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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철
Добавлен 15 дек 2014
한국전쟁 전후 희생당한 민간 주민들이 100만명을 넘어섭니다. 축소했을 국방부 자료에 따르더라도 전쟁 당시 이남만 군인 전사 실종자가 27만명인 반면 민간인 사망 실종자는 76만명입니다. 군인의 경우 3년 동안인 반면 민간인들은 주로 초기 8개월 동안 당한 피해였습니다. 이는 1950년 6월 25일이 전쟁의 시작이라기보다 학살의 시작이었음을 의미합니다.
한국전쟁을 미화하려는 보수세력은 물론 일부 진보세력조차 인정하지 않으려는 민족최대의 비극, 민간인학살. 이들의 억울한 죽음과 진실규명 과정을 담은 영상을 모아봅니다.
한국전쟁을 미화하려는 보수세력은 물론 일부 진보세력조차 인정하지 않으려는 민족최대의 비극, 민간인학살. 이들의 억울한 죽음과 진실규명 과정을 담은 영상을 모아봅니다.
다섯 번째 고양인권평화포럼
다섯 번째 고양인권평화포럼이 지난 2018년 11월 22일(목) 열렸습니다. 이번에는 우다야 라이 이주노동조합 위원장님과 김대권 아시아의 친구들 대표님께서 발표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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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포럼 청년, 고양을 말하다 2018년7월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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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고양인권평화포럼, "청년, 고양을 말하다"가 2018년 7월 19일 한양문고 주엽점 한강홀에서 열렸습니다. 고양지역의 청년 문제를 의제로 열린 이번 포럼에는 모두 스물 다섯 분이 참가하셨습니다.
"금정굴, 화해를 넘어 통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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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18일 '통일을 이루는 사람들'에서 주최한 고양평화포럼 "금정굴, 화해를 넘어 통일로" 토론회 영상입니다.
제2회고양인권평화포럼 2018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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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의정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강주석 신부님을 모시고 두 번째 고양인권평화포럼을 열었습니다. 강 신부님은 "분단과 평화에 대한 천주교의 성찰"이란 주제로 해방과 분단, 전쟁 시기 천주교의 반공주의와 전쟁 지지의 모순, 민간인 학살에 대한 항의의 기록을 소개했습니다. 보조 발제로 "통일을 이루는 사람들"의 윤주한 대표님, "고양시민사회연대회의"의 김철기 사무국장님의 고양지역 통일운동, 평화운동의 현황과 활동, 과제에 대한 발표가 있었습니다.
제1회고양인권평화포럼 "고양의 새로운 시작, 민주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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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8년 5월 17일(목) 한양문고 주엽점 한강홀에서 열린 고양인권평화포럼 첫 만남 "고양의 새로운 시작, 민주시민교육" 영상입니다. 진지하게 토론해 주신 30명 참석자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강연을 허락하신 이철국 선생님, 곽노근 선생님 덕분에 포럼이라는 새로운 시도가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준비모임을 이끄신 고광석 대표님과 유신욱 님, 김회님 님, 이현옥 님께서 실무 준비로 고생하셨습니다. 불이학교 이철국 선생님의 주요 강의 내용은 -우리 교육의 문제는 입시위주, 사교육비, 대학진학용, 표준화 -그 결과는 관용과 배려 결여 -다양한 아이들이 좋아하는 다양한 학습 필요 -고졸만세(고등학교만 졸업해도 만족하는 세상) 운동 -차별없는 교육, 민주시민 교육을 정의한 교육기본법 지키기 -대...
전주KBS 20180314 양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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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지역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사건에 대한 KBS 아침 뉴스입니다. 고양유족회 양완수 회장님께서 직접 촬영해서 올리신 파일입니다.
