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4 가 결정적인 장면입니다. 1950년 7월 24일, 남원에 입성한 방호산과 6사단. 더구나 김일성으로부터 부산 진격 지시까지 받은 상황. 그런데 굳이 남쪽에 있는 순천으로? 오죽하면 당시 미군 지휘부에서도 방호산의 행동을 미스터리라고 불렀습니다. 이 컨텐츠에서는 바로 그 미스터리의 원인을 다룬 것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6.25전쟁 기간 중 민간인 학살이 가장 많았던 지역은 전남, 전북, 충북, 충남, 강원 순서라고 공식 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ruclips.net/user/postUgkxMrs4rAZnHQitpshxQT_BaevPjt7TVhE- (6.25전쟁 기간 중 민간인 학살 공식 통계)
@@김현익-n2j 방호산이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닙니다. 더구나 김일성에게 부산진격 명령까지 받은 상황에서 굳이 순천을 찍은 것은 도시하나라도 더 북한영역으로 만들려는 욕심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순천을 찍은 후 방호산이 바로 진주, 마산으로 쾌속 진군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미 늦어버렸죠. 8월 1일에는 미군에게 포착되니까요. 1950년 8월 3일, 마산방어전투는 그래서 벌어집니다.
저는 외갓집이 없습니다 6.25전쟁시 어머니께서 전사 했다 하셨는데 국방부에 몇일전 장병이 찾아와 DNA검사를 하고 외삼촌 과 같다면서 돌아가서 전사한곳이 통보가 와서 1952년도 12월 강원도 금성전투서 전사 현충원에 묻햐 있었습니다 국방부 관계자들 정말 눈물나게 고맙습니디 추석명절 지나고 현충원에 외삼촌 을 찾아 인사 드리려 합니다 제가 태어나서 3개월후에 전사 하셨군요 외삼촌 외동입니다 못다한 일들 제가 살아 생전 외삼촌 제사 지내드리겠습니다 보고싶은 나의 외삼촌 눈물납니다
바로 이 컨텐츠에서 묘사된 김성은의 국군 해병대의 활약입니다. 개인적으로도 너무나 영화같습니다. (06:43) 뒤늦게 낙동강 방어선으로 달려오는 북한군 6사단 선발대. 그리고 미 25사단보다 먼저 달려오던는 국군 해병대. 이들이 딱 마주쳤던 그 이야기를 이 컨텐츠에서 최초로 다뤘습니다.
방호산 부대가 호남을 휩쓸었던 이유는 통치 외에도 보급 문제가 있었을듯 합니다 호남을 확실히 점령한후에 곡창지대인 호남지역으로 부터 군량미와 같은 보급을 공급 받기 위해 그런것은 아닌가 추측되네요 이미 남부 지방으로 전진하면서 기존의 보급로도 길어졌고 미군의 공습으로 보급이 자주끊겼습니다 진주 마산 부산을 공격하더라도 지역에 호남 을 남겨 두면 보급문제 때문에 곤란을 겪을 가능성이 큽니다 호남을 확실한 점령 이후에 진주 마산을 공격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늦어진 타이밍 덕분에 낙동강 방어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죠 대한 민국에 천운이 따른것 같습니다 "멸공"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보급을 공급받기 위한 항구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는 말은 인터넷에도 나왔던 이야깁니다. 그러나 09:42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1950년 7월 20일부터 앞으로 10일간은 남한을 완전히 끝낼 절호의 기회가 다가온 상황이었습니다. 온통 북쪽만 바라보고 있는 한미 연합군. 7월 20일에 방호산이 전주에 도착한 것은 지금에서야 아는 것이지 당시에는 그 누구도 신경쓰지 못했습니다. 또한 7월 20일 그날은 김일성이 보급물자와 추가병력까지 보내며 부산으로 진격하라고 명령한 날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남원을 거쳐 순천으로 내려간 것은 방호산이 부산을 가기 싫었던 것이 아니라 순천에서도 뿌리 좀 뽑아볼까 하는 의도로 간 거라고 보는것이 합리적입니다. 이 내용은 개인 생각이 아니라 최근 마산방어전투를 조명해야 한다며 국내 학계에서 새롭게 밝혀진 내용입니다.
감사합니다. 05:06 부분을 주목하십시오. 7월 24일, 방호산과 그의 6사단은 남원에 있었습니다. 그 때 오른편의 진주, 그리고 창원(마산), 부산까지 지키는 부대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방호산은 순천으로 향합니다. 실제로 8월 1일, 방호산의 6사단이 처음 미군에 포착됩니다. 미군에게 발각되기까지 귀중한 일주일 기간, 방호산은 인민재판을 하고 식량을 공출했을 겁니다. 만약 방호산이 순천으로 가지 않고 그냥 동쪽으로 갔다면 8월 3일에야 마산에서 가로막는 미 25사단과 싸우지 않고 7월 안에 충분히 부산까지 갔을 것입니다.
@@만물상자TV전쟁의신뭐 그정도까지는 않았을거고 좀더일찍 마산방면 전투가 시작되면서 낙동강전선에 대한 지원이 줄었겠죠. 그래서 낙동강 전선 어딘가에 전선이 돌파되어 위기가 있었을수는 있으나 전후 북한의 상태가 공개된 8~9월 북한국의 상태를 본다면 대구점령이 될까말까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래도 위험하긴했습니다. 전력이 많이 약화된 6사단으로 부산까지 점령은 불가능했다고 판단됩니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왜 정예사단인 6사단이 호남을 지그재그? 식으로 다니면서 작전을 해야만했나 최근 미국과 구소련 한국전 보고서등이 공개되면서 제기된 이론은 스탈린의 명령을 받은 소련 군사고문단이 미국의참전시간을 벌어주기위해 뺑뺑이?를 일부러 돌렸다는것 이유는 모택동의 중국을 참전시켜 미래의 중국역량을 약화시키기 위함요 좀 거시기하지만 국제정치라는것과 당시 스탈린이였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요
@@afrcanus1992 궁극적 목적이 매우 중요하므로 반드시 구별해야 한다 봅니다. 일본에서의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과 공산국가 건국을 위해 싸운 사람은 다릅니다. 공산주의자들을 거기다 슬쩍 집어넣고 영웅화시켜서 거부감을 줄이려는 속셈은 이해하는데 그렇게는 곤란하죠. 항일활동은 인정하되 목적은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그때 죄없는 민간인들 많이 죽었습니다. 재산 뺏기고, 목숨 잃고, 반국가 세력들이 죽창으로 죽이고, 산매장 시키고 지극히 잔인했습니다. 우리는 남침625를 절대로 잊으면 안됩니다. 지금도 우리 자유대한민국에는 그때 처럼 반국가 세력이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전남권은 그날의 기억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됩니다.
동숭동 혜화동 서울대병원에서 후송된 부상병들이 북한군에 의해서 학살된 후 쓰레기처럼 겹이 쌓인 채로 버려졌다고 합니다. 시신이 썩어서 악취가 진동할 때쯤 그대로 휘발유 부어서 태워 버렸다고 하더군요. 서울대병원에 위령비 자그마한 거 딸랑 하나 있고, 좌파 정권 집권기에 인근에서 인골이 대량 나왔는데 유야무야 처리한 신문 보도 있었지요
전쟁 전, 전쟁 중에도 빨치산 활동이 많았었는데 특히 유명했던게 제주도 빨치산, 지리산 빨치산들.. 채명신 회고록에서도 관련 이야기를 봤던 기억이 드문드문 남아있는데 그중에 채명신 장군이 백골부대로 이북에서 유격대 활동을 했다는 그런 이야기가 기억에 남아있네요 나중에 빨치산 관련해서 영상도 나왔으면 좋겠어요
말씀하신 그 만행의 주체는 방호산의 6사단이 한 짓이라고 보면 정확합니다. 6.25전쟁 기간 중 민간인 피해가 가장 큰 지역이 호남지역입니다. (공식기록) 호남지역에 머물렀던 북한군 사단은 방호산의 6사단 뿐입니다. 그래서 이 컨텐츠의 주제인 북한군이 호남지역에 오래 머무른 이유가 신빙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 컨텐츠의 내용은 개인 주장이 아니라 최근 국내 학계에서 나온 내용입니다.
@@만물상자TV전쟁의신반공사상은 어릴적 방학이면 찾아가던 시골 고향집 할머니의 저녁마다 호롱불 아래서 들려주던 전쟁 체험담을 통해서 자연스레 형성하게 되었지요~! 인민군이 살아있는 사람을 트럭에 매어달고 하루종일 동네를 질주하여 뼈만 남아서 죽이더라는 목격담이며 대청마루에 앉으면 멀리 가물가물하게 보이는 유학산에서 밤새 전쟁하던 이야기 등~!
@@광말헌남 친형 박상희가 원래 독립운동가였슴 공산주의에 빠저 남로당에 가입하고 동생 박정희를 남로당군사책이라는 직함을 올려놓음 박정희는 남로당활동은 전혀 없슴 1948년부터 백선엽이 남로당을 잡아들이기 시작하여 박정희도 끌려옴 박정희가 내일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처지에 박정희가 남로당활동 안했다는 여러 증언이나오고 동료들이 구명활동을 해줌 극적으로 사형선고를 면함 이때 박정희가 대구 모사단에 숨어있는 남로당 명단을 넘겨 남로당색출에 공을세움 남로당은 6.25발생시 위로는 북한군 남쪽에는 남로당이 폭동하면 한달내 대한민국을 공산화 시킨다는 목표를 가지고 세력을 엄청나게 확장 하고 있던중임
감사드립니다. 낙동강 방어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미 8군 사령관 워커장군은 왜 북한군 6사단이 호남지역을 순회하듯 돌아다녔을까? 그들이 바로 부산방향으로 직행했다면 우리는 지금쯤 부산 앞바다에 빠졌을 것이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컨텐츠는 바로 그 의문에 대한 답이 될 것입니다.
이 컨텐츠의 핵심은 매우 간단합니다. 05:00을 보시면 1950년 7월 20일, 방호산 소장은 전주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정확한 기록입니다. 당시 전 북한군이 뭘 목표로 싸웠는지 아십니까? 바로 부산입니다. 그런데 방호산만 남원 (7.24) 그리고 진주가 아니라 순천으로 간 것입니다. 굳이 순천을 찍을 필요가 있었을까? 방호산은 순천을 찍고 난 후 그야말로 미친듯이 마산으로 달려갑니다. 결국 마산 근처에 이르렀던 1950년 8월 1일. 그때서야 미군 지휘부는 북한군 6사단을 포착합니다. 방호산도 이렇게 될 줄 몰랐을 것입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7월 24일 남원에서라도 바로 부산으로 달렸을 것입니다. 방호산은 왜 굳이 호남지역 도시들을 모두 찍고 부산으로 간 것일까? 그 이유를 밝힌 것이 이 컨텐츠의 주제인 것입니다.
@@가등청정 반갑습니다. 저희 조부님도 전북지역 경찰이셨습니다. 개전초 국군 없이 경찰만의 부대로 괴뢰군(방호산 부대)을 막다 패퇴하여 산으로 후퇴 후 잡혀 처형 당하셨습니다. 그 후 가족(할머니, 아버지 형제들...)들은 또 도망 다니고 고생은 말도 못하였다 하십니다.... 공산 학정시 학살 당한 우익인사 가족들이 수복후 괴뢰군 앞잡이들 잡으러 다니셨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저희 외할아버지도 해남경찰에 복무중 북한군에 부대가 괴멸되고, 산으로 숨어들어가 인천상륙작전으로 호남지역이 해방되고 나서 산에서 내려 오셨습니다. 저희 어머니(44년생)께서는 할아버지를 잡으려고 집에 찾아온 인민군들 중에 소년병이 잠시 놀아줬던 기억이 있으시다고 하네요.
@@skynew0633 야 이 씹새키야.. 우리 할아버지도 경상도 분이시고 같이 참전하셧던 동년배분들도 10분넘게 계셧지만, 그분들이 왜 빨갱이소리 않하겠노... 서로서로 싸우면서얼마나 아팠고, 주위분들중에 친구한두분 이상은 다 돌아가셨다.. 그런 상황에 좌익이니 빨갱이가 버티고 살고 있었겠냐.. 이 짱구만도 몬한새키야.. 그분들 다음 세대가 이상한 교육을 받아서 한번도 못본 빨갱이 빨갱이 타령하지.. 너같은 완전 모질이 새키들이.. 일본이 2차대전 끝나고 우익이 없었다.. 알겠냐?? 그 다음 세대에 우익이 생겨났지 안겪어본것들이 현실의 무서움은 모르고 이빨만 털지.. 본인 모자란건 모르고, 에혀 불쌍한 인생아..박정희가 남로당원이었어. 알겠냐
예전 아버지 말씀중 북한군이 호남으로 왔을때 미군이 다수있었다고 합니다.그 때 미군이 전사하면 민간인들이 미군 손목시계나 가지고있던 물품 몰래 취하 다 인민군한테 걸려 몰매맞는걸 많이 봐다고 합니다.인민군이 어느날 물러가 고 징집되어 전장으로 같다더군요 훈련은 총쏘기 수류탄던지기 포폭만 배웠다고 합니다.눈옆에 총 한방스쳤고 팔에 관통상입었으나 치료후 계속 전투 임해다더군요.중공군은 싸움은 못하는 데 숫자가 개미때 같았다고 줄지어서 뛰어오는게 어마어마 했답니다.
