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왕조는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쇄미록에는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와 사대주의로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이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 한족은 베트남과 함께 다른 계통에 묶여 한국인과는 유전적으로 차이를 보였다. O2b : 이 유형은 가히 한국인의 고유 Y염색체의 핵심이라 할 만하다. 한국인의 37.3%를 점유하고 있으나 중국지역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한반도 이외에 O2b는 주로 일본(31.9%), 만주족(3.8%)등에 분포하므로, O2b는 가히 한국인과 일본인만의 특징적인 유전자라 할만하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만주지역에 살던 조선인들은 이들을 마적단이라고 부름)은 중국공산당 산하의 빨치산 세력인 동북항일연군이었다. 한국 독립군과 중국 호로군의 연합체로서 이들중 상당수 한국인은 중국 국적을 취득한 공산주의자들이었으며 이들 중국공산당과 연합한 광복군은 339명 이었다. 반면에 2차대전 말기 조선인 일본군 지원자는 80만 명이 넘었고, 입대 경쟁률이 62:1을 넘었다.당시 조선인들의 일본에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 알수있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왕조는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쇄미록에는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와 사대주의로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이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 한족은 베트남과 함께 다른 계통에 묶여 한국인과는 유전적으로 차이를 보였다. O2b : 이 유형은 가히 한국인의 고유 Y염색체의 핵심이라 할 만하다. 한국인의 37.3%를 점유하고 있으나 중국지역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한반도 이외에 O2b는 주로 일본(31.9%), 만주족(3.8%)등에 분포하므로, O2b는 가히 한국인과 일본인만의 특징적인 유전자라 할만하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만주지역에 살던 조선인들은 이들을 마적단이라고 부름)은 중국공산당 산하의 빨치산 세력인 동북항일연군이었다. 한국 독립군과 중국 호로군의 연합체로서 이들중 상당수 한국인은 중국 국적을 취득한 공산주의자들이었으며 이들 중국공산당과 연합한 광복군은 339명 이었다. 반면에 2차대전 말기 조선인 일본군 지원자는 80만 명이 넘었고, 입대 경쟁률이 62:1을 넘었다.당시 조선인들의 일본에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 알수있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폭군 연산군 일단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이단 조선왕중 최고의 폭군 연산은 반대로 최고의 성군이었을 수도 삼단 조선의 사대 개국공신 신의왕후한씨 방원이의 모 신덕왕후강씨 방원이의 계모 원경왕후민씨 방원이의 처 소헌왕후심씨 방원이의 머느리 신의왕후한씨 세럭은 신덕,원경,소헌왕후 세력을 차례대로 격파후 세종 등극으로 조선최고의 실세가된다 사단 연산은 조선 최초로 적장자 출신이다 정종 문종 단종은 적장자로 단명한다 조선은 세자책봉시 명 황제의 결재를 득해야한다 연산이 세자로 명황제의 결재시 드뎌 조선에 적자승계의 원칙이 지켜졌다고 명황제가 하루종일 웃었단다 기뻐서 오단 연산은 천재로 명황제의 후광으로 백년동안 조선을 죄지우지했든 사대주의 훈구파 신의왕후세럭을 척살했다 그것이 갑자사화다 결론 신의왕후한씨 세럭의 끝판왕은 명황제의 공비한씨다 인수대비의 고모이다 인수대비는 부는 명의 고위 관료이며 조선의 죄의정이고 공비의 오빠이다 남동생은 세종의 적손녀의 남편 여동생은 세종때 쩐을 관리하든 신빈김씨의 아들 계성군의 아내 세조의 머느리이고 성종의 모 연산군은 할머니 인수대비한씨를 괘함으로 죽이고 칠삭동이 한씨를 부관참시하고 직전 영의정한씨를 부관능지하고 일가친척 천여명을 사대주의 훈구파를 끝장낸다 다시 사대주의가 중종반란으로 되살아 났지만 ~~~
정조가 왕이 돼는 데 찬성하냐 반대하냐를 우리 현대의 시점에서 보는 건 의미가 없죠. 영조의 세손이 여럿이었나요 사도세자의 혈육인 정조 아닌 대타가 있었냐 하는 문제도 있고 정치적 이해 관계에 따라 답이 다르겠죠. 연산군이 사랑받지 못하고 죽은 건 알겠지만 정말 그 엄마 윤비의 폭력적 성정을 물러받으거네요. 어떻게 그렇게 악한 짓을. 엄마가 죽은 거에 대한 단순한 복수심 이상이고 요즘말로 하면 사이코네요. 폭군이 될 씨는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거겠죠.
