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의 요충지를 다스리던 노장이 숙원으로 죽기전 강건너 강역을 점령하기 위해 수전을 벌이다 강에서 전사한 모양임.진군을 말리던 아내가 그의 맹렬한 정신을 어쩌면 좋으냐 한낱 원혼으로 떠돌아야 하느냐 해서 한탄하며 노래를 지어 부르니 주민들이 그를 추모하여 호국신으로 추대하고 제를 지냈다는 얘기같음.그 노래로 그의 용맹하고 진취적인 정신을 기념해 온것.
公은 고조선의 왕으로 봅니다. 고대 향가는 왕실 전용입니다 (삼국시대도 왕실. 불교) 백수狂부는 어리석다로 해독함이 내용상 맞습니다. 아내가 떠나지 말라고 만류하나 외고집으로 떠나가는 어리석은 사람. 안민가에서 狂도 어리석음을 한탄해야 하는 물가(阿)의 아해(孩)로 해독합니다. 이게 맞습니다. 미친 의미로 푸는 것은 문맥상 ×입니다 ((김영회 선생님 말씀)))
상(商)나라의 갑골문에 나오는 '졸(卒)'도 원래는 '계급이 낮은 일반 병사'라는 뜻이 아니라,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군대 지휘관/장수'라는 뜻이었다고 합니다. 그 글자 자체가 군대 지휘관/군대 대장의 모습을 간략하게 만든 상형문자였다고 하네요. (저도 열 몇 해 전에, 동아시아 고대사를 다룬 어느 책을 읽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러다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군대 지휘관'/'장수'라는 말은 '장(將)'자로 쓰게 되었고, '졸(卒)'은 '신분이 낮은 군관'/'일반 병사'라는 뜻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같은 한자도 갑골문 시절에 담았던 뜻이 다르고, 한(漢)나라 때에 담았던 뜻이 다르며, 명(明)나라 때의 뜻이 달라요. 한문(漢文) 사료로 동아시아사를 파헤칠 때에는 그런 점을 고려하며, 글자의 뜻과 그 글자가 쓰인 시대를 하나하나 다 살펴봐야 합니다.
놀랍습니다. 아사달('고조선'의 도읍 이름이자, 순수한 배달말 이름) 사람이 만든 노래로만 알았던 가 이렇게 전쟁이나 아사달 거수의 비극적인 죽음과 관련된 노래였다니! 그것도 황하에서 일어난 일을 다룬 노래였다니! 전 그런 점은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런 사실을 알고 나서 노래를 다시 들으니, 노래가 전과는 다르게 다가옵니다. 문사님, 좋은 풀이를 담은 움직그림을 올려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님에게 "천 번의 감사를" 하고 싶습니다. (덧붙이자면, [삼국유사]에 따르면 아사달은 서기전 425년에 해체되었으므로[단군이 '산신'이 되었다는 건, 후한 말기의 헌제 유협처럼 - 또는 춘추전국시대의 동주(東周) 왕실처럼 - 실권을 잃고 물러나 뫼에 틀어박혔다는 뜻이니까요], 그보다 2세기 뒤인 한[漢]나라 때의 "조선"은 실제로는 아사달의 유민이거나, 아니면 원[原] 부여 - 북부여/동부여/갈사부여/고구리[高句麗]가 나타나기 전에 있었던, 복승[복생]이 [상서尙書]에서 언급한 부여. 그 책에는 "해동의 모든 나라"가 "부여"에 속했다는 말이 나온다 - 의 백성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나라 때 본인들은 '부여'라는 말을 썼고, 황하 가까운 곳에 사는 부여 사람들도 그건 마찬가지였는데, '한족(漢族)'들은 그 이름 대신, 서주(西周) 시절, 아니 어쩌면 하(夏)나라 때부터 익숙하게 들어온 이름인 '조선'을 계속 써서 자신들의 동쪽에 있는 나라를 불렀다는 이야기죠. 이는 서기 6세기 전반에 나라 이름을 '남부여[南扶餘]'로 바꾼 나라가, 신라나 북조나 남조나 수/당으로부터는 계속 [수 세기 동안 쓰던] 옛 이름인 '백제'로 불린 사실과 같습니다. 만약 이 풀이가 옳다면, 원 부여는 한때 한나라와 전쟁을 했고, - 공의 아내가 거수인 공이 황하를 건너다가 빠져 죽은 사실을 슬퍼한다는 노랫말로 미루어볼 때 - 그 전쟁은 공이 죽을 정도로 치열했으며, 원 부여는 전쟁이나 전투에서 졌을 겄입니다. 수나라 말기에 수나라 백성들에게서 나온, 전기 고리[高麗]와의 전쟁을 반대하고 "요동에 가서 개죽음을 당하지 말자."