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9 찬송가 33 영광스런 주를 보라 03:43 말씀 봉독 (왕상 6:14-38) 05:30 말씀 선포 솔로몬의 삶의 특징적인 것은 자신의 왕궁보다 성전을 먼저 건축했다는 것이다. 하나님 중심의 삶, 신앙이 먼저 드러났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라는 자신이 했던 말을 잘 실천하고 이루었던 참된 신앙 고백이 솔로몬의 성전 건축에서 잘 보여지고 있다. 7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솔로몬이 다른 어떤 것들에 눈 돌리지 않고 성전을 건축하는 데 열심을 냈다는 것에서 솔로몬의 신앙이 보여진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신 후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율법을 주시고 율법 중심으로 살아가야 됨을 말씀하셨다. 더불어 하나님께서 주신 설계와 모양대로 이 성전을 지으라고 명령하신 것을 주목하자. 하나님께서 모양, 규격, 재료를 보여주셨고 말씀에 순종하여 그 모양 그대로 지어야 했다. 율법을 지키는 것과 같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굳이 이렇게 세세하게 기록할 필요가 있나?' 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는 말씀이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특별한 의미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하나하나 세세하게 그 안에 있는 영적인 의미들을 다 알 수는 없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하나님 앞에 갔을 때 다 이해하게 되는 것처럼 지금은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아무 의미 없이 그냥 그렇게 지으라고 하신 것은 아니다. 규격과 모양 안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시기 위한 목적이 담겨 있다. 하나님 백성들과의 교제, 그들을 통해 받으시는 예배, 약속하신 거룩함의 결과물인 복을 주시고자 함이다. 성전은 단순히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의 의미보다는 성전 안에 온 우주가 모형적으로 담겨 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피조물과 어떻게 함께하시는지 원리가 성전 안에 담겨 있다. 원래는 하나님께서 우주를 다스리시는 통치의 원리를 에덴 동산 안에 담겨 두셨다. 에덴 동산 안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피조물들과 어떻게 함께하시고 통치하시는지가 담겨져 있었다. 죄로 인해서 에덴 동산이 파괴되자 임시적인 집으로 만드신 건축물이 성막과 성전이다. 나중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면서 그 안에 참된 완성될 성전이 나타나게 된다. 완성될 성전의 모형적인 모습이 오늘 본문의 솔로몬의 성전 안에 담겨있다. 안에 있는 모양들과 재료들을 보면 금, 백향목 등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재료들로 만들어져 있다. 처음엔 '하나님과 어울리지 않는다' 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율법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보면 거룩하고 엄위로우신 분이기도 하지만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 약자의 하나님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 성전의 모습을 보면 '너무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의 성전은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의 모형이라고 한다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더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좋은 것이 아닐까? 더 화려하고 찬란하고 아름다울수록 우리에게 더 큰 소망을 주는 것 같다. 아브라함, 모세 등 믿음의 선진들은 이 성전을 바라보며 믿음을 지켰다고 한다. 그곳이 너무나 아름답고, 완전하고, 거룩하고, 엄위스럽고, 찬란했기 때문에 그것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의 어려움을 이겨낼 만큼 찬란하고 아름다웠기에 믿음의 길을 걸어갔다고 한다. 금, 백향목 등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재료로 성전을 만들었는데, 이는 허례 허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실 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기쁨, 평안이 얼마나 찬란하고 좋은 것인지가 이 안에 담겨 있다. 솔로몬은 가장 완벽한 구조와 가장 완벽한 재료 가장 영광스러운 재료로 오늘의 성전을 만들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영광스러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백성들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거룩해야 하고 완전해야 하고 얼마나 정결해야 하는지를 성전 자체를 보며 알 수 있었다. 또 성소 자체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이 되어주신,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희생제물을 가지고 나아가야 했다. 이 지상 성전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가치가 더 많이 드러나게 된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이 길을 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희생이 얼마나 값지고 놀라운 것인지를 묵상할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집이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 아름다우심, 찬란하심, 거룩하심, 엄위로우심을 드러내기를 원하신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신앙 안에서 가장 귀한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가 우리 안에 끊임없이 이루어짐을 통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임이 우리에게 드러나고 그 영적 교제의 결과물인 거룩과 정결이 우리를 통해 세상에 드러나야 한다. 22:21 합심기도
01:25 찬송가 208장 내 주의 나라와 03:41 말씀 봉독 (왕상 6:1-13) 06:40 말씀 선포 오늘 말씀을 통해서 솔로몬의 성전 건축 과정 가운데 주목해 볼만한 부분이 있다. (1절)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이요" 그냥 '솔로몬이 다스린지 4년 2월'이 아니라 성전이 지어지는 날짜의 그 기준점을 출애굽 사건에 두고 있다. '출애굽이 이루어진지 480년'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오늘 말씀에 특별히 강조되는 숫자는 4. 4는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 12는 이스라엘을 상징(12지파) 10은 '완벽하게 찼다'를 의미 4x12x10 = 480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하게 하신 그 뜻이 채워졌다는 의미. 솔로몬의 성전은 하나님의 구원의 큰 그림 안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일들이 이 때에 이루어짐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거하는 하나님의 집, 성전 건축이 완성됨으로 출애굽이 완성되었음을 말씀하신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통해서 무엇을 원하셨을까?"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출애굽을 이스라엘의 구원의 사건으로 본다면 우리도 십자가 사건으로 구원하셨는데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날까지 하나님께서 완성하고 싶으신 것은 무엇일까? 성전 건축과 비교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출애굽할 때 하나님께서 애굽의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놓으라고 하실 때 "하나님께 제사 지내기 위해" 내어놓으라고 말씀하신다. 출애굽의 목적을 처음 말씀하신 그 때에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기 위해서' 이 백성들을 내어놓으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것은 그들이 불쌍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큰 그림 안에서 출애굽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으로 만드시기 위함이셨다. (사 43:21) "이 백성은 나를 찬송하기 위해서 만들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하게 해주신 것은 그들을 통해 예배 받으시고 섬김받기 위함이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하게 하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시면서 그들의 예배를 받으시고자 하셨던 것임을 오늘 본문의 성전을 통해 말씀해주신다. 하나님이 정말 받으시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시는 것이다. 제사와 예식을 통해서 예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하시는 것임을 말씀하신다. (11절) 네가 만일 내 법도를 따르며 내 율례를 행하며 내 모든 계명을 지켜 그대로 행하면 내가 네 아버지 다윗에게 한 말을 네게 확실히 이를 것이요 하나님께서는 성전 건축 그 자체에 목적을 두신 것이 아니다. 외형적인 것으로만 그치지 않고 성전 안에서 하나님의 법도를 따르며 율례를 행하며 모든 계명을 지켜서 그대로 행하는 것을 원하셨다. 신약의 표현으로 말하면 '삶의 예배'인 것이다. 어마어마하고 화려하게 지어진 성전은 하나님께서 거하시고 함께하시기 위해 지어진 집이었다. 이 성전은 솔로몬이 지은 것이긴 하지만 성전의 모든 설계는 하나님께서 주셨다. 식양과 모양과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지은 것이다. 성전 안에서는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들이 일어나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계획이 이루어져야 한다. (1) 성전이 완성은 출애굽 후 480년이 지나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거의 500년이 흐른 뒤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다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다. 비록 우리가 원하는 시간과는 다른 시간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은 분명히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때와 방식대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원하는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2) 화려한 성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성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참된 예배가 더 중요함을 말씀하신다. 성전이라는 외형적이고, 형식적인 것보다 때로는 율법적으로 빠질수도 있는 것보다 그 성전 안에서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그대로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고 그래야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음을 말씀해주신다. 우리 마음속에 늘 지켜야되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삶의 예배'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우리에게서 나타나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고 나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참된 예배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임을 기억하자. 형식에 빠져 우리의 진심이 약해지지 않을 수 있도록 늘 우리의 마음을 지키며 주님 안에서 참된 예배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22:38 합심기도 오늘은 특별히 제게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항상 제게 하시는 말씀으로 듣지만 오늘은 특별히 더더욱..)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흐려지고 의심되고.. 그래서 ‘안 계신가보다’하고 또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려고 할 때, 그렇지 않다고, 주님 시간은 제 시간과 다르다고 주님 방법은 제 방법과 다르다고 반드시 이루어지니 참고 기다리며 지금의 자리를 지키고 다시금 삶의 예배자로 서라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네요.. 아침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마음을 주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십니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는 주님이십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돌이키게 하시는 은혜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00:46 찬송가 321장 날 대속하신 예수께 03:50 말씀 봉독 (왕상 5:1-18) 05:40 말씀 선포 성전건축을 준비하는 솔로몬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성전 건축을 막으셨다. 그 당시에는 전쟁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4절) "이제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게 태평을 주시매" 솔로몬은 여기서 하나님을 아버지의 하나님이 아니라 조상의 하나님이 아니라 '내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우리에게도 중요한 고백은 성경 속의 하나님, 이전 세대의 하나님이 아니라 여기, 지금 나와 함께하시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이다.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지 못한 2가지 이유> (1) 다윗의 시대에는 화평이 없었다. - 주변국들과의 전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2) 다윗이 피를 너무 많이 흘렸기 때문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사명을 맡기실 때 그 사람이 살아가는 환경과 시대에 알맞은 사명을 주심을 볼 수 있다. 다윗에게는 그 시대에 맞는 사명을, 솔로몬에게는 그 시대에 맞는 사명을 주셨다. 솔로몬 = 평강, 안식, 화평(샬롬)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두시기로 한 성전을 화평의 시대에 만드신다. (1)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여기 이 시대에 세워주시고 살게 하셨는가? 왜 우리를 이러한 형편과 환경 가운데 살아가게 하시는가? 늘 분별하며 기도하며 묻고, 되묻고, 순종해야하는 기도의 제목은 "하나님 왜 우리를 여기 이 시대에 세워주시고 살게 하십니까?"라는 물음이다. 우리의 시대, 환경안에서 우리가 해야하는 일이 있음을 본문 말씀을 통해 보여주신다. (2) 평화, 안식, 화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주변국에 화평을 이루신 다음에 성전을 건축하게 하신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은혜를 누리게 하신 다음에 일을 이루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결과가 화평인데 그것이 온전히 이루어진 상태에서 성전을 건축하게 하셨다. 우리는 성령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장소, 시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증거가 바로 화평, 평화, 안식이다.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화평하라" 하나님은 그분과의 올바른 관계 안에서 참된 평강과 안식을 누리는 자들을 통해서 시대의 화평, 이웃과의 화평을 누림으로써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통치를 드러내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만 있지 아니하고 의와 평강과 희락에 있다. 18:47 합심기도
00:42 찬송가 450장 내 평생 소원 이것 뿐 02:55 말씀봉독 (왕상 2:26-35) 05:43 말씀선포 열왕기상은 왕들의 이야기이다. 어떤 왕이 하나님 앞에서 선한 왕인지, 하나님 나라의 왕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성경이다. <오늘 본문에 나온 두 사람의 종말> (1) 제사장 아비아달 - 추방, 폐위 (2) 군사령관 요압 - 사형 솔로몬이 제사장 아비아달을 아도니야를 도왔다는 이유로 제사장 직분에서 쫓아내고 있다. 아비아달은 다윗 가문과 아주 밀접한 사람이다. 2가지의 결정적인 일이 있었다. 아비아달은 다윗의 신앙의 동역자였고 다윗이 여기까지 오기까지 늘 함께했다. (1) 오벧에돔에 있던 여호와의 궤를 다윗 성으로 메어올 때 그것을 메어온 사람중에 한 명이었다. →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참된 신앙의 길을 걸어가려고 할 때 함께 했던 사람이었다. (2)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서 도망할 때 제사장 아비아달의 아버지였던 아히멜렉이 있는 곳으로 피신했었다. 그 때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던 진설병을 다윗과 그의 무리들에게 주어서 먹게 했던 그 집안이 바로 아비아달의 집안이었다. 아비아달은 다윗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운명을 같이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비아달은 마지막 순간에 그가 가졌던 것을 잃어버렸다. 진실함, 변함없는 충성, 신실함을 그의 노년에 저버리는 모습이 나온다. 제사장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임을 아도니야의 반역에 동참함으로써 스스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왕, 제사장, 왕의 신하 등 다양한 사람이 있을 것인데 언약의 신실함, 성실하고 충성스러움, 변함없는 사랑.. 그것을 기준으로 하나님 백성다울 수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오늘 본문은 보여주고 있다. 솔로몬은 아비아달을 파면하여 아나돗으로 보낸다. 그는 제사장 아비아달을 죽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오늘 솔로몬을 세우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자를 내 마음대로 처형할 수 없다"라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원리원칙을 철저히 지켜 행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자기 충동이나 화를 이기지 못함으로써 일을 행하는 자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27절) 솔로몬이 어떻게든지 말씀 안에서 자신의 마음을 지키며 일을 행할 때, 그 일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인 것처럼 하나님의 뜻이 이 일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 일을 성취하시는 것처럼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굳건하게 서서 그분의 신실하심과 성실하심을 따라서 충성스럽게 이 일을 감당할 때 때때로 우리가 뭔가를 하는 것 같고 우리가 의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이루시고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심을 솔로몬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29절) 하나님의 법에, 제단 뿔을 잡으면 처형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너는 가서 그를 치라" 그러나 요압을 처단하는 일에 솔로몬은 머뭇거리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해도 되는거야?' 하는 의문이 들기까지 한다. 그러나 출애굽기 21장에 보면 만일 고의로 동족을 살해하는 이가 있다면 그가 제단의 뿔을 붙잡고 호소할지라도 그를 끌어내어 죽이라는 명령이 있다. 지금 솔로몬은 분노나 복수심에 따라 이와 같이 한 것이 아니라 말씀에 입각해서 그렇게 행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우리가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말씀에 따라 행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는 역사들이 우리 삶에 일어난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 이 모든 것을 더해주시겠다는 약속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서 결정하면 겉으로는 우리를 위해서 하는 결정인 것 같고 우리의 지혜로 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 주시는 하나님 나라의 법칙이 오늘 열왕기상 말씀에 담겨져 있다. 우리도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 앞에 신실함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데 쓰임받는 일꾼들로 세워져 가기를.. 23:11 합심기도 (❤오늘 합심기도 때 목사님 기도가 너무 좋았다❤)