“역적”이 아니라 “죄인”이란거죠. 역적은 왕권에 대적한단 단어고.. 사도를 뒤주에 가둔것은 궁안에서 100여명을 살해해서 입니디. 궁밖에서 여스님과 기생을 궁안으로 데려와서 계집질 했다고 이걸 영조에게 상소올린 사람은 원래 글을 쓸줄 모르는 사람인데, 상소의 사주를 추적하지 않았는데 정치적 공작이었습니다. 첫 살인이 23살이고 벤머리를 혜경궁 홍씨도 목격했고요. 궁녀나 내시를 죽이는게 그 가족들을 억울하게 한거니까, 그들의 원귀가 있다고 영조가 사도를 사사한것은 잘한 행위입니다. 아무리 왕자라도 범죄를 저질렀으면 사형시켜야지. 바른 역사를 부자사이의 살해로 착오하는것은 멍청한 짓입니다.
솔까말 아무리 아빠에게 혼나고 스트레스 받았다지만 죄도 없는 내시와 궁녀는 왜 죽일까? 솔까말 사도세자는 죽을만했음 하지만 사약 정도 먹였으면 괜찮았을 것을... 하지만 연산군과 정조는 진짜 다른게 연산군은 세상에 자기 이뻐하는 사람 하나 없이 살았지만 정조는 그래도 엄마도 훌륭하고 할아버지도 비록 아빠를 죽였지만 엄청 이뻐해주고 훈육도 잘 시켜주었음
역쉬 역사 강의는 설민석 선생님
강의가 귀에쏙쏙 들어옵니다
쵝옵니다 ❤❤❤ 보고싶었어요
그동안 너무 많이 기다렸어요
😃🤩🤩🤩
이것저것 다 떠나서.. 압도적인 스토리텔링 능력으로 청중 눈높이에 맞춰 지식을 전달하는 엄청난 재능은 정말이지 부정할 수가 없다.
선생님말씀 백번공감하고도 남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참으로 사랑으로 키우면 엇나가지 않는다는 것은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도역사를좋아하는데
정조 이야기 알게되면서 책읽으면서 마니울기도하고
수원화성을 아버지를위해 건축했다는이야기도 참 감동이여서
눈물났습니다
둘째가 좀더크면 수원화성 꼭가보고싶은 소망이 있습니다 😊
귀에 쏙쏙
맛깔난 강의
설쌤 너무 너무 반갑고 강의 너무 감동적으로 들었습니다. 더 자주 자주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힘든시대에 설쌤이 더더욱 그리웠고 기다렸습니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왕조는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쇄미록에는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와 사대주의로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이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 한족은 베트남과 함께 다른 계통에 묶여 한국인과는 유전적으로 차이를 보였다.
O2b
: 이 유형은 가히 한국인의 고유 Y염색체의 핵심이라 할 만하다. 한국인의 37.3%를 점유하고 있으나 중국지역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한반도 이외에 O2b는 주로 일본(31.9%), 만주족(3.8%)등에 분포하므로, O2b는 가히 한국인과 일본인만의 특징적인 유전자라 할만하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만주지역에 살던 조선인들은 이들을 마적단이라고 부름)은 중국공산당 산하의 빨치산 세력인 동북항일연군이었다.
한국 독립군과 중국 호로군의 연합체로서 이들중 상당수 한국인은 중국 국적을 취득한 공산주의자들이었으며 이들 중국공산당과 연합한 광복군은 339명 이었다.
반면에 2차대전 말기 조선인 일본군 지원자는 80만 명이 넘었고, 입대 경쟁률이 62:1을 넘었다.당시 조선인들의 일본에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 알수있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seromekim7798그래서 뭐 어쩌라고.......본래 저임금으로 깔아주는 노예.외노자....가 있어야 경제가 돌아가지.그시절엔 사람이 그렇게살았지.지금도 다를건없이.새삼 휴머니스트났네
울컥했습니다. 정조대왕에 대해 많이 보고 들어왔지만 오늘 강의 너~~~무 와닿네요.
역시
최고이십니다^^
설샘 반갑습니다
다시 유투버로 보게돼서 신나요
언제나 맛깔난 양념처럼 우리역사를 맛깔나게 설명해주시는 설샘 화이팅~~^^
다시 명강의를 들을수 있어서 넘 감사합니다!!
설샘!!! 응원해요!!!
역시 설샘 최고입니다.
