이라고 생각했었어요.
말씀하신 것이 맞습니다!! 해변에 쭉 기갑부대를 깔아놓자!! 이말 자체가 연합군이 어디로 올지 장소를 몰랐던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날짜와 장소까지 맞췄던 독일군 내 유일한 장성이 있었습니다! 마르크스 장군입니다. (ruclips.net/video/ilfCoG1eVw4/видео.html) 2차대전 인물열전에 소개된 바 있었습니다.
@@만물상자TV전쟁의신 그 영화 지상 최대의 작전에서 한 쪽 다리가 의족이었던 그 장군인 것 같군요.
그런데 그는 아이젠하워는 도박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이젠하워는 도박을 했으니......
사실 잠시 동안 기상이 좋아진다는 예보 하나만으로
그냥 GO 했으니 말입니다.
연합군이 상륙지점을 속이기 위해서 진짜 뼈빠지게 고생을 했습니다.
포티튜트 작전 (연합군 기만작전 암호명) 실시 중
제1군이라는 허께비 군을 만들어서
그 군 사령관을 패튼으로 하고
파 드 칼레 지역을 노리는 곳에 제1군 아니 허께비 유령군을 주둔(?)시키고
그 유명한 못생긴 개를 데리고 항상 패튼 장군은 그 지역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독일군의 시선을 다 집중시켜야만 했으니.......
그래도 어떻게 보자면
패튼 장군도 그런 부분에서는 2차대전 승리에 한 몫을 했다고 해야 할 지.......
@@daewookkim4795 영화 롬멜에서 아이젠 하워가 실패할 경우 군법회부 사형이라고 하는 대사가 나옵니다. 연합군장성들과 독일장성들 모두 이구동성으로 아이젠하워 이자가 미쳤구나 하였답니다.
영미공군이 노르망디일대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는 상태에서는...롬멜이 선호하는 방법을 채택했어도...상륙군을 저지하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입니다. 롬멜의 생각이 타당하려면
독일공군이 영미공군을 약간은 견제할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이죠....롬멜의 주장대로 했다면 ...독일한테 그나마 남아있는 귀중한 기갑전력 모두가 6월에 영미공군의 밥이 되었을 겁니다.
롬멜에게 충분한 재량권을 줬으면 최소한 1944년 한해는 버텼을거라고 봅니다. 애초에 롬멜 자신도 전쟁에서는 패배했다고 봤습니다. 롬멜은 영미공군을 많이 상대해봤습니다. 더미탱크 운영하며 은폐엄폐로 최대한 유지시켰을겁니다. 말씀하신 롬멜에 대한 평가는 그의 북아프리카의 전적과 매치과 되지 않습니다. 한발 양보해서 막대한 기갑전력 손실을 가정한다 하더라도 아끼다가 똥만들자는 다른 장군들 판단보다 낫다고 봅니다. 이와는 별개로 롬멜은 결정적인 순간에 전선에서 자리비운게 가장 큰 잘못 이었던 것입니다. 기갑부대의 해안배치나 롬멜이 전선에 있었거나 둘중에 하나만 가능했어도 상륙은 성공하지 못했으리라 봅니다.
전쟁사는 만물상자님거만 봅니다! 최고의 퀄리티!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기 댓글답변만 쭉 읽어보고 영상봐도 진실이 딱 보이실 것입니다.
동부전선과 서부전선의 차이가 이것이었군요 롬멜의 해안이 대단하네요
사실 동부전선의 소련공군은 독일 루프트바페 조종사들의 밥이었다고 봐도 무방했습니다. 격추스코어만 올려준 꼴이었죠.
때문에 동부전선에서 싸워왔던 장군들은 공군력 뭐 별게 있나? 이런 반응이 많았습니다.
1944년 시점으로 가보면 롬멜 빼고는 서부전선에서 연합군하고 치열하게 부딪혀본 장군이 없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죄다 동부전선에서만 싸워왔던 장군들만 득시글댔죠.
한스 위르겐 폰 아르님이 롬멜 후임으로 독일 아프리카 군단 사령관을 맡았지만 이 사람은 영국군 포로가 된 사람입니다. 롬멜 빼곤 정말 없었던 것입니다.
슈베펜부르크도 바르바로사 작전에 참가하는 등 동부전선에서만 싸워왔던 사람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사람이 그렇게 롬멜을 반대하더니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시작된 후 롬멜에게 사과편지까지 썼다는 것입니다.
참...군인으로서 흠잡을 일이 거의 없는 롬멜..
롬멜의 의견이 반영되어 오버로드작전 실패하고 연합군과 강화협상을 맺어 서부전선
안정화 시키고 , 독일이 소련을 뒈지게 두둘겨 패서 소련 국력을 거덜내고 휴전하고.
태평양 전선에서는 미국이 일본을 아작냈으면
우리나라 분단도 없었을것을...
선생님의 소중하고 정성스런 영상 잘 시청했습니다.감사합니다.
그럼 노르망디. 해안가를 붉은 군대. 장병들이 걸어 다녔을 것이며 전 유럽이 공산화 되는 최악의 결과가 나왔을 것 입니다.
빠아끄라띠온 작전에서 이미 중부집단군이 붕괴되면서 승부가 난 건 주지의 사실이고 만슈타인 이나 구데리안 등이 회고록등에서. 주장했던
대로 했다 한들 예견된 종말을 몇주
더 미루는데 불과 했습니다
실제 그 때부터 붉은 군대를 가로막는 것은 독일군이 아닌 열악한 보급체계와 인력난 이었습니다
"뛰는 놈위에 나는 놈있다." 뛰는 놈이 아무리 강해도 나는 놈한테는 안되죠.