01:08 찬송가 488장 이 몸의 소망 무언가 03:36 말씀봉독 (열왕기상 1:1-10) 06:00 말씀선포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 하늘 아래 영원한 것은 없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영원할 것 같았던 다윗의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 영원할 것 같았던 다윗의 왕위, 능력, 출중함도 무기력해가는 모습이 나온다. 오늘 열왕기상의 주제는 '다윗의 죽음 이후 이들이 어떻게 되어가는가?' 사사기의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에 "저들에게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라는 내용의 흐름과 연결이 된다. (1) 다윗왕의 신하였던 사람들 연로한 왕을 위해 젊은 여성을 몸종 or 후궁으로 넣어 보낸다. 그 당시의 하나의 문화였기에 언뜻 보면 별일 아닌 것처럼 보이고 왕을 위해 하는 일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이 일 때문에 아도니야가 죽임을 당하는 원인제공이 된다. 자신들은 옳다고 생각하고 누군가를 위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일이라면 그 끝이 어떻게 되는가? 다윗과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점이 보인다. 다윗과 왕의 신하들, 다윗과 아도니야의 차이점이 드러난다. 바로 자기 뜻대로 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 무엇이든지 스스로 하려고 하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 신실함을 볼 수 있다. (2) 아도니야라는 왕자 압살롬 다음에 태어난 4번째 아들이다. 압살롬, 아도니야.. 용모가 심히 출중한 자. 겉으로 보기에는 충분히 왕이 될만한 사람처럼 보이나 그렇지 않았다. (5절) 왕위를 누구에게 물려주어야 하는지 아직 정해지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 이것을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지를 겸손히 기다려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당연히 자기가 왕이 되어야만 하는 것처럼 아도니야는 스스로를 높이고 있다. 아도니야의 현실을 보면 자기가 왕위를 이어 받을만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모습을 보면 아무리 용모가 뛰어나고 아무리 왕이 될만한 자질이 있을지라도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신 하나님이심을 잊고 스스로를 높인 것이다. (3) 스루야의 아들 요압 (=다윗의 최측근, 전우) 다윗이 늙은 것처럼 스루야의 아들 요압도 자기가 가진 권력을 내려놓아야 할 때였다. 그러나 요압의 마음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왕을 새로 세워서 자신이 개국공신이 되면 이 권세를 더 누리리라고 꿈꿨던 것이다. (4) 제사장 아비아달 (=밧세바의 할아버지로 추측) 다윗을 싫어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다. 그 당시 대제사장 가문(사독 가문)과 경쟁 중, 다음 대제사장 가문이 누가 될 것인가? 라는 물음 앞에서 아도니야가 왕이 되면 자신이 대제사장이 될 거라고 꿈꿨다. 결국 자신의 탐욕, 욕심, 욕망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사람을 반역하고 자기자신을 높이려고 하는 열왕기상의 모든 왕들의 처음 시작 부분에 나타나고 있다. 앞으로 시작될 열왕기상의 오늘 본문 말씀을 잘 지켜보면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가 보이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어떤 것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것이 우리 안에 있을 때 그분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뜻, 계획, 소망,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있지 않을 때 하나님 앞에 옳은 것이 될 수 없음을 기억하자.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다면 온 우주 만물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이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의 작은 인생 하나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분의 뜻에 맞게 이끌어가실 수 있는 분이심을 기억하자. 스스로 높이는 삶이 아닌 마음을 낮추며 겸손하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아가자. 23:33 합심기도
00:25 찬송가 419장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03:24 말씀 봉독(시편 94:1-23) 06:17 말씀 선포 "하나님은 도대체 뭐 하시고 계시는가?" 어지럽고 불의한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질문이 찾아온다. 하나님께서 계시기나 하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라는 질문이 생겨날 때가 있다. 때로는 다 대답할 수 없는 일들도 있다. 왜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잘되는 것을 놔두시고 술수, 음모, 불법을 일삼는 권세자들을 허용하시는가? 불의한 세상의 시작은 법의 왜곡, 법이 집행되는 장소에서부터 불법과 불의가 성행하게 되면 거기서부터 악한 세상이 시작된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다. 이 시편기자가 마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17-18절) 과거에도 현재도 동일하게 세상은 불법과 불의가 성행하는 듯하나 하나님은 나를 도우시고 내가 미끄러지지 않게 붙드시고 주의 위안이 나를 즐겁게 한다고 고백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7절) 사람들이 악을 행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보지 못하신다. 하나님은 관심도 없으시다'라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함, 두려움이 없이 때문이다. (11절) 인간의 생각은 허무하다. 자신들이 득세할 때는 모든것이 자신들의 뜻대로 되는 것 같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헛된 것이다. 하나님은 정의롭고 공의로우시고 그의 백성을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 약한자들의 하나님이시다. 이전에 자신도 악한 자들의 득세와 득의 때문에 마음이 상하고 미끄러질 뻔 했지만 자신이 믿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 안에서 올바로 살아갈 수 있음을 믿음으로 하는 고백이 시편 94편이다. 어떤것이 참된 복이냐? (12절) 세상의 복과 믿는 자의 복은 다르다. "하나님께서 이런 악한 세상을 분명히 가만두지 않으신다. 분명히 심판하시고 바로잡아주시고 회복하실 것이다." 악한 세상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보복과 복수를 외치고 있지만 그럼에도 환난날에 도움이 되시고 자신을 평안하게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통해 이겨나가고 기다릴 수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내가 겪는 모든 일들을 이미 다 아신다. 주님이 이 모든 일들을 해결해주실 수 있고 해결해주실 것이다. 하나님께만 온전히 피할 수 있음을, 하나님 안에서만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음을 고백하며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가자. 20:00 합심기도
00:47 찬송가 356장 주 예수 이름 소리 높여 03:49 기도(강춘규 권사) 05:16 말씀 봉독(시 51:1-5) 06:28 말씀 선포 시편 51편은 다윗이 밧세바와의 간음 사건을 일으킨 후 위선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던 중 나단 선지자로부터 책망을 듣고나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이다. (3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비로소 다윗이 자기 앞에 항상 자기를 넘어뜨리려고 기다리고 있는 죄를 보게 되었다. (5절) "내 존재의 본질은 죄 덩어리다" 인간 자체가 죄 안에서 태어나고 죄의 본성이 이 안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다윗이 깨닫게 되었다. <죄와 싸우는 사람이 얻는 은혜> (1) 그 영혼이 소성함을 입게 된다. (2) 성령의 도우심을 즉각적으로 받는다. (3)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다. - 죄의 삯은 사망이다. - 죽음이 주는 질병과 고통은 여전하지만 내게 찾아오는 죄의 유혹과 시험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겨나간다면 죄의 삯이 사망이 아니라 의의 삯인 영생이 내게로 옴을 겪어나가는 은혜가 있다. (히 12: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히브리서를 받은 사람들은 어떤 처지였나?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고향과 집에서 쫓겨나 타지와 동굴에서 나그네처럼 돌아다니며 고통 당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영적으로 피곤한 사람들' '내가 이렇게 믿음대로 사는 것이, 이 믿음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을까?' 마음의 흔들림, 피곤함이 찾아온 이들이었다. 피곤하여 낙심할 위험이 보이는 이들에게 '너희가 아직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워본 적이 없기 때문이야' 라고 말하는 것이다. '너무 냉정하고 몰아붙이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드는 말씀이다. 믿음 때문에 집을 빼앗기고 감옥에 갇히는 순교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죄로 인한 마음의 피곤함과 낙심이 찾아올 수 있다. "마음 가운데 찾아온 피곤함과 낙심은 여러분이 아직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죄에 대한 사랑과 미련이 여전히 남아있다면 세상의 낙과 즐거움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다면 죄와 싸울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을 누리지 못함에 대한 실망이 여러분의 마음을 실망하게 하고 낙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조차도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우리에게 영원하게 주어질 하늘의 도성이 우리에게 영원히 주어졌는데 왜 이 세상이 주는 낙과 죄의 즐거움에 마음을 두려고 하느냐?" 믿음의 선배들은 설교한다는 이유만으로 16년, 20년 그렇게 감옥에 갇히고 그랬다. 조금은 보상 받고 싶거나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었을 텐데 지금의 삶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룩과 신앙을 지키는 삶을 살아갔다. 자신들의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영적인 눈이 훨씬 더 많이 열려있었던 것이다. <죄와 싸우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5가지 표지> 1. 죄에 대한 정직한 인식을 소유함 → 죄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자 함. → 알아야 고칠 수 있고 싸울 수 있다. → 죄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한다. → (롬7:21-23)성령의 법 ↔ 죄의 법 2. 효과적인 죄 죽임의 방법을 갈망함 → (롬8:13) 성령의 도우심을 받는 것 → 죄를 이기는 방법은 지식이 아닌 지혜 → 1903년 원산, 25살의 나이에 캐나다에서 이 땅에 와서 사역한 하디 선교사님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고 그 회개의 물결이 이어져서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길선주 장로님의 회개와 평양 대부흥으로 이어졌다. 3. 죄의 힘보다 은혜의 능력을 믿음 4. 자신의 결단보다 성령을 의지함 5. 고민보다 기도를 많이 함 → '제 결단과 의지 가지고는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합니다.' 그 기도 가운데 자기 죄악을 깨닫게 된다. <죄와의 싸움에서 옳은 판단력을 유지하기 위해> 1)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2) 항상 연구해야 합니다. → 말씀 읽을 때 어떤 구절에 많이 표시하는가? → 죄와 싸우는 것이 무엇인지와 관련된 그런 말씀들을 많이 찾아보자. 3)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 즉각적인 응답을 받는 경험이 우리의 영혼을 깨어있게 한다. 4) 항상 순종해야 합니다. → 성령님께선 우리의 순종을 통하여 일하신다. 47:03 합심기도 52:43 주기도문
00:30 찬송가 400장 험한 시험 물속에서 03:05 시편 93:1-5 04:30 말씀 선포 '지도자가 중요하다' 시편 93~100편 :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 어떤 대통령, 왕이 있는데 그 지도자의 자녀가 2, 3살 되는 어린 아이라면 아버지가 어떤 일을 하는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이해할 수 있을까? 마냥 아버지이기 때문에 좋아서 옆에 있을 뿐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리신다는 고백, 단순히 내 삶뿐만 아니라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왕이시고 이 시대의 왕이시다 라고 고백할 수 있을까? 이는 우리가 어떤 처지, 형편, 상황에 있느냐에 따라 각기 다르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라는 이 한 마디. 신약에 와서는 이 한 마디가 복음으로 바뀐다. 신약시대에 그 시대를 다스리는 왕은 로마의 황제였다. 로마의 황제가 그 시대를 다스리는 것처럼 보였다. 원래 '복음'이라는 단어는 (1) 로마의 왕이 새롭게 등극할 때 (2) 로마의 왕의 후계자가 태어날 때 (3) 로마의 왕이 이끄는 전쟁이 승리했을 때 그것이 바로 기쁜 소식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교회를 세우시고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복음이라는 말을 바꿈. "로마의 황제가 이 세상을 다스리는게 아닌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이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다스리심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신다." (3절) 우리가 이 세상을 눈으로 보면 복음의 능력보다 세상의 험한 파도가 훨씬 더 크게 보이는게 현실이다. 큰 물결, 큰 물, 바다의 쓰나미와 같은 큰 파도가 덮쳐오면 그게 더 커보이는게 사실이다. 하지만 시편 기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새롭게 깨닫고 다시금 고백하게 된 것이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 이 말은 소망의 말이 아니다. '다스려 주셨으면 좋겠다'는 말이 아니다. 이 세상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고백이다. 하나님께서 고레스라는 페르시아의 새 왕을 감동하셔서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금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게 하셨다. '새로운 출애굽'이라고 이야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에서 회복하신 일.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이 바뀌었다. "고레스 안에서만 잘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다스리심, 은혜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고레스라고 하는, 페르시아라는 어마어마한 나라를 움직이실 수 있는 분이구나!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니 이 세상의 견고한 권세가 움직이고 흔들리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구나!" 그 후 새로운 고백이 생겨난 것이다. 새로운 영적인 눈이 열어지게 된 것이다. (4절)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를 새롭게 경험한 것이다. 세상의 어떤 권세, 권력, 문제, 아픔, 고통 어떤 험하고 악한 세력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것들보다 훨씬 크시고 충분히 그것들을 제어하시고 다스리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 "하나님보다 높으신 분은 없다! 그분이 지금도 내 삶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신다! 온 세상을 넘어서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이 세상의 어떤 파도보다 높으신 능력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 믿음의 사람들 안에 이런 경험이 중요하다. 아무리 우리가 믿음이 좋다 할지라도 여전히 어떤 부분은 고백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역사하셔서 그것까지도 우리가 고백하게 만들어 주신다. 마치 온 우주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교하고 오묘하고 놀랍게 움직여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우리가 다 볼 수 없고, 다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지금도 우리가 다 깨달을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의 모든 부분을 다스리시고 움직이시고 통치하고 계신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 단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영원히 다스리신다! (5절) 우리에게 닥쳐오는 많은 사건, 사고, 험한 파도.. 어제와 오늘 우리를 다스리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영원무궁토록 우리를 다스려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은 반드시 이루시고, 언제나 동일하게 우리를 다스리시고, 그 다스리심이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아무리 우리 주변의 어둠의 세력이, 파도가 크게 보인다 할지라도 그 안에서 충분히 하나님으 높으신 분이심을 참된 믿음으로 함께 고백하며 살아가기를.. 17:35 합심기도 1. 말씀에서 약속하신 증거들, 말씀들이 매우 확실하고 영원 무궁하다는 그 고백이 우리의 진정한 믿음의 고백이 될 수 있도록.. 말씀을 경험하고, 체험하고 말씀의 역사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의 성도의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주시도록 2. 단지 우리의 삶 속에서만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이루어주신 하나님의 다스리심, 왕 되심을 우리의 삶을 통해서 우리의 이웃들, 믿지 않는 이들에게 전하고 나눌 수 있을만큼 우리를 붙들어 주시도록..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01:03 찬송가 67장 영광의 왕께 다 경배하며 03:54 말씀봉독 (시 92:1-15) 05:58 말씀 선포 매일 이런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 말씀은 시편 기자가 안식일 아침에 제사(상번제)드릴 때 부른 찬송이다. 두드러지는 내용은 '하나님의 성품'. 나의 상황과 비춰볼 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내용이다. 하나님을 어떻게 부르는지를 주목해보자. (1절) '지존자여' 다른 성경에는 잘 나오지 않는 호칭이다. 이는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대상을 높일 수 있는 한 높여 표현한 것이다. 세상에 있는 어떤 다른 권력들, 어떤 것보다 비할 수 없이 높으신 분이라는 것. 