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메이지시대 - "판적봉환(版籍奉還)과 폐번치현(廃藩置県)을 통해 본 번주(藩主)들의 기득권 포기 과정"

Поделиться
HTML-код
  • Опубликовано: 23 дек 2024

Комментарии • 166

  • @freedomultimate976
    @freedomultimate976 4 года назад +32

    일본 역사에서 제일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폐번치현이었는데, 방송을 보니 정말 이해가 가는군요. 좋은 내용 감사드립니다.

  • @왕밤바
    @왕밤바 4 года назад +5

    사료, 일본 현지 서적, 영화자료 등 현존하는 자료를 근거로 일본역사를 차분히 설명해주셔서 콘텐츠에 신뢰가 가고
    재밌게 영상시청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영상 부탁드립니다^^

  • @herbertkim7097
    @herbertkim7097 4 года назад +8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 @samurairomance
      @samurairomance  4 года назад +3

      오늘 많이 늦었네요. 힘이되는 말씀, 감사합니다.

  • @jojaehyun3438
    @jojaehyun3438 4 года назад +6

    오늘 내용 역시 감사히 잘 보고 갑니다 - 근대화 에서 현대화 로 넘어오는 메커니즘을 아주 손쉽게 습득 할수 있는 내용 이였습니다

  • @seokhohong4181
    @seokhohong4181 4 года назад +8

    저도 폐번치현이 그렇게 쉬웠을까 하고 생각했었는데, 상세한 설명 감사드립니다

  • @에르브
    @에르브 3 года назад +2

    새로운사실을 많이 알았네요^~^ 재밌고 흥미진진해요 앞으로도 새로운영상 많이 올려주세요

    • @samurairomance
      @samurairomance  3 года назад +2

      매주 일요일 늦은 밤 업데이트 됩니다. 일요일 낮에 커뮤니티 글로 예고가 나가고요. 이번 주도 업데이트됩니다. 97화 98화를 보시고 미리 학습하시면 이번 주 99화 내용을 더욱 재미있게 즐기실 수 있습니다.

  • @akiikaru
    @akiikaru 4 года назад +13

    대부분의 번주들이 귀족원으로 편입되어 정치력과 명예까지 얻고 부실한 번을 버리고 알찬 부동산과 가보 그리고 봉록을 받으니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하였죠. 폐번은 되었지만 번주와 가신가문의 영향력이 쎄서 자손대대로 국회의원이나 공무원을 계속 지역내에서 배출하죠. 아직까지 에도시대에 사는 듯, 항상 일본인들은 자기소개하라면 출신지고향을 먼저 말함.

    • @펨코유저
      @펨코유저 7 месяцев назад

      전통과 관습이 일본의 힘

    • @x6ga7f3qu
      @x6ga7f3qu 26 дней назад

      대놓고 유세는 안하지만 요즘도 몇몇 지역은 다이묘 집안이 꽉 잡고 있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구요, 일본에서 유학온 친구에게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 @남산코끼리-l3e
    @남산코끼리-l3e 4 года назад +3

    이야 정말 재밌고 유익하네요. 겉으로 보기엔 대단해보이는데 속을 보면 의외로 실리가 별로 없고 골치만 아팠는데 그걸 다 해결해주고 풍족하게 살 수 있게 해주니 룰루랄라하면서 협조했군요. 어쨌든 저런 골치아플 수 있을 문제를 원만히 잘 해결해서 근대국가로 도약한 일본 정말 대단합니다.

  • @쿠쿠-o1y
    @쿠쿠-o1y 3 года назад +4

    《사카모토 료마》에 대해 소개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다른 자료로 접한게 있는데 역사란게 의외로 여러 면으로 해석되거나 미화되는거도 많이 있어서요..

  • @소금맛새우-i3w
    @소금맛새우-i3w 4 года назад +4

    매번 좋은 영상 감사드립니다

  • @짜이주
    @짜이주 4 года назад +4

    인트로가 바뀌었군요! 웅장하니 멋들어집니다^^

    • @samurairomance
      @samurairomance  4 года назад +2

      좋은 무료 브금이 있어서 박자에 영상을 맞춰 봤습니다.1년에 한 번 씩 인트로를 바꾸고 있거든요.

    • @짜이주
      @짜이주 4 года назад +1

      @@samurairomance 박력 넘치는 21년도 인트로 처럼 내년에도 더욱이 채널이 성장하길 소망합니다!!

  • @하하하하-h7n
    @하하하하-h7n 4 года назад +7

    폐번치현 하면서 행정지도 등을 했던 경험이 구한말 일본인 고문을 배치하고 통감부를 설치하는 밑바탕으로 작용했을거 같네여 학계에서 본격적으러 연구해볼 만한 주제인거 같아요

    • @cj22cen
      @cj22cen 4 года назад +3

      그것은 저도 동감입니다.

    • @samurairomance
      @samurairomance  4 года назад +4

      일본 국내를 정리하며 근댁 국가를 만들었던 과정에 대한 경험이 식민지 경영에도 한 몫했음에는 분명해 보입니다.

  • @axeandturtle
    @axeandturtle 4 года назад +3

    일단 감사댓글부터 드리고 편안히 감상합니다!!

    • @samurairomance
      @samurairomance  4 года назад +3

      간만에 오셨네요 !

    • @axeandturtle
      @axeandturtle 4 года назад +1

      @@samurairomance 넵. 댓글은 간만이지만 영상 알림 뜨면 항상 보려고 킵해두고 있습니다!

  • @coreofthis
    @coreofthis 4 года назад +3

    7분쯤에 나오는 곳은 어딘가요 한번 가보고싶네요

  • @구공탄-j3e
    @구공탄-j3e 4 года назад +7

    항상 폐번되면 그곳의 영주들이 기득권을 뻇기는거니 반발해야 왜 전쟁이 안일어났을까? 생각햇는데 이런내용 이었군요.

  • @홀본
    @홀본 4 года назад +5

    질문이 있습니다. 예전에 일본 TV보니까 메이지유신 이전까지는 일본에는 지역마다 방언이 너무 심해서 의사 소통이 않되었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

    • @청솔향-g9u
      @청솔향-g9u 3 года назад

      의사소통이 안된다면 전쟁이죠! 우리가 탐라 사투리 이해 못하는 정도일 겁니다......

    • @개인용-r3v
      @개인용-r3v 3 года назад

      지금도 일본 북부 쓰가루벤이나 오키나와 사투리는 알아듣기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 @paul-qc9rw
    @paul-qc9rw 4 года назад +2

    잘봤습니다.감사합니다.

