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Видео 80
- Просмотров 269 801
박영규 작가의 실록한국사
Южная Корея
Добавлен 27 окт 2020
‘역사 대중화의 기수’, ‘실록사가’라는 찬사를 받은 대중 역사 저술가 박영규 작가의 "실록 한국사"
누적 200만 부 판매를 기록한 밀리언셀러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출간한 이후
『한 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한 권으로 읽는 신라왕조실록』, 『한 권으로 읽는 대한민국 대통령실록』, 『한 권으로 읽는 일제강점실록』 등 20여 년간 9권의 「한 권으로 읽는 실록」 시리즈를 펴냈다.
최근에는 『크리미널 조선』, 『에로틱 조선』, 『정조와 채제공, 그리고 정약용』, 『조선 관청 기행』, 『조선 명저 기행』 등 새로운 주제를 통해 조선을 재조명하는 역사 교양서를 집필해오고 있다. 그 외 저작으로 역사서인 『환관과 궁녀』, 『춘추전국사』, 『박영규의 고대사 갤러리』, 역사문화 에세이 『특별한 한국인』, 동서양철학사 『생각 박물관』, 불교 선담집 『깨침의 순간』 등이 있다.
누적 200만 부 판매를 기록한 밀리언셀러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출간한 이후
『한 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한 권으로 읽는 신라왕조실록』, 『한 권으로 읽는 대한민국 대통령실록』, 『한 권으로 읽는 일제강점실록』 등 20여 년간 9권의 「한 권으로 읽는 실록」 시리즈를 펴냈다.
최근에는 『크리미널 조선』, 『에로틱 조선』, 『정조와 채제공, 그리고 정약용』, 『조선 관청 기행』, 『조선 명저 기행』 등 새로운 주제를 통해 조선을 재조명하는 역사 교양서를 집필해오고 있다. 그 외 저작으로 역사서인 『환관과 궁녀』, 『춘추전국사』, 『박영규의 고대사 갤러리』, 역사문화 에세이 『특별한 한국인』, 동서양철학사 『생각 박물관』, 불교 선담집 『깨침의 순간』 등이 있다.
Видео
조선사시크릿파일_56강 인조는 왜 소현세자와 세자빈, 세손을 모두 죽였을까?
Просмотров 1,9 тыс.3 года назад
조선사시크릿파일_56강 인조는 왜 소현세자와 세자빈, 세손을 모두 죽였을까?
국가경영은 세종처럼 1강_조선시대 짚어보기 *조선 500년 역사 시대구분*
Просмотров 8183 года назад
500년 조선사 30분으로 마스터하자! 조선의 주요 사건부터 정치적 흐름을 박영규 작가가 짚어봅니다.
김홍도와 신윤복이 남긴 춘화2 - 승려와 마나님의 밀애, 그리고 노인들의 씁쓸한 욕망
Просмотров 18 тыс.3 года назад
김홍도와 신윤복이 남긴 춘화2 - 승려와 마나님의 밀애, 그리고 노인들의 씁쓸한 욕망
조선사시크릿파일_51강중종은 왜 조광조를 죽였나?
Просмотров 9843 года назад
중종은 왜 조광조를 죽였을까?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박영규 작가가 들려드립니다!
조선성性풍속 2-3강_조선 남성들이 기생에 목 맨 이유와 음탕한 시조
Просмотров 3373 года назад
조선성性풍속 2-3강_조선 남성들이 기생에 목 맨 이유와 음탕한 시조
조선사시크릿파일_48강연산군을 파멸로 이끈 팜프파탈 장녹수는 어떤 여인?
Просмотров 6263 года назад
조선사시크릿파일_48강연산군을 파멸로 이끈 팜프파탈 장녹수는 어떤 여인?