오늘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형식적으로 고백하지 않는다. 너무나 가깝고, 매일 함께하시고 매 순간 일하시는 분임을 고백한다. (1-3절) '아침마다.. 밤마다..' 목소리로만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각종 악기로 찬양함이 너무 좋다고 고백하고 있다. 시편을 연구하는 분들의 말에 의하면 이 시는 다윗의 시대, 솔로몬의 시대에 쓰여진 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다 멸망한 이후에 포로로 잡혀간 이후에 쓰여진 시라고 한다. 모든 악기를 동원해서 날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인자하시고, 성실하시고, 함께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세상의 삶의 굴곡과 어려운 순간들을 되돌아보며 '주님은 아침마다 내게 인자하시고 밤마다 성실하신 분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4절)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고백하고 있는가? 매 순간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경배하고, 높이고 있는가? 그 시대는 악인들이 흥왕하고 번성하는 것처럼 보이던 때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상황과 상관없이 이렇게 찬양할 수 있는 이유는 그런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서 일하심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듣고, 아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작은 자에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역사와 자신의 삶에서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5절)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그 안에서 행하신 일들은 늘 자신의 생각보다 크고, 깊고, 놀랍고, 찬양할 수 밖에 없음을 경험했기에.. 우리는 이 악한 세상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고, 노래하고 있는가? (15절)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우리를 뒤흔들 때가 많지만 내가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은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7절) 이 세상에서의 삶은 녹록치가 않다. "악인들은 풀 같이 자란다" 너무나 빠르고, 넓고, 질기게 순식간에 잘되고 흥왕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바로 악인들, 세상이다. 그러나 그런 이들은 영원히 멸망한다. (12-13절) 풀은 잠깐의 바람과 폭우를 만나고 사라진다. 나무는 해가 바뀔 때마다 찾아오는 어려움과 폭풍우와 가뭄, 기근을 이겨나가면서 자란다. 그러면서 그 나무가 가진 웅장함, 번성함을 볼 수 있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여호와의 말씀, 임재, 인도하심, 붙드심 가운데 심겨져셔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는 나무. 이 나무가 바로 자신임을 고백하고 있다. 날마다 신선한 기름을 부어주셔서 치료해주시고 힘을 북돋워주시는 자신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이심을 오늘 시편기자는 고백하고 있다. 우리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으면 좋겠다. 여호와의 집에, 뜰에 심겨져서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고,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한.. 매 순간 이렇게 주님을 찬양하고 높일 수 있는 이렇게 노래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21:21 합심기도
00:15 찬양(2) - 슬픔 없는 가정 없으나 02:47 찬양(3) - 나는 주를 섬기는 것에 후회가 없습니다 05:58 합심기도 07:37 예배 기원 (묵상기도) 08:44 신앙고백 (사도신경) 09:42 찬송가 44장 지난 이레 동안에 12:40 기도(김재천 장로) 16:37 말씀봉독 - 빌 3:1-3 17:20 말씀 선포 <제목 - 참된 그리스도인의 증거> 그리스도인으로서 목사님의 소망 (1) 내가 섬기는 공동체의 모든 이들이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되는 것. (2) 그들이 참된 그리스도인 답게 성숙하고 성장해 가는 것. 다섯 살, 네 살 짜리 아이에게 우리가 타고 다니는 차키보다는 장난감 자동차를 주는 것을 좋아한다. 이처럼 우리들도 참이 아닌 거짓, 진짜가 아닌 모조를 더 좋아하는 경우가 많다. 무엇을 더 좋아하고, 아끼고, 자랑하는가?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구별하는 조건이 무엇인가? (빌 3:1)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 어떻게 학비를 마련해야 할까? 이번주에 담당교수님이 전화가 와서 “이번에 목사님을 장학금 대상으로 추천했으니 기다려 보세요” 장학금 대상에 선정이 안 됐다. 갑자기 짜증이 확 나면서 “공부하기 싫다고, 학교 등록하기 싫다고” 그렇게 투정아닌 투정을 부렸다. 한 3일쯤 있다가 문자 하나가 왔는데 '장학금 대상으로 선발 됐으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감사한 일인 것은 제가 얼마나 물질에 얽매여 있는지를 보게 하셨다는 것이다. 진짜 믿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진짜 믿음은 흔들림 없는 믿음이다. 어떤 상황에도 흔들림 없는 믿음. 모래 위에 세운 집이 아니라 반석 위에 세운 집. 우리의 삶에서 우리를 기쁘게 하는 그런 것들 때문에 기뻐하는 것은 흔들리는 믿음이다.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다. 어제 친한 목사님과 잠깐 만났는데 그 목사님은 길랑-바레 증후군이라는 병을 앓으셨던 분이다. 갑자기 찾아오는 말초신경계의 자가면역질환인데 호흡을 못해서 죽어가는 질병이다. 여전히 휠체어로 다니시는 분인데 그분과 어제 이야기하면서 늘 말씀하시는 것이 ‘감사’였다. 내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주 안에서 기뻐하는 삶. 어떤 상황이 우리에게 다가올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기뻐할 수 있게 만드신다. 우리에게 있어야 될 3가지 조건 '참된 것이 무엇이냐?' (1)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함(3절) 그 봉사의 이유, 능력, 원인은 내 힘, 내 의지가 아니라 성령으로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자기 힘, 자기 의지로 하게되면 보상받고자 하는 심리가 생겨난다. '내가 이 것까지 하는데... 내가 이 정도까지 하나님을 섬기는데...' 하나님을 우리가 섬기고 봉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성령으로 봉사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사랑이 나타난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이웃 사랑. 성령은 사랑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봉사는 예배를 뜻한다. (로마서 12장)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은 자기의 삶을 하나님께 예배로 내어드리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함으로 드리는 예배. 우리의 예배가 반쪽짜리가 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성령은 늘 우리를 진리로 이끄신다. 우리의 몸이 하나님 앞에 산 제물로 살았는지 분별해보아야 한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화평, 희락... 이런 열매가 맺어지는 것이 바로 예배다. 예배가 참되게 서 있지 않는 한 하나님 앞에 참된 은혜로 살아갈 수 없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주체가 달라지는 이들이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다 라고 진정으로 고백할 수 있는 이들이다.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많은 것들 그것들은 언젠가는 없어질 것들이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나 자랑으로 '주님 앞에 나아온 이유가 내게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예배의 이유가 있다고 그런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예배하는 이들이다. 49:09 헌상 및 기도 51:07 찬송가 288장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53:36 교회소식 55:04 교제의 인사 55:16 축도(신재웅 목사)
00:43 찬송가 324장 예수 나를 오라 하네 04:57 예레미야 25:15-29 07:34 말씀 선포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자유롭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을 위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주셨다. 구원의 결정도, 이루어가심도 하나님의 일하심이었다. 누구도 그것을 반대 or 저항할 수 없다. '하나님의 경영하심' 어떤 조직이든 그 조직을 이끌어가기 위해 계획, 헌신하고 모든것을 쏟아부으며 일하는 '인간의 경영'이 있다. 개인의 삶이나 회사도 이렇게 하는데 온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은 얼마나 더하겠는가? 구원의 역사로 경영하신 주님 비록 심판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경영하심은 구원의 역사였다. (사 14:24)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내가 경영한 것을 반드시 이루리라 (사 14:27)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그것을 능히 폐하며 그의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하나님의 계획, 뜻하심, 경영하심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우리 각자의 삶에도 하나님의 경영하심이 반드시 있다. 요즘 많이 부르는 찬양 중에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라는 찬양이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근심과 후회하심이 없다. 하나님께서 한번 정하시고 뜻하시고 계획, 작정하신 일들은 반드시 이루신다. 나의 삶에 분명히 하나님의 경영하심이 있다는 그 믿음이 없이는 이 세상 가운데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갈 수가 없다. (15절) 이 진노의 술잔을 "모든 나라로 하여금 마시게 하라" '온 세계 열방을 향해서 하나님의 분노의 잔을 마시게 하라' 우리로 보면 정작 살아간 삶이 구이 땅 정도를 벗어나지 못한 성도에게 전라북도 온 땅을 향해서 말씀을 선포하라는 것을 넘어서는 황당하기도 하고 이해되지 않는 말씀이다. (17절)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다. 예레미야를 부르실 때 '내가 너로 온 열방의 나라를 심기도, 뽑기도, 세우기도, 무너뜨리기도 하겠다'라고 하셨다. 예레미야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을지라도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 예레미야처럼 우리도 온 세계를, 우주를 심판하시기 위해 다시 오실 하나님을 선포하고 있지만 우리의 삶이 세상에서 얼마만큼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가를 보면 마치 세상 안에서 꿈을 이야기 하듯 그 선포가 허황된 것처럼 보인다. 세상이 돌아가는 여러가지 일들에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같고 작고 연약하고 힘없는 존재처럼 보인다. (27절)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이다. 나의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온 우주의 하나님이시고 온 우주의 하나님이 작고 연약한 나의 삶을 주관하신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전하는 말씀이 사람들이 보기에는 얼토당토 않아 보이는 그런 말씀일지라도 그 말씀을 온 세상을 향해서 전하고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내 삶에 이런 말씀이 이루어질까?' 라고 생각될 때가 있다. 하지만 만군의 하나님,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 작고 작은 내 삶도 경영하신다면 얼마나 더 정확, 세밀하고, 아름답고 놀랍게 내 삶을 이루어가실까? 라는 그 믿음으로 말씀을 따라서 살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인류의 역사를 경영하심은 심판으로 끝나지 않고 세상이 볼 때는 세상 권세에 무너져 망한 것 같아 보일지라도 겟세마네에서 예수님께서 심판의 잔인 것처럼 보이는 그 잔을 주님의 잔으로 받아 마심으로 구원의 잔으로 바꾸어주시고 영원한 생명의 잔으로 바꿔주심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셨다. 우리의 삶에도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그분이 우리의 삶을 경영하시도록 내어드릴 때 비록 현재는 분노인 것처럼 망한 것처럼 갈 바를 모르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 삶 안에서 그것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바뀌게 될 것임을 믿자. 22:24 합심기도
01:22 찬송가 393장 오 신실하신 주 05:10 말씀 봉독(예레미야 25:1-14) 08:08 말씀 선포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말씀 오늘 본문에 2가지 숫자가 나온다. (1) 23(3절) 예레미야가 활동한 햇수 (2) 70(11절) 회복의 때까지의 기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는 숫자. 1. 23(3절) 약속의 말씀을 한번도 쉬지않고 23년동안 예레미야를 통해 주신 하나님. 회개하고 돌아오면 받아줄 것이라는 말씀을 그 말씀을 계속해서 들었는데도 유다 백성들은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23년이라는 시간동안 끊임없이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그들이 들을 수 있도록 하셨다. 어느정도 듣지 않는다고 포기하지 않고 돌아온다면 받아주실 것이라는 말씀을 23년동안 오래참으심으로 말씀하셨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 우리가 1년이 넘고 10년이 넘도록 끊임없이 기도하는 대상이 있다. 친구, 자녀, 가족 등.. 얼마만큼 오랫동안 기도하고, 품고 받아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달려있다. 하나님께서 얼마만큼 사랑하시는가는 얼마만큼 참아주시고 말씀하셨는지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도바울이 깨달은 사랑의 내용을 보면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사랑에 대해서 가장 먼저 꺼낸 내용도 오래참음이다. 우리의 기도의 제목도 우리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처럼 오래참음으로 나타날 수 있게 해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참아주신만큼 우리도 자녀, 이웃, 친구를향해 오래참는 그런 하나님 백성들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2. 70 (11절)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심판의 햇수' 그 햇수가 차면 회복과 돌이키심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70년이 숫자가 차면 돌이키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다. 지금은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계획 안에는 정해진 기한이 있었다. 70이라는 숫자는 '완전'을 뜻하는 7에 '충만'을 뜻하는 10이 곱해진 숫자다. 완전히 충만한 하나님의 심판, 경책의 시간이 찼다는 뜻. 하나님께서는 오늘 11절 앞까지만 말씀하셔도 충분하셨다.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이 정당하다고 할 수 있는 그 백성들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 마음에는 이미 다시금 회복하시고 다시금 나라를 세우시는 약속의 시간이 담겨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 속에서 하나님앞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오래참으심과 신실하심이 있기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 같다. 때때로 기쁨의 소리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고 맷돌소리, 등불빛이 끊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여전히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23과 70이라는 숫자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성품, 우리에게 이런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자. 여전히 말씀하시고 여전히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절망과 끝이라고 인식되는 그 순간에도 70이라는 숫자를 품고 이스라엘을 바라보시듯 우리에게 하나님의 때를 준비하시고 그 때를 위하여 일하고계신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삶에도 그렇게 일하시는 분이다. 기나긴 시간동안 이루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가장 좋은 것으로 준비하시며 그분의 뜻과 계획을 가지고 이루어가시는, 오래 참으시고, 여전히 일하고 계시고, 가장 좋은 시간을 준비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며 우리도 그렇게 인내하며 감사하며 살아가자. 21:22 합심기도