고 주장하는 노래가 수나라의 패전과 수나라 백성들의 괴로움을 드러내듯이 말이지요. 추측컨대, 원 부여는 전국시대의 연나라와 싸웠듯이 한나라와 대립하거나 맞부딪쳤고[아마 국경선을 긋는 일이나, 땅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로 싸웠겠지요. 아니면 훗날 수나라가 전기 고리에게 복종을 요구한 것처럼, 큰 제국이 된 한나라가 원 부여에게 굽힐 것을 강요해서 원 부여가 분노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전투나 전쟁으로 이어졌으며, 결과가 한나라의 승리/원 부여 거수의 전사였기 때문에 원 부여 국경지대에 살던 사람들이 그 일을 슬퍼하며 "도대체 왜 황하를 건너서 무모한 싸움을 하셨습니까? 그러지 마셨어야죠! 이제 우리를 이끄시던 공(거수)이 돌아가셨으니, 누가 우리를 한[漢]나라로부터 지켜주겠습니까? 이 일을 어떡하면 좋냐고요?" 하고 한탄/절망하며 를 지어서 부른 게 아닌가 합니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고조선의 왕이 적에 쫓겨서 황하에 이르렀던거 같습니다. 無를 말라고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저는 황하를 건널 수단인 배가 없다로 봅니다. 또 竟을 건넜다로 해석들 하는데 境의 오역인거 같습니다. 황하를 건넜는데 떨어져(墮) 죽는 것은 논리적으로 잘 맞지 않습니다. 즉 두번째 구는 황하를 건너야 하는 지경에 처한 현실의 한탄입니다. 그래야만 다음 구절의 墮가 자연스럽습니다. 즉 이시는 초패왕 항우가 오강에서 최후를 맞이한 것과 같은 슬픔을 나타낸 것 같습니다. 어디까지나 한 개인의 뇌피셜이니 이렇게도 볼수 있겠다 정도로 봐주시길.
♣♣♣ 문사님의 탁견에 감사드리며, 흥미가 일어 를 참조하여 작품의 이 누구일까를 제 나름대로 추정해 보았습니다. ▶ 현 북경(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태행산맥 이동 지역 은 동아시아 역사상 가장 중요한 땅이다. 이 땅을 보유한 나라가 동아시아의 패권국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을 번조선으로부터 탈취한 위만정권은 당시 한민족의 대장국인 북부여의 눈에 가시가 되어 북부여는 끊임없이 공격했고 위만정권은 이를 막아냈다.(북부여기) ▶ 한나라 유철의 침략으로 위만정권이 망하자 고두막한이 일어나 유철을 무찌르고 드디어 숙원인 을 회복한다. 이 과정은 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 (다만, 안경전 선생님 등이 지리 고증을 다른 곳으로 하여 이리 읽히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위치가 와 와 으로 정확히 밝혀져 드디어 제대로 읽어낼 수 있었다.) ▶ 이 공로로 고두막한은 북부여의 대통을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해부루는 동쪽으로 쫓겨가 동부여로 명맥 만을 유지한다. ▶ 고두막한의 뒤를 이은 고무서는 소해모수로 불릴 정도로 탁월한 군사적 능력을 자랑했다. 에서 한나라의 준동을 분쇄했다. 고두막한이 을 차지했으므로 당연히 밑인 가 가 되고 이 의 동쪽인 산동성 방면이 되는 것이 인 것이다. ▶ 하지만, 전투 중 잘못하여 에 익사한다. ▶ 문제는 즉위한 지 불과 1년 남짓만에 사망하여 아직 후계자가 없는 것이다. 북부여에서 벌어진 이 혼란을 틈타서 한나라는 북부여를 멸한다. 한민족 국통맥은 여기서 잠시 멈춘다. 당시 동부여 등이 남아있었지만 후에 고구리가 강성해져 이 국통맥을 자신에게로 잇게 하기 때문이다. ▶ 해모수로 부터 이어지는 국통맥을 자신에게로 잇기 위해 고두막한은 고열가 단군의 후손을 자처했다. 이와 비슷하게 고구리는 자신들의 시조인 고추모가 북부여의 마지막 단군 고무서의 즉위한 것으로 후일 역사를 기술했던 것이다. ▶ 그런 고구리 입장에서는 고무서 단군을 추모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만든 노래가 인 것이다. 고무서 단군이 비극적으로 사망하여 북부여가 졸지에 망하게 되고 황하 이북 지역인 을 차이나에 한동안 빼앗겼던 뼈아픈 역사적 사실을 상기하면서...