저는 박영규 작가님이 잘못된 부분이 있음을 인정하려는 태도가 있다고 믿습니다. 이러면서 서로 발전해나가는 모습은 좋다만 너무 과격한 말투보단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 좋을 것 같네요. 서로 발전해 나가야지 서로 깍아내리는 건 잘못된 학문 교류입니다. 우리 모두 이제부터 서로 지식을 공유해가며 살아봅시다! 서로 기분상하게 하지 말고요
사실 유생들 학사들은 한글의 창제에 관심이 없었고 해서 세종이 홀로전진 한거로 보는게 정상 입니다
성삼문이 아무 증거없이 억울하게 죽었다라고 할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세조는 성삼문을 얻으려고 한 중요한 인재로 보았스니 억지로 없는 죄 뒤집어서 역적으로 몰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세조의 후계구도는 비교적 든든한 입장입니다. 나이상 세조의 장남인 도원군 후일 덕종으로 추존되는 의경세자는 나이가 단종보다 세살이 연상입니다. 그렇기에 단종이 후일날 세조 장남 도원군을 제끼고 다시 왕위를 찾을 상황이 되고자 한다면 단종을 옹호할 세력이 키워지지 않은상 어려운 입장입니다.
성삼문등이 세조에 반기를 든 이유는 단종에 대한 충심이 아니고 세조의 전제정치에 대한 반발입니다. 단종에 대한 충심은 그저 표면적 명분에 불과한 것입니다.
단종 영월유배는 사육신 때가 아니고 1년 후 장인의 역모건 때문인데 ㅋ 뭔 사육신 사건으로 유배를 갔다고 구라를 치시나요ㅋㅋ 세조가 단종죽이려고 조작했으면 뭐하러 1년을 더 끌어 ㅋ
이제는 세종과 훈민정음에 대하여 추측에 의한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증거가 있는 내용들이 벌써 책으로 5 권이 나왔습니다. 세종과 훈민정음 글자의 구조의 비밀, 사라진 글자를 찾아서, 한글 창제 천년 비밀을 풀었다, 세종대왕은 왜 크메르 문자를 배웠을까, 세종의 독창성 거의 모방과 파생이다. 5 권, 세종이 무슨 자료를 참조해서 훈민정음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다양한 증거를 제시하였습니다. 더 이상 논쟁이나 추측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박영규 작가님은 조선사만 공부한거같지 중국사는 공부 1도 안한거 같군여. 요동지역은 1차 요동정벌 실패뒤 벌어진일이 유익이 명나라에 귀부하면서 주원장이 접수해버렸슴. 거기에 (요양, 심양) 정요도지휘사사를 설치하구 요새화 해갔었슴. 4년뒤엔 요동도사로 개편하구 휘하에 12위 설치하구 요동지역에 우주방어선 설치했구 그뒤 10여년간은 나하추가 이지역 다시 되찾기위해 여러번 공략했지만 번번히 깨졌던곳임.. 최소 요동지역에 명나라 주둔군만 6만이란 얘기임. (1위 = 5천, 12위 = 6만) 풍승 남옥이 나하추를 치러 20만이 갔는데 .. 얘네들이 보급받던게 수군통해 요동에서 보급받으면서 나하추를 포위해서 항복받았던거였슴. (이게 위화도 회군 1년전일임) 그뒤 바로 남옥이 15만을 데리고 더 북상해서 북원을 기습해서 멸망시킨거였슴. 당시 북원의 수도는 카라코룸이 아님. 대도떠나.. 상도에서 더 북으로 올라간게 지금의 내몽골인 후룬베이럴이었슴. 나하추가 있던 장춘지역 만주에서 좀더 북상하면 되는곳임. 남옥이 15만끌고가서 북원 기습한곳이 부이르호였슴. 북원황제만 도주했고 (도주하다 죽음) 그의 가족들, 왕족들 싹다 포로로 잡혀서 북원이 아예 멸망한 전투였슴. 이게 위화도 회군 한달전에 벌어진일임.
사육신들중 단종연관을 불지 않은 단한사람이 진정한 사육신이 아닐까요?