00:14 찬양①(행복) 02:58 찬양②(슬픔 없는 가정 없으나) 08:55 합심기도 10:22 찬송가 292장 주 없이 살 수 없네 13:22 기도(이선규 장로) 16:16 말씀 봉독(로마서 8:12-17) 17:11 말씀 선포 <제목 : 죄와 은혜의 지배(37강)> 삐삐 처음 나왔을 때 대학생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다가 들고다니는 전화기가 나왔고 이후에 벽돌만한 전화기를 들고 다녔다. 그러다가 나온 것이 휴대전화. 처음에는 전화와 문자만 되다가 카메라의 기능이 좋아지고 인터넷이 되고 이걸로 이제는 물건도 사고 은행업무도 하는 등 다양한 업무가 가능해졌다. 로마서에서의 핵심도 이와 같다. 복음의 깊이와 이치를 알면 알 수록 마치 삐삐를 가지고 다니던 사람이 스마트폰의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 것처럼 너무나 큰 영적인 기쁨을 알게 된다고, 그래서 복음을 더 잘 알려주고자 한다는 것. (12절) 우리가 '빚진 자'로되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께 빚진 자들이다. 이 구원은 우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양만큼 빚을 졌다. 왜 그 빚을 주님이 스스로 져 가시면서 우리를 구원해주셨는가? 롬 8:1 '이제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 지배를 받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구원얻은 이후에 죄와 사망의 법이 아닌 그 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셔서 이제는 죄를 지어도 영원히 죽지 않는 그런 법에 따라 살아가게 되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생명의 성령의 법을 계속 따라서 그 법이 더 역사하고 더 많이 적용이 되면 우리에게서는 '거룩'이 드러난다. 하나님을 닮음. 거룩이 우리에게서 나타나게 된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이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 삼으신 모두에게 적용되는 원칙이자 목적이다. 거룩하게 되면 삐삐에서 스마트폰으로의 차원이 다른 많은 것들을 누리게 되는 것처럼 거룩하게 되면 하나님이 누리시는 지혜, 하나님이 누리시는 사랑, 기쁨, 안식, 평안을 우리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년에 한번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의 법궤 앞에 나아갈 때 제물의 피를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직접 제물이 되어주셔서 화목을 이루기 위해서 피 흘려주신 것이 바로 십자가의 죽으심이었다. 그것을 통해 주님이 이루시고 싶었던 것은 더 이상 우리에게 정죄함이 없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삶이었다.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생명의 성령의 법의 지배를 당함으로 그 안에서 거룩이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그 뜻에 자기 자신을 순종하고 자기자신을 굴복케 만드는(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를 매일 지고 자신의 죽음을 경험하고 주님 주시는 생명이 내 안에서 살아남을 경험하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참된 목적은 (1)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죄의 문제를 없애시고 (2) 우리와 화평케 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16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신다. 증언이라는 말은 단순히 우리를 도와주시고 보증해주시는 것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실제로 열매맺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전기가 들어오면 전기 제품들은 동작하게 된다. 성령이 우리에게 역사하면 우리 안에 생명이 나타나게 된다. 우리가 이세상에서 아무런 문제 없이 편하게 살아가는 것을 뛰어 넘어서 우리가 주님과 화목하며 주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아나가는 그것을 방해시키고 약화시키는 죄와 싸워가는, 피흘리기까지 싸워 나가다 보면 우리가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엄청난 것들을 우리 삶 속에서 경험하게 하심으로 '세상의 것들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고백을 진짜 할 수 있도록 우리 마음 속의 참된 기쁨을 회복시켜 주신다. 50:39 ⭐️여기부터 설교 하이라이트(기쁨's pick) 성경에 약속된 하나님 나라의 역사들이 내 삶에 나타나지 않는데도 내 삶이 평안한 것처럼 보인다면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성령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는 모습이 아니다. 성령이 내 삶에 증언하시면 갈등, 고민, 아픔이 일어나고 괴로울 수밖에 없다. 그럴 때 기도하면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주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이것 때문에 하나님과 화평하지 못함으로 인해 울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내 삶에 문제가 없다고 하며 안주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평안이다. 삶의 평안이 아니라 영혼의 평안을 주님은 약속하셨다. (17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이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인답게, 그리스도로 구원받아 그리스도께 빚진자답게 살아가려고 하다보니까 안되는 그것 때문에 자기 마음의 고통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그 모습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53:19 합심기도 59:44 주기도문
01:21 찬송가 400장 험한 시험 물속에서 04:11 말씀 봉독 (예레미야 24:1-10) 06:32 말씀 선포 예레미야부터 시작해서 그 이후의 선지자들에게 하나님께서 환상을 통해 보여주신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부르실 때도 살구나무가지 환상을 통해 부르셨다.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성전 앞에 놓인 무화과 두 광주리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전 앞에 무화과 두 광주리가 놓인 것.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3번 침공한다. (1) 609년 (다니엘이 (2) 619년 (여호야김과 기술자들 포로로) (3) 이스라엘에 남아있던 백성들의 생각: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은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서 그들의 죄악에 대한 대가를 받은 것이고 우리는 예루살렘에 남아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남은자들이다.' 하나님의 보호, 인도, 평안이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광주리① : 처음 익은 극히 좋은 무화과 광주리② : 먹을 수 없는 극히 나쁜 무화과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열매 = 포도나무, 무화과 '입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었던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 → 성전 앞에 놓인 무화과는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 "오히려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 좋은 무화과이고 남아있는 백성들은 극히 나쁜 무화과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반적인 생각을 다 깨뜨리셨다. (1)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이 좋은 무화과라는 것 그렇다면 포로로 잡혀간 그들이 왜 좋은 무화과이냐? 그들에게 어떤 좋은 조건도, 공로도 없었던 이들이 바로 포로로 잡혀간 이들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바라보시기 때문에 좋은 무화과인 것이다. 악한 자들이지만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가운데 그들을 선한 백성으로 바라봐주시기로 결정하셨고 그들 안에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을 부어주셔서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역사를 베풀어 주실거라고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2) 남아있는 백성들이 나쁜 무화과라는 것 이스라엘에 남아있던 백성들은 자신들이 포로로 잡혀가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어떤 좋은 공로가 있고 조건이 있어서 그 땅에 남아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비록 예루살렘에 남아있다 할지라도 그들이 오히려 악한 자들이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나쁜 무화과라는 것.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연했던 생각 '그럼 우리 안에는 소망이 없는 것인가? 절망, 심판, 멸망만 남아있는 것인가?'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하심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으로 붙드실 것이라는 약속을 통해 그들에게 소망이 있음을 보여주고 계신다. 1. 눈에 보이는 것이 좋고 나쁨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예루살렘에 남아있으니까 좋은열매가 아니었던 것처럼 우리 눈에 보이는 좋은 조건들이 하나님 보시기엔 좋은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더 좋은 직장, 더 좋은 것을 가지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하는 실수를 범해선 안될 것이다. 세상의 기준, 잘못된 기준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 오늘 예루살렘에 남은 사람들처럼 착각할 수 있다. 2. 은혜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한다. 우리에게 어떤 좋은 조건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좋은 무화과가 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우리를 좋은 무화과로 여겨주시고 지금도 인도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신 백성으로 만들어가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설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주님의 눈으로, 주님의 말씀의 시선으로 우리와 세상을 바라보고 은혜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살아가자 20:07 합심기도
@@대덕교회공동체 아침마다 새벽예배 드릴 수 있게 귀한 영상 올려주시니 제가 더 감사합니다~🥰 그런데 월요일은 왜 영상이 안 올라올까요?😭😭 올해 1월부터 시작하신 오후예배(성경이 읽어집니다) 영상도 정주행 중인데 너무 너무 도움받고 있습니다! 목사님 폐가 안된다면 앞으로 예배 후 요약 댓글을 지속적으로 달겠습니다~❤️
28:36 리 스트로벨의 'The case for' 시리즈 중 '특종! 믿음 사건(The case for Faith)' 라는 책의 내용을 인용해주셨네요! 미국의 강신균 목사님도 해당 내용을 말씀해주시면서 해당 책 시리즈를 꼭 읽어보라고 추천해주셨습니다ㅎㅎ 보다가 반가운 내용이 있어서 몇 자 남겨봅니다!
00:41 찬송가 569장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 04:08 말씀봉독 예레미야 23:23-40 (읽기는 32절까지) 06:10 말씀 선포 역사 속에서 어떤 나라가 무너지는 데는 지도자들의 타락이 치명적인 원인이었다. 종교 지도자들의 타락 : 유다 멸망에 직접적인 원인 (25절)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전한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의 간교한 것(속이는 것)을 예언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말씀을 받은 백성들은 그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하나님께로부터 점차 멀어져 갔다. 그들은 백성들이 듣기 좋은 말을 만들어냈다. 백성들이 듣기 좋아하는 평안, 백성들이 듣기 좋아하는 복을 이야기했다. 백성들조차도 자신들이 듣고자하는 것만 들었던 것. (30절) '서로 내 말을 도둑질하고 있다' 마땅히 백성들에게 전해져야 하는 말씀을 전하지 않고 그것을 가로채 그 말씀이 백성의 귀에 들리지 않게하고 거짓 말씀을 만들어내서 전했기 때문에. <그럼 선지자들은 언제 거짓 말씀을 전할 수 있었나?> 1. 천지에 충만하신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인식하지 못할 때(23절) 거짓된 선지자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했냐면 이스라엘이라는 좁은 땅만 통치하시는 분이지, 강대국인 앗수르, 애굽, 바벨론까지는 통치하시지 않는다고 여겨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경외심이 없었다. [로마서의 사도바울이 지적하는 죄의 근본적인 공통점] =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섬기지 않는 (경외하지 않는)데서 죄가 시작된다! '하나님을 안다'라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런 모습이 나타남을 보게 된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이 무너질 때, 거기서 죄가 출발한다. 2. 하나님 말씀의 참된 능력을 경험하지 못할때(29절) 거짓된 선지자들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면 말씀은 마음을 뜨겁게 만드는 불같은 말씀이었을테고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은 권세가 있는 말씀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전하는 말은 백성을 거짓된 길로 이끄는 마치 겨와같이 바람이 불면 쉽게 날아가버리는 그 안에 생명도, 권세도, 능력도 없는 말씀이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매 순간 순간마다 천지에 충만하시고 온 우주만물을 붙드시는 주님에 대한 경외함과 참된 섬김의 마음이 줄어들면, 듣고싶은 것만 듣고 우리에게 불리하다 싶으면 마음을 닫는 불의한 선택만 하다보면 우리 또한 말씀의 도둑들이 될 수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우리가 선택적으로 어떤 것은 받고, 어떤 것은 받지 않고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듣기 좋은 말씀이든 듣기 좋지 않은 말씀이든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 말씀으로 우리를 채우고 겸손과 순종으로 그 말씀을 따름으로 하나님이 이끄시는 길을 가자 22:32 합심기도
00:00 미국 Vision Trip 선교보고(황영근 전도사) 04:17 찬양 (내 구주 예수님) 06:48 예배기원 07:53 신앙고백(사도신경) 08:43 입례 찬송(찬송가 43장 즐겁게 안식할 날) 11:25 기도 (김상오 집사) 16:50 성경 봉독(빌립보서 3:1-3) 17:28 말씀 선포 (제목: 기쁨이라는 안전장치) 우리 삶에 찾아오는 위기나 뜻밖의 사고에 대비하기 위해 안전장치로 대비해놓는 것이 있다. (Ex. 자동차보험, 생명보험, 안전벨트 등) 목사님이 아이들과 목포 가셔서 해상 케이블카를 도전하셨는데 신기하게도 하나도 무섭지가 않았다. (원래 고소공포증이 있다고 하심) → 안전이 보장되면 즐길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의 전반에 위기와 사고가 올 때 우리는 어떻게 이것들을 이겨낼 수 있을까?"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어떤 안전장치를 주셨을까? 빌 3:1)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빌립보 교회에 있었던 문제> = 다툼의 문제, 잘못된 가르침의 문제 해결책은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다. 그냥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 (= 주님만을, 주님 때문에만 기뻐하는 것) '최고의 기쁨은 주님이십니다. 주님께만 있습니다.' 라는 고백과 같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신 것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 자체에 기쁨을 둘 때에만 우리의 기쁨이 사라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셨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시고 장차 약속하신 것들을 이루실 분임을 확신하면 주님 안에서, 주님으로 기뻐할 수 있다. 내가 가진 내 육체의 그 어떤 것으로도 신뢰를 두지 않고 그것을 나의 안전장치로 두지 않고 주 안에 있는 것,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이시고 만물을 창조하신 그분이 지금도 나를 붙드시고 계신 그것 외에는 내게 참된 기쁨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그 삶에는 온전한 안전장치가 되어 있다. 육체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는 자랑될 게 없고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는 신뢰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감옥에 갇혀있는 사도바울이 하는 고백이다. 이는 차원이 다른 안전장치이다. 우리 삶의 참된 안전장치는 '기쁨'이다. 우리가 주님만을 자랑하는 것이다. 사랑의교회 故 옥한흠 목사님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같은 자를 들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신 그것 자체가 내게 가장 큰 행복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여러분 주 안에서 기쁨을 누려야 됩니다, 주 안에서 기쁨을 누리면 좋습니다, 주 안에서 기쁨을 좀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는 주 안에서 기뻐'하라'라고 명령했다. 안 되면 되게 하라는 것이다. 주님 안에서, 주님으로만 기뻐하는 것 외에는 우리 신앙의 안전장치가 없다. 이 참된 안전장치를 우리 삶에 온전히 덧대어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살아가자. 52:17 헌상 및 기도 57:44 찬송 (찬송가 411장 아 내 맘 속에) 1:01:04 교회 소식 1:02:32 교제의 인사 1:03:11 축도 (신재웅 목사)
1:29 찬송가 350장 우리들의 싸울 것은 4:42 말씀 봉독 (예레미야 22:10-19) 6:39 설교 시작 "왕은 하늘이 내린다" 왕의 자리는 자신의 뜻을 이루는 자리가 아님을 인식하고 한 말. 유다의 두 왕 살룸(여호아하스), 여호야김(엘리야김)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워주셨다는 생각과는 반대로 행했다. 나라를 망하게만든 두 왕, 살룸은 3개월간 통치했고 여호야김은 몇년간 통치 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 이 두 왕은 굉장히 선한 왕이었던 요시야의 두 아들이다. 자신들의 아버지가 걷던 길을 걷기만 해도 비록 망해가는 나라였지만 하나님께서 형통케해주심을 입었을 것이다. "그가 나를 앎이 아니냐" = 요시야가 형통할 수 있었던 비결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의지했기 때문 먹고, 마시고 하는 일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나님께서 형통케 해주셨음 그러나 그의 아들들에 이르러서는 불의와 부정과 착취하는 왕들이 됨 자기자신의 힘으로 자신들의 자리를 통해서 자신들의 형통을 만들어내려고 함. "요시야의 죽음을 슬퍼하지 마라" 오히려 살룸왕 때문에 슬퍼하라 오히려 여호야김 때문에 슬퍼하라 그들은 포로로 잡혀가서 다시는 고국땅을 밟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어 묻히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저주스러운 죽음을 맞을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죽은 아비 요시야왕보다 살룸을 부러웠을수도 있다. 현재 왕의 자리에서 통치하고 있던 여호야김이 더 부러웠을 수도 있다. 눈에 보이는 영광, 찬란함을 보며 죽은 아비보다 낫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 보여주신다. 그들이 현재 누리는 부, 지위, 권세, 위세는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오히려 심판의 대상, 통곡의 대상임을 말씀하신다. 그들은 자신들이 왕의 자리에 있을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삶을 살았다.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공의를 그 아버지 요시야왕이 오랜 기간동안 세웠는데 그 아들인 살룸이 3개월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그것들을 처참하게 무너뜨리는 삶을 살아갔다. 여호야김도 마찬가지로 바벨론에 의해서 왕의 자리에서 내쫓겨나고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 1. (본문 16절)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면, 하나님 아는 지식이 있다면 그 지식은 반드시 삶에서 열매맺게 되어있다. 내 소유를 통해서 다른 이들을 형통케하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모습이다. 2. (본문 19절) 우리는 과연 어떤 끝을 맞이하게 될 것인가? 요시야왕은 오랜기간 돌이키고 노력하고 회복하고 개혁하는 일을 만들어갔다. 우리가 쌓아가는 공든 탑을 순식간에 무너뜨릴 수 있는 게 바로 악과 죄다. 악과 죄는 하나님이 주신 형통을 단번에 무너뜨릴 수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이들에게 세상이 주는 형통이 굉장히 좋아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형통케하기 위해 주시는 신앙적인 것들은 돼지 목에 걸린 진주처럼 쓸데없는 것들로 보일 수 있다. 그들 스스로가 그것을 망가뜨리고, 결국엔 비참한 말로를 맞이한다. 백향목으로 왕궁을 꾸민다고 해서 참된 왕이 아니다. 우리 삶에 세상의 좋은 것들을 채운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형통케하는 삶이 아니다. 요시야왕처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바르게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형통케하시는 삶이다. 내 삶에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들이 열매로 드러나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세상의 가치있는 것들로 채워가기 시작하면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무의미하게 만들어가실 것이다. 우리는 진정으로 살룸과 여호야김같은 삶이 아니라 요시야처럼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하나님께서 형통케하시고 하나님께서 가치있다고 여겨주시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내 죄와 싸우고 참된 형통인 '말씀'과 '주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삶의 열매가 우리에게 드러나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23:27 합심기도
감사합니다.. 아멘
수고하셨습니다
고난을 통해 하늘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
아멘!