2017년 10월 28일 제67주기(제4회) 김포위령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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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주기(제4회) 김포지역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합동위령제 영상입니다.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개성지역을 방어하던 국군 1사단 12연대 2대대는 임진강변으로 후퇴하여 전선을 형성한다는 사단 작전계획과 달리 강화 앞바다와 김포 통진으로 철수하였으며, 6월 27일 김포-오류동 지역에서 조직을 정비하였습니다. 한편, 6월 26일부터 국군을 따라 강화와 김포에 들어 온 인민군 6사단이 김포지역까지 점령했으므로 행주를 도하한 국군 1사단 병력이 김포 개화산을 점령한 인민군으로부터 총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 사태는 인천지역에 큰 영향을 주어 6월 28일 인천경찰서 등이 조기 후퇴했던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후 형성된 김포-오류동 전선은 7월 3일까지 지속되었으나 한강방어선이 와해됨에 따라...
한정분(금정굴 희생자 한복영의 큰딸)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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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굴 희생자 한복영의 큰 딸 한정분 유족의 증언입니다. 증언자의 모친은 지금도 희생자에 대한 이야기 하는 것을 절대 피하고 있다고 합니다. 영상 끝 부분에 유족회 간부들이 1년 한 번 치르는 위령제에라도 참여해 주시길 권하는 모습에서 당시 진실규명 작업의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습니다. 주요 증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해방둥이 1945년생 -백석리 거주, 사건 당시 30세. 한복례라고 불렀음(호적상 한복영). -인민군 점령시 이장을 보았다는 이유로 흰돌마을 치안대에게 잡혀갔음. -일을 안 보려고 했는데 강제로 시켜서 보게 된 것이었음. -(수복 후)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함께 피신했으나 할아버지가 먼저 잡혀 고문을 당했고 매를 못 이겨 아버지가 숨어 있던 곳을 말했던 것임. -일산으로 붙들...
허구례(금정굴희생자 허정임의 언니) 유족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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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2월 27일에 있었던 허구례(금정굴 희생자 허정임의 언니) 유족의 증언입니다. 증언자의 소극적인 태도는 당시까지도 만연해 있던 공포의 단면을 보여주며, 당시도 이미 연로했던 유족의 바람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가슴아픔니다. 주요 증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 37세. 동생 허정임은 22세. -출가했으나 전쟁이 나자 친정에 와 있었음. -동생은 인공시 오이지를 한 번 걷어다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음. -수복 직전 가족들이 피난 나갔다가 돌아오던 중이었음. 부역했다는 소문 때문이었는지 동생은 치안대 두 사람에게 잡혀 백마국민학교로 끌려갔음. -백마인지 일산인지 밥을 해갔으나 얼마 뒤 해 오지 마라고 했음.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없었음. 금정굴에서 희생되었다는...
19980227_채봉화유족(희생자 채기동)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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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0227_채봉화(금정굴 희생자 채기동 장녀)증언 현 고양유족회 회장이신 채봉화 님의 20년 전 증언 모습입니다. 고양경찰서에서 일주일간 밥을 받은 사실이나 마을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 외에도 형사사건기록에 파주 사람이 있었다는 진술이 있습니다. 희생자 채기동을 가르키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주요 증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수복 후 보리밭 갈 때 치안대에서 두 사람이 총을 메고 잡으러 왔음. 하나는 일산에서 고무신 가게를 하던 사람이었음. -어머니는 큰 언니를 보내 도망가라고 했으나 무슨 죄가 있냐며 스스로 잡혀 갔음. -아버지를 잡아간 치안대들은 구장집 문간에 아버지를 묶어 둔 채 점심을 먹고 갔음. -아버지는 한 번 쌀을 걷어 주었다고 함. 다른 부역일 본 것은 없었음. 인민군 측에게...
금정굴사건 최진 유족의 증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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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석방된 음력 10월 15일은 양력 11월 24일이므로 금정굴 학살은 중단된 뒤로 군검경 합동수사본부가 의용경찰대 등의 부역혐의를 조사하던 중입니다. 2주일 유치장에 있었다고 한다면 잡혀간 날은 11월 10일이 됩니다. 심한 폭행은 당하지 않았지만 이전 희생자들이 가혹행위를 당한 사실에 대해 들었습니다.
서울시의회 인권평화토론회(2015년 11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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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4일 서울시의회 2층 대회의실에서 열렸던 토론회 발제영상입니다. 2기 진화위 필요성과 권고사항에 대한 후속조치 추진 등 한국전쟁 집단희생사건 조사의 성과와 과제에 대한 발표였습니다.