♣♣♣ 쓰고보니 한민족 최초의 악가라는 칭호에 걸맞게 엄청난 역사가 숨어있음을 알고 새삼 저도 놀랐습니다. 결론지으면 공무도하가의 은 입니다. 전임 고두막한 단군의 재위가 49년(동명국왕 22년 + 북부여 단군 27년)이나 되므로 고두막한이 3-40대에 동명국을 건국했고 아들을 좀 늦게 보았다면, 그 아들인 고무서 단군이 공무도하가에 등장하는 =의 행색과 충분히 일치할 수 있습니다. 은 제후국 왕을 뜻하는 차이나 표현일 뿐입니다. 당연히 인데 차이나 사서가 으로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 참고로 에 대하여 기술해 보았습니다. ▶ 고추모는 동부여에서 도망하여 고무서 단군의 비극으로 안타깝게도 한나라 땅이 되어 있던 에 들어와 지역 거상 연타발의 도움으로 나라를 세우나 어쩔 수 없는 한나라의 부용국이라 성(城)도 쌓을 수 없었다고 사서에 나와 있다. 이는 고추모를 이은 유리왕 때 전한을 이은 신나라의 김망(차이나 사서엔 왕망이라고 하나 김일제의 직계 후손으로 김씨임)이 고구리 병사에 대한 징발권이 있었던 것으로 확증된다. ▶ 고구리가 차이나의 부용국을 벗어난 것은 유리왕의 뒤를 이은 여율왕 때이다. 그 계기도 호(흉노 등)를 공격하려는 신나라 김망의 병사 징발을 고구리가 거부하자 유리왕이 차이나 장수 에게 목이 잘리는 참극을 겪고난 뒤인 것이다. ▶ 엄우가 살해한 고구려왕은 유리왕이다. 는 "의 순으로 왕이 된다"고 하며 "부여(동부여)를 정복한 왕을 막래"라 한다. 그렇다면 막래가 대무신왕이므로 여달인 유리왕과의 사이에 여율왕이 있었던 것이다. 고구리는 유리왕이 목이 잘려 살해된 수치를 감추기 위하여 유리왕이 CE 12년 죽은 사실을 감추고, CE 12년에서 CE 18년까지인 여율왕의 치세를 유리왕의 치세에 포함시켜 기술하였다. ▶ 를 분석하면, CE 12년을 기준으로 유리왕의 성격이 크게 변화한다. CE 12년 이전의 유리왕은 수세적이고, 선비의 소집단을 복속시킨 것을 제외하면 대외적인 치적이 전무하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인 첩(치희)이나 그리워하며 나 짓고 앉아있는 일개 한량에 다름없었다. 충신인 가 이런 유리왕에게 실망하여 으로 떠나버릴 정도로 지극히 무능한 왕이었다. ▶ 하지만 갑자기 사람이 달라진 양 CE 13년에는 북부여가 망하여 한민족 대장국이 된 동부여에 대승을 거두고, CE 14년부터 CE 18년 사이에는 드디어 를 공격하여 을 고구리 땅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 고두막한이 이룬 업적의 완벽한 재현인 것이다. 진짜로 CE 12년을 기준으로 사람이 달라진 것이고 이는 여율왕인 것이다. ▶ 여율왕을 뒤를 이은 대무신왕은 북부여의 강역을 넘어서 진조선의 강역의 대부분을 회복하고 한민족의 대장국으로 우뚝 선다. 드디어 고무서 단군의 대통을 추모대왕에게 잇게할 준비가 끝난 것이다. ▶ 그리고 를 지어서 고무서 단군의 영혼을 위로한다.