00:29 찬송가 33 영광스런 주를 보라 03:43 말씀 봉독 (왕상 6:14-38) 05:30 말씀 선포 솔로몬의 삶의 특징적인 것은 자신의 왕궁보다 성전을 먼저 건축했다는 것이다. 하나님 중심의 삶, 신앙이 먼저 드러났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라는 자신이 했던 말을 잘 실천하고 이루었던 참된 신앙 고백이 솔로몬의 성전 건축에서 잘 보여지고 있다. 7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솔로몬이 다른 어떤 것들에 눈 돌리지 않고 성전을 건축하는 데 열심을 냈다는 것에서 솔로몬의 신앙이 보여진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신 후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율법을 주시고 율법 중심으로 살아가야 됨을 말씀하셨다. 더불어 하나님께서 주신 설계와 모양대로 이 성전을 지으라고 명령하신 것을 주목하자. 하나님께서 모양, 규격, 재료를 보여주셨고 말씀에 순종하여 그 모양 그대로 지어야 했다. 율법을 지키는 것과 같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굳이 이렇게 세세하게 기록할 필요가 있나?' 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는 말씀이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특별한 의미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하나하나 세세하게 그 안에 있는 영적인 의미들을 다 알 수는 없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하나님 앞에 갔을 때 다 이해하게 되는 것처럼 지금은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아무 의미 없이 그냥 그렇게 지으라고 하신 것은 아니다. 규격과 모양 안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시기 위한 목적이 담겨 있다. 하나님 백성들과의 교제, 그들을 통해 받으시는 예배, 약속하신 거룩함의 결과물인 복을 주시고자 함이다. 성전은 단순히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의 의미보다는 성전 안에 온 우주가 모형적으로 담겨 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피조물과 어떻게 함께하시는지 원리가 성전 안에 담겨 있다. 원래는 하나님께서 우주를 다스리시는 통치의 원리를 에덴 동산 안에 담겨 두셨다. 에덴 동산 안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피조물들과 어떻게 함께하시고 통치하시는지가 담겨져 있었다. 죄로 인해서 에덴 동산이 파괴되자 임시적인 집으로 만드신 건축물이 성막과 성전이다. 나중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면서 그 안에 참된 완성될 성전이 나타나게 된다. 완성될 성전의 모형적인 모습이 오늘 본문의 솔로몬의 성전 안에 담겨있다. 안에 있는 모양들과 재료들을 보면 금, 백향목 등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재료들로 만들어져 있다. 처음엔 '하나님과 어울리지 않는다' 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율법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보면 거룩하고 엄위로우신 분이기도 하지만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 약자의 하나님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 성전의 모습을 보면 '너무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의 성전은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의 모형이라고 한다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더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좋은 것이 아닐까? 더 화려하고 찬란하고 아름다울수록 우리에게 더 큰 소망을 주는 것 같다. 아브라함, 모세 등 믿음의 선진들은 이 성전을 바라보며 믿음을 지켰다고 한다. 그곳이 너무나 아름답고, 완전하고, 거룩하고, 엄위스럽고, 찬란했기 때문에 그것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의 어려움을 이겨낼 만큼 찬란하고 아름다웠기에 믿음의 길을 걸어갔다고 한다. 금, 백향목 등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재료로 성전을 만들었는데, 이는 허례 허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실 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기쁨, 평안이 얼마나 찬란하고 좋은 것인지가 이 안에 담겨 있다. 솔로몬은 가장 완벽한 구조와 가장 완벽한 재료 가장 영광스러운 재료로 오늘의 성전을 만들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영광스러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백성들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거룩해야 하고 완전해야 하고 얼마나 정결해야 하는지를 성전 자체를 보며 알 수 있었다. 또 성소 자체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이 되어주신,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희생제물을 가지고 나아가야 했다. 이 지상 성전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가치가 더 많이 드러나게 된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이 길을 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희생이 얼마나 값지고 놀라운 것인지를 묵상할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집이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 아름다우심, 찬란하심, 거룩하심, 엄위로우심을 드러내기를 원하신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신앙 안에서 가장 귀한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가 우리 안에 끊임없이 이루어짐을 통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임이 우리에게 드러나고 그 영적 교제의 결과물인 거룩과 정결이 우리를 통해 세상에 드러나야 한다. 22:21 합심기도
01:25 찬송가 208장 내 주의 나라와 03:41 말씀 봉독 (왕상 6:1-13) 06:40 말씀 선포 오늘 말씀을 통해서 솔로몬의 성전 건축 과정 가운데 주목해 볼만한 부분이 있다. (1절)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이요" 그냥 '솔로몬이 다스린지 4년 2월'이 아니라 성전이 지어지는 날짜의 그 기준점을 출애굽 사건에 두고 있다. '출애굽이 이루어진지 480년'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오늘 말씀에 특별히 강조되는 숫자는 4. 4는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 12는 이스라엘을 상징(12지파) 10은 '완벽하게 찼다'를 의미 4x12x10 = 480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하게 하신 그 뜻이 채워졌다는 의미. 솔로몬의 성전은 하나님의 구원의 큰 그림 안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일들이 이 때에 이루어짐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거하는 하나님의 집, 성전 건축이 완성됨으로 출애굽이 완성되었음을 말씀하신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통해서 무엇을 원하셨을까?"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출애굽을 이스라엘의 구원의 사건으로 본다면 우리도 십자가 사건으로 구원하셨는데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날까지 하나님께서 완성하고 싶으신 것은 무엇일까? 성전 건축과 비교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출애굽할 때 하나님께서 애굽의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놓으라고 하실 때 "하나님께 제사 지내기 위해" 내어놓으라고 말씀하신다. 출애굽의 목적을 처음 말씀하신 그 때에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기 위해서' 이 백성들을 내어놓으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것은 그들이 불쌍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큰 그림 안에서 출애굽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으로 만드시기 위함이셨다. (사 43:21) "이 백성은 나를 찬송하기 위해서 만들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하게 해주신 것은 그들을 통해 예배 받으시고 섬김받기 위함이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하게 하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시면서 그들의 예배를 받으시고자 하셨던 것임을 오늘 본문의 성전을 통해 말씀해주신다. 하나님이 정말 받으시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시는 것이다. 제사와 예식을 통해서 예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하시는 것임을 말씀하신다. (11절) 네가 만일 내 법도를 따르며 내 율례를 행하며 내 모든 계명을 지켜 그대로 행하면 내가 네 아버지 다윗에게 한 말을 네게 확실히 이를 것이요 하나님께서는 성전 건축 그 자체에 목적을 두신 것이 아니다. 외형적인 것으로만 그치지 않고 성전 안에서 하나님의 법도를 따르며 율례를 행하며 모든 계명을 지켜서 그대로 행하는 것을 원하셨다. 신약의 표현으로 말하면 '삶의 예배'인 것이다. 어마어마하고 화려하게 지어진 성전은 하나님께서 거하시고 함께하시기 위해 지어진 집이었다. 이 성전은 솔로몬이 지은 것이긴 하지만 성전의 모든 설계는 하나님께서 주셨다. 식양과 모양과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지은 것이다. 성전 안에서는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들이 일어나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계획이 이루어져야 한다. (1) 성전이 완성은 출애굽 후 480년이 지나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거의 500년이 흐른 뒤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다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다. 비록 우리가 원하는 시간과는 다른 시간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은 분명히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때와 방식대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원하는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2) 화려한 성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성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참된 예배가 더 중요함을 말씀하신다. 성전이라는 외형적이고, 형식적인 것보다 때로는 율법적으로 빠질수도 있는 것보다 그 성전 안에서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그대로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고 그래야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음을 말씀해주신다. 우리 마음속에 늘 지켜야되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삶의 예배'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우리에게서 나타나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고 나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참된 예배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임을 기억하자. 형식에 빠져 우리의 진심이 약해지지 않을 수 있도록 늘 우리의 마음을 지키며 주님 안에서 참된 예배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22:38 합심기도 오늘은 특별히 제게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항상 제게 하시는 말씀으로 듣지만 오늘은 특별히 더더욱..)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흐려지고 의심되고.. 그래서 ‘안 계신가보다’하고 또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려고 할 때, 그렇지 않다고, 주님 시간은 제 시간과 다르다고 주님 방법은 제 방법과 다르다고 반드시 이루어지니 참고 기다리며 지금의 자리를 지키고 다시금 삶의 예배자로 서라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네요.. 아침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마음을 주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십니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는 주님이십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돌이키게 하시는 은혜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00:46 찬송가 321장 날 대속하신 예수께 03:50 말씀 봉독 (왕상 5:1-18) 05:40 말씀 선포 성전건축을 준비하는 솔로몬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성전 건축을 막으셨다. 그 당시에는 전쟁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4절) "이제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게 태평을 주시매" 솔로몬은 여기서 하나님을 아버지의 하나님이 아니라 조상의 하나님이 아니라 '내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우리에게도 중요한 고백은 성경 속의 하나님, 이전 세대의 하나님이 아니라 여기, 지금 나와 함께하시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이다.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지 못한 2가지 이유> (1) 다윗의 시대에는 화평이 없었다. - 주변국들과의 전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2) 다윗이 피를 너무 많이 흘렸기 때문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사명을 맡기실 때 그 사람이 살아가는 환경과 시대에 알맞은 사명을 주심을 볼 수 있다. 다윗에게는 그 시대에 맞는 사명을, 솔로몬에게는 그 시대에 맞는 사명을 주셨다. 솔로몬 = 평강, 안식, 화평(샬롬)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두시기로 한 성전을 화평의 시대에 만드신다. (1)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여기 이 시대에 세워주시고 살게 하셨는가? 왜 우리를 이러한 형편과 환경 가운데 살아가게 하시는가? 늘 분별하며 기도하며 묻고, 되묻고, 순종해야하는 기도의 제목은 "하나님 왜 우리를 여기 이 시대에 세워주시고 살게 하십니까?"라는 물음이다. 우리의 시대, 환경안에서 우리가 해야하는 일이 있음을 본문 말씀을 통해 보여주신다. (2) 평화, 안식, 화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주변국에 화평을 이루신 다음에 성전을 건축하게 하신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은혜를 누리게 하신 다음에 일을 이루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결과가 화평인데 그것이 온전히 이루어진 상태에서 성전을 건축하게 하셨다. 우리는 성령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장소, 시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증거가 바로 화평, 평화, 안식이다.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화평하라" 하나님은 그분과의 올바른 관계 안에서 참된 평강과 안식을 누리는 자들을 통해서 시대의 화평, 이웃과의 화평을 누림으로써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통치를 드러내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만 있지 아니하고 의와 평강과 희락에 있다. 18:47 합심기도
00:42 찬송가 450장 내 평생 소원 이것 뿐 02:55 말씀봉독 (왕상 2:26-35) 05:43 말씀선포 열왕기상은 왕들의 이야기이다. 어떤 왕이 하나님 앞에서 선한 왕인지, 하나님 나라의 왕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성경이다. <오늘 본문에 나온 두 사람의 종말> (1) 제사장 아비아달 - 추방, 폐위 (2) 군사령관 요압 - 사형 솔로몬이 제사장 아비아달을 아도니야를 도왔다는 이유로 제사장 직분에서 쫓아내고 있다. 아비아달은 다윗 가문과 아주 밀접한 사람이다. 2가지의 결정적인 일이 있었다. 아비아달은 다윗의 신앙의 동역자였고 다윗이 여기까지 오기까지 늘 함께했다. (1) 오벧에돔에 있던 여호와의 궤를 다윗 성으로 메어올 때 그것을 메어온 사람중에 한 명이었다. →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참된 신앙의 길을 걸어가려고 할 때 함께 했던 사람이었다. (2)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서 도망할 때 제사장 아비아달의 아버지였던 아히멜렉이 있는 곳으로 피신했었다. 그 때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던 진설병을 다윗과 그의 무리들에게 주어서 먹게 했던 그 집안이 바로 아비아달의 집안이었다. 아비아달은 다윗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운명을 같이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비아달은 마지막 순간에 그가 가졌던 것을 잃어버렸다. 진실함, 변함없는 충성, 신실함을 그의 노년에 저버리는 모습이 나온다. 제사장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임을 아도니야의 반역에 동참함으로써 스스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왕, 제사장, 왕의 신하 등 다양한 사람이 있을 것인데 언약의 신실함, 성실하고 충성스러움, 변함없는 사랑.. 그것을 기준으로 하나님 백성다울 수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오늘 본문은 보여주고 있다. 솔로몬은 아비아달을 파면하여 아나돗으로 보낸다. 그는 제사장 아비아달을 죽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오늘 솔로몬을 세우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자를 내 마음대로 처형할 수 없다"라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원리원칙을 철저히 지켜 행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자기 충동이나 화를 이기지 못함으로써 일을 행하는 자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27절) 솔로몬이 어떻게든지 말씀 안에서 자신의 마음을 지키며 일을 행할 때, 그 일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인 것처럼 하나님의 뜻이 이 일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 일을 성취하시는 것처럼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굳건하게 서서 그분의 신실하심과 성실하심을 따라서 충성스럽게 이 일을 감당할 때 때때로 우리가 뭔가를 하는 것 같고 우리가 의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이루시고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심을 솔로몬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29절) 하나님의 법에, 제단 뿔을 잡으면 처형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너는 가서 그를 치라" 그러나 요압을 처단하는 일에 솔로몬은 머뭇거리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해도 되는거야?' 하는 의문이 들기까지 한다. 그러나 출애굽기 21장에 보면 만일 고의로 동족을 살해하는 이가 있다면 그가 제단의 뿔을 붙잡고 호소할지라도 그를 끌어내어 죽이라는 명령이 있다. 지금 솔로몬은 분노나 복수심에 따라 이와 같이 한 것이 아니라 말씀에 입각해서 그렇게 행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우리가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말씀에 따라 행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는 역사들이 우리 삶에 일어난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 이 모든 것을 더해주시겠다는 약속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서 결정하면 겉으로는 우리를 위해서 하는 결정인 것 같고 우리의 지혜로 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 주시는 하나님 나라의 법칙이 오늘 열왕기상 말씀에 담겨져 있다. 우리도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 앞에 신실함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데 쓰임받는 일꾼들로 세워져 가기를.. 23:11 합심기도 (❤오늘 합심기도 때 목사님 기도가 너무 좋았다❤)
