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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
Южная Корея
Добавлен 27 июл 2020
김선생의 서울 이야기
문명의 나들목 양화진
#서울,#한강,#양화나루,#들머리,#잠두봉,#용산,#절두산,#양화진,#순교성지,#외국인선교사묘원,#군진터,#병인양요
근대 문물의 나들목 양화진에 대해 알아봅니다.
근대 문물의 나들목 양화진에 대해 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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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현과 만리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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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서강,#애고개,#아현,#마포나루,#큰고개,#만리현,#만리동,#용산나루,#군자감,#신창,#만리창,#청일전쟁,#새창고개,#경의선 용산선 큰고개인 만리현과 새창고개 만리창에 대해 알아봅니다.
개발시대 서울의 그늘, 청계천 판자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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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성동여행SNS서포터즈,#청계천,#중랑천,#판자촌,#달동네,#송정동,#답십리,#송정동,#1970년대,#청계천 복개공사,#고가도로,#청계천박물관 1970년대 개발시대 서울의 그늘이었던 청계천 판자촌에 대해 알아봅니다.
신식 두레박 혜화동 풍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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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혜화동,#풍차,#신식두레박,#백동수도원,#혜화동성당,#분도수도원,#독일수도원,#숭공학교 1920년대 서울의 명물로 신문에 소개되었던 혜화동 풍차에 대해 알아봅니다.
용의 형상을 닮은 용산, 용산과 둔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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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안산,#연화봉,#용산,#만초처,#용산나루,#군자감,#남산,#둔지산,#저습지,#풍운뇌우단,#이태원,#신용산 절대권력을 상징하는 용의 형상을 닮아다 해서 붙여진 용산에 대해 알아봅니다.
여의도 국회의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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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여의도,#양말산,#국회의사당,#중앙청,#경남도청 무덕전,#부민관,#태평로의사당,#남산국회의사당,#여의도국회의사당,#1975년 준공 대한민국 수립이후 국회의사당의 이전 변천사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문헌상 가장 오래된 동명, 안암동(安巖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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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안암동,#안감동,#안암천,#개운산,#수릉,#궁리,#종암동,#개운사,#보타사 풍수적으로나 교통상으로 편안한 동네 안암동에 대해 알아봅니다.
청계천 검정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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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성동여행SNS서포터즈,#청계천,#성북천,#비우당교,#성북천교,#무학교,#검정다리,#기동차길,#판자촌,#청계고가도로,#용두동 청계천이 복개되면서 사라진 검정다리의 위치를 찾아봅니다.
어머니산 모악(母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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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인왕산,#안산,#무악재,#무악산,#안산,#길마재,#모아재,#무학재,#봉화뚝,#봉우재,#사현,#소현,#무학대사 의주대로 모악과 인왕산 사이 첫 고갯길 무악재에 대해 알아봅니다.
동소문 밖 사한이에 있던 선잠단, 선잠단과 선농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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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성북동,#사한이,#북둔,#선잠단,#성북천,#정해친잠,#창덕궁 뽕나무,#잠실동,#잠원동,#잠두봉,#서잠실터 농사와 양잠은 국가 경제의 밑거름이어서 왕과 왕비가 솔선수범해서 풍요를 비는 제를 지냈다. 선농제와 선잠제에 대해 알아봅니다.
서울 도심 속 습지 밤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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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한강,#여의도,#밤섬,#윤중제,#장유들,#람사르습지,#윗밤섬,#아랫밤섬,#민물가마우지,#육지화,#산성화 서울 속 람사르 습지 밤섬의 생태 변화에 대해 알아봅니다.
산마루에 나 있는 성문 '잣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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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한양도성,#북소문,#창의문,#자하문,#자문밖,#혜화문,#동소문,#잣골,#백자동,#동소문고개 혜화문의 속칭이 잣문이고, 성아래 마을을 잣골, 백자동이라 불린 이유를 알아봅니다.
광명이 널리 빛나는 광희문(光熙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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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남소문,#광희문,#수구문,#시구문,#이간수문,#흥인지문 한양도성 남소문인 광희문의 속칭 수구문, 시구문에 대해 알아봅니다.
