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유럽의 『메디치』 가문

Поделиться
HTML-код
  • Опубликовано: 8 фев 2025
  • 은행 도시로서 피렌체가 정점에 달한 것은 1422년이었습니다. 당시 피렌체와 근교에서는 72곳의 국제은행이 운영되었습니다. 당시 존재하던 수많은 은행가문 중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룩하며 명성을 누린 가문이 바로 메디치 가문으로, 그 장본인은 당시 상인이었던 조반니 메디치였다. 조반니의 두 아들 코시모와 로렌초는 주목받는 은행가이자 상인이며, 피렌체의 통치자이고 교회의 추기경으로 활동하면서 르네상스를 이끌어낸 전설적인 인물들이 되었습니다. 특히 코시모는 ‘국부’라는 칭호까지 받으며 추앙받았습니다. 코시모의 집무실은 그 후 메디치가가 대대로 수집한 예술품들을 소장해서 현재 우피치 미술관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메디치가의 딸들은 유럽의 주요 왕가와 혼인했는데, 그 중 마리는 프랑스의 여왕이 되었으며 카트린느는 국왕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엄청난 권력을 소유하게 된 이 가문은 나중에 자신들의 역사를 화려하게 재구축했습니다. 자신들이 로마를 방문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왔다가 소작농들을 괴롭히던 거인을 처치하느라 토스카나에 머물게 된 기사의 후손이라고 칭한 것입니다. 가문의 원조가 누구이며 문장의 뜻이 무엇인지와 상관없이, 메디치 가문은 은행을 만들어 정치적 힘을 얻었고, 예술을 후원하며 명성을 얻었습니다. 이들은 재산을 모으는 것 못지않게 제대로 사용하는 방법에도 고민을 많이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메디치를 중심으로 발달한 르네상스 시대에는 돈을 어떻게 쓰는지가 엘리트들 사이에서 중요한 화두였다고 합니다.
    코시모 메디치의 운영 아래 메디치가의 은행은 상업적 절정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들은 유럽에서 활동하는 기업 중 최고였습니다. 메디치가는 피렌체 이외에도 안코나, 앤트워프, 아비뇽, 바젤, 볼로냐, 브뤼즈, 제네바, 런던, 뤼베크, 리용, 밀라노, 나폴리, 피사, 로마, 배네치아 등지에 지점을 열었습니다. 각 지점의 고용인은 12명을 넘지 않았으며, 다른 은행과 제휴 없이 다양한 업무를 처리했습니다. 메디치 은행의 거래품목에는 동양의 향신료, 지중해의 올리브기름, 발트해 지방의 모피, 영국의 양모, 이탈리아의 옷감뿐만 아니라 종교적 유물, 노예, 기린, 거세한 성가대 소년 등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메디치가는 상인조합이나 귀족 가문들의 중심 역할을 담당했고, 이 새로운 조직을 운영하는 최초의 집단이 되었습니다. 이들의 은행업이 정점에 도달한 것은 1429~1494년이었습니다. 중세에는 시장보다 환전을 더 빈번하게 하는 곳이 한 군데 있었는데, 바로 교황청이었습니다. 교황청은 세계 전역에 흩어져 있는 성당에서 보내는 헌금을 받아 다시 필요한 지역에 보내야 했기 때문에 환전할 일이 많았습니다. 메디치 가문은 교황청의 환전 업무를 독점하고 거기다 헌금을 보관해주는 일까지 맡으면서 중세 유럽 최고의 금융가문으로 성장하며 르네상스를 이끌게 됩니다. 메치디가는 은행과 토지에서뿐만 아니라, 양모 가게와 비단 가게까지 열어 직물업으로도 소득을 올렸습니다. 메디치 은행은 프랑스의 찰스 8세가 1494년 피렌체를 침략하기 전까지 운영되었습니다.

Комментари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