이분은 뭔가 뽕맛있게 설명함 잘듣고 있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잘보고갑니다😀 😀 😀 😀
감사합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롬멜의
의견대로 해안에 기갑사단들을
배치했어도 미영연합군의 진격이
1년정도 늦어지는 것이지, 결국은
동서 양쪽에서 무너지는것은
당연수순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죠. 그것은 당연했습니다. 그걸 알았기에 롬멜은 전쟁 승리가 목적이 아니라 협상이 목적이었습니다. 협상을 위해서는 연합군이 순순히 오케이 하진 않을테니 타격을 입히자는 논리였죠. 타격이 크면 민주주의 국가 특성 상 협상이 더 쉬울 것으로 봤던 것입니다. 롬멜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시작되자마자 절대 승리할 수 없다고 봤습니다. (ruclips.net/video/6rJi7M6HtJ0/видео.html) "롬멜은 정말로 히틀러를 없애려고 했을까?" 란 영상입니다. 이 영상에도 나오지만 롬멜은 1944년 6월 15일부터 히틀러 면전에서 정치적 협상을 하자고 요구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연합군에게만 항복하고 소련군하고는 싸우겠다고 연합군에게 협상하려고 했습니다. 더 나아가 연합군이 거절하면 베를린까지 그냥 개방하려고 했습니다. 이건 사료에 증거로 나오는 사실입니다. 결국 항복하자는 말인데 히틀러 앞에서 이런 소리를 하고도 죽지 않은 사람은 롬멜 밖엔 없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장군들 중에 유일한 성인군자 롬멜
당시 독일의 기갑부대는 세계 최강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롬멜의 말대로 해안가에 기갑부대를 배치했으면 기갑부대 특성상 은엄폐가 어려워 상륙 직전이나 직후의 연합군의 대규모 함포사격과 공중공습에 싸워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전멸했을거라 봅니다
얕게 분산 배치해버리면 그정도 규모와 화력으로 연합군을 바다로 밀어낼거라 생각이 들지 않고요
먼저 독일의 기갑부대 배치논쟁 (ruclips.net/video/OQaoX_oa0p0/видео.html) 이 컨텐츠를 보시면 많은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말씀하신 기갑부대 특성상 은엄폐가 어려워 상륙 직전이나 직후의 연합군의 대규모 함포사격과 공중공습에 싸워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전멸했을거라 봅니다, 이 말은 이론적으로 맞습니다.
그런데 실제 역사를 보면 연합군은 이상하게도 상륙 첫날에 해안가를 제대로 포격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마하에서 그렇게 저항이 컸던 것입니다.
두번째 말씀하신 얕게 분산 배치해버리면 그정도 규모와 화력으로 연합군을 바다로 밀어낼거라 생각이 들지 않고요. 이 말은 저도 동의합니다. 롬멜도 그걸 알았습니다.
그런데 롬멜의 목적은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최대한 연합군에게 피해를 많이 줘서 강화협상을 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따라서 막아내지 못하더라도 인적 피해를 엄청나게 줄 수 있었습니다. 상륙 첫날에 연합군 기갑장비는 제대로 상륙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따라서 독일 탱크가 단 몇대라도 있었으면
연합군은 엄청나게 죽었을 것입니다.
@@만물상자TV전쟁의신 방어시설을 베톤의 집인지 뭔지 콘크리트 구조물이었지만 지붕도 안덮은 것도 있었고 롬멜이 노르망디와 캉 중간을 상륙지점으로 예상하고 있어서 어차피 못막았겠지만 인명피해가 만단위에서 몇만 단위로 올라갔겠죠.스핏파이어 출격범위안에 노르망디까지 포함되어 있어서 이곳을 의심한 자들도 있었다고는 하는데 폭풍치는데 인공부두 2개 만들어서 상륙시도 할줄은 아무도 예상못해서 결국 성공한 거지요.어차피 노르망디 상륙이 실패하면 핵으로 주요 거점을 폭격하고 다시 상륙할 계획도 있었으니 차라리 상륙작전 성공한게 프랑스와 독일 입장에서 더 나았을지도요.올림픽 작전처럼 유보트 항구와 주요 거점을 핵투발 하면 최초의 핵투발은 일본이 아니라 프랑스 해안이었을 테니까요.그냥 처칠의견대로 발칸반도에 상륙해서 제2전선 형성하는게 더 편했을 텐데 프랑스에 상륙해서 결국 유럽의 반은 공산화된 것 같습니다.
@@cz1310 핵은 1년도 더 지난 1945년 7월에야 만들어 집니다. 노르망디 상륙은 1944년 6월 이고요
@@cz1310 @
1944년 2월 총통은 리투아니아에서 한대의 손실 없이 러시아 기갑부대를 완벽하게 격파한 그로스 도이칠란트 의 본 만토이팰 장군을 투입해서 패튼 장군과 맞짱을 뜨게 했습니다. 제대로된 전차부대(판터를 제일 선호 했음)가 도착 하기전에 독촉을 받고 섣불리 공격을 했다가 패퇴 했습니다. 이후, 발지 전투에서도 제5 기갑군을 받고 선두에서 공격을 했다가 실패를 했습니다.
6:00 저그전 만 해본 프로토스 유저들
적절한 비유시네요. 저그: 소련군 / 프로토스 : 독일군
@@만물상자TV전쟁의신 소련: 저그, 연합군: 테란 나치독일: 프로토스. 이거 아님?
저그는 확실히 소련군 느낌이 확 다가왔는데 듣고보니 프로토스가 독일군에게 가장 부합하네요.
@@만물상자TV전쟁의신 이제 보니까 독소전은 에일리언 vs 프레데터 였내요
캐리어에 털린 테란 전차부대 아님? ㅎㅎ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영국군 이 식수가 없어서 군병원 부상자 환자들이 다죽을 위기에 독일 롬멜장군 이 식수를 공급해준 사례가 있던데 서프라이즈 에서 본건데
채널의 컨텐츠에서 그 부분을 놓쳤을리가 없습니다.
그 내용 뿐만 아니라 롬멜의 마지막에 얽힌 숨겨진 이야기도 모두 다뤘습니다.
ruclips.net/video/vKoAncIuMbc/видео.html 롬멜 완전 정복 1부
ruclips.net/video/dF52u-pwFMg/видео.html 롬멜 완전 정복 2부
말씀하신 롬멜의 그 일화는 전쟁 중에 롬멜과 롬멜의 부인이 서로 교환했던 편지에 있던 내용입니다.
따라서 거짓으로 꾸며낼 수가 없는 일입니다.
하긴 영국군 측 기록에도 몽고메리가 롬멜로부터 식수를 받은 답례로
독일군에게 와인을 선물했다고 하니 거짓일리도 없죠.
저도 그동안 영미연합군은 소련보다 약하다 라고 생각했는데 역사는 정 반대였군요
말씀하신 것과 관련해서 이 영상을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의외로 최고 에이스와 에이스들이 맞붙었던 것이 서부전선입니다. 대부분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팔레즈 전투 예고편 (ruclips.net/video/p4ZLY_LhChg/видео.html)
예고편이라 짧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본편도 영상 마지막에 안내되어 있습니다.