  • @ilovemath-MAISON4300
    @ilovemath-MAISON4300 4 года назад +4

    항상 관심있었던 "화족"의 유래에 대해 알게되었네요
    시대의 격변기라고 할수있는 메이지시대에 왕가와 지배층인 번주들간의 융통성있는 거래로 서로 윈윈하게 된게 일본인들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것 같아요
    체면지켜가며 실리를 얻어낸걸로 보이는데 제가 잘 이해한건가요?
    오프닝이 멋지고 웅장하게 달라져서 깜짝 놀랐습니다 ㅎㅎ
    구독자수 많이많이 늘어나고 번창해서 콘텐츠제작 하시는데 큰 힘이 되었으면 합니다

    • @samurairomance
      @samurairomance  4 года назад +2

      말씀하신대로 체면 세워주고 실리 챙겨주면서 2년에 걸쳐 봉건제도의 상징인 번을 해체할 수 있었다라고 정리할 수 있겠네요.
      전통적 다이묘들, 공가 등이 화족으로 신분 전환이 된 것이 골자이지만, 메이지의 주역들은 "국가훈공자" 라는 명목으로 자신들도 화족에 포함시켰습니다. 이들 대부분이 하급무사 출신인데, 귀족으로 변신하며 신분상승을 일궈낸 것입니다.

    • @ilovemath-MAISON4300
      @ilovemath-MAISON4300 4 года назад +2

      @@samurairomance 하급무사출신이었던 메이지의 주역들도 화족이 되었군요
      세습 다이묘들이나 공가출신들이 반발하지 못할만큼 메이지주역들의 힘이 막강해진 거였나요?

    • @호두구속
      @호두구속 3 года назад +1

      @@ilovemath-MAISON4300 둘 다입니다 메이지 주역들의 영향력 증대와 전통적인 다이묘나 귀족들의 영향력이 약해진 것과 맞물렸죠

    • @dominion8998
      @dominion8998 3 года назад +1

      네. 도쿠가와가문 공작 도쿠가와가문 방계 고산케 후작 류큐(오키나와)왕족 후작인데 쵸슈번 하급무사 출신인 이토는 공작까지 올라갔죠

  • @virtus63
    @virtus63 4 года назад +5

    시대상황과 적절한 보상

  • @BlackSkyUploadTube
    @BlackSkyUploadTube 4 года назад +4

    0. 대정봉환만 알고 있었습니다.
    1. 전 수능 탐구영역이 4개 선택하던 시절 문과에서 이과로 옮겼는데요. 문과의 4과목이 윤리와 사상, 국사, 한국근현대사, 그리고 세계사였습니다. 동아시아사로 배우는 요즘과 다르게 세계사에선 메이치 신정부가 바로 폐번치현한 거로 묘사되더군요. 공존한 시기에 대한 언급은 못 봤습니다

  • @아니의톡방
    @아니의톡방 4 года назад +2

    나중에 시간되시면 에도시대 복식문화에 대해 알려주세요. 사무라이들은 왜 붕대로 배를 둘둘말고 다녔는지 궁금하더라고요

  • @chriskim5929
    @chriskim5929 4 года назад +5

    판적봉환과 폐번치현과 동일한 시기에 벌어졌다고 했던 잘못을 알려줘서 감사합니다.

  • @규라이프kyulife
    @규라이프kyulife 4 года назад +2

    메이지 유신때 일본이 어떤식으로 서구문물을 잘 수용하여 오늘날의 강대국이 되었는지 알고 싶네요. 쇄국정책이나 그런것은 없었나요??

    • @invitebyte3278
      @invitebyte3278 Месяц назад

      메이지 유신이 아니라 이미 전국시대 이전부터 일본은 포르투갈과 교역을 하며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고 있었고 에도시대부턴 네덜란드와 정기적으로 교역과 교류를 하며 서구유럽의 문물 및 서구유럽의 정세를 파악할수 있었지. 다시 말해 300년이 넘는 기간동안 일본은 서구 문물을 지속적으로 습득, 응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후 메이지 유신 및 서구식 부국강병에 대해서도 대중과 사회지도층 모두 거부감이나 시행착오가 적었던거. 더욱이 화폐경제가 이른 시기 발달되면서 전체적인 자본력이 성장했다는점도 있고.

  • @sylon8984
    @sylon8984 4 года назад +25

    예전에 일본군사사라는 책에서는 폐번치현 성공의 가장큰 이유를 채무대리로 서술했었는데, 현대적 자본가가 되는 편이 낫다는 판단이 섰을 수도 있었겠네요

    • @samurairomance
      @samurairomance  4 года назад +15

      재정파탄에 시달리며 검소한 생활을 강요받는 껍데기 뿐인 번주보다는 돈 두둑히 받고 풍족한 일상의 귀족이 될 수 있다먼 저 같아도 그 길을 택했을 것 같습니다.

    • @德川家康-p7o
      @德川家康-p7o 4 года назад +5

      @@samurairomance 돈앞엔 장사가 없죠... 도쿠가와 가문이 너무 다이묘들을 옥죄어서ㄷㄷ

    • @德川家康-p7o
      @德川家康-p7o 4 года назад +9

      도쿠가와 가문은 다이묘들의 힘을 뺀답시고 참근교대,부역을 계속...
      굶어죽느니 유신지사들 편에 붙는게 현실적일겁니다

    • @cj22cen
      @cj22cen 4 года назад +1

      @@samurairomance 동영상을 보니까 이제사 이해가 됐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소수 사무라이 및 가신들이 몇차례 반란을 일으켰죠. 졸지에 실업자가 되었으니...

    • @이경환-d2i
      @이경환-d2i 2 года назад

      @@samurairomance < 메이지 천황 정부가 들어선 지 얼마 안 된 1871년 나가오카 번 등 열세 개 번이 재정이 곤궁하다며 폐번을 신청했다. 그 전에 조슈 번의 탈퇴 소동이 있었다 >
      문소영 님이 쓴 '조선의 못난 개항'에 있는 폐번치현과 관련된 내용들 중 하나인데요..
      여기서.. '조슈 번의 탈퇴 소동'이라는 건 어떤 내용인지 알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2022.08.14

  • @kimjames6725
    @kimjames6725 4 года назад +3

    대정봉환이랑 다른뜻이었네옇ㅎㅎㅎ; 항상잘보고있습니다~!

    • @samurairomance
      @samurairomance  4 года назад +1

      대정봉환은 판적봉환 전에 일어난 일이지요. 토쿠가와 막부가 대행해 온 통치행위를 조정에 반환한 것으로 막부 해체를 통해 평화적 정권이양을 꾀한 것입니다. 그 뒤 다이묘(번주)들을 해체 하는... 순차적 작업이었던 것이지요.