'국민은적이아니다' 출판기념강연(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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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25일 고양시 일산동구청 강당에서 있었던 '국민은 적이 아니다' 출판기념 강연 파일입니다.
금정굴사건 희생자 최연 등의 동생 최진_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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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에서는 여성동맹위원회 강사였다는 이유로 고양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되었다가 풀려난 증언자는 자신이 직접 겪거나 목격한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할미마을 강씨 일가족의 죽음, 덕이리 이씨 집안 며느리들이 겪었던 고통은 전쟁을 빌미로 벌어졌던 민중들의 고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증언 중 덕이리 이씨 집안에서는 이용우님의 금정굴 희생사실이 확인됩니다. 집안에 군인이 있어 부역을 피할 수 없었다는 증언이 있었는데 아마 수복 후에는 이 때문에 그나마 며느리들이 목숨을 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주요 증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중에 자수한 막내 오빠는 송포지서에 일주일 정도 갇혀있다가 고양경찰서로 이송되어 금정굴에서 희생되었을 것임. 큰 오빠는 태극단 활동하던 친구들에게 잡혀갔는데 서로 웃으며 이야기 할...
한국전쟁 유족 1,453명의 문재인후보 지지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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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26일 강창일 소병훈 의원님의 소개로 국회 정론관에서 한국전쟁 백만 희생자 유족들의 염원을 모아 1,453명이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는 선언을 했습니다. 왼쪽부터 김복영, 박성태, 이세찬, 전술손, 소병훈 의원, 정석희, 이경숙, 강창일의원, 민경철, 마임순, 한인덕, 이창준께서 참석하셨습니다. 선언문 전문(명단은 생략했습니다)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전쟁 전후 전국 민간인 희생자 유족 1,453명의 염원을 담은 문재인대통령후보 지지선언 기자회견문 우리는 한국전쟁 전후 대한민국 정부에 끌려가 무참히 불법 학살당한 백만 희생자들의 유족입니다. 희생자들은 죽음의 길인지도 모르고 끌려갔습니다. 우리는 부모형제를 잃은 뒤에도 연좌제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 억울한 죽음으로 인해 또 억...
제공자막:대웅제약,SK가스(존속/해당사업은 폐업),튼튼영어,브라운(한국피앤지 직영),해태htb,SK하이닉스,우성식품(모체-폐업/사업-머거본),코리아나화장품,KCC,쌍용제지(모체-존속/사업-쌍용C&B로 분리),LG생활건강,심풍제약,BYC,하이트진로,아모레퍼시픽
1995년 9월 29일, MBC 뉴스데스크를 끝으로 정혜정 아나운서는 당시 앵커였던 백지연 아나운서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미국으로 유학을 갔었죠.
이거 어디서 찾았죠?
당시 진행자가 최승호 現 뉴스타파 앵커시네요.
전원이 오른쪽 밖에 없다보니 저리 되었네요.
1998년부터 2000년도까지 금정굴 바로 위에 있는 군부대에서 복무해서 금정굴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태극단이나 대동청년단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그들은 다른모습으로 굳건히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빨갱이'라는 단어 대신 '종북좌파'라는 새로운 단어로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과거사를 정리 해야 그들도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새누리당 훼방속에서 제대로된 진실 규명의 기회가 박탈되었는데,이번에 정권이 바뀐다면 꼭! 진실규명을 통해서 희생자 명예회복과가해자의 처벌이 반드시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희생자 최연은 앞에서 본 희생자 최재옥과 같은 날 끌려나가 금정굴에서 희생되신 것으로 판단됩니다. 1950년 10월 9일 학살당한 47명 중에 포함되신다는 것.
거의가 VHS로 녹화한 거여서 DVD로 변환한 것입니다.
93년도면 나 태어나면서 봤네 오랜만에 봐서 옛 추억 생각난다
9.28 수복 시기 대통령 이승만은 "장"자 붙은 사람은 모두 처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피해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과장된 빈 말이 아니라 실제 집행되었던 사실임을 알 수 있는데요, 이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갖는 원망과 증오의 역설을 잘 보여줍니다.