호남 지역의 만행이 방호산 사단의 짓이라? 6.25전후 호남의 좌익들이 저지른 짓을 책임 전가하는것 같네요. 호남의 우익인사나 군경의 가족들을 죽인거 살아계신분들의 증언들이 남아 있는데 이건 아닌것 같네요. 솔직히 호남은 6.25때 방어 포기한 죄, 좌익들이 저지른 죄값은 반드시 치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NOBODY-yj1ci 정확히따지면 김일성은 1955년에 벌어진 대기근 사태를 벗어나기 위해 군부부터 김일성을 지지하는 만주파 이외의 타파벌 군인을 숙청했고요 연안파였던 방호산도 그 때 숙청당했습니다. 이듬해엔 김일성이 소련과 중국 순방간 사이에 김일성을 비판한 연안파, 소련파, 갑산파 멤버들이 김일성의 귀국 이후 모두 숙청되었고 그 후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려다가 발각되서 비만주파 인사들이 모두 처형됩니다. 방호산은 숙청 이후 탄광소장으로 좌천되었는데 반란을 꾀했단 누명을 써서 총살당했다고 한네요
6사단에도 기갑 전력이 있었는데(상당수가 사천에서 철수하다가 미 공군에 괴멸됨), 당시 도로를 확인해 봐야하겠지만, 전주-광주-목포-순천-진주로 이동하는 것이 맞았을 듯. 부산 점령을 위해 6사단은 조공이고, 도로 사정상 경부선과 문경-상주-영천/대구 2개 주공으로 국군,UN군 방어선을 뚫어야. 북한군의 남침 작전은 쏘련이 기획해 줬다고 봐야, 대대장, 중대장 하던 실력으로는 현대전 작전 기획하지 못함. 동북 출신 조선인 부대는 국군에 비해 엘리트이지 중공군에서는 투항군(?). 모택동이 한국전에서 조선인 부대와 운남 출신 부대를 많이 소모시킴
돌아가신 부친에게 여수,순천,강진 등 전남 지역 학도병으로 구성된 부대로 순천에서 50년 7월에 전주 근교까지 올라갔다가 철수하는 국군을 따라 남원까지 후퇴한 뒤 남원 인근에서 경남지역으로 후퇴하기 위해 섬진강을 건너려고 구례 하동 방면으로 후퇴하다 북한 6사단에 따라잡혀 쌍계사 부근에서 전투가 있었고 패퇴된 병력이 하동으로 철수 했다고 들었슴
이 컨텐츠의 고정댓글에 6.25전쟁 기간 중 학살당한 한국인들의 통계 자료를 올려놨습니다. 전쟁 통에 죽은 것이 아니라 학살당한 통계입니다. 전남지역이 전국 1위를 차지했습니다. 방호산의 6사단이 그 주인공이라고 밖엔 설명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전남지역이 점령당한 것은 한번 밖에 없었거든요.
방호산은 공산당교육을 제대로받았고 중공팔로군으로 전투경험도많아 그의6사단은 북한최정예부대로 진격,후퇴 작전 모두 공이컸다고 전쟁이후 영웅칭호를받았으나 결국 55년 숙청당함 방에 비하면 김일성의 경력은 초라할 지경 일성은 오로지 소련의 후원을 받아 권력 찬탈 소련입장에서 독자적인 세력이 적은 일성이 꼭두각시로 안성맞춤
할아버지가 전주 인근에서 군수를 하셔서 숨어 계셨고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초등 중학년 또래였는데 공무원 가족이라 어디론가 데려갔다합니다. 아마 학살 당할 상황이었던듯 한데 다행인지 지역 공산주의자중 지인분이 어린애들이라 따로 보내줘서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올 수 있으셨다 합니다. 😂
안녕하십니까 만물상자님 영상 잘 봤습니다. 김성은의 해병대가 막는데 결정적인 역할 을 해주었네요! 해병대 포위망에 걸린 이상 6사단 정찰대는 사실상 전멸했네요 그게 제일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어요. 미 25사단이 도착했을때는 이미 해공군의 압도적우세라서 마산을 돌파하는건 거의 물건너 간거지만.. 이 상황에서 만에 하나 마산에서 조금 뚫렸어도 낙동강 방어전의 영천전투처럼 전개가 되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데요.. 6사단이 워낙 정예라 달리 봐야되나 싶기도 하고..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영상을 보다가 그 생각이 나더라구요
김성은의 해병대 300명은 너무나 상황이 급박했기에 마산으로 먼저 이동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드라마틱했던 것은 너무나 배가 고파 인근 주막에 주먹밥을 요청했는데 바로 그날 밤에 그 주막에 북한군 6사단 선발대가 왔다는 사실입니다. 방호산도 뒤늦게 상황 파악을 하고 선발대를 먼저 보냈던 겁니다. 방호산의 마음이 급했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방호산도 마산만 뚫으면 바로 부산이고 지키는 병력도 없음을 안 것입니다. 더욱 드라마틱한 것은 미군 25사단이 2일 동안 달려와 방호산을 막았다는 사실. 이 컨텐츠에서 자세히 지도로 알기 쉽게 보여줬지만 그 당시는 모두가 북쪽만 바라봤지 서쪽에서 오는 북한군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방호산이 7월 24일 남원에서 부산으로 진격을 하지 않고 순천으로 간 것이 결정적인 실수였습니다. (05:06) 워커가 북한군 6사단의 위치를 파악한 것은 8월 1일이 되서였습니다. 때문에 방호산이 내버린 시간은 7일입니다. 그는 왜 그렇게도 호남 구석구석에 미련을 못 버렸을까? 그 이유를 이 컨텐츠가 잘 보여줍니다.
경남 창녕에서 마산 고동리로 먼저 내려간 김성은과 국군 해병대 300명. 내막을 알고 본다면 이것은 무척 감동적입니다. 마산으로 방호산의 선발대가 오고 있었기에 너무나 급박했던 워커장군은 김성은 중령의 국군 해병대 300명을 먼저 보냈던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마산 고동리에 있던 이름 모를 주막집에서 만나게 됩니다.
해병대 채상병 사망 사건은 정말 안타깝고 국가의 부름을 받고 구조 활동을 하다 빚어진 일이기에 최고의 예우를 해야 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도 없고 이용해서도 안된다고 봅니다 세계 어느 군대나 마찬가지겠지만 평시 훈련 시 비전투 손실이 발생하기 마련이고 또 대민지원을 하지 않는 군대는 없습니다 그래야 군이 국민의 군대가 될 수 있고 국민들로부터 지지와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래서는 안되겠지만 훈련 중 안타까운 사고로 목숨을 잃는 사례가 과거에는 훨씬 많았고 외국 군대도 지금도 있습니다 사고를 한 건도 나지 않게 한다는 것은 훈련을 안하고 내무반에 쉬게 하고 대민지원을 나가지 않으면 됩니다 집에 가만히 있으면 지하철 사고,신림역,서현역,예전 삼풍,성수대교 사고를 안 당할 겁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 있는 삶이겠습니까? 국가를 지켜야 하는 군인이 지금은 정치 도구가 되어서 그냥 무사안일주의로 고착화된지 오래이고 어린이가 되어서 부모님들께 전화로 일러 바치고 있습니다 군대 안 가서 징역살다 노 대통령 특사령으로 반만 살다 풀려난 동성애자 임태훈이 설치고 다니는데 왜 군 행정에서 못 쫒아 냅니까? 군대 내 감성적인,비이성적인,통일운동에 치우친 간부들을 숙군 작업을 통해 군을 개혁해야 합니다 지금 군대는 군대가 아니라 병영체험장이 돼 버렸습니다 훈련소 야외교장 재래식 화장실도 수세식으로 바꿔달라고 하는가 하면 힘 센 사람이 고참이 되다 보니 기술전수가 불가능합니다 재래식 화장실도 써 봐야 전쟁 시 산에서 볼일을 보기 쉽고 또 나뭇잎으로도 해결할 수 있어야 하는데 휴지 없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15%만 선발해서 훈련하고 85%~80%는 뒤에서 시간만 때우다 복귀한다고 합니다
중요한 역사 영상 잘 보았습니다. 호남권 정치인들이 인민군에 의한 국민의 희생을 언급조차 하지 않는 이유와 일본x 앞잡이 노릇한 인사들에게는 거품을 내 물면서도 6.25당시 완장 차고 죽창들고 인민군 앞잡이 노릇한 사람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못하도록 하는 이유가 이 영상을 통해 짐작이 가네요.
야이 일베 같은 좃아 ! 뭔 귀신씨나락 까먹는 소리냐? 호남지방은 민족주의 성향 즉 네셔널리즘이 아주 강한 지역이어서 외부세력에 강한 반동을 가진 지역이다 ..그래서 외침이 있을때마다 강하게 의병이나 저항이 많은 지역이고....호남에서 공산주의이라니? 호남출신 공산주의자가 누가있나? 빙신아..왜곡하고 물귀신처럼 잡아 끌지마라..
돈 좀 있다고 아니면 가족중에 공무원 있다고 온가족이 몰살당한 사례가 호남지역에서 가장 많이 일어났죠.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갓난아기까지 30, 40명 일가족을 모조리 끌고가서 잔인하게 죽이고 시체를 아무데나 버렸습니다. 서울대에 진학했다가 고향집에 온 학생도 공무원 가족이라고 죽였고 온가족이 끌려가 죽는 것도 모르고 이웃 동네에 놀러갔다 귀가하는 어린이도 몽둥이로 때려 죽이고요. 평소에 알던 마을 주민들이 적극 앞장서서 이런 만행이 가능했고요. 나중에 우익들의 보복이 있었지만 당사자만 죽였지 가족까지 몰살시켜서 씨를 말리지는 않았습니다.
님이 말한 사례가 우리 외가의 경우인데 화순지역에 거주한 밀양 손씨로 외할아버지는 큰 토지를 소유(집은 당시 인민군 장교 숙소로 징벌) 했었고 큰외삼촌은 화순군청 공무원, 큰 이모는 교사, 둘째 외삼촌은 국군 중위로 외가 일가족이 한날, 한시에 집단으로 몰살됐습니다. 나의 어머니와 작은 이모(다행히 당시 전남광주 수피아여고생으로 광주거주)만 살아 남으셨고 외가 뿐 아니라 외가의 사돈 가족들 까지 모두 살해됐습니다. 외가의 묘는 하나 입니다. 한날한시에 일가족을 처형하고 한 웅덩이 뭍어 놓은채 몇년이 지나 시체를 수습하지 못해 그렇다고 했습니다. 90년대 후반 이 사건을 알아보려 했지만 자료는 없고 오히려 좌익 활동을 하다 처형된 조사만 있어 문제라 생각했습니다. 좌익을 집단학살한 장소와 사건의 개요(예로 과거사조사위원회 등과 같은 기관)는 연구도 세세히 되고 자료도 많이 축적되어 있던데 님이 말한 우익들의 학살사례나 외가의 경우 자료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대한 자료를 찾아볼 수 있는데가 있을 까요? 저는 조국이라는 금수만도 못한 놈과 민주당을 장악한 86과 87들은 국가를 공동체로 인정하지 않고 허위이념을 내세운 전체주의 파시스트집단으로 인간기생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영 퍄권을 내세운 혐오나 증오, 적대적 대립이나 갈등보다 사회통합이 중요한 사회과제라는 입장입니다. 이 과제에 필요한 전제가 님의 댓글처럼 전남북지역에서 벌어진 집단학살을 규명하는 것이고 이런 측면에서 좌파들의 피해는 자세한 자료와 함께 연구되어 있는데 님이 말한 우리 외가와 같은 경우는 자료는 커녕 조사조차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 문제가 매우 크다 생각합니다.
@@tinwoodman1575 저는 이분야 전문가는 아니고 올해 1월 9일자 조선일보 기사 "6·25때 좌익의 학살....부자·경찰 가족이라고 죽이고 아기까지 水葬" 이라는 기사를 읽고 알게된 겁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조사를 마친 6.25 민간인 희생자 1039명 중 좌익이 집단 학살 (일가족 7명 이상 학살) 당한 사람이 308명으로 밝혀졌습니다. 7명이란 기준도 임의적이고 물론 실제 학살당한 사람 수는 수백수천배 되겠죠. 우익이 일가족 7명 이상 학살한 사례는 없어서 기준을 3명 이상으로 낮춰서 집단학살 40명이 된다 합니다. 일가족 학살은 좌익들만 저지른거나 마찬가지죠. 10세 이하 어린이 학살도 좌익들만 저질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대한민국 군경이 학살주체이면 국가에 보상을 요구할 수 있지만 북한군,좌익이 학살주체이면 그렇지 않기 때문에 주체가 불분명하면 군경, 우익을 가해 주체로 지목하는 동기부여가 된다는거죠. '김광동 진실화해위원장은 “교과서에서 보도연맹 사건이나 노근리 사건 등을 부각하고 좌익·인민군의 학살은 얼버무리기 때문에 6·25 당시 민간인 희생은 우리 군경이 주된 가해 주체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이번 조사는 좌익의 학살이 어린이와 여성, 고령자를 가리지 않는 비(非)인도적 가족 집단 학살이라는 점을 일깨워 주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진실화해위원회에 문의하면 정보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맞습니다. 신안군 지도 임자도에 살았는데 1979년 1학년때 담임선생님이 1500명 이상이 학살되었다고 말씀해 주셨죠. 아버지 말씀으로는 후퇴하면서도 학살했고 집마당에서도 인민심판으로 수십명 학살하고 인민위원장이 되서 형제도 죽이고 이런 사실은 밝혖지지 않고 왜 그런교육은 하지 않는지 모르겠네요.
방호산 6사단 혼자 7천명 델구 부산 갔으면 과연 이겼을까? 포위섬멸로 다 전멸하지 않았을까? 초반에 몇일 혼란스럽다가 미군이 전멸시켰을 가능성 99% 일간데 방호산도 혼자 진격하면 부대원 몰살이니까 시간적으로 버틴듯 합니다. 전채적인 포위망 형성을 기다린듯한데요. 팔로군 시절부터 함께한 부대원들에대한 애착이 엄청났을듯요
방호산이 호남에서 오래 머문 이유가 호남에서의 군정작전이었다니?그럼 호남에서 군정작전을 할 시간에 빨리 부산을 점령했다면 과연 현재가 있을까요?내가 봤을때 방호산이 국공내전,중일전쟁 때에도 이런 선무공작을 포함한 군정작전을 중국에서도 벌일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런 작전을 한반도에서도 벌리니 마오쩌둥이 따로 지시를 내렸다는 말이 나돌았죠!!근데 이게 방호산 본인의 자의적 판단으로 한 것을!이걸로 김일성에게 숙청당했다는 것!!
@@솔저오브포츈 갑자기 전라도는 뭔 말이고 조선족은 뭔 말이지요.. 차라리 가만 있으면 중이라도 갈텐데 이런 얼치기같은 댓글 달면 기분이 좋아지나요? 신라인들은 자신들이 중국 진나라를 피해온 중국후손이라고 주장했어요(삼국사기 참조) 또 광개토비를 보면 경주 일대에 와놈이 성마다 가득했다고 돼있는 것보면 잡종지역이지요.. 잡탕이다보니 상모지리같은 윤퉁과 파렴치년 줄레를 찍어주고 이를 옹호하는 국짐당의원에 표주고 잡탕짓을 하는거요.. 오히여 대구경북을 중심으로 보수니 진보니를 떠나 정신이상자 구역같아요.. 미친새키덜 아니냐구..
영상에도 나왔듯이 군인 가족 공무원 가족들 학살 하느라 늦음. 예전 우리 할머니 말씀에 중국말 쓰는 조선족애들이 와서 그랬다고 하는데, 이제와 보니 6사단 애들이었겠네요. 어린애들도 싹다 죽이고 쌀창고에서 쌀 다 빼가고 창고 불지르고 부르주아라고 동네 유지들도 처형했다고 하니 지옥이었죠.
