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고 당시 멤버 김경기, 최용철,주경업,주정혁, 최광천,탁명렬,김원근, 정재준 등 혹시 이 멤버에 님이 계시는지요? 인천고는 85년 대통령배 서울고에 1:4로 패해서 준우승했는데요 84년 부진을겪고 85년도에 기대를 했고 투타가 안정됬었조 2020년 봉횡기 결승에서 3:2서울고를 이기고 35년만에 설욕했습니다 당시 제가 준결승전 KBS- TV로 시청 했는데 아쉽게 0:5로 패했습니다 부산고 박동희의 구위에 눌려 산발8안타를 때렸냈습니다 대통렁배 대회에서는 8강전에서 부산고에 2:1승리한바 있었죠 김원근 선수의 솔로홈런이 있었구요(직접관람) MBC 라디오 중계 당시는 부산고 박동희투수가 투구 이닝 제한규정 에 의해 던질수 없었고 권영일 투수가 투구했죠 지금 투수의 투구수 제한 규정이 있듯이 85년도는 5인닝 제한이 있었습니다. 청룡기 1회전 전주고에 6:4승(야간경기) 직관 8강전에서 중앙고에 6:1승 기분좋게 4강에 진출했었죠 이후 청롱기는35년이 지났지만 아직4강에 진출하지 못한것으로 압니다, 4강전이었는데 KBS스포츠국에 직접 문의하시면 답을 얻을수 있는데 .... 저두 가끔식 70.80년대 고교야구 특히 인천고 경기영상물에 대하여 문의를하고 있는데 보관용이 있고 특히 페기처분된게 많이 있다고 합니다. 저는 인천고 77회 졸업생입니다.
그날 제가 KBS-TV중계 시청했는데 인천고가 0:5로 패했지요 인천고 그해 4월에 있었던 대통령배대회 결승전에서 서울고에 4:1패배하여 준우승을 했는데... 멤버는 좋았죠 인천고.. 김경기,탁명렬,이상훈,최용철,주경업,최광천,김원근등 인천고 1회말 주자1,3루두고 5번 김원근이 친 타구가 홈런성이었는데 부산고 좌익수에 잡혀아웃 인천고는 부산고 박동희의 구위에 눌려 산발8안타를 치고 패배했습니다 지난 대통령배에서는 8강전에서 부산고에 2:1승리하였으나 청룡기에서는 부산고에 석패했습니다 대통령배대회에서는 박동희투수가 인닝투구에 규정에의거 던질수 없었구 귄영일 투수가 투구했었죠 당시는 투수에 대하여 5인닝 이상 투구하면 다음경기에 출전할수 없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2020년 현재는 투수에대하여 인닝이 아닌 투구수 제한을 규정하고 있죠 참고로 저는 인천고77회 졸업생입니다.
@@이정헌-e5o 제가 최계훈 투수 때문에 어려서부터 인천고 팬이었습니다. 85년도 중3 때인데 인천고 두 경기 직관하러 갔는데 하필 두 경기 다 인천고가 맥없이 졌지요. 그게 서울고와의 대통령배 결승 (1대4 패), 그 다음이 부산고와의 청룡기 준결승 (0대5 패)였습니다. 서울고와의 결승 때는 1회 1번 주경업이 안타를 치고 출루, 2회에는 5번 장타자 김원근이 좌중간 2루타를 친 후 후속 땅볼 때 득점해서 승리의 기대감이 컸으나 이후에는 박형렬과 이용호의 계투에 눌려 맥없이 주저앉더군요. 부산고 전에서도 말씀하신대로 1회 김원근이 친 공이 홈런성 타구였는데 아쉽게 잡히고 나서는 전혀 게임이 풀리지 않았어요. 그 경기에서도 박동희는 시종일관 150km 안팎의 강속구를 뿌렸지만 (직관하니 박동희의 직구 구위는 살벌하다 싶을 정도더군요) 인천고 타선이 전혀 공략을 못한 것도 아니고 에이스 탁명렬이 난타를 당한 것도 아닌데 점수차가 벌어지더군요... 85년 인천고는 이후 대회에서는 별성적을 거두지 못했죠. 봉황대기에서는 1회전에서 경남고를 맞아 사이드암 투수 김병주(요새 프로야구 심판위원장 하는 그분)에 말려 김경기가 홈런은 하나 쳤지만 완패를 당했고 황금사자기 대회는 아무 기억이 안 나네요...