맞네 정작 가장 최근까지 북아프리카에서 영미연합군이랑 싸웟던게 롬멜이엿는데 룬트슈테트,구데리안등등 최근까지 동부전선에만 있었으니;; 12:48 러우전쟁으로 다시 나토 러시아 대립하는거보면;; 2차대전이 나랑 상관없는 엄청 옛날같은데 이렇게보면 7-80년 전이라 뭔가 와닿습니다
2차대전은 지금 한반도에 사는 모든 사람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른 채 늘 불안하게 사는
한반도 남쪽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운명이 2차대전 때 정해졌습니다.
아래의 컨텐츠를 연관 컨텐츠로 강추합니다.
ruclips.net/video/3HD3YR5VW4o/видео.html (한반도의 분단을 가져온 루즈벨트의 대실수)
독일군 전사중 한명 더 있습니다. SS Standartenfuhrer 요킴 파이퍼 입니다. 1943년 하리코프 전투를 성공 시키고, (마이클 비트만) 과 함께 쿠르트스 전투에 참가 했습니다. 이후, 1944년 7월 중순 노르망디에도 투입 됐습니다. 1SS 기갑 사단 라이프스탄다르테 SS 아돌프 히틀러 (LSSAH)를 지휘 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요하힘 파이퍼도 서부전선으로 왔죠. 그러고보면 1944년 서부전선이 정말 특별하지 않습니까? SS에서 가장 유명했던 사람들이 시점에서 한창 급박했던 동부전선이 아니라 전부 서부전선으로 왔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만물상자TV전쟁의신 총통은 1944년 서부전선을 우선 순위로 정했습니다. 동부전선은 힘겹지만 어차피 장기전을 예상 했습니다. 민주주의 와 언론 의 자유가 있는 미국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면 여론에 밀려 미국이 휴전, 태평양 전쟁 포커스, 중립국 선언을 할거라고 판단 했습니다. 그래서 독일군의 피해 와 승리 보다 미군의 피해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 결과가 절망적인 아르덴느 공세 입니다.
상세 해설 감사 합니다.
설명하실때 목소리 크기 오르락 내리락 하는데 밤에 듣다 깜짝 깜짝 놀라네요 톤 크기를 어느정도 고정 해주셨으면 합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최근 컨텐츠에서는 그 부분을 감안하여 제작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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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 목소리가 유튜버 진xx하고 비슷하신거 같은데 혹시 동일인물인지 알 수 있나요???
진XX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은 아닙니다.
군사전략도 경험에 지나치게 의존하는것보다. 선견지명이 있어야한다는 것이군요.
다음 영상은 구데리안입니다. 시리즈로 나갈 것 같습니다. 1부는 세계최초 기갑사단의 창설자 구데리안 2부는 전격전 창안자의 전설적인 승리 3부: 히틀러와의 전략 논쟁.. 순이 될 것 같습니다.
1944년의 서부전선의 독일육군은 참 안습....대부분의 정예사단은 소련군을 감당하느라 동부전선에 있고...어마무시한 영미공군은 차라리 얘기하지 않더라도..
강력한 연합군 함대에 타격을 가해야 할 독일의 U보트함대는 만신창이가 돼 거의 도움을 못줬고...그럼에도 팔레즈회전까지 3개월을 버터낸 그들을 칭찬합니다.
갈대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2차대전 주요전투 굿우드 작전을 한번 보시지요. 정말로 이것은 인간승리 그 자체였습니다. 이런 생각 안해보셨습니까? 독일은 그 허접한 1~4호전차를 갖고도 빛나는 승리를 거뒀는데 그 강력한 티거와 판터를 가졌을 때 왜 그런 승리를 거두지 못했는지 말입니다. (ruclips.net/video/4WsiZ_baXEg/видео.html) 굿우드 작전 (ruclips.net/video/4dqtLpmggFE/видео.html) 팔레즈 전투를 보시면 그 답을 아실 수 있습니다.
@@만물상자TV전쟁의신 암만 잘 정비된, 훈련된 기갑사단도 적절한 공중지원없이는 결국은 무력해질것입니다. 그나저나 1944년 서부전역에 만쉬타인만
출전을 못했군요. 그가 그 전역을 맡았다고 해도 결과를 바꾸지는 못했겠지만....만물상자님은 되니즈장군한테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은 것 같습니다.^^
@@갈대-z1l 아! 1944년이 아닌 1940년 5월, 서부유럽 침공전에 참여를 못했습니다. 그 유명한 낫질작전. 그 작전을 창안한 사람이었지만 지방 보병군단장으로 좌천당한 상태였으니까요. 히틀러가 우연히 그 작전을 듣고 채택하지 않았습니까? 만슈타인 1부( ruclips.net/video/tcdRlJ2PgHU/видео.html)에서 자세히 다뤘었습니다. 되니츠 장군! 당연히 관심이 많습니다. 되니츠를 다루기 위해서는 자세한 사료 조사가 먼저 선행되야겠죠.
저때부터라도 서부에 병력 몰빵하고 동부병력은 바그라티온 전에 독일국경으로 후퇴 했더라면 ..
근데 노르망디때 서부전선에 독일군이 몇명정도 있었나요? 50만?
50만이 아니라 무려 150만 가까이 있었습니다. 롬멜이 맡은 B집단군만 해도 100만명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독일은 결정적으로 정보력에서 연합군에게 한참 뒤졌기 때문에 어디로 올지를 정확히 파악하질 못했습니다. 시기하고 작전명이 오버로드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제일 중요한 상륙장소를 몰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많은 병력이 분산되어 있었습니다. (ruclips.net/video/OQaoX_oa0p0/видео.html) 이 영상 노르망디 상륙을 막을 기갑부대 배치문제라는 컨텐츠와 롬멜과 패튼의 대결(ruclips.net/video/gmJkDp5L_E0/видео.html)이라는 컨텐츠를 함께 보시면 완벽히 서부전선 상황이 정리될 것입니다.
40대 징집병에 훈련도도 낮아서 전투력은 그닥...히틀러 유겐트까지 있어서...
@@cz1310 듣기로는 10대나 5~60대도 있었답니다.그야말로 총력전!