말씀하신 것이 정확합니다. 이 컨텐츠에 자세히 묘사되었지만 당시 국군과 미군은 북쪽에서 북한군을 막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방호산에게 옆구리로 쳐들어올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미군조차 무주공산 상태였습니다. 그냥 내달리면 쉽게 끝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워커장군도 후에 언급했던 내용입니다.
@@옌니-h2s 빨치산은 인천상륙작전으로 후퇴 못한 인민군들이 어쩔수 없이 지리산에 숨어서 한 행동이죠.역사를 알고 좀 까야지...참 억지스럽네요. 참고로 저희 외할아버지도 인민군 잡혀서 죽을뻔 했고요. 저는 공산당을 누구보다 싫어합니다. 지금의 전라도 이미지를 만든놈은 전두환 노태우죠. 지들의 학살을 북한에 동조했다고 악의적으로 거짓선동했죠. 정치인들에게 선동당하면 국민들만 죽어나가요.
참고로 항일독립군과 항일빨치산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고싶은 말은 항일 무장단체의 두가지 부류가 다른점은 무장투쟁 행위가 다르다는게 아니라 그들이 정치적 지향점이 항일독립군은 우리민족의 독립적인 나라를 건국하는것이 첫번째 목적인 반면 항일빨치산은 우리민족이 건국하는 새로운 독립국가의 이념으로 공산주의(사회주의) 국가의 수립이 첫번째 목표라는 것임.
방호산이 어떤 인물인지, 그리고 당시 독립군이라는 집단이 어떤 집단이지 알고 넘어가야할 필요가 있다 방호산은 항일 운동가 즉, 독립운동가란 말이지 중국에서 할동했던 독립군이라고 하는 집단은 해방 이후 모두 중국군에 편성, 6,25 전쟁의 모택동과 김일성의 최선봉에 서서 대한민국 국민을 도륙한 집단이지 그 대표적인 인물이 항일 운동가로 지칭되는 방호산을 비롯해 부지기 수다 한 마디로 중국에서 독립군이라 행세했던 집단은 모두 공산당(김일성 졸개)이라 봐도 무방하지 않나? 김구까지도 포함되지 정율성 동상이 어디에 세우려 했다니 기가 막힌다 전라도 에서는 이런 자들을 기를 쓰고 추앙하려하니 방호산이 전라도에 오래 머문 이유도 나오겠지?
6.25전쟁 당시 북한군이 호남지역에 무혈로 입성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된 것은 미 8군 사령관 워커장군의 작전이 그랬기 때문입니다. 미군은 대전전투 패배이후 금강유역에서 버티는 것을 포기합니다. ruclips.net/video/ggmNltdxpvc/видео.html (대전전투 패배! 미군의 사단장인 윌리엄 딘 소장은 전라도 산속을 헤매야 했다.)
03:43 에 방호산과 김일성의 차이가 등장합니다. 방호산은 김일성하곤 다르게 모스크바에서 공산주의를 공부한 엘리트 이념주의자였습니다. 더구나 바로 부산으로 진격하라는 김일성의 명령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어찌되었을 것 같습니까? 방호산 부대는 연대장이 2명이나 죽습니다.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부대의 건재를 유지하고 태백산맥을 통해 북한으로 도망칩니다. 부대건재를 유지했기 때문에 이중영웅 칭호를 받으며 북한의 영웅이 됩니다만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는 종파분자로 몰려 김일성에게 숙청당합니다.
무슨 소린지 지금 방호산의 공산혁명업무 수행으로 전국적으로 고생하고있는데 작전실패라고 웃기는 소리 그 잔재로 대한민국이 조선인민공국으로 바뀔판인데 방호산이 실패라고 무슨개소리 전술에 졌지만 전략에선 승리한건데 무슨소린지 봐 지금 조선인민괴뢰민주당과 시민단체세력이 어디지역에서 기어나오는지
영상 잘 봤습니다 인민군 6사단이 부산을 점령하지 못한 것이 결국 북한에게는 반쪽 땅만 차지하게 한 결과와 중국에게는 중국의 영향력을 한반도 전체에 미칠 수 없게 되었고 다행히 한국을 지킬 수 있는 결과가 되었다고 봅니다 인민군 6사단이 전남북 지역에 오래 머무른 큰 실수를 한 것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전쟁지도부의 전략적 실수와 방호산 부대의 군정 활동 때문이라고 봅니다 6.25전쟁 전 전국에서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좌편향 현상이 농민,노동자,인텔리(사무직종사자,교수,중고,대학생)층에서 활발했는데 그 중에서도 호남에서 가장 활발했지 않았나?합니다 경북 및 경남동부지역 빨치산은 사실상 52년도 2월 경북 및 경남동부지구당 위원장 박종근이 영양 일월산에서 사망한 이후로 큰 타격을 받아 활동이 미미했습니다 물론 경남동부 지역은 신불산,가지산,운문산,부산 ,금정산,구덕산 등에서 54년 4월까지 소규모 빨치산 부대가 건재했으나 어디까지나 존재감 과시였지 한국군에게 큰 타격을 입힐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리산 등지에 모인 빨치산들은 숫자 면에서도 전성기 수 천 명 정도였고 보급과 정보수집을 도와 주는 주민들이 타 지역 보다는 상대적으로 많았다고 합니다 이런 까닭에 방호산이 호남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나? 특히 그 중에서도 태백산맥을 이용해 북으로 후퇴하기에 용이한 지리산 일대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나? 합니다 어쨌든 저는 본 영상에 감사를 드면서도 인민군 출신 중 45년 이전 독립운동한 분들에게는 이념 보다는 열린 시선으로 봐야 하지 않나?합니다 저는 보수 중 보수입니다만 북한과 중국으루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념은 자유민주주의를 확고히 해야 겠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 깊숙히 자리 잡은 좌편향 세력들을 축출하는 전쟁이 필요하지 않나? 합니다 그리고 유치원 군대가 된 현재의 한국군을 싸울 수 있는 군대로 만드는 것입니다 여성페미 단체,동성애 단체를 철거하고 군기를 다잡고 군 내에서 개인적 욕구의 산물인 스마트폰 허용 등을 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이 컨텐츠에서는 많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김일성은 사실 이념주의자라기 보단 야망이 컸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방호산이야말로 이념주의자입니다. 그래서 원래부터 두 사람은 잘 맞지 않았다고 합니다. 더구나 09:42에 나오지만 김일성이 부산으로 진격하라고 했는데도 전남 순천으로 가는 등 미 25사단이 마산으로 올 시간을 줘버린 꼴이 됩니다. 전쟁이 끝난 후 방호산은 김일성에게 종파분자로 몰려 숙청당합니다.
끔찍하네요 북한군 6사단을 이끌었던 방호산소장 압록강까지 올라갔던 6사단 청성부대 사령부를 97년도에(서울출신인제가) 사병으로 전역한 제가보았을때는요 지금 저랑 같이 일하는 회사에도 월급더받으려고 사장님한테 아부하고 자기본인만아는 조선족분있는데 조선족들이 이렇게 무서운 양반들인지 인제 알았네요 그리고 전라남북도를 저렇게 우익인사분들을 잔인하게 씨를말리고 처형한것도 끔찍하구요 전 국힘도 안좋아하는 제조업 생산직근로자지만6.25 를 남침이라고 제대로 이야기못하는 북한인권에 김정은 눈치보니라 말한마디 못하는 전직 대통령 더블어민주당 주사파 추종자 국회의원분들 그렇게 북한 중국이 좋음 보내드렸음 좋겠네요
@@김현익-n2j 놀구들 있네 정말... 국방비 줄이고, 군인연금 쪼그려뜨려 질은 낮추고, 전략무기자산 개발비 줄이는 입으로만 안보 외치는데도 좋댄다. 그게 영토 수호세력인가?? 지금의 국방력, 그 원천이 민주계열의 정권 당시 을 위해서 투자한 것임을 보수들도 인정하는데, 이런 헛소리를 어떻게 하는가??
아 말로만 들었는데... 내가 태어나서 살았던 함안군 칠원읍 유원리와 구성리 경계에는 공동묘지가 있는데, 이 것은 미군들이 전투중에 죽어 묻혔던 묘지이다. 어렸을 때 밤길에 여길 지나가면 시퍼런 불이 날아다니곤 했다. 사람의 뼈에서 나온 인이 밝히는 불빛이다. 낮에는 마을에서 살고 밤에는 산속으로 숨어서 지내곤 했다. 우리 모친의 이야기이다. 간혹 이 산 속에 들어가면 해골바가지를 발견하곤 한다. ...그리고 우리 장인어른은 워커장군의 당번병이었는데 장인어른이 하도 잘 생겨서 양자로 삼고자 했는데 장인어른이 장손이라 거절했다 한다. 만약 그 때 장인어른이 양자로 들어갔다면 난 지금의 우리 와이프를 만날 수 있었을까??
대단하네요! 워커장군은 이렇게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기 위해 없는 병력을 쪼개가며 고생고생 했지만 결국 너무나 어이없이 전사합니다. ruclips.net/video/fY1qk8O4bAk/видео.html (대한민국을 구한 남자, 월튼워커는 왜 도봉역 부근에서 죽었을까?)
한국전쟁기간내내 좌익이 죽인 민간인수가 아직도 우익이 죽인 민간인수보다 많다고 생각허지? 이래서 공부가 부족하고 멍청한 수구꼴통소릴 듣는거란다. 10승마니가 죽인 보도연맹원만 30만이 넘어. 근데 승마니랑 자칭우익놈들이 죽인 무고한 양민이 그거뿐일까나? ㅋㅋㅋㅋㅋ 부디 생각을 좀 하고 짖어라.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고 낙동강 방어전투가 끝난 후 미 8군 사령관 워커는 이렇게 말합니다. "방호산이 호남지역에서 지체하지 않고 바로 진주, 마산, 부산 경로로 진격했다면 우리는 바다 속으로 빠졌을 것이다." 이 컨텐츠는 워커장군의 이런 고백만 봐도 굉장히 가능성이 높은 이야깁니다. 05:08 부분에 그 상황이 자세히 나옵니다. 1950년 7월 24일, 방호산의 6사단이 전주에 있었을 때 미군은 북한군 6사단이 어디 있는지조차 몰랐습니다. 모두가 북쪽만 지키고 있었지 서쪽에서 어떤 부대가 오는지 조차 몰랐던 것입니다. 워커장군이 이런 고백을 한 이유는 바로 이런 사정 때문이었습니다.
@@만물상자TV전쟁의신 역사에는 IF가 없고 방호산이 왜 빠른 진격을 안 했는지는 역사 속에 묻힐겁니다. 통일되도 자료가 남아 있을지 의문이구요. 워커도 안타까운 사고로 일찍 전사하시어 전쟁 전반을 회고 할수도 없었구요. 만약에 워커 중장이 오래 사시어 전후에도 같은 평가를 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기동에는 대단했지만 결국은 미군전력에 붕괴되긴 했으니까요. 당시 후쿠오카에서 항공지원이 오던걸로 알고 있었는데 마산과 후쿠오카가 공중지원 하기에 비교적 용이한 거리고 해안에서 가까운 마산이라 함포사격도 피하기 어려웠을텐데..여러 이유가 있었겠죠.
방호산은 모스크바에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김일성보다 상당한 엘리트였습니다. 전라도 지역에 대한 군정활동과 반동분자 척결. 그리고 지나친 자신감이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서두르지 않았던 그 실수는 후에 워커장군도 언급했습니다. '북한군이 지체없이 바로 부산으로 왔다면 우리는 밀려났을 것이다."
마산까지 진격한 북한군이 연합군의 반격에 밀려 후퇴할 때, 피신하거나 잠복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전라도 일대가 된다는 가설이 성립하는 것 같습니다. 이미 그들에게는 반동분자라고 하는 반대 세력이 전멸한 지역이기 때문에 모택동이나 월맹의 심리전을 펼치기에 부담없는 지역이 됩니다.
05:04 가 결정적인 장면입니다.
1950년 7월 24일, 남원에 입성한 방호산과 6사단.
더구나 김일성으로부터 부산 진격 지시까지 받은 상황.
그런데 굳이 남쪽에 있는 순천으로?
오죽하면 당시 미군 지휘부에서도 방호산의 행동을 미스터리라고 불렀습니다.
이 컨텐츠에서는 바로 그 미스터리의 원인을 다룬 것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6.25전쟁 기간 중 민간인 학살이 가장 많았던 지역은
전남, 전북, 충북, 충남, 강원 순서라고 공식 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ruclips.net/user/postUgkxMrs4rAZnHQitpshxQT_BaevPjt7TVhE- (6.25전쟁 기간 중 민간인 학살 공식 통계)
지리를 착오한듯요
@@김현익-n2j 방호산이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닙니다.
더구나 김일성에게 부산진격 명령까지 받은 상황에서 굳이 순천을 찍은 것은
도시하나라도 더 북한영역으로 만들려는 욕심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순천을 찍은 후 방호산이 바로 진주, 마산으로 쾌속 진군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미 늦어버렸죠. 8월 1일에는 미군에게 포착되니까요.
1950년 8월 3일, 마산방어전투는 그래서 벌어집니다.
@@만물상자TV전쟁의신 중국에서 하던대로 민정에 중심을 두다가 지연된 듯
호남의 우익,보수 인사들이 6.25때 방호산에게 다 살해 당하고,그래서, 호남에 좌파들만 남아서 더부러에 몰표질 하고, 북빨강이에게 우호적인가 보구먼.ㅋㅋ
민간인학살이 많았던 지역과 현재 민주당 지지율이 높은것이 대체로 비례하네요.
저는 외갓집이 없습니다 6.25전쟁시 어머니께서 전사 했다 하셨는데 국방부에 몇일전 장병이 찾아와 DNA검사를 하고 외삼촌 과 같다면서
돌아가서 전사한곳이 통보가 와서 1952년도 12월 강원도 금성전투서 전사 현충원에 묻햐 있었습니다 국방부 관계자들 정말 눈물나게
고맙습니디 추석명절 지나고 현충원에 외삼촌 을 찾아 인사 드리려 합니다 제가 태어나서 3개월후에 전사 하셨군요 외삼촌 외동입니다
못다한 일들 제가 살아 생전 외삼촌 제사 지내드리겠습니다 보고싶은 나의 외삼촌 눈물납니다
휼륭한 인성을 타고 나셨네요❤
오. 그나마 다행입니다. 외삼촌 희생에 감사드립니다
인증 부터 하시는게
순서 입니다
고향이 창원인데, 그당시 고향은 피해가 없었습니다. 해병대가 진동에서 잘 막았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국군과 미구 유엔군에게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바로 이 컨텐츠에서 묘사된 김성은의 국군 해병대의 활약입니다.