진짜 날것 그대로 방송하네 잔인하게 결승에서 분패한 패전투수에게 대놓고 직접 왜졌냐고 물어보다니 ㅋㅋㅋ 그래도 박동희 선수 대답에 반드시 꺾고 말겠다는 의지가 확고하게 나타나는게 왜 저선수가 훌륭한 선수일수밖에 없는지 잘보여주네요 편히 쉬시면서 야구 후배들 지켜봐주세요 명복을 빕니다
1991년 한일 프로야구 경기에서, 한국 선발 박동희 강속구가 일본 선발 구와다 마스미 직구를 압도했었지요. 한국 박동희 강속구는 빨랐지만, 투구 폼이 크고 매끄럽지 못하고, 변화구 미숙, 타자 대처 미숙 등으로 일본 타자들에게 난타 당했음. 박동희 강속구를 일본 타자들은 잘도 받아치더라. 일본 선발 구와다 마스미 는 직구는 박동희에 비해 느렸지만, 투구폼이 부드럽고 교과서 적이었며, 변화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콘트롤이 자로 잰듯 정확했으며, 타자와의 승부는 능수 능란 해서 한국 타자들을 가지고 놀았음.
중3, 고1는 짝지였고, 중학교는 비슷한 체격이었는데 고등학교 때는 나보다 훨씬 컸는데, 농구공을 한 손으로 들고 할 정도로 손도 크고 운동도 잘하던 동희야. 그 곳에서는 잘 지내지?
잘 계실겁니다 우리의 레전드....
슬프네요
@@최지훈-p6d6s 2007년 교통사고로 사망했습니다.ㅠㅠ
마지막 박동희 선수의 인터뷰가 인상적이네요~~
와... 1985년때 서울고1학년 재학생이었는데...이때는 정말 1년내내 야구장 응원다니는맛으로 학교 다녔네... 보고싶다 친구들아... 보고싶다 임수혁...꼰데쓰
1985년이면 프로야구 출범이후인데... 관중이 좀 있네요?? 어떻게된건지요? ㅋ
@@BOXER462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쫌 있었음
40회신가요? 반갑습니다. 85년 졸업생임다. 접때만해도 정말 울학교 야구볼만 했는데 그이후에 최원태 강백호 나올때까지 그리 오래 우승못할줄 정말 몰랐네요.
수혁이하고 동기신가요? 수혁이는 제 고교 대학선배님 동생이기도 해서... 너무 안타까울따름임다.
69년 🐔 띠 !
저날 응원석에 있었다. 나는 부산고!!!
서울고에 OB 임형석 선수도 있었네요
92년에 정말 잘했었습니다.
92년 잠실 롯데 전에서 사이클링 히트 기록할때 직관했었는데.....
아나운서 멘트 중에 "박동희 선수, 어제에 이어 오늘도 완투를...." 소름...박동희가 그래서 수명이 짧았는지...
저 때 뿐 아니고 대회때마다 전게임 다 던졌죠
온 가족이 같이 보러 가던 70~80년대 고교야구의 인기!
박형렬 91시즌 시작할 때 선발투수 로 활약할 정도로 기대를 모았으나 91년 시즌 중반 갑자기 사라짐. 부상인지 다른 이유인지 안타깝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사생활관리가 엉망이었다고 합니다. 동기생이자 배터리였던 포수 김동수가 프로에서 어마어마한 커리어를 쌓은 반면 구속이 너무 평범해서 거의 프로에서 일찍 사라졌지요.차라리 대학에 갔어야 했는데
화질이 안 좋아서 백프론 아닌데,,저기 라이트 쪽 외야에서 신나게 응원하는 34년전 내 모습이 보이네요..ㅋㅋ 와 이거,,
서울고 40 회 이신가요?