신들의 얘기 한 주도 안빼고 다
봤는데 방송에서 다시 보고싶어요.
진짜 학창시절때는 왜 설쌤과 같은 선생님이 계시지않은걸까요ㅠㅠ
야간근무하다가 우연히 눈돌려서 선생님강의보는데, 항상감사하네요. 저는 이제 서른살이고 아직 결혼도 하지않았으나 훗날에 제게 아이가 태어난다면 정조처럼 사랑줘야겠네요
설민선생님. 다시 공부하신다는. 반가운소식을. 들었습니다
네. 누구나 실수합니다
선생님 응원합니다
돌아오는 어느날. 테레비에서. 뵐꺼예요
반갑습니다.
귀에 쏙쏙들어와요.
자주 뵐수있었음...
맞아요. 복수는 자신도 죽고, 상대방도 죽고, 결국 끝은 허무함 밖에
없어요. 정조는 위대한 왕..
사랑이 제일이죠. 사랑은 시공간을
초월하기 때문에 꼭 필요해요.
정조는 늘 신하들에게도
공부하라고 조언을 했다지요.
드디어 나오셨어요. 먼 타국에서 설쌤 강의 듣고 아이들에게 우리나라 역사를 이야기 해주었어요. 다행히 아이들이 우리나라를 존경합니다.
설쌤과 최태성 쌤 덕분에 역사에 다시 관심 가지게 된 사람이에요
다시 뵙게 되어 넘 반갑고 감사해요
전 예전에 세종을존경ㅎ겄는데 지금은 정조 태종도정말 왕의로선 멋지도 그런분이 피를 묻혔기에 세종 탄생 사도세다의 죄인의아들로써 연산군 처럼 살지 안고 중종치럼 살지안코 정조도 최고입니다
명강의 최고 입니다 너무 재미있어요 역사가 재미 있어요
역시 설명,강연최고 킹탑임
너무 재미납니다.
설민석 쌤 안녕하세요? 설쌤이 해주시는 역사강의가 참 좋은데 요즘 그리스 신화강의도 하시는데 역시 좋더군요.❤
슬쩍~
재미있으니 ^^최고 짱!!
설샘! 최고예요.응원합니다.지지합니다.
역시 설민석 샘
너무 재밌고 깊이 있는 강의였어요
설선생님~
다시 강의해 주셔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오늘도 훌륭한 강의 감사합니다
풍성한 실력과 목소리 일목요연한 전개.....
설샘 자주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ㄳ ㄳ
선생님 너무 잘 생기셨어요
목소리도 좋고
특장점이 많으신 쌤
역사 교육은 그 중 최고
설민석
기다렸지롱
당신은 특별해
이야깃꾼 천재야
반가워요
나도 속상했었어요
넘 재밌어요
그러했기에 오늘날 까지도 우리에게 세종대왕다음 훌륭한인격의 정조대왕 으로 존경받게 되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왕조는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쇄미록에는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와 사대주의로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이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 한족은 베트남과 함께 다른 계통에 묶여 한국인과는 유전적으로 차이를 보였다.
O2b
: 이 유형은 가히 한국인의 고유 Y염색체의 핵심이라 할 만하다. 한국인의 37.3%를 점유하고 있으나 중국지역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한반도 이외에 O2b는 주로 일본(31.9%), 만주족(3.8%)등에 분포하므로, O2b는 가히 한국인과 일본인만의 특징적인 유전자라 할만하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만주지역에 살던 조선인들은 이들을 마적단이라고 부름)은 중국공산당 산하의 빨치산 세력인 동북항일연군이었다.
한국 독립군과 중국 호로군의 연합체로서 이들중 상당수 한국인은 중국 국적을 취득한 공산주의자들이었으며 이들 중국공산당과 연합한 광복군은 339명 이었다.