참 롬멜의 혜안이 탁월합니다. 탱크와 장갑차를 동원한 기동전이란 지상전에 국한했을 때 유용하지만 공중을 제합하지 못했을 땐 항공기에 그냥 희생물입니다. 이에 대해 탱크는 항공기에 대한 방어와 공격수단이 거의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롬멜은 이미 아프리카에서 미영군과 이런 경험을 했기에 그런 제한이 가능했겠지요. 결국 현대전은 공중우세가 결정적입니다.
우리의 경우를 대입한다면 KF-21의 본격적 배치와 제7기동군의 조합은 가장 이상적인 구상입니다. 결국 최종적인 점령은 기갑군과 기계화군의 몫이니까요.
유명하다는 타 방송에 진행되는 내용은 그냥 추상적이라 그건 나도 아는데 군에서 실병력을 지휘해 본 없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무엇을, 왜 했단 말인가?
우월한 인원과 장비라도 전략의 차이는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 본 방송은 제2차 세계대전의 실상을 파악하게 한 최고의 군사 체널이라고 칭찬을 하고 싶네요. 귀하의 견해와 노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감사합니다. 모두 사료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1944년 초에 B집단군 사령관이 된 롬멜. 그 당시 서부전선의 지휘관의 면면을 쭉 볼것 같으면 하나같이 독일이 잘 나가던 시기에
동부전선에서 싸워봤던 인물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독일군 장군들 중에서 오로지 롬멜만이 연합군의 제공권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짜피 연합군이 상륙하면 연합군 항공기가 하늘을 온통 뒤덮을 것이라고 예상했고 독일군은 낮엔 기동도 못할 것을 예상했습니다.
그럴 바엔 차라리 해안에 기갑부대를 붙여놨다가 바로 연합군을 쓸어버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독일군 장교들 심지어 히틀러도 그것을 실감하지 못했고 상륙이 벌어지고 나서야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현대전은 공중우세와 기동군의 조합이라는 생각도 어쩌면 독일식 기동전과 마찬가지로 과거의 것일 수 있습니다. 상황은 항상 변화하는 것이니 정해진 정답은 없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상황과 피아의 능력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융통성 있고 유연하게 대비하는 것이 승리의 기본이 아닐까요?
근데 기갑부대 이동 못한건 부대 자휘권을 자기가 직접 쥐고 안보내준 히틀러가 문제지 슈페벤부르크가 문제는 아니지 않나요?
실제 노르망디 전역중 공군력에 의한 기갑부대 손실은 6퍼센트 아래로 알고 있습니다.
히틀러가 문제지 슈베펜부르크가 문제가 아니라고 하셨는데 거꾸로 되었습니다. 장군들 간의 의견이 분분하고 합치가 안되니까 히틀러가 나서게 된 것입니다. (ruclips.net/video/OQaoX_oa0p0/видео.html) 를 같이 보시면 의문이 풀리실 겁니다. 롬멜 vs 다른 장군들 간에 이 문제로 논쟁이 치열하니까 히틀러가 나선 것입니다. 히틀러는 어느쪽에도 힘을 실어주지 않고 기갑부대를 갈갈이 찢어서 나눠놨죠. 양측의 의견을 다 만족시킨 것입니다. 해변 근처에도 찔금, 기동방어전을 하기 위해 파리 근교 후방에도 찔끔. 어느쪽에도 힘을 실어주지 않은 것이죠. 결국 독일군은 통일된 전략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이도저도 아닌 전략으로 연합군을 맞게 됩니다.
@@만물상자TV전쟁의신 튀니지,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롬멜의 도를 넘는 월권행위가 방어전략의 혼선을 가져왔고 결국 어쩡쩡한 히틀러의 절충안이 채택되었지요. 이탈리아에선 카리스마 있는 케세링 총사령관이 히틀러에게 어필해 서부전선으로 내쫓아내었지만 선비인 룬트슈테트원수는 그렇지못했습니다.
전선이 무려 세개였나요?서부전선.그리고동부전선.그리고발칸반도쪽의남부전선.ㅜㅜ
독일군부가 2차대전 직전에 그토록 양면전쟁을 두려워했죠. 그래서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독소불가침 조약도 맺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시작되면서 양면 전쟁이 아니라 3면전쟁이 됩니다. 첫번째 북프랑스 서부전선, 두번째 이탈리아 남부전선 , 세번째는 소련과의 동부전선 이렇게 삼면 전쟁이 됩니다. 이런 이유때문에 롬멜이 그렇게도 고민을 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롬멜은 연합군을 막아보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6월 26일에 히틀러에게 완전히 마음을 접게 됩니다. (ruclips.net/video/6rJi7M6HtJ0/видео.html) 롬멜은 정말로 히틀러를 죽이려고 했을까? 그 진실을 알아봅니다란 영상에서 이 주제를 자세하게 다뤘습니다.
독일이 양면전쟁의 큰 부담을 가진 건 이미 1871년 통독제국시절부터 늘 있었던거니까요
롬멜생각대로 2-3개 완편 기갑사단을 노르망디일대에 전개했다면...수천대의 연합군 "야보"가 그 일대 하늘을 뒤덮었을 것이고 동시에 연합군 함대에서 엄청난 화력이 독일기갑사단을
강타했을 것이다. 독일기갑이 그 곳에서 전멸했다면 ...독일이 아르덴느에서 마지막 회심의 일격을 가할 수 있도록 시간을 많이 벌어준 팔레즈 회전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해안 가까이에 붙여놨다면 예를 들어 오마하 비치. 연합군 공군이 전술폭격을 하기가 그렇게 녹녹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너무 독일군과 연합군간의 거리가 가까웠으니까요.
@@만물상자TV전쟁의신 연합군 수뇌는 당연히 영미공군과 연합군 함대가 해안에 전개된 독일기갑을 대부분 정리한 후에 상륙부대를 해변에 내려 놓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럴 수 있는 역량이 있었고요.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상륙군을 독일기갑 전면에 두게 되면...연합군이 비록 이긴다 해도 지나친 피해를 입게 됩니다.
