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안학3호분의 인물과 건축양식에 있어 고구려 양식이라는 것에 회의적입니다. 구당서를 보면 벽화속 인물의 복식은 백제인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고구려는 247년 동천왕때 현재 요하 중류 심양,철령,개원일때에서 쫒겨 달아나 환인일때로 이후 342년 고국원왕때 다시 동쪽 집안(황성,동황성) 산속에 의지해 있을때로 국력이 약할때 입니다. 무엇보다도 벽화속 인물들의 의상표현이 집안일대의 양식과 현재 평양 양식에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비슷하긴 하나 뭔가 양식이 달라 보입니다. 6세기 이후 유적들은 고구려적 색채가 강한건 부정할순 없지만 392년,396년 고구려의 한성 점령후 408년 덕흥리고분의 영락연호가 잠시 보이기도 하지만 475년 위례국이 망하여 고마성으로 천도하기 까지 현재 평양과 대동강 이남엔 백제가 있지 않았나 의심이 갑니다. 최근의 고조선연구소의 논문을 보면 장수왕이 집안에서 천도한 평양은 요양(427년)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이시점 전후로 광개토왕 비문에서 정벌했던 백잔과 왜가 진서,송서,남제서,양서엔 왜5왕,백제왕의 작호 쟁탈전이 수수께끼 처럼 등장하다가 501년 왜왕무가 없어지고 502년 중년의 무령왕이 등장합니다. 결국 광개토대왕이 점령하기전 고구려의 국력이 약했을때(357년)만들어진 안학3호분에서 묘사한 인물은 근초고왕 아닐까요? 이때의 백제는 고구려보다 월등이 강했습니다. 묵서명에 쓰인 동진의 연호는 고구려보다 백제와 연결해야 맞는게 아닐까요? 고구려가 동진연호를 사용한적이 있습니까? 낙랑,대방 문제에 가려져 잃어버린 서기 475년 이전의 백제의 왕릉,귀족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건가요? 현재 서울이 한성이라는 증거가 있긴 한건가요!! 석촌동고분,풍납토성 등 이 유적들이 백제거라는 증거가 있긴 한걸가요?
전 안학3호분의 인물과 건축양식에 있어 고구려 양식이라는 것에 회의적입니다. 구당서를 보면 벽화속 인물의 복식은 백제인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고구려는 247년 동천왕때 현재 요하 중류 심양,철령,개원일때에서 쫒겨 달아나 환인일때로 이후 342년 고국원왕때 다시 동쪽 집안(황성,동황성) 산속에 의지해 있을때로 국력이 약할때 입니다. 무엇보다도 벽화속 인물들의 의상표현이 집안일대의 양식과 현재 평양 양식에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비슷하긴 하나 뭔가 양식이 달라 보입니다. 6세기 이후 유적들은 고구려적 색채가 강한건 부정할순 없지만 392년,396년 고구려의 한성 점령후 408년 덕흥리고분의 영락연호가 잠시 보이기도 하지만 475년 위례국이 망하여 고마성으로 천도하기 까지 현재 평양과 대동강 이남엔 백제가 있지 않았나 의심이 갑니다.
최근의 고조선연구소의 논문을 보면 장수왕이 집안에서 천도한 평양은 요양(427년)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이시점 전후로 광개토왕 비문에서 정벌했던 백잔과 왜가 진서,송서,남제서,양서엔 왜5왕,백제왕의 작호 쟁탈전이 수수께끼 처럼 등장하다가 501년 왜왕무가 없어지고 502년 중년의 무령왕이 등장합니다.
결국 광개토대왕이 점령하기전 고구려의 국력이 약했을때(357년)만들어진 안학3호분에서 묘사한 인물은 근초고왕 아닐까요? 이때의 백제는 고구려보다 월등이 강했습니다. 묵서명에 쓰인 동진의 연호는 고구려보다 백제와 연결해야 맞는게 아닐까요? 고구려가 동진연호를 사용한적이 있습니까?
낙랑,대방 문제에 가려져 잃어버린 서기 475년 이전의 백제의 왕릉,귀족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건가요? 현재 서울이 한성이라는 증거가 있긴 한건가요!! 석촌동고분,풍납토성 등 이 유적들이 백제거라는 증거가 있긴 한걸가요?
백제가 비록 승리했으나 고구려 복수가 두려워 근초고왕때 산속으로 도읍까지 옮긴거 아닌가요? 월등히 강하지는 않은듯. 그리고 고구려는 동진과 우호관계였던걸로 들었는데
웃기지도 않네... 우리나라 석학들은 다 어디가고 울산대교수가 고구려 역사 썰을 푸나?
내용이 너무부실..본론이없고 서론만있는영상..
맞아용
맞아여!!
뭔 소리더냐?
@@spagnada3167 뭐가여
@@spagnada3167 우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