개인적으로도 너무나 영화같습니다. (06:43)
뒤늦게 낙동강 방어선으로 달려오는 북한군 6사단 선발대.
그리고 미 25사단보다 먼저 달려오던는 국군 해병대.
이들이 딱 마주쳤던 그 이야기를 이 컨텐츠에서 최초로 다뤘습니다.
갓데미산
방호산 부대가 호남을 휩쓸었던 이유는 통치 외에도
보급 문제가 있었을듯 합니다
호남을 확실히 점령한후에 곡창지대인 호남지역으로 부터 군량미와 같은
보급을 공급 받기 위해 그런것은 아닌가 추측되네요
이미 남부 지방으로 전진하면서 기존의 보급로도 길어졌고 미군의 공습으로 보급이 자주끊겼습니다 진주 마산 부산을 공격하더라도
지역에 호남 을 남겨 두면 보급문제 때문에 곤란을 겪을 가능성이 큽니다
호남을 확실한 점령 이후에 진주 마산을 공격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늦어진 타이밍 덕분에 낙동강 방어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죠
대한 민국에 천운이 따른것 같습니다
"멸공"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보급을 공급받기 위한 항구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는 말은 인터넷에도 나왔던 이야깁니다.
그러나 09:42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1950년 7월 20일부터 앞으로 10일간은
남한을 완전히 끝낼 절호의 기회가 다가온 상황이었습니다.
온통 북쪽만 바라보고 있는 한미 연합군.
7월 20일에 방호산이 전주에 도착한 것은 지금에서야 아는 것이지
당시에는 그 누구도 신경쓰지 못했습니다.
또한 7월 20일 그날은 김일성이 보급물자와 추가병력까지 보내며
부산으로 진격하라고 명령한 날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남원을 거쳐 순천으로 내려간 것은
방호산이 부산을 가기 싫었던 것이 아니라
순천에서도 뿌리 좀 뽑아볼까 하는 의도로 간 거라고 보는것이 합리적입니다.
이 내용은 개인 생각이 아니라
최근 마산방어전투를 조명해야 한다며 국내 학계에서 새롭게 밝혀진 내용입니다.
골수 좌익이던 방호산이 여순 사건 후 좌익 학살에 대한 보복을 하려던 것 같기도 합니다.
@@쉴레이만은솔로몬유수 엉뚱하기는 참
@@쉴레이만은솔로몬유수 나도 동의합니다. 만일 여순사건 보복을 위해서였다면 소탐대실이죠^^ 방호산이 큰 실수한거죠.
주특기 세금먹이려고 수수목 세다 마무리못하고 쫏겨감.
이것은 인공때 사실.
더불당 같은뿌리.
북한의 침략을 막아주신
호국영령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광말헌남박정희가 남로당은 맞지만 6.25땐 남로당 북한군과 맞서 싸운 군인이다 일본 앞잡이로 독립군 때려잡고 남로당 동료들 밀고하고 목숨부지한 기회주의자는 맞지만 이승만보다는 나은 인간 아니누
@@광말헌남
미쳤군 북으로 꺼져라
@@광말헌남 뭔 헛소리...
네 다음 조선족쓰😂@@최종길-e8z
만행 때문에 늦은게 우리에겐 방어의 기회가 될줄이야.... 영상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05:06 부분을 주목하십시오.
7월 24일, 방호산과 그의 6사단은 남원에 있었습니다.
그 때 오른편의 진주, 그리고 창원(마산), 부산까지 지키는 부대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방호산은 순천으로 향합니다.
실제로 8월 1일, 방호산의 6사단이 처음 미군에 포착됩니다.
미군에게 발각되기까지 귀중한 일주일 기간,
방호산은 인민재판을 하고 식량을 공출했을 겁니다.
만약 방호산이 순천으로 가지 않고 그냥 동쪽으로 갔다면
8월 3일에야 마산에서 가로막는 미 25사단과 싸우지 않고
7월 안에 충분히 부산까지 갔을 것입니다.
@@만물상자TV전쟁의신뭐 그정도까지는 않았을거고 좀더일찍 마산방면 전투가 시작되면서 낙동강전선에 대한 지원이 줄었겠죠. 그래서 낙동강 전선 어딘가에 전선이 돌파되어 위기가 있었을수는 있으나 전후 북한의 상태가 공개된 8~9월 북한국의 상태를 본다면 대구점령이 될까말까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래도 위험하긴했습니다. 전력이 많이 약화된 6사단으로 부산까지 점령은 불가능했다고 판단됩니다
민주당애들 5.18은 추모하면서 이런거 6.25학살 추모식은 안함 ㅋㅋㅋㅋ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왜 정예사단인 6사단이 호남을 지그재그? 식으로 다니면서 작전을 해야만했나 최근 미국과 구소련 한국전 보고서등이 공개되면서 제기된 이론은 스탈린의 명령을 받은 소련 군사고문단이 미국의참전시간을 벌어주기위해 뺑뺑이?를 일부러 돌렸다는것 이유는 모택동의 중국을 참전시켜 미래의 중국역량을 약화시키기 위함요
좀 거시기하지만 국제정치라는것과 당시 스탈린이였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요
@@만물상자TV전쟁의신 스탈린 큰계획설도 요즘 제기됨 소련 고문단에의한 의도적 뺑뺑이 이유는 차후 중국참전시켜 모택동견재 또 공개된 미군사서류엔 6사단행방을 몰랐다기보다 왜 뻘짓? 하고있는지 의아하게 생각
팔로군 출신 방호산을 항일독립군이라고 부르지맙시다. 항일빨치산이 합당하다고 봅니다.
그렇긴 합니다만 사료에 나오는 그대로를 따랐습니다.
그가 매우 어린 나이부터 만주로 가서 일본군과 싸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가 했던 것이 결국은 게릴라전이었으니 빨치산이 맞는 말이겠네요.
@@만물상자TV전쟁의신 김좌진 홍범도 등 조선인 주도의 항일 무장세력은 항일 독립군, 중공군 지휘하의 항일 무장세력은 항일 공산군, 임시정부 산하의 항일 무장세력은 항일 광복군이라 해야 맞는 것 같습니다.
독립군이든 빨치산이든 일제 치하에서 벗어나기 위한 무장 세력은 독립군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afrcanus1992 궁극적 목적이 매우 중요하므로 반드시 구별해야 한다 봅니다. 일본에서의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과 공산국가 건국을 위해 싸운 사람은 다릅니다. 공산주의자들을 거기다 슬쩍 집어넣고 영웅화시켜서 거부감을 줄이려는 속셈은 이해하는데 그렇게는 곤란하죠. 항일활동은 인정하되 목적은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전라민국 의 전신 호남은 북한군에 부역하고 빨치산 활동함
*실제 전쟁참여하면 ㅈ나 무서울듯 언제 죽을줄모르는데 6,25때 나라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졸라 무섭죠.. 숨이 안쉬어질 정도..
대간첩작전 참가했었는데
상병이었는데..
심리적으로 위축이 많이됩니다.
수류탄 60 개인화기 소리 나고 나서야
나간 정신 붙들어맴..
@@신의암호나라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젊어도 이렇게 현실감각이 있으시면 됩니다.
그럼 재밌겠냐?
마산전투가 영화로 나와
국민들에게 알려졌음 좋겠습니다
나라를 지켜주신 국군미군등의
군인들에게 감사함을 전합니다
그분들의 목숨건 전투끝에
지금의 자유 대한민국이 있으니카요
북한입장에서도 대한민국입장에서도
손에 땀을 쥐는 시간과의 싸움이 바로 마산방어전투였습니다.
적극 지지합니다..
이미 문화계는 좌파 소굴 아닌가요? ㅋㅋㅋ
지금 우리가 북한의 밑에 있었다면... 생각만해도 아찔하다. 남한을 지켜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대깨 노사모 개딸 조구기부대 라도 애들 생각은 다르니 문제입니다.
그럼요.
고마운. 분들이지요
남로당군사총책 박정희
대한민국을 북한 아래 두고 싶은 인간들이 더불어 민주당 내에 수두룩 널려 있음.
주적이 북한이지만 하루빨리 더불어 민주당 조직 소탕을 해야 함
@@siyunkim1957 지금 빨갱당이 북한의 봉이 되고싶은거 아니냐?.북한 정은이 따라가는데?
우리 할아버지 담양이 고향인데 그때 빨갱이들이 집 쳐들어와서 조금이라도 밥숟가락 뜨던 이들 다 잡아다가 인민재판했다고 하던데. 그때 이후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부산으로 피난가서 빨갱이라면 진절머리치시던 생각이 드네요. 더구나 그 앞잡이들이 더 싫었다고
그때 죄없는 민간인들
많이 죽었습니다.
재산 뺏기고, 목숨 잃고,
반국가 세력들이 죽창으로 죽이고, 산매장 시키고
지극히 잔인했습니다.
우리는 남침625를 절대로 잊으면 안됩니다. 지금도 우리 자유대한민국에는 그때 처럼 반국가 세력이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전남권은 그날의 기억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됩니다.
6.25. 남침전쟁 때 북한 공산군이 전라도에서 경남 마산 서쪽으로 침공할때 그 당시 진동면. 진전면. 진북면 삼진이라 부르는 지역에 미 해군이 함포사격을 며칠 동안 해서 그나마 진격이 늦어졌다고 어르신들께서 종종 술드시면서 이야기 하셨죠.
❤조선족 사단 북한군6사단. 전라도에 약 한 달 정도 머물렀는데 사람들을 너무 많이 죽였죠. 각 마을당 평균 열 댓명씩은 죽였을 겁니다.진도는 전라도 최 남단인데도 29일을 인민군이 머물러 있었습니다.
전라도 우파씨를마렸으니 지금의 좌파소굴. 독립해라 전라성 으로
그런데 전라지역이
그렇게희생이큰데도불구하고 왜 좌파들이 득시글할가요?
쪽바리똥고빨던한국인이죽인한국인들이더많음
북한군의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해 방호산 부대가 호남을 점령한것이다
아님,그들이 간후에 중공과협조했다는 이유로 국군이 죽인것까지 덮어씌운것
그리고 전에 어디서 봤는데 서울에서 철수못한 국군들이 학살당한걸 많이 보셨다는 분이 있더라고요 지금도 활동하는 원로배우아신데 한 국군장교는 지프차로 가족들과 도망가다가 북괴군에게 사격당하고 차가 전복되서 일가족이 다 죽었는데 ,그 상태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동숭동 혜화동 서울대병원에서 후송된 부상병들이 북한군에 의해서 학살된 후 쓰레기처럼 겹이 쌓인 채로 버려졌다고 합니다.
시신이 썩어서 악취가 진동할 때쯤 그대로 휘발유 부어서 태워 버렸다고 하더군요.
서울대병원에 위령비 자그마한 거 딸랑 하나 있고, 좌파 정권 집권기에 인근에서 인골이 대량 나왔는데 유야무야 처리한 신문 보도 있었지요
남쪽도 공산화 되었다면 우리는 지금 벽에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놈의 초상화를 걸고 보물단지 모시듯 충성하며 노예처럼 살았을 것이다
대구에 아직 있던데? ㅂㅈㅎ 사진걸고. 역시 한민족인가?😊
@@plmdh36196 아따 북괴앞잡이 댓글알바 한다고 고생이 많소잉
도요다 다이쥬 센세!!!
@@plmdh36196박정희대통령은 공이라도 있지, 니들이 믿는 그들은 뭘했냐? 통계조작 선동 정치? 빚쟁이...
@@plmdh36196 벽에 걸어둔 느그 핵슨상 액자부터 내리고 말을 해라 좌빨 새끼야ㅋㅋ
이런 유투버가 하루 빨리 구독자 10만 실버버튼 , 더 나아가 100 만 골드버튼을 받기를 기원합니다~~~~
응원의 귀한 말씀 감사드립니다.
장성사람인데 6.25때 침투전 헬기장에 북한공수부대가 투입됬고 이미 지역대부분이 점령당해있었고 인민대회?이런거하면서 동네주민들 학살하고 이념사상당했다고 부모님께 들었습니다
혹시 부모님 연세가 어찌 되시나요 궁금해서
그렇지요 호남은 이미 좌익분자들의 인민들이었으니까요
인민재판!!!
공수부대? 김대중 목포해상방위부대랑 동급인가?
방호산이 인민재판으로 호남 의사들 씨를 마렸다고 들었는데 죽인 것이 아니라 그냥 납치해 간 것이었네
전쟁 전, 전쟁 중에도 빨치산 활동이 많았었는데 특히 유명했던게 제주도 빨치산, 지리산 빨치산들..
채명신 회고록에서도 관련 이야기를 봤던 기억이 드문드문 남아있는데
그중에 채명신 장군이 백골부대로 이북에서 유격대 활동을 했다는 그런 이야기가 기억에 남아있네요
나중에 빨치산 관련해서 영상도 나왔으면 좋겠어요
이 채널은 전쟁만 다뤄서요.
만주 전략 공세 작전(1945.08.08 ~ 1945.08.23) 좀 하라니까
죽어도 안하던데요? 4.3사건, 여순반란과 연결된 지리산 파르티잔을 하겠어요?
채명신 등신짓 해서 스파이 의심까지 받는 넘인디?
6사단 이었군요. 홍성에 사시던 외할머니가 항상 말씀하신게 북한군이 지나가고 동네 우물에 산에 죽창으로 꽂아죽인 주민들이 많았다고 너무 처참했다고 하셨는데..6사단이었군요
말씀하신 그 만행의 주체는 방호산의 6사단이 한 짓이라고 보면 정확합니다.
6.25전쟁 기간 중 민간인 피해가 가장 큰 지역이 호남지역입니다. (공식기록)
호남지역에 머물렀던 북한군 사단은 방호산의 6사단 뿐입니다.
그래서 이 컨텐츠의 주제인
북한군이 호남지역에 오래 머무른 이유가 신빙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 컨텐츠의 내용은 개인 주장이 아니라 최근 국내 학계에서 나온 내용입니다.
국군이 들어오면 빨갱이 코를 꿔어 질질끌고 다님
홍성에삽니다.
반가워요
@@만물상자TV전쟁의신반공사상은 어릴적 방학이면 찾아가던 시골 고향집 할머니의 저녁마다 호롱불 아래서 들려주던 전쟁 체험담을 통해서 자연스레 형성하게 되었지요~! 인민군이 살아있는 사람을 트럭에 매어달고 하루종일 동네를 질주하여 뼈만 남아서 죽이더라는 목격담이며 대청마루에 앉으면 멀리 가물가물하게 보이는 유학산에서 밤새 전쟁하던 이야기 등~!