법곳리에서는 모두 여덟 분이 금정굴에서 학살당하십니다. 당시 증언에서 다섯에서 여섯 분을 말씀하시지만 증언자들조차 말하기 곤란한 분들이 더 있었던 것이지요. 2006년과 2014년 나머지 두 분이 확인되었습니다.
증언 당시 박이례 할머니께선 담담하게 응하셨지만 이 인터뷰 후 잊고 있던 기억이 되살아나 크게 앓으셨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나중에 들은 조사자는 면담조사를 중단하기에 이르렀다는 후일담이 있습니다. 트라우마와 그것의 전염 때문이었다고.
노인성께서는 인민군 점령기 의용군에 나가지 않으려다 인민위원회 일을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세히 확인되진 않으나 증언으로 보아 대화리 김인규 등 좌익인사들을 중심으로 강제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화리 주민들은 김인규 삼형제가 유명했다고 하는데 김인규는 대지주 집안 장손으로서 시국만 잘 만났다면 국회의원 감이었다고 합니다.
송기순 할머니의 어머니께서도 한 달 가까이 끌려갔었다는 사실. 저 파일 받은지 10년이 넘었는데 이제서야 그 말이 들리는군요.
1995년 발굴된 이병희 선생의 도장. 45년 동안 썩지 않고 있던 이 도장은 희생자 자신이 만든 것이었습니다. 희생자는 손 재주가 좋아 낙원상가의 악기점에서 일하셨다고 합니다. 대한청년단 군사훈련을 마치고 촬영한 기념사진, 30여 명의 마을 청년들과 행주산성 야유회에서 함께한 기념사진이 가족들 품에 남아 있습니다.
한 시간 분량을 줄이느라 나름 고생했습니다만 잘한 짓인지 모르겠습니다. 서고문님께서 발굴 후에도 가해자 측에서 들었다는 말, 여전히 그들은 희생자들을 "반역자"로 부르더라는 말, 2015년에도 고양시의회에서 들었고 고등법원 항소심에서도 다시 듣고 있습니다. 박근혜와 최순실의 헌법유린은 인간의 기본권 말살과 직접 통하는 행위지요. 탄핵이 무효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랍니다.
마임순 고문님의 발언을 통해 발굴 초기부터 유족들의 바람은 현장 유해 안치였음이 다시 한 번 확인됩니다.
필요없어 보이는 부분 편집했습니다. 처음 시도했습니다.
금정굴을 보아 오른 편으로 온갖 잡초들이 자라고 있네요. 발굴 영상을 보니 굴 속에서 나온 흙을 그 곳에 쌓고 있었네요. 희생자들의 살과 뼈였을텐데.
진실규명 활동을 기록으로 남기시기 위해 유족회에서 캠코더를 구입하셨다고 합니다. 영상은 심기호, 마임순, 이경숙 유족께서 발굴 사진을 현장사무실에 붙이고 주변을 정리하는 모습이 담겨있네요.
1995년 신동영 고양시장. 민주당 소속이었습니다. 중앙정부에 책임을 떠 넘기는 모습. 오늘 날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올 해 위령탑을 세운 화순, 경산, 경주의 지자체장은 어떻게 한 것인지 알려고나 하는지...
발굴된 도장의 주인 '박중원'. 당시 40세. 일산금융조합 직원. 당시 17세였던 아들 박상하도 함께 금정굴에서 희생되었습니다. 배다리는 원당을 말합니다. 아버지의 죽임을 봐야하는 아들, 아들의 죽임을 봐야하는 아버지.형의 죽임을 봐야하는 동생, 동생의 죽임을 봐야하는 형. 금정굴은 그 참혹한 반인륜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태극단원들 중에도 일산리 서기장, 민청원 출신이 있었음이 당시 판결문과 검찰자료, 그리고 자신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됩니다. <태극단 투쟁사>에는 태극단원들조차 부역자로 의심을 받아 치안대에게 고문을 당한 사실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자료 이기호 씨의 증언은 수복 당시 누구나 부역자로 의심받았다는 사실을 감추어서 자신들의 범죄행각은 물론 금정굴사건 자체의 진실을 숨기려는 주장으로 봅니다.