@@minseokkim5176 예, 40회 입니다. ㅎ
@@jhkim498 ㅋㅋ 전 39회 입니다. 저도 그날 응원하러 갔었습니다.
다들 반갑습니다. 그날 경기보러갔던 37회에요. 그때 재학생들 응원쩔었는데... 경기장서 선배 후배 동기들 제법 많이 만났던 기억납니다.
저해 우승이후 다시 우승하기까지 정말 세월 많이 흘렀지요.
아이고 어쩌다 보니 세월이... 5학년이네여 우리모두
@@이정환-x7p 38회
이 영상에 건강하셨을 때 우리 장인어른이 등장하십니다. 현재는 요양원에 계시는데 이 영상 볼때마다 반갑기도 하고 가슴이 아프기도 하네요.
아이차, 제1, 2응원가 다양한 믕원가와 함께 경기에 몰입했던 야구장내 전교생들의 모습, 그 자체가 기억속 명품입니다!
아버지 부산고 출신이라 아버지 손잡고 박동희 야구하는거 보러갔지. 덕분에 불행히도 롯데팬이 됐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불행은 유전되는군.
아버님이 엘리트 이세네요
어제도 완투.오늘도 완투. 이게 그시절 고교야구의 현실. 선수야 팔이갈려나가건말건 이기면 그만이라는 감독들의 마인드. 이것이 선수 생명단축의 가장큰 요인
야구 특징이 너무 투수 의존도가 큼
일본도 마찬가지 에이스 투수 혼자서 몇백개 투구가 일상
박동희선수는 명성에비해 프로에서 아쉬움이 있던 강속구 레젼드
좋은 체격에서 무시무시한
강속구를 던졌던 박동희.
직구로는 선동열, 최동원에
전혀 뒤지지 않았음.
다만, 콘트롤 들쭉날쭉.
변화구 미흡, 자기관리 부족 등으로
프로에서는 기대만큼 성적 안 나옴.
그런걸 머슬메모리가 안 좋다고 하지. 한마디로 뇌세포 유전자. 보통 요령을 터득하는 능력으로 표현된다. 컨트롤 좋은 애들은 공부를 해도 잘한다.
70년대 중계영상이 있다면 그것이 한국고교야구의 진짜모습. 중계도 흔하디 흔하게 했겄만..
80년 이전 영상은 볼수없나요
진정한 고교야구 전성기 시절인데
전설의 명경기🎉🎉
앳된모습의 박동희.김동수의 모습도 고교때이후 슬그머니 사라진 박형열선수.참그리운 얼굴들이네요.저당시 응원하던팀도 아닌데 군휴가나와서 동대문야구장에서 봤는데.그시절이 그립네요.고박동희선수의 명복을빕니다.
아 정말 눈물나도록 귀한영상 잘봤습니다 제가 저당시 인천고 야구선수 였습니다 저희는 부산고에게 4강에서 졌구요 혹시라도
인천고 영상도 있을까요 저희는 저때 대툥령배때 결승에서 서울고에게 4:1로 패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이런 귀한 영상 올려주셔서감사드립니다 저때 박동희선수도 잘던졌지만 권영일이란 사이드투수도 있었지요
인천고 당시 멤버
김경기, 최용철,주경업,주정혁, 최광천,탁명렬,김원근, 정재준 등
혹시 이 멤버에 님이 계시는지요?
인천고는 85년 대통령배 서울고에 1:4로 패해서 준우승했는데요
84년 부진을겪고 85년도에 기대를 했고 투타가
안정됬었조
2020년 봉횡기 결승에서 3:2서울고를 이기고 35년만에 설욕했습니다
당시 제가 준결승전 KBS- TV로 시청 했는데
아쉽게 0:5로 패했습니다
부산고 박동희의 구위에 눌려 산발8안타를 때렸냈습니다
대통렁배 대회에서는 8강전에서 부산고에 2:1승리한바 있었죠
김원근 선수의 솔로홈런이 있었구요(직접관람)
MBC 라디오 중계
당시는 부산고 박동희투수가 투구 이닝 제한규정
에 의해 던질수 없었고 권영일 투수가 투구했죠
지금 투수의 투구수 제한 규정이 있듯이 85년도는 5인닝 제한이 있었습니다.