  • @tv.2745
    @tv.2745 4 года назад +3

    🙋‍♀️우선 잘듣겠습니다.

  • @qqeeee6790
    @qqeeee6790 4 года назад +6

    일본은 그래도 서로 윈윈하려고 하는 느낌이 강하내요. 저시기를 슬쩍 볼 때 순식간에 처리한 것 처럼 보였는데, 굉장히 일본인 스럽게 보신전쟁만 빼고는 계획적으로 차근차근하고 깔끔하내요.
    그리고 신세력이 전세력을 숙청이나 처벌 하기보다는 포용하려는게 참 인상깊슾니다. 나중에 메이지나 다이쇼 때 설립한 기업에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면 소개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samurairomance
      @samurairomance  4 года назад +4

      미츠비시 그룹의 이와사키 야타로 이야기 한 번 들려드리겠습니다. 미츠비시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정말 많더라고요.

    • @남산코끼리-l3e
      @남산코끼리-l3e 4 года назад +2

      숙청하려했는데 천황을 받들던 사상(존황?)이 깊이 뿌리 내린 미토번 출신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천황과 싸울 수 없다고 후퇴한 것도 있고 아츠히메의 설득으로 자숙을 열심히 해서 그런것으로 압니다만 맞는지 모르겠네요 ㅎㅎ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전철을 밟지 않은 훌륭한 처세술이였다고 생각합니다. 히데요리도 오사카성을 내주고 시코쿠나 이가 지역같은 변두리로 퇴거했다면 한동안은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을것 같은데 말입니다. 결국에는 막부의 작업으로 가이에키 되었으려나요?ㅎㅎ

    • @김양언-h7o
      @김양언-h7o 3 года назад +1

      이에야스 입장에서 히데요리는 반드시 정리해야할 대상이었습니다
      비록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반反이에야스 세력을 정리하고 도요토미의 영지도 줄여 세력이 줄었지만 만만히 볼 수 없는 세력임은 물론 정월에 쇼군에게 인사를 올리라 요구하자 가토 기요마사가 경호를 자처하며 도요토미파 다이묘들을 선동하자 이에야스가 상당히 긴장하며 결국 유야무야 넘어갔지만 이는 도요토미가 존재하는 한 얼마든지 도쿠가와 바쿠후를 공격할 수 있다는 의미였기에 이에야스는 오랜 세월동안 공을 들여 지속적으로 도요토미의 세력을 압박하며 오사카 성에서 나와 다른 번으로 옮길 것을 요구하였고 끝내 오사카 공방전에서 도요토미를 숙청한 이후에도 한 야사에서는 어느 다이묘가 주인 없는 오사카 성을 요구하자 크게 대노하며 아예 그의 영지를 빼앗았다는 풍문이 있을만큼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하니 히데요리가 오사카 성을 나가 다른 번으로 갔다 하여도 결국 숙청당하는 결과를 피하지 못하였을겁니다

  • @MICHAEL-ft6mo
    @MICHAEL-ft6mo 4 года назад +3

    오~오프닝이 더 세련되게 바뀌었네여!
    녹음 속도가 조금 빨라져서 몰입감도 더 높아진 영상이었습니다!^^
    아, 오프닝 처음에 '일본인의 시각으로'라는 멘트는 혹시 채널장님께서 일본인이라는 뜻은 아니지요?

    • @samurairomance
      @samurairomance  4 года назад +2

      역시 말이 좀 더 빨라야 하는군요. 앞으로도 지금 스피드를 유지하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아.. 역시 그 부분이 오해가 있을 수 있겠네요.. 한국인이지만, 한국인의 삐딱한 일본관을 배제하고 일본인이 자국역사를 보듯이 건조하게 일본사를 바라보갰다는 의미였는데, 문구를 고쳐야 갰네요.

    • @MICHAEL-ft6mo
      @MICHAEL-ft6mo 4 года назад +1

      @@samurairomance 빠른 피드백 감사합니다!^^ 한국분인줄 알고 있었지만 일본어를 너무 잘하셔서 자막 보는 순간 어 모지?했었는데 깊은 뜻이 있었네요!^^ 저는 올려주시는 영상들 볼때 관심있는 분야 이긴해도 역사이야기인지라 보다 가끔 루즈해지는 경우가 있었는데요, 역시 살짝 긴장감드는 속도로 설명해주시니 몰입감이 훨씬 좋았습니다, 물론 내용이 평소 궁금했지만 쉽게 알수 없는 신기한 내용이라 더 그랬던것도 있었구요^^ 앞으로도 좋은 영상 부탁드리며 항상 응원합니다!!^^

    • @samurairomance
      @samurairomance  4 года назад +1

      하여튼 말 느린 것이 항상 문제입니다... 서울 사람입니다만, 오랜 대에 걸쳐 충청도 피가 흐르는 것은 속일 수가 없군요..ㅋ

  • @joehenry8165
    @joehenry8165 7 месяцев назад +1

    화족이라는 신분과 경제적인 이유가 컸군요. 주변에서 다들 받아들이는 분위기 보고 따라가기도 했을테고.

  • @차가운포도
    @차가운포도 4 года назад +2

    새해에 맞는 새로운 오프닝 너무 멋집니다! 번주들은 생각보다 불만도 손해도 얼마 없었군요... 결국 손해는 번사들이 본 건가요? 판적봉환이나 폐번치현에 대해서는 책에서 한 번 읽어본 게 다라 모르는 게 많았었는데 이렇게 유익한 영상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ㅠ
    내년에는 더 소문나고 더 번창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내일부터 3일간 기말고사 잘 보고 오겠습니다...ㅋㅋㅠ
    나중에 시험 끝나면 팬아트 그려봐도 괜찮을까요?

    • @samurairomance
      @samurairomance  4 года назад +2

      시럼 잘 보세요. 우리 딸도 내일부터 3일간 기말고사 보던데.
      번사들은 처음에는 가록을 인정해주다가 메이지 정부 재정의 40% 가까이가 사족들 봉록 급여로 나가다 보니, 결국 "치츠로쿠쇼분(秩禄処分)"을 통해 봉록 지급을 중단하고, 국채 발행해 주고 그 이자를 받을 수 있게 바꿨지요.
      다만, 이자로 먹고 살기 어렵다 보니 지급한 채권을 팔아 사업을 시작하고 당연 경험없다보니 망하고 하면서 사족(번사)들의 블만은 높아져 갔습니다.
      이러한 불만이, 사가의 난(佐賀の乱), 신푸렌의 난(新風連の乱), 하기의 난(萩の乱), 세이난 전쟁(西南戦争)까지 이어지게 되지요.
      근데 팬 아트가 뭡니까??

