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서의 칠십 이레(다니엘 9장 1 ~ 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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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23 ноя 2024

Комментарии •

  • @royr5703
    @royr5703 6 месяцев назад

    감사합니다.

  • @love84822
    @love84822 6 месяцев назад +1

    감사합니다

  • @ezrahousetv
    @ezrahousetv  6 месяцев назад +6

    앞뒤의 문맥을 따라서 원만하게 읽어내는 것이 매우 난해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해석해 보려고 노력들을 해 보았지만 여전히 개운하지는 않는 면이 있습니다. 따라서 누구의 해석도 완전하지 않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먼저 70이레의 기한이나 7이레, 62 이레, 그리고 1 이레 도합 70이레의 기한과 언약의 주체는 로마황제나 로마 장군이 세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해 두고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27절에서 "그가"라고 쓴 것을 보면 1 이레 동안의 언약을 "그가"굳게 맺는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7이레나 62이레나 남은 1이레이 언약의 주체는 로마의 장군이나 왕이어서는 안되고 오직 다니엘에게 계시는 주시는 천사나 하나님이어야 할 터인데 7절을 보면 해석을 어렵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하나님께서 기한을 정하고 언약을 세우셨다면 하나님 외 다른 어떤 누구도 그 언약을 좌지우지 할 수 없어야 한다는 것 때문에 해석에 있어서 난점이 발생하게 됩니다. 여러 주석들이 해석을 보아도 결과는 다 마찬가지로 개운하지 않습니다. 한편 예루살렘이 멸망하게 되는 과정의 역사를 보면 대략 아래와 같습니다. 이 내용들은 유대역사가 요세프스의 책이 나오는 내용을 거의 그대로 인용합니다. 차라리 이대로 보면 "그가"에 나오는 그를 예수님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이 로마의 장군 티투스로 보면 무리가 없습니다.
    ********예루살렘 멸망사***********(요세프스에서 발췌)
    '명망 직전의 예루살렘은 1전쟁, 2폭정, 3내분. 이 세 가지 불행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 세 가지 불행을 비교할 때 전쟁이 가장 경미하게 생각될 정도로 동족끼리의 내분과 폭정이 심했다'고 역사가는 기록하고 있다. 티투스는 예루살렘 성벽보다 높은 토성을 쌓고, 공성기로 돌을 날려 성벽을 공격하였다. 밤이면 성을 빠져나와 항복하려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로부터 성 안의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도망친 사람들의 가족들은 죽임을 당하였다.
    예루살렘은 극심한 기근으로 신발은 물론 방패에 달린 가죽까지 씹어 먹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자신의 아들까지도 먹었다고 하며, 기근으로 굶주리는 사람들은 차라리 죽은 자를 부러워했다고 한다. 자식을 먹는 그 참상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AD.70년, 7월 로마군은 야음을 틈타 안토니아 요새를 기습 탈취하여 성전 파괴의 교두보가 마련되고,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살육 당했다. 5개월에 걸친 격전 끝에 마침내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
    AD.70년, 8월 10일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올랐다. 유대인들은 성전이 불타고 있을 때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신호를 주실 것이라는 어느 거짓 선지자의 선언을 잔뜩 믿었다고 한다. 성전이 불에 탄 8월 10일은, 솔로몬 성전이 느부갓네살에 의해 파괴된 바로 그 날이었다고 한다. BC. 586년 5월 7일부터 5월 10일까지 예루살렘에 불타 없어졌는데 유대력은 태양력과 약 3개월 늦게 가기 때문에 태양력으로 8월 10일이면 유대력으로 5월 10일경일 수 있다.
    예루살렘의 참상은 그 어떤 혼돈보다 무서웠다고 한다. 성전이 서 있던 산은 그 엄청난 불길에 바닥까지 녹아버릴 것 같았고, 피에 적셔진 면적이 불에 탄 면적보다 넓었고, 죽인 자들보다 죽은 자들이 더 많았다고 한다. 맨 땅은 보이지 않았고, 온통 시체로 뒤덮였는데, 이 시체더미를 밟고서 군인들이 도망자들을 추격했다고 한다.
    로마 군인들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폐허 위에 동문 쪽으로 독수리 깃발과 휘장을 세워 놓고 거기다 제사를 드리고 열광적인 기쁨의 함성으로 티투스 임페라토를 외쳤다. 이로써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리라'는 예언이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마24:15)