청룡기 1회전
전주고에 6:4승(야간경기) 직관
8강전에서 중앙고에 6:1승
기분좋게 4강에 진출했었죠
이후 청롱기는35년이 지났지만 아직4강에 진출하지 못한것으로 압니다,
4강전이었는데 KBS스포츠국에 직접 문의하시면
답을 얻을수 있는데 ....
저두 가끔식 70.80년대 고교야구 특히 인천고 경기영상물에 대하여 문의를하고 있는데 보관용이 있고 특히 페기처분된게 많이 있다고 합니다.
저는 인천고 77회 졸업생입니다.
네 마찬가지로 인천고에도 당시 에이스 탁명렬을, 사이드암 2년생 장승철이 받쳐주었지요. 탁명렬은 선배 정은배처럼 인하대가 아닌 경희대로 진학했고 이후에는 프로가 아닌 실업행을 택했지요.
@@이정헌-e5o 주경업과 김경기는 고려대로 (당시 고려대 최남수 감독이 인천고 출신이라 인천고 유망선수의 고려대 진학이 더러 있었습니다. 최계훈 투수도 인하대와 중앙대의 줄다리기 사이로 고려대 진학가능성이 있었고요), 주정혁과 탁명렬은 경희대로, 거포 김원근은 인하대로, 3번 교타자 최용철은 연세대에 진학했지요...
79년 최계훈 투수 영상을 꼭 보았으면 싶네요... 봉황대기 광주상고와의 결승전에서 이승중에 이어 2회 등판했지만 삼진을 무려 13개인가 잡아놓고도 7,8회 위기를 극복하지 못 하고 져서 어린 마음에도 어찌나 안타깝던지...
@@Juanseo70 대한뉴스 79년도 9월분을 보시면 약 40초가량 김승환 아나운서의 멘트로 동영상(칼라분)이 있습니다
당시 선발로 나온 이승중(27번) 투수의 투구모습
채태석 포수 등이 나옵니다
저두 군입대를 앞두고 직관했는데...
7회초 2점 8회초 3점을허용 패했죠
7회초 2점허용후 안타를 치고나간 최계훈 1사 2루에서 9번 윤강노가 중전안타를 첬는데
중견수가 공을 놓치는사이 최계훈이 3루에서 머뭇거리다가 홈에 뛰어들었는데 광상 중견수 이순철의 호송구로 아웃
여기서 맥이 풀렀죠
80년대분은 동영상이 더러 있지만 70년대분은 거의 페기처분 되었다고 보시면 될겁니다
2011년도 JTBC방송국 탄생과 괸련 문의하였는데
1980년 신군부에의거 TBC 등 방송국 통페합으로 KBS로 모든자료가 넘어갔는데 관리소홀과 기술부족으로 폐기처분으로 보고 있더라구요
그건 그렇고 님께서도 야구에 관심이 많으시네요
저희때는 77년도 황금사자기 결승전 인고와 광주상고 전(준우승)이 있었는데..이장면 또한 대한뉴스에 있습니다
지금은 기술이 좋아 관리만 잘하면 영구 보관이 가능한데 ..
박형열 선수 투구폼 진짜 깔끔하고 두뇌피칭 장난없네요..ㄷㄷㄷ 박동희 선수는 역시나 직구가 날카롭네요 ㄷ
서울고등학교 주전 멤버가 강남중 주전멤버 그대로네~
박형렬 고졸 신인 최초로 계약금 1억원.
오비 지명 받고 갔었는데.
이용호가 4번치네~^^
추억의 고교야구.
그립네~
김동수
박형렬
임형석~ㅎㅎ
그때 1억이면 지금 5억이상
멤버 좋네요
저도 당시에OB팬이어서 박형렬선수를 85년에는 박동희투수보단 안좋아했지만
입단후(86년이후~) 잘던지라고 응원했는데~역시 프로의 높은벽을 실감하더라고요!ㅜㅜ
부산고 4번 이종택 준결까지 11타수 10안타 0.909치타가 저 경기서 4타수 무안타여서 0.667로 타격상 받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리포터는 농구선수 출신 김승규 님
농구? 어쩐지 키가 크더라...