    • @차가운포도
      @차가운포도 4 года назад +1

      @@samurairomance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사업하다 말아먹었다니 납득이 갑니다ㅎㅎ 평생 장사도 안 하고 문서작업이나 칼만 다룬 사람들이 갑자기 스스로 생계를 이어나가야 하다니 참 막막했을 것 같습니다. (팬아트는 다른 분이나 그 분의 캐릭터를 그리는 것입니다! 영상 초반에 나오는 카부토 쓴 사무라이 캐릭터가 자주 나오는 것 같아서 허락해주신다면 존경의 마음을 담아 열심히 그려서 드리고 싶습니다😆)

    • @samurairomance
      @samurairomance  4 года назад +2

      오오. 저야 감사하지요 !! 우리 애들은 이제 시켜도 말도 안듣고 해서..

    • @samurairomance
      @samurairomance  4 года назад +2

      앗. 타츠오키님도 한 그림 하시나 보네요??

    • @samurairomance
      @samurairomance  4 года назад +2

      그림 잘그리는 분 부럽습니다. ㅠㅠ

  • @dollarking4108
    @dollarking4108 Год назад +2

    행정지도라고 가신들을 먼저 전리해서 번주의 힘을 약화시켜놓고, 경제적 이득이라는 당근을 주어 폐번치현...
    우리도 이렇게 근대와 현대를 연결했으면 좋았을 것을...

  • @jaewonjang3446
    @jaewonjang3446 4 года назад +1

    메이지유신때 전통귀족인 공가의 처리가 궁금해지네요. 트리비아입니다만 공후백자남작은 중국 주나라 관작명을 Duke Baron 등등에 갖다붙인거라고 들었습니다.😅

    • @samurairomance
      @samurairomance  4 года назад +1

      공가, 무가 모두 화족 신분으로 정해집니다.공가는 원래 신분 계급에따라 공후백저남이 정해졌고, 무가는 보통은 영지 규모에 따라 정해졌지요.
      여기에 국가훈공자라는 이름으로 메이지 주역들도 화족 반열에 숟가락을 얹게 됩니다.

  • @elvenisar
    @elvenisar Год назад +1

    "기득권 포기인데 왜 그렇게 쉽게 넘어갔을까? 보신전쟁때 다들 초토화 되었던것도 아닌데..."라고 의문을 품고있던 부분인데 모든 부채를 신정부가.... 정확히 이해가 되었습니다. "딜이란건, 거부할 이유가 없는걸 제시하는 것"이란 이야기가 있었는데 번주들 입장에서 폐번치현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네요.

    • @samurairomance
      @samurairomance  Год назад +1

      명언이네요. 딜이란건 거부할 이유가 없는걸 제시하는 것이라...

  • @영웅무송
    @영웅무송 4 года назад +2

    역시 나르호도 일본이 한순간에 메이지유신같은
    번개불에 콩볶듯이 한것이
    아니군요
    수십개 봉건의 다이묘들
    한순간에 다몰락한게 아니고
    서서히 중앙집권하고
    다이묘들이 봉건제를 버리고
    새로운 화족(귀족)과 자본가로 성장하기에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로 갈수있는 토대가
    서서히 만들어지게 되었내요
    일본의 근대화 깊은 내부사정(속내)를
    알게되어 감사합니다^^

  • @로버트존슨-c2d
    @로버트존슨-c2d 4 года назад +2

    영상 잼나게 잘보았습니다ㅎ
    근데 그때 폐번치현이후 사유재산으로 인정한 번주들의 영토나 성은 아직도 그번주들 후손것일까? 어떻게 됐을까 궁금하네요 ㅎ

    • @akiikaru
      @akiikaru 4 года назад +2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정 대본영을 이끄는 죠슈번과 사츠마번 등만 번성하고 나머지 번들은 망합니다.

  • @김정훈-y2d2y
    @김정훈-y2d2y 4 года назад +1

    감사합니다

  • @윤영조-f6d
    @윤영조-f6d 4 года назад +6

    메이지 유신의 키는 청ㆍ일전쟁 배상금. 판적봉환을 하고도 유신정부는 적자를 면치 못했다 들음.

    • @cj22cen
      @cj22cen 4 года назад +2

      그 정도로 에도막부가 다이묘들을 옮아엮였는지 알 수있죠.

  • @소금맛새우-i3w
    @소금맛새우-i3w 4 года назад +3

    오 오프닝 좋네요 !

    • @samurairomance
      @samurairomance  4 года назад +3

      박력 있게 꾸며 봤습니다. 이것저것 흉내좀 내 봤는데 괜찮다니 좋네요. ㅋ

  • @김명룡-z5k
    @김명룡-z5k 3 года назад +2

    도쿠가와 가문은 어찌 되었나요?

    • @개인용-r3v
      @개인용-r3v 3 года назад +1

      지금도 남아있어요 이후로도 제국 시절에는 귀족작위 받아서 외교관 등으로 활동했고 현재 도쿠가와 가문 당주 도쿠가와 츠네나리는 일본우선이라는 일본 3대 해운업 회사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 @개인용-r3v
      @개인용-r3v 3 года назад +1

      츠네나리 후계자는 도쿠가와 이에히로라는 정치평론가 겸 작가인데 입헌민주당 소속이었던 진보주의자입니다. 일하다가 만난 베트남 여자랑 결혼해서 도쿠가와 츠네나리가 호적에서 파버린다고도 했었는데 최근에는 그냥 물려준다는것 같더라고요

    • @samurairomance
      @samurairomance  3 года назад +1

      회사 부사장님이군요. 회사 직원들 농담들이 그려지네요.
      언제까지 토쿠가와에게 세상을 맡겨야 하느냐 라든가...
      막부를 무너트려야 한다라든가... 회사 내에서 제2의 메이지 유신을 일으켜야 한다든가...

    • @개인용-r3v
      @개인용-r3v 3 года назад +1

      @@samurairomance 실제로 마에다 토시이에 가문 카가 마에다 가문 종손하고 일하게 됐을때 상사가 마에다 종손과 도쿠가와 종손을 부리게 되다니 태합 이후 처음이라는 농담을 했다는 일화가 있다네요 ㅋㅋ

  • @유재성-u3b
    @유재성-u3b 4 года назад +2

    명치유신 ㅡ 폐번치현 등 당시 일본의 경제를 좀 상세하게 기술한 저서 추천해 주세요.