선생님의 학설에 아주 흥미가 있습니다 선생님이 생각 하시는 사육신은 누구누구 라고 생각 하시고 중심 6인을 뽑는다면 누구이며? 백촌 김문기 선생에 대해 단종 복위운동애서의 위치및 주요 역활은 무엇이을까요?
이 얘기가 맞다면 어느 놈이 백촌 김문기선생을 밀고 하고 고문 하였지만 인정하지 않고 아무도 밀고하지도 말하지 않았다고 하는것 보아 대단한 분이군요
행위를 볼 때 김처선한테 꾸짖음 당해 마땅하죠.
큰아버를 쏙 빼닮은
그 당시 스님들은 고려시대부터 이어져온 불경을 읽는 기호를 만들어 온 각필, 구결이 있었다. 그걸 알면 답이 보인다. 훈민정음 만들고 편찬된 책이름을 봐라. 부처의 일대기를 서술한 석보상절, 금강경에 나오는 월인천강을 노래로 밀든 월인천강지곡을 편찬한 것만 봐도 누가 만들었는지 짐작할수 있지 않는가? 만악 집현전등 유가들이 만들었다면 논어. 맹자등 사서삼경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가르쳐야하거늘 어찌 불경을 만들었을까? 답은 뻔하지않는가? 눈귀를 가리고 봐도 그당시 중국어. 실담어 등 5개국어를 한 신미대사가 만든 것이다. 왜 세조은 혜각존자라는 26글자로 된 칭호를 내렸겠는가? 왜 세조는 신미가 있는 속리산 복천사를 3번이나 찾아갔겠는가? 훈민정음 창제는 세종의 기획하에 신미를 비롯한 스님들이 만들 것이다. 그렇다고 세종의 업적이 훼손되는게 아니다. 세종이 아니면 누가 이런생각을 하고 만들었겠는가? 수양등 왕실 자제들도 같이 했기에 이게 만들어 진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의 업적은 위대하다.
요동땅은 유지하기가 매우 어려운 땅인것 같네요 동서남북이 적이네요
공부를 더 하시기 바랍니다 실록을 거꾸로 해석하시는 군요? 김문기 선생이 빠진 사육신 사건도 모르시고, 야사에 근거하지 마시고 실록을 자세히 더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이 썻던 책들도 오류가 많음을 숙고하시기 바랍니다.
피해망상 정신병 인조...
조선 초기에 여흥 민씨, 청송 심씨가 투톱 명문가였습니다. 더군다나 소헌왕후의 할아버지 심덕부는 이성계와 위화도회군에서 의형제를 맺은 회군1등공신이었고, 고려 공양왕 때는 문하시중을 지냈고, 조선 건국 후에는 경복궁과 종묘사직 등 한양도성을 건설하는 총책임자이기도 했습니다. 정종 때에는 수상을 지내기도 했고요. 그리고 소헌왕후의 삼촌들 중에 태조 이성계의 둘째딸 경선공주와 결혼한 심종 이라는 부마가 있었습니다. 심온의 동생이고 태종 이방원의 매형이죠. 소헌왕후의 숙모 경선공주가 충녕대군의 베필로 소헌왕후를 적극 추천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숙부 심종이 소헌왕후가 왕비가 되기 2년전인 1416년에 예전에 제2차 왕자의난을 일으켜 유배 가있었던 이방간과 은밀히 사통한 것이 드러나 심종은 위리안치형에 처해지고 1418년 소헌왕후가 왕비가 되기 직전 유배지에서 죽습니다. 그래서 태종은 나중에 자기가 죽고나서 심온이 동생 심종처럼 다른 왕족과 사통하여 왕위찬탈을 할까봐 두려워 심온 가문을 제거해야겠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소헌왕후를 폐위하지 않은 이유는 선생님의 말씀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자녀를 4명이나 낳았는데 폐위할 수가 없었겠죠. 만약 자녀가 없었다면 폐위시킬 수도 있었다고 봅니다. 양녕대군 처가나 효령대군 처가 같은 평범한 가문의 여식을 새 왕비로 들였으면 외척의 발호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을겁니다.