보통 무능한 장군들이라면 결과를 똑부러지게 봐도 자신이 맞다고 우길겁니다 슈베펜베르크는 자신에 작전이 틀려다는것을 롬멜한테 ㅇㅈ한거보면 괜히 능력있는 장군이 아니긴합니다 능력있는 장군은 능력있는 장군이 ㅇㅈ할수있습니다 비록 서방국에대한 경험은 없지만 한번에 실수로 바로 알아채리고 ㅇㅈ하는거보면 사실 슈배펜베르크도 보통 실력이 아닌거죠 하지만 서방국가들에 가장잘아는것은 롬멜이죠 결국엔 경험이 없다는 전제하에서 능력이 있어도 단점이있는 장군이있는 장군이었죠 이건 롬멜 구데리안 만슈타인 마찬가지죠 어느장군이든 장단점이 있기마련이죠 하지만 그런 단점을 ㅇㅈ하는 장군이야말로 이열악한 전선에서 앞을보고 나아갈수있습니다 이런 앞을보고 나아가는 장군들이 명장이 됄수있는 기회가 얼마든지있죠
1944년 6월 이전 즉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전만해도
서부유럽은 그나마 평온했습니다. 프랑스는 독일군에게 휴식같은 낙원이었습니다.
그나마 이탈리아 전선이 있긴 했지만 이탈리아 전선에서도 연합군의 공군력을 제대로 맛본 전선은 아니었습니다.
롬멜을 빼고는 대부분은 독소전만 경험했던 독일군 장성들은 허접하고 만만한 소련공군만을 상대해봤기에
롬멜의 말을 체감하지 못했던 것은 이해가 되는 대목입니다.
@@만물상자TV전쟁의신롬멜 장군이 사람치고 장군치고 성인군자 였는지?
@@옛날고유의개 채널에 롬멜관련 컨텐츠가 무척 많습니다.
어느 채널에서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다양한 주제의 롬멜관련 컨텐츠입니다.
이것들을 보셔도 아시겠지만 롬멜은 나치독일의 장군들 중에서 가장 인간적이고 나치답지 않은 장군이었습니다.
때문에 롬멜 1부 (ruclips.net/video/vKoAncIuMbc/видео.html) 제목을 "착한 독일군이라 불린 독일 장군"이라고 지었습니다.
실제로도 연합국에서는 그를 그렇게 불렀습니다.
저도 대장 말고 소장 포함 대령 독일군 정보를 알고 싶은데 어디서 알수 있을까요? 2차대전 독일군 대령~소장까지 인물을 알고 싶습니다.
원수나 장군급은 몰라도 대령~소장까지 나온 별도 사이트같은 것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본 채널 2차대전 인물열전(ruclips.net/p/PLZmdkuHOpnlFcKT5XIZZplE3BK1UeUIXq) 에서 그나마 아쉬움을 달래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전혀 모르셨던 인물들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펼쳐지니까요.
@@만물상자TV전쟁의신 감사합니다. 구독하였습니다.
구데리안도 처음에는 혁신적인 사상으로 데뷔했는데 시대의 변화를 못 읽는 실수를 했내요.
이때가 1944년이었습니다. 무려 5년전 폴란드 전부터 세계최초로 집단화된 기갑부대를 실전에서 운용한 최초 지휘관이 구데리안이었습니다. 그 전술로 승리만 거듭했던 사람이 구데리안입니다. 1941년 말 모스크바 점령에 실패하자 히틀러에게 후퇴를 주장했다가 해임당했죠. 그로부터 무려 3년이 지났습니다. 그 시간동안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연합군에게는 집단화된 기갑부대가 먹이감에 지나지 않게 된 것입니다. 항공력이 강력하지 않은 소련군에게 하늘이 완전히 점령당해 유린당한 경험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구데리안은 실제로 미군과는 싸워보지도 않았죠.
@@만물상자TV전쟁의신 근데 제가 히틀러라도 구데리안이 주장하면 솔깃하긴 할듯 해요. ㅋㅋ 굴려본 병력수하고 전과 따지면 구데리안이 한참위라고 봐서
롬멜에게 한가지 약점이 있다면, 전선을 이탈했다는 겁니다. 아내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전선을 이탈하다니.. 아무리 유능한 부하들이 있어도, 결정적인 순간에 지휘관이 부재하면, 그건 지휘관으로서의 임무를 소홀히 한 겁니다. 롬멜이 아내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그리고 적이 도저히 상륙하지 못할 것 같은 기상이 지속될 것임을 확신하고) 잠시 전선을 이탈해도 괜찮을 것이라는 안일함은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하는 데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습니다.
영국해협은 파고가 높고, 풍랑이 심해서 대규모 상륙작전을 하기 어려운 천혜의 장벽 역할을 합니다(영국에서 프랑스 방향으로 상륙하는 것도, 그 반대방향의 상륙도). 게다가 기상까지 안 좋으니, 당시 독일군이 방심할만 했습니다. 반면에, 연합군은 성난 파도와 악천후를 돌파하여 상륙하려는 입장에서 절대로 방심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지속되는 악천후를 보고 상륙작전이 실패할 것을 두려워하고, 긴장했으며, 게다가 이대로 가만 있다가는 수많은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절대로 상륙을 못할게 될 정도로 파고와 기상 조건이 악화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섣불리 결정을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이러한 어려운 여건에서도 롬멜처럼 잠시 전선을 이탈하는 연합군 장교는 없었습니다(다만, D-Day와 밀접한 보안 누설을 하여 대령으로 강등된 후 미국 본토로 강제 복귀되어 불명예 전역한 공군사령관 헨리 장군과 같은 사례는 있었습니다).
실제로 노르망디 상륙작전 예정일은 6월 5일이었는데, 당일 기상 상태가 도저히 상륙작전을 실행하지 못할 정도였으므로, 상륙작전은 취소되고 잠정 연기되었습니다. 이에 연합군 내부에서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도대체 언제 실행될지 이견이 많았지만, 누구도 적합한 날짜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6월 5일 밤에 역사적인 결단이 이루어졌습니다. 바로 그 다음 날인 6월 6일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강행이 결정된 겁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해당 결정은 아이젠하워 원수의 전격적인 결단에 의한 것이며, 놀라운 사실은 당시 아이젠하워 원수는 휘하 기상 장교의 희미하지만 희망적인 조언을 들었다는 겁니다. 즉 기상 장교가 말하기를 '각하, 내일의 기상은 오늘보다 안 좋을 것이고, 그 이후로는 파고가 더욱 높아져서, 우리 상륙정들이 독일군이 설치한 기뢰를 발견하지 못하고, 폭사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희망을 말씀드리면, 6월 6일의 특정 시간대에 상륙하기 좋은 기상이 일시적으로 지속될 것 같습니다만, 그게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릅니다. 2시간 일수도 있고, 1시간 일수도 있습니다.'