@@만물상자TV전쟁의신 그때 붉은 물이 든 애들이 많아졌군요 우파 호국영령들이 많이 죽임을 당하셨을 것으로 봅니다
북한군 6사단장 방호산의 전남지역 만행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광말헌남그래서 남로당군사총책 때 민간인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증거는?
@@화기만당-b9u 남로당 /...몰라?
노무현 장인 권오석이도 남로당 김해 진영지구 위원장이었다
@@광말헌남 병신 여기서 박정희가 왜 나오냐? 너 개딸 아니면 대깨문이지?
@@광말헌남 친형 박상희가 원래 독립운동가였슴
공산주의에 빠저 남로당에 가입하고 동생 박정희를 남로당군사책이라는 직함을 올려놓음 박정희는 남로당활동은 전혀 없슴
1948년부터 백선엽이 남로당을 잡아들이기 시작하여 박정희도 끌려옴 박정희가 내일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처지에 박정희가 남로당활동 안했다는 여러 증언이나오고 동료들이 구명활동을 해줌 극적으로 사형선고를 면함
이때 박정희가 대구 모사단에 숨어있는 남로당 명단을 넘겨 남로당색출에 공을세움
남로당은 6.25발생시 위로는 북한군 남쪽에는 남로당이 폭동하면 한달내 대한민국을 공산화 시킨다는 목표를 가지고 세력을 엄청나게 확장 하고 있던중임
한국전쟁 은 정말 일촉즉발 들이많았내요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왔내요🇰🇷
이북을 빼았겼잔아 우리나라를 도운건 아니지 이북도 우리 땅인데
@@사랑전하기-h7x 제말은 우리나라가 안없어져서 다행이다는 애기입니다
그건 중공군 때문이고@@사랑전하기-h7x
그저 천운이라고 생각합니다
빙호산 덕분에 남한의 공산화는 막았지만 그대신 ㅈㄹㄷ의 공산화는 막지못했군요 😂
정말 영상제작 수준 최고네요. 주변에 많이 소개할게요
감사드립니다.
낙동강 방어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미 8군 사령관 워커장군은
왜 북한군 6사단이 호남지역을 순회하듯 돌아다녔을까?
그들이 바로 부산방향으로 직행했다면
우리는 지금쯤 부산 앞바다에 빠졌을 것이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컨텐츠는 바로 그 의문에 대한 답이 될 것입니다.
그렇군요
나라가 어려울때 두렵다고 후방에 숨어 있다면 저렇게 허무하게 죽을수도 있다는것을 깨닫게 해주네요ㆍㆍ정신들 차립시다ㆍ ㆍ
이 컨텐츠의 핵심은 매우 간단합니다.
05:00을 보시면 1950년 7월 20일, 방호산 소장은 전주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정확한 기록입니다.
당시 전 북한군이 뭘 목표로 싸웠는지 아십니까? 바로 부산입니다.
그런데 방호산만 남원 (7.24) 그리고 진주가 아니라 순천으로 간 것입니다.
굳이 순천을 찍을 필요가 있었을까?
방호산은 순천을 찍고 난 후 그야말로 미친듯이 마산으로 달려갑니다.
결국 마산 근처에 이르렀던 1950년 8월 1일.
그때서야 미군 지휘부는 북한군 6사단을 포착합니다.
방호산도 이렇게 될 줄 몰랐을 것입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7월 24일 남원에서라도 바로 부산으로 달렸을 것입니다.
방호산은 왜 굳이 호남지역 도시들을 모두 찍고 부산으로 간 것일까?
그 이유를 밝힌 것이 이 컨텐츠의 주제인 것입니다.
목포 순천은 항구가 있고 바로 진주로 가면 미군이 순천으로 들어와 퇴로를 막으면 포위 될수 있다는 생각을 할수도..
방호산이 호남지방에서 우익인사들을 색출,학살하여 호남지역 경찰들은 패배후 산으로 숨었어도 결국 거의 다 전사 하였습니다. 그분들의 희생 덕분에 국운을 되살릴 수 있는 시간을 벌은셈 입니다.
예 맞습니다
저희 할아버님도 한국전쟁때 호남지역 경찰 하셨고~~ 방호산부대와 전투하시다가 포로로 잡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다가 할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저희아버지는 유복자 되셨고 저희집안은 망했고요 ~
ㅠㅠ
@@가등청정 반갑습니다. 저희 조부님도 전북지역 경찰이셨습니다. 개전초 국군 없이 경찰만의 부대로 괴뢰군(방호산 부대)을 막다 패퇴하여 산으로 후퇴 후 잡혀 처형 당하셨습니다. 그 후 가족(할머니, 아버지 형제들...)들은 또 도망 다니고 고생은 말도 못하였다 하십니다.... 공산 학정시 학살 당한 우익인사 가족들이 수복후 괴뢰군 앞잡이들 잡으러 다니셨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저희 외할아버지도 해남경찰에 복무중 북한군에 부대가 괴멸되고, 산으로 숨어들어가 인천상륙작전으로 호남지역이 해방되고 나서 산에서 내려 오셨습니다. 저희 어머니(44년생)께서는 할아버지를 잡으려고 집에 찾아온 인민군들 중에 소년병이 잠시 놀아줬던 기억이 있으시다고 하네요.
우리아버님은 지리산 토벌대 지휘관으로 빨치산을 섬멸시켰습니다.
남로당군사총책 박정희
호남지역 학살이 제일 심했다고 들었는데 이게 방호산놈의 짓 이었군요.
안타까운 일이지만 결국 호남지역 분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된 걸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진실을 알면 알수록 역사는 아이러니 합니다.
단물을 빠느라 단 한번의 기회를 날려버린 방호산.
결국 미 25사단에게 마산에서 막혀버린 방호산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무사히 북한으로 돌아가지만 결국 김일성에 의해 제거됩니다.
그래서 호남에 우익이 없군요. 방호산때문에ᆢ우익씨가 말랐네요.ㅠㅠ
방호산 때문에 호남우파가 씨가 말랐고 그 결과가 선거때마다 나타나죠
방호산 때문이라기 보다 해방전부터 호남은 붉은물이 들어 있어서였습니다.
붉은 호남인들과 방호산이 힘을 합쳐서 지주들을 죽창으로 죽인 것이지요.
@@skynew0633 야 이 씹새키야.. 우리 할아버지도 경상도 분이시고 같이 참전하셧던 동년배분들도 10분넘게 계셧지만, 그분들이 왜 빨갱이소리 않하겠노... 서로서로 싸우면서얼마나 아팠고, 주위분들중에 친구한두분 이상은 다 돌아가셨다.. 그런 상황에 좌익이니 빨갱이가 버티고 살고 있었겠냐.. 이 짱구만도 몬한새키야.. 그분들 다음 세대가 이상한 교육을 받아서 한번도 못본 빨갱이 빨갱이 타령하지.. 너같은 완전 모질이 새키들이.. 일본이 2차대전 끝나고 우익이 없었다.. 알겠냐?? 그 다음 세대에 우익이 생겨났지 안겪어본것들이 현실의 무서움은 모르고 이빨만 털지.. 본인 모자란건 모르고, 에혀 불쌍한 인생아..박정희가 남로당원이었어. 알겠냐
예전 아버지 말씀중 북한군이 호남으로 왔을때 미군이 다수있었다고 합니다.그
때 미군이 전사하면 민간인들이 미군 손목시계나 가지고있던 물품 몰래 취하
다 인민군한테 걸려 몰매맞는걸 많이 봐다고 합니다.인민군이 어느날 물러가
고 징집되어 전장으로 같다더군요 훈련은 총쏘기 수류탄던지기 포폭만
배웠다고 합니다.눈옆에 총 한방스쳤고 팔에 관통상입었으나 치료후 계속 전투
임해다더군요.중공군은 싸움은 못하는
데 숫자가 개미때 같았다고 줄지어서 뛰어오는게 어마어마 했답니다.
아버지가 96년도에 돌아가셨는데 60년대가 전쟁용사들 중 몇만명에
수여된 훈장이 작년에 왔으니 우리나라 공무원들 뭐하는 인간들인 우습더군
요.
역시 라도군요. 미군 손목시계 훔칠 생각이나 하고
저시절 군경이셨던 가족분들이 있었는데 일가족들이 죽창으로 살해 당하셨다고 들었어요~ 그게 6사단 이었겠네요
호남지역의 만행은 모두 북한군 6사단이 저지른 것입니다.
호남지역은 워커장군의 방어구역이 아니었고
워커장군은 방호산 부대가 호남지역에 있을 때 안 것이 아니라
8월 1일, 마산에 나타난 후에야 그 위치를 처음 알게 됩니다.
문재인과 그 지지자들. 부산를 대표하는 발갱이 김태성은 북한군의 만행에는 관심없고 이 시절 공산당 선전에 동화된 민간을 억울한 희생자로 미화하고 있다.
김원봉
죽창만행은 6사단보단 호남토박이빨치산들일거예요
호남 지역의 만행이 방호산 사단의 짓이라? 6.25전후 호남의 좌익들이 저지른 짓을 책임 전가하는것 같네요. 호남의 우익인사나 군경의 가족들을 죽인거 살아계신분들의 증언들이 남아 있는데 이건 아닌것 같네요. 솔직히 호남은 6.25때 방어 포기한 죄, 좌익들이 저지른 죄값은 반드시 치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6살때 목포에서 인민군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셨다고 하셨음. 목포교도소 뒤에 공산군들이 죽인 시체더미들 위에서 친구들과 놀았다고 하셨음
돌아가신 동네아재가 6살때 갱상도에서 쪽발이들이 지나가는것을봤다고 했음..
역시 전라도는 빨갱이 소굴이다..
그때 안돌아간 사람들 좌익
아~ 방호산이 군정활동을해서 호남지역이..
백선엽 장군이 회고한 걸 보면 낙동강 방어선 당시 많은 호남 출신 장병들이 최전선에서 피흘리며 싸웠다죠? 그런데 그 때 고향 사람들이 방호산 휘하 북괴군 6사단에게 도륙이 나고 있었다니 참...
왜 머가불만인데홍어족아?
남로당 출신 다까끼 마사오 (박정희 ), 관동군 출신 시라카와 요시노리 (백선엽) 가 그 당시 국군 주역이였다.
@@홍쇼-k5q 일베 버러지
주인장님! 영상 잘보고 가영!
방호산은 후일 김일성에 의해 위내용처럼 진격 미시행의 책임을 물어 숙청 했습니다.
방호산의 숙청 이유
휴전후 잠시 동안은 영웅 칭호받으며 우대
그러나 중공군출신 연안파세력이
커지자 김일성이
일괄 숙청하면서
동반 몰락함
결국 이용만 당하고 뒈졌군요..........지금도 여전하고요.
@@인재송-o6j
직계 아니면 무슨 이유로든 덮어씌워 숙청하는게
김일성과 공산당 독재의
본성
북이나 남이나 조선족을 싫어히지
@@NOBODY-yj1ci 정확히따지면 김일성은 1955년에 벌어진 대기근 사태를 벗어나기 위해 군부부터 김일성을 지지하는 만주파 이외의 타파벌 군인을 숙청했고요 연안파였던 방호산도 그 때 숙청당했습니다. 이듬해엔 김일성이 소련과 중국 순방간 사이에 김일성을 비판한 연안파, 소련파, 갑산파 멤버들이 김일성의 귀국 이후 모두 숙청되었고 그 후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려다가 발각되서 비만주파 인사들이 모두 처형됩니다. 방호산은 숙청 이후 탄광소장으로 좌천되었는데 반란을 꾀했단 누명을 써서 총살당했다고 한네요
낙동강 방어선 서부경남이 미24사단 관할. 정보에 없던 6사단에 섬진강 돌파 당하고, 하동에서 채병덕 사망하면서 진주도 바로 뚤림. 미25사단과 한국군 해병 추가 투입하여 마산 방어
6사단에도 기갑 전력이 있었는데(상당수가 사천에서 철수하다가 미 공군에 괴멸됨), 당시 도로를 확인해 봐야하겠지만, 전주-광주-목포-순천-진주로 이동하는 것이 맞았을 듯. 부산 점령을 위해 6사단은 조공이고, 도로 사정상 경부선과 문경-상주-영천/대구 2개 주공으로 국군,UN군 방어선을 뚫어야.
북한군의 남침 작전은 쏘련이 기획해 줬다고 봐야, 대대장, 중대장 하던 실력으로는 현대전 작전 기획하지 못함. 동북 출신 조선인 부대는 국군에 비해 엘리트이지 중공군에서는 투항군(?). 모택동이 한국전에서 조선인 부대와 운남 출신 부대를 많이 소모시킴
당시 북괴군의 방호산은
중공군 출신이다보니
북괴의 적화통일 후를 대비해
호남을 중공의 영향으로 두려는 사전포석(말씀하신 소위 6사단의 군정활동)을 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덕분에 5.18 이전까지 전라도는 우파가 많았었죠.
@@테스트-b6i못배우고 멍청한 새끼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지만 전쟁사에서 만약을 가정해보고 분석하니까 실제 전쟁사가 더 잘 이해되네요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돌아가신 부친에게 여수,순천,강진 등 전남 지역 학도병으로 구성된 부대로 순천에서 50년 7월에 전주 근교까지 올라갔다가 철수하는 국군을 따라 남원까지 후퇴한 뒤 남원 인근에서
경남지역으로 후퇴하기 위해 섬진강을 건너려고 구례 하동 방면으로 후퇴하다 북한 6사단에 따라잡혀 쌍계사 부근에서 전투가 있었고 패퇴된 병력이 하동으로 철수 했다고 들었슴
전투도 없었던 전남 나의 고향마을에서 167분이 돌아가셨다는데 그때 그랬던 원인도 있었겠군요
이 컨텐츠의 고정댓글에 6.25전쟁 기간 중
학살당한 한국인들의 통계 자료를 올려놨습니다.
전쟁 통에 죽은 것이 아니라 학살당한 통계입니다.
전남지역이 전국 1위를 차지했습니다.
방호산의 6사단이 그 주인공이라고 밖엔 설명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전남지역이 점령당한 것은 한번 밖에 없었거든요.