당시 명지대 농구팀 감독
85년도 청룡기 4강 tv중계 했었거든요 인천고 부산고 자료좀 있으면 꼭좀올려주십시요
그날 제가 KBS-TV중계 시청했는데 인천고가 0:5로 패했지요
인천고 그해 4월에 있었던 대통령배대회 결승전에서 서울고에 4:1패배하여 준우승을 했는데...
멤버는 좋았죠
인천고.. 김경기,탁명렬,이상훈,최용철,주경업,최광천,김원근등
인천고 1회말 주자1,3루두고 5번 김원근이 친 타구가 홈런성이었는데 부산고 좌익수에 잡혀아웃
인천고는 부산고 박동희의 구위에 눌려 산발8안타를 치고 패배했습니다
지난 대통령배에서는 8강전에서 부산고에 2:1승리하였으나 청룡기에서는 부산고에 석패했습니다
대통령배대회에서는 박동희투수가 인닝투구에 규정에의거 던질수 없었구 귄영일 투수가 투구했었죠
당시는 투수에 대하여 5인닝 이상 투구하면 다음경기에 출전할수 없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2020년 현재는 투수에대하여 인닝이 아닌 투구수
제한을 규정하고 있죠
참고로 저는 인천고77회 졸업생입니다.
@@이정헌-e5o 제가 최계훈 투수 때문에 어려서부터 인천고 팬이었습니다. 85년도 중3 때인데 인천고 두 경기 직관하러 갔는데 하필 두 경기 다 인천고가 맥없이 졌지요. 그게 서울고와의 대통령배 결승 (1대4 패), 그 다음이 부산고와의 청룡기 준결승 (0대5 패)였습니다. 서울고와의 결승 때는 1회 1번 주경업이 안타를 치고 출루, 2회에는 5번 장타자 김원근이 좌중간 2루타를 친 후 후속 땅볼 때 득점해서 승리의 기대감이 컸으나 이후에는 박형렬과 이용호의 계투에 눌려 맥없이 주저앉더군요.
부산고 전에서도 말씀하신대로 1회 김원근이 친 공이 홈런성 타구였는데 아쉽게 잡히고 나서는 전혀 게임이 풀리지 않았어요. 그 경기에서도 박동희는 시종일관 150km 안팎의 강속구를 뿌렸지만 (직관하니 박동희의 직구 구위는 살벌하다 싶을 정도더군요) 인천고 타선이 전혀 공략을 못한 것도 아니고 에이스 탁명렬이 난타를 당한 것도 아닌데 점수차가 벌어지더군요...
85년 인천고는 이후 대회에서는 별성적을 거두지 못했죠. 봉황대기에서는 1회전에서 경남고를 맞아 사이드암 투수 김병주(요새 프로야구 심판위원장 하는 그분)에 말려 김경기가 홈런은 하나 쳤지만 완패를 당했고 황금사자기 대회는 아무 기억이 안 나네요...
@@Juanseo70
기억력이 대단하십니다
85년도 황금사자기는 제물포고에 패해서 지역예선 탈락했습니다.
서울고교 전설의좌완에이스 박형렬 투수 👍
박동희투수 정말 공이 믿트에 들어가는 소리가 대단합니다 !
7:57 동수 행님의 따뜻한 마음
그런분이 조카같은 안영명 빰 가격?
고등학교 동시대에 재학중 상대팀 부산고등학교 위기가 되면 외야에 있는 박동희 올라와서 불 끄고 내려가고 진짜 부러웠다. 10년이 지나 모교도 박동희급 선수가 나타났다 그 이름 김건덕
박동희.김건덕 그곳에서는 편한하시길
동희형...
보고싶어여..ㅠㅠ
1987년 청룡기 결승전 경기 좀 올려주세요
혹시 83대통령배 결승전 화면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시절 부산고 투수였던 김종석투수 저의 우상과도 같았던 선수였는데....