반면에 2차대전 말기 조선인 일본군 지원자는 80만 명이 넘었고, 입대 경쟁률이 62:1을 넘었다.당시 조선인들의 일본에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 알수있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폭군 연산군
일단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이단 조선왕중 최고의 폭군 연산은 반대로 최고의 성군이었을 수도
삼단
조선의 사대 개국공신
신의왕후한씨 방원이의 모
신덕왕후강씨 방원이의 계모
원경왕후민씨 방원이의 처
소헌왕후심씨 방원이의 머느리
신의왕후한씨 세럭은 신덕,원경,소헌왕후 세력을 차례대로 격파후 세종 등극으로 조선최고의 실세가된다
사단
연산은 조선 최초로 적장자 출신이다 정종 문종 단종은 적장자로 단명한다 조선은 세자책봉시 명 황제의 결재를 득해야한다 연산이 세자로 명황제의 결재시 드뎌 조선에 적자승계의 원칙이 지켜졌다고 명황제가 하루종일 웃었단다 기뻐서
오단
연산은 천재로 명황제의 후광으로 백년동안 조선을 죄지우지했든 사대주의 훈구파 신의왕후세럭을 척살했다 그것이 갑자사화다
결론
신의왕후한씨 세럭의 끝판왕은 명황제의 공비한씨다
인수대비의 고모이다 인수대비는
부는 명의 고위 관료이며 조선의 죄의정이고 공비의 오빠이다
남동생은 세종의 적손녀의 남편
여동생은 세종때 쩐을 관리하든 신빈김씨의 아들 계성군의 아내
세조의 머느리이고 성종의 모
연산군은
할머니 인수대비한씨를 괘함으로 죽이고 칠삭동이 한씨를 부관참시하고 직전 영의정한씨를 부관능지하고 일가친척 천여명을
사대주의 훈구파를 끝장낸다
다시 사대주의가 중종반란으로 되살아 났지만 ~~~
이 정신병자가 길게 쓴 글의 요지는 조선을 깔보는 , 일본의 강제지배가 조선에 도움됐다는. 유튜브 댓글창에 논문쓰고 자빠졌네.. 일베 작작다녀라
설샘~♡
너무너무 반가워요
항상 건강하시고 언제나 행복하세요
맛깔난 역사 이야기에 더위가 날아갔어요.
감사합니다.
구독과 좋아요도 날립니다~~❤
설민석님 .좋은애기계속들려주세요 .
응원합니다 .
언제 Tv에 나오시나요
벌거벗은 세계사 같은데 나오시면 본방사수 합니다
직접 듣고도 2시간이 너무짧게느꺄질만큼 꽉차고 즐거운강의였습니다 😊
설샘 많이 기다렸습니다. 최고의 역사지식 전달자로서 늘 감사합니다!!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준다.❤❤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역시 역사는 설쌤~~!!
역시 설쌤 ❤❤❤
저때 설쌤을 실제로뵈서 좋았습니다
가서 설쌤말듣고 역사를 좋아하게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역사에 대해서 많이얘기해주세요
설샘 강의는 넘나 탁월해서 단연 으뜸입니다
역사강의 제대로~~
다시 보니 좋네요
그리고 귀여운 초등 학생들ᆢ
기다렸습니다 설민석선생님^^
앞으로는 흔들리지 마시고 낚이지 마세요!!
재미난 이야기 다시 듣게 되어 반갑습니다~
설민석쌤
열,팬
새로 나오시나요?
반가워요
오래 기다렸습니다~~^^
영조고 정조고 설쌤이 최고^^
설샘 우리 민족의 고대사도 다뤄주세요
맞아요 고구려백제 신라 영토연구에 대한 고찰도 다류ㅓ주세요. 모든 정황이 대륙설을 증명하는 판인데
대단하십니다 설쌤
역시나 설쌤~ 정조대왕의. 광팬으로써
한번도 생각지 않했던 정조가 임금이 아니돼였다면...
공부더하시길
왕의 귀환
저라면 지지 합니다 ㆍ
설쌤 감사합니다 최고입니다 👍
반갑읍니다
*강의 많이 기다려읍니다
👏🙏💝
설쌤 유툽이 있었군요 정말 팬이었는데 너무 반갑고 좋아요 알고리즘이 갑자기 여기로 데려왔어요 구독합니다😊
진짜 시간 가는줄 모르겟다
설샘 반갑습니다 ❤
지지합니다 그렇게 훌륭한 임금이 어디있습니까 말조심하셔야 되겠네요
정말 반가워요 설민석님
👍❤❤❤
연산은 엄마가 없고 정조는 엄마가 계셨다
엄마의 사랑으로 키운 아이라서 잘 자란거다
혜경궁 홍씨와 그 일문들이 정조에게도움이 된게 있을까요?
설교수님 강의 감동입니다!!
💕 은 모두를 춤추게합니다!!❤
영조의 정신감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럼 사도세자를 왕 시키리? 살인마 인데??
@@IamGaeDeungSin 살인마로 만든게 영조인데??