@@만물상자TV전쟁의신 제 고향마을은 집성촌인데 처음 인민군이 들어와서 죽임이 있었고 퇴각하고 이후 보복으로 죽임이 있고 좌우,문중과 문중, 소문중간에 복잡한 관계와 감정으로 많이 희생되었다 합니다
@@만물상자TV전쟁의신 구구절절 방호산 전라도 변명? 해명? 좌편향 댓글...역효과 인듯
1916생 함경북도 1958년 8월 8월 종파사건 연류되어 숙청 사망년도 미상
이런 얘기도 있어요 김일성이 (장래의 정적)방호산의 지나친 전공을 경계해 팔로군 출신 정예부대를
남한군도 없는 호남지역으로 진격하도록 했다는
정상적이라면 방의 정예부대를 부산 점령의 최전선에 투입했어야....
그 말이 맞을 것 같네요!
설득력 있는 말!
그 말이 맞는 거 같네요.
자유민주주의, 법치주의, 시장경제, 강력한국방, 제한된정부, 반사회주의, 한미일-삼각동맹을 수호합시다.
국회의원 면허(자격)시험 제도를 도입하고, 인원도 100명 이하로 줄여야 합니다.
방호산은 공산당교육을 제대로받았고 중공팔로군으로 전투경험도많아
그의6사단은 북한최정예부대로
진격,후퇴 작전 모두
공이컸다고
전쟁이후 영웅칭호를받았으나
결국 55년 숙청당함
방에 비하면 김일성의 경력은 초라할 지경
일성은 오로지 소련의 후원을 받아 권력 찬탈
소련입장에서
독자적인 세력이 적은
일성이 꼭두각시로
안성맞춤
8월 15일 광복절까지 부산점령하라고 했으니 신속히 이동할 필요 없었고 항상 연승하면 주변을 읽는 능력이 쉬워지고 그로 인해 강력한 미군앞에서 착해지는 순서
남한의 곡창지대인 호남 일대를 점령. 통치한 전술적인 승리. 하지만 부산을 밀어버릴 골든타임을 놓친 전략적인 패배네요.
할아버지가 전주 인근에서 군수를 하셔서 숨어 계셨고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초등 중학년 또래였는데 공무원 가족이라 어디론가 데려갔다합니다. 아마 학살 당할 상황이었던듯 한데 다행인지 지역 공산주의자중 지인분이 어린애들이라 따로 보내줘서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올 수 있으셨다 합니다. 😂
다행입니다. 군인ㆍ공무원ㆍ경찰가족은 모두 처형하고 지역 인민위원회를 만들어 놓아 우익은 씨가 말랐습니다.
@@skynew0633그래서 그지역은 지금도 좌파일색이죠
전라도는 그들의 고향이나 다름없는곳 아닌지..대환영 받았을듯
안녕하십니까 만물상자님 영상 잘 봤습니다. 김성은의 해병대가 막는데 결정적인 역할 을 해주었네요! 해병대 포위망에 걸린 이상 6사단 정찰대는 사실상 전멸했네요 그게 제일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어요. 미 25사단이 도착했을때는 이미 해공군의 압도적우세라서 마산을 돌파하는건 거의 물건너 간거지만.. 이 상황에서 만에 하나 마산에서 조금 뚫렸어도 낙동강 방어전의 영천전투처럼 전개가 되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데요.. 6사단이 워낙 정예라 달리 봐야되나 싶기도 하고..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영상을 보다가 그 생각이 나더라구요
김성은의 해병대 300명은 너무나 상황이 급박했기에
마산으로 먼저 이동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드라마틱했던 것은
너무나 배가 고파 인근 주막에 주먹밥을 요청했는데
바로 그날 밤에 그 주막에 북한군 6사단 선발대가 왔다는 사실입니다.
방호산도 뒤늦게 상황 파악을 하고 선발대를 먼저 보냈던 겁니다.
방호산의 마음이 급했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방호산도 마산만 뚫으면 바로 부산이고 지키는 병력도 없음을 안 것입니다.
더욱 드라마틱한 것은 미군 25사단이 2일 동안 달려와 방호산을 막았다는 사실.
이 컨텐츠에서 자세히 지도로 알기 쉽게 보여줬지만
그 당시는 모두가 북쪽만 바라봤지 서쪽에서 오는 북한군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방호산이 7월 24일 남원에서 부산으로 진격을 하지 않고
순천으로 간 것이 결정적인 실수였습니다. (05:06)
워커가 북한군 6사단의 위치를 파악한 것은 8월 1일이 되서였습니다.
때문에 방호산이 내버린 시간은 7일입니다.
그는 왜 그렇게도 호남 구석구석에 미련을 못 버렸을까? 그 이유를 이 컨텐츠가 잘 보여줍니다.
해병 분위기가 어수선한데 동기밴드에 공유했습니다 고맙습니다
경남 창녕에서 마산 고동리로 먼저 내려간
김성은과 국군 해병대 300명.
내막을 알고 본다면 이것은 무척 감동적입니다.
마산으로 방호산의 선발대가 오고 있었기에
너무나 급박했던 워커장군은 김성은 중령의 국군 해병대 300명을 먼저 보냈던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마산 고동리에 있던 이름 모를 주막집에서 만나게 됩니다.
해병대가 민주당이 변경한 군내 사망사건 무조건 경찰청 이관 법률을 제대로 이해 못하고 있습니다.
해병대 채상병 사망 사건은 정말 안타깝고 국가의 부름을 받고 구조 활동을 하다 빚어진 일이기에 최고의 예우를 해야 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도 없고 이용해서도 안된다고 봅니다
세계 어느 군대나 마찬가지겠지만 평시 훈련 시 비전투 손실이 발생하기 마련이고 또 대민지원을 하지 않는 군대는 없습니다
그래야 군이 국민의 군대가 될 수 있고 국민들로부터 지지와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래서는 안되겠지만 훈련 중 안타까운 사고로 목숨을 잃는 사례가 과거에는 훨씬 많았고 외국 군대도 지금도 있습니다
사고를 한 건도 나지 않게 한다는 것은 훈련을 안하고 내무반에 쉬게 하고 대민지원을 나가지 않으면 됩니다
집에 가만히 있으면 지하철 사고,신림역,서현역,예전 삼풍,성수대교 사고를 안 당할 겁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 있는 삶이겠습니까?
국가를 지켜야 하는 군인이 지금은 정치 도구가 되어서 그냥 무사안일주의로 고착화된지 오래이고 어린이가 되어서 부모님들께 전화로 일러 바치고 있습니다
군대 안 가서 징역살다 노 대통령 특사령으로 반만 살다 풀려난 동성애자 임태훈이 설치고 다니는데 왜 군 행정에서 못 쫒아 냅니까?
군대 내 감성적인,비이성적인,통일운동에 치우친 간부들을 숙군 작업을 통해 군을 개혁해야 합니다
지금 군대는 군대가 아니라 병영체험장이 돼 버렸습니다
훈련소 야외교장 재래식 화장실도 수세식으로 바꿔달라고 하는가 하면 힘 센 사람이 고참이 되다 보니 기술전수가 불가능합니다
재래식 화장실도 써 봐야 전쟁 시 산에서 볼일을 보기 쉽고 또 나뭇잎으로도 해결할 수 있어야 하는데 휴지 없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15%만 선발해서 훈련하고 85%~80%는 뒤에서 시간만 때우다 복귀한다고 합니다
@@곰돌이-u3x6h 정부가 그렇게 해주겠다는데
해병대 단체는 왜 자꾸 저러는 거에요?
군인 정신이 다들 어디 간건지?
@@곰돌이-u3x6h 해병대 단체들은
자신들이 나서는거 자체가 이미 정치에 휘둘리고 있다는걸
스스로 자각도 못하는거 같습니다.
중요한 역사 영상 잘 보았습니다. 호남권 정치인들이 인민군에 의한 국민의 희생을 언급조차 하지 않는 이유와 일본x 앞잡이 노릇한 인사들에게는 거품을 내 물면서도 6.25당시 완장 차고 죽창들고 인민군 앞잡이 노릇한 사람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못하도록 하는 이유가 이 영상을 통해 짐작이 가네요.
미친소리하고 있네
왜 호남 정치인이니
그건 아닐겁니다.
핵심은 5.18 일 거에요.
야이 일베 같은 좃아 ! 뭔 귀신씨나락 까먹는 소리냐? 호남지방은 민족주의 성향 즉 네셔널리즘이 아주 강한 지역이어서 외부세력에 강한 반동을 가진 지역이다 ..그래서 외침이 있을때마다 강하게 의병이나 저항이 많은 지역이고....호남에서 공산주의이라니? 호남출신 공산주의자가 누가있나? 빙신아..왜곡하고 물귀신처럼 잡아 끌지마라..
뭔 개소리인지
대갈통에 뭐가들었으면 이걸 그따위로 꼬는건지 모르겠네
그리고 육이오부역자들은 어지간한건 싸그리 쓸려나갔지 북으로 북괴군 따라갔거나
그뒤로 이승만 박정희가 가만놔뒀겠냐? 아 남로당출신 박정희는 혹시 모르겠네
돈 좀 있다고 아니면 가족중에 공무원 있다고 온가족이 몰살당한 사례가 호남지역에서 가장 많이 일어났죠.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갓난아기까지 30, 40명 일가족을 모조리 끌고가서 잔인하게 죽이고 시체를 아무데나 버렸습니다. 서울대에 진학했다가 고향집에 온 학생도 공무원 가족이라고 죽였고 온가족이 끌려가 죽는 것도 모르고 이웃 동네에 놀러갔다 귀가하는 어린이도 몽둥이로 때려 죽이고요. 평소에 알던 마을 주민들이 적극 앞장서서 이런 만행이 가능했고요. 나중에 우익들의 보복이 있었지만 당사자만 죽였지 가족까지 몰살시켜서 씨를 말리지는 않았습니다.
님이 말한 사례가 우리 외가의 경우인데 화순지역에 거주한 밀양 손씨로 외할아버지는 큰 토지를 소유(집은 당시 인민군 장교 숙소로 징벌) 했었고
큰외삼촌은 화순군청 공무원, 큰 이모는 교사, 둘째 외삼촌은 국군 중위로 외가 일가족이 한날, 한시에 집단으로 몰살됐습니다.
나의 어머니와 작은 이모(다행히 당시 전남광주 수피아여고생으로 광주거주)만 살아 남으셨고 외가 뿐 아니라 외가의 사돈 가족들 까지 모두 살해됐습니다.
외가의 묘는 하나 입니다. 한날한시에 일가족을 처형하고 한 웅덩이 뭍어 놓은채 몇년이 지나 시체를 수습하지 못해 그렇다고 했습니다.
90년대 후반 이 사건을 알아보려 했지만 자료는 없고 오히려 좌익 활동을 하다 처형된 조사만 있어 문제라 생각했습니다.
좌익을 집단학살한 장소와 사건의 개요(예로 과거사조사위원회 등과 같은 기관)는 연구도 세세히 되고 자료도 많이 축적되어 있던데
님이 말한 우익들의 학살사례나 외가의 경우 자료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대한 자료를 찾아볼 수 있는데가 있을 까요?
저는 조국이라는 금수만도 못한 놈과 민주당을 장악한 86과 87들은 국가를 공동체로 인정하지 않고 허위이념을 내세운 전체주의 파시스트집단으로 인간기생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영 퍄권을 내세운 혐오나 증오, 적대적 대립이나 갈등보다 사회통합이 중요한 사회과제라는 입장입니다.
이 과제에 필요한 전제가 님의 댓글처럼 전남북지역에서 벌어진 집단학살을 규명하는 것이고 이런 측면에서
좌파들의 피해는 자세한 자료와 함께 연구되어 있는데
님이 말한 우리 외가와 같은 경우는 자료는 커녕 조사조차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 문제가 매우 크다 생각합니다.
@@tinwoodman1575 저는 이분야 전문가는 아니고 올해 1월 9일자 조선일보 기사 "6·25때 좌익의 학살....부자·경찰 가족이라고 죽이고 아기까지 水葬" 이라는 기사를 읽고 알게된 겁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조사를 마친 6.25 민간인 희생자 1039명 중 좌익이 집단 학살 (일가족 7명 이상 학살) 당한 사람이 308명으로 밝혀졌습니다. 7명이란 기준도 임의적이고 물론 실제 학살당한 사람 수는 수백수천배 되겠죠. 우익이 일가족 7명 이상 학살한 사례는 없어서 기준을 3명 이상으로 낮춰서 집단학살 40명이 된다 합니다. 일가족 학살은 좌익들만 저지른거나 마찬가지죠. 10세 이하 어린이 학살도 좌익들만 저질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대한민국 군경이 학살주체이면 국가에 보상을 요구할 수 있지만 북한군,좌익이 학살주체이면 그렇지 않기 때문에 주체가 불분명하면 군경, 우익을 가해 주체로 지목하는 동기부여가 된다는거죠.
'김광동 진실화해위원장은 “교과서에서 보도연맹 사건이나 노근리 사건 등을 부각하고 좌익·인민군의 학살은 얼버무리기 때문에 6·25 당시 민간인 희생은 우리 군경이 주된 가해 주체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이번 조사는 좌익의 학살이 어린이와 여성, 고령자를 가리지 않는 비(非)인도적 가족 집단 학살이라는 점을 일깨워 주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진실화해위원회에 문의하면 정보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tinwoodman1575 북한무장공비에의해 학살당ㅈ한 우익의 과거사는 왜 묻혀버렸는지 똑같이 밝혀져야 공평합니다
노무현 마누라 아버지가. 손가락질 반동분자다 하면 다죽였던 부역자
맞습니다. 신안군 지도 임자도에 살았는데 1979년 1학년때 담임선생님이 1500명 이상이 학살되었다고 말씀해 주셨죠. 아버지 말씀으로는 후퇴하면서도 학살했고 집마당에서도 인민심판으로 수십명 학살하고 인민위원장이 되서 형제도 죽이고 이런 사실은 밝혖지지 않고 왜 그런교육은 하지 않는지 모르겠네요.
방호산은 그만큼 호남을 중시했던 것 같다
호남을 제대로 장악하고 나서 경상도를 접수하려는
심산이었지만 미국이 그렇게 빨리 참전할지는
예상을 못했던 것 같다
방호산 6사단 혼자 7천명 델구 부산 갔으면 과연 이겼을까?
포위섬멸로 다 전멸하지 않았을까?
초반에 몇일 혼란스럽다가 미군이 전멸시켰을 가능성 99% 일간데 방호산도 혼자 진격하면 부대원 몰살이니까 시간적으로 버틴듯 합니다.
전채적인 포위망 형성을 기다린듯한데요. 팔로군 시절부터 함께한 부대원들에대한 애착이 엄청났을듯요
방호산이 팔로군 시절부터 함께했던 부대원들에 대한
애착이 엄청났다는 것은 당시 기록에도 나오더군요.