    타키투스에 따르면, 희생자는 포로와 사망자를 합쳐 60만 명이라고 한다. 거의 유대인이지만 예루살렘 거주자보다 유월절을 기리기 위해 예루살렘을 찾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로마군에 의해 죽은 자보다 전염병과 굶어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한다.
    17세 이상의 남자 포로는 노예가 되어 속주에 선물로 보내졌고, 이들은 검투사가 되어 맹수의 먹이가 되거나 상대방 칼에 죽었고, 16세 이하의 남녀는 병사들에게 분배되었고, 병사들은 보너스를 받은 셈치고 그들을 노예상인에게 팔아치웠다고 한다.
    10만 명의 유대인이 포로가 되어 로마에 끌려가 콜로세움 건설 공사에 투입되었고, 훗날 이곳콜로세움 경기장에서 맹수들에 의해 그리스도인들 희생되기도 했다. 콜로세움은 이렇게 유대인 포로들의 피와 땀으로 세워진 것이다. 티투스의 개선문에는 유대에서 빼앗아 전리품이 된 성소의 보물들이 새겨져 있다. 요세푸스의 진술을 정리한 어느 역사가는 유대전쟁 시작부터 끝까지 죽은 사람들의 수를 1,356,460명, 포로들의 수를 101,700명으로 계산한다.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벽이 무너졌지만, 유대 전쟁이 종결된 것은 3년이 지나서였다. 예루살렘에서 도망친 일부의 사람들이 마사다 요새로 피신하여 3년간이나 저항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대부분이 자살함으로 3년간의 공략 끝에 마사다 요새가 함락되었고, 마침내 예루살렘 함락을 위한 유다 전쟁이 막을 내린다.
    A.D.70년 '유대 전쟁'은 로마에 반항하는 유대인의 운명은 죽음 아니면 노예 신세임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 예루살렘 멸망은 유대교의 동질성이 상실된 것을 의미했다. 성전 제사는 멈추어졌고 제사장직이 소멸되었다. 영향력 있는 기관이었던 산헤드린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유대 전쟁과 예루살렘 멸망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에 큰 획을 긋는 변화를 주었는데, 기독교 교회가 유대교를 뚫고 벗어나오는 중대한 분기점이 된 것이다.
    그 후 2차 유대 반란은 ​트라야누스 황제가 재위해 있던 A.D.115-117년 구레네, 애굽, 구브로, 메소포타미아에 살던 유대인들에 의해 반란이 일어났지만, 트라야누스 황제는 상당한 살륙을 감행하여 진압하였다. 트라야누스 황제 때의 사료는 많이 남아있지 않아 자세한 상황은 알 수가 없다.
    ​트라야누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제국의 동부 유대지역을 순방하며 예루살렘 북쪽에 도시를 건설하여 10군단을 상주시키고, 유대인의 할례를 금지시켰다. 또한 성전 자리에 로마의 신 주피터의 신전을 건설했는데, 이 일이 유대인의 '반 로마 감정'을 고조시켰다.
    이 때 유대인들의 존경을 받던 랍비 '아키바 벤 요셉'은 반란을 선동하였다. '아키바는 별의 아들'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바르 코크바'가 민수기 24:17에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나오는 바로 그 사람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바르 코크바를 메시아라 여겼고, 코크바의 항쟁은 급속하게 유대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쳐서 무찌르고 또 셋의 자식들을 다 멸하리라'(민24:17)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브리타니아에 있는 세베루스를 사령관으로, 다뉴브의 군단을 진압군으로 보냈다. 세베루스는 유대 북부에서부터 차례차례 공격하며 반란군을 진압에 성공하였고, A.D.134년 대대적인 공세로 예루살렘을 탈환하였다. 3년에 걸친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 참혹하였다.
    바르 코크바는 자결하였고, 아키바 벤 요셉은 붙잡혀 모진 고문 끝에 처형되었다. 사망자는 6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한 수많은 유대인들이 노예 시장으로 쏟아져 나와 노예값이 폭락했다고 한다.
    이 때까지는 '유대'라 불리웠던 지명을 '팔레스타인'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유대'라는 이름대신 다른 이름을 찾게 하였는데, 유대 지역은 원래 블레셋 사람들이 살던 땅이라 하여 '팔레스타인'이 지금까지 지명이 되었다. 팔레스타인은 '블레셋 사람들의 땅'이라는 뜻이다.
    블레셋은 원래 해양민족이었다. B.C.13세기경 애굽에 정착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가나안 해안 지역에 거주하게 되었다. 팔레스타인은 '블레셋 사람들의 땅'이라는 뜻이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예루살렘이 항상 반 로마 항쟁의 진원지가 된다는 것을 알고 모든 유대인은 예루살렘에서 추방하였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주피터 신전이 세워진 이방인의 도시가 되었다.

  • @지형김-k3f
    @지형김-k3f 6 месяцев назад

    목사님.
    묵시문학 구조와 히브리 구조를 알아야 다니엘서와 계시록이 풀어진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