사실 역사는 암기가 아니라 재미있다는 걸 처음으로 하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다시 하심 되죠
그 시대와 함께 한자 : 설샘
사랑하면 정조된답니다~~~
♡♥♡
가서 직접 듣고싶었는데 못가서 넘 아쉬웠던
연산군이 얼마나 사랑을 못받고 자랐으면 저질인간이 되었을까
사람은 사랑을 받고 자라야 문제가 없다
"역사는반복됀다" 설쌤강의감사합니다
아직도 설민석을 역사학자라고 믿는 사람이 있네.
와~ 설쌤이당!!!
ㅡ연산군은 어머니에 대한 의문을 갖고 자란게 아니고 장녹수 통해 폐비의 피묻은 한삼 전달받고 돌았다고 하는데 좀 더 공부 해보시고.. 정조가 왕이 된게 천만다행😊
하마터면 옷소매 붉은끝동
못볼뻔 했네ㅋㅋㅋㅋㅋㅋ
설샘 그리웠ㅇᆢ요
봐라 이시대는 누가왕이 되어도
아픔이있다
지금 이시대처럼
❤❤❤
역시 설쌤~~
광고
이러다가
-10%이상 급락이
한번이상 나와줘야
오르는 패턴이네요.
지금은
매수하지면 손해봅니다 ㅎ
정조가 왕이 돼는 데 찬성하냐 반대하냐를 우리 현대의 시점에서 보는 건 의미가 없죠. 영조의 세손이 여럿이었나요 사도세자의 혈육인 정조 아닌 대타가 있었냐 하는 문제도 있고 정치적 이해 관계에 따라 답이 다르겠죠.
연산군이 사랑받지 못하고 죽은 건 알겠지만 정말 그 엄마 윤비의 폭력적 성정을 물러받으거네요. 어떻게 그렇게 악한 짓을. 엄마가 죽은 거에 대한 단순한 복수심 이상이고 요즘말로 하면 사이코네요. 폭군이 될 씨는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거겠죠.
살아있었네 ㅋㅋ
헐. 헐. 헐.
그대에게~~~
민석쌤 연산이 있었을땐 민란도 없었어여 그렇게 미부였다던데
왜 성덕임과 그아들은 일찍죽었을까?
왜 정조께서 일찍 승하했을까?
참으로 당쟁의 비밀이 있었을것
7살에 왜 모르냐
다 알지
그래서 반대하는 이유는 뭐였던가요?
정조 대왕 이야기를 듣다보면 노무현 대통령 생각이 납니다.
ㅋㅋ
반대할 위치가 되려나요
“역적”이 아니라 “죄인”이란거죠. 역적은 왕권에
대적한단 단어고.. 사도를 뒤주에 가둔것은 궁안에서 100여명을 살해해서 입니디. 궁밖에서 여스님과 기생을 궁안으로 데려와서 계집질 했다고 이걸 영조에게 상소올린 사람은 원래 글을 쓸줄 모르는 사람인데, 상소의 사주를 추적하지 않았는데 정치적 공작이었습니다. 첫 살인이 23살이고 벤머리를 혜경궁 홍씨도 목격했고요. 궁녀나 내시를 죽이는게 그 가족들을 억울하게 한거니까, 그들의 원귀가 있다고 영조가 사도를 사사한것은 잘한 행위입니다. 아무리 왕자라도 범죄를 저질렀으면 사형시켜야지. 바른 역사를 부자사이의
살해로 착오하는것은 멍청한 짓입니다.
정조야,영조대왕 정비의 맏손자였으니,
말않하면 아무일 없을 것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씀
역사 일타강사 설은영쌤이네ㅡ ㅋ
솔까말 아무리 아빠에게 혼나고 스트레스 받았다지만 죄도 없는 내시와 궁녀는 왜 죽일까?
솔까말 사도세자는 죽을만했음
하지만 사약 정도 먹였으면 괜찮았을 것을...
하지만 연산군과 정조는 진짜 다른게 연산군은 세상에 자기 이뻐하는 사람 하나 없이 살았지만 정조는 그래도 엄마도 훌륭하고 할아버지도 비록 아빠를 죽였지만 엄청 이뻐해주고 훈육도 잘 시켜주었음
영조같은 부모랑 살아보세요 ㅋ 영조는 정말 결핍도 심하고 진짜 영조가 장성왕후 서씨한테 했던거보면 사도세자가 안 미칠수가 없었을겁니다
만약에 정조대왕께서
노론벽파와 정순왕후를 숙청했다면 ..조선을 자주적 개방했다면....
왜요
40대 후반이요?
동안에
목소리도 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