이에 아이젠하워 원수는 그 희망적인 시간대를 믿고, 6월 6일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결정합니다(심지어 희망적이지 않더라도, 상륙작전이 지연되면 '빠드깔레와 조지 패튼'으로서 독일군을 속인 양동작전 계획이 간파되므로, 노르망디 상륙을 강행해야 했습니다).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얼마나 어려운 계획이었냐면, 무려 400만 명 규모의 연합군 총사령관인 아이젠하워 원수조차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실패시 전 세계에 대한 보도용으로서 '우리는 노르망디에 전략적인 상륙거점을 확보하지 못했으며, 우세를 점하지 못한 연합군은 유럽 전선으로부터 후퇴한다.'라는 내용의 쪽지까지 작성 후 보관할 정도였습니다(아이젠하워 원수는 해당 쪽지를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후 몇일 후에 거리낌없이 부관에게 줍니다).
요약하면, 연합군과 독일군의 분수령이 된 그 찰나의 시간대(1~2시간)에서 롬멜은 전선 이탈을 하였고, 그 라이벌 격인 패튼은 전선을 이탈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는 결국 연합군의 군세가 독일군을 압박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한편, 연합군 내부에서 조차 악화되는 기상 조건으로 상륙 여부가 반신반의했는데도, 에리히 폰 마르크스 장군은 어떠한 논리로 6월 6일 노르망디에 연합군의 상륙을 예상했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마치 아이젠하워 원수의 생각을 읽은 것 같이..
(ruclips.net/video/OQaoX_oa0p0/видео.html) 서부전선 기갑부대 배치 논쟁이란 영상을 같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테토는 미쿠 친구님이 하신 분석을 그대로 결론을 내렸으니까요. 17:00에서 말입니다.
@@만물상자TV전쟁의신 방금 말씀하신 영상을 보았습니다. 핵심을 제대로 지적해주셨습니다. 그런데도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관련하여 아직도 이례적인 비밀(?)이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는 당시 기상이 계속 악화되었는데도 단 몇 시간 동안만 연합군에게 노르망디에 상륙할 좋은 기회를 주었던 기상 비밀(?)이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시간, 상륙지점을 제대로 예측한 에리히 폰 마르크스 장군의 예측 능력입니다. 구체적으로 그 예측 능력의 근거가 연합군의 양동 작전의 의도를 간파하면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자체 비밀 정보망을 운영하고 있던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단순히 전쟁 감각에 의한 것인지, 정말로 궁금합니다.
2차 대전 기간을 고려하면, 6월 6일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아주 작은 부분이긴 합니다. 연합군의 입장에서는 상륙 작전에 실패해도, 다른 방식으로 독일을 공력할 역량이 남아 있었으며, 심지어 전쟁 초반인 1942년 7월 경에, 바로 프랑스로 상륙하려는 야심찬 쇠메작전(Sledgehammer)이 계획되었습니다. 해당 작전은 당시 미 육군참모총장 마셜과 아이젠하워 중장 및 미국 고위 군사기획관들이 적극적으로 주장했으나, 실행 직전 단계에서 처칠과 영국 고위 군지휘관들의 반대(우선은 북아프리카에서 연합군이 공세를 하자는 전략)로 무산되었습니다. 과연 당시에 쇠메작전이 실행되면 성공했을까? 연합군의 희생은 어느 정도였을까? 등에 대하여 '만약'의 상황을 놓고 군사 전문가 간 다양한 예측 및 논쟁이 2차 대전 이후로도 이어졌습니다.
저는 요즈음 전쟁의 전체 방향과 대전략보다는, 소규모 전투라도 나중에 밝혀지는 '이례적 요인'에 관심이 가고 있으며, 이러한 맥락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모든 이례적 요인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놈의 설마....하는 생각이 사람 잡은 경우지요.
'Don't worry about it. (돈트 워리 어바웃 잇).
이런 생각을 하는 장군은 반드시 전쟁에서 패하는 법.........
그냥 가볍게 볼만한 내용이라는 생각 밖에 안 듭니다.. 댓글 적어놓으신 거 봤는데 장군들 의견 합치가 왜 안되었겠습니까? 상륙지점을 정확히 예측을 못했으니 합치가 안되었던 거지요. 슈베펜부르크가 예비대를 뒤로 빼놓은 결정적인 이유이구요 롬멜 말대로 했으면 상륙작전을 막을 수 있었을까요? 저는 아니요라고 답하겠습니다.
동의합니다
사실 롬멜이 불리한 부분이 있었다면
그는 독일 군부 내에서 아웃사이더 였던 것도 요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프로이센 군인귀족들 (융커) 출신들이 주축이 된 독일 군부 내에서는
롬멜은
평민인데다가 참모교육도 받지 않고
다만 히틀러가 초창기부터 총애해서 장군 달고 원수 달고 그런 낙하산 인사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고 합니다.
사실
롬멜이 기갑사단을 지휘하기 전 맡은 직책이 총통경호대장 이었으니......
게다가
지금 세계 국가지도자들이 가끔 보여주는 오픈카 퍼레이드를
히틀러가 처음 하게 된 것인데
그것을 알려준 사람이 롬멜이었다고......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저 당시 독일 군부는 롬멜을 히틀러의 서커스 광대 라는 식으로 뒤에서 비웃었다고 합니다.
@@daewookkim4795 그런면이 분명 있다고 봅니다.
아프리카 전선도 최고 사령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돌출행동으로 전선을 확대... 선전거리가 필요했던 히틀러의 지원을 받게되고, 동부전선으로갈 물자와 병력이 아프리카로...
그러나 지중해를 건너다가 절반이상 써보지도 못하고 격추,격침 손실.
이걸 막겠다고 되니츠 제독의 반대에도 불구 U-보트 투입하여 전량손실... 소련으로 가는 랜드리스 물자 차단에 마이너스.
대전략으로 보면 히틀러의 비호하에 이루어진 북아프리카 전선의 약진은 북아프리카에서의 성공 여부에 관계없이 결과적으론 트롤짓이 되버렸죠.
거기에 더해서 미국에서 건너온 신삥 미군이 패튼의 지휘아래 강군으로 거듭난 것도 북아프리카 전선의 결과물입니다.