늘 깊이있고 합리적인 정리 감사합니다.
황하를 하라했고 장강을 강이라고 했습니다. 고대에 하는 보통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였습니다.
이건 진심 생각지도 못했던 접근이네요 대단합니다 문사님
겨우 미친?남편이 물에 빠져서 슬퍼서 만든 노래가 이리 오래도록 남을리 없다고 생각했었음. 문사님의 해석을 보니 어색한 부분이 맞아 떨어짐.
자연스런 해석을 그동안 어떤 억지를 부렸길래 평양 대동강이니 한강이니 하는 이야기들이 나왔을까?
식민사관/반도사관/사대주의 사관의 폐해죠.
논문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매우 흥미로운 해석이십니다. 고대사에 대한 또다른 시각을 갖게 되었네요.
구독자 100만 이상 가야 할 채널이다 👍
고조선의 요충지를 다스리던 노장이 숙원으로 죽기전 강건너 강역을 점령하기 위해 수전을 벌이다 강에서 전사한 모양임.진군을 말리던 아내가 그의 맹렬한 정신을 어쩌면 좋으냐 한낱 원혼으로 떠돌아야 하느냐 해서 한탄하며 노래를 지어 부르니 주민들이 그를 추모하여 호국신으로 추대하고 제를 지냈다는 얘기같음.그 노래로 그의 용맹하고 진취적인 정신을 기념해 온것.
오 서사가 그려진다
그럴듯합니다
문사님 때문에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게 진짜 애국가.
모두 가슴에 새기고 널리 퍼트립시다.!
문사님 화이팅!❤
점점 발전하는 우리나라 인문학 만세.
와우 대박이네요~
公은 고조선의 왕으로 봅니다.
고대 향가는 왕실 전용입니다
(삼국시대도 왕실. 불교)
백수狂부는 어리석다로 해독함이 내용상 맞습니다. 아내가 떠나지 말라고 만류하나 외고집으로 떠나가는 어리석은 사람. 안민가에서 狂도 어리석음을 한탄해야 하는 물가(阿)의 아해(孩)로 해독합니다. 이게 맞습니다. 미친 의미로 푸는 것은 문맥상 ×입니다
((김영회 선생님 말씀)))
白首狂夫.. 머리하얀미친남편??
안민가. ((광))
民焉狂尸恨阿孩古爲. 어린 어리석은
안타까움을 노래로 표현했습니다
""어리석은"". 머리 하얀 남편(안타까움)
더 적절하지 않늘까요?
안민가의 '광' 해석처럼🤔
공무도하가 뛰어난 해석 감사합니다 제 개인적 아리랑 해석은 아리는 얼이고 쓰리는 살입니다 아리랑 쓰리랑 아라리가 낫다는 말은 영혼과 육신 중 영혼이 낫다는 말로 해석됩니다
너무 멋진 분석입니다! 감사합니다!!
졸이 오늘날 중대장을 말하는 거군요!!
황하의 문화재들은 우리 문화재!! 중국은 그냥 농노들 집단!!
상(商)나라의 갑골문에 나오는 '졸(卒)'도 원래는 '계급이 낮은 일반 병사'라는 뜻이 아니라,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군대 지휘관/장수'라는 뜻이었다고 합니다.
그 글자 자체가 군대 지휘관/군대 대장의 모습을 간략하게 만든 상형문자였다고 하네요.
(저도 열 몇 해 전에, 동아시아 고대사를 다룬 어느 책을 읽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러다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군대 지휘관'/'장수'라는 말은 '장(將)'자로 쓰게 되었고, '졸(卒)'은 '신분이 낮은 군관'/'일반 병사'라는 뜻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같은 한자도 갑골문 시절에 담았던 뜻이 다르고, 한(漢)나라 때에 담았던 뜻이 다르며, 명(明)나라 때의 뜻이 달라요.
한문(漢文) 사료로 동아시아사를 파헤칠 때에는 그런 점을 고려하며, 글자의 뜻과 그 글자가 쓰인 시대를 하나하나 다 살펴봐야 합니다.
