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강좌]_(이성계의 신도시 건설 프로젝트, 한양 천도)_Ep. 06-01 서울 성곽 4소문(혜화문, 광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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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13 дек 2024

Комментарии • 5

  • @tv-iz6jb
    @tv-iz6jb Месяц назад

    차분한 설명이 아주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나 질문드릴께요
    거리 환산법
    一步가
    營造尺에서는 1,8m
    周尺에서는 1,2m라고 하는데 맞는지요_?
    또 어떤 근거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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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istoryteller_seon
      @historyteller_seon  Месяц назад +1

      네 선생님 시청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좋은 내용 전달해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질문하신 내용에 답변드리겠습니다.
      우선, 조선시대 길이 측정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세종때 만들어진 황종척입니다.
      현재 창덕궁에 남아 있는 황종척에는 주척, 조례기척, 영조척, 포백척 등 다른 기준들도 같이 새겨 놓았습니다.
      다만, 실제 사용 측면에서는 실용적이고 기술적인, 그리고 변화를 겪지 않은 영조척이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경국대전과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에 따르면 1영조척이 0.899황종척이 됩니다. 그리고 주척은 황종척 대비 1.499입니다.
      계산상으로는 영조척이 주척보다 거의 50%이상 길다고 보시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황종척이 정확히 몇 센치미터인가 일텐데,
      세종 오례에 따르면 35..11cm, 현존하는 황종척을 재어 보면 34.352cm 혹은 34.608cm입니다(논문에 따라 조금의 편차가 있습니다)
      여하튼 이를 기준으로 대략적인 영조척과 주척을 계산하면,
      약간의 편차가 있지만 영조척은 30.8, 주척은 대략 20.6cm로 보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입니다.
      그리고 1보는 6척이니 영조척으로 1보는 30.8x6=184.8cm,
      주척으로 1보는 20.6x6=123.6cm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이쪽 전공이 아니어서 다른 전공자분들의 논문을 참조했습니다. 약간의 편차는 있겠지만 대략적으로는 맞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 처음 기술하신 영조척 1.8m와 주척 1.2는 맞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제 채널은 함께 공부하는 곳입니다. 궁금하신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말씀드리겠지만, 가능한 범위 내에서는 답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tv-iz6jb
      @tv-iz6jb Месяц назад

      @historyteller_seon
      감사합니다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 @샤카1004
    @샤카1004 Месяц назад

    예전에 한양의 풍수지리에 관한 책을 본적있는데 광희문이 한양의 청계천 물길이 빠져나가는 위치에 있으면서 일종의 국운의 종말을 의미한다는 설명을 봤습니다
    말하자면 조선의 마지막 두 임금만 연호를 썼는데 고종과 순종의 연호 광무와 융희를 합쳐 광희문이라 처음부터 이름지었다 하던데 신빙성이 있는 얘기일까요?

    • @historyteller_seon
      @historyteller_seon  Месяц назад

      선생님 시청 감사드립니다.
      기본적으로 풍수지리는 개인의 주관이 많이 반영됩니다. 이론 체계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해석하는 이의 주관이 강하게 작용하는 분야입니다.
      그점을 우선 염두에 두셨으면 좋겠습니다.
      광희문이라는 이름은 태조실록 태조 5년(1396) 9월 24일자 기사에 보입니다. "동남에 있는 문은 광희문이니 속칭 수구문이라 하고..."
      조선 개국 초에 이미 확정된 이름인데 이게 500년이 지난 대한제국 때의 고종, 순종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전부터 이와 같은 이야기가 회자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광희문의 '광희'를 '광무', '융희' 연호와 연관 짓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