롬멜 만슈타인 구데리안 발터 모델같은 명장를 두고도 전쟁에 패한 히틀러
독일군이 모든 것을 세계최초로 했던 (예를 들면 전격전 등 )최고의 명장들을 갖고도 끝내 패배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연합군은 임무형 지휘체계 (즉 목표만 제시하고 세부적인 것은 알아서 하는 명령체계) 를 했지만
독일군은 최고의 장군들이 있었음에도 임무형 지휘체계가 완전히 무너진 상태에서 싸웠기 때문입니다.
히틀러가 처칠과 루즈벨트의 리더십을 배웠다면 연합군 물량을 극복했을까? | 2차대전 논쟁점 (ruclips.net/video/j48aG0yXRq8/видео.html) 를 보시면 더욱 명확히 알게 되실 것입니다.
잘보구있습니다.
파워게임한거네...융커와 평민차이...
1960년대에 개봉된 '생과사'라는 2차 대전 영화로써 1944년의 독일군 상황을 잘 드러내는 영화인대, 미육군 항공대 소속 P-47십여기의 기총소사에 어느 프랑스 시골의 오솔길위에서 행군중인 수백명의 독일보병부대대열이 공습으로 지리멸렬 당하는 장면은 요즘영화에 없는 명장면이자 2차 대전 후반부의 다무너져가는 독일군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1944년의 뜨거운 여름 즉 1944년 6월~8월 까지의 서부전선 전사에 대해 관심이 무척 많습니다. 본 영상에 표현된 것은 하나도 과장이 아니라 100%의 사실입니다. 애니그마를 어느정도로 신뢰했길래 연합군에게 다 뚫려버린 것을 그렇게 몰랐는지 참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운데요. 그토록 롬멜앞에서 자신만만하게 기갑부대를 후방에 놨다가 연합군이 상륙하면 공격하자던 슈베펜베르크이 멘붕에 처할 정도로 연합군 항공력은 엄청났습니다. 연합군 공군이 슈베펜베르크의 기갑집단 본부를 불바다로 만든 것도 모두 애니그마 암호 해독 덕분이었습니다.
@@만물상자TV전쟁의신 정예기갑사단을 곧 서부전선의 최전방이될 해안선 가까이 분산 베치시키자는 롬멜의 의견을 따랐으면, 결과가 좀더 나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pedrogim6952 그래서 제가 이전에 기갑부대 배치 논쟁 누가 맞았을까? (ruclips.net/video/OQaoX_oa0p0/видео.html) 이 영상에서 이미 결론을 확실히 냈습니다. 롬멜 말대로 했다면 알보병 연합군은 완전히 아작이 났을 거라고 말입니다. 기갑부대를 뒤로 빼자는 이유 중 하나가 해군함포 때문이었는데 당시에 연합군은 해군 함포사격도 제대로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마하 비치에서 독일의 허접한 동방부대에게도 그렇게 피해가 컸던 겁니다. 그때 기갑부대가 있었다면 어찌되었겠습니까? 한번 저 영상을 다시 보신다면 더 확실히 느끼시게 될 것입니다.
음 그 백작 합리적이네요.자신의 잘못도 인정하고 나름대로 뛰어난 인물이었군요.제공권만 대등했으면 기동전이 통했을 텐데 ㅎㅎㅎ.
독일군 장군 중에서 노르망디 상륙작전 (1944년 6월) 이전에 연합군 공군력의 뜨거운 맛을 제대로 봤던 사람은 롬멜이 거의 유일했습니다.
슈베펜부르크도 주로 동부전선에서 허접한 소련공군만 봐왔기 때문에 연합군 공군력에 대해서는 잘 몰랐습니다.
이 영상과 관련되어 연합군 상륙을 막아라! 독일기갑부대 배치 논쟁 (ruclips.net/video/OQaoX_oa0p0/видео.html) 을 함께 보시면 좋습니다!
전쟁의 패러다임은 계속 바뀝니다. 고급 지휘관이 이걸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를 보여주는 케이스.
드론과 대기갑 집속탄, 그리고 ECM이 추가된 21세기 현재의 전장환경을 대한민국 군은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지 솔직히 의심스럽습니다.
기갑 집중 운용을 통한 기동전은 단 몇발의 대기갑 집속탄만으로도 돈좌된다는 전훈이 이미 동부 우크라이나에서 몇년전 현실화 되었습니다. 기동군단에 화력 몰빵하는 것은 멋있어 보이지만... 글쎄요...
이제 현대의 전쟁은 사람이 아닌 AI가 조종하는 무인병기가 주력이 될 겁니다.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드론이 엄청난 활약을 하고 있으니.......
전쟁 패러다임은 계속해서 변한다! 명언을 해주셨네요. 2차세계대전 초반에는 구데리안의 집중화된 탱크 부대는 한마디로 넘사벽이었습니다. 소련군을 대상으로는 대전 말까지도 잘 먹혔죠. 그렇지만 1944년 영미 연합군에게는 그냥 먹이감으로 전락했습니다. 롬멜은 이미 북아프리카에서 선행학습을 했기에 미리 알았던 것 뿐입니다.
@@만물상자TV전쟁의신 21세기 초반 돈바스 전장에서 집속탄 몇방에 기계화 여단이 글자 그대로 증발했습니다.
직접교전은 해보지도 못하고...
탐지자산과 장거리 타격 대기갑 집속탄... 무시무시한 조합이고, 부칸의 전술 신무기 개발 역시 장거리유도 다연장에 촛점이 맞춰진지 오래입니다.
기동7군단... 멋있긴 한데 글쎄요. 고가치 자산인 기갑의 공세적 운영은 제공권에 이어 대기갑 집속탄 세력까지 제거되어야 가능한게 아닐까 합니다.
도수 운반 화기의 발달과 헬기세력의 효용 극대화를 고려한다면, 산악 침투에 특화된 보병세력을 집중 육성하는게 하나의 대안이 아닐까 하네요.
인력과 예산이 차량화 기계화에 너무 편중 되는게 아닌지...
일리있는 뷴석입니다. 전술이란 늘 변화무쌍해야겠죠
지피지기 백전불태..
3 army vs 3000 division
독일공군은 놀고있었나...
독일공군은 뜰 엄두를 못냈다고 합니다. 노르망디 해안부터 내륙 100km의 하늘은 모두 연합군이 차지했습니다. 물론 다른 지역은 독일공군의 차지였죠. 단지 노르망디 해안부터 100킬로 이내는 연합군 공군이 제공권을 장악한 상황이었습니다.