훌륭한 해석입니다.❤ 고조선은 옛중원 내에 있었을 것으로 해석도 될 것 같습니다
당시 고조선이 장소이므로 지금의 황ㅎ나 호타하로 비정할 수 있겠네요
마지막 해석이 가슴에와닿네요 전쟁에출전해 사망한 사람들을위한 위로곡???
네, 저도 그런 생각이 듭니다. 덧붙이자면, 노랫말이 슬픈 걸 보면, 그 전쟁은 "조선"의 승전이 아니라 패전으로 끝난 것 같아요.
놀랍습니다.
아사달('고조선'의 도읍 이름이자, 순수한 배달말 이름) 사람이 만든 노래로만 알았던 가 이렇게 전쟁이나 아사달 거수의 비극적인 죽음과 관련된 노래였다니!
그것도 황하에서 일어난 일을 다룬 노래였다니!
전 그런 점은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런 사실을 알고 나서 노래를 다시 들으니, 노래가 전과는 다르게 다가옵니다.
문사님, 좋은 풀이를 담은 움직그림을 올려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님에게 "천 번의 감사를" 하고 싶습니다.
(덧붙이자면, [삼국유사]에 따르면 아사달은 서기전 425년에 해체되었으므로[단군이 '산신'이 되었다는 건, 후한 말기의 헌제 유협처럼 - 또는 춘추전국시대의 동주(東周) 왕실처럼 - 실권을 잃고 물러나 뫼에 틀어박혔다는 뜻이니까요],
그보다 2세기 뒤인 한[漢]나라 때의 "조선"은 실제로는 아사달의 유민이거나, 아니면 원[原] 부여 - 북부여/동부여/갈사부여/고구리[高句麗]가 나타나기 전에 있었던, 복승[복생]이 [상서尙書]에서 언급한 부여. 그 책에는 "해동의 모든 나라"가 "부여"에 속했다는 말이 나온다 - 의 백성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나라 때 본인들은 '부여'라는 말을 썼고, 황하 가까운 곳에 사는 부여 사람들도 그건 마찬가지였는데,
'한족(漢族)'들은 그 이름 대신, 서주(西周) 시절, 아니 어쩌면 하(夏)나라 때부터 익숙하게 들어온 이름인 '조선'을 계속 써서 자신들의 동쪽에 있는 나라를 불렀다는 이야기죠.
이는 서기 6세기 전반에 나라 이름을 '남부여[南扶餘]'로 바꾼 나라가, 신라나 북조나 남조나 수/당으로부터는 계속 [수 세기 동안 쓰던] 옛 이름인 '백제'로 불린 사실과 같습니다.
만약 이 풀이가 옳다면, 원 부여는 한때 한나라와 전쟁을 했고, - 공의 아내가 거수인 공이 황하를 건너다가 빠져 죽은 사실을 슬퍼한다는 노랫말로 미루어볼 때 - 그 전쟁은 공이 죽을 정도로 치열했으며, 원 부여는 전쟁이나 전투에서 졌을 겄입니다.
수나라 말기에 수나라 백성들에게서 나온, 전기 고리[高麗]와의 전쟁을 반대하고 "요동에 가서 개죽음을 당하지 말자."고 주장하는 노래가 수나라의 패전과 수나라 백성들의 괴로움을 드러내듯이 말이지요.
추측컨대, 원 부여는 전국시대의 연나라와 싸웠듯이 한나라와 대립하거나 맞부딪쳤고[아마 국경선을 긋는 일이나, 땅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로 싸웠겠지요. 아니면 훗날 수나라가 전기 고리에게 복종을 요구한 것처럼, 큰 제국이 된 한나라가 원 부여에게 굽힐 것을 강요해서 원 부여가 분노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전투나 전쟁으로 이어졌으며,
결과가 한나라의 승리/원 부여 거수의 전사였기 때문에 원 부여 국경지대에 살던 사람들이 그 일을 슬퍼하며
"도대체 왜 황하를 건너서 무모한 싸움을 하셨습니까? 그러지 마셨어야죠! 이제 우리를 이끄시던 공(거수)이 돌아가셨으니, 누가 우리를 한[漢]나라로부터 지켜주겠습니까? 이 일을 어떡하면 좋냐고요?"