1982년입니다
83년 한양대갔죠
부산고 김종석 왼손에이스
고교때 혹사로 에구 ᆢ
아드님이 기아 김대유선수
우리는 기억합니다
83학번들
강기웅ㆍ류중일ㆍ노찬엽ㆍ김종석 ㅎㅎㅎ
최고스타들
부산고 시절 박동희 투구를
볼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강속구가 무시무시 하네요.
참 아깝고 안타까운 투수.
좀 만 더 관리 잘 했으면,
더욱 좋은 성적 냈을 텐데....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고로
갑작스럽게 타계해서
너무 안타깝습니다.
봉황대기 평자 0점 92년 한국 시리즈 mvp 내가 가장 좋아했던 투수 동희형 보고 싶네요.
@@parkrio211
1992년 코시 MVP는 박동희
@@parkrio211 84년 최동원이 우승시키고 mvp는 유두열 92년 염종석이 우승시키고 mvp는 박동희~~~
저날 비도 조금 왔는데.
고인의 명복을빕니다
서울고 쉽게 갈 경기를 8회초 2루 주자 실수로 ㅋㅋㅋ
3:07 심판의 넘치는 에너지!!!
서울고 박형열.
투구폼도 좋고 다양한 구질.
참 좋은 투수였는 데.
서울고 졸업후에 갑자기 성장을 멈춤.
OB로 가지 않고 대학을 갔으면,
더 좋지 않았을 까 ...
같은 생각입니다
1년후배였는데 참 아까운 놈이었습니다. 형렬이와 호흡을 맞췄던 김동수는 한양대가서 엘지 삼성 현대에서 두루 뛰며 정말 프로에서 대성했고 장수했지요. 형렬이보다 더 뛰어난 선수가 될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고등학교때 운동회 마지막 주자로 박동희와 달려본 1인
국대때 일본은 노모 히데오 한국은 박동희 ....이후 노모 한국의 박이 메이져 들어간다는 소식듣고 처음 박동희인줄 알았다는
서울고화이팅
9회말 부산고 2번째 아웃은 세잎 아닌가...?
당시 황당한 볼 판정 많았습니다. 수도권팀 유리하게 선언. 관중수 티켓수입과 연관있었지요. 결승전땐 지방이라도 단체로 올라오니 덜한편.
느리게 보니깐 의외로 동타임이라..아웃줘도 될거 같아요
7:50 진짜 아프겠다….
서울고 김동수가 훗날 명포수로서 안영명 참교육하신 그분 맞나요?
맞습니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안영명선수가 얼굴로 다 막았습니다.
빙그레 큰형 송진우한텐 ㅎㅎ
0:36 신바람 이박사?
박동희, 임수혁..
둘다 훗날 롯데로 갔고…
그렇게 두분은 고인이되어 하늘에서 캐치볼하고 계시겠지
두분의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진짜 날것 그대로 방송하네 잔인하게 결승에서 분패한 패전투수에게 대놓고 직접 왜졌냐고 물어보다니 ㅋㅋㅋ
그래도 박동희 선수 대답에 반드시 꺾고 말겠다는 의지가 확고하게 나타나는게 왜 저선수가 훌륭한 선수일수밖에 없는지 잘보여주네요
편히 쉬시면서 야구 후배들 지켜봐주세요
명복을 빕니다
아~~부산고
명문서울고
야구부 뜨겁던동대문야구장
선우대영ㆍ윤수봉ㆍ이승희ㆍ김영균ㆍ장훈ㆍ전대영
그대들은 지금은 머하고사는가 ?
박형렬 임형석 캬
임형석 92년 서울 홈런왕. 비운의 스타
박형렬이면 오비베어스 같은데... 아닌가? 오비는 박상열인데... 박형렬도 있었나?
박동희 강속구 기억 나네요
이석재 지금도 화이팅, 심정환 지금도 화이팅
이긴 애도 아니고 져서 울거 같은 애 붙잡고 어른이란 게 뭐하는건지
7분5초 데이빗 보위 특별출연
인터뷰 어린학생이 지금은 50대ㄷㄷㄷ
박형열은 어디에???