01:08 찬송가 488장 이 몸의 소망 무언가 03:36 말씀봉독 (열왕기상 1:1-10) 06:00 말씀선포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 하늘 아래 영원한 것은 없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영원할 것 같았던 다윗의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 영원할 것 같았던 다윗의 왕위, 능력, 출중함도 무기력해가는 모습이 나온다. 오늘 열왕기상의 주제는 '다윗의 죽음 이후 이들이 어떻게 되어가는가?' 사사기의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에 "저들에게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라는 내용의 흐름과 연결이 된다. (1) 다윗왕의 신하였던 사람들 연로한 왕을 위해 젊은 여성을 몸종 or 후궁으로 넣어 보낸다. 그 당시의 하나의 문화였기에 언뜻 보면 별일 아닌 것처럼 보이고 왕을 위해 하는 일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이 일 때문에 아도니야가 죽임을 당하는 원인제공이 된다. 자신들은 옳다고 생각하고 누군가를 위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일이라면 그 끝이 어떻게 되는가? 다윗과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점이 보인다. 다윗과 왕의 신하들, 다윗과 아도니야의 차이점이 드러난다. 바로 자기 뜻대로 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 무엇이든지 스스로 하려고 하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 신실함을 볼 수 있다. (2) 아도니야라는 왕자 압살롬 다음에 태어난 4번째 아들이다. 압살롬, 아도니야.. 용모가 심히 출중한 자. 겉으로 보기에는 충분히 왕이 될만한 사람처럼 보이나 그렇지 않았다. (5절) 왕위를 누구에게 물려주어야 하는지 아직 정해지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 이것을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지를 겸손히 기다려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당연히 자기가 왕이 되어야만 하는 것처럼 아도니야는 스스로를 높이고 있다. 아도니야의 현실을 보면 자기가 왕위를 이어 받을만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모습을 보면 아무리 용모가 뛰어나고 아무리 왕이 될만한 자질이 있을지라도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신 하나님이심을 잊고 스스로를 높인 것이다. (3) 스루야의 아들 요압 (=다윗의 최측근, 전우) 다윗이 늙은 것처럼 스루야의 아들 요압도 자기가 가진 권력을 내려놓아야 할 때였다. 그러나 요압의 마음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왕을 새로 세워서 자신이 개국공신이 되면 이 권세를 더 누리리라고 꿈꿨던 것이다. (4) 제사장 아비아달 (=밧세바의 할아버지로 추측) 다윗을 싫어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다. 그 당시 대제사장 가문(사독 가문)과 경쟁 중, 다음 대제사장 가문이 누가 될 것인가? 라는 물음 앞에서 아도니야가 왕이 되면 자신이 대제사장이 될 거라고 꿈꿨다. 결국 자신의 탐욕, 욕심, 욕망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사람을 반역하고 자기자신을 높이려고 하는 열왕기상의 모든 왕들의 처음 시작 부분에 나타나고 있다. 앞으로 시작될 열왕기상의 오늘 본문 말씀을 잘 지켜보면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가 보이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어떤 것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것이 우리 안에 있을 때 그분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뜻, 계획, 소망,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있지 않을 때 하나님 앞에 옳은 것이 될 수 없음을 기억하자.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다면 온 우주 만물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이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의 작은 인생 하나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분의 뜻에 맞게 이끌어가실 수 있는 분이심을 기억하자. 스스로 높이는 삶이 아닌 마음을 낮추며 겸손하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아가자. 23:33 합심기도
00:25 찬송가 419장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03:24 말씀 봉독(시편 94:1-23) 06:17 말씀 선포 "하나님은 도대체 뭐 하시고 계시는가?" 어지럽고 불의한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질문이 찾아온다. 하나님께서 계시기나 하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라는 질문이 생겨날 때가 있다. 때로는 다 대답할 수 없는 일들도 있다. 왜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잘되는 것을 놔두시고 술수, 음모, 불법을 일삼는 권세자들을 허용하시는가? 불의한 세상의 시작은 법의 왜곡, 법이 집행되는 장소에서부터 불법과 불의가 성행하게 되면 거기서부터 악한 세상이 시작된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다. 이 시편기자가 마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17-18절) 과거에도 현재도 동일하게 세상은 불법과 불의가 성행하는 듯하나 하나님은 나를 도우시고 내가 미끄러지지 않게 붙드시고 주의 위안이 나를 즐겁게 한다고 고백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7절) 사람들이 악을 행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보지 못하신다. 하나님은 관심도 없으시다'라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함, 두려움이 없이 때문이다. (11절) 인간의 생각은 허무하다. 자신들이 득세할 때는 모든것이 자신들의 뜻대로 되는 것 같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헛된 것이다. 하나님은 정의롭고 공의로우시고 그의 백성을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 약한자들의 하나님이시다. 이전에 자신도 악한 자들의 득세와 득의 때문에 마음이 상하고 미끄러질 뻔 했지만 자신이 믿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 안에서 올바로 살아갈 수 있음을 믿음으로 하는 고백이 시편 94편이다. 어떤것이 참된 복이냐? (12절) 세상의 복과 믿는 자의 복은 다르다. "하나님께서 이런 악한 세상을 분명히 가만두지 않으신다. 분명히 심판하시고 바로잡아주시고 회복하실 것이다." 악한 세상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보복과 복수를 외치고 있지만 그럼에도 환난날에 도움이 되시고 자신을 평안하게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통해 이겨나가고 기다릴 수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내가 겪는 모든 일들을 이미 다 아신다. 주님이 이 모든 일들을 해결해주실 수 있고 해결해주실 것이다. 하나님께만 온전히 피할 수 있음을, 하나님 안에서만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음을 고백하며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가자. 20:00 합심기도
00:47 찬송가 356장 주 예수 이름 소리 높여 03:49 기도(강춘규 권사) 05:16 말씀 봉독(시 51:1-5) 06:28 말씀 선포 시편 51편은 다윗이 밧세바와의 간음 사건을 일으킨 후 위선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던 중 나단 선지자로부터 책망을 듣고나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이다. (3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비로소 다윗이 자기 앞에 항상 자기를 넘어뜨리려고 기다리고 있는 죄를 보게 되었다. (5절) "내 존재의 본질은 죄 덩어리다" 인간 자체가 죄 안에서 태어나고 죄의 본성이 이 안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다윗이 깨닫게 되었다. <죄와 싸우는 사람이 얻는 은혜> (1) 그 영혼이 소성함을 입게 된다. (2) 성령의 도우심을 즉각적으로 받는다. (3)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다. - 죄의 삯은 사망이다. - 죽음이 주는 질병과 고통은 여전하지만 내게 찾아오는 죄의 유혹과 시험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겨나간다면 죄의 삯이 사망이 아니라 의의 삯인 영생이 내게로 옴을 겪어나가는 은혜가 있다. (히 12: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히브리서를 받은 사람들은 어떤 처지였나?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고향과 집에서 쫓겨나 타지와 동굴에서 나그네처럼 돌아다니며 고통 당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영적으로 피곤한 사람들' '내가 이렇게 믿음대로 사는 것이, 이 믿음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을까?' 마음의 흔들림, 피곤함이 찾아온 이들이었다. 피곤하여 낙심할 위험이 보이는 이들에게 '너희가 아직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워본 적이 없기 때문이야' 라고 말하는 것이다. '너무 냉정하고 몰아붙이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드는 말씀이다. 믿음 때문에 집을 빼앗기고 감옥에 갇히는 순교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죄로 인한 마음의 피곤함과 낙심이 찾아올 수 있다. "마음 가운데 찾아온 피곤함과 낙심은 여러분이 아직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죄에 대한 사랑과 미련이 여전히 남아있다면 세상의 낙과 즐거움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다면 죄와 싸울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을 누리지 못함에 대한 실망이 여러분의 마음을 실망하게 하고 낙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조차도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우리에게 영원하게 주어질 하늘의 도성이 우리에게 영원히 주어졌는데 왜 이 세상이 주는 낙과 죄의 즐거움에 마음을 두려고 하느냐?" 믿음의 선배들은 설교한다는 이유만으로 16년, 20년 그렇게 감옥에 갇히고 그랬다. 조금은 보상 받고 싶거나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었을 텐데 지금의 삶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룩과 신앙을 지키는 삶을 살아갔다. 자신들의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영적인 눈이 훨씬 더 많이 열려있었던 것이다. <죄와 싸우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5가지 표지> 1. 죄에 대한 정직한 인식을 소유함 → 죄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자 함. → 알아야 고칠 수 있고 싸울 수 있다. → 죄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한다. → (롬7:21-23)성령의 법 ↔ 죄의 법 2. 효과적인 죄 죽임의 방법을 갈망함 → (롬8:13) 성령의 도우심을 받는 것 → 죄를 이기는 방법은 지식이 아닌 지혜 → 1903년 원산, 25살의 나이에 캐나다에서 이 땅에 와서 사역한 하디 선교사님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고 그 회개의 물결이 이어져서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길선주 장로님의 회개와 평양 대부흥으로 이어졌다. 3. 죄의 힘보다 은혜의 능력을 믿음 4. 자신의 결단보다 성령을 의지함 5. 고민보다 기도를 많이 함 → '제 결단과 의지 가지고는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합니다.' 그 기도 가운데 자기 죄악을 깨닫게 된다. <죄와의 싸움에서 옳은 판단력을 유지하기 위해> 1)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2) 항상 연구해야 합니다. → 말씀 읽을 때 어떤 구절에 많이 표시하는가? → 죄와 싸우는 것이 무엇인지와 관련된 그런 말씀들을 많이 찾아보자. 3)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 즉각적인 응답을 받는 경험이 우리의 영혼을 깨어있게 한다. 4) 항상 순종해야 합니다. → 성령님께선 우리의 순종을 통하여 일하신다. 47:03 합심기도 52:43 주기도문
00:30 찬송가 400장 험한 시험 물속에서 03:05 시편 93:1-5 04:30 말씀 선포 '지도자가 중요하다' 시편 93~100편 :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 어떤 대통령, 왕이 있는데 그 지도자의 자녀가 2, 3살 되는 어린 아이라면 아버지가 어떤 일을 하는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이해할 수 있을까? 마냥 아버지이기 때문에 좋아서 옆에 있을 뿐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리신다는 고백, 단순히 내 삶뿐만 아니라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왕이시고 이 시대의 왕이시다 라고 고백할 수 있을까? 이는 우리가 어떤 처지, 형편, 상황에 있느냐에 따라 각기 다르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라는 이 한 마디. 신약에 와서는 이 한 마디가 복음으로 바뀐다. 신약시대에 그 시대를 다스리는 왕은 로마의 황제였다. 로마의 황제가 그 시대를 다스리는 것처럼 보였다. 원래 '복음'이라는 단어는 (1) 로마의 왕이 새롭게 등극할 때 (2) 로마의 왕의 후계자가 태어날 때 (3) 로마의 왕이 이끄는 전쟁이 승리했을 때 그것이 바로 기쁜 소식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교회를 세우시고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복음이라는 말을 바꿈. "로마의 황제가 이 세상을 다스리는게 아닌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이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다스리심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신다." (3절) 우리가 이 세상을 눈으로 보면 복음의 능력보다 세상의 험한 파도가 훨씬 더 크게 보이는게 현실이다. 큰 물결, 큰 물, 바다의 쓰나미와 같은 큰 파도가 덮쳐오면 그게 더 커보이는게 사실이다. 하지만 시편 기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새롭게 깨닫고 다시금 고백하게 된 것이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 이 말은 소망의 말이 아니다. '다스려 주셨으면 좋겠다'는 말이 아니다. 이 세상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고백이다. 하나님께서 고레스라는 페르시아의 새 왕을 감동하셔서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금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게 하셨다. '새로운 출애굽'이라고 이야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에서 회복하신 일.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이 바뀌었다. "고레스 안에서만 잘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다스리심, 은혜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고레스라고 하는, 페르시아라는 어마어마한 나라를 움직이실 수 있는 분이구나!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니 이 세상의 견고한 권세가 움직이고 흔들리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구나!" 그 후 새로운 고백이 생겨난 것이다. 새로운 영적인 눈이 열어지게 된 것이다. (4절)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를 새롭게 경험한 것이다. 세상의 어떤 권세, 권력, 문제, 아픔, 고통 어떤 험하고 악한 세력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것들보다 훨씬 크시고 충분히 그것들을 제어하시고 다스리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 "하나님보다 높으신 분은 없다! 그분이 지금도 내 삶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신다! 온 세상을 넘어서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이 세상의 어떤 파도보다 높으신 능력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 믿음의 사람들 안에 이런 경험이 중요하다. 아무리 우리가 믿음이 좋다 할지라도 여전히 어떤 부분은 고백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역사하셔서 그것까지도 우리가 고백하게 만들어 주신다. 마치 온 우주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교하고 오묘하고 놀랍게 움직여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우리가 다 볼 수 없고, 다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지금도 우리가 다 깨달을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의 모든 부분을 다스리시고 움직이시고 통치하고 계신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 단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영원히 다스리신다! (5절) 우리에게 닥쳐오는 많은 사건, 사고, 험한 파도.. 어제와 오늘 우리를 다스리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영원무궁토록 우리를 다스려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은 반드시 이루시고, 언제나 동일하게 우리를 다스리시고, 그 다스리심이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아무리 우리 주변의 어둠의 세력이, 파도가 크게 보인다 할지라도 그 안에서 충분히 하나님으 높으신 분이심을 참된 믿음으로 함께 고백하며 살아가기를.. 17:35 합심기도 1. 말씀에서 약속하신 증거들, 말씀들이 매우 확실하고 영원 무궁하다는 그 고백이 우리의 진정한 믿음의 고백이 될 수 있도록.. 말씀을 경험하고, 체험하고 말씀의 역사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의 성도의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주시도록 2. 단지 우리의 삶 속에서만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이루어주신 하나님의 다스리심, 왕 되심을 우리의 삶을 통해서 우리의 이웃들, 믿지 않는 이들에게 전하고 나눌 수 있을만큼 우리를 붙들어 주시도록..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01:03 찬송가 67장 영광의 왕께 다 경배하며 03:54 말씀봉독 (시 92:1-15) 05:58 말씀 선포 매일 이런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 말씀은 시편 기자가 안식일 아침에 제사(상번제)드릴 때 부른 찬송이다. 두드러지는 내용은 '하나님의 성품'. 나의 상황과 비춰볼 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내용이다. 하나님을 어떻게 부르는지를 주목해보자. (1절) '지존자여' 다른 성경에는 잘 나오지 않는 호칭이다. 이는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대상을 높일 수 있는 한 높여 표현한 것이다. 세상에 있는 어떤 다른 권력들, 어떤 것보다 비할 수 없이 높으신 분이라는 것. 오늘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형식적으로 고백하지 않는다. 너무나 가깝고, 매일 함께하시고 매 순간 일하시는 분임을 고백한다. (1-3절) '아침마다.. 밤마다..' 목소리로만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각종 악기로 찬양함이 너무 좋다고 고백하고 있다. 시편을 연구하는 분들의 말에 의하면 이 시는 다윗의 시대, 솔로몬의 시대에 쓰여진 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다 멸망한 이후에 포로로 잡혀간 이후에 쓰여진 시라고 한다. 