계생동천 제생원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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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계동,#재동,#원서동,#제생원,#계생동,#제생동천,#회동천,#복개,#계동궁,#갑신정변 안국역 3번 출구 계동길 현대본사빌딩앞에서 만나는 제생원터와 계동궁터 표지석에 대해 알아봅니다.
백두대간에서 물길이 이어진 용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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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동대문구,#용두동,#정릉천,#홍릉천,#중랑천,#선농단,#동방토룡단,#제기동,#찬물내기,#동적전,#전농,#청룡문화제 동대문구 용두동, 제기동, 전농동의 유래에 대해 알아봅니다.
출생지가 하왕십리동 1038번지라 마당에서 건너편 산자락에 있는 안정사가 마주 보이는 곳이었습니다. 5세쯤 응봉동(신촌)으로 우리집이 분가를 하면서 큰집이 되었지만 자주 놀러와서 안정사로 돌산으로 뛰어다니곤 했지요. 안정사의 범종 소리를 들으면서 서울로 과거보러 가던 선비가 구렁이에게 잡혀 죽을뻔 할 때 자기 새끼를 구해준 은혜를 갚으려고 머리가 깨지도록 종을 친 어미까치 이야기를 상상하기도 했구요, 안정사 옆 언덕길로 올라가면 소나무가 우거진 숲이었는데 지금도 눈에 선하네요.
최만리가 살아 만리동이란 이름이 유래한 게 특이합니다.
개발 시대의 왜 그늘이냐. 개발 시대라서 그런게 이전의 청계천도 그랬다. 뭔 개발시대만의 음지인 것처럼 말하냐. 조선시대에서부터 쭉 그 수준이었다. 인구 늘어나면서 자연 정화 수준 넘어나면 당연 그렇게 되는 것 아냐.
1970년대 중반 마장동에 있던 중학교를 다녔지요. 지금 그 학교는 강동구로 이사가서 외국어고까지 생긴 명문고가 되었는데 당시에는 깡패학교로 소문난 학교였죠. 고등학교 운동장 너머가 바로 청계천 판자촌이었는데 수업 끝나고 축구하다가 공이라도 울타리 밖으로 넘어가면 공 찾으러 간 친구는 공을 찾기는 커녕 동네 애들한테 두드려맞고 돌아오기 일쑤였습니다. 중학교 때는 방과 후 사근동 고개를 넘어서 왕십리 집으로 오는데 가끔 동네 십대 후반이나 이십대 초반 형들이 중학생들 돈을 뺏기도 했어요. 험한 동네였죠.
반가워요 고향친구... 🤗 한영중학교 다녔군요. 평준화 되기 전에는 3류 깡패 학교였지만 70년대 중반이면 추첨을 통해 배정 받은 학교지요. 나는 성동중학교 다녔는데 평준화를 잘 모르는 동네 꼰데 아재들은 명문학교 다니는 나는 예뻐해 주고 한영중학교 다니는 친구들은 무시 당했지요(억울) 😅 지금 한영중고 자리는 세림아파트로 철도 공무원 아파트로 지어져 삼촌도 철도청 공무원이어서 세림아파트에 살았어요.
1990년대에도 삼양동, 도화동, 약수동 판자집들은 구경해봤고. 1970년대 초 우리집 답십리 157번 종점 근처 갈비집할때 저 뚝방길따라 아빠 자전거 뒤에 타고 마장동 갈비 사러 같다 온거 기억나는데, 판자집들은 있었는지 기억이 안나네.
서울의 어려운 주거환경을 상징하는 청계천 판자촌을 잘 보았습니다.
김선생님, 너무 좋은 방송 하시는군요. 감사드립니다. 근데 1회가 없는데, 삭제하신걸까요?
관심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도 오래전 일이라 찾아보았더니, 제1화는 "기동차타고 뚝섬유원지로"입니다.
@김효 감사합니다. 찾아보겠습니다
잘 봤습니다
이승만이 쫒겨나지 않았다면 남산을 모두 훼손한 괴물 국회의사당을 볼 뻔 했습니다. 쿠데타를 막기에는 좋았을까요?
공부좀 더 하지요 왕십리 만리동 고려때부터 잇던 지명들인데 ㅋㅋ
안암동이 명당이라 정동이전 신덕왕후 묫자리로 추진했네요. 자세히 듣고 보니 명당이 분명합니다.