  • @경지진
    @경지진 2 года назад +1

    기존 번주들의 영주 수익 10% 보존과 막대한 채무를 전부 탕감해주고 귀족 신분을 부여한다는건 엄청나고 파격적인 조건이네요;;; 아무리 번주들의 반감&협조를 위해서 그랬다고는 하나... 백성들 위한 유신 개혁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돕니다.. 오늘도 또 배워갑니다 감사합니다

  • @shk5253
    @shk5253 4 года назад +4

    황족/화족/재벌/웅번출신자/제국대졸/사관학교졸/고시출신 만 득세를 했을까...

  • @김주철-d3w
    @김주철-d3w 4 года назад +1

    신체제의 안정된 자리와 중앙집권화를 교환하는데 성공했기에 유신이 생각보다 무리없이 진행되었던 거군요. 좋은 영상 잘 봤습니다. 그런데 유신의 기둥을 떠받치고 있던 조슈와 웅번들의 다이묘들은 어떻게 쉽게 판적봉환과 폐번치현을 할 생각을 했을까요. 막상 유신 초를 보면 권력을 잡고 방향타를 조종한 사람들은 상급무사 출신들이 아니었던 걸 보면, 다이묘들이 권력에서 어느정도 물러나는 걸 받아들여야 했을텐데 말입니다

    • @samurairomance
      @samurairomance  4 года назад +3

      판적봉환까지야 크게 차이가 느껴지지 않으니 큰 반발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2년 만에 전격적으로 폐번치현까지 이루어지자, 사츠마 번주 시마즈 히사미츠는 너무나도 급작스러운 결정에 불만을 품고 불꽃놀이로 불만을 표출했다고 하지요.
      반발하려해도 판적봉환에서 자발적으로 텐노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했기에 이 논리를 깰 대의명분이 없었습니다.
      또한 사츠마, 쵸슈, 토사로부터 고신페이(御新兵)로 불리우는 9천의 병력을 메이지 정부가 차출했는데요. 세 웅번 출신의 병력으로 메이지 정부 직할군을 만든 것이지요. 이 대병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사츠마, 쵸슈, 토사 번주가 뜻을 같이해야 하는데, 그 가능성이 희박했습니다.

    • @김주철-d3w
      @김주철-d3w 4 года назад +1

      친절한 설명 감사합니다. 신정부가 번들보다 한수를 더 봤군요. 번병들이 있어 쉽지 않았을텐데 했는데 이미 군권도 빼앗긴 상황이면 게임 끝이었네요

  • @sucregabe3708
    @sucregabe3708 4 года назад +11

    저정도 exit 조건이면 당연히 신정부에 적극 협조하겠네요. 재산 불려주고 빚은 대신 떠안아주고 귀족이라는 신분까지.... ㅎㅎ
    저 때 끌어안은 부채를 신정부가 어떻게 갚았는지가 도리어 궁금합니다

    • @samurairomance
      @samurairomance  4 года назад +6

      30년을 넘은 오래된 부채는 그냥 삭제, 30년 이내의 부채는 공채(公債)를 발행해 줌으로써, 상인들과 중간점에서 적절한 딜을 보는 것으로 정리되었습니다.

    • @남산코끼리-l3e
      @남산코끼리-l3e 4 года назад +4

      @@samurairomance 캬 너무너무 유익한 채널 ㅜㅜ 정말 감사드립니다. 악성부채는 걍 삭제했군요 ㅋㅋ

    • @samurairomance
      @samurairomance  4 года назад +8

      막부말기 부채 거치기간을 100년, 150년으로 해 두면서 재정개혁(?)을 단행하다보니, 대대로 받아야 하는 빚이 되어버렸고, 어차피 살아생전 못받을 것 뻔한데 그나마 30년 이라도 인정해 주니 그 딜을 받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 @청솔향-g9u
      @청솔향-g9u 3 года назад +2

      신정부 시대에 국가의 비호 아래 엄청난 기업 활동이 일어나고 지금도 존재하는 많은 대기업이 이때 힘을 얻습니다. 부채상환 대신에 이권을 손에 쥐어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죠!

  • @분열정신
    @분열정신 3 года назад +2

    메이지 유신 = 다이묘 ~> 기업가(자본가) 로 바뀌게된 계기라고 할 수 있겠네용....

  • @binuinsoap
    @binuinsoap 4 года назад +1

    질문있어요
    보통 몇석하는 단위가 쌀한가마할때 그 몋석인가요?

    • @samurairomance
      @samurairomance  4 года назад +1

      맞습니다만, 일본의 1석과 조선의 1석은 무게가 다르기는 합니다.

    • @binuinsoap
      @binuinsoap 4 года назад +1

      혹시기회가된다면 사무라이들의 생활에대해서도 알려주세요
      녹봉대비 어느정도 생활수준을유지했는지

    • @samurairomance
      @samurairomance  4 года назад +1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보통의 하급 무사들이 어떤 생활을 해 왔는지에 대해서, 제 영상 79화 "에도시대 하급 사무라이 아르바이트 이야기"가 참고가 될 겁니다.

  • @ultra-devilsparrow2917
    @ultra-devilsparrow2917 3 года назад +1

    가끔 친구들하고 술 한잔 걸치다가 역사에 관련한 이야기도 하는데 그 중에서 일본이라면 질색을 하는 놈이 있길래 우리나라 역사 제대로 알려면 일본 역사도 알아야 한다고 전국시대나 메이지 유신같은거 아는 한도내에서 얘기 가끔 해주거든요. 여기를 통해서 그 얘기를 앞으로는 좀 더 세부적으로 할 수 있어서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 @samurairomance
      @samurairomance  3 года назад +2

      서로 좋은 이야기 나누며 일본을 바로 알아가도록 노력해 봅시다. 개인의 영역에서 일본에 흥미가 있냐 없냐는 취향의 영역이지만, 국가의 관점에서는 일본을 정확히 판단하고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대한민국 생존과 국익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 @ultra-devilsparrow2917
      @ultra-devilsparrow2917 3 года назад +1

      @@samurairomance 당연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영상 부탁드리겠습니다.

  • @tkkimreal
    @tkkimreal 6 месяцев назад +1

    다른번들은 경제적으로 위태했으니 판적봉환이 손해보는 장사는 아닐수 있겠는데 조슈번과 사츠마번은 왜 솔선수범해서 내놓았을까요? 정부 요직을 꿰찼으니 이미 번을 넘어 국가를 대대손손 지배하게 될것으로 생각했을라나요?