모든 악기를 동원해서 날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인자하시고, 성실하시고, 함께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세상의 삶의 굴곡과 어려운 순간들을 되돌아보며 '주님은 아침마다 내게 인자하시고 밤마다 성실하신 분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4절)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고백하고 있는가? 매 순간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경배하고, 높이고 있는가? 그 시대는 악인들이 흥왕하고 번성하는 것처럼 보이던 때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상황과 상관없이 이렇게 찬양할 수 있는 이유는 그런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서 일하심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듣고, 아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작은 자에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역사와 자신의 삶에서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5절)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그 안에서 행하신 일들은 늘 자신의 생각보다 크고, 깊고, 놀랍고, 찬양할 수 밖에 없음을 경험했기에.. 우리는 이 악한 세상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고, 노래하고 있는가? (15절)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우리를 뒤흔들 때가 많지만 내가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은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7절) 이 세상에서의 삶은 녹록치가 않다. "악인들은 풀 같이 자란다" 너무나 빠르고, 넓고, 질기게 순식간에 잘되고 흥왕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바로 악인들, 세상이다. 그러나 그런 이들은 영원히 멸망한다. (12-13절) 풀은 잠깐의 바람과 폭우를 만나고 사라진다. 나무는 해가 바뀔 때마다 찾아오는 어려움과 폭풍우와 가뭄, 기근을 이겨나가면서 자란다. 그러면서 그 나무가 가진 웅장함, 번성함을 볼 수 있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여호와의 말씀, 임재, 인도하심, 붙드심 가운데 심겨져셔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는 나무. 이 나무가 바로 자신임을 고백하고 있다. 날마다 신선한 기름을 부어주셔서 치료해주시고 힘을 북돋워주시는 자신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이심을 오늘 시편기자는 고백하고 있다. 우리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으면 좋겠다. 여호와의 집에, 뜰에 심겨져서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고,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한.. 매 순간 이렇게 주님을 찬양하고 높일 수 있는 이렇게 노래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21:21 합심기도
00:15 찬양(2) - 슬픔 없는 가정 없으나 02:47 찬양(3) - 나는 주를 섬기는 것에 후회가 없습니다 05:58 합심기도 07:37 예배 기원 (묵상기도) 08:44 신앙고백 (사도신경) 09:42 찬송가 44장 지난 이레 동안에 12:40 기도(김재천 장로) 16:37 말씀봉독 - 빌 3:1-3 17:20 말씀 선포 <제목 - 참된 그리스도인의 증거> 그리스도인으로서 목사님의 소망 (1) 내가 섬기는 공동체의 모든 이들이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되는 것. (2) 그들이 참된 그리스도인 답게 성숙하고 성장해 가는 것. 다섯 살, 네 살 짜리 아이에게 우리가 타고 다니는 차키보다는 장난감 자동차를 주는 것을 좋아한다. 이처럼 우리들도 참이 아닌 거짓, 진짜가 아닌 모조를 더 좋아하는 경우가 많다. 무엇을 더 좋아하고, 아끼고, 자랑하는가?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구별하는 조건이 무엇인가? (빌 3:1)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 어떻게 학비를 마련해야 할까? 이번주에 담당교수님이 전화가 와서 “이번에 목사님을 장학금 대상으로 추천했으니 기다려 보세요” 장학금 대상에 선정이 안 됐다. 갑자기 짜증이 확 나면서 “공부하기 싫다고, 학교 등록하기 싫다고” 그렇게 투정아닌 투정을 부렸다. 한 3일쯤 있다가 문자 하나가 왔는데 '장학금 대상으로 선발 됐으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감사한 일인 것은 제가 얼마나 물질에 얽매여 있는지를 보게 하셨다는 것이다. 진짜 믿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진짜 믿음은 흔들림 없는 믿음이다. 어떤 상황에도 흔들림 없는 믿음. 모래 위에 세운 집이 아니라 반석 위에 세운 집. 우리의 삶에서 우리를 기쁘게 하는 그런 것들 때문에 기뻐하는 것은 흔들리는 믿음이다.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다. 어제 친한 목사님과 잠깐 만났는데 그 목사님은 길랑-바레 증후군이라는 병을 앓으셨던 분이다. 갑자기 찾아오는 말초신경계의 자가면역질환인데 호흡을 못해서 죽어가는 질병이다. 여전히 휠체어로 다니시는 분인데 그분과 어제 이야기하면서 늘 말씀하시는 것이 ‘감사’였다. 내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주 안에서 기뻐하는 삶. 어떤 상황이 우리에게 다가올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기뻐할 수 있게 만드신다. 우리에게 있어야 될 3가지 조건 '참된 것이 무엇이냐?' (1)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함(3절) 그 봉사의 이유, 능력, 원인은 내 힘, 내 의지가 아니라 성령으로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자기 힘, 자기 의지로 하게되면 보상받고자 하는 심리가 생겨난다. '내가 이 것까지 하는데... 내가 이 정도까지 하나님을 섬기는데...' 하나님을 우리가 섬기고 봉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성령으로 봉사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사랑이 나타난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이웃 사랑. 성령은 사랑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봉사는 예배를 뜻한다. (로마서 12장)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은 자기의 삶을 하나님께 예배로 내어드리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함으로 드리는 예배. 우리의 예배가 반쪽짜리가 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성령은 늘 우리를 진리로 이끄신다. 우리의 몸이 하나님 앞에 산 제물로 살았는지 분별해보아야 한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화평, 희락... 이런 열매가 맺어지는 것이 바로 예배다. 예배가 참되게 서 있지 않는 한 하나님 앞에 참된 은혜로 살아갈 수 없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주체가 달라지는 이들이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다 라고 진정으로 고백할 수 있는 이들이다.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많은 것들 그것들은 언젠가는 없어질 것들이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나 자랑으로 '주님 앞에 나아온 이유가 내게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예배의 이유가 있다고 그런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예배하는 이들이다. 49:09 헌상 및 기도 51:07 찬송가 288장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53:36 교회소식 55:04 교제의 인사 55:16 축도(신재웅 목사)
00:43 찬송가 324장 예수 나를 오라 하네 04:57 예레미야 25:15-29 07:34 말씀 선포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자유롭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을 위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주셨다. 구원의 결정도, 이루어가심도 하나님의 일하심이었다. 누구도 그것을 반대 or 저항할 수 없다. '하나님의 경영하심' 어떤 조직이든 그 조직을 이끌어가기 위해 계획, 헌신하고 모든것을 쏟아부으며 일하는 '인간의 경영'이 있다. 개인의 삶이나 회사도 이렇게 하는데 온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은 얼마나 더하겠는가? 구원의 역사로 경영하신 주님 비록 심판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경영하심은 구원의 역사였다. (사 14:24)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내가 경영한 것을 반드시 이루리라 (사 14:27)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그것을 능히 폐하며 그의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하나님의 계획, 뜻하심, 경영하심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우리 각자의 삶에도 하나님의 경영하심이 반드시 있다. 요즘 많이 부르는 찬양 중에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라는 찬양이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근심과 후회하심이 없다. 하나님께서 한번 정하시고 뜻하시고 계획, 작정하신 일들은 반드시 이루신다. 나의 삶에 분명히 하나님의 경영하심이 있다는 그 믿음이 없이는 이 세상 가운데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갈 수가 없다. (15절) 이 진노의 술잔을 "모든 나라로 하여금 마시게 하라" '온 세계 열방을 향해서 하나님의 분노의 잔을 마시게 하라' 우리로 보면 정작 살아간 삶이 구이 땅 정도를 벗어나지 못한 성도에게 전라북도 온 땅을 향해서 말씀을 선포하라는 것을 넘어서는 황당하기도 하고 이해되지 않는 말씀이다. (17절)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다. 예레미야를 부르실 때 '내가 너로 온 열방의 나라를 심기도, 뽑기도, 세우기도, 무너뜨리기도 하겠다'라고 하셨다. 예레미야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을지라도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 예레미야처럼 우리도 온 세계를, 우주를 심판하시기 위해 다시 오실 하나님을 선포하고 있지만 우리의 삶이 세상에서 얼마만큼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가를 보면 마치 세상 안에서 꿈을 이야기 하듯 그 선포가 허황된 것처럼 보인다. 세상이 돌아가는 여러가지 일들에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같고 작고 연약하고 힘없는 존재처럼 보인다. (27절)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이다. 나의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온 우주의 하나님이시고 온 우주의 하나님이 작고 연약한 나의 삶을 주관하신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전하는 말씀이 사람들이 보기에는 얼토당토 않아 보이는 그런 말씀일지라도 그 말씀을 온 세상을 향해서 전하고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내 삶에 이런 말씀이 이루어질까?' 라고 생각될 때가 있다. 하지만 만군의 하나님,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 작고 작은 내 삶도 경영하신다면 얼마나 더 정확, 세밀하고, 아름답고 놀랍게 내 삶을 이루어가실까? 라는 그 믿음으로 말씀을 따라서 살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인류의 역사를 경영하심은 심판으로 끝나지 않고 세상이 볼 때는 세상 권세에 무너져 망한 것 같아 보일지라도 겟세마네에서 예수님께서 심판의 잔인 것처럼 보이는 그 잔을 주님의 잔으로 받아 마심으로 구원의 잔으로 바꾸어주시고 영원한 생명의 잔으로 바꿔주심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셨다. 우리의 삶에도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그분이 우리의 삶을 경영하시도록 내어드릴 때 비록 현재는 분노인 것처럼 망한 것처럼 갈 바를 모르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 삶 안에서 그것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바뀌게 될 것임을 믿자. 22:24 합심기도
01:22 찬송가 393장 오 신실하신 주 05:10 말씀 봉독(예레미야 25:1-14) 08:08 말씀 선포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말씀 오늘 본문에 2가지 숫자가 나온다. (1) 23(3절) 예레미야가 활동한 햇수 (2) 70(11절) 회복의 때까지의 기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는 숫자. 1. 23(3절) 약속의 말씀을 한번도 쉬지않고 23년동안 예레미야를 통해 주신 하나님. 회개하고 돌아오면 받아줄 것이라는 말씀을 그 말씀을 계속해서 들었는데도 유다 백성들은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23년이라는 시간동안 끊임없이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그들이 들을 수 있도록 하셨다. 어느정도 듣지 않는다고 포기하지 않고 돌아온다면 받아주실 것이라는 말씀을 23년동안 오래참으심으로 말씀하셨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 우리가 1년이 넘고 10년이 넘도록 끊임없이 기도하는 대상이 있다. 친구, 자녀, 가족 등.. 얼마만큼 오랫동안 기도하고, 품고 받아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달려있다. 하나님께서 얼마만큼 사랑하시는가는 얼마만큼 참아주시고 말씀하셨는지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도바울이 깨달은 사랑의 내용을 보면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사랑에 대해서 가장 먼저 꺼낸 내용도 오래참음이다. 우리의 기도의 제목도 우리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처럼 오래참음으로 나타날 수 있게 해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참아주신만큼 우리도 자녀, 이웃, 친구를향해 오래참는 그런 하나님 백성들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2. 70 (11절)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심판의 햇수' 그 햇수가 차면 회복과 돌이키심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70년이 숫자가 차면 돌이키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다. 지금은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계획 안에는 정해진 기한이 있었다. 70이라는 숫자는 '완전'을 뜻하는 7에 '충만'을 뜻하는 10이 곱해진 숫자다. 완전히 충만한 하나님의 심판, 경책의 시간이 찼다는 뜻. 하나님께서는 오늘 11절 앞까지만 말씀하셔도 충분하셨다.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이 정당하다고 할 수 있는 그 백성들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 마음에는 이미 다시금 회복하시고 다시금 나라를 세우시는 약속의 시간이 담겨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 속에서 하나님앞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오래참으심과 신실하심이 있기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 같다. 때때로 기쁨의 소리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고 맷돌소리, 등불빛이 끊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여전히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23과 70이라는 숫자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성품, 우리에게 이런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자. 여전히 말씀하시고 여전히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절망과 끝이라고 인식되는 그 순간에도 70이라는 숫자를 품고 이스라엘을 바라보시듯 우리에게 하나님의 때를 준비하시고 그 때를 위하여 일하고계신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삶에도 그렇게 일하시는 분이다. 기나긴 시간동안 이루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가장 좋은 것으로 준비하시며 그분의 뜻과 계획을 가지고 이루어가시는, 오래 참으시고, 여전히 일하고 계시고, 가장 좋은 시간을 준비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며 우리도 그렇게 인내하며 감사하며 살아가자. 21:22 합심기도
00:14 찬양①(행복) 02:58 찬양②(슬픔 없는 가정 없으나) 08:55 합심기도 10:22 찬송가 292장 주 없이 살 수 없네 13:22 기도(이선규 장로) 16:16 말씀 봉독(로마서 8:12-17) 17:11 말씀 선포 <제목 : 죄와 은혜의 지배(37강)> 삐삐 처음 나왔을 때 대학생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다가 들고다니는 전화기가 나왔고 이후에 벽돌만한 전화기를 들고 다녔다. 그러다가 나온 것이 휴대전화. 처음에는 전화와 문자만 되다가 카메라의 기능이 좋아지고 인터넷이 되고 이걸로 이제는 물건도 사고 은행업무도 하는 등 다양한 업무가 가능해졌다. 로마서에서의 핵심도 이와 같다. 복음의 깊이와 이치를 알면 알 수록 마치 삐삐를 가지고 다니던 사람이 스마트폰의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 것처럼 너무나 큰 영적인 기쁨을 알게 된다고, 그래서 복음을 더 잘 알려주고자 한다는 것. (12절) 우리가 '빚진 자'로되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께 빚진 자들이다. 이 구원은 우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양만큼 빚을 졌다. 왜 그 빚을 주님이 스스로 져 가시면서 우리를 구원해주셨는가? 롬 8:1 '이제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 지배를 받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구원얻은 이후에 죄와 사망의 법이 아닌 그 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셔서 이제는 죄를 지어도 영원히 죽지 않는 그런 법에 따라 살아가게 되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생명의 성령의 법을 계속 따라서 그 법이 더 역사하고 더 많이 적용이 되면 우리에게서는 '거룩'이 드러난다. 하나님을 닮음. 거룩이 우리에게서 나타나게 된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이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 삼으신 모두에게 적용되는 원칙이자 목적이다. 거룩하게 되면 삐삐에서 스마트폰으로의 차원이 다른 많은 것들을 누리게 되는 것처럼 거룩하게 되면 하나님이 누리시는 지혜, 하나님이 누리시는 사랑, 기쁨, 안식, 평안을 우리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년에 한번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의 법궤 앞에 나아갈 때 제물의 피를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직접 제물이 되어주셔서 화목을 이루기 위해서 피 흘려주신 것이 바로 십자가의 죽으심이었다. 그것을 통해 주님이 이루시고 싶었던 것은 더 이상 우리에게 정죄함이 없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삶이었다.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생명의 성령의 법의 지배를 당함으로 그 안에서 거룩이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그 뜻에 자기 자신을 순종하고 자기자신을 굴복케 만드는(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를 매일 지고 자신의 죽음을 경험하고 주님 주시는 생명이 내 안에서 살아남을 경험하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참된 목적은 (1)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죄의 문제를 없애시고 (2) 우리와 화평케 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16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신다. 증언이라는 말은 단순히 우리를 도와주시고 보증해주시는 것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실제로 열매맺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전기가 들어오면 전기 제품들은 동작하게 된다. 성령이 우리에게 역사하면 우리 안에 생명이 나타나게 된다. 우리가 이세상에서 아무런 문제 없이 편하게 살아가는 것을 뛰어 넘어서 우리가 주님과 화목하며 주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아나가는 그것을 방해시키고 약화시키는 죄와 싸워가는, 피흘리기까지 싸워 나가다 보면 우리가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엄청난 것들을 우리 삶 속에서 경험하게 하심으로 '세상의 것들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고백을 진짜 할 수 있도록 우리 마음 속의 참된 기쁨을 회복시켜 주신다. 50:39 ⭐️여기부터 설교 하이라이트(기쁨's pick) 성경에 약속된 하나님 나라의 역사들이 내 삶에 나타나지 않는데도 내 삶이 평안한 것처럼 보인다면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성령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는 모습이 아니다. 성령이 내 삶에 증언하시면 갈등, 고민, 아픔이 일어나고 괴로울 수밖에 없다. 그럴 때 기도하면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주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이것 때문에 하나님과 화평하지 못함으로 인해 울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내 삶에 문제가 없다고 하며 안주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평안이다. 삶의 평안이 아니라 영혼의 평안을 주님은 약속하셨다. (17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이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인답게, 그리스도로 구원받아 그리스도께 빚진자답게 살아가려고 하다보니까 안되는 그것 때문에 자기 마음의 고통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그 모습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53:19 합심기도 59:44 주기도문
