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P...테너 박인수 교수님 | Che gelida manina(그대의 찬손) | G.Puccini Opera "La Boheme"중 로돌포의 아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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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7 сен 2024
  • #철의음악 #테너_박인수 #Che_gelida_manina
    #라보엠
    이탈리아 작곡가 Giacomo Puccini(쟈꼬모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 "에서 테너 주인공
    로돌포의 아리아
    다락방에 사는 시인 로돌포에게 아랫집 아가씨 미미가 찾아와 촛불이 꺼졌다며 촛불을 빌리러 옵니다.
    촛불을 빌리고 돌아가는데 방 열쇠를 잃어버린 미미가 다시 돌아와 열쇠를 찾습니다.
    열쇠를 찾는 중에 로돌포가 자신의 촛불을 꺼 버리고,어둠속에서 열쇠를 찾다가 미미의 손을 잡게 됩니다.
    차가운 미미의 손을 잡으며 자신을 소개하는 아리아입니다.
    Che gelida manina,
    이렇게 차가운 손,
    se la lasci riscaldar.
    내가 따뜻하게 해주겠어요
    Cercar che giova?
    찾아서 무슨 소용이 있어요?
    Al buio non si trova.
    어둠 속에서 찾지 못해요.
    Ma per fortuna
    그러나 행운인 것은
    é una notte di luna,
    달이 떠 있는 밤이라는 것,
    e qui la luna
    그리고 이곳에 달이
    l’abbiamo vicina.
    우리 가까이에 있어요.
    Aspetti, signorina,
    기다려요, 아가씨,
    le dirò con due parole
    당신께 두 마디만 할께요
    chi son, e che faccio,
    내가 누구이며,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come vivo. Vuole?
    어떻게 사는지. 원하세요?
    Chi son? Sono un poeta.
    누구냐구요? 나는 시인이랍니다.
    Che cosa faccio? Scrivo.
    무슨 일을 하느냐구요? 글을 씁니다.
    E come vivo? Vivo.
    그리고 어떻게 사느냐구요? 그냥 살지요.
    In povertà mia lieta
    행복한 가난함 속에서
    scialo da gran signore
    귀족들의 사치스러움
    rime ed inni d’amore.
    사랑의 시와 찬가를 즐깁니다.
    Per sogni e per chimere
    꿈과 환상속에서
    e per castelli in aria,
    대저택을 가지고 있지요
    l’anima ho milionaria.
    백만장자의 영혼을 가지고 있어요.
    Talor dal mio forziere
    가끔 나의 금고에서
    ruban tutti i gioelli
    모든 보석들을 훔칩니다
    due ladri, gli occhi belli.
    두 명의 도둑, 두 아름다운 눈들이
    V’entrar con voi pur ora,
    당신과 함께 지금 들어갑니다,
    ed i miei sogni usati
    그리고 나의 평소 꿈들이
    e i bei sogni miei,
    그리고 아름다운 나의 꿈들이
    tosto si dileguar!
    즉시 사라집니다!
    Ma il furto non m’accora,
    그러나 도둑은 나를 슬프게 하지 않습니다,
    poiché, poiché v’ha preso stanza
    왜냐하면, 자리잡기 때문입니다
    la speranza!
    희망이!
    Or che mi conoscete,
    지금 당신은 나를 알게 되었으니,
    parlate voi, deh! Parlate.
    당신이 말씀하세요, 당신이, 말해주세요.
    Chi siete?
    당신은 누구세요?
    Vi piaccia dir!
    제발 말해줘요!
    테너 박인수(1938- 2023.3.1)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줄리아드 음대에서 마리아 칼라스 장학생으로 공부했다. 영혼을 울리는 목소리로 남미와 유럽에서까지 주역 테너로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20여 년간 모교인
    서울대학교에서 제자들을 양성하며 3백회가 넘는
    오페라 공연에서 주역의 자리를 지켜왔다
    1938년 서울 종로구 내수동에서 5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본 주오대학 법학부에서 유학을 했고, 서울시청에서 운수과장, 도시계획과장, 건설과장 등 요직을 거쳤으나, 너무나 청렴하여 자식들 학비조차 제대로 내지 못할 정도로 집안이 가난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노래를 좋아했고 노래를 한 번 시작하면
    트로트에서부터 이태리 민요, 오페라 아리아, 가곡에 이르기까지 계속 불렀다고 한다. 어머니는 한국의
    모든 어머니가 그러하듯 매우 알뜰했고, 음식 솜씨가 굉장히 좋았다고 한다.