세종이 한글을 만들 능력도 되지 않고 성군도 아니다. 육식을 좋아하고 술과 여자를 좋아 해서 밤마다 향흥에 바져 살았다.백성의 고혈을 짜내서 명에 바친놈이다
왜역적으로표현합니까이상하네 진짜이유인지뭔지는모르나 역적표현삼가하시요
그래도 그 잔인한 수양대군이 사육신중 성삼문 선생과 박팽년 선생은 어떻게든 살려서 자기편으로 삼고 싶어 했다는 기록이 있답니다. 사육신을 잔인하게 죽이고도 아까워했던 그 심정을 "당대에는 역적이요 후대에는 충신이다" 라고 까지 했다잖아요. 암튼! 사육신은 불의에 절대 무릎 꿇지 않은 "만고의 충신" 이라 추앙받기에 전혀 아깝지 않다 생각합니다. 단종님도 사육신도 어찌보면 안타까운 희생양분들이죠 😔
이걸 역사강의라고 하고 있는거에요 조선총독부의 외곡된 역사를 젊은사람이 우리의 역사를 찾도록 해야지 식민지 역사를 강의하다니 참으로 원통 하도다
인간의 이기적 본성, 약육강식, 법의 불평등함, 불공평한 법 집행, 조작, 모함 ㅋㅋㅋ 인간의 역사는 늘 반복
소설가 시네요 역시 ㅋ 성삼문은 김종서를 처단하는데 동의하고 암묵적으로 침묵한거지. 1년뒤 세조가 폐위를 하고 올라가는건 동의한적이 없습니다. 거짓선동이 아주 그냥…. 실록이 이상하다 하다가 자기말 근거로 댈땐 실록에도 없다 오락가락하는게 실록을 한두명이 봤을까 ㅋ 단종복위설이 주작이면 본인이 실록에서 증거를 내면 되는데 야사처럼 써내려가시는군요.
저는 좀 생각이 다른게, 1,2차 왕자의난이 제일 중요한 이성계 생전에 있었고 왕자의난 주요 참여인물도 이성계 쪽 인물이기에 신덕왕후 지지파들은 정도전 남은이지 신덕왕후가 죽었다고 이방원에 갈아탄건 없습니다. 심지어 사후 청계천에 신덕왕후 묘석을 박아다가 다리를 만들어도 반대하는 상소 하나 없었죠. 신덕왕후가 없었다면 개국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겠지만 이방원 즉위와는 상관 없다 봅니다.
거짓말도 작작하자 .학자들 100명이 100년 연구 해도 못만드는게 문잔인데 돌대가리 육식충 성병으로 디진 세종이 어떻게 문자를 만드나 대제학최만리와 집현전학자들이 만든걸 가로 챈게 세종이다
맞습니다. 대한민국 역사교육 자체가 잘못되었어요. 그렇게 임진왜란을 왕 1명 탓으로 다 돌려놓으면 대다수 사람들은 책임감에서 해방되고 간단히 해결되니까 학창시절부터 그런식으로 세뇌된 역사관을 가르치는겁니다. 한양이 수성에 적합한 성도 아니고 선조 붙잡고 나서 이순신한테 항복하라는 강제교지 내리게하면 거기서 조선은 그냥 끝나는거죠.
인조 입장에선 소현세자가 왕위를 이으면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이 되는거라 마찬가지라 생각한듯 정신은 청나라 사람이니
개소리 하지말아
훈민정음 해례본에 정확한 기록이 있고 일성록은 한참 후대의 왕인 정조부터 쓰기 시작한 것인데 ...