옛 활주로 모습 처음 봤습니다 😊
소공동은 홍영철이지 암 지금도 롯데호텔은 홍영철조직에 상납하면서 장사함
귀한자료 감사드려요 1959년부터 1965년까지 무악재를 넘어 안산국민학교를 다녀습니다 감회가 남다르네요
저희 집앞인데~^^ 신비로운 옛 이야기 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길마재가 한자로 안산이네요.
청계천의 검정다리는 판자촌과 어울리는 조합인듯 합니다. 그리고 나무로 만든 다리도 있었네요!
웃기는 소리 하지마라. 현재 야당은 윤석열을 특활비를 삭감한 것 뿐이다. 윤석열이가 예산안을 넘길 때 경북도 지원에 대한 예산은 처음부터 없었다. 억울하면 윤석열을 원망해야지 왜 야당을 들먹이나? 야당에서 경상북도 및 지방에 대한 예산을 삭감한 적이 없다. 미친 놈이네[!
상세한 설명으로 한강 지역 역사공부를 잘하게되어서 감사합니다
옛날엔 무악재 쫍았네..
김선생님 해설을 듣다 보면 서대문쪽 서울 말씨로 들립니다. ^^
@@김원기-o7d 대단하십니다. 서울 사투리를 판별하시네요. 제 가 태어나 성장한 동네가 내수동입니다.
감사합니다
구로에 살고 있어서 아주 재미있게 봤습니다 지도로 보니 아주 새롭네요
귀한 내용 잘 봤습니다 ~~
남산도 잠두봉이라 부를 정도로 누에가 중요했군요.
밤섬을 습지로 잘 보존하려면 가마우지와 쓰레기문제에 대한 해법이 필요할 듯 합니다.
왕의 존재를 나타내는 둑기에서 뚝섬이란 말이 생겼네요
화경대는 경치가 줗아 시대에 따라 힘이 있는 사람이 차지하는 곳이었네요.
창의문을 자문, 잣문밖이라는 것이 산마루에 있어 그렇게 불렀군요.
옛날에 학교 지각해서 계동길 엄청 뛰어 댕겻네.ㅋ
창천은 와우산의 동편 (연대에서부터 쭉 내려와 서강대교쪽으로 빠지는) 에 위치합니다. 그리고 4:04에 보이는 사진 장면은 위치상 와우산 위에서 서남쪽 양화진 방면을 담은 사진으로 보이는데, 6-70년대 항공사진을 찾아보니 저 사진에서 앞에 흐르는 물로 설명주신 것은 물이 아니라 와우산 서편(홍익대 쪽, 당시 방송소전 기차역 방면)에서 당인리 역 쪽으로 난 기찻길 (당인리선) 로 보입니다. 현재 망원동/서교동 쪽에 있는 현재의 '잔다리 어린이공원' 위치를 기준으로, 북동쪽으로 쭉 위로 연대 후문까지 이어진 길(동교로)이 아랫잔다리 윗잔다리가 있던 세교천(망원천)이고 쭉 따라서 복개된 것으로 알고 있구요.. 이 세교천은 연대 후문에서 시작해 내려와서 서남쪽의 잔다리 어린이공원 쪽을 지나, 망원동(현재의 희우정로) 위치로 틀어 흘러가 망원유수지 방면까지 가서 한강에 합류했던 것으로 압니다.. 따라서 연대와 이대 사이 금화터널 부근에서 시작하여 서강대교쪽으로 빠지는 봉원천(창천)과, 서교/동교동을 나누는 기준이 되었던 세교천(망원천)은 엄밀히 다른 한강 지류로 생각됩니다..
@@moonjung6298 정성어린 가르침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늘 배웁니다.
계생동천에서 계동의 옛이름을 알게 됩니다. 북촌의 유래를 잘 보여주네요.
한 편의 드라마틱한 외교이야기입니다. 역사의 격동에 따라 숨가쁘게 전개되었습니다.
지금도 토박이로살고잇어요. 마레푸들어서고 더클래시들어서고 부자동네되버림
모든 맛의 근원인 장맛, 장독대는 궁궐까지 우리나라의 독특한 풍경입니다.