하고 한탄/절망하며 를 지어서 부른 게 아닌가 합니다)
책보고tv
를 아십니까
놀러와 주십시오~
🍋🥶🎃
감사합니다 ~~
개인적인 견해로는
고조선의 왕이 적에 쫓겨서 황하에 이르렀던거 같습니다.
無를 말라고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저는 황하를 건널 수단인 배가 없다로 봅니다.
또 竟을 건넜다로 해석들 하는데 境의 오역인거 같습니다.
황하를 건넜는데 떨어져(墮) 죽는 것은 논리적으로 잘 맞지 않습니다.
즉 두번째 구는 황하를 건너야 하는 지경에 처한 현실의 한탄입니다.
그래야만 다음 구절의 墮가 자연스럽습니다.
즉 이시는 초패왕 항우가 오강에서 최후를 맞이한 것과 같은 슬픔을 나타낸 것 같습니다.
어디까지나 한 개인의 뇌피셜이니 이렇게도 볼수 있겠다 정도로 봐주시길.
기자가 황하의 구비치는 곳(구주)기지국에 제후로...
숙이. 백제가 수양산에서 죽어 간곳
그곳이 바로(황하의 굽어진곳)한나라와
국경이고, 고구리 유리왕의 황조가의
무대인 것이다.
♣♣♣ 문사님의 탁견에 감사드리며, 흥미가 일어 를 참조하여 작품의 이 누구일까를 제 나름대로 추정해 보았습니다.
▶ 현 북경(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태행산맥 이동 지역 은 동아시아 역사상 가장 중요한 땅이다. 이 땅을 보유한 나라가 동아시아의 패권국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을 번조선으로부터 탈취한 위만정권은 당시 한민족의 대장국인 북부여의 눈에 가시가 되어 북부여는 끊임없이 공격했고 위만정권은 이를 막아냈다.(북부여기)
▶ 한나라 유철의 침략으로 위만정권이 망하자 고두막한이 일어나 유철을 무찌르고 드디어 숙원인 을 회복한다. 이 과정은 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 (다만, 안경전 선생님 등이 지리 고증을 다른 곳으로 하여 이리 읽히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위치가 와 와 으로 정확히 밝혀져 드디어 제대로 읽어낼 수 있었다.)
▶ 이 공로로 고두막한은 북부여의 대통을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해부루는 동쪽으로 쫓겨가 동부여로 명맥 만을 유지한다.
▶ 고두막한의 뒤를 이은 고무서는 소해모수로 불릴 정도로 탁월한 군사적 능력을 자랑했다. 에서 한나라의 준동을 분쇄했다. 고두막한이 을 차지했으므로 당연히 밑인 가 가 되고 이 의 동쪽인 산동성 방면이 되는 것이 인 것이다.
▶ 하지만, 전투 중 잘못하여 에 익사한다.
▶ 문제는 즉위한 지 불과 1년 남짓만에 사망하여 아직 후계자가 없는 것이다. 북부여에서 벌어진 이 혼란을 틈타서 한나라는 북부여를 멸한다. 한민족 국통맥은 여기서 잠시 멈춘다. 당시 동부여 등이 남아있었지만 후에 고구리가 강성해져 이 국통맥을 자신에게로 잇게 하기 때문이다.
▶ 해모수로 부터 이어지는 국통맥을 자신에게로 잇기 위해 고두막한은 고열가 단군의 후손을 자처했다. 이와 비슷하게 고구리는 자신들의 시조인 고추모가 북부여의 마지막 단군 고무서의 즉위한 것으로 후일 역사를 기술했던 것이다.
▶ 그런 고구리 입장에서는 고무서 단군을 추모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만든 노래가 인 것이다. 고무서 단군이 비극적으로 사망하여 북부여가 졸지에 망하게 되고 황하 이북 지역인 을 차이나에 한동안 빼앗겼던 뼈아픈 역사적 사실을 상기하면서...
♣♣♣ 쓰고보니 한민족 최초의 악가라는 칭호에 걸맞게 엄청난 역사가 숨어있음을 알고 새삼 저도 놀랐습니다. 결론지으면 공무도하가의 은 입니다. 전임 고두막한 단군의 재위가 49년(동명국왕 22년 + 북부여 단군 27년)이나 되므로 고두막한이 3-40대에 동명국을 건국했고 아들을 좀 늦게 보았다면, 그 아들인 고무서 단군이 공무도하가에 등장하는 =의 행색과 충분히 일치할 수 있습니다. 은 제후국 왕을 뜻하는 차이나 표현일 뿐입니다. 당연히 인데 차이나 사서가 으로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 참고로 에 대하여 기술해 보았습니다.