관중 많았나
서울 박형렬 김동수는 명 배터리 부산은 박동희의 팀
당시에 김동수 22번(포수의 등번호?^^).박동희,박형렬 모두21번
혹시 박철순투수의 영향(?)ㅋ
고 박동희 선수의 경우 부친의 함차입니다. 박두일씨였는데, 둘일해서 21번을 달았습니다.
@@vanechkapark 아 그랬군요!^^예전부터
보면 11,21번은 수준급 투수들의 고유 번호로 봐와서요.프로,아마 모두 그랬으니깐요
@@오영학-y1s 최동원 선수의 경우 에이스라는 의미로 원래 1번을 달다가 덩치가 커지면서 허전한 느낌이 들어 1을 하나 더해서 11번을 달았다고 합니다.
일본야구의 영향이기도 합니다. 일본 고교야구대회는 선발투수가 무조건 등번호 1번, 선발포수가 2번, 백업 포수가 12번, 22번. 선발유격수가 6번, 백업유격수가 16번을 달아야 하죠. 우리나라 고교야구는 그런 규정은 없었지만, 1번, 11번, 21번은 투수들이 선호하고, 2번, 12번, 22번은 포수들이 선호하는 번호죠.
이규항 아나운서 하일성 해설 참 그립습닏ㆍ
박형열은 방출, 박동희는 하늘나라 다 덧없다...
이런 역사적인 구장을 없애고 이상한 건물 지어서 치적이나 자랑하고..ㅜㅜ
그자리에 돔구장 지엇어야 했죠. 고척돔 생각하면 열받죠 멍청한 5세후니
88올림픽 박동희.김동수 배터리~ 노모.후루타 배터리~~~
서울고 유니폼이 이상하넹.... 아래위 줄무늬도 아니고..
윤장술, 박승암, 김차곤 좀 안나오나? 경원중 1회 출신들....
혹시 저희 아버지 아시나요...? 박승암 선수 입니더
1991년 한일 프로야구 경기에서,
한국 선발 박동희 강속구가
일본 선발 구와다 마스미 직구를
압도했었지요.
한국 박동희 강속구는 빨랐지만,
투구 폼이 크고 매끄럽지 못하고,
변화구 미숙, 타자 대처 미숙 등으로
일본 타자들에게 난타 당했음.
박동희 강속구를
일본 타자들은 잘도 받아치더라.
일본 선발 구와다 마스미 는
직구는 박동희에 비해 느렸지만,
투구폼이 부드럽고 교과서 적이었며,
변화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콘트롤이 자로 잰듯 정확했으며,
타자와의 승부는 능수 능란 해서
한국 타자들을 가지고 놀았음.
박동희의 150KM 강속구를 가볍게 2루타로 만들었던 일본 포수 후루타가 말하길...
볼은 빠르지만 회전수가 없어 눈에 잘 보였다고!
꼰대스대스까 대스까라무스까
패해서 낙담하고 있는 선수에게 아무런 동의없이 불쑥 찾아가 인터뷰 하는 저 80년대 아나운서 클라쓰~모지리네
아나운서 아니고 농구선수출신 스포츠전문 리포터 였습니다
아무런 동의도 없이 탕크 몰고 온 놈이 대통령하고 아무런 동의도 없이 광주에서 발포명령 내린 시대에 뭔 개소리야?
박형렬이는 ob입단 후 그냥 사라졌지요
우리말도 있는데 자꾸 영어를 쓰는게 거슬리네.
무사 주자 2. 3루
우익수 등등
박형열은 처음듣는 이름인데 저는
서울고 에이스로 고등학교때는 잘 나가는 투수로 당시로선 파격적으로 고졸신인으로 OB에 입단했는데 프로에서 피지못했죠
인터뷰 진짜 촌스럽다
시작부터 재수 없게 조선일보가?
청룡기 야구대회가 방가일보 주최라서 어쩔 수가 없네요. 85년이면 전대갈과 그 일당들 한창 빨아주던 시절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