    중학교에 입학을 한 뒤부터는 럭비부에 들어가고
    기계체조도 배웠다. 유도부터 수영에 이르기까지
    안 배운 종목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어머니를 따라 동네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노래 부르는 게 좋아서 성가대를 했다.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 말 교회 목사님으로부터 성악을 하라는 권유를 받고, 마도로스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성악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바로 음대에 진학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 후 구청에 임시직으로 들어가 일하면서 야간으로 성균관대학교 사학과에 다녔다. 그러면서 당시 대한민국의 3대 테너 중 하나였던 이화예고의 이우근 선생에게서 무료로 성악 레슨을 받았다. 그 덕분에 1960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입학 시험에 합격하였다.
    1967년 국립오페라단에서 '마탄의 사수'를 올릴 때에 주인공 ‘막스’ 역을 맡아 학생 신분으로 데뷔하였다.
    그런데 공연 당시 잘하고 싶은 욕심에 발성을 바꾼 게 화근이 되어서 오페라 자체를 완전히 망쳐버리고 말았다. 서울 시내 일간지들이 일제히 혹평을 하였고, 결국 오페라 무대에 서자마자 한국 오페라계에서 매장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 후 남대문 시장에서 포장마차를 하며 돈을 벌었으나, 그것마저 실패를 하였다. 결국 어렵게 친구의 도움을 받아 1968년 서울 시향과 협연으로 아내와 함께 부부 음악회를 열었는데, 다행히 좋은 평을 얻었다. 이후 여기저기서 출연 요청이 들어왔고, 프리마 오페라단에서 올린 '사랑의 묘약'에서 ‘네모리노’ 역을 맡아 드디어 재기에 성공했다.
    1969년에는 친구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젊은 성악가들을 모아 ‘서울 오페라 아카데미’를 결성했다. '라 보엠'을 제작해 우리나라 최초로 이탈리아 원어로 불렀다. 그렇게 무대에 올린 오페라가 성공하니 여기저기서 출연 요청이 쇄도했고, 작곡자들도 자기 작품을 노래해달라고 요청해 왔다. 그의 노래가 FM 전파를 타고 방송되기 시작했다.
    마침 버펄로 심포니오케스트라 바이올리니스트로 일하던 서울대 선배가 추천을 하여, 1969년 여름 버펄로 심포니오케스트라의 오페라에 출연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1970년 5월 미국으로 진출하였고, 줄리아드 음대에서 마리아 칼라스의 마스터 클래스 오디션에 합격하여, 전액 장학금을 받고 줄리어드 음대에서 성악 교육을 받았다. 생활비를 매달 받긴 했지만, 뉴욕의 집세를 감당하기엔 빠듯하여, 뉴욕의 한국 음식점에서 배달 일을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1976년부터 미국 뉴 헤븐 오페라단(New Heaven Opera)과 버팔로 오페라단(Buffalo Opera)에서 '라 보엠'의 ‘로돌프’ 역을 했고, 캐나다 온타리오 더 쇼 페스티벌(Ontario the Show Festival)에서 '낙소스의 아리아드네'의 ‘바쿠스’ 역을 했다. 1년에 반 이상은 미국 전역과 남미, 캐나다 등으로 연주 여행을 다녔다.
    1983년에 귀국하여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그리고 2003년 퇴임할 때까지 3백회가 넘는 오페라 공연을 했다.
    1989년에는 클래식과 가곡을 접목한 국민가요 '향수'를 가수 이동원과 함께 불러서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당시에는 공연 직후 클래식계에서 '클래식 음악을 모욕했다'는 비난을 받았고, 자신이 단장으로 내정되기까지 한 국립 오페라단에서 제명을 당했다. 당시만 해도 클래식과 대중가요의 크로스오버는 상당히 생소했고, 이 때문에 클래식계에서 반발이 심하였다. 그러나 4년 후 시작된 KBS의 "열린 음악회", 파바로티를 비롯한 3대 테너가 주도했던 성악계의 크로스오버 추세가 자리잡힌 것을 보면, 도리어 선견지명이었던 셈이었다.
    지금은 모든 성악가들의 애창연주곡이 되었다.
    2003년 서울대 정년퇴임 후 백석대학교 석좌교수, 음악대학원장을 맡아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후 미국에 체류중 2023.3.1 어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하시고 그의 아름다운 노래로 전국민이 기뻐했던 일들을 기억합니다.
    제가 대학교 1학년 시절 교수님의 지방공연에 합창으로 함께한 후 공연을 마치고 교수님댁 앞에서 아이크림을 사 주시면서 아버지같이 친근하게 좋은 말씀해주시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히 남아있습니다.
    고 박인수 교수님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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