상륙을 허락하고 그 다음 내륙에서 기갑부대로 막는 건 저 당시 독일로선 무모한듯 후보지인 칼레와 노르망디 해안가에 기뢰와 지뢰를 도배하고 대공포와 참호를 2중 3중 도배하고 바로 뒤쪽에 기갑전력을 배치해서 치고 빠지면서 갈리폴리처럼 상륙지점에서 승부를 내고 아작을 내야함 ㅎㅎ
롬멜의 전략이 바로 그거였습니다! 연합군이 어디로 올지는 모르지만 기갑부대를 해안근처에 끌어다 놓는다면 연합군이 상륙했을 때 최대의 타격을 가할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동료장군들이 모두 다 반대했습니다. 이해를 못했죠. 더구나 상륙 당일날은 연합군 해군 함포지원도 부실했기 때문에 한줌의 기갑부대라도 있었다면 연합군은 몇배의 피해를 보고도 상륙을 못할 뻔했습니다. 그럴법도 한 것이 1940년 프랑스 전역 대승리 이후 1941년 6월에 독소전이 시작되죠. 룬트슈테트, 구데리안, 슈베펜베르크, 클루게 모두가 동부전선에서 싸우게 됩니다. 롬멜만이 프랑스 전역 이후에도 계속해서 연합군과 싸워왔습니다. 누구보다도 연합군을 잘 알수 밖엔 없었습니다.
1차 대전 중 인 1915년 갈리폴리 전투의 참혹한 경험을 누구보다 잘아는 사람은 영국수상 처칠외 없을겁니다. 그걸 또 겪어보고싶을지
히틀러가 차~~암 ......
롬멜...자살한거 아닌가요?
롬멜은 자살한 것이 아니라 자살을 강요당했죠.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서 말입니다!
롬멜의 마지막을 세부적으로 알고 싶으시다면 롬멜의 모든것 2부를 (ruclips.net/video/dF52u-pwFMg/видео.html) 참고하세요~
권총 자살한거로 아는데...
아닙니다. 권총 자살이라뇨~ 롬멜의 모든것 2부를 (ruclips.net/video/dF52u-pwFMg/видео.html) 를 참조하세요.
부인과 아들과 마지막 이별을 했습니다. 히틀러가 그냥 죽어주면 너네 가족은 무사할 것이다. 라고 했기 때문이죠.
마치 영화 같은 상황인데요. 결국 롬멜은 가족때문에 죽게 된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user-mz3ho4cm8v 독약으로 자살당한것으로 알고 있어요.
독일 최고에 명장 1만슈타인 2롬멜
전사에 대해 깊이 알면 알수록
만슈타인은 정말로 틀린 말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만슈타인이 창안했던 낫질작전 또한 단순히 프랑스 점이 아니라
아예 연합군 전체를 포로로 잡고 전쟁을 끝낼 정도의 대승리를 거두는 것이
목표라는 것을 알게 된 후에 참으로 놀랄 수 밖엔 없었습니다.
채널에서 만슈타인의 그 낫질작전에 대해 무척 자세히 다룬 컨텐츠가 있습니다.
ruclips.net/video/lxB_hqPS8vE/видео.html (전설의 시작 만슈타인 1부)
롬멜이 마치 완벽한 군인처럼 묘사되고 있는데 롬멜에 대해서 너무 과대평가되었다는 기록도 보았었습니다.
롬멜의 단점이나 실수도 어느정도 언급해 주시면 좋을 듯 합니다...
좋은 의견 감사드립니다.
롬멜이 완벽한 군인처럼 묘사되었다고 느끼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도 롬멜에게 반대했던 슈베펜부르크 대장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시작된 후 직접 사과편지를 쓴 것도 역사적 사실입니다.
아마 롬멜의 실수라고 한다면 보급 문제 신경 안쓰고 닥치고 돌격했던 북아프리카 전역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에도 사실 이유가 있었습니다.
말씀주신 것은 후에 다뤄봐야 겠네요~
있는 사실 그대로 적었규만. 씹선비 납셧네. 없는 사실을 적음?
노르망디에서 롬멜에 실수라면 일기예보보고 아내생일 잔치해주러간거죠 이런중요한날에 생일잔치라니 이게 롬멜에 실책이고 슈베펜부루크는 동부전선에서에 전형적인 장군이자 프로이센에 전통인 기동포위섬멸을 주장하는 장군입니다 야크트판터도 공군보내면 고철덩아리가 됄텐데 영미공군상대로 기동전은 자살행위죠 소련군은 저그같은 느낌이라면 영미애들은 테란같은 느낌입니다 많은쥐와 적은고양이에 차이라고 봐야죠 독일군한테는 둘다 물량이지만 롬멜이 전략이 부족하고 과대평가됄만한 인물은 아님니다 하지만 영미연합군을 누구보다 잘알고있는 장군이라면 롬멜말고는 보기힘듬니다 구데리안조차도 항상기동전을 추구햇고 노르망에서 롬멜에 정적인방어를 추천으로 구데리안에 화딱지가 낫죠 슈베펜부르크는 동부전선걸맞는 전형적인 프로이센 전술느낌이지만 롬멜은 아님니다 말그대로 상황에맞게 전술을 쓰는 장군이죠 밀덕들이 롬멜과 모델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전형적인 허세충 귀족나부랭이가아닌 병사들이 환장하는 평민출신이기때문이죠 유명한 독일 장군들중 영미연합군과에 전투에서 여러번에 승리를 이끈 대표적인 장군이라면 전 롬멜과 모델을 뽑습니다 무엇보다 어쩔수없는게 역사상 독일은 영국과 전쟁을 여러번 해본 경험이없습니다 1차 2차말고는 영국과 제대로 싸워본적이없습니다 독일에 전술은 러시아나 프랑스같이 돌파력이 약한 물량에 정점을 둔군대에 강한전술이 특화적이죠(나폴레옹시절빼고) 하지만 부대 하나 하나에 큰 방어력과 돌파력을 가진 군대인 미군과 영국군을 많이 상대해본적은 없습니다 2차세계대전에 독일군이 사용됀 프로이센 전술은 러시아와 프랑스에 특화됏을뿐 영국과 미국한테는 먹히기 힘든 전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