저 때 왕후 살릴 명분으로 둘째 아들 둘 죽였어야했네
이성계의 실체를 좀더 자세히 알게되어 다행입니다 역사는 왜곡하면 안되고 있는 그대로 밝혀야됩니다 이사건에서 알수있는건 이성계가 쿠테타를 일으키는 바람에 오늘날 사대주의에 찌들은 나라가 된것이며 이점은 조선말기로 갈수록 정신과 기상이 다 죽어버려서 결국 일제식민지가 되었던건당연한 결과로 나타난겁니다 조선사료에는 이성계가 마치 영웅처럼 묘사되었는데 그건 승리자의 입장이지 냉정한 역사학자들의 판단은 쿠테타로 판명난것아닙니까 내가볼때 이성계는 훌륭한 장수라기보단 자신이 관할하는 작은 전투인 국지전만 몆번 이긴 경험있는 장수지 요동땅에서 대회전을 수없이치른 무패의 최영과는 비교불가합니다 요동정벌 명령을 내린것도 자신의 출세욕보단 명나라의 부당한요구에 맞서 고려의 실질적인 옛땅을찾고자 명령한것아닙니까 그 누구보다 죽을때까지 전쟁터가 삶이고 잔뼈가 굵은 최영이고 보면 당시의 국제정세와 그지역 지리를 정확히 꿰 뚫어보고 이때가 기회라고 여겼던것은 분명해보인다 그텐데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은 정당하다고 말하는것은 어불성설이며 요즘 식민사학자들의 역사관은 이제 버리고 이성계가 사전에 계휙되어진 사건으로 마무리짓는게 역사적 가치가있다 이성계의 인간됨을 살펴볼때 그릇이 적고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반역을 할수있겠다는 권력욕이 앞선인물로 보여진다 요즘 박정희나 전두한같은 인물이 아닌가 결론지어진다 역사는 바르게 가르켜서 좋고 나쁜면들을 분별할수있도록 후세 사람들에게 진실을 전해주어야지 결코 미화시키거나 부풀려서 무조건적인 영웅화로 잘못 전해주면 안된다
지금 위성사진으로 위화도를 봐도 조그만 섬인데... 고려말 위화도라면 지금보다 더 작은 섬이었을텐데..무슨 5만군사가 그것도 14일을 있었단 말입니까?
철령이 강원도에 있었다면 왜 요동으로 가나?
철령이 강원도 라고 하다니. 이분 거짓말을 하시는 군
임영대군 개판이다 ㅎ
과연 이성계가 천수를 누렸을까요? 방원이 때문에 최소 수년은 깎였을듯 한데
약간은 서글픈 ㅎㅎ
뉴라이프 인가요? 뉴 라이트인가요?
실록에 기반한 내용은 맞는거 같은데.. 요거 딱 뉴라이프 냄새가 폴폴.
그냥 정상적인 사람이기만 했어도 세종이 저렇게까지는 안 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세자였던 문종이 너무 여자에 무관심 했던것도 원인이었다고 봅니다. 왕의 후계자가 결혼을 일찍 하던건 다 이유가 있는건데 말이에요.
순흥 안씨 . 대단한 명문가죠!
니가 뭘 다안다고 씨부리냐?
박은 그 놈이 야비한 놈이지 어딜가도 그런 놈이 있지
한글창제 자체가 반사대 반유교 정책이고 왕권이 강하지 않을땐 반사대 중립외교 만으로 반정의 명분이 되는시대였기에 미래를 보고 한글의 사용에 신하들의 반발을 덜기위해 불교사상을 서서히 녹일려고 하지않았나 싶네요 그리고 정치적으로 봤을때 현재 대한민국도 미국과 실질적으로 사대 관계인데 규제,방위비등 자국이 전쟁의 위협에서 멀어졌을땐 강대국의 사대관계보다 규제 눈치없는게 세종같은 능력있는 행정가 에겐 국가 발전을 크게 이룰수있기 때문에 세종대왕은 국익을 봐서 국교가 불교로 교체시킬 그림을 그렸던거 같습니다 세종때 중국 눈치도 많이 봤고요 ㅋㅋㅋ
사람된 도리에 끝판왕이시네요
다른 시각.. 재미있어요..
진짜.. 잼있다.. 박작가님.. 이제 알아보아 죄송합니다..^^
너무 잼있게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방원을 너무 낮게 평가하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