일제 잔재를 말끔히 씻어내야 진정한 독립국가가 되는 것이다. 역사속에 있는 흔적은 남길 만한 가치가 있는 것에 국한되어야 한다.
초등학교 1학년때는 왕십리역에서 전차를 타고 비원이나 창경원으로 소풍을 갔었는데 2학년이 되면서(1969년) 전차가 없어지고 소풍도 가까운 뚝섬유원지나 뚝섬경마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경마장 관중석에서 김밥을 까먹으며 가운데 있는 잔디밭 가장자리에서 게임을 하다 오는 것이 전부였죠. 지금 서울 숲 주차장 쯤에 있던 친척집에 놀러가면 그 집 마당과 경마장 트랙이 철조망 하나로 붙어 있었는데 철조망에 매달려서 울긋불긋한 복장의 기수들이 말을 타고 달려가는 것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어린이대공원이 생기면서부터는 거기로 소풍을 갔었죠.
고향친구 같아요. 동명국민학교 다니다 사근국민학교로 전학했지요. 왕십리에서 전차타면 갈곳 없는 마포종점까지 갈 수 있었지요. 마포종점에서 내려서 한강 모래사장에서 다슬기 잡으며 놀았지요
감사합니다. 즐겁게 시청중입니다.
박석고개가 이곳에도 있었네요. 이현대로에서 연결하는군요.
한국의 문재점 땅 한삽 퍼내고 하루 넘기고 세월 내월 미루고 무슨 철거가 2년이나 걸리느냐 에구 한심한 공사
예전 갑신정변 공부할때 나온 경우궁이 어디인지 헤맨 기억이 납니다.
경마장이 골프장을 겸한 것이 재미있습니다.
진팔리 이야기 하나 더. 1 4 후퇴 때 왕십리에 남은 저희 아버지와 동생 들 3남매는 먹을 게 없어서 굶기를 밥먹듯이 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살구지 다리를 건너 뚝섬 벌까지 가서 배추 꼬랑지를 잔뜩 캐가지고 오는데 벌판에 가끔씩 총알 날라가는 소리가 들려서 땅바닥을 기어서 다녀오는 길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캔 배추 꼬랑지 보따리를 메고 굴다리 고개를 넘어 진팔리까지 왔는데 거거서 중공군 부대와 마주쳤다고 헙니다. 중공군들이 자루 속에 뭐가 들었냐고 수색을 하더니 배추 꼬랑지만 잔뜩 들은 것을 확인하여 뭐러뭐라 하면서 보내주더라고 합니다. 우리 아버지가 전쟁터에서 먹을 것 구하러 다니던 그 길을 비슷한 나이의 저는 중학생으로 친구들과 히히덕 거리며 학교를 통학했습니다.
옛날에 나의 기억으로 1973년쯤 답십리 현대시장쪽에 개천이 흘렀는데, 복개가 된것이군요....
사실 한국식 BBQ는 고기를 굽는 방식일 뿐이며, 1700년 조선시대 때 부터 소고기를 즐겨 먹던 방식입니다 ㅎㅎ 자료는 대한민국 국립박물관에 보관중인 '성협'이라는 화가의 '야연(野宴)'이란 작품에서 옛 모습을 볼수 있으며 1467년1월4일 부터의 관련 자료들로 인해 이러한 풍습을 볼수 있지요 ㅎㅎ
제가 어릴 때인 1960년대, 70년대에는 왕십리에는 이미 배추밭이 거의 없었고 응봉동 신춘(신촌)하고 뚝섬에만 배추밭이 있었습니다. 봄에 벌에 나가면 노란 배추꽃, 보라색 무우꽃이 온 들판에 가득했습니다. 보기엔 좋았지만 가까이가면 인분 썩는 냄새가 심했죠. 동네에 우물이 둘 있었는데 하나는 물이 말라있었고 하나는 더러워서 마시지는 못했지만 물이 넘쳐서 저녁 나절 벌에서 일하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거기서 손발이나 농기구를 씻었죠. 기억에 아른하네요.
마포와 의주대로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여서 번성한 소의문지역이네요.
마장안에서 장안동이 나온 말이네요.
궁금했던 부침바위에 대해 자세히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