태극단장 이장복 씨가 이송을 지원했다고 증언하는 날은 1950년 10월 9일. 태극단은 고양지역 수복직후인 9월 28일부터 고양경찰서 석호진 경위(해병대 배속)를 지휘 아래 경찰서 앞에 있던 지서(파출소)를 이용하여 주민들을 연행하기 시작했습니다. 10월 6일 사찰계(오늘날 정보과) 주임이 복귀한 뒤 중면 치안대가 재편되었고 그 아래 태극단이 동원되었던 것입니다. 이무영 서장이 인천을 통해 들어 온 날은 9월 24일로 추정되는데 김창룡 등을 비롯해 수복 후 치안을 담당할 경찰 2천여 명이 복귀한 날이기도 합니다.
신기철 ?
증언자 중 강원근 씨가 당시 근무한 곳이 고양경찰서 구파발지서로 표기되어 있지만 정확한 명칭은 신도지서입니다. 자막의 대한파견결사대도 오기입니다. 자세히 들어보시면 대한타공결사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도면과 벽제면에서 활동한 민간치안조직은 대한타공결사대였습니다. 중면의 태극단과 같은 역할을 한 조직이었습니다. 신도면 농업창고에 꽉 차있었던 희생자는 금정굴이 아닌 다른 곳에서 희생된 분들입니다. 당시 언론 자료는 희생자가 200명에 달한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타공결사대에 의해 희생당했다는 주민들이 오금리에 계시는데 유족들은 인민군 측에게 학살당했다고 주장하십니다. 태극단과 타공결사대. 같은 성격의 조직이었지만 미래의 운명은 정반대로 갈립니다. 김창룡에 의해서 말이지요.
학살의 주체는 고양경찰서였습니다. 우익단체는 고양경찰서의 지휘를 받았습니다. 유족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가해자로 우익단체를 지목하는 것은 대부분 우익단체원들이 희생자들을 연행하는 것이 목격되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태극단원으로 소개된 김인성 노인은 1983년 간행된 <태극단 투쟁사>의 태극단원 명부에는 없습니다. 탈퇴하셨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비밀 청년학생 조직이고 점조직형태여서 서로 누가 진짜 단원인지 알 수 없었고 가짜가 행세한다는 증언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로서는 태극단이라도 가입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초기 치안활동을 민간치안대와 태극단이 했다는 위 보도는 이후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해병대에 편입되었던 고양경찰서 경찰관이 수복과 동시에 치안활동을 지휘했습니다. 그는 석호진 경위였습니다.
태극단원 이준영 노인의 증언(2006년 10월 18일)에 따르면 1950년 9월 28일 태극단원 일부가 덕이리 은장마을에서 희생되었습니다. 국방부 자료 등에 따르면 이곳에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분들은 13명입니다. 이날은 고양군 전체가 수복되는 날이기도 하는데 학살하는 인민군 측 무장세력과 수복하는 미군 측, 또는 국군 해병대 등 무장세력의 충돌은 없었다는 의문이 남습니다. 학살자가 인민군이었다는 증언은 아직까지 없고, 함께 끌려갔던 앞 이 노인은 내무서에서 일했던 친구가 풀어줘 살았다고 증언했습니다. 뉴스에서 말하는 45명은 국군 수복 시기 고양과 파주 일대 전체를 종합한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덕이리 태극단묘지에 기록된 희생자는 모두 52명이고 이중 고양 분은 21명, 나머지 31명은 파주 분들입니다. 예산지원은 고양만 하고 있습니다.
1993년 당시 고양경찰서 보안계장이 이미 금정굴학살이 있었음을 조사하여 알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한 때가 2007년이었으니 무려 15년이나 걸렸던 것입니다.
해방전후는 물론 전쟁 당시에도 고양지역에 극심한 좌우대립은 없었습니다. 이승만정부 고양경찰서의 체계적 학살 지휘만 있었을 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