    • @samurairomance
      @samurairomance  6 месяцев назад +1

      사츠마와 쵸슈가 일찍이 재정개혁을 단행하긴 했지만, 사츠마는 영국과의 전쟁, 쵸슈는 유럽 각국과의 전쟁과 막부와의 두 차례에 걸친 전쟁... 그리고 사츠마, 쵸슈 모두 그 뒤의 보신전쟁에서 막대한 전쟁 비용을 소모했기 때문에 재정 파탄 상태에 직면해 있던 것은 동일했습니다.
      신정부는 사츠마, 쵸슈의 기둑권 세력과는 또다른 존재였을 뿐만 아니라 키도 타카요시, 오오쿠보 토시미치 등은 신국가 체제 건설이 출신 번의 이해관계보다 중요했고 오히려 솔선수범해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사츠마와 쵸슈도 예외는 없었던 거죠.
      한 발자국씩 무너져 가는 기득 세력의 몰락 과정이 참으로 드라마틱한 시대입니다.

    • @tkkimreal
      @tkkimreal 6 месяцев назад +1

      @@samurairomance 오 답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요새 일본 역사에 관심이 많이 생겨서 궁금한게 많은데 사무라이님 영상 보면서 도움이 정말 많이 되고 있습니다^^ 사실 아직 메이지유신 과정에서 기득세력이 물러가는 과정을 알아보는 중인데요 납득이 잘 되질않아서 어렵네요 ㅠ 최근에 번역출판된 폐번치현이라는 책을 보면 감이 좀 잡힐까 싶어서 읽어볼까해요 앞으로도 좋은 영상 부탁드립니다^^

    • @samurairomance
      @samurairomance  5 месяцев назад +1

      감사합니다 !!

  • @kjb6477
    @kjb6477 4 года назад +1

    지난번 도쿄시내 목장 이야기에서 번주 에도 부지를 목장으로 활용했다길래 번주 에도관저가 국유지인줄 알았는데 번주 개인 땅이었군요

    • @samurairomance
      @samurairomance  4 года назад +1

      예리하게 기억하시고 계셨네요. 그 과정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저택부지를 팔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 @이정환-x7p
    @이정환-x7p 3 года назад

    공부 잘하고 갑니다 정말 내용이 알차고 새롭네요. 일본사를 겉핥기로만 배우다가 제대로 본 기분임다.

    • @samurairomance
      @samurairomance  3 года назад

      남의나라 이야기인데 학교에서는 이런 내용을 다룰 이유는 없으니까요. 다만, 몇 줄 안되는 일본사라도 제대로 가르쳤으면 좋겠는데 말이지요.

    • @이정환-x7p
      @이정환-x7p 3 года назад

      @@samurairomance 저들이 오래전 에도시대에 징비록과 동의보감을 들여다봤듯이 우리도 일본에 대해 좀 더 폭넓게 알았으면 합니다. 과거지사 이전에 상대를 잘 알아야 위태롭지 않으니까요.

  • @헉헉허헉
    @헉헉허헉 3 года назад +2

    어찌보면 기득권을 포기한 것 같이 보여도, [에도막부 아래에 영주로서의 삶보다 훨씬 윤택하고 자유로울 수 있었다.] 가 골자인 듯 하네요.

    • @samurairomance
      @samurairomance  3 года назад +3

      맞습니다. 고쿠다카(石高) 몇 만석씨 되어도 농민 소득을 제외하고, 가신들 영지, 급여 제외하면 별로 남는게 없거든요. 2년에 한번 찾아오는 산킨코오타이 예산이 고쿠다카의 50%가 넘으니, 산킨코오타이가 있는 해에는 그냥 적자재정으로 시작하는 겁니다. 오사카의 거상들에게 돈을 빌려 해결했던 것들이 200년 넘게 쌓이다 보니 막부발기 대부분의 번들이 재정파탄에 허덕인 것이지요.
      기득권은 포기하지만, 재정난에 허덕이는 허울 좋은 다이묘 보다는 대우받는 귀족이 나을 수 있었겠죠.
      다이묘들도 검약을 강요받아야 하는 상황에

  • @권학수-w2n
    @권학수-w2n 3 года назад +1

    100석이나 1000석짜리 작은 가신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 @samurairomance
      @samurairomance  3 года назад +1

      1000석은 꽤 높은 봉록이니 높은 귀족 계급으로 편입이 되었을 것이고요. 100석 정도의 하급 사무라이들은 "사족(士族, 시조쿠)"이라는 새로운 신분으로 편입되었고 이런 사무라이 밑에서 일하던 츄우겐(中間) 같은 부류는 "졸족(卒族, 소츠조쿠)"으로 편입됩니다.
      원래 받고 있던 녹을 메이지 정부가 계속 지급했지요. 물론 심한 경우 1/10 가까이 녹이 감소하기는 했습니다.
      다만, 예산에 막대한 부담이 따르다보니 사족 신분을 상업 계열로 연착륙 시키려는 제도적 노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메이지 정부 탄생하고 6년이 지난 1873년, 여전히 예산에 압박을 느낀 메이지 정부는 "자발적"으로 녹을 반환하는 사족들에게 "질록공채(秩禄公債, 치츠로쿠코오사이)"를 발행해 주면서 일단 예산을 일부 줄일 수 있게 되지요. 하지만, 여전히 예산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3년 후에 "강제"로 녹을 반환시키는 "금록공채(金禄公債, 킨로쿠코오사이)"를 발행하면서 사실상 녹봉제도는 폐지됩니다.
      인구의 5%밖에 안되는 귀족들에게 녹을 지급하느라고 국가 예산의 40%가 사용되었다고 하니, 메이지 정부의 질록제 폐지는 어쩌면 근대국가로 가는 당연한 수순이었다고 봅니다.

  • @bezaleel01
    @bezaleel01 4 года назад +1

    재밌네요. 화이팅

  • @naruhd
    @naruhd 2 года назад +1

    ‘어느 날, 자식 둘을 데리고 엄마 거지가 왔다. 조금 있으니 아이들 아비지라는 키가 큰 거지도 왔다. 할머니는 이들을 특별히 정성스럽게 대접했다. 우리도 간신히 먹고 사는 형편인데 흰 쌀밥까지 대접했다. 왜 그리 귀하게 대접하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들이 돌아가자 나는 할머니에게 물었다.
    “그 남자 분은 옛 가미노야마번의 3만 석 번주였던 마쓰다이라 노부야스님이다”
    할머님은 그렇게 대답했다. 마쓰다이라 님은 메이지 유신 때 폐번치현으로 번주에서 물러나 자작 작위를 받았으나 이제는 그 작위도 몰수되어 걸식으로 생활하는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
    거지가 된 영주도 있었네요 ㅎ

  • @dominion8998
    @dominion8998 3 года назад +1

    刀狩り는 반발이 컸는데 폐번치현도 반발 큰 줄 알고있었어요 잘 배우고 갑니다

    • @samurairomance
      @samurairomance  3 года назад +1

      빚만 남은 번주의 이권은 다 챙겨줬으니까요. 질록채권, 질록처분 등을 통해 녹봉 지급을 강제로 중단시켜 버리면서 일반 하급 사무라이들이 폭발하게 되죠. 신푸렌의 난, 아키츠키의 난, 하기의 난... 세이난 전쟁으로 마무리.