▶ 고추모는 동부여에서 도망하여 고무서 단군의 비극으로 안타깝게도 한나라 땅이 되어 있던 에 들어와 지역 거상 연타발의 도움으로 나라를 세우나 어쩔 수 없는 한나라의 부용국이라 성(城)도 쌓을 수 없었다고 사서에 나와 있다. 이는 고추모를 이은 유리왕 때 전한을 이은 신나라의 김망(차이나 사서엔 왕망이라고 하나 김일제의 직계 후손으로 김씨임)이 고구리 병사에 대한 징발권이 있었던 것으로 확증된다.
▶ 고구리가 차이나의 부용국을 벗어난 것은 유리왕의 뒤를 이은 여율왕 때이다. 그 계기도 호(흉노 등)를 공격하려는 신나라 김망의 병사 징발을 고구리가 거부하자 유리왕이 차이나 장수 에게 목이 잘리는 참극을 겪고난 뒤인 것이다.
▶ 엄우가 살해한 고구려왕은 유리왕이다. 는 "의 순으로 왕이 된다"고 하며 "부여(동부여)를 정복한 왕을 막래"라 한다. 그렇다면 막래가 대무신왕이므로 여달인 유리왕과의 사이에 여율왕이 있었던 것이다.
고구리는 유리왕이 목이 잘려 살해된 수치를 감추기 위하여 유리왕이 CE 12년 죽은 사실을 감추고, CE 12년에서 CE 18년까지인 여율왕의 치세를 유리왕의 치세에 포함시켜 기술하였다.
▶ 를 분석하면, CE 12년을 기준으로 유리왕의 성격이 크게 변화한다. CE 12년 이전의 유리왕은 수세적이고, 선비의 소집단을 복속시킨 것을 제외하면 대외적인 치적이 전무하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인 첩(치희)이나 그리워하며 나 짓고 앉아있는 일개 한량에 다름없었다. 충신인 가 이런 유리왕에게 실망하여 으로 떠나버릴 정도로 지극히 무능한 왕이었다.
▶ 하지만 갑자기 사람이 달라진 양 CE 13년에는 북부여가 망하여 한민족 대장국이 된 동부여에 대승을 거두고, CE 14년부터 CE 18년 사이에는 드디어 를 공격하여 을 고구리 땅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 고두막한이 이룬 업적의 완벽한 재현인 것이다. 진짜로 CE 12년을 기준으로 사람이 달라진 것이고 이는 여율왕인 것이다.
▶ 여율왕을 뒤를 이은 대무신왕은 북부여의 강역을 넘어서 진조선의 강역의 대부분을 회복하고 한민족의 대장국으로 우뚝 선다. 드디어 고무서 단군의 대통을 추모대왕에게 잇게할 준비가 끝난 것이다.
▶ 그리고 를 지어서 고무서 단군의 영혼을 위로한다.
♣♣♣ 이렇듯 의 심연에는 역사의 땅 이 들어있으며 그곳에서 탄생한 가 들어있습니다.
😊👍🏻🎉❤
캬~~~ 탁견.. 띠용! 노벨한국사끕
원래배달국은 지금발견된 홍산문화지역에있다가 치우천황이 수도를 옮기면서 산동성으로내려왔는데 이때 중국의시조라하는 헌원과전재을하였고 치우천황이이겨 헌원을 항하남서쪽 황토고원으로 쫓아내고 황하이북을 치우천황이차지하여 고조선으로 연결되었다고보면됩니다 그러나 고조선의수도는 다시요하문명의 하가점지역이였을겁니다
여하튼 조선과 친일사관이...고대 우리 역사를 다 잊어버리게 만듬.
❤️
중원에서 하와강은 황하장강의 줄임말...ㅎ
옛조선이란말 맘에드네여..
문사님에게 드릴수있는건
광고풀로 듣는거밖에 없네여..😅
잘봤습니다
허허.
북경의 현 조하(=조선하)로 이해하고 싶다.
잘봤습니다
1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