더구나 북한에 들어온 1949년 6월부터
전쟁 터지기 직전까지 계속 남침 훈련만 했다고 하니
이들의 전투력과 전우애가 어땠을지 상상이 됩니다.
조까는 소리 그쉑들은 최우선은 공산화지 뭔 전우애?조까는 솔
스미스특임대, 미 24사단 부산입성 찾아보면 아실겁니다. 절대 개전 한달만에 부산점령 꿈도 못꾼다는걸. 당시 미군은 태평양에 완편사단이 없어서 참전 늦어졌다지만 7월부터 24사단 시작으로 부산입항하는데 방호산 입장에선 그 수가 얼마일지 알 수 없죠
영상을 의미있게 잘 시청하였습니다.
지리산 빨치산 양성 주범 ㅡ 방호산
당시 지리산 파르티잔은
북조선의 강동 정치 학원에서 파견된 이현상이
1948년 여순반란 당시 패잔병들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여수 14연대 반란 주동자 김지회, 홍순석 1949.4.9 사살
호남은 그냥 무혈입성한곳중 한곳이죠 그리고
인민군에 의해 가장많이 민간인학살당한지역이 호남 충청도죠
그랬는데도 정율성 거리를 만들고 찬양가요제를 해도 좋다고 박수치는 지역이 호남이죠.심지어 중국어로 노랠 부름.ㅎㅎ
@@장준혁-b4r 그게 제일 이해가 안간다니까요.
5.18 좋다 이거에요. 그렇다고 6.25 당시 자신들을 학살했던 조선의용군을 위하여???
@@장준혁-b4r ㅂㅅ
@@테스트-b6i 뭔소릴 하고자 함인지? 5.18과 6.25를 연결짓고 싶은건가??
@@장준혁-b4r 중국어 노래가 뭐죠? 어디 일베 좃선일보만 보시나?
전쟁이든 투자든 타이밍이 중요하다
방호산이 호남에서 오래 머문 이유가 호남에서의 군정작전이었다니?그럼 호남에서 군정작전을 할 시간에 빨리 부산을 점령했다면 과연 현재가 있을까요?내가 봤을때 방호산이 국공내전,중일전쟁 때에도 이런 선무공작을 포함한 군정작전을 중국에서도 벌일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런 작전을 한반도에서도 벌리니 마오쩌둥이 따로 지시를 내렸다는 말이 나돌았죠!!근데 이게 방호산 본인의 자의적 판단으로 한 것을!이걸로 김일성에게 숙청당했다는 것!!
전쟁통에 군정때문에?? 너무 단순한데.. 설사 군정이라면 당의 지시겠지 단독결정이겠냐구? 미군상륙 등도 염두에 뒀갰지.
전라도 그래서 조선족을 좋아하는군.ㅎㅎ
@@솔저오브포츈 그게 뭔말?
@@솔저오브포츈 갑자기 전라도는 뭔 말이고 조선족은 뭔 말이지요.. 차라리 가만 있으면 중이라도 갈텐데 이런 얼치기같은 댓글 달면 기분이 좋아지나요? 신라인들은 자신들이 중국 진나라를 피해온 중국후손이라고 주장했어요(삼국사기 참조) 또 광개토비를 보면 경주 일대에 와놈이 성마다 가득했다고 돼있는 것보면 잡종지역이지요.. 잡탕이다보니 상모지리같은 윤퉁과 파렴치년 줄레를 찍어주고 이를 옹호하는 국짐당의원에 표주고 잡탕짓을 하는거요.. 오히여 대구경북을 중심으로 보수니 진보니를 떠나 정신이상자 구역같아요.. 미친새키덜 아니냐구..
@@솔저오브포츈 어휴 호남에서 맨몸으로 인민군에 맞선 순국 선열들께 사과하세요.
방호산은 국공내전과 항일전쟁을 겪으며 실전경험이 풍부한 뛰어난 전략가인데 김일성을 너무 얕잡아 봤어요..호남에 오래 머문것은 미군의 공중폭격으로 보급품이 바닥나서 그랬어요..
만물상자님 북한 🇰🇵군 6사단 전라도에 머물었던 이유가 뭘까요 🤔?!
영상에도 나왔듯이 군인 가족 공무원 가족들 학살 하느라 늦음.
예전 우리 할머니 말씀에 중국말 쓰는 조선족애들이 와서 그랬다고 하는데, 이제와 보니 6사단 애들이었겠네요.
어린애들도 싹다 죽이고 쌀창고에서 쌀 다 빼가고 창고 불지르고 부르주아라고 동네 유지들도 처형했다고 하니 지옥이었죠.
근데 절라도 북한을 좋아할까요?
@@솔저오브포츈 뭐 북한이 하는건 내부분열이지.
너같은 애들만 봐도 효과 좋잖아.
@@솔저오브포츈그 때 우익가족들은 싹다죽어서 아닐까요
그때 살아남은 자들은
가재였고
그가재 후손들이
오늘날 나체촌을 이루었고ᆢ퍼즐맞춰지죠
마녀의애비도 빨찌산으로 쫓기다 대구로 도망가 신분 세탁하고
갱상도 행세하며
지금에이르렀다고하죠
방호산 입장에서는 그냥 파죽지세로 마산으로 밀고가느냐 아니면 호남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나서 가느냐 두갈래 길이었을 겁니다 후자를 선택하는 바람에 미군과국군이 전열을 정비해 마산에서 막아내고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할 수가 있었네요
말씀하신 것이 정확합니다.
이 컨텐츠에 자세히 묘사되었지만
당시 국군과 미군은 북쪽에서 북한군을 막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방호산에게 옆구리로 쳐들어올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미군조차 무주공산 상태였습니다. 그냥 내달리면 쉽게 끝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워커장군도 후에 언급했던 내용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
호남 산맥과 지리산 쪽에 남로당 게릴라 잔당들이 있었음. 반란 14연대 잔당도 합류하고...
북한군 6사단이 내려오자 합류한 듯. 경상도 쪽에도 남로당 게릴라들이 없었던건 아니지만...
저때 방호산덕분에 적화통일은 안됐지만 그 군정활동으로 많은 호남인들과의 통합이 아직도 안되고 있다는 아이러니..
굉장히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습니다.
채널의 커뮤니티 란에 6.25전쟁 기간 중 발생한
남한지역의 민간인 학살자 숫자 통계자료를 올렸습니다.
ruclips.net/user/postUgkxMrs4rAZnHQitpshxQT_BaevPjt7TVhE-
대구는 어차피 빨갱이 소굴이었으니 그냥 냅둬도 되기는 했지....
@@green_grass2010 병신새키야 대구 빨갱이 청소는 625전에 종결 되었단다..무식한 종자야..
전라도랑 통합이 될수 있을까요? 천년이 지나도 될수없는 일임
왜구화된 토왜들이 할 소린 아닌듯^^
저렇게 우익인사들 죽였는데도 남한이 학살한것만 부각시켜서 알리는 현실
호남지역에서 가장 많은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이념을 떠나 역사적 사실입니다.
@@광말헌남너 북한에서 남파된 간첩이지?
@@광말헌남그 막정희 아니었으면 넌 댓글도 못남겨. 아니 니 애비는 씨도 못뿌려. 등신도 유전이야.
@@만물상자TV전쟁의신
지식인및,우익인사는 모두 학살당하고
나머지 일반주민은 공산주의자로 사상으로
대부분 변질되어
지금 까지 진보,좌빨이 주를 이루고 있다고 보면 됨.......
오늘날까지 전라도 사람들이 좌익성향이 강하니 결론적으로는 성공했네요.
우리나라에 좌익이 어딧냐 대가리 빠개져서 국평오 티내지 말자
이런*들은 암적 존재다...진보는 모두 나쁘냐?
독재의 통치를 벋어나 민주주의릏 맛보고 있음에 감사 할 줄 알아라
임진란도 그렇고 나라의 국운이 다할때 전라도가 희생해서 살려놓으니 다들 까기 바쁘고..참 어이없는 짓거리들입니다. 역사에서 전라도 땅은 항상 나라를 지키는 든든한 방패가 될겁니다. 정치성향이 다르다고 폄하는 하지 맙시다.
@@이현일-q6z 읭?? 625때 앞장서서 빨치산 좌익활동을 했는데..든든한 방패? 뭐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니 존중합니다.
@@옌니-h2s 빨치산은 인천상륙작전으로 후퇴 못한 인민군들이 어쩔수 없이 지리산에 숨어서 한 행동이죠.역사를 알고 좀 까야지...참 억지스럽네요.
참고로 저희 외할아버지도 인민군 잡혀서 죽을뻔 했고요. 저는 공산당을 누구보다 싫어합니다. 지금의 전라도 이미지를 만든놈은 전두환 노태우죠. 지들의 학살을 북한에 동조했다고 악의적으로 거짓선동했죠. 정치인들에게 선동당하면 국민들만 죽어나가요.
결국 이념에 골몰하여 실질적인 목표 성과를 못 내는 건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가 보네요..
그나저나 역시 한국전쟁 내내 미 공군 폭격이라 역시 제공권 장악이 전쟁에서 제일 깡패인 것 같습니다?
위협은 되었어도 사실 6.25 내내 별 효과 못본게 공군.
실질적으로 북중이 제일 두려워 한 것은 육군 포병과 미7함대 함포 였습니다.
괜시리 포병을 전장의 꽃이라 하겠어요?
낙동강 오리알이라는 말 못들어보셨나요?
엄청난 낙동강 폭격 때문에 북한이 낙동강 지역을 점령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미 공군 때문에 나라를 지킬 수가 있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인 지는 모르나 그 폭격에서 중공군도 많이 죽었다고 합니다.
@@ppark107 공포감을 심어주긴 했지만
실제로 별 타격은 없었습니다.
결국 워커 장군의 보병 전술로 막은거에요.
@@ppark107 중공군도 밴 플리트 장군의
보병 전술. 특히 포병의 밴플리트 탄약량 전술로 많이 죽었죠.
참고로 항일독립군과 항일빨치산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고싶은 말은 항일 무장단체의 두가지 부류가 다른점은 무장투쟁 행위가 다르다는게 아니라 그들이 정치적 지향점이 항일독립군은 우리민족의 독립적인 나라를 건국하는것이 첫번째 목적인 반면 항일빨치산은 우리민족이 건국하는 새로운 독립국가의 이념으로 공산주의(사회주의) 국가의 수립이 첫번째 목표라는 것임.
방호산이 어떤 인물인지, 그리고 당시 독립군이라는 집단이 어떤 집단이지 알고 넘어가야할 필요가 있다
방호산은 항일 운동가 즉, 독립운동가란 말이지
중국에서 할동했던 독립군이라고 하는 집단은 해방 이후 모두 중국군에 편성,
6,25 전쟁의 모택동과 김일성의 최선봉에 서서 대한민국 국민을 도륙한 집단이지
그 대표적인 인물이 항일 운동가로 지칭되는 방호산을 비롯해 부지기 수다
한 마디로 중국에서 독립군이라 행세했던 집단은 모두 공산당(김일성 졸개)이라 봐도 무방하지 않나?
김구까지도 포함되지
정율성 동상이 어디에 세우려 했다니 기가 막힌다
전라도 에서는 이런 자들을 기를 쓰고 추앙하려하니
방호산이 전라도에 오래 머문 이유도 나오겠지?
호남쪽은무혈입성이나마찬가지였죠
6.25전쟁 당시 북한군이 호남지역에 무혈로 입성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된 것은
미 8군 사령관 워커장군의 작전이 그랬기 때문입니다.
미군은 대전전투 패배이후 금강유역에서 버티는 것을 포기합니다.
ruclips.net/video/ggmNltdxpvc/видео.html
(대전전투 패배! 미군의 사단장인 윌리엄 딘 소장은 전라도 산속을 헤매야 했다.)
6사단 진로 자체가 무혈입성 코스였던 춘천, 동부전선등은 치열한 교전이라도 있었는데 6사단 개성 점령은 총 몇번 쏘고 끝. 인민군 다른 사단은 즉 4사단등은 1번 국도라 중간 중간 교전이라도 있었지만 6사단은 서해안 쪽으로 그냥 내려감
무혈이아니고 사단을 증강시키고 나왔어요
물론낙동가전선에서 총알받이로 소모당했는데
이게 전라도가경상도에 악감정품은한원인이라는설도있다고하더라고요
방호산 6사단 주병력은 조선족 입니다
중공군 8로군에 복무하던 조선족으로 편성된 북한 전투서열 상위 사단 입니다
한국군은쪽바리개들이정예였지
남로당 출신 다까끼 마사오 (박정희 ), 관동군 출신 시라카와 요시노리 (백선엽) 가 그 당시 국군 주역이였다.
@@zherongjin5792 도요다 다이쥬(김대중)은 전쟁 3년간 징집 안되려고 숨어 있었지요
@@zherongjin5792도요타 다이쥬는?
도요다다이쥬 하사관
MBC 드라마가 아닌 김성종의 소설 여명의 눈동자에서는 최대치가 방호산 밑에서 6사단 11연대 연대장으로 남침의 선봉에 서는걸로 나옵니다.
What if 지만 진짜 우리나라 운명이 달린 급박한 상황이었네요. 방호산과 6사단은 그후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03:43 에 방호산과 김일성의 차이가 등장합니다.
방호산은 김일성하곤 다르게 모스크바에서
공산주의를 공부한 엘리트 이념주의자였습니다.
더구나 바로 부산으로 진격하라는 김일성의 명령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어찌되었을 것 같습니까?
방호산 부대는 연대장이 2명이나 죽습니다.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부대의 건재를 유지하고 태백산맥을 통해 북한으로 도망칩니다.
부대건재를 유지했기 때문에 이중영웅 칭호를 받으며 북한의 영웅이 됩니다만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는 종파분자로 몰려 김일성에게 숙청당합니다.
마산전투에서 방호산이 패하고 지리산까지 밀렸다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다는 소식에 차령산맥을 타고 대각선으로 쭉 올라가서 태백산맥을 따라 북한으로 성공적으로 퇴각합니다. 보통이 아닌 사람임.그 이후 계속 동부전선에서 국군과 싸움. 나중에 김일성한테 처형당함.
아~~~~
그래서 그쪽 사람들 대부분 같은 성향이 모여있네.
하나임이 보호하셨네요 🕺
무슨 소린지 지금 방호산의 공산혁명업무 수행으로 전국적으로 고생하고있는데 작전실패라고 웃기는 소리 그 잔재로 대한민국이 조선인민공국으로 바뀔판인데 방호산이 실패라고 무슨개소리 전술에 졌지만 전략에선 승리한건데 무슨소린지 봐 지금 조선인민괴뢰민주당과 시민단체세력이 어디지역에서 기어나오는지
현재의 서부 대한민국의 방호산의 영향력이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영상이 이 정도 퀄리티면 교육자료로 써도 될듯함
감사드립니다.