  • @유형종-z9h
    @유형종-z9h 4 года назад +1

    오프닝 바꾸었네 신기 오

  • @역덕피디
    @역덕피디 4 года назад +2

    좋은 영상이네요. 영주입장에선 개꿀이네. 빚은 탕감하고 거성과 에도저택이 고스란히 개인부동산으로

    • @samurairomance
      @samurairomance  4 года назад +1

      성은 아니고 성이 있던 부지를 보장받았다고 합니다만, 그 범위가 어느 영역까지인지는 저도 좀 불분명 합니다.

    • @꾸준하게-o1i
      @꾸준하게-o1i 4 года назад +1

      부도나기 일보 직전인 회사의 경영권을 넘기는 대신 더 높은 급여, 임원 직급 유지, 회사 사택을 가지는 거라고 볼수 있네요~

  • @개가짖어도기차는-v9z
    @개가짖어도기차는-v9z 4 года назад +1

    듣기로는 폐번치현을 유일하게 반대했던 사람이 사쓰마의 시마즈 히사미츠라고 합니다! 시위의 일환으로 가고시마에서 폭죽까지 쏘아댔으니 오죽했을까요

    • @samurairomance
      @samurairomance  4 года назад +1

      대하드라마 세고동에서도 폭죽 장면을 본 기억이 납니다. 즈쇼 히로사토의 활약(?)으로 어느 정도 부채 정리가 된 상황이었기 때문일까요. 하지만 결국 시대의 흐름을 거역하진 못했죠...

  • @청솔향-g9u
    @청솔향-g9u 3 года назад +2

    에도시대 아니 거슬러올라가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부터 일본은 묘한 2중 정치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토 천황의 공가정치와 에도 쇼군가의 바쿠후 정치죠.
    쇼군이라고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천황으 신하로서 천황에게 세이다이쇼군(정이대장군)의 지위를 하사받고 정2위 이하의 관훈을 받습니다.
    이는 그 실력도 실력이지만 애초에 세이다이쇼군(이하 쇼군)이 되기 위해서는 맨 처음 장군직을 하사받앗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이래의 전통으로 원源씨 즉, 미나모토씨일 필요가 있엇습니다. 때문에 나중에 미나모토씨 대신에 미나코토 막부에서 권력을 잡은 후지와라씨는 미나모토씽의 중역직으로 만족 했어야 했고, 아시카가 씨는 족보를 꽈서라도 무리를 해서 장군직을 이었으며 오다 노부나가와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깨끗하게 포기 했습니다. 당시 천황이 오다에게 장군직을 제시했지만 오다는 이 무슨 농담이냐고 화를 벌컥 냈지요. 한마디로 족보를 사란 예기였으니까!
    한데 우리의 꿍심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기어이 족보를 사서 장군직을 얻습니다!!!
    이처럼 일본의 소군과 다이묘는 스스로 무사정권의 지배자이면서도 공가정권의 신하라는 이중직명을 지녔습니다. 즉, 다이묘들도 에도막부의 신하이지만 천황의 신하로서 이미 벼슬을 가졋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판적봉환 때는 순순히 따를 수 잇었습니다. 어짜피 막부가 망해 막부로부터 받은 직위는 없더라도 천황의 신하로서의 직위는 남아 잇던던 겁니다. 게다가 막부가 묻 닫으면서 지위적으로 불안하던 각 다이묘들에게 천황정부가 주인을 자처하고 나섰으니 오히려 안심되엇을 겁니다.
    하지만 판적봉환의 본뜻을 알았더라면............
    동양에서 신하되고 백성된 자로서 3가지 의무를 지게 됩니다.
    조용조.조(租)는 토지에 부과되는 세금으로서 소득세에 해당하는 세금입니다. 생산자,수익자가 부담하는 세금으로 농업이 경제의 절대였던 동양에서는 땅에 대해 부과 했습니다.
    용(庸)은 백성이 노력동원으로 납부하는 세금으로서 모든 국가사업의 노동력이 됩니다. 이것은 다음의 조(調)와 함께 인두세의 개념을 가지는 겁니다. 즉, 각 사람대로 부과되는 세금이죠.
    마지막 조(調)는 바로 특산품. 즉,현물로 바치는 세금입니다. 지배체제인 조정은 여러가지 물품을 필요로하고 또 만들어 내기에 그 상품이나 재료조달이 필요합니다. 때문에 사람살이에 필요한 거의 모든 물품을 세금형태로 수급하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가 가능하려면 쥔장이 설명하신 판版 즉,토지대장과 적籍 즉,호적대장 합쳐서 판적이 기본적으로 필요합니다.
    명 태조때 조세제도를 개혁하고자 전국조사를 통해 어린도책魚鱗圖冊(토지대장:땅의 모습이 물고기 비늘같다 하여 붙인 명칭)과 부역황책(賦役黃冊)(호적대장 부역에 기본이되므로 이런 이름을 붙임)을 만들어 재정의 기본을 삼았던것과 같습니다. 영국도 일찌기 노르만 정복왕 윌리엄 1세때 토지대장인 "둠즈데이 북"을 만들어 이용 했습니다.
    즉, 판적을 봉환한다는 예기는 경제적 자주권을 때려친다는 소리 였습니다.
    이래놓고 후에 폐번치현을 단행 한거죠. 즉, 다이묘들에게는 이미 경제권이 넘어가 반대한다고 전쟁조차 치룰 수 없게 되어버린 겁니다.
    그리고 빚잔치 거창하게 치르는 거죠!!!!!!! 세금으로........

  • @longlong2754
    @longlong2754 4 года назад +1

    메이지정부는 빚들을 다 갚아줬나요? 갚아줬다면 그 재원들은 어디서 생긴것들인가요? ㅜ

    • @samurairomance
      @samurairomance  4 года назад +4

      30년 넘은 오래된 채무는 그냥 무시. 30년 이내의 채무는 공채를 발행해 줌으로써 상인들의 재산권을 어느 정도 지켜주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 @longlong2754
      @longlong2754 4 года назад +1

      @@samurairomance 감사합니다!

  • @donghyunlee540
    @donghyunlee540 4 года назад +1

    저는 막부와 친막부파 영지가 다른 번의 영지를 압살할줄 알았는데 아예 반대네요. 이런상황에 어떻게 에도 막부가 돌아갔지...