01:21 찬송가 400장 험한 시험 물속에서 04:11 말씀 봉독 (예레미야 24:1-10) 06:32 말씀 선포 예레미야부터 시작해서 그 이후의 선지자들에게 하나님께서 환상을 통해 보여주신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부르실 때도 살구나무가지 환상을 통해 부르셨다.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성전 앞에 놓인 무화과 두 광주리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전 앞에 무화과 두 광주리가 놓인 것.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3번 침공한다. (1) 609년 (다니엘이 (2) 619년 (여호야김과 기술자들 포로로) (3) 이스라엘에 남아있던 백성들의 생각: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은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서 그들의 죄악에 대한 대가를 받은 것이고 우리는 예루살렘에 남아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남은자들이다.' 하나님의 보호, 인도, 평안이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광주리① : 처음 익은 극히 좋은 무화과 광주리② : 먹을 수 없는 극히 나쁜 무화과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열매 = 포도나무, 무화과 '입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었던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 → 성전 앞에 놓인 무화과는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 "오히려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 좋은 무화과이고 남아있는 백성들은 극히 나쁜 무화과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반적인 생각을 다 깨뜨리셨다. (1)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이 좋은 무화과라는 것 그렇다면 포로로 잡혀간 그들이 왜 좋은 무화과이냐? 그들에게 어떤 좋은 조건도, 공로도 없었던 이들이 바로 포로로 잡혀간 이들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바라보시기 때문에 좋은 무화과인 것이다. 악한 자들이지만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가운데 그들을 선한 백성으로 바라봐주시기로 결정하셨고 그들 안에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을 부어주셔서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역사를 베풀어 주실거라고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2) 남아있는 백성들이 나쁜 무화과라는 것 이스라엘에 남아있던 백성들은 자신들이 포로로 잡혀가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어떤 좋은 공로가 있고 조건이 있어서 그 땅에 남아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비록 예루살렘에 남아있다 할지라도 그들이 오히려 악한 자들이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나쁜 무화과라는 것.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연했던 생각 '그럼 우리 안에는 소망이 없는 것인가? 절망, 심판, 멸망만 남아있는 것인가?'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하심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으로 붙드실 것이라는 약속을 통해 그들에게 소망이 있음을 보여주고 계신다. 1. 눈에 보이는 것이 좋고 나쁨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예루살렘에 남아있으니까 좋은열매가 아니었던 것처럼 우리 눈에 보이는 좋은 조건들이 하나님 보시기엔 좋은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더 좋은 직장, 더 좋은 것을 가지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하는 실수를 범해선 안될 것이다. 세상의 기준, 잘못된 기준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 오늘 예루살렘에 남은 사람들처럼 착각할 수 있다. 2. 은혜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한다. 우리에게 어떤 좋은 조건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좋은 무화과가 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우리를 좋은 무화과로 여겨주시고 지금도 인도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신 백성으로 만들어가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설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주님의 눈으로, 주님의 말씀의 시선으로 우리와 세상을 바라보고 은혜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살아가자 20:07 합심기도
가끔씩 답글을 달아주었는데 이제야 보았네요~~ 미국 비전트립에서 유겸이 잘 돌봐 주어서 감사했습니다~~
@@대덕교회공동체 아침마다 새벽예배 드릴 수 있게 귀한 영상 올려주시니 제가 더 감사합니다~🥰 그런데 월요일은 왜 영상이 안 올라올까요?😭😭 올해 1월부터 시작하신 오후예배(성경이 읽어집니다) 영상도 정주행 중인데 너무 너무 도움받고 있습니다! 목사님 폐가 안된다면 앞으로 예배 후 요약 댓글을 지속적으로 달겠습니다~❤️
@@김기쁨-l6m 네 어떤 영상이든 자매님께 도움이 된다면 언제든지 보시고 댓글 남겨주셔도 됩니다. 그리고 월요일 새벽은 주일 사역후에 좀 쉬려고 새벽기도회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개인묵상^^
@@대덕교회공동체 월요일엔 새벽기도회가 없군요😭😭 너무 아쉽습니다! 좋은 말씀의 꼴을 공급해주시니 감사하며 보겠습니다😊 설교말씀 가운데 목사님의 인품과 얼마나 말씀앞에서 씨름하시는 분인지가 느껴집니다🥰🥰 모쪼록 잘 심겨져서 삶에서 열매맺는 인생 되길 원합니다! 목사님 바쁘신 중에도 답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28:36 리 스트로벨의 'The case for' 시리즈 중 '특종! 믿음 사건(The case for Faith)' 라는 책의 내용을 인용해주셨네요! 미국의 강신균 목사님도 해당 내용을 말씀해주시면서 해당 책 시리즈를 꼭 읽어보라고 추천해주셨습니다ㅎㅎ 보다가 반가운 내용이 있어서 몇 자 남겨봅니다!
00:41 찬송가 569장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 04:08 말씀봉독 예레미야 23:23-40 (읽기는 32절까지) 06:10 말씀 선포 역사 속에서 어떤 나라가 무너지는 데는 지도자들의 타락이 치명적인 원인이었다. 종교 지도자들의 타락 : 유다 멸망에 직접적인 원인 (25절)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전한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의 간교한 것(속이는 것)을 예언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말씀을 받은 백성들은 그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하나님께로부터 점차 멀어져 갔다. 그들은 백성들이 듣기 좋은 말을 만들어냈다. 백성들이 듣기 좋아하는 평안, 백성들이 듣기 좋아하는 복을 이야기했다. 백성들조차도 자신들이 듣고자하는 것만 들었던 것. (30절) '서로 내 말을 도둑질하고 있다' 마땅히 백성들에게 전해져야 하는 말씀을 전하지 않고 그것을 가로채 그 말씀이 백성의 귀에 들리지 않게하고 거짓 말씀을 만들어내서 전했기 때문에. <그럼 선지자들은 언제 거짓 말씀을 전할 수 있었나?> 1. 천지에 충만하신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인식하지 못할 때(23절) 거짓된 선지자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했냐면 이스라엘이라는 좁은 땅만 통치하시는 분이지, 강대국인 앗수르, 애굽, 바벨론까지는 통치하시지 않는다고 여겨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경외심이 없었다. [로마서의 사도바울이 지적하는 죄의 근본적인 공통점] =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섬기지 않는 (경외하지 않는)데서 죄가 시작된다! '하나님을 안다'라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런 모습이 나타남을 보게 된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이 무너질 때, 거기서 죄가 출발한다. 2. 하나님 말씀의 참된 능력을 경험하지 못할때(29절) 거짓된 선지자들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면 말씀은 마음을 뜨겁게 만드는 불같은 말씀이었을테고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은 권세가 있는 말씀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전하는 말은 백성을 거짓된 길로 이끄는 마치 겨와같이 바람이 불면 쉽게 날아가버리는 그 안에 생명도, 권세도, 능력도 없는 말씀이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매 순간 순간마다 천지에 충만하시고 온 우주만물을 붙드시는 주님에 대한 경외함과 참된 섬김의 마음이 줄어들면, 듣고싶은 것만 듣고 우리에게 불리하다 싶으면 마음을 닫는 불의한 선택만 하다보면 우리 또한 말씀의 도둑들이 될 수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우리가 선택적으로 어떤 것은 받고, 어떤 것은 받지 않고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듣기 좋은 말씀이든 듣기 좋지 않은 말씀이든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 말씀으로 우리를 채우고 겸손과 순종으로 그 말씀을 따름으로 하나님이 이끄시는 길을 가자 22:32 합심기도
00:00 미국 Vision Trip 선교보고(황영근 전도사) 04:17 찬양 (내 구주 예수님) 06:48 예배기원 07:53 신앙고백(사도신경) 08:43 입례 찬송(찬송가 43장 즐겁게 안식할 날) 11:25 기도 (김상오 집사) 16:50 성경 봉독(빌립보서 3:1-3) 17:28 말씀 선포 (제목: 기쁨이라는 안전장치) 우리 삶에 찾아오는 위기나 뜻밖의 사고에 대비하기 위해 안전장치로 대비해놓는 것이 있다. (Ex. 자동차보험, 생명보험, 안전벨트 등) 목사님이 아이들과 목포 가셔서 해상 케이블카를 도전하셨는데 신기하게도 하나도 무섭지가 않았다. (원래 고소공포증이 있다고 하심) → 안전이 보장되면 즐길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의 전반에 위기와 사고가 올 때 우리는 어떻게 이것들을 이겨낼 수 있을까?"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어떤 안전장치를 주셨을까? 빌 3:1)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빌립보 교회에 있었던 문제> = 다툼의 문제, 잘못된 가르침의 문제 해결책은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다. 그냥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 (= 주님만을, 주님 때문에만 기뻐하는 것) '최고의 기쁨은 주님이십니다. 주님께만 있습니다.' 라는 고백과 같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신 것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 자체에 기쁨을 둘 때에만 우리의 기쁨이 사라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셨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시고 장차 약속하신 것들을 이루실 분임을 확신하면 주님 안에서, 주님으로 기뻐할 수 있다. 내가 가진 내 육체의 그 어떤 것으로도 신뢰를 두지 않고 그것을 나의 안전장치로 두지 않고 주 안에 있는 것,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이시고 만물을 창조하신 그분이 지금도 나를 붙드시고 계신 그것 외에는 내게 참된 기쁨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그 삶에는 온전한 안전장치가 되어 있다. 육체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는 자랑될 게 없고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는 신뢰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감옥에 갇혀있는 사도바울이 하는 고백이다. 이는 차원이 다른 안전장치이다. 우리 삶의 참된 안전장치는 '기쁨'이다. 우리가 주님만을 자랑하는 것이다. 사랑의교회 故 옥한흠 목사님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같은 자를 들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신 그것 자체가 내게 가장 큰 행복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여러분 주 안에서 기쁨을 누려야 됩니다, 주 안에서 기쁨을 누리면 좋습니다, 주 안에서 기쁨을 좀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는 주 안에서 기뻐'하라'라고 명령했다. 안 되면 되게 하라는 것이다. 주님 안에서, 주님으로만 기뻐하는 것 외에는 우리 신앙의 안전장치가 없다. 이 참된 안전장치를 우리 삶에 온전히 덧대어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살아가자. 52:17 헌상 및 기도 57:44 찬송 (찬송가 411장 아 내 맘 속에) 1:01:04 교회 소식 1:02:32 교제의 인사 1:03:11 축도 (신재웅 목사)
1:29 찬송가 350장 우리들의 싸울 것은 4:42 말씀 봉독 (예레미야 22:10-19) 6:39 설교 시작 "왕은 하늘이 내린다" 왕의 자리는 자신의 뜻을 이루는 자리가 아님을 인식하고 한 말. 유다의 두 왕 살룸(여호아하스), 여호야김(엘리야김)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워주셨다는 생각과는 반대로 행했다. 나라를 망하게만든 두 왕, 살룸은 3개월간 통치했고 여호야김은 몇년간 통치 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 이 두 왕은 굉장히 선한 왕이었던 요시야의 두 아들이다. 자신들의 아버지가 걷던 길을 걷기만 해도 비록 망해가는 나라였지만 하나님께서 형통케해주심을 입었을 것이다. "그가 나를 앎이 아니냐" = 요시야가 형통할 수 있었던 비결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의지했기 때문 먹고, 마시고 하는 일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나님께서 형통케 해주셨음 그러나 그의 아들들에 이르러서는 불의와 부정과 착취하는 왕들이 됨 자기자신의 힘으로 자신들의 자리를 통해서 자신들의 형통을 만들어내려고 함. "요시야의 죽음을 슬퍼하지 마라" 오히려 살룸왕 때문에 슬퍼하라 오히려 여호야김 때문에 슬퍼하라 그들은 포로로 잡혀가서 다시는 고국땅을 밟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어 묻히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저주스러운 죽음을 맞을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죽은 아비 요시야왕보다 살룸을 부러웠을수도 있다. 현재 왕의 자리에서 통치하고 있던 여호야김이 더 부러웠을 수도 있다. 눈에 보이는 영광, 찬란함을 보며 죽은 아비보다 낫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 보여주신다. 그들이 현재 누리는 부, 지위, 권세, 위세는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오히려 심판의 대상, 통곡의 대상임을 말씀하신다. 그들은 자신들이 왕의 자리에 있을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삶을 살았다.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공의를 그 아버지 요시야왕이 오랜 기간동안 세웠는데 그 아들인 살룸이 3개월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그것들을 처참하게 무너뜨리는 삶을 살아갔다. 여호야김도 마찬가지로 바벨론에 의해서 왕의 자리에서 내쫓겨나고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 1. (본문 16절)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면, 하나님 아는 지식이 있다면 그 지식은 반드시 삶에서 열매맺게 되어있다. 내 소유를 통해서 다른 이들을 형통케하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모습이다. 2. (본문 19절) 우리는 과연 어떤 끝을 맞이하게 될 것인가? 요시야왕은 오랜기간 돌이키고 노력하고 회복하고 개혁하는 일을 만들어갔다. 우리가 쌓아가는 공든 탑을 순식간에 무너뜨릴 수 있는 게 바로 악과 죄다. 악과 죄는 하나님이 주신 형통을 단번에 무너뜨릴 수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이들에게 세상이 주는 형통이 굉장히 좋아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형통케하기 위해 주시는 신앙적인 것들은 돼지 목에 걸린 진주처럼 쓸데없는 것들로 보일 수 있다. 그들 스스로가 그것을 망가뜨리고, 결국엔 비참한 말로를 맞이한다. 백향목으로 왕궁을 꾸민다고 해서 참된 왕이 아니다. 우리 삶에 세상의 좋은 것들을 채운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형통케하는 삶이 아니다. 요시야왕처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바르게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형통케하시는 삶이다. 내 삶에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들이 열매로 드러나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세상의 가치있는 것들로 채워가기 시작하면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무의미하게 만들어가실 것이다. 우리는 진정으로 살룸과 여호야김같은 삶이 아니라 요시야처럼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하나님께서 형통케하시고 하나님께서 가치있다고 여겨주시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내 죄와 싸우고 참된 형통인 '말씀'과 '주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삶의 열매가 우리에게 드러나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23:27 합심기도
이번 주에 자주 지각 방송을 해서 죄송합니다~~ 다음 주 부터는 정시에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 모두 평안하세요~~
오늘 늦게 시작해서 죄송합니다~~ 하루 온종일 기도의 은혜가 모두에게 충만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영상은 앞부분은 건너 뛰시고, 10분 정도부터 시작하시면 됩니다.~~
8분 21초 부터 들으시면 됩니다. 그전 시간은 음향이 녹음되지 않았습니다. 다음 주부터는.~~