많은 정보를 흥미진진하게 시청자들의 눈에 보여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 컨텐츠입니다.
영상 잘 봤습니다
인민군 6사단이 부산을 점령하지 못한 것이 결국 북한에게는 반쪽 땅만 차지하게 한 결과와 중국에게는 중국의 영향력을 한반도 전체에 미칠 수 없게 되었고 다행히 한국을 지킬 수 있는 결과가 되었다고 봅니다
인민군 6사단이 전남북 지역에 오래 머무른 큰 실수를 한 것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전쟁지도부의 전략적 실수와 방호산 부대의 군정 활동 때문이라고 봅니다
6.25전쟁 전 전국에서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좌편향 현상이 농민,노동자,인텔리(사무직종사자,교수,중고,대학생)층에서 활발했는데 그 중에서도 호남에서 가장 활발했지 않았나?합니다
경북 및 경남동부지역 빨치산은 사실상 52년도 2월 경북 및 경남동부지구당 위원장 박종근이 영양 일월산에서 사망한 이후로 큰 타격을 받아 활동이 미미했습니다
물론 경남동부 지역은 신불산,가지산,운문산,부산 ,금정산,구덕산 등에서 54년 4월까지 소규모 빨치산 부대가 건재했으나 어디까지나 존재감 과시였지 한국군에게 큰 타격을 입힐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리산 등지에 모인 빨치산들은 숫자 면에서도 전성기 수 천 명 정도였고 보급과 정보수집을 도와 주는 주민들이 타 지역 보다는 상대적으로 많았다고 합니다
이런 까닭에 방호산이 호남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나? 특히 그 중에서도 태백산맥을 이용해 북으로 후퇴하기에 용이한 지리산 일대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나? 합니다
어쨌든 저는 본 영상에 감사를 드면서도 인민군 출신 중 45년 이전 독립운동한 분들에게는 이념 보다는 열린 시선으로 봐야 하지 않나?합니다
저는 보수 중 보수입니다만 북한과 중국으루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념은 자유민주주의를 확고히 해야 겠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 깊숙히 자리 잡은 좌편향 세력들을 축출하는 전쟁이 필요하지 않나? 합니다
그리고 유치원 군대가 된 현재의 한국군을 싸울 수 있는 군대로 만드는 것입니다
여성페미 단체,동성애 단체를 철거하고 군기를 다잡고 군 내에서 개인적 욕구의 산물인 스마트폰 허용 등을 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또 편가르기 해서 손에 피를 묻혀야 겠나? 제발 뭘 솎아 내느니 하지마라..니가 제일 먼저 뽑혀 나간다...분리주의자야!!!
@@jklee4855 너나 편가르기 하지마!!
내가 쓴 글 다 읽고 얘기해 봐!!
똘아이 색기
땡큐 방호산 이후에 방호산은 어떡게 되어나요?
이 컨텐츠에서는 많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김일성은 사실 이념주의자라기 보단 야망이 컸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방호산이야말로 이념주의자입니다.
그래서 원래부터 두 사람은 잘 맞지 않았다고 합니다.
더구나 09:42에 나오지만 김일성이 부산으로 진격하라고 했는데도
전남 순천으로 가는 등 미 25사단이 마산으로 올 시간을 줘버린 꼴이 됩니다.
전쟁이 끝난 후 방호산은 김일성에게 종파분자로 몰려 숙청당합니다.
@@만물상자TV전쟁의신 답글 감사합니다..김일성은 그래서 자기 야망에따라 신왕조를 만들어 버린거군요..ㅠㅠ
위키백과에 따르면
'1959년 연안계가 기도한 반당·반정부 활동을 했다는 8월 종파 사건에 연루되어 숙청되었다.'고 나오네요
@@ysukpark5715 김일성 일가는 정말 인간백정 집안입니다. 대한민국을 위해 싸웠던 미군을 비롯한 많은나라에 감사하고...그 빚을 갚아야 합니다...ㅠ
김일성에게 죽어라 충성다바친 북한군들아..늬들 덕분에 지금껏 너희 후손들이 끼니걱정을하고,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서 맞아죽고 있는것이다. 꼴좋지 않냐..충성의 댓가가 북녘후손들에겐 지옥을 선물한거다. 머저리북녁조상들아!! 그 총부리로 김일성을 뚜드려 부쉈어야지..
그 영향이 지금도..
대구경북일베네
@@너나알아-l9m팩트자나ㅋㅋ만물일베설 지겹다ㅋㅋㅋ 일베무새
끔찍하네요 북한군 6사단을 이끌었던 방호산소장
압록강까지 올라갔던 6사단 청성부대 사령부를 97년도에(서울출신인제가) 사병으로 전역한 제가보았을때는요
지금 저랑 같이 일하는 회사에도 월급더받으려고 사장님한테 아부하고 자기본인만아는 조선족분있는데 조선족들이 이렇게 무서운 양반들인지 인제 알았네요 그리고
전라남북도를 저렇게 우익인사분들을 잔인하게 씨를말리고 처형한것도 끔찍하구요 전 국힘도 안좋아하는 제조업 생산직근로자지만6.25 를 남침이라고 제대로 이야기못하는 북한인권에 김정은 눈치보니라 말한마디 못하는 전직 대통령 더블어민주당 주사파 추종자 국회의원분들 그렇게 북한 중국이 좋음 보내드렸음 좋겠네요
6.25 당시 북조선 인민군 주력이 독립군 출신의 조선의용군이라 하면 발작 부터 하던데요?
국힘이. 그래도 헌법과 영토 수호세력입니다
@@김현익-n2j 놀구들 있네 정말...
국방비 줄이고, 군인연금 쪼그려뜨려 질은 낮추고, 전략무기자산 개발비 줄이는 입으로만 안보 외치는데도 좋댄다. 그게 영토 수호세력인가??
지금의 국방력, 그 원천이 민주계열의 정권 당시 을 위해서 투자한 것임을 보수들도 인정하는데, 이런 헛소리를 어떻게 하는가??
@@taylorlee5110 민주당이?
이런 인물들 보면 왜 아직도 공산화가 안된건지 의문이 들정도야.
추ㅁ애가 CCP 세계정당대회 기조연설을 대놓고 해도 아직도 아니라고 우기니...
@@taylorlee5110 혹시 너 첩자냐?
아 말로만 들었는데...
내가 태어나서 살았던 함안군 칠원읍 유원리와 구성리 경계에는
공동묘지가 있는데, 이 것은 미군들이 전투중에 죽어 묻혔던 묘지이다.
어렸을 때 밤길에 여길 지나가면 시퍼런 불이 날아다니곤 했다.
사람의 뼈에서 나온 인이 밝히는 불빛이다.
낮에는 마을에서 살고 밤에는 산속으로 숨어서 지내곤 했다.
우리 모친의 이야기이다.
간혹 이 산 속에 들어가면 해골바가지를 발견하곤 한다.
...그리고 우리 장인어른은 워커장군의 당번병이었는데
장인어른이 하도 잘 생겨서 양자로 삼고자 했는데
장인어른이 장손이라 거절했다 한다.
만약 그 때 장인어른이 양자로 들어갔다면
난 지금의 우리 와이프를 만날 수 있었을까??
대단하네요!
워커장군은 이렇게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기 위해
없는 병력을 쪼개가며 고생고생 했지만 결국 너무나 어이없이 전사합니다.
ruclips.net/video/fY1qk8O4bAk/видео.html (대한민국을 구한 남자, 월튼워커는 왜 도봉역 부근에서 죽었을까?)
북한 6 사단장 방호산한테 매우 고맙다고 말하고 싶네요
왜냐면 아시지 않습니까? 만약 부산으로 진격했다면은 우리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테고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없었을 텐데 방호산한테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습니다. 고맙다 방호산
니가 우리 대한민국을 살려줘서 고맙다
군정활동덕에 70년이 지난 지금도 ...
저당시 기후로 봐서ᆢ
탱크속은 가마속 열기로ᆢㅋ
그래서 탱크에 냉방장치가 필요한거지요
민주당애들 5.18은 추모하면서 이런거 6.25학살 추모식은 안함 ㅋㅋㅋㅋ
우덜하고 조선인민군은 친 형제여~ 우덜 학살한 국군보다는 우덜은 조선 인민군이 더 좋당께..
6.25 이전에 있었던 제주4.3은 입에 거품물고 떠들어대죠 좌익반란을 민간인 학살로 둔갑시켜 ㅋ
전라도 종교인가하는 원불교는 인민군 중공군 제사도 지내던데
한국전쟁기간내내 좌익이 죽인 민간인수가 아직도 우익이 죽인 민간인수보다 많다고 생각허지? 이래서 공부가 부족하고 멍청한 수구꼴통소릴 듣는거란다. 10승마니가 죽인 보도연맹원만 30만이 넘어. 근데 승마니랑 자칭우익놈들이 죽인 무고한 양민이 그거뿐일까나? ㅋㅋㅋㅋㅋ 부디 생각을 좀 하고 짖어라.
어이구...역사인식이 약한 바보네. 모르면 공부 좀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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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Day
from 초창기 구독자 하봉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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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이 마지막 남은 낙동강을 넘지 못한 이유) 입니다.
이런걸 보면 하느님이 보우하신건가?
한편 이때만해도 북한 주요 인물들은 김일성을 자신의 보스로 생각하지 않았네
음…약간의 오해가 생길수 있는 컨텐트. 방호산이 호남에서 군정활동을 하며 공산이념을 전파하고 우익인사들 씨를 말려서 호남은 그 후로부터 빨강물이 …이런 오해
한국 독립군은1920년경소련공산군에의해흑하자유시참변으로전멸당했습니다
방호산은1916년생이니가독립군은아니고중국공산팔로군내에조선인의용군입니다
인민군 출신 장교분 말씀 ㅡ경상도 밀고 들어가니ㅡ다 아 도망가고 🐶 도 없드라ㅡ전라도 방향틀어 진격하니ㅡ인민군 만세하고ㅡ쉽게 진격 ㅡ아직도 으
그래서호남빨갱이지금도많다
경상도...
정말 주위에 많이들 돌아가심.
친구 큰집은 오형제 다 전사함.
@@박정규-k6y 아ㅡ예 !
도망간게 아니고 싸우다 죽었다.딴동네 인공기 흔들 때
@@우산-k7x 경상도 때문에 나라가 이모양 이꼴
예나 지금이나 정의는 승리한다.
빨치산하면서 힘없는 한인 조선백성 핍박하고
삥뜯던 습성 결국 못버리고 전공세우기 급급
이조의 폐단이 북한에 고스란히 남아서 아직도 저 지경
삥 뜯다가 타이밍 놓친 셈...
전라도지역을 순식간에 점령하였고 전라도지역은 큰저항도 없었을까. 방호산은 전라도지역에서 사상교육에 집중한다고
오래 머물렀다고 했다
"미 24사단 윌리엄 딘소장은 작전중 길을 잃고 헤메다가 전라북도 진안군에서 전라도 사람들의 밀고로 인민군에 생포되었다."
전라북한이니까
빨갱이들이 들어와도
신고하는분은 없지
진짜가?개호로 라도종자들
맞습니다. 우리를 자유수호 해 주려고 도우러 온 미국장군을 밀고한것 맞음.
부산을 빨리 안간 이유는 김일성이 말한 8.15까지는 시간도 많고, 전쟁경험도 많은 엘리트인 본인보다 무식해서 급이 떨어지고 중국파인 본인에 비해 경쟁관계인 러시아파 김일성의 명령을 듣기 싫어한 이유도 있을거임
방호산의 6사단이 낙동강 전선에 일찍 갔어도 큰 도움 안 됐을듯 싶네요. 화력에 개발렸을듯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고
낙동강 방어전투가 끝난 후 미 8군 사령관 워커는 이렇게 말합니다.
"방호산이 호남지역에서 지체하지 않고 바로 진주, 마산, 부산 경로로 진격했다면
우리는 바다 속으로 빠졌을 것이다."
이 컨텐츠는 워커장군의 이런 고백만 봐도 굉장히 가능성이 높은 이야깁니다.
05:08 부분에 그 상황이 자세히 나옵니다.
1950년 7월 24일, 방호산의 6사단이 전주에 있었을 때
미군은 북한군 6사단이 어디 있는지조차 몰랐습니다.
모두가 북쪽만 지키고 있었지 서쪽에서 어떤 부대가 오는지 조차 몰랐던 것입니다.
워커장군이 이런 고백을 한 이유는 바로 이런 사정 때문이었습니다.
@@만물상자TV전쟁의신 역사에는 IF가 없고 방호산이 왜 빠른 진격을 안 했는지는 역사 속에 묻힐겁니다. 통일되도 자료가 남아 있을지 의문이구요.
워커도 안타까운 사고로 일찍 전사하시어 전쟁 전반을 회고 할수도 없었구요.
만약에 워커 중장이 오래 사시어 전후에도 같은 평가를 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기동에는 대단했지만 결국은 미군전력에 붕괴되긴 했으니까요.
당시 후쿠오카에서 항공지원이 오던걸로 알고 있었는데 마산과 후쿠오카가 공중지원 하기에 비교적 용이한 거리고 해안에서 가까운 마산이라 함포사격도 피하기 어려웠을텐데..여러 이유가 있었겠죠.
그래서 호남에서 우익이 사라지게 되었군요 ㅠㅠㅠ 현 상황을 보면 그 놈의 방호산 덕에 나라가 사상적으로 두쪽이 난 것이고 ㅉㅉㅉ
일제당시 호남의병대토벌때 좌파인지 우파인진 몰것으나 정의롭고 용맹한분들이 대다수가 사라진거도 클거같네요
멍청한 놈. 할말이 없다.
방호산, 결승점을 코앞에 두고 낮잠 자다가 경기에 지고만
이솝우화의 토끼 신세가 되었군요.
방호산은 모스크바에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김일성보다 상당한 엘리트였습니다.
전라도 지역에 대한 군정활동과 반동분자 척결.
그리고 지나친 자신감이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서두르지 않았던 그 실수는 후에 워커장군도 언급했습니다.
'북한군이 지체없이 바로 부산으로 왔다면 우리는 밀려났을 것이다."
마산까지 진격한 북한군이 연합군의 반격에 밀려 후퇴할 때, 피신하거나 잠복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전라도 일대가 된다는 가설이 성립하는 것 같습니다. 이미 그들에게는 반동분자라고 하는 반대 세력이 전멸한 지역이기 때문에 모택동이나 월맹의 심리전을 펼치기에 부담없는 지역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