    • @samurairomance
      @samurairomance  4 года назад +1

      게임이론에 나오는 죄수의 딜레마 비슷한 상황 아닐까요.
      반 막부 세력이 다수 뭉치면 막부 힘을 입살하지만, 누가 협력할지 누가 배반할지 사전 모의가 어떻게 새어나갈지 모르는 상황이고, 잘못될 경우 영지몰수와 가문단절은 기본이니 이런 불확실성에 기인해서 막부가 유지되었을 겁니다.

    • @donghyunlee540
      @donghyunlee540 4 года назад +1

      그래도 막부가 알짜배기 땅인 관동과 관서 지방을 직할로 지배하고 친척가문이나 이이&혼다 같은 가족같은 가신 가문도 쩔이 지방이 아닐텐데 ㅎㅎ
      할튼 일본역사는 알다가도 모르겠네요 ㅎ

  • @koreapower-no1
    @koreapower-no1 4 года назад +2

    인트로 바꿨어요 ㅎㅎㅎ

    • @samurairomance
      @samurairomance  4 года назад +2

      맘에는 드는데 1년 간 쓰기에는 금방 질릴 것 같네요.

  • @일차일라
    @일차일라 4 года назад +5

    참근교대제가 얼마나 번주들 피를 말렸으면 부채 때문에 토호자리를 포기 할까 ㅋㅋ

    • @user-uc4px3vu6z
      @user-uc4px3vu6z 4 года назад +1

      참근교대제가 산킨코타이? 인가요?

    • @德川家康-p7o
      @德川家康-p7o 4 года назад +1

      @@user-uc4px3vu6z 네

    • @德川家康-p7o
      @德川家康-p7o 4 года назад +1

      참근교대제에 덤으로 부역까지...
      가령 도쿠가와 직할령 성을 수리한다면
      다이묘들에게 금전적인 부담을ㄷㄷ
      인력(기술자)를 보내더라도 그 인건비 지불은 오롯이 다이묘들 부담이죠

    • @남산코끼리-l3e
      @남산코끼리-l3e 4 года назад +1

      @@德川家康-p7o 다테 마사무네가 부역 마치고 영지 돌아오니 센다이번 재정이 초토화되어 있었다고 하더군요 ㅜㅜㅋ

  • @별나무-c8e
    @별나무-c8e 3 года назад +1

    골치 아픈 권한으로 인한 한 책임 때문에 권한은 내놓고 경제적 이득을 취한 거군

  • @로또1등당첨자-m7p
    @로또1등당첨자-m7p 4 года назад +2

    도쿠가와 가문이 후작급이였군요..공작은 사쓰마나 죠슈쪽이 되었을라요..

    • @samurairomance
      @samurairomance  4 года назад +1

      정확히 말씀드리면 도쿠가와 고산케(徳川御三家)가 후작급입니다.
      토쿠가와 종가, 시마즈 종가, 모리 가문 등이 공작급이었습니다.

    • @뤼팽아르센
      @뤼팽아르센 4 года назад +1

      @@samurairomance 토사 야마우치가는 어떻게 되었나요?

    • @로또1등당첨자-m7p
      @로또1등당첨자-m7p 4 года назад +1

      사무라이 로망스 역시..큰 가문이..

    • @samurairomance
      @samurairomance  4 года назад +1

      후작 작위를 받고 역시 화족이 되었습니다. 토사 야마우치 가문은 현재 19대까지 계승되어 야마우치 토요코토 (山内豊功)라는 분이 당주로 되어 있네요.
      매국노의 대명사로 되어있는 이완용도 후작 작위를 받았습니다.

  • @myskynet2
    @myskynet2 4 года назад +3

    권력을 돈으로 바꾼거네요.

  • @VitorJKhan
    @VitorJKhan 4 года назад +2

    매우 중요한 내용군요

  • @crouchingstone
    @crouchingstone 4 года назад +3

    항상 고품질의 영상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잘 보았습니다. 책에서 대충 보고 외우듯이 폐번치헌을 그냥 얻은 것이 아니군요 1. 계획 : 판적봉환 등의 baby step도 밟으면서 2. 주도권 : 메이지 정부가 다른 번들을 군사 정치적으로 압도하고 있었고 3. 경제 : 번주를 금전적으로 만족시키고 산업개발역량 등을 갖추었으니 ...
    그나저나 대한제국의 자체적 개혁이 가능하였을까를 생각을 해보면 씁쓸하긴 합니다.(비슷하게 청제국도)
    대한제국은 여흥민씨와 세도3가가 황실보다도 정치, 경제적으로 꽉 잡고 있었고, 군사력은 약했으며, 경제력을 키우기 위한 산업역량 개발에도 미진해서(그나마도 일본 러시아 등 열강에 넘어감) 자체적인 개혁을 하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 @75umberto20
      @75umberto20 2 года наза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조선은 개혁의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일본은 그게 있었다는게 큰 차이입니다.

    • @crouchingstone
      @crouchingstone 2 года назад

      @@75umberto20 시간적 여유 측면에서 맞는 말씀이시지만
      개혁 주도세력 또는 기득권층을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조선이 개혁을 자체적으로 빠른 시일 내에 할 수 있었을까 하는 개인적인 의문이 있습니다.

  • @이윤성-u6u
    @이윤성-u6u 5 месяцев назад +1

    번주들을 의원으로 흡수한다!!!!!!!!!!!!!!!!

  • @레몬주스-k1o
    @레몬주스-k1o 4 года назад +3

    으윽..일본 순정만화에서 맨날 나오는 그놈의 화족에 저런 배경이 있었군요..xx님은 화족출신이셔..이딴거!
    말하자면 다이묘 후손들이네..다들 좋은집에 돈이많은것 같은데 저런 이유가 있었군요..그리고 주인공 약혼자로 내정된 또다른 화족아가씨가 평민출신 여주를 괴롭혀요..흥 평민출신주제에..교양없는 것이 감히 xx님에게 꼬리를 쳐..이렇게

    • @samurairomance
      @samurairomance  4 года назад +2

      많이 보셨나 보네요..ㅋ

    • @shk5253
      @shk5253 4 года назад +1

      하이카라상

  • @이윤성-u6u
    @이윤성-u6u 6 месяцев назад +1

    토지개혁으로 이어진다!!!!!!!!!!!!!!!!!!!!!!

  • @후아유-w9o
    @후아유-w9o 4 года назад +2

    조선이 일본보다 더 좋은 환경이였는데도, 19세기말에 이렇게 차이가 나다니

  • @비정한세상
    @비정한세상 4 года назад +4

    개처량한 세상.. 피 토하는 음악..ㅋ

    • @samurairomance
      @samurairomance  4 года назад +3

      항상